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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991026_일밥초대법회_초청 설법_월산 김일상교무님설법.hwp
● 원기99년 10월 26일 일요일 ‘일반 가족인연 초대법회’ 초청 설법
● 주제 : 향기로운 인연
● 월산 김일상 교무님 설법
● 타이핑 : 일반 6단 김대현, 일반 7단 박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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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서울에 오니 남의 집 같지 않습니다. 제 교역생활 중 15년을 서울에서 지냈기 때문에 서울이 저를 키워주었고, 서울이 제 체질에 좀 맞습니다. ^^
사고 성향이 시골이 편안할 수도 있고, 도시가 편안할 수도 있는데 저는 성격 상 푸짐하지 못하다 보니 조금 까칠한 부분이 있어(^^) 서울이 더 맞는 거 같습니다.
오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게 주어진 주제는 여러분 초대장에 쓰여진 그대로, 10월의 향기로운 인연을 위해서...
교무님이 저에게 인연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주문이셨던 것 같습니다.
혹시 원불교를 오래 다니신 어른들은 기억을 하시겠습니다만, 오늘 처음 오신 분들에게는 첫 이야기가 되겠죠.
원불교 중앙 총부는 익산에 있습니다. 원불교 역사로 20년에 대각전이라는 건물을 짓습니다. 공동체가 출발하고 10여년 지난 뒤에, 대각전이라는 그 당시 굉장히 큰 건물이었습니다. 지금은 문화재로 등록되는 형태인데요. 그 건물 앞에 또 조그만한 집이 있습니다. 거기에 성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70세에 출가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교단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일인데. 이 어른이 독립운동을 하셨고, 교육자이셨기 때문에, 또 교단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으셨기 때문에 교단에서 받아들이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 분이 미산 오미산 선진님입니다. 이분이 성불당이란 곳에 주거를 하셨습니다. 참고로 말씀 올리면, 이분의 자녀 두 분은 교당 회장을 하는 등 가족도 모두 공적인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미산님은 늦게 출가 한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정말 열심히, 수행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원불교 교전을 쭉 보시면서 대종경 교의품에 나오는 그 실상사 실지불공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변산 실상사 옆 봉래정사에 머무르셨을 때, 여름철에 노인 부부가 며느리가 불효한다고 해서 불공을 하러 실상사로 가는데, 가기 전에 대종사님을 만나죠. 그러니 ‘왜 가느냐’ 하니 ‘며느리가 불효하니 부처님께 불공하면 효도를 할 까 싶어 불공을 하러갑니다.’ 라고 하니, 대종사님께서 왜 산부처를 놔두고, 등신불에게 불공을 하려 하느냐. 그러니 노인 분들은 처음 듣던 얘기죠. 산부처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살아있는 부처가 어디 계시냐고, ‘아니, 당신 며느리가 살아있는 부처 아닙니까’ 하고 그 이야기를 다 설명을 해서, 불공을 가던 것을 돌아가서 며느리에게 불공을 하기 시작해요. 그런 것을 보고 실지불공이라 합니다. 불공을 해서 나중에 3개월 만에 며느리가 완전히 바뀌어서 효부가 되죠. 그것을 나중에 대종사께 와서 보고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산 오미산 선진님이 성불당에 계시면서 경전을 읽다보니 아차! 하고 놓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미산 선생님의 큰 아드님이 대한약사회 회장을 할 만큼 신망 있었는데, 어느 날 결혼 정년기가 돼서 한 여자를 데려왔는데, 무조건 이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 하니 아버지의 유교사상이 깊었던 이 분이 이게 절차상 별로 아름답지 않고, 마음이 딱 곧았던 분이기 때문에 머리를 저으셨겠죠. 그런데도 아들은 그냥 밀어붙이고 가버렸습니다. 그 뒤로부터 며느리를 안봤습니다. 그리고 출가를 하신 거예요.
그런데 대종경 실지불공을 보는 순간에 이 분이 ‘아 내가 헛살았구나. 진리공부를 헛 것 했구나.’ 하는 마음이 딱 나면서 대종경 덮고 익산에서 서울로 올라 온 겁니다. 미산님이 떴다 하면 집안이 모두 긴장 속에 몰아드는데, 아들이 긴장을 하고 집에 갔는데...
집에서 아버지가 며느리를 들어오게 합니다. 처음 있는 일이긴 한데, 아무튼 며느리를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니 아들이 너무 긴장되니 같이 따라 들어가려하니 너는 들어오지마라, 그러니 더 긴장되죠. 문 닫고 아랫목에는 미산선생님이 앉아 계시고, 윗목에는 며느리가 앉게 됐죠. 아들은 문닫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고 심경이 불안하고, 안에서 아내 울음소리가 나서 더는 못 기다리다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떤 현상이 벌어졌느냐. 문을 닫을 때에는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아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며느리가 아랫목에 앉아있고, 시아버지가 윗목에서 아까 우리가 사배하듯이 절을 하고서 내가 잘못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며느리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겠죠. 그래서 집안 분위기가 다 달라지게 된 겁니다.
모든 향기로운 인연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묻는다면, 불공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불공을 하지 않고서는 인연을 내 인연으로 만들기가 어려운 겁니다.
불공에서 염두 해 둘 것은, 불공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게 됩니다. 사물이 됐든, 사람이 됐든...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획일적으로 보셔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어둡거나 그 사람의 특징이 51:49. 형태를 띄우는 것 뿐이지, 두 가지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게 진리입니다. 그것을 처음부터 인정을 못하면 불공을 못합니다. 그러니 모든 대상은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 대상을 향해서, 불공이라는 것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표현하는 것에서는 이성과 감성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각과 감정을 다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각만 전하거나, 감정만 전합니다. 제가 이 설명은 오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주로 생각형이고, 여자는 주로 느낌형입니다.
한 예만 얼른 들어볼게요. 여자가 남편에게 쌓인 게 많으면, 그냥 뭉뚱그려 감정만 전달합니다. 남편이 저녁 먹고 티비를 보고 있으면, 의도적으로 남편 앞으로 지나가면서 ‘발 치워!’ 하면서 발을 툭 치고 지나갑니다. 남편은 알아듣기를 발 치우라는 소리구나 하고 얼른 피해주고 그게 끝났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안풀리죠. 하지만 여자는 하나의 행동을 했지만 그 속에는 왜 티비만 보고 나랑 이야기도 안해주느냐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불공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불공은 그런 속성을 알아서 접근을 해야 변화가 옵니다.
그러니 대종사님도 실지로 며느리에게 불공하라 할 때 ‘며느리가 좋아하는 게 뭐냐’, ‘꽃고무신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불공비용 가지고 꽃고무신을 한번 사다봐 줘라’ 아무튼 여러 가지 방법을 마음에 맞게 해 주지요. 성인들은 그 속성을 알아서 딱 맞추기 때문에 한 번에 끝나죠. 하지만 중생은 속성을 모르기 때문에 이 방법, 저 방법 써봐도 잘 안돼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가 진리공부를 해야 하고 마음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향기로운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할 때 제가 생각했을 때는 바로 불공을 잘 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거고요.
또 하나, 향기로운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늘 참회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내 마음을 참회하지 않고서는 불공이 잘 안됩니다. 그 말은,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잘한 것은 네 덕인 거예요. 모든 것은 내가 잘 했고, 잘못한 것은 다 네가 한거다. 마음보자기가 그렇게 생겼으면 원리적으로 안되게 되어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하면 참회하는 마음이다. 교회에서 예기하는 회개라고 얘기하는 거죠. 종교는 같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거지 내용이 다른 것은 없어요.
불경을 보면 부처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여자가 부처님께 찾아와서 잘 살아갈 법문을 해주세요 합니다. 누구든지 다 그렇게 하죠. 저도 이 생활을 해서 그런지, 어디 가면 ‘인생에 보감될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하면, 저는 얼른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네 마음 그릇이 얼마냐 되느냐’ 묻고 싶습니다. 그릇은 조그마한 종지 같으면서 인생 전부를 담을 수 있는 그 말씀을 해달라 하면 쏟아 부어줘도... 이 컵에 주전자 물을 담으면 얼마나 담아질까요. 주전자 물이 다 담길까요? 그러면서도 탓은 주전자를 하는 것이 중생들입니다. 그러니 알아도 아는 것을 다 얘기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깨달은 사람은 그 수준에 딱 맞게 해주는 겁니다. 8부 정도만 담아주고, 나머지 2부를 안 담아줘야 ‘아!’ 내가 받았다고 느끼지 넘치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러한 겁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너무 넘치게 해버리면 모릅니다. 조금 부족한 듯 99%를 해줘야 ‘아! 나한테 잘해줬구나!’ 그래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볼 줄 모르면 행복한 가정 못 만듭니다.
그래서 두 여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 안하시고, 네 살아온 얘기나 들어보자 합니다. 먼저 입을 연 여자가, 지난 날을 다 생각해 보니 너무 잘못한 것이 많아서 드릴 말씀이 없다 할 정도로 얘기하면서 울고 얘기하면서 울고 통곡을 하면서 그랬습니다. 나머지 한 여자는 저는 살아온 것이 별로 죄 지은 것도 없고, 남한테 못한 일도 없고, 별로 이 여자처럼 울고 불고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끝나고 부처님 법어가 나올 줄 알았더니 나오지 않고, 저 정원에 가서 돌을 가져오느라 합니다. 죄가 많은 여자에게는 큰 돌을, 죄를 별로 지은 일이 없다는 여자에게는 공기놀이 할 정도의 작은 돌 20개를 주워오라 합니다. 죄를 안 지은 여인은 가볍게 20개를 주워오고, 죄졌다는 여인은 힘들게 큰 돌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가져 오면 설법을 할 줄 알았는데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라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무겁게 가져온 여인은 그대로 제자리에 갖다놓습니다. 그런데 20개 조각돌 주워온 여자는 이것을 도대체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도 못 두고 그대로 주저앉은 거죠. 이제 부처님이 설법을 할 것도 말 것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는 부부도, 부모자녀관계도, 친구 관계도 그렇고 내 주변의 모든 인연에 대해서 그렇게들 삽니다. 그게 뭐냐면 자기가 한 것은 모르고 상대방만 라이트 비춰서 보고 있는 겁니다. 사람 사는 게 뭔지 아십니까. 제가 살면서, 이 공부를 하면서 삶을 나름대로 연구하니 삶은 죄입니다. 죄 짓는 삶이 반절입니다. 나머지는 복 짓는 거겠죠. 그런데 그게 진리를 모르고 도덕적이지 못하면, 50%에 추가가 되어 죄가 더 많은 인생이냐, 아니냐 결론이 납니다.
왜 삶을 죄냐, 묻는 다면 제가 할 말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밥을 먹고 살지요? 밥 안 먹고 빵 먹고 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
먹고 산다는 것이 사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자연계에서 생태고리라는 것은 내가 너를 먹어야 사는 거잖아요. 그것을 안좋게 얘기하면 양육강식이라고 얘기합니다. 또는 적자생존이라 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표현이 부정적인 것이고 그냥 자연의 원리가 죽여야 살아요. 또 죽여야 산다는 얘기는 50:50 얘기입니다. 아름다운 삶의 얘기도 죽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런 것은 깊게 공부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 어떻든 아침에 쌀, 반찬, 고깃국, 생선 먹었죠. 다 이게 남의 생명을 내가 살려고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죄 지은게 없다. 뒤의 여인처럼 죄 지은 일이 없어서 참회할 게 없습니다. 그러니 죄 지은 줄도 모르니 돌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할 줄 알아야 그래야 불공이 된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자기는 다 희생만 하고 봉사한 것 같아도 알게 모르게 준 상처, 없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늘 서로 얘기하면서 치유하면서 살아야 가정도 행복하고 인연이 원만해 지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마음 하나, 진심을 가지고 있다고 인연이 좋아진다는 꿈꾸지 마세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참회의 극치는 무엇이냐. 참회를 잘 하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한 말씀으로 이야기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시방에 충만하게 했을 때. 그게 참회했다는 겁니다. 참회를 내 잘못 뉘우치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내가 참회하는 마음이 우주와 하나가 되어서 내 모습이 감사로 충만하고, 모든 사람이 나를 볼 때 아! 하고 탄성을 지를 수 있을 때 이게 참회입니다.
저는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향기로운 인연은 불공과 참회로 만들어 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선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허리 풀러놓고 이야기 하자 했습니다. 이론만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 제가 불공과 참회로 인연이 만들어 진다고 말씀 드렸을까요? 그 이유를 봐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2557년 전에 지금의 네팔에서 탄생하셨어요. 29세에 출가를 해서 35세에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45년간 설법을 하고 8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설이 하도 오래된 분이라 설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 진리를 깨닫고 진리 원체를 말씀하셨다 합니다. 화엄세계를 얘기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듣는 거죠. 그래서 바꿔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게 아함경이라는 것인데, 그 아함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차유고 피유(此有故 彼有) 차기고 피기(此起故 彼起)
이 말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는 고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움직이면 저것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자연의 진리다. 그 인연의 설파를 하게 되는 것이죠. 바꿔 생각해 보면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주의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적 법칙, 우주적인 법칙을 이 간단한 말로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2003년이 되는 해, 서기로 말하면 1916년에 대한민국 영광에서 소태산 대종사께서 진리를 깨달으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해 말씀하시기를 ‘없어서는 살 수 없다’ 우리의 관계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다, 하고 은혜로 풀이해 주셨습니다. 2500년 전 부처님은 그때 당시 진리를 인연이란 것으로 풀어줬고, 저희 대종사님은 2500년이 지난 오늘 날 은혜라고 그것을 풀어주셨는데... 내용인 즉 같아요. 팔만장경 속에 나오는 얘기나, 대종사님이 깨달은 교전 속에 내용은 딱 한마디입니다. ‘불생불멸 인과보응’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불생불멸 인과보응 되는 것이다. 그것이 딱 일치를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은 네팔이고, 시대적으로 보면 3천년. 대종사님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영광이라는 곳에서 이 시대에 태어났는데 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함께 나온 이야기는 불생불멸 인과보응. 즉 인연과 은혜라는 말로 그렇게 표현이 되어졌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진리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또 하나로 존재한다. 아마 원불교 교도님들은 원불교에서 들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 그 중에 하나가 ‘진리는 하나’죠. 교회 진리가 됐든, 원불교 진리가 됐든, 우주의 진리는 하나지 둘은 아니다. 그런 원리가 여기에서 증명이 된 거죠.
그렇다면, 우주의 법칙인 인연 또는 인과의 속성이 무엇이냐, 진리의 속성이 무엇이냐.
이걸 아셔야 합니다. 한번 맺은 인연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이거 기억 잘 해두셔야 관계가 좋아집니다. 한 번 보고 끝내려고 생각하면, 종로 네거리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처럼 생각하면 그 사람의 삶의 자세는 올바르지 않은 자세다.
저희 원불교 대종경 인과품 11장에는 부부싸움을 한 교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 11장
한 교도가 부부간에 불화하여 내생에는 또 다시 인연 있는 사이가 되지 아니하리라 하며 늘 그 남편을 미워하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그 남편과 다시 인연을 맺지 아니하려면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도 다 두지 말고 오직 무심으로 대하라.」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이춘이라는 교도였는데. 이 분이 남편과 자주 싸웠나보죠. 싸우고 나면 가슴에 응어리 진 거 대종사님에게 와서 이야기 하는 거죠. ‘저 인간 다시 안만난다’ 라는 거죠. 옛날에는 헤어지지는 못하고 그렇게 사는 거였죠. 그런데 대종사님께서 정말로 안만나고 싶냐 질문 하는 거죠. 그러니 이 여자, 다시는 안만나고 싶다고. 그러니깐 대종사님께서 ‘그 남편과 다시 인연을 맺지 아니하려면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도 다 두지 말고 오직 무심으로 대하라.’ 이게 인연을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보니 둘 중 하나예요. 미워하기 아니면 사랑하기지, 무심은 잘 안되는 거예요. 무심하면 살 수 있어요. 무심할 수도 없는 능력을 가지고 미워하고, 사랑만 하는 거예요. 중생들이 하는 일은 그런 거예요. 여러분들 사는 거 들여다 보세요 안그런지.
이와 같이 한 번 만난 인연은 단 한 번에 정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게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나 살게 될 때 그 인연을 불공과 참회로 내 진정한 인연이 되게 만들어 놓는 것이 이게 공부라는 것입니다. 이건 진리를 아는 사람이 하는 일이지, 진리를 모르면 내 이익 중심으로 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그래요. 그런 진리는 우주에 없다는 것이 부처님과 대종사님 이야기입니다.
인과의 속성이 또 하나 있습니다. 단 한 번에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 업이라는 것은 내 몸과 입과 마음을 쓰는 일을 말해요. 간단히 말하면 정신과 육신을 사용하는 것을 업이라 하고, 그 사용한 결과로 남아있는 것을 업이라고 해요. 두 가지 다 의미가 있죠.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업 하면 전생에 내가 무슨 죄업이 있다는 50%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으면서 지어놓은 결과를 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몸과 입과 마음으로 한 번 던져버린 것은 그 짓는 순간이 업이고, 지어 놓은 결과는 나중에 인과 원리로 볼 때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어떻게 눈짓, 손짓할 것인가. 마음을 가질 것이냐는 그 출발은 나에게서 시작되는 겁니다. 이 원리를 자각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잘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라는 표현이 아닌 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해드리면 쉬워요.
조선조 인조 때 스님으로서 잘 나가던 스님이 있었어요. 한 세상 놀고 술 먹고 간 스님이 있는데, 진묵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대단한 양반입니다. 이 양반은 당신이 스스로 석가의 화신이라 했고, 사람들도 그렇게 얘기할 만큼 대단한 깨달음을 가졌던 분입니다. 우리 원불교 교전에도 나와요. 이 분이 잘생기고 키도 크고, 젊을 때 일찍 깨달았어요. 그래서 젊은 시절에 창원 마산포에서 법설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두 경청하며 잘 듣고 있는데 한 여자만 설법은 안 듣고 진묵스님에게 빠져서 법문 끝날 때까지 ‘저 남자 내 남자!’ 라는 생각만 한거죠. 18살 먹은 처녀였는데... 이 여인이 저녁에 진묵스님을 찾아갑니다. ‘나를 책임져라 내가 스님을 보는 순간에 요즘 말로 뿅갔다. 다른 남자 와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나 책임져야 한다’고.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진묵스님이 ‘안된다’ 그러고선 시간이 흘러가는거예요. ‘나는 중인데, 이생에 여자랑은 못산다. 네가 남자라고 한다면 내가 여기서 같이 지낼 수 있지만, 여자로는 안된다’ 하고 몇 시간을 그렇게 씨름 하다가 여자가 마지막 얘기를 ‘남자로 오면 확실히 책임져야 한다’ 라고 다짐을 받고 떠납니다. 이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자가 정말 상사병으로 1년 여 만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죽었는지, 요즘 이렇게 얘기하면 옛날 이야기로 들으니, 다른 과학적으로 이야기를 해야겠죠. 그런 일이 있은 후 진묵스님은 전주 대원사라는 절에서 지내게 됐어요. 16년이 지난 어느 날, 진묵스님이 비몽사몽간에 잠깐 뭐가 나타나면, 16년 전 여자가 뜬금없이 나타나서 ‘이제는 날 버려서는 안된다’고 그 말 한마디만 하는 거예요. 참 별일도 다 있다 하는데, 그 때 밖에서 조그마한 아이 목소리가 진묵스님을 부릅니다. 나가보니 머리 빡빡 깎은 조그마한 아이가 와서 시자로 받아달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상해서 마루에서 내려가 들여다보니 비몽사몽간에 나왔던 여자 얼굴하고 너무나 흡사한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너는 어디서 왔느냐?’ ‘저는 창원 마산포에서 왔습니다.’ ‘너 몇 살이냐?’ ‘열 다섯 살 먹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기춘입니다’ 아주 일목요연하게 물어보는데도 다 대답합니다. 옛날 그 시절에 그 조그마한 아이가 어떤 인연을 따라서 산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됐는지 진묵스님같이 깨달은 사람이나 알지, 우리야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진묵스님이 딱 보니 ‘내 한마디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됐구나’ 하면서 시 한구(假令經百劫 因緣會遇時 所作業不亡 果報還自受)를 읊는데, 내가 지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은 설사 백겁이 지난다 하더라도, 불교에서 일 겁은 무한대의 수를 말합니다. 세상이 한 판 바뀌는 겁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천지가 창조하고, 종말이 이뤄지고 또 다시 이뤄지는 과정을 겁이라 합니다. 백겁이 지나도 내가 지은 업은 이렇게 거둬야 하는구나 하고 아이를 시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방이 따로 있는데도 잠을 잘 못 자니 할 수 없이 스님이 당신 방에서 같이 자는데, 그래도 잠을 못 이루자 꼭 진묵스님이 뻗어서 팔베개를 해야...^^ 이걸 이야기로만 들으시면 안됩니다. 진묵스님 이야기라고 해서 전달하는데, 인연의 진리라는 것이 단순한 게 아닙니다. 우주가 움직여 지는 이 진리가, 인연의 진리인데 그렇게 되어지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진리가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단 한순간의 인연이라도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부부간에도 함부로 말하는 거 이거 조심해야 해요. 그래서 원불교 마음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요? 멈추는 겁니다. 멈추어서 한 호흡하고 생각해보고, 그 다음에 실천하는 겁니다. 이게 마음공부의 지름길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멈추라는 겁니다. 감정으로 접근하지 마라. 네가 그 과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능력 없으면 멈춰서 참는 게 제일 좋고, 아니면 조리조리 얘기를 해 가면서 풀어가라. 그것이 지혜다.
인과가 이런 것인 만큼, 이제는 인연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한번 만나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인연. 그러면 인연을 어떻게 지어야 될 것인가.
독일에 의사이고 작가였던, 한스 카로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미국에 마틴 부버라는 사람이 있었고요. 이 사람들이 인생을 이야기 할 때, ‘인생은 만남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사실 우주 자체가 만남인데요. 그런데, 안 만나고는 살 수 없잖아요. 눈만 뜨면 사물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삶이다. 안 만나는 존재는 없다. 그러니 내가 만나는 인연을 잘 돌려가는 것이 잘 사는 겁니다. 안 좋게 등지게 하면 안 좋은 삶이 되는거죠. 잘못 사는 사람들 한 번 보세요. 원인을 가만히 들여다 보세요. 도덕적이지 못한 삶을 살 지 않아 지금은 잘 사는 것 같아도 그러는 거 아닙니다. 언제 바람을 맞아도 맞게 되는 것이 인과의 진리입니다. 우주 자연의 진리가 그럽니다. 끊임없이 인연을, 인과를 지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만남과 인연. 불교의 인연이라는 것은 만남이라는 건데요.
노사연이 만남이라는 노래 불렀죠. 원불교 교무들이 노래 부르라고 하면, 이런 유행가 중에서 선택적으로 부르는데, 이런 노래는 불법이랑 꼭 연결이 되니 다 할 줄 알겁니다 ^^
만남과 인연은 크게 두 가지로 분리됩니다.
어떻게 분리할 수 있느냐면, 상생의 인연, 상생의 만남이고. 상극의 인연, 상극의 만남입니다.
상생은 만나면 그냥 좋은 거예요. 그런데 그 좋은 인연은 일생동안 계속 갑니다. 그런데 상극의 인연은 한번 뿅 가고, 안 좋다든지 만나서는 안 좋은, 만나면 만날수록 힘들어지는 인연을 상극의 인연이라 합니다.
사물도, 지방도, 지역도, 학교도, 사람도 다 인연이 있습니다. 내가 서울 살면, 서울에 돈 벌러 와서 계속 살아지는 거 아닙니다.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으면 단세포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희 원불교 교전에 보면, 아까 우리 좌종치고 독경했죠? 일원상서원문. ‘내가 진리를 향해서 맹세코 이렇게 하겠다’ 하는 자기 약속을 하는 게 일원상서원문인데. 서원문 끝에 보면 ‘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혜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그러니 내가 은혜 입는 삶, 해독을 입지 않는 삶. 그래서 늘 영적으로 발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서원이 바로 일원상서원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세 가지 어려운 일이 있다 했습니다. 하나는 많은 영혼들이 몸을 받아 나오는데, 그 몸을 받아오는 영혼 가운데, 사람 몸을 받는 것이 정말 어려운거다. 본인이 사람이니까 잘 못 느끼는 건지도 모르는데, 사람 아니어 보면 알아요.
사람 몸을 받았어도 결함 없는 몸을 받는 것도 또한 어렵다. 우리 인류의 10%가 장애를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장애를 갖지 않은 몸을 갖는다는 것이 대단한 복입니다. 우리 현대 사회는 60~70%사람이 정신 질환을 갖고 있다 합니다. 건강한 지 안한지는 사는 검토를 다 해봐야 압니다. 내가 뭔가 집착이 돼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치유가 되어야 할 사람이다. 정신 위생에 거의 문제없는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우울증, 조울증, 죽을까? 제대로 사는 사람은 그런 생각 안해요. 낙엽만 져도 슬퍼져서 내 인생 어떻게 되나? 이것도 정신적으로 감정해야할 부분이라니까요.
이 두 가지 난관을 거쳤다 할지라도 영원히 진급할 수 있는 마음공부를 가르쳐 주는 부처님 회상에 발 들여 놓기가 어렵다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까지 다 와버렸기 때문에 별로, 그래서 요즘은 여기에 하나 더 더해서 진리를 깨닫는 이야기를 하죠. 불법을 만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연의 진리를 밝힌 일원상 서원문과 부처님의 말씀을 합쳐보면, 이런 겁니다.
사람의 몸을 받기 어려우니 받았으니 만나는 인연 모두를 상생으로 지어, 진급되고 은혜만 있는 삶을 살아서 영원한 세상을 행복하게 살자. 결론은 그겁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내가 잘 살자는 겁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고, 종교도 갖고, 학교도 다니는 것이지.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기 위해, 종교를 다니기 위해서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이게 잘못되면 맹신이 되는 겁니다. 그거 잘 아셔야 돼요.
저희 대종경 인과품(1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어리석은 사람은 남이 복 받는 것을 보면 욕심을 내고 부러워하나, 제가 복 지을 때를 당하여서는 짓기를 게을리하고 잠을 자나니, 이는 짓지 아니한 농사에 수확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나니라. 농부가 봄에 씨 뿌리지 아니하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나니 이것이 인과의 원칙이라, 어찌 농사에만 한한 일이리요’
우리가 분명하게 앞서 이야기 할 때, 진리는 하나예요. 사람 진리, 농 짓는 진리, 우주 자연의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진리는 하나이고 하나의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여져 가는데, 부처님과 같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인연’이라고 했다.
그래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 인연입니다.
그 인연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예요.
그 인연을 제가 두 가지로 말씀 드렸죠? 상생의 인연, 상극의 인연.
인연법을 아는 사람은 상극의 인연을 지어서는 안되는거죠.
제가 원불교 교무를 하고 처음 부교무로 나간 것이 대구교당이었어요. 만 1년 살았어요. 그 주인공이 앞에 두 분 앉아계시네요. 그때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요. 그 때 저를 본 모습하고 지금 나를 보는 모습은, 뭐 늙었으니 다르긴 다르겠죠. 그런데 제가 저를 평가해보면요. 저는 성깔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깔이 좀 있어요.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먼저 보이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잘했고 잘못했는지 시비가 먼저 보이는 사람입니다. 시비를 먼저 가리려 하는 사람은 성격 급할 경우 바로 칼질 들어가죠. 아십니까?
제가 요새는 그렇게 못삽니다. 이 인연의 공부를 하고보니, 제가 잘 지어놓고 무엇으로 까먹어요? (입^^) 빨래 집게를 입에다 두었으면 50%는 안 잃고 살텐데, 보고 너 잘했다 못했다 시비를 가리고, 상대방 감정이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겁니다.
이야기는 이성적으로 먼저 따지면 안됩니다. 인연관리 할 때는 느낌으로 다가가서 느낌을 이해해줘야 대화가 됩니다.
남자들이 여자하고 부부간에 싸우고 이야기해서 시비를 따지면 여자가 지게 마련입니다. 감정이 먼저 시작되면 이성적으로 따지자는데 감성이 안 되게 되어있죠. 여자의 가슴 속은 지건, 이기건 자기 마음대로 안됐을 때 오는 감정은 배가로 폭발이 되는거죠. 멍청한 남자나 이성으로 따지지, 제대로 된 남자는 ‘그래 어땠어, 그랬지. 정말 당신 마음 아팠겠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끝날 일 가지고 따지면 두 시간도 좋고, 3일도 가고, 일주일도 가는 겁니다. 이것은 자연의 진리를 알고 살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말씀을 가족 초대, 인연 법회이기 때문에 인연관리의 소중한 것이 뭘까. 다가서서 주는 겁니다. 다가서서 마음으로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내 얘기만 하지 말고 ‘그랬구나’, 하고 그냥 들어만 주어도 살아가는 데 편안한 겁니다. 잘난 남자들이 많은데, 사실 그게 잘난 게 아니라 못난 겁니다.
이제 마지막 말씀 드리겠습니다.
상생의 인연은 향기로운 인연입니다.
향기 나는 인연은 상생이 되어야 향기가 나는 인연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이 자리에 초대된 가족, 친구, 가까운 인연들 모두가 이 우주의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타당한 법칙, 우주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즉 우주적인 법칙. ‘불생불멸 인과보응’. 이것을 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인연과. 인과에 대한 이치를 잘 공부하시기를 마음속으로 기원드립니다.
영생과 인과를 모를 때는 믿어야 합니다. 나보다 낳은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으신 대종사님이 말씀하신거잖아요. 그러니 진리를 모를 때는 성현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부지런히~읽어가지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입니다. 인생을 바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이렇게 믿고 접근하다보면 알아져요. 개안(開眼)이 된다하죠. 육안으로 글만 보이는 게 아니라 이면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심하면 무릎도 치고 하죠. 아! 이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영생과 인과를 믿는 것이 처음에 매우 중요하다. 믿기만 하면 안돼요. 정말 그런지 확인 작업이 들어가야 합니다. 믿는 것을 신앙이라 하면, 확인하는 것은 수행입니다. 믿는 것도, 수행도 끝나면 깨달음인데, 깨달았을 때 오는 것이 실천인 겁니다. 그러니 진리를 깨달은 모든 성자들이 결론은 다 내놓고, 중생을 위해서 제도하는 작업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인이라 하는 사람이, 예수는 목숨을 내어놓고 부처는 왕이었지만 의식주 족하게 생활했을 텐데 바루를 들고 45년간을 빌어먹고 사셨습니다. 수행까지 합치면 50년을 빌어먹고 살았어요. 대종사님도 400원 개인자산을 모두 정리하셔서 방원공사 지원하셨습니다. 오늘 날 대종사 후손들이 그 400원 받은 일 있습니까? 왜 성자들이 영생과 진리를 깨닫고 나면 그렇게 가느냐. 우주 자연의 진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삶이기 때문에 그런겁니다.그러니까 내가 이기적이고, 나만 봐달라고 하는 마음으로 살고, 남에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주로 하는 사람들의 삶의 미래는 어두움으로 간급으로 떨어지지만, 마음이 오픈돼서 남과 더불어 주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의 삶은 현실적으로 내가 가진 게 없다 할지라도 분명하게 진급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 우주 자연의 진리다. 그렇게 인연을 상생으로 가꾸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좋은 친구이지 인연들로 자신의 주변을 가꾸어서 한없는 세월에 사람의 몸을 잃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셔야 합니다.
안 보이는 세계라 뭐라 해줄 수가 없으니 마음으로 생각해 보세요.
진심이, 화가 자꾸 올라온다. 성을 잘 낸다. 그러면 불교적으로 육도로 윤회할 때 바로 떨어지는 것이 축생입니다. 사람의 몸이 아닌 축생, 동물의 몸을 받기 쉽다.
욕심, 탐심 진심 치심. 사람 몸 받으려면 상당히 자신을 가꿔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기 본위적인 삶은 결코 다음 생에 사람 몸 받기 어려울 수 있다. 받았다 할지라도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가 나한테 쏟아 부어 희생하니까, 나는 발 뻗고 살지만 다음 생에는 반드시 뛰어다니면서 발 뻗을 시간 없이 갚아야 된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물 달라하고, 밥해달라고 하고 그럴 줄 알아야 합니다. ^^
그걸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던진 이야기로 생각하면, 촌사람들에게는 미안한데 촌사람입니다. 도시 산다고 도시 사람이 아니라, 생각이 엷으면 안목이 좁으면 촌사람입니다. 우리가 딱 봐서 대화 2번만 해보면 아~ 촌사람이구나. 그런 것 정도는 한 50년 살다보니 좀 느껴지대요 ^^ 촌사람 되지 맙시다.
좋은 인연 잘 가꾸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한시간 꽉 채우신 설법을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더불어 인연으로 요란함이 극에 달해있는 시점에 다시금 그날의 설법을 떠올리며 무심으로 대하고자 노력해 봅니다. 감사해요~~
월산님 설법 참 좋았지요.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