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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안식 원문보기 글쓴이: 우승호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 독자에게
하나님과 알레ㅍ - 베이트 그리고 진리
이 책은 성경과 고대 성경문학에 나오는 하나님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여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읽으면서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가까이 계심을 느끌 뿐만 아니라 그 단어 하나 하나에 숨겨져 있는 유대인의 지햬와 철학적인 사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단어는 히브리어 문자의 순서를 따라 알레ㅍ - 베이트 순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알레 ㅍ - 베이트는 단어를 구성하는 단순한 문자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믿지요. 유대인들의 많은 전통 가운데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 창세기의 첫 번째 문장의 단어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버레이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는 하나님께서 ....을 창조하시기 전에 히브리어 자음 문자 첫 번째 문자 '알레ㅍ' 부터 마지막 문자 '타브' 까지를 창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히브리어 문장을 차례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태초에 창조하였다 하나님이 에트를..."
이 문장의 마지막 단어인 '에트'는 히브리어 처음 문자 '알레ㅍ' 와 마지막 문자 '타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요 오메가니 라는 구문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만 된다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은 모든 것, 처음부터 끝까지 다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알레ㅍ 와 타브는 처음과 마지막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으로 알레프-베이트를 우주의 근본으로 여깁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문과 알레ㅍ 베이트
대부분의 유대인 기도문은 하나님과 알레ㅍ-베이트 문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특별한 관계성에 주의를 집중 시킵니다.
어떤 기도문은 단어의 시작이나 문장의 시작이 알레ㅍ-베이트 순으로 되는데 이것을 '머리글자 모음' 기도문 또는 알파벳 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 모두에게 익숙한 기도문 대부분은 이러한 형식을 취하는데 대표적인 아슈레이 기도문을 보시지요.
아슈레이 기도문의 첫 세 구절은 '베이트'를 가지고 시작하고 다음은 '김멜' 다음은 '달렏 ' 그리고 '타브'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형식을 취하는 평범한 기도문 한 구절을 보십시다.
엘 바루크 그돌 데이아
하나님은 복이 있고 위대하시다
기도문의 각 단어 알레 ㅍ, 베이트, 기멜, 달레트로 시작하는 것을 볼수 있지요.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 시, 노래 등에 아주 흔히 사용되고 있는 문학의 형태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히브리어 성경을 가지고 계신다면 시편 119편을 찾아보세요.
1-8절까지는 알레 ㅍ 로 9-16절은 베이트로 17-24절은 기멜로 마지막 169-176절까지는 마지막 문자인 타브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레ㅍ 베이트 22문자 모두가 사용되었기에 알파벳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 기도문의 저자들은 알레ㅍ-베이트 순서를 따르는 기도문을 썼는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셔서 첫 문자인 알레ㅍ 에서 마지막 문자 타브까지의 모든 문자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서 그와 같은 형태를 취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기 위하여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문자를 다 사용해도 모자라며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해도 늘 모자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히브리어 단어
만일 여러분이 알레ㅍ 에서 타브까지 차례로 써 내려 가는데 어미형1)(5문자)을 포함해서 쓴다면 모두 27개의 문자를 쓰게 됩니다.2)
1) 히브리어는 22문자가 있으며 단어의 끝에 문자가 사용될 때 모양이 달라지는 문자가 다섯이 있습니다.
2) 235면에 있는 알파벳 표를 참고하기 바람
그때 써놓은 문자의 중간 문자를 찾으면 멤이 될 것입니다. 멤 앞에 13문자, 뒤에 13문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알레ㅍ-베이트의 첫번째 문자와 중간 문자와 마지막 문자를 연결해서 써보면 '에메트' 라는 단어가 되지요.
이 단어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처음과 과정과 마지막이 언제나 동일하여야 합니다.
히브리어 단어 에메트(진리)에 관하여 2장에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진리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쉬아흐(메시야), 트필라(기도) 역시 하나님과 분리되어질 수 없는 단어들이지요.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고 하나님과 더 가끼워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본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용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유대인의 사상과 철학을 알기 쉽게 소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에 관하여 연구하는 유대인의 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단순히 단어의 뜻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딘어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철학을 찾아보려고 노력한 책이며 그러면서 지혜로운 삶을 사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세권으로 이어집니다. 제1권은 '하나님'에 관한 단어를 모아 보았으며, 제2권에서는 '토라' 즉 '성경'과 관련되어지는 중요 단어들을 연구하여 성경의 지혜, 사상, 철학을 배움으로써 믿음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며, 제3권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그들의 땅인 이스라엘 그리고 그들의 국가 이스라엘과 연관되는 단어들을 찾아 연구함으로써 유대인 공동체의 신앙솨 철학과 지혜를 배워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 차례
차례
제1장 에무나((믿음, 신앙)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제2장 에메트(진리) 진리이신 하나님
제3장 보레이 에트 하콜(만물의 창조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제4장 발 타슈히트(피괴는 금물)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
제5장 바르 미쯔바 바트 미쯔바(유대인의 남녀 성인식) 성인식과 하나님을 향한 의무
제6장 버리트(언약,계약,동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제7장 브라코트(축복들) 복 주시는 하나님
제8장 야밈 노라임(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날들) 용서하시는 하나님
제9장 카바나(열중함, 집중함)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제10장 미다트 하딘 미다트 하라하밈 (공의와 은혜, 사랑)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제11장 마쉬 아흐(메시야) 메시야와 하나님
제12장 느샤마(혼, 정신) 살아있는 영과 하나님
제13장 올람하제 올람하바 (이 세상, 장차 올 세상)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제14장 크두샤(거룩) 거룩하신 하나님
제15장 샤바트(안식일)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
제16장 슈마(들으라) 슈마와 하나님
제17장 트필라(기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제18장 트슈바(회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1장 에무나(믿음, 신앙)
에무나 (믿음, 신앙)
에무나는 '믿음' '신앙' 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아멘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으로부터 왔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그것이 그렇습니다' '맞습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에무나는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의지적인 어떤 것의 조화라고 마틴 부버는 말하였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에무나(믿음)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면 1492년 유대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그때 유대인 한 가족(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둘)이 추방되어 배를 타고 다른 나라를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그 배 안에 무서운 전염병인 흑사병 환자가 생겼고, 그 가족중 부인이 흑사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해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무인도에 내려진 부인은 마침내 죽고 말았으며 남은 세 식구는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나는 나의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는 나의 에무나(믿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유대인입니다. 나는 끝까지 유대인으로 남을 것이며, 다른 이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떻게 취급하든지 나는 당신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에도 꼭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에 가장 무시무시한 홀로커스트(대희생 또는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에무나를 고백합니다. 나치스의 수용소-죽임에 직면한 극한 고통속에서도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에무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유대인이 유대인 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믿는가라기 보다 그들이 에무나를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유대인답게 행동하기 휘애 에무나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다운 행위는 에무나로부터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무나를 읽으면서 우리는 유대인의 삶 가운데 에므나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본 장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에무나를 그들의 삶에 적용함에 잇어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기도문의 한 형태를 알게 될 것이며, 에무나에 관하여 묻는 그들의 백성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될 중요한 교훈
1. 유대인들은 그들의 양친의 가르침과 그들 자신의 사상의 기초를 에무나에 둡니다.
2. 믿음에 대한 진술은 소망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에무나(믿음) 와 아미다(기도)
유대인들은 "너는 너의 부모가 너에게 그것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실로서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느냐?" 고 묻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배우는 일과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해서 자기 자신의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단계로 성장할 때까지 부모가 말하는 대로 인도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미다(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이라고 부립니다.
그러므로 아미다로부터 나타나는 이 축복의 구절을 더 많이 읽게 되며, 그때 그 아미다가 에무나와 함께 그들의 삶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미를 묻고 스스로 답하면서 스스로 답한대로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란?
유대인들이 아미다 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첫 번째 구절인 축복은 '주, 우리 주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당신이 복이 잇을지어다'로 시작합니다.
축복에 관한 이 기도문이 2000년 전에 처음으로 기록될 때 그것을 기록한 사람의 머리 속에 어떤 사상이 떠올라 이러한 말을 하였겠습니까?
우리의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호칭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위대한 종교 사상가 마틴 부버(1878-1965)의 설명을 들어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연구와 사고로서 그들의 에무나를 찾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을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하난미을 믿음으로 에무나를 찾았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논증을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른 사람은 여러분이 배운 논증에 반대되는 논증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고, 에무나를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여러분의 에무나 또한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부모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부버에 의하면 우리 부모가 우리를 가르쳐 온 것과,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결정하는 것, 즉 이 두가지 양상의 에무나가 어우러진다면 완전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구와 사상이 우리가 그분을 믿도록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전통 때문에 그 분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는가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바로 하나님은 개인 개인의 믿음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믿음은 그들의 부모님, 조부모님으로부터 영적인 계대를 통하여 강해 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모습을 자녀들이 바라보고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그들의 믿음이 서 있기를 원합니다. 즉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부모님을 지켜 주신 그 하나님을 자신도 지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며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듯한 상황이 올 때 유대인들은 어떻게 그들의 에무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할 수 있을까요?
마이어가 쓴 소설에 답이 될 수 있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정하는일을 방해하시거나 끼어들지 않으십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사람들이 나쁜 방향으로 사용할 때 슬퍼하시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왜 우리의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난미이라고 하였습니까? 에 대한 우리들의 설명은 무엇입니까?
2. 오늘날 많은 회당에서 사용하는 유대인의 기도책에 그들 조상의 하나님을 말할때 여자 조상의 이름도 사용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 이삭과 리브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변화는 유대인의 믿음과 기도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3. 우리들은 우리 조상들의 믿음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4. 하나님이 선 또는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지유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난미이 에무나를 설명할 때 우리들의 언어로 에무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에무나를 위한 기도
유대인들은 에무나를 단지 어떤 진술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인 위대한 사상가 모세 마이마너디(1135-1204)가 에무나에 대하여 설명하는 13가지 원칙이 기도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토라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셨다' '모세는 위대한 예언자였다' '메시야는 올 것이다'는 믿음을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합니다.
유대인들이 마이마너디의 13가지 원칙을 기록한 기도문을 읽을 때 그들은 그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나는 완전한 신앙을 가지고 믿는다'라고 하는 마이마너디의 말이 어떤 사실의 진술이 아닌 기도로 고려할 것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습니까?
완전한 에무나를 위한 기도
랍비 노아는 그의 서재가 옆집과 공유하는 벽을 가진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옆집에서 에무나의 원칙들이 말하여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귀에 생ㄱ\생하게 들려온 구절은 "나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믿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들으면서 반복하여 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랍비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자신에게 속삭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집에 찾아가 말하기를 "나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믿습니다"라는 말은 나에게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만약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진실로 믿는다면, 내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이웃은 말하였습니다.
"에무나는 진술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에무나로 받아들이면서 '진실로 믿게 되기 위하여'기도하면서 그들의 에무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술이 아니며 고백이며 삶의 원천이며 생활입니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2장 에메트(진리)
에메트
진리
'에메트'는 진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로 서로 상대방에게 진리를 보여 주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에메트는 하나님의 본질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의 랍비들은 말하기를 "에메트는 하나님 자신의 인감 도장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랍비들이 모여서 진리를 연구하는 연구실에 어린이들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실 벽에는 히브리어 '알레ㅍ' - '베이트' 알파벳의 처음 문자 '알레ㅍ'로부터 마지막 문자 '타브'까지 차례로 걸려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각 문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만들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온 연구실이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랍비들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자 '쉰'을 사용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쉰은 '쉐케르(거짓)'를 위한 문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문자 타브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타브는 에메트를 위해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랍비에게 "성경에서 쉐케르는 각ㄱ가의 문자가 단지 하나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에메트는 각각의 문자가 안정된 기초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을 아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쉐케르의 각 문자는 모두 밑부분이 뾰족하기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이며, 에메트는 모두 밑부분이 다리가 둘이든지 아니면 아주 평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린이들은 설명하기를 쉐케르(거짓)는 일반적으로 비틀거리며 넘어지기가 쉬우나 에메트(진리)는 그것의 확고하고 안정된 기초를 가지고 세상을 지;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리의 기초가 실제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탈무드의 랍비들이 하나님과 진리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게 될 중요한 교훈
1. 에메트(진리)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2. 다른 사람과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 '정직'은 에메트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메트(진리)는 하나님의 본질입니것.
요즈음 우리는 편지 쓰는 것을 끝내고 봉투에 그것을 집어넣은 후 봉투 끝을 풀로 봉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녹여진 수지 양초의 풀과 종이로 그것을 봉한 후 거기에 개인의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받는 사람은 그 도장을 보고 누가 편지를 보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탈무드의 랍비들은 하나님과 진리가 어떻게 연관 되어지는지 가르쳐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개인 도장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하기를
"에메트는 하나님께서 보증하셨음을 나타내는 개인적인 인감도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1.유대인은 하나님과 에메트의 관계가 전통적인 예배에서 어떻게 분명하게 나타나는가를 묻습니다.
2. 에메트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어떻게 '하나님은 영원히 왕이시다'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 하나님은 에메트(진리)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과 에메트와의 관계는 매일 매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생각하는 슈마의 마지막 문장은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슈마를 따라오는 기도의 첫번째 단어는 에메트입니다.
유대인들은 슈마를 암송할 때 그것을 따라오는 기도문에서 호흡의 쉼을 가지지 않고 바로 연결지웁니다.
즉 두 개의 기도문을 쉼이 없이 연결지우므로 말미암아 예배자들은 말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은 진리이시다(아도나이 엘로헤이헴 에메트)' 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분리될 수 없는 딘어입니다.
두문자어로서 에메트
영어와 히브리어에서 몇 개의 단아로 된 문장에[서 각각의 단어의 머리 글자를 모아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영어 단어 radar는 radio detectinf and ranging 이라는 단어들의 머리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단어를 두문자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들 가운데 "사람은 진솔하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솔이라는 말은 진실과 솔직하다는 말의 머리 글자를 모아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랍비들은 에메트는 두문자어임에 틸림없다고 합니다.
'에메트'에서 첫 문자 '알레ㅍ'는 히브리어 단어 '하나님'에 해당하는 단어인 '엘로힘'의 첫 문자이고, 두번째 문자 '멤'은 히브리어의 '왕'이라는 단어인 '멜렠흐'의 첫 문자이며, '타브'는 영원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인 '타미드'의 첫 문자입니다.
그러므로 에메트는 '엘로힘 멜렠흐 타미드(하나님은 영원히 왕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의 머리 글자를 모아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두문자어로 된 에메트를 해석할 때 랍비들은 에메트의 진정한 기초는 하나님의 영우너한 규칙의 확고한 기초와 관련되어짐을 확살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방법들 중 하나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는데 특히 에메트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이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함에 있어서 정직하게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방할 수 있다고 랍비들은 가르쳤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1.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예배에서 슈마를 기도할 때 하나님과 에메트의 연관관계를 어느 정도로 강조하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예배에서 진리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2. 랍비들에 의하면 에메트는 히브리어 세 단어의 두문자어라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의 에메트
약 4세기경의 바벨론 랍비들은 에메트를 연습하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연습할 수 있는지를 그 랍비들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진리를 말함으로 그들의 에메트를 연습하였다고 합니다.
그 실제의 이야기를 인용해 봅시다.
어느날 아침 랍비가 사프라가 평상시대로 그의 집 바까 마당에서 슈마 기도(유대인들은 마당에 서서 기도할 때는 눙을 감지 않고 서서 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모를 수 있음)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로 다가와서 말하기를
'랍비여 나는 당신이 당신의 나귀를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50세겔을 낼 테니 나에게 파시오'라고 했습니다.
랍비 사프라는 그의 당나귀를 팔기를 원했으며, 그 값은 50 세겔이면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기도를 멈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랍비의 침묵을 자기가 제안한 값이 너무 작아서 대답하지 않는 줄로 오해하고 나귀의 값을 10세겔 올려서 60세겔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10세겔을 올려서 70세겔을 주겠다고 하면서 나에게는 그 이상의 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랍비 사프라는 기도가 끝났으며, 70세겔의 돈이 그를 유혹하였지만 랍비는 원래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한 가격 이상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랍비가 말하기를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제안한 첫번재의 가격이 적장하기 때문에 그 값에 당나귀를 당신에게 주겠소. 단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이라서, 기도를 중단할 수 없어서 대답을 못하였는데 미안하오'라고 하면서 '만약 내가 당신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 더 큰 이익을 가진다면 지금 내가 기도한 '주 너의 하나님은 진리이시다'는 에메트를 비웃고 도롱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랍비의 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에메트는 단지 '거짓이 아니다'는 말을 훨씬 능가하는 단어임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에메트를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은 영원히 진리이다' 라는 말의 고백과 함께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노력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은 진리임을 알리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쉐케르(거짓)는 기초가 불안정하여 비틀거리지만, 에메트(진리)는 그 기초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확고합니다.
또한 에메트는 '하나님은 영원히 왕이시다'는 신앙의 고백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여러분이라면 기도할 때 랍비 사프라와 같은 제안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혹시 아!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복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2. '진리는 단지 거짓이 아니다라는 말 이상의 것이다'라는 랍비의 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탈무드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묵은 쌀에 햇쌀을 섰어서 팔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모르지만 에메트의 하나님은 아십니다.
포도주를 팔 때에도 물을 탄 포도주를 팔지 마십시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와서 물을 탄 포도주가 있습니까? 물으면 팔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물을 탔다는 것을 알고 사려는 사람에게는 팔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장사하는 사람이 와서 물을 탄 포도주를 사겠다고 하면 팔지 마십시오 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장사할 사람이 물을 탄 포도주를 가지고 가서 물을 타지 않은 포도주처럼 팔지도 모르게 때문입니다.
에메트는 하나님의 인감도장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거짓을 만들 가능성이 있는 일까지도 하지 말라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진실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3장 보레이 에트 하콜(만물의 창조자)
보레이. 에트. 하콜
만물의 창조자
보레이 에트 하콜은 '만물의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보레이 에트 하콜은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믿음과 '만물은 창조된 목적을 가진다'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는 어구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목적이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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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라쉬가 포함하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하나님이 보레이 에트 하콜(만물의 창조자) 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 이야기 중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신성에 대하여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드리안이 어떤 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 승전가를 부르면서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성공하는 이 순간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으로 섬겨주기를 바라오"
황제의 오만은 그의 대신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들의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법철학자 한 사람이 한가지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철학자는 황제에게 "전하, 저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전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귀중한 물건을 실은 배가 바다에거 삼마일도 못가서 폭풍으로 위험한 순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드리안은 "귀하의 어려움을 위하여 내가 로마군의 몇 군단을 파견하도록 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신하가 말하기를 "시간이 없습니다. 왜 전하께서는 폭풍의 방향을 바꾸기 위하여 반대 방향으로부터 한 바탕의 바람을 보내지 않으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전하는 말했습니다.
"터무니 없는 말을 하지 마시오. 짐이 어디서 보낼 바람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신하는 "전하, 그러면 어찌하여 우리가 전하를 하나님으로 섬겨야 합니까? 하나님은 바람과 그 밖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황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보레이 에트 하콜(만물의 창조자)라고 가르치는 두 종류의 이야기를 읽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랍비 아키바가 그의 이웃에게 하나님은 보레이 에트 하콜이라고 가르쳤던 이야기이고, 둘째 이야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용되어 진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알게 될 중요한 교훈
1. 세상은 창조자가 있다난 증거를 보여줍니다.
2.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봉사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을 가집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기사를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결국 과학의 증명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세상은 수백억 년 전부터 진화되어 오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6일간의 처ㅓㄴ지창조 기사가 어떻게 진실일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랍비들은 그 자신들이 칭조기사의 문자적 의미를 믿으며, 성경이 하나님을 이 세상 모든 것의 창조주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랍비 아키바의 증거
이제 랍비 아키바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그의 이웃과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는 어떤 로마인이 랍비 아키바를 찾아와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나에게 보여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아키바는 "내일 다시 오시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 날 그 사람이 다시 아키바를 찾아왔습니다.
랍비 아키바는 "당신은 무엇을 입고 있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로마 사람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며 "양복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랍비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이 입고 있는 양복의 옷감을 누가 만들었소?" 로마사람은 "직물공이 짰찌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랍비 아키바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소. 당신은 당신의 옷감을 직물공이 짰다는 분명한 증거를 나에게 보이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로마 사람은 이 요구에 어떻게 응답하여야 할지 몰라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에게 어떤 증거를 줄수 있습니까? 직물은 그 자체 스스로 여기에 있을 수 없지 않소? 직물공이 직물을 짰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 아니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키바가 말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소?" 로마인은 부끄러워하면서 아키바를 떠났습니다. 그때 랍비 아키바는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여, 집을 건축하는 자가 없이 어찌 집을 지을 수 있느냐? 직물공이 없이 어찌 직물이 존재할 수 있느냐? 이와 똑같이 모든 것의 창조주 하나님이 없이 어찌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느냐"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고 확살하게 보여주며 증명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논리를 전개한다 하더라도 성경보다 더 분명하게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랍비 아키바의 대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2. 랍비 아키바의 논증은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3. 증명할 수 없어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열해 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된 목적을 가집니까?
아름다운 별들이 반짝이는 밤에 하늘을 보면 우리는 창조의 신비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모기가 우리의 귀ㅏㅅ전에 맴돌면서 앵앵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모기를 하나님이 왜 만들었을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한 것도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을까? 무엇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만들었을까? 랍비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잇을 것이다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랍비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실 때 그들이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개구리, 벼룩 그리고 각다귀 등도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윗의 이야기를 많이 인용합니다.
다윗과 거미과 장수 왕벌
다윗이 어느날 그의 정원에 앉아 있다가 장수 왕벌이 거미를 잡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당신은 왜 쓸모없는 거미를 창조하셨습니까? 장수 왕벌은 꿀도 주지 않고 보기에도 추하게 보입니다. 거미는 그의 일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거미는 하루 종일 거미줄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쓸모없는 직물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이유없이 창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배울 날이 올 것이다"
얼마 후 다윗은 사울왕이 자지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망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광야로 도망하여 숨기에 적합한 장소인 어두운 동굴을 찾아서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은 그 동굴 입구를 막기 위해 거미를 보내 거미줄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사울과 그의 병사들이 다윗을 찾아 나섰고, 드디어 그가 숨어있는 동굴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굴입구에 쳐져있는 거미줄을 보면서 말하기를 "거미줄을 제거하지 않고 동굴에 들어가서 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며칠 후 다윗은 그의 병사들 중 몇몇을 보내어 사울이 어디에 진을 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오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진치고 있는 곳을 알아내었고 어두움을 틈타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때 사울왕과 그의 병사들은 불을 피워놓은 채 불 가까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엇습니다. 사울왕은 물주머니를 베게로 하고, 창은 머리맡에 두고 자고 있었고, 사울의 심복 야브넬은 사울왕 옆에서 다리를 꼬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여기까지 왔다가 갔다는 흔적을 남기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의 창을 취하고, 베개하여 자고 있는 물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브넬이 그의 긴 다리를 쭉 뻗었는데, 다윗에게 그의 다리가 걸쳐졌고 다윗은 깜짝 놀랐으며 곤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장수 왕벌이 아브넬의 다리에 앉아서 아브넬을 쏘았습니다. 아브넬은 그의 다리를 자신의 손으로 때리면서 몸을 다른 방향으로 홱 돌렸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생각할 때 아무 쓸모가 없는 장수 왕벌이나 거미까지도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보레이 에트 하콜(모든 것의 창조자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사용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아 모든 것의 창조주되신 하나님(보레이 에트 하콜)의 뜻을 이루어 나가므로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보레이 에트 하콜)께 영광 돌리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2.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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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바흐야이븐 파쿠다는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백지위에 잉크병이 엎질러 졌지요. 그 위에 아주 아름다운 문자로 글을 써 보았으나 읽을 수가 없었지요. 또한 아름다운 문자로 글을 써 놓았는데 그 위에 실수로 잉크병이 엎질러 졌어요. 모든 문자가 뒤범벅이 되어 읽을 수가 없었어요.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세상에 죄악의 어두움이 들어왔지요. 아름다운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어요.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를 볼 수 없기에 창조주가 없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이 세상은 전능한 창조주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창조의 목적이 없이 창조된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당신을 창조한 창조주가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하시오" 라고 하였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4장 발 타슈히트(파괴는 금물)
발 타슈히트
파괴는 금물
발 타슈히트는 '파괴하지 않는다' 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는 말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돌아보며 관리하여야 할 의무를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발 타슈히트를 하게 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의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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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지각을 깨우칠 때가 있습니다. 랍비 하나니아의 아들이며 그 역시 랍비였던 여호수아가 어느 날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좁은 길 같은 것을 발견하고 무의식 중에 그 길을 걸어 들판을 횡단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우리의 농작물을 밟으면서 걸어가시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 농장은 우리의 것이며 당신은 이곳을 횡단하여 갈 권리가 없습니다. 길로 돌아서 가야 합니다"
랍비는 대답하였습니다.
"젊은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밟아서 만들어 놓은 길을 보았네"
그러자 젊은니는 "이 농작물을 짓밟은 발들이 길이라는 것을 만들었지요. 단지 그들 자신의 편안함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발 타슈히트(파괴는 금물)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장에서 여러분은 발 타슈히트(파괴는 금물)와 관련지어 지는 몇 가지 교훈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으로 접하게 될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유일한 관리자'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다음으로 여러분은 '발 타슈히트(파괴는 금물)하는 방법에 관하여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랍비가 주는 교훈 한가지...
랍비 여호수아가 우리에게 한가지 귀한 교훈을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행동을 할때 여러분은 소경처럼 그저 따라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실천에 옮기기 전에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아무 생각없이 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또는 우리의 주변 환경이 파괴디는 경우가 흔히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게 될 중요한 교훈
1. 인간은 세상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게에서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2. 발 타슈히트(파괴는 금물)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건설적인 행위는 해야만 하고, 파괴적인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는 하나님의 소유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건물을 더 좋은 상태로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하여 관리인을 고용하였다고 합시다.
만약 그 관리인이 창문을 부수고, 벽을 헐고 문을 새롭게 만드는 등의 일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리인, 정원사 그리고 집사들이 그 집에 딸려 잇는 모든 ㅅ고유물들을 잘 관리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다음 질문에 답을 해보십시오.
토라와 미드라쉬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 안에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주고 받는 이야기는 환경에 관하여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십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의 관리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 세상과 세상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을 돌보고 관리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더 깊이 연구하 보면 하나님께서는 주어진 환경이나 세계를 인간들이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주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작하고 관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에 아담을 두었습니다.
이것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아담이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이 손상되는 것을 막고 잘 관리하고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관계되어지는 미드라쉬를 보면 랍비들이 발 타슈히트(파괴는 금물)에 관하여 얼마나 큰 관심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드라쉬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 그러나 내가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네가 그것을 파괴하고 난 후 그것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오래된 미드라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그 순간 많은 천사들이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미드라쉬의 현대어 번역본에는 "하나님의 계호기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대적자들중 지상의 자원, 자연을 책임지고 있는 수호신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수호신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게 만들어 발 타슈히트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그들은 모든 자연만물의 성장을 방해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하는 창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질문이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까? 여러분은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2. 미드라쉬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경고하는 것과, 핵무기의 위험에 관하여 경고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비교해 보십시오.
발 타슈히트(파괴는 금물)를 이루는 방법
여러분의 양친이 여러분에게 아우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신 후 얼마 동안 집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부모님이 부탁하신 말씀은 '동생들을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두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 한가지는 동생들을 힘들게 하거나 그들이 하기 싫어하는 어떤 일을 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요, 다른 한 가지는 동생들과 함께 어떤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령 집안을 정리한다든지, 동생들에게 필요한 것을 함께 힘을 합쳐 만든다든지 하는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어떤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우리가 살고 잇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발 타슈히트를 이루는 것이며, 적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자연 환경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창조적인 어떤 일을 함으로싸 발 타슈히트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 스스로 질문을 하며 답을 찾아 보십시오.
다음에 이어지는 랍비 엘라이져와 하니에 관한 설화가 발 타슈히트를 이루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어떻게 교훈하는지 보면서 여러분의 방법을 찾아 보기를 바랍니다.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맙시다.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발전시킵시다.
어느 날 랍비 엘라이져와 쉬몬이 점심식사 후 산책을 하고 있던 중 엘라이져가 길가에 아름다운 야상화가 피어 보기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한다발의 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 랍비 쉬몬에게 그가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꽃을 꺾는 것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쉬몬이 꽃을 꺾으려는 순간 엘라이져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잠깐 쉬몬! 나의 생각을 바꾸었네. 만약 이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얼나후 모든 야생화는 껶여질 것이요, 그 이후에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을 위하여 남아 잇는 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일세. 이 길을 지나갈 모든 사람들이 이 야생화를 보며 즐길 수 있도록 이 꽃을 보존하세. 나 혼자만을 위한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발 타슈히트의 적극적인 면을 교훈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랍비 하니가 점심을 싸가지고 아름다운 산길을 따라 걷는 중 한 사람이 쥐엄나무를 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랍비 하니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심고 있는 나무에서 몇년 후에 열매를 거두어 들일 수 있소?"
그 농부는 "70년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니는 "당신은 지금부터 70년 후에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지금 나무를 심고 있나요?"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농부는 "나는 그때 이미 죽었을 것이오. 그러나 내가 오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나무를 나의 조상이 심었던 것과 같이, 내 인생의 뒤를 따라 다음 세대를 살아갈 누군가를 위하여 오늘 나는 이 나무를 심고 있소"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랍비 하니는 시장해서 그가 가지고 간 점심을 먹고 피곤하기에 잠시 낮잠을 자기로 결정하고 좋은 자리를 찾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니는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낮잠을 자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낮잠을 자기 전 한 농부가 심고 있던 그 쥐엄나무에서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어떤 사람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갸우뚱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향하여 "실례합니다. 당신이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이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니오 나의 항아버지가 70년 전에 이 나무를 심었지요. 우리 가족의 모든 세대는 우리의 대를 이어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후손을 위하여 환경을 개선하고 개발하고 지속적인 창조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지요. 나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열매를 맺고 잇는 이 쥐엄나무를 가지고 있었지요. 나도 나의 할아버지처럼 발 타슈히트를 이루기 위하여, 나의 아들과 후손을 위하여 새로운 쥐엄나무를 지금 심고 있는 중이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자연환경에서 발 타슈히트를 이루기 위하여 소극적인 노력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지요?
생각해 봅시다.
1. 여러분은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좋은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까?
2. 여러분이 지금 발 티슈히트를 이루기 위하여 하고 계시는 적극적인 방법와 소극적인 방법을 한번 적어 보시고, 친구와 토론해 보십시오.
3. 신명기 20:19-20; 23:13-15 과 미드라쉬와 신명기를 읽으시고 성경과 유대인 문학에서는 발 타슈히트를 어떻게 이루어 가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라는 원리를 제시하는지 연구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과 탈무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오염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가 어느 성읍을 오래 동안 에워싸고 쳐서 취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작벌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밭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오직 과목이 아닌 줄로 아는 수목은 작벌하여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할 때까지 쓸지니라"(신명기20:19-20)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일으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돌리지 말고" (신명기23:13-15)
특히 탈무드는 땅을 보호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문제와 공기 오염에 관한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잘 보호하고 관리할 것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5장 바르 미쯔바 바트 미쯔바(남녀성인식)
바르 미쯔바 바트 미쯔바
유대인의 남녀 성인식
바르 미쯔바(남자 성년식)와 바트 미쯔바(여자 성년식)는 '의무를 감당해야 할 남자'와 '의무를 감당해야 할 여자' 즉 '성년식'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르 미쯔바와 바크 미쯔바의 의식을 행할 남, 여는 미쯔보트 '의무' '계약'을 수행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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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소년들은 열 세 살에, 소녀들은 열 두 살 또는 열 세 살에 이러한 기념식을 가집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전통과 비교해 본다면 일종의 성년식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날 하루 동안을 축제일로 기념합니다. 또한 기념식에 참석한 남녀는 일평생에 가질 의무를, 책임의식을 깨닫게 되며 그것을 잘 수행하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기념식은 하루에 끝납니다만 그날 주어지는 의무와 책임은 그의 삶 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성년식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의 기념식을 가져야 할 연령에 이르렀을 때 그들 머리와 마음 속에 어떤 사상과 감정을 가지겠습니까?
남녀들의 성년식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를 할 연령에 이르면 그들의 생애에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정신적인 면, 육체적인 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오는 시기로 성인으로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인 면과 지적인 면에서 더 이상 어린이로 대우받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사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새로운 의무를 가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린이로서 성인들을 보아왔던 생각이 변화되어 그들을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은 누구나 열 두 살 또는 열 세 살이 될때 생애에서 가장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경험하는 것이 다르더라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는 이러한 새로운 국면으로의 도약을 위한 특별한 기념식을 기자게 됩니다. 특히 유대교에서 유대인들은 이 기념식을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라고 부릅니다.
열 두 살 또는 열 세 살된 젊은이들이 여러가지 면에서 어린아이의 티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유대교에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종교적 의무를 가지도록 준비하는 적절한 시기로 봅니다.
이번 장에서 여자 성년식인 바트 미쯔바는 근래에 만들어진 유대교 전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남자 성년식인 바르 미쯔바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후대에 시작되었다는 거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 역시 남녀 성년식의 기념일에 새로운 가치를 설정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성년식을 거행하여야 할 만큼 성장한 자녀를 보면서 부모님은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성년식이 진행될때 부모님은 말하기를 '이제 이 자녀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은 복이 잇습니다'라는 기도문을 묵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기도문의 뜻은 자녀들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대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성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본 장에서 알게 될 중요한 교훈
1. 성년식인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 기념식에 따르는 전통은 새로운 것입니다. 탈무드와 미드라쉬 시대 이래로 유대교에서는 열 수달 또는 열 세살의 나이가 아주 중요한 연령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2.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 기념식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특별한 순서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하루의 기념식이 아닌 전 생에를 주관하는 기념식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는 초, 중,고등학교 졸업식을 'graduation ceremony' 라고 부르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commencement' 라고 말합니다. 각급학교의 졸업은 졸업생들이 새로운 단계로의 생애를 시작할 수 잇도록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는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는 기념식에 참여한 소년, 소녀들이 그들의 생애에서 귀중한 전환점이 된느 시기로 기념하며 새로운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 기념식 날 소년, 소녀들은 유대인으로서,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임무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잇어서 이 기념식은 단순한 하루의 기념식이 아니라 전 생에에 영향을 주는 귀중한 날로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바르 미쯔바(남자 성년식)와 바트 미쯔바(여자 성년식) 기념식
성경이나 탈무드에서는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의 기념식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일생에서 매우 귀중한 날로 아직도 전수되거 있는 유대인의 전통으로 현대에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 세 살에 유대인으로서의 생에에 새로운 시대로 들어 간다는 사상은 탈무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테마의 아들 유다는 약 1800년 전에 생존했던 유명한 랍비인데 그는 "열 세[ 살의 나이가 마쯔보트(의무계약)을 수행할 수 있는 연령의 시작으로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람의 숫자에서 한 명이 부족할 때 13세인 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수를 충족시켰다고 하였습니다.
탈무드에는 열 두 살된 소녀와 열 살된 소년에게 욤 키푸르(속죄일)에 금식이 요구되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의무는 바로 유대인들이 열 두 살 또는 열 세 살 되었을 때 유대인으로서 의무를 수행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탈무드의 다른 글에는 열 세 살의 소년에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성인을 지칭하는 말로 바르 미쯔바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미드라쉬에서 말하는 열 세 살
대부분의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의 우상 가게에서 아버지를 도왔다는 설화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외출을 하고 아브라함이 우상 가게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분명하게 하기로 결심하고 우상들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와서 일어난 일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우상들에게 복을 빌기 위하여 우리 가게에서 제일 큰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상들이 서로 자기가 이 상을 차지하여야 한다고 논쟁하다가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부서졌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진느 아브라함에게 "너 이놈! 왜 거짓말을 하느냐? 우상들은 단지 흙으로 빚었거나 아니면 나무로 깎아서 만들었는데 그것들끼리 어떻게 싸우며 논쟁하며 다툴 수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은 우상에게 기도하지요? 우상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머리가 있어도 생각하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말이예요" 라고 물었습니다.
미드라쉬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그때의 나이가 열 세 살이었다고 합니다.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즉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옮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는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사야 43:8-13)
또 다른 미드라쉬를 읽어보면 야곱과 에서의 생의 전환점이 열 세 살에 일어낫다고 합니다. 그들의 아버지 이삭은 야곱가 에서의 어린 시절에 그 당시의 좋은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열 세 살이 되자 에서는 우상을 예배하는 곳으로 갔고, 야곱은 토라를 연구하는 집으로 가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여러분은 몇 살쯤 되었을 때 생의 전환점을 경험하셨습니까?
2. 아브라함과 야곱은 생의 전환점인 열 세 살에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할 수 있었을까요?
세 가지 특별한 기념식
대부분의 유대인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 기념식을 크고 중대한 행사로 여깁니다. 이 기념식은 아주 특이해서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 아주 특이한 바트 미쯔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첫번째 바트 미쯔바(여자 성년식)
'유디스 카플란'이란 이름의 소녀는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모르드카이 키플란(1881-1983)은 뉴욕에 있는 유대인 신학대학교의 유명한 교수혔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교 재건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유대인 가정에서 지켜지고 있는 전통을 재건하기 위하여, 유대인 생활의 여러 가지 양상을 지도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카플린은 현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회당의 중심사상을 재고하여 회당이 기도와 토라연구를 위한 장소로소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사회활동 중심지로 사용되는 등 공동체 전반의 생활 중심지로 활용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딸 유디스가 열 세 살이 되는 생일날, 그는 유대교의 종교적 생활에서 남녀가 동등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실행에 옮기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뉴욕에서 처음으로 바트 미쯔바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트 미쯔바의 시작으로서 사회에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유디스는 유명한 음악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성인들이 회당에서 성경을 봉독하기 전이나 후, 축복송을 노래한 후 주간 성경읽기 부분에서 자신의 선택 부분을 읽은 후에 '천둥소리가 없이 번개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 하곤 했습니다.
그후 바트 미쯔바 기념식이 바르 미쯔바와 나란히, 그리고 동등하게 시행되기까지는 그후로도 수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유디스 카플란의 바트 미쯔바는 바로 현대에 이르는 유대인 전통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폴란드에서 바르 미쯔바(남자 성년식)
유대인 대량학살이 있기 전 폴란드의 크라코우라는 도시에 6만명의 유대인 공동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에는 겨우 600여명의 유대인만이 살고 있었고 다구나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몇 가정에만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크라코우에서는 한 지도자의 요구로 그 어린이들을 위한 바르 미쯔바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유대인의 삶 속에서 활동하는 젊은 유대인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릭 소톰'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크라코우에서느 제일 처음으로 바르 미쯔바 기념식을 치룬 젊은이었는데 그의 바르 미쯔바는 1985년 9월에 있었습니다.
그 기념식에서 에릭은 성경의 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로 더 이상 폭력이 없는 미래의 시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릭은 그 부분을 특별한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를 생각하면서 선지자의 글을 묵상할 때 새로운 의미가 그에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크라코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찌스의 아우슈비츠 죽음의 캠프가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습니다. 에릭의 증조부 역시 학살도니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릭은 그의 고향 미국의 커넷티컷주에서 바르 미쯔바의 기념식을 가지는 대신 폴란드의 크라코우에서 기념식을 차루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릭은 폴란드에서 유대인의 사람을 재건하는데 특별한 헌신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컴퓨터와 함께 한 바르 미쯔바(남자 성년식)
1985년 11월ㅇ[ 미국 피츠버그에서 '리 크웰러'는 진실로 고상한 바르 미쯔바를 거행했는데, 그는 뇌성마비로 인하여 단지 몸짓으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바르 미쯔바의 경우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컴퓨터 학자가 두 대의 컴퓨터에 특별한 프로그램을 입력하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크 웰러가 읽어야 될 선지자의 글과 축복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키보드를 사용하여 활자화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며, 그것은 곧바로 정확한 히브리어 발음으로 들려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같은 방법으로 시편과 찬양을 묵상했고, 그의 성년식 연설문을 영어로 만들었습니다.
그 연설문에서 리 크웰러는 말하기를 "나는 오늘 생명을 얻었다. 나의 조상들의 전통 안에서, 그것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관한 모든 것을 지금 말할 수 있다. 성년식은 자신을 위한 새로운 세계로의 삶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성녀식은 위의 세 사람의 것과 다르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는 그의 생에에서 아주 큰 날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특수한 방식이든지 평범한 방식이든지 그들 삶의 전환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환점을 지나면서 유대인 소년 소녀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을 결심하며, 종교적, 사회적 의식의 책임있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유대인에게 있어서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는 중요한 날인데 여러분에게 이와 유사한 어떤 날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어떤 날입니까?
2. 여러분도 어떠한 종교에 헌신을 결심하는 에식을 가져보셨습니까? 예를 들면 세례, 성례, 영세, 뒤의 등의 예식 말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주었습니까?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6장 버리트(언약,계약,동의)
버리트
언약, 계약, 동의
버리트는 언약, 계약, 동의를 말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유대인 전통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 번의 언약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몇 번이나 언약을 맺어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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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친구 즉 죽마고우들과 싸우기도 하고, 사이좋 게 지내기도 하며 수많은 물건과 장난감을 가지고 함께 놀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기가 갖고 싶은 장난ㅁ감이 서로 상대방에게 있을 경우, 그것을 서로 바꾸어 가져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서로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는 바꾸어 가진 장난감이 자기의 것이 되었음을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경험한 버리트(언약, 계약, 동의) 입니다.
성장하면서 어떤 단체나 모임의 회원이 된다든지 하는 등 이 모든 것은 결국 버리트(계약)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버리트로 연결되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을 사거나 전세 및 사글세를 얻는 것 역시 계약의 한가지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 역시 계약의 한가지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국가간의 조약 역시 버리트입니다.
일반적인 버리트는 당사자가 동등한 자격을 갖추고 있을 때, 대등한 입장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보통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쉬은 예를 들어보면 어린이가 집안 일을 거들어 주면 용돈을 올려주겠다는 바리트, 또는 학교에서 학급의 학생 모두가 평균 B를 맞2으면 숙제를 주지 않ㄴ느다든지, 다음주 월요일에 테스트를 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 역시 버리트입니다.
본 장에서 여러분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세 종류의 언약에 관하여 읽게 될 것입니다. 각각의 언약은 당사자가 가지는 의무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라면 이해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이는 유대인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본 장에서 토론할 내용 요약
1. 무지개와 안식일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버리트(언약)의 표입니다.
2. 할례는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맺어진 버리트(언약)의 표입니다.
버리트(언약)의 두가지 표
대부분의 회사나 단체는 자신들을 나타내 주는 상징인 이름과 로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꽃은 무궁화 꽃, 각 대학 등을 알려주는 마크 등이 있습니다. 이 로고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이 상징하는 기업, 학교, 단체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버리트(언약)를 기억나게 하는 버리트(언약)의 표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버리트(언약)의 로고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보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와 안식일이라고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1. 버리트의 상징으로서 무지개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2. 버리트의 상징으로서 안식일은 어떻게 인류를 위하여 봉사합니까?
3. 기독교에서는 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어졌습니까?
버리트(언약)의 상징으로서의 무지개
성경은 세상의 악한 모든 것들을 쓸어버린 거대한 홍수 기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버리트의 상징으로서 무지개를 보여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버리트를 체결하는 데 두 당사자가 필요합니다.
한 편의 당사자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의 당사자는 지구에 현존하는 사람과 미래에 살 사람들입니다. 무지개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그분의 책임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창세기 9장 13절로 16절에 보면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내 버리트를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잇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있는 영원한 버리트를 기억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버리트(언약)의 상징으로서의 안식일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은 버리트의 상징으로 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버리트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버리트의 상징으로서의 안식일은 주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무를 그들로 하여금 기억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성경 출애굽기 31장 12절로 13절, 16절로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을 대대로 영원한 버리트로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이 구절을 노래로 만들어 '버 샤므루(그들이 지켰다)' 라는 제목으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아침 아미다(기도-기독교 예배의 대표기도로 볼수 있다)가 끝나면 이 성경 구정을 읽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예바가 끝날 때 '구별된 날'이라는 의미로 이 구절을 다시 읽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버리트의 상징으로 무지개가 나타날 때 언약의 당사자 중 어느 편이 더 큰 의무를 가집니까?
2. 버리트의 상징으로 안식일에서 당사자 중 어느 편이 더 큰 의무를 지닙니까?
버리트 밀라(할례 언약)
유대인 가정에서는 어린 아니가 태어나면 유대인이 되는 표시로 특별한 기념식을 합니다. 그 기념식은 남자 아이과 여자 아이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게 불리어지는데, 남자 아이를 위해서는 버리트 밀라(할례 언약)로, 여자 아이를 위해서는 버리트 바트(언약의 딸)로 불리어 집니다.
밀라는 할례에 대한 히브리어입니다. 즉 사내 아이가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에 행하는 종교의식입니다. 할례는 종교적 지도자로서 할례자나 또는 의사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수술 예식인데, 유대인들은 간단하고 짧게 행하는 의식이라 하며 단순하게 버리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버리트 밀라(할례언약)는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협정하는 표시입니다.
버리트에서 하나님의 의무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영원히 지키시는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후손의 의무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속적인 할례를 행하는 것이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1. 할례는 왜 언약에 대한 표징으로 나타납니까?
2. 왜 엘리야는 할례 언약에 참가했습니까?
버리트(언약)의 쵸징으로서의 할례.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는 표징으로서 할례를 선택하셨습니까? 어떤 유대인 학자는 말하기를 "후손을 창조하는데 사용되는 육체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을 통하여 계약을 맺는 것은, 할례받은 유대인의 혈통에서 출생된 모든 자녀는 하나님께 그들이 충성을 다할 것을 보여주는 약속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드라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로마 장교가 랍비를 찾아와서 "만약 하나님이 유대인들이 할례 의식을 행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이 왜 그 방법을 만들어서 가르쳐 주시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왜 유대인에게 할례의 고통을 주었느냐?" 고 묻습니다.
랍비가 대답하기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특별한 버리트의 표징으로서 명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더 완전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와 할례 언약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에 있던 몇몇 유대인 회당은 할례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특별한 두개의 왕좌 같은 의자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절친한 친구나 또는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앉는 자리인데, 거기에 앉는 자는 할례받을 어린이를 자신의 무릎에 안고 있게 됩니다. 다른 하나의 의자는 엘리야 선지자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오늘날 그러한 의자들은 유대인 박물관에 있습니다. 현대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유월절 의식을 행할 때 선지자 엘리야를 위한 자리와 술잔을 준비하는데 이것 또한 할례의식 때의 규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전 9세기경 사악한 왕 아합의 통치시대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그들의 언약을 무시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선지자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어린이가 할례를 받는 동안 엘리야 선지자가 그 예식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의 글은 엘리야를 메시야의 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모든 어린이들은 메시야로 선정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할례의식에서 엘리야가 어린 아이를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할례의식이 끝난 후 어린 아이릐 아버지는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에서 아버지는 그들의 조상 아브리함의 언약에 자기의 아들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그 예식에 참여한 손님들은 "지금 하나님과의 언약에 인도된 것처럼, 적당한 연령이 되었을 때 토라를 연구하는 길에, 결혼하는 길에, 훌륭한 일을 행하는 길에 하나님 앞에서 인도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때 증인으로 참여한 선지자 엘리야는 할례자의 가족들을 언약에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유대인 이상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만족해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왜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에 적합한 표징이 되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2. 엘리야가 할례시에 참여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하여 보십시오.
1843년 미국 뉴욕에는 세게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전 세게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의 복지와 안전 및 그들의 후손을 교육 시키기 위한 봉사단체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 공동체를 '언약의 후손들(브네이 버리트)' 라 부르며 전 유대인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7장 브라코트(축복들)
브라코트
축복들
브라코트는 '축복들'을 의미하며 단수형은 브라카(축복)입니다. 이 단어는 베레크와 같은 어근을 가지는데 베레크는 '무릎'이라는 말이고, 이 단어의 동사형은 바라크인데 '무릎 꿇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브라카(축복)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주 흔하게 사용되는 바루크는 바라크 동사의 수동 분사형으로 '무릎 꿇어지는 것' '무릎 꿇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비라코트(축복들)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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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처음 것을 대하는 순간 그 순간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가장 적당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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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는 한 가지 방법은 행위를 통하여서이고, 다른 한 방법은 그 브라코트(축복들)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한 도시를 출발하여 아름답게 장식된 왕복 6차선 정도의 길을 따라 다른 도시를 향하여 달리면서 도로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런데 한 지점에 이르자 '1마일을 지나면 특별히 아름다운 경관이 있다'는 안내 표지판이 길 옆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천히 가십시오. 여러분은 아름다운 계곡의 경관을 보게 될 것입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계곡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안내 표지판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풍경을 못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브라코트는 이 안내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에 대하여 더욱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표지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행하는 동안 먹고 마시는 일들 같은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표지판이 바로 브라코트인 것입니다.
이제 브라코트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는 뜻을 찾아 봅시다. 우리의 주변에서 아주 쉽게 대할 수 있는 몇가지 예를 통하여 브라코트의 형태를 살펴봅시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축복이라는 단어가 무릎이라는 단어와 원형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바라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알게 될 중요한 교훈
1. 브라코트를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고 우리의 입을 통하여 시인하므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브라코트에는 주로 몇 가지 형태가 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브라코트(축복들)와 하나님의 전
먼저 브라코트와 하나님의 전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대에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하여 정복을 당하고 신전이 파괴되면 정복당한 백성은 자신들의 신이 능력을 잃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복자들의 신을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했을 때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파괴가 어떻게 그들에게 바르코트가 될 수 있습니까?
성전이 파괴된 후 그들은 오히려 전 세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브라코트는 하나님의 소유를 우리가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에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의 영적인 지도자들은 절망적인 상태로부터 백성들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에 재한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 한가지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한 분의 진정한 하나님이 진세계 안에 계시며, 전세계는 바로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을 가르침으로 절망으로부터 그들의 백성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 성전 안에 있는 어떤 용기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여 성전의 물겅을 사용하는 사람은 구구이든지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의 영적 지도자들은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물건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성모독죄를 범하지 않고 세상 안, 즉 성전 안에 있는 물건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브라코트를 묵상하는 것에 의해서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들은 브라코트를 말하는 것에 의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결국 그들은 이제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일 없이 세상 안에 있는 어떤 물건이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수 세기 동안 랍비들은 브라코트가 가지고 있는 숨은 의미를 찾기 위하여 토론하여 왔습니다.
한 랍비가 일어나서 말하였습니다.
"어떤 시편 기자는 왜 '지구와 지구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속하였다'고 말합니까?
반면에 또 다른 시편 기자는 '하늘들은 하나님의 하늘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을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말합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 땅을 사람들에게 주었다면 그 땅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속합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탈무드는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우리가 브라코트를 말하기 전에 지구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브라코트를 묵상할 때 '하나님은 지구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습니다'라고 가르칩니다.
S.Y. 에그론(1888-1970)은 귀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1966년에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웨덴의 왕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스톡홀름으로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는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만군의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참석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어느 누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영광을 주면서 기뻐하며 즐거워합니까? 오직 당신망이 유일하신 분입니다. 이 큰 영광을 당신에게 돌려드립니다. 무한 감사합니다. 하나님 할렐루야!'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귀한 상을 받았다면 제일 먼저 무엇이라고 말하였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1. 브라코트를 인정하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신성 모독죄로부터 벗어나게 합니까?
2. 갑작스럽게 아주 아름답고 놀라운 일을, 과거에 그냥 지나쳐 버렸던 일 가운데 새롭게 느껴지는 기이한 것이 기억난다면 한번 적어보면서 브라코트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브라코트(축복들)의 몇가지 형태
이제 브라코트의 형태를 살펴보면서 그것의 숨은 의미를 묵상하여 보십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태의 브라코트가 유대인들이 지키는 다양한 명절 첫날 저녁에 항상 읽혀집니다.
그들은 명절 첫날 저녁에 먼저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빛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며 브라코트를 묵상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시는 일용할 음식과 음료를 감사하면서 브라코트를 묵상합니다.
셋째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지금 호흡을 하고 있으며 현재의 상황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브라코트를 묵상합니다.
유대인의 삶 가운데서의 브라코트(축복들)
유대인들이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은 미쯔바 또는 미쯔보트(계명들)인데, 이것은 일종의 성년식과 같은 것으로 이 예식을 거행하기 전 10 단어로 된 브라코트를 묵상하게 됩니다.
바루흐 아타
아도나이 엘레헤이누
멜레ㅋ 하올람
아쉐르 키드샤누
버미쯔보타브 버미쯔바누
이 10단어의 의미는 "복되신 자, 당신은 아도나이(여호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주의 왕이십니다. 누가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며, 계명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나이까?"
이 브라코트의 마지막 문장은 바뀌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 기념식이 거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은 이 10 단어의 브라코트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먹는 특별한 음식(무교병)과 관계해서 히브리 단어 알 아킬라트 마짜(무교병을 먹는 것을 언급하면서)를 첨가합니다.
또 다른 절기에 미쯔보트(계명)을 행하는 중 촛불을 켜기 전에 브라코트를 말하면서 그들이 몇 가지 다른 의식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미쯔보트 의식을 실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기회를 주신 하난미께 감사하며, 또한 미쯔보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식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즐길 때 또한 브라코트를 묵상하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애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마실 수 있는 음료를 주신 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6단어의 말로 구성됩니다.
바루흐 아타
아도나이 엘레헤이누
멜레ㅋ 하올람
복되신 자 당신은 아도나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주의 왕입니다.
이것은 다른 절기나 특별한 날에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6단어를 묵상한 뒤에 그들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들에데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빵을 먹기 전에 하나님이 땅으로부터 이 빵을 허락하여 주셨다는 뜻인 '하모찌아 레헴 민 하아레쯔를 고백합니다. 또한 포도즙이나 기타 다른 음료를 즐길 때도 그들은 포도라는 과일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말하기를 보레이 프리이하가펜 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대인들은 명절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현상들 속에서 하나님의 브라코트를 묵상하며, 개인적인 생황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건들 앞에서, 특히 큰 사건을 만나거나, 특별히 귀한 상을 수상한다든지, 결혼식을 하든지, 성년식을 할때, 또는 생일날 파티를 할때 그들은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브라코트를 묵상합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경험할 때 가령 새옷을 산다거나, 새집을 사서 이사갈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브라코트를 묵상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될때, 가령 여름에 처음으로 수영하러 갈 때라든가 아니면 그해에 처음 익은 과일을 먹을 때 하나님의 브라코트를 묵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브라코트는 생활이 일부이며 삶 자체인 것입니다. 기쁜 환경이나 슬픈 환경, 특별한 환경, 특별한 일이나, 하찮은 일이나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축복을 언제나 느끼며 살려고 노력하며,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브라코트를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즐겨 묵상하는 말씀은 :
바루흐 아타
아도나이 엘레헤이누
멜레ㅋ 하올람
쉐헤헤야누 버키여마누
버히기아누 라즈만 하제
입니다. 번역하여 보면
복되신 자,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여 주시고 이러한 모든 환경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우주의 왕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한국의 기독교인들도 이들보다 더 많은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는 브라코트(축복들)를 얼마나 감사하면서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2. 하나님의 소유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브라코트를 어느 정도 활용하며 그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8장 야밈 노라임(경외 하며 두려워하는 날들)
야밈 노라임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날들
야밈노라임은 '경외의 날들, 두려움의 날들'을 의미합니다.
야밈 노라는 로쉬 하샤나(유대인 설날:한국의 음력8월1일)로부터 시작하여 욤 키푸르(사죄,용서의 날)까지 이어지는 10일 동안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 기간 유대인들은 지나간 일년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행한 일들 가운데 좋은 일을 한 것과 좋지 못한 일을 한 것을 저울로 측정하여 본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지요.
그래서 그 기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 가운데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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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밈 노라임(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날들)은 유대인의 달력에서 특별한 날로 표시됩니다. 이 기간 유대인들은 지난 일년 동안의 삶을 돌아봅니다. 유대인들은 야밈 노라임에 기도할때 "하나님, 우리가 지난 일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그릇된 것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용서를 비는 기도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에 한해서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릇된 일을 했다면 직접 그 사라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야밈 노라임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어느 해, 로쉬 하샤나(유대인 설날) 오후에 나드보르나의 유명한 랍비 모르드가이가 길을 걷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급하게 지나가다가 그와 부딪혔습니다. 랍비는 그가 회당의 캔터(회당에서 예배드릴 때 성경을 곡을 붙여서 읽는 사람이며, 교독할 때와 찬양할 때 선창하는 사람을 말한다)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서둘러 가십니까 나의 친구여"라고 랍비가 물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나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나 저는 야밈 노라임을 위한 기도책 마흐죠르(회개의 기간동안에 드려지는 예배시간에 읽는 기도책의 한부분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를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회당의 캔터로서 기도의 순서에 따라 로쉬 하샤나(설날)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회당에 서둘러 가는 이유입니다"
캔터의 이 말은 랍비를 전혀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나의 친구여, 나의 충고를 듣고 서두르지 마시오. 마흐죠르 기도의 순서는 바꿀 수 없습니다. 당신이 회당에 갔을 때 로쉬 하샤나를 위한 기도는 벌써 순서대로 시작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마흐죠르를 찾으려고 서두르지 말고 대신 지난 일년 동안 당신이 행한 일을 돌아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맡은 순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돌아보고 향상시키려는 당신의 노력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본 장에서 우리는 야밈 노라임(두려워하는 날들) 기간에 하나님의 용서를 찾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에 관한 두가지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절기가 있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생각해 봅시다.
1. 야밈 노라임 동안 유대인들은 두가지 방법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으로 용서를 구하십니까?
2.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용서와 하나님께 구하는 용서는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야밈 노라임(두려워하는 날들)에 하나님께 구하는 용서의 기도
야밈 노라임은 일년 중 아주 특별힌 기간입니다. 이제 우리는 동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해지는 두가지 이야기를 읽게 될 것입니다. 야밈 노라임은 일년 중 아주 유일한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하나님과 대하를 나누는 것을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유대인
첫번째 이야기는 베르딕 헤이브의 랍비 레위 이삭(1740-1810)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해 야밈 노라임 동안 랍비 이삭은 그의 양복을 수선하기 위하여 양복점에 갔습니다. 랍비는 수선공이 마히죠르를 읽을만큼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랍비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수선공은 기도를 하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수선공이 기도하지 않은 이래로 하나님의 용서를 ㄱ\받지못한 것을 깨닫도록 하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수선공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친절한 말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의 친구여, 나는 매년 욤 키푸르(속죄일)에 똑같은 일을 많이 합니다. 나는 지금 놀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욤 키푸르 관습이 나의 관습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금년 욤 키푸르에 어떤 일을 하시면서 보냈습니까?"
수선공이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제가 범한 죄는 당신이 범한 죄와 비교하면 아주 작습니다. 단골손님이 많아지므로 그들이 양복이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서 옷감을 가지고 오면 옷을 만든 후 남은 천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대신 제가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아이들을 어머니들로부터, 어머니들로부터 아이들을 분리시켰습니다. 이것은 옷감으로부터 조각을 분리하여 남은 것을 제가 가진 것 보다 훨씬 더 중대한 범죄 중 하나입니다. 만약 당신이 나의 조그만 죄를 용서하면 당신의 죄를 용서하는 데 나는 동의하겠소' 라고 하였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랍비 이삭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격조 높은 어조로 말하기를 "당신이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소? 당신은 좋은 기회를 잃어버렸소. 당신은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당신 스스로 그것을 잃은 것이오. 하나님과 당신은 거래를 할수 없소. 단지 하나님 앞에 당신을 내어 놓으시오" 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욤 키푸르에 얼어난 것입니다.
리즈헨스크의 랍비 엘리멜렉(1717-1787)이 그의 제자들을 양복접점 주인에게 보내면서 "양복점 주인이 그대들에게 거룩한 날에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가르칠 것이다"고 말하셨습니다. 학생들은 양복점 주인의 집에 이를러 창문을 통해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회계장부처럼 보이는 두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훤 권은 두껍고 한권은 얇았습니다. 곧이어 학생들은 그가 두권의 책을 손에 들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주의 주재시여, 오늘은 모든 유대인들이 당신의 용서를 받는 날입니다. 지금 두 장부 책을 정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얇은 장부 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책에는 내가 지은 모든 죄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의 책은 얼마나 두꺼운지 보십시오. 이 두꺼운 책에는 당신이 범한 모든 죄의 목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고통을 보십시오. 많은 가정들이 불행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공평한 거래를 원하십니까? 자, 보시빗오. 제가 당신에게 빚진 것보다 당신이 나에게 빚진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욤 키푸르 저녁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하기로 합시다.
지금 이 시간 당신과 나 사이에 평화를 누리십시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이 기이한 광경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서둘러 스승에게로 돌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모든 것을 스승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오만불손하고 건방진 양복점 주인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쇼크를 받고 놀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양족점 주인의 단순한 말 즉 '당신이 용서한다면 내가 당신을 용서하겠다'는 말을 하난미이 들으셨을 때 하나님이 웃으셨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말하기를 "제군들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가? 제군들은 왜 서로 서로를 정죄하는가? 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줄 모르는가? 양복점 주인은 흥정할 지언정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랍비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생각해 봅시다.
1. 첫째 이야기에서 랍비는 왜 격조 높은 어조로 말을 하였을까요?
2. 둘째 이야기에서 스승이 제자들을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두 이야기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야밈 노라임(두려워하는 날들) 동안 타인으로부터 구하는 용서
유대인들은 욤 키푸르에 서로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합니다. "만약 당신이 아직 금식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곧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금식을 하며 온전히 예배를 드리는 일과 토라를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에만 골몰하였다면 당신은 배고프고 갈증나고 피곤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깨끗한 상태로 일년을 시작하는 준비를 한 것에 대하여 기쁨과 평화를 소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금식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쇼파르(양뿔로 만든 나팔)가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하여 언제 쇼파르가 울리는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행위를 하는 것과 금식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느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쇼파르
이제 불과 몇분 후면 야밈 노라임은 끝날 것입니다. 욤 키푸르의 금식은 거의 끝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경건함과 선함 등 여러 가지 덕목으로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는 랍비가 있었는데 그는 또한 쇼파르를 잘 부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제 몇분 후면 명절이 끝나는 것을 알리기 위해 쇼파르를 잡고 그것을 불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쇼파르를 불 시간이 되었는데도 소리가 울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깊은 고뇌의 적막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만물이 잠든 듯한 짧은 순간의 고요가 있은 뒤 한 사람이 앞을 향하여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쇼파르가 소리를 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는 계속해서 "내가 예배를 드리러 오는 길에 가난한 과부가 그녀의 집 앞에서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아이들이 로쉬 하샤나로부터 지금까지 많이 아프고, 자신은 ㄱ뒤가 어두워서 야밈 노라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쇼파르릐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욤 키푸르가 끝나는 것을 알리는 쇼파르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 나의 자녀들과 함께 있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만을 생각하고 그 부탁을 거절하고 예배에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배에 참석한 회중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 당장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서 그녀의 아이들과 머무루겠소"라고 말하고는 그녀의 집을 향하여 떠나갔습니다. 그후 예배는 끝나고, 랍비는 쇼파르를 가지고 그 과부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을 위하여 명절이 끝나는 신호의 쇼파르를 불었습니다. 그때 랍비는 그에게 말하기를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할때, 다른 사람의 필요를 거절한다면 야밈 노라임 동안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랍비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무리 아무리 노력해도 지나치지 않소"라고 덧붙였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이 이야기는 야밈 노라임에 관하여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까?
2. 이 이야기에 의하면 기도자와 기도자의 행함과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까?
3.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설날에 유대인들이 행하는 아주 특이한 관습이 있습니다. 그들은 흐르는 냇가나 강으로 가서 타슈리흐(문자적인 뜻은 보내다, 버리다)의식을 행합니다. 이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을 흔들면서 주머니를 완전하게 비우며, 흐르는 물속에 빵 조각을 던집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죄를 흐르는 물속에 흘려 보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없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의미의 의식입니다.
창세기 18장 20절로 32절까지 자세히 읽어 보시면서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물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로마서 3장 10절)는 성경 구절이 생각날 것입니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9장 카바나(집중함)
카바나
열중함, 집중함
카바나는 '의지'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예배와 일에 집중하는 것을 제안하는 용어입니다.
카바나를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예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모든 순서와 행위, 특히 말씀과 기도문의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에 집중하는 예배입니다.
당신이 카바나를 가지고 하는 일에 대하여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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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카바나를 가지오 모든 일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특히 성경을 읽을 때 카바나를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일ㄹ고 기도를 하며, 찬송을 하며, 다른 이들에게 선을 베푸는 가운데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어 단어 카바나는 티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키분은 방향을 지적하는 단어로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설때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정확하게 방향이 정하여 있어야 됨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랍비들은 카바나를 가르치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예배 행위를 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되어 있느냐, 있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신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피아노 경연대회나 운동경기에 참가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이나 코치는 여러분에게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것을 준비하여 발표할때 정신 자세가 흐트러진다면 얻어지는 성과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실력만큼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잘하는 것과 탁월한 것과의 차이점을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연주자의 집중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바나는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삶과 다른 민족들의 삶에 진정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축복의 구문들이나 기도문을 묵상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인도하지 못합니다. 기도문이나 축복의 구문들을 암송하고 읽을 때 마음을 다하고, 단어 하나 하나의 진정한 의미에 카바나를 두어야 합니다. 유대교는 예배자에게 "행위의 예배"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는 예배"를 드릴 것을 언제나 요구합니다.
본 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에 카바나를 가지고 예배할 수 있으며, 어떤 마음의 의지를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는지를 곧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 장에서 알게 될 교훈
1. 카바나를 가진 예배는 의지와 정신을 차리고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기도하는 중에 카바나를 증가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알아 봅시다.
자신의 의지와 카바나(정신집중)를 결합하라
약 200여년 전 바알 쉠 토브(1700-1760)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한 사람에 의하여 하시딕 운동(은혜를 강조하는 부흥운둥)이 유대인들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알 쉠 토브는 "유대인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유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집중력의 조화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카바나가 필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하시딕(은혜주의자들)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는 카바나의 양면성을 중요하시며 강조합니다.
이제 다음 이야기를 읽으면서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시시 바랍니다.
1. 핵심을 잡을 수 없는 사상과 말들이 기도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2. 기도에 관한 하시딕의 이야기에는 왜 교육 받지 않은 유대인이 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까?
중언부언의 기도와 카바나(집중)를 가진 기도
베르딕 헤이브에 사는 유대인들이 어느날 아침 아미다 기도(예배 중에 드리는 기도)를 마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랍비 이삭이 예배자들에게 걸어와서 인사를 주고 받던 중 랍비가 하는 인사말에 에배에 참석한 예배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손님이나 또는 다른 도시로부터 와서 처음으로 회당 기도모임에 출석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인사말인 "당신들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배자들은 랍비에게 "랍비여, 우리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예배하였으며 오늘도 같은 방에서 예배하였는데 왜 우리에게 처음 온 사람에게 하는 인사말을 사용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나는 당신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당신들의 예배와 기도의 모습을 볼수 있었소. 당신들은 입으로 기도의 구문을 읽고 있었으나 마음은 하나님을 항하여 있지 않았소. 당신들의 마음은 기도와 수십리나 떨어져 있었소. 아마 유명한 백화점에 세일하는 것이나 오늘 저녁 있을 만찬장을 향하여 당신들의 마음과 생각이 있는 것을 보았소. 그래서 지금 나는 당신들이 그와 같은 긴 사업 여행으로부터 예배당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고 있엇던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랍비는 "나는 당신들이 기도할 때 카바나를 가진 기도, 즉 집중력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는 기도를 조금이라고 하기를 바라오"라고 덧붙였습니다.
카바나(줍중)의 중요한 부분인 '의지력' 또는 '의지'
랍비 이삭은 매년 로쉬 하샤나(유대인 설날)에 그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여기를 말하곤 합니다.
"옛날에 나는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방문할 기회가 한번 있엇습니다. 그날 나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아침기도에 참석하였지요. 그때 나를 실말시키는 일이 있었답니다.
기도모임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인이었습니다. 나의 귀에 들려오는 그들이 기도하는 소리가 어린이들이 속닥대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때로는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것 같았고 때로는 아주 나쁘게 발음되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상인들이 그들의 사업을 위하여 떠나기 전에 나는 그들에게 '구.구. 바.바'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기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인들은 놀라서 나를 마치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 관해서 설명한 후 '여러분은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 말햇어야 했소. 좀 부끄러워 할줄 아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상인 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히브리어를 정확하에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유대인을 놀리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오. 당신은 우리들이 기도할때 사용한 말을 어린아이의 말로 비교하였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오. 그러나 랍비여, 당신은 이것을 아시는지요? 어린 아이의 부모는 말도 안되는 자기 자식의 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요. 다른 어떤 사람도 그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어린아이릐 말로 기도할지라도 우리가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한다면, 어누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하버지 하나님은 완전하게 이해하신다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당신의 말이 옳소. 오늘 로쉬 하샤나에 당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란느 확신을 갖기를 바라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사랑과 카바나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사람위 귀에 그들의 말이 어떤 소리로 들릴지라도 하나님은 이해하십니다.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바라고'라고 말했지요"
생각해 봅시다.
1. 두편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타나는 카바나의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2. 카바나를 가지고 묵상기도를 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카바나(집중)를 가진 기도
기도할 때마다 카바나를 가진 기도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서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기 전에 이러한 방법을 여러분 스스로 먼저 생각해 보고 자신에게 '나는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을까?'를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연극, 음악, 운동과 카바나(집중)
기도에서 카바나를 향상시키는 방법은, 당신이 기도하고 있는 말을 당신 스스로가 먼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친숙한 것을 택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하는 기도라 다른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줄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랍비나 선생님이 추천한 말을 당신의 기도에 번역하여 상요하고, 다시 조심성 있게 당신의 말로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상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며 기도할 때 당신은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문을 히브리어와 당신의 모국어로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이 과정을 반복한다면 당신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기도 창고에 점점 더 많은 기도가 저장될 것입니다. 그때 계속되는 기도는 당신에게 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바로소 희생과 진실한 의미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 한 대로 삶 속에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당신 자신이 하는 기도를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음을 붙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배시 기도에 사용하는 음률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를 니군이라고 부르는데, 기도자의 성격과 취미에 따라 다양한 음률을 붙이기도 합니다. 가장 평범하며 일반적으로 들려지는 음률이 누싸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누싸흐로 음률을 붙여야 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니군(임률)을 만들어 기도에 붙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만물의 니군(임률)레 기도말을 붙여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기도에서 카바나를 이루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적인 방법은, 기도하는 동안 제스쳐를 취하는 것입니다. 가령 욤 키푸르에 드리는 고백기도인 아샤므누를 하는 동안 몇몇 사람이 그들의 가슴을 그들의 주먹으로 두드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하여 기도자는 말 뿐만이 아니라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몸부림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기도할때 메스쳐를 통하여 그들이 말로 고백하는 기도의 내용을 갖오하며 카바나를 가진 기도를 욤 키푸르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 기도하든지 카바나를 할 수 있다면 그렇게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슈마를 기도하는 시간에는 손으로 눈을 가리우든지, 눈을 꼭 감든지 합니다. 왜냐하면 슈마를 낭독하는 동안 기도의 의미에 완전하게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사상과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슈마나 욤 키푸르의 기도 뿐만 아니라 예배의 가장 중신을 이루는 기도인 아미다를 낭독할 때도 카바나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하여 특별한 제스쳐를 하기도 합니다. 아주 특이한 것은 아미다를 시작하면서 세번의 뒷걸음질을 하는데 이는 기도 시간을 통하여 날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미다를 시작할때 첫째 구절의 축복 구문을 낭독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이것은 신하가 왕의 옥좌가 있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발걸음을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나, 머리를 숙이는 것이나, 눈을 가리오는 것 들의 제스쳐가 기도를 더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적인 기도 구문의 낭송이나 낭독, 기계적으로 하는 제스쳐가 특별하게 카바나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할 떄 카바나를 증진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고 유대인들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기도를 하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 귀중하게 보여진다고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1. 기도에 음률을 붙여서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자신을 기도에 더 집중하게 합니까?
2. 기도할 때 무엇이 당신의 사상과 마음을 흐트러지게 합니까? 어떻게 하면 흐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3. 어떻게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까?
4.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노력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어떤 랍비의 가르침
기도는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라면 기도를 시작하지 마시오.
기도를 시작하지 전에 당신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십시오.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방법은 카바나(집중)를 가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10장 미다트 하딘 미다트
미다트 하딘 미다트 하라하밈
공의와 은혜, 사랑
미다트 하딘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를 맣랄 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던어이며, 미다트 하라하밈은 '은혜'를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필료오 합니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어서 유리잔에 따르면 잔이 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는 전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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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원칙과 사랑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모든 부모님들의 걱정이다.
어떤 가정의 아이가 시계를 부러뜨렸습니다.
어머니가 이 아이에게 원리와 사랑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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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엘ㄹ호힘으로, 2장에서는 아도나이 엘로힘(여호와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토라에 사용된 모든 히브리어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랍비들은 하나님의 각각의 호칭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고 다르게 번역하기를 즐깁니다.
그 랍비들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의 속성을, 다시 말해서 미다트 하딘(공의)을 나타낸다고 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심판자로 나타내실 때 사용하시는 호칭이며, 아도나이 엘로힘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미다트 하라하밈(은혜) 즉 은혜의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쓰여졌다고 합니다.
본 장에서는 먼저 창조기사를 포함하고 있는 토라에서 하나님의 칭호를 각각 다르게 사용한 것에 대하여 랍비들이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미다트 하딘(공의)과 미다트 하라하밈(은혜)의 조화를 이루는 것에 관한 랍비들의 믿음을, 셋째는 하나님의 미다트 하라하밈(은혜)에 의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미다트 하라하밈(은혜)를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장에서 얻게 될 교훈
1. 하나님의 미다트 하라하밈(은혜)과 미다트 하딘(공의)은 세상이 존재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2. 랍비들은 미다트 하딘(공의)보다 미다트 하라하밈(은혜)을 강조하였습니다.
3. 랍비들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미다트 하라하밈(은혜)을 베풀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세상과 미다트 하딘(공의)과 미다트 하라하밈(은혜)의 관계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즉, 부모님이 자신들의 행위를 강요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자녀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교육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걱정합니다. 부모 자신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자신에게 행했던 '꾸중'과 '사랑' 두 가지가 필요한데, 어떻게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미다트 하라하밈과 미다트 하딘이 어떻게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미드라쉬를 읽으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빈 유리잔
랍비들은 세상을 빈 유리잔에 비유하여 말하고는 합니다. 랍비즐은 "토라 창세기2장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왜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말하고 있습니까?"라고 묻곤 합니다. 랍비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왜 토라는 하나님의 호칭을 아도나이(여호와)와 엘로힘(하나님) 두가지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은 두가지 본질(속성)을 가지신다, 다시 말해서 미다트 하라하밈(은혜)과 미다트 하딘(공의)의 두가지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랍비들이 비유로 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빈 유리잔 이야기지요.
"빈 유리잔을 가진 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끄릏는 물을 그 유리잔에 부으니 잔이 깨어졌다. 왕은 다시 아주 차가운 물을 유리잔에 부었더니 또 잔이 깨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끓는 물과 얼음물을 섞어서 유리잔에 부어 보았더니 잔이 깨지지 않았다"
랍비들은 이와 같은 의미로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덴느 두가지 속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라하밈(은혜)의 기초 위에서만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사람들이 죄 짓는 행위를 그만 둘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죽이고 하다가 결국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파괴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속성인 엄격한 하딘(공의)의 기초 위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신다면,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심각하게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 남아있을 인간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미다트 하딘과 미다트 하라하밈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규칙을 주셨고, 규칙에 어긋난는 잘못을 했을 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두가지 이름이 사용된 것에 대하여 랍비들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2. 왕의 이야기를 통하여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떻게 교육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미다트 하라하밈(은혜)
탈무드에 등장하는 랍비들은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미다트 하라하밈을 미다트 하딘보다 우위에 두시는 속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탈무드의 한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기도하시고 계시는 것처럼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미다트 하라하밈이 나의 진노를 정복하는 것은 나의 뜻이 되게 하고, 나의 미다트 하딘이 나의 모든 다른 속성을 억제하게 하면서 엄격한 미다트 하딘을 가지고 창조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미다츠 하라하밈을 가지고 창조물을 보존하도록 하는 것이 나의 뜻이 되게 하라"는 구절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랍비들은 왜 하나님께서 미다트 하라하밈을 강조하였는지 스스로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미다트 하딘(공의)
탈무드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본질상 악하다고 하기보다 선하다고 하는 데 훨씬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 명의 천사들이 모여 사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중 999명의 천사가 선으로 평가하고 한 천사가 억으로 평가를 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미다트 하라하밈을 보이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999명의 천사가 한 사람을 악하다고 평가하고 한 천사만이 그 사람을 선하다고 평가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도 미다트 하라하밈을 보이실 것이라고 탈무드는 가르칩니다. 어쩔수 없이 미다트 하딘을 나타내셔야 할 때도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지 못하십니다.
때때로 부모가 자녀를 벌할 때 "이 벌이 너를 아프게 하는 것보다 나를 더 아프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미다트 하딘을 나타내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프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미다트 하딘을 나타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떄의 상황을 탈무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미다트 하라하밈으 나타내실 때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나타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물 속을 마른 땅같이 건넜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애굽 군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쫓기 위해 홍해에 들어가자 물이 다시 하나가 되었으며 결국 모든 애굽 군인들이 수장되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들이 노래하는 것을 금하시면서 "나의 창조물이 바다 속에 익사되었다. 천사들이여 어떻게 나에게 찬양을 돌릴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있는가?
코레초의 핀하스 샤피로(1726-1791)라는 랍비가 동유럽에 살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의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하나님은 미다트 하라하밈을 미다트 하딘보다 더 좋아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랍비 샤피로는 "만약 사림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ㄴ 하나님이 미다트 하라하밈을 사용하실 경우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들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속성인 미다트 하딘을 나타내실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억측같은 말을 하면서 하난미의 미다트 하라하밈을 강조해서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의 속성인 미다트 하딘을 나타내셔야 할때 하나님은 슬퍼하신다는 랍비들의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2.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은혜 미다트 하라하밈과 공의 미다트 하딘을 조화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모델로서 미다트 하라하밈(은혜)
탈무드의 랍비들은 행위에 대하여 사람들을 가르칠 때 하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미다트 하라하밈에 의해서 표현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랍비들과 미다트 하라하밈에 관한 다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은혜로운'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진 '랍비 레위 이삭 머시풀'
베드릭 헤이브의 유명한 백작 레위 이삭의 성은 머시풀(은혜로운)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호적을 올릴 때 그러한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정부의 호적등록 담당자로 하여금 랍비 레위 이삭의 이름에 그런 이름을 덧붙이게 하였을까요?
한 왕이 그의 국민들에게 각각 자신의 이름과 성을 공식적으로 등록하도록 하는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인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베르딕 헤이브의 정부 관리가 새로운 법대로 호족 초본을 만들기 위하여 집집마다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관리가 랍비 레위 이삭의 집에 와서 그의 공식적인 요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랍비는 그 요구를 무시한 채 관리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머시풀인 것처럼 사람도 머시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관리는 랍비 레위 이사그이 말 중 단지 마지막 부분인 머시풀만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공적인 문세에 '랍비 레위 이삭 머시플'이라고 써넣었습니다. 그때부터 랍비 레위 이삭은 성이 머시풀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랍비 레위 이삭이 진정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2.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사람들이 동물들을 잘 보호하고 관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다트 하라하밈을 배우는 방법이랍니다.
성경 여러 부분에서 동물들을 잔인하게 다루지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랍비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여러분이 입고 있는 값비싼 가죽잠바나 신발 또는 여러분이 즐겨먹는 음식은 동물들이 그들의 생명을 희생하였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동물들을 잔인하게 다루지 말 것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11장 마쉬 아흐(메시야)
마쉬 아흐
메시야
마쉬아흐는 '메시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단어 마쉬아흐는 문자적으로 '기름부어진 어떤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며, '거룩한 기름을 가지고 기름붓다'는 뜻을 가진 동사 마샤흐와 관련있는 단어입니다.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마쉬아흐의 사상을 소망있는 미래에 올 평화의 시대와 관련지어 연구합니다.
또한 유대인 전통은 시대의 끝은 반드시 온다고 믿으며 그 날을 기대합니다. 그때 마쉬아흐는 평화와 완전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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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는 미래에 대하여 동경과 소망을 가지는데 어떤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삶과 관계되는 것이며, 어떤 것은 세계의 미래와 관계되어지는 것들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기분이 안좋고 무엇인가 잘 안풀릴 떄도 미래에는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며 그것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는 미래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안식일과 관련지어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토요일 저녁에 안식일이 끝나는 표시로 지키는 예식인 하브달라를 거행합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불을 켜는데 사용하는 초, 숯, 그리고 아름다운 양념통 등 이러한 모든 것이 하브달라(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의 이름)의 예식에서 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또는 예식의 끝에 그들은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아후와 관련된 노래를 부릅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엘리아후 선지자가 미래의 시대에 관하여 말하기를 '마쉬아흐(메시야)가 올 것이며 그떄 모든 시계는 평화와 민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고 전하여 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평화의 미래와 만족한 미래가 어떠한 것인지를 안식일에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 장에서는 유대인이 말하는 마쉬아흐(메시야)의 도래 시기를 살피게 될 것이며, 마쉬아흐가 도래할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 장에서 알게 될 교훈
1.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마쉬아흐가 도래하면 평화아 만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2. 모든 사람을 향하여 선을 베풀때 마쉬아흐의 날이 속히 오도록 하는 일을 도울 수 있습니다.
마쉬아흐(메시야)의 날
마쉬아흐가 온다는 믿음이 고통 당하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메시야의 ㄷ래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마쉬아흐의 날을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소망에 관한 다음 이야기를 읽으명서 생각해 볼 것은,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마쉬아흐의 날에 모든 사람을 위한 그드르이 사람의 환경과 정황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의 시간
유대인의 전통은 두가지의 황금시기를 가지고 삶을 구축하는데, 그중 하나의 황금시기는 시간의 시작에 있었던 에덴동산의 시대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의 끝에 나타날 마수ㅏㅣ아흐의 시대입니다.
이 두시대의 중간에서 이 지상의 모든 인생의 삶은 전개되어 왔고 전개되어 가고 있습니다. 전통에 의하면 메시야의 시대는 평화로운 시대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조화있게 연합하여 살 것이고, 모든 사람이 형제 자매라는 것을 사람들이 서로 서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크게 성공했다'는 말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성취한 일에 대하여 부모님께 설명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부모님은 마침내 여러분을 이해하게 될떄 여러분이 이룬 작은 성취감은 큰 만족감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날에, 세상에서늬 큰 성공이나 업적이나 명예나 권력이 없었을 지라도 자신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반겨주시는 메시야를 만나게 될때 큰 성취감과 아울러 만족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부모와 자식, 이웃과 이웃, 원수와 자신 모두는 서로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의 날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자연계도 완전히 새롭고 평화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사나운 짐승이 연약한 짐승을 먹이로 삼는 본능의 삶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것과 같이 늑대가 양과 함께 살 것이며, 사자가 염소와 함께 누울 것입니다. 사람들과 동물들이 함께 생활하며 서로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배고픔은 과거지사로 돌아갈 것이요 모두가 만족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자유를 억압받지 않으며 공평하고 만족스러운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빵과 땅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전쟁이나 정복이나 점령이나 투쟁이 없을 것이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그들 자신을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통치자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메시야의 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평화와 만족이 있는 미래 세계를 믿는 믿음이 유대인들에게서 결코 소망을 빼앗아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현세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울 지라도 반드시 좋은 세상으로 바뀌어질 것이며, 미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현재보다 훨씬 더 좋은 세계가 된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언제나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말은 "만사가 잘 풀려지지 않든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을 더 좋게 만드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현재의 삶과 메시야가 온 이후의 삶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2. 메시야의 시대에 관한 유대교 사상은 낙천주의적 사상입니까? 아닙니까?
3. 메시야 도래 이후의 세상에 관하여 상상해 보십시오.
마쉬아흐(메시야)를 기다림
탈무드 시대의 랍비들은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메시야 시대에 관하여 연구하였는데, 하나의 문장에서 마쉬아흐의 도래에 관하여 두가지 다른 사상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여진다고 말합니다.
첫째, 마쉬아흐는 정하여진 시간에 올 것이라는 사상과
둘째, 하나님께서는 마쉬아흐의 도래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고 랍비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마쉬아흐의 도래 시기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그들은 왜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3세기경에 살았던 레위인 랍비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올바른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메시야의 도래 시기를 앞당길 것이고, 사람들이 올바른 삶을 영워하지 않는다면 마쉬아흐는 정하여진 시간에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일에 대하여 계속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설명을 읽어보면서 마쉬아흐가 언제 올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쉬아흐(메시야)의 도래는 준비되어 있습니까?
유대인의 전설 속에 나오는 한 이야기에 보면 랍비 여호수아가 선지자 엘리아후를 만났다고 합니다. 랍비는 엘리아후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일이 마쉬아흐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선지자에게 "마쉬아흐는 언제 오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는 "왜 나에게 그것을 묻느냐? 마쉬아흐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랍비 여호수아가 "내가 어디에서 마쉬아흐를 만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으며 선지자는 "도시의 성문에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랍비 여호수아는 도시의 성문으로 갔으며, 그곳에 앉아 계시는 마쉬아후를 만났습니다.
랍비는 "나의 주인이시여, 나의 선생님이시여, 당신은 언제 오실 것입니까?"라고 묻자 마쉬아흐는 "오늘"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랍비는 집으로 돌아와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날이 저물고 그날이 다 지나가는데고 메시야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떄 랍비 여호수아의 심경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보십시오.
실망한 랍비는 다시 선지자 엘리아후를 찾아가서 "마쉬아흐가 내게 거짓말을 하였소. 마쉬아흐는 나에게 오늘 온다고 말하였는데 결국 오지 않았소"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아후가 랍비에게 그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마쉬아흐는 시편의 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이오. 시편에 '오늘 네가 나의 목소리를 듣거든'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 중에 나오는 '오늘'을 말씀하신 것이오. 즉 마쉬아흐가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마쉬아흐를 기다리면서 앉아있지만 말고,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오"
생각해 봅시다.
1. 탈무드에 의하면 무엇이 마쉬아흐가 오는 시기를 앞당기도록 할 수 있습니까?
2. 전설에 나타나는 이야기에서 마쉬아흐가 말한 오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유대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제12장 느샤마(혼, 정신)
느샤마는 '혼' 또는 '정신'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느샤마는 '호흡하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나샴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입니다.
토라 가운데 첫번째 책 창세기에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니슈마트 하임, 즉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시기 전까지 인간 존재는 먼지에 불과합니다. 니슈마트 하임이 인간 존재의 코에 불어 넣어졌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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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샤바트(안식일)가 끝나는 시간에 특별한 느샤마(혼, 정신)가 떠나게 되므로 사람들은 공허한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 공허한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하브달라(안식일의 끝을 알리는 예식)의 특별한 묘미라고 합니다.
또한 그들의 전설에 따르면 안식일 전야에 특별한 느샤마(혼)가 그들에게 찾아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느샤마(혼)는 안식일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이 일상적인 일을 뒤로 밀어 젖히고 안식일의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날 때는 이 특별한 느샤마(혼) 역시 그들로부터 떠나간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풍습 중 하나인 '하브달라' 즉 특별한 향기를 내는 상자 주위를 도는 의식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안식일이 끝남과 동시에 안식일 느샤마도 떠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마음의 공허를 느끼게 됩니다. 이때 매일 매일 임하는 느샤마(혼, 정신)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공허를 채워준다는 의미로 행하는 의식입니다.
본 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느샤마(혼, 정신)에 관하여 많은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육체와 느샤마)혼, 정신)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 보고자 하며, 그들은 왜 인간이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육과 느샤마가 협력자가 되었다고 말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 장에서 생각할 교훈
1. 육체와 느샤마(혼, 정신)는 동등한 협력자입니까?
2. 사람들이 느샤마를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켜야 합니다.
평등한 협력자 느샤마(혼)와 육체
여러분이 어떤 운동경기 종목을 훈련받고 있거나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동료들이 모두 초콜렛 캔디를 먹을 때 당신은 자신과 투쟁을 해야 합니다.
"나도 캔디를 먹을 것인가? 끝까지 참을 것인가?"
여러분은 "나의 느샤마는 내가 다이어트 하는 것을 원하는데 나의 육체는 협력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전통은 이와 같은 방법은 느샤마와 육체가 서로 반대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제 다음 미드라쉬를 읽은 후 질문에 답하기를 바랍니다.
미드라쉬에서 느샤마와 육체가 서로 책임을 나눈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 과연 옳은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랍비 예후다 하나시(약 2세기경)를 찾아왔습니다.
"랍비여, 사람이 죽은 후에 왜 자신이 죽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육체와 느샤마가 서로를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육체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는 것은 전적으로 느샤마의 잘못이다. 사람이 죽던 날 나는 돌과 같이 무덤 속에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그가 나를 떠났다'고 하였다.
그러자 느샤마가 자기를 변호하면서 말하기를 '분명 육체가 잘못이다. 왜냐하면 내가 육체를 떠나던 날 나는 공중에서 결백한 새들처럼 날아 다니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랍비 예후다 하나시는 그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옛날에 굉장히 큰 과수원을 소유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에 달려있는 과일들을 지키기 위하여 과원지기 두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소경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절름발이였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앉아있던 과원지기들은 배가 고팠어요. 그때 절름발이 과원지기가 나무들 위에 달려있는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을 바라보며 동료인 소경 과원지기에게 '불행하게도 나는 열매가 있는 나무까지 걸어갈 수가 없소. 그래서 나는 과일을 딸 수 있는 방법이 없구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경 과원지기는 '만약 내가 과일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 두 사람을 위하여 과일을 딸 수 있을 텐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공모하여 음모를 꾸몄어요. 소경 과원지기는 자신의 어깨 위에 절름발이 과원지기를 목마 태웠지요. 그리고는 그가 방향을 지시하는 대로 과일 나무를 향하여 걸어갔으며, 어깨 위에 앉아있는 절름발이 과원지기는 어느 정도의 과일을 땄고, 둘은 그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며칠 후 왕이 과수원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목들 중 이상하게 한 나무에는 열매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과원지기들에게 '저기 있는 나무에는 왜 열매가 거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과원지기는 자기들의 결백을 주장하였습니다. 절름발이 과원지기는 '주인이시여, 아시다시피 보시다시피 저는 그 나무까지 걸어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으며 소경인 과원지기도 '주인이시여, 당신이 지시하여 말씀하시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저는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일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절름발이 과원지기와 소경인 과원지기가 서로 서로 어떻게 협력하면서 나무의 열매를 땄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들을 함께 재판하고 정죄하였습니다"
랍비 예후다 하나시는 "나의 친구여,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와 느샤마(혼, 정신)를 합쳐서 온전한 하나로 간주하십니다. 두 부분은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좋고 나쁜 일에 대하여 동등한 책임을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사람들이 행하는 일에 대하여 육과 느샤마(혼,정신) 중 어느 편이 책임을 져야 합니까?
2.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느샤마(혼, 정신)
한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와서 자기는 랍비가 될 준비가 다 되었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랍비는 어떤 자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어떤 점이 네가 랍비가 될 수 있도록 만든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나는 나와 육체의 행위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침대가 아닌 땅 위에서 매일 밤 단 2-3시간 잠을 자며, 음식으로는 단지 야채만 먹습니다. 그리고 매일 세 번씩 자신을 호되게 훈련시켜 왔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조금도 감동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젊은이, 랍비가 먹고 잠자는데 사용하는 시간은 낭비가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사람들 속에 있는 느샤마(혼, 정신)는 먹는 것을 통하여 새롭게 힘을 얻고, 잠자는 것을 통하여 쉼을 얻는다네. 자네의 육체가 건강하게 보존됨으로써 자네의 느샤마(혼, 정신)가 하나님을 향하여 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바라네. 그리고 젊은이, 이 시간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자네는 원숭이가 되기에는 적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나 랍비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은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하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학생은 놀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왜 선생님은 학생에게 랍비가 되는 것보다 원숭이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을까요?
2. 느샤마(혼, 정신)와 육체와의 관계에 대하여 깊이 고려해 보십시오.
과연 느샤마(혼, 정신)가 바라는 것과 육체가 바라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