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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설】
산서민가 - 3
이 대 영
▣ 슬픈 귀환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주님의 품에 안겨 세상을 용서와 성서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궁금했습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설계하고 일군 이화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봉천동에 있는 조그마한 개척교회에서 두 달간 몸을 추스른 뒤에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나는 정상인의 의식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생활하는 동안 느낀 것은 세상을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더불어 살아갈 때, 그리고 내가 사랑으로 다가설 때 상대방도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온다는 소박한 진리를 몸서리치는 감정으로 경험했습니다.
이화원에서 서태후의 생활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을 때, 햇볕도 안 드는 음지에서 짐승처럼, 그리고 먹이를 찾아나서는 하이에나처럼 골목골목을 누비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
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으로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십자가로 몰려드는, 교회의 종소리에 마음을 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감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이화원을 한 번 가고 싶다는 뜻을 말씀드렸지요. 그러자 목사님은 물끄러미 나의 얼굴을 응시하셨습니다. 동요하지 않는 나의 마음을 감지라도 하신 듯 목사님은 나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눈을 감고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서로의 약속이 전제된 행동이었지요. 백발이 허연 칠십 노구의 목사님은 내가 이화원에 들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세운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을 제어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이야기를 했지요. 그러자 목사님은 그 꿈이 예수님의 실천의지를 담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잠시 망설이는 나에게 목사님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실천의지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이어 물으셨지요. 그래서 나는 낮은 목소리로 ‘사랑’이라고 읊조렸습니다. 그 꿈속에 ‘사랑’의 실천의지가 담겨 있었느냐고 재차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고 모기만한 소리로 답변을 했지요. 그러자 목사님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예수처럼 나에게 설교했지만 나의 귀는 이미 닫혀버린 후였습니다.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습니다. 나는 이화원을 방문한다는 설렘에 잠을 설쳤습니다. 내가 구상했던 이화원의 인테리어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까, 옛 직원들은 얼마나 남아 있으며 새로운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옛 단골손님들은 지금도 이화루에 들를까, 그들 중에 나의 안부를 물었던 사람은 몇이나 될까, 메뉴는 지금도 그대로일까, 아니면 달라졌을까, 운영은 흑자일까, 아니면 적자일까, 내가 나타났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나는 이화원이 영업을 하기 위해 문을 열 때까지 화장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화장을 마치고 옷을 고르기 위해 장롱의 문을 여는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이화루의 직원들 중 그 시각에 출근할 사람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홀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열 시 넘어서야 출근했던 기억을 떠 올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사님이 외출 준비를 마치셔야 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동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화원에 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나는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조간신문을 꼼꼼히 읽고 있었습니다. 사회면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 보는 신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의 의식세계는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 삶의 궤적에서 시간과 공간의식은 한동안 정지되어 있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군부독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으며, 광주 민주화 항쟁의 후유증은 여전히 사회 전역에서 몸살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진입한 경찰들이 발사한 최루탄가스가 거리와 대학가에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정의구현을 외치는 정부의 의지와는 상반되게 여전히 살인과 방화, 사기 등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을 읽어 가는 동안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싫다는 느낌이 체내에 있는 모든 시신경을 통하여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피곤함을 느껴 침실에 눕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나는 삶에, 그리고 지난날의 상처에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외상이 완치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소 깊은 생각을 할라치면 온 몸이 나른해지는 증상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을 수습하여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여전히 열 시를 넘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기척을 살피기 위해 한 번 쯤 들러주셨을 듯도 한데 밖은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 주변을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여전히 밖은 봄볕이 마당으로 스며들어 여기저기서 생명이 움트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정오가 되어도 끝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목사님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지요. 방문을 나서기 전에 바라 본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이미 핼쑥한 기운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립스틱도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쓴 웃음을 지은 나는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방문을 나섰습니다.
강당을 가로질러 2층에 있는 목사님의 집무실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목사님 대신 누군가가 사다 놓은 연산홍이 나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자의와는 무관하게 이층으로 키워진 연산홍은 작은 방울만한 봉우리들을 매달고 있었습니다. 연산홍은 봄의 기쁨을 만끽하다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듯 했습니다. 비록 꽃 무게에 눌려 나무가 부러지지 않을까봐 지탱해 준 철사줄에 온몸이 치렁치렁 감겨 있었지만 계절의 바뀜을 감지한 연산홍은 붉은 혼을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들어오신 것은 집무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책들을 정리하고 한 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정장을 차려입으신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다녀오신 듯 했습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목사님은 엷은 미소를 보이시더니 의자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부드러우면서도 안쓰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이화원은 이미 이화원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화원은 젊은 소비층을 대상으로 한 대형 맥주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자고 주문하셨지만 나는 넋을 잃은 채 그 자리에 목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미 이화원은 서태후의 쉼터이며 생활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의화단운동의 핵심세력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나는 서태후가 아니라 광서제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두세 번 더 이화원을 잊으라고 당부하시며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서태후의 꿈이 담긴 이화원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이화원의 소유권이 밴드마스터에게 넘어갔을지언정 그간의 정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증인이 확보된다면 소송을 통해 납치와 폭행으로 인한 소유권강탈임을 밝히고 재산을 환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해가 저물 때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파주에서 하루를 인내하며 견디던 시간만큼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목사님의 권유를 듣지 않고 밤에 외출을 시도하고야 말았습니다. 참으로 낯설고 어설픈 밤길이었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수표로 가득한 지갑을 갖고 자가용만으로 다니던 똑같은 길을 몇 푼의 동전과 평상복차림으로 시내버스를 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직업이 존재의 이상을 실현하고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라지만 버스 안에 자리한 승객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용케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살아 있는 자들의 얼굴을 뜯어봐야 했습니다. 아침을 먹고 출근하여 일상에 찌들다 소주 몇 잔 먹거나 혹은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은 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 속 탤런트들의 몸동작에 일비일소하다 졸린 눈으로 침대에 들어 갈 것입니다. 금슬 좋은 사람은 섹스를 몇 번 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등을 돌리고 자거나 각 방을 쓰며 편안함 또는 아쉬움을 달래며 뒤척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것이 별 것이 아닌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정거장인가를 지나고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고서야 나는 이화원의 거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화원의 거리는 여전히 살아있는 동물들의 문화가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가득 받은 자들만이 모여 사는 천국과 같은 이미지를 주고 있었지요. 술집뿐만 아니라 교회의 십자가도 유흥가 간판의 네온사인의 뒤편에서 붉은 십자가를 들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골목어귀에선 전경들이 대학생들의 가방을 검문하고 있었으며 간혹 경찰들과 실랑이를 하는 젊은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액세서리를 팔고 있는 주인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으며 뚜레쥬르 앞의 오뎅집 주인도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무릎을 버팅기고 있었습니다.
이화원의 간판에 흥분한 나는 거침없이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미 이화원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불향각이나 궁등도 찾아볼 수 없으며 곤명호는 이미 목판으로 덮여 맥주홀이 되어 있었습니다. 초저녁이라 그런지 두 테이블에서만이 젊은 남녀 몇몇이 맥주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카운터를 보고 있는 여직원이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동태를 주시하는 듯 했습니다. 우선 나는 우측 맨 구석에 있는 자리를 택하여 앉았습니다. 중년의 여인이 공간을 차지하기에는 너무 낯설고 온통 영어 투성이의, 그리고 요염한 외국 배우들의 알몸이 붉은 빛을 자극하는 술집이었습니다. 10여 명의 여종업원들과 대 여섯 명의 남자 종업원들이 정장을 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영업이 제법 잘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던 나를 깨운 것은 여자 직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화루를 운영할 당시 명문대학 법학과를 다니는 인상 깊은 여학생이었습니다. 고아원 출신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며 아르바이트를 간절하게 부탁하는 모습이 너무 기특하여 유일하게 채용했던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통하여 두어 번 등록금도 내주고, 용돈도 주면서 친 동생처럼 대했던 아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주먹을 가슴에 모으고 발만 동동거리며 사장님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선뜩 답변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손을 덥석 쥐더니 자기의 볼에 가져가 따뜻한 체온을 나눠줬습니다.
그는 이제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고시원에서 여전히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출근하여 자정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후, 고시원으로 돌아가 책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의 검은 눈에서 나는 내 젊은 날의 야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궁금했던 몇 가지들을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습니다. 이화원은 내가 한 달이 지나도록 업소에 출근 하지 않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문과 함께 종업원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은 삼 개월 째에 문을 닫았다고 했습니다. 밴드마스크는 이화원을 폐업하는 날 남은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 업소를 자신이 인수하게 되었으며 업종을 바꿔 대형 생맥주집을 경영하겠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생맥주집을 개업하기까지 한 달 동안의 기간이 필요한데 직원들 중에 이 곳 업소에 애정을 갖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오십만 원 정도의 생활보조금을 주겠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고시원과 가까운 이 곳을 떠나기가 아쉬워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기를 요청했고 현재 이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깊은 눈 속에 무언가를 이야기하고픈 내용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내 눈 속에도 많은 이야기가 간직되어 있음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곳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김 사장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김인영 사장을 아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순간, 아찔해지는 절망감을 경험했습니다. 김사장은 맥주홀을 오픈하는 날, 이 업소의 주인이 되어 있었으며 밴드마스터는 그의 아들임을 공개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김인영 사장을 본 것은 다섯 살 때, 충무로의 어느 레스토랑이었습니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지요. 화려한 은막의 스타를 꿈꾸던 두 여인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당시 백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던 영화의 여주인공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며 생긴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난처해진 영화감독은 결국 신인배우를 캐스팅하여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고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악연으로 매듭이 지어진 셈이지요. 게다가 연예계 잡지사 기자들의 루머성 기사와 이로 인한 명예실추, 아버지의 정치자금 비리수사 등 불운의 연속 속에 결국 어머니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 것이었어요. 부산에서의 칩거생활이 오 년 정도 흐르자 어머니는 옛충무로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인들에게 전화를 시도했고, 당시 영화감독의 주선으로 어머니와 김 사장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내가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고 권력께나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가자 김 사장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가 늘어났고 결국은 이화원에서 밴드마스트와 같이 생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의 아들인 밴드마스터가 나를 순수한 마음에서 동업자로서의 길을 자청했다할지라도 결국 나는 그들에게 업소를 강탈당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손은 이미 짙푸른 색을 띠고 있는 프랑스제 악어가방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두 모자는 출근 전이었으므로 집에 있을 것이었습니다. 마침 그들의 집은 업소로부터 두 블록 건너 자리하고 있는 오피스텔의 칠 층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시지망생 아이를 한 번 포옹해주고는 그 곳을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 애의 모습을 보고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려 판검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여려서는 안된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밖은 현란한 불빛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진열장의 마네킹에는 연산홍빛의 원피스 혹은 쑥색의 정장들이 유행을 선도하고 있었으며, 술집 삐끼들이 회식 나온 직장인 옆에 달러 붙어 하류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순간, 하루에 수 천 만원을 유흥비로 날렸던 지난날이 영상으로 스쳐갔습니다. 삐끼들에게 호통을 치고, 술집사장의 얼굴에 양주를 집어 던지고, 접대하러 나온 미소년에게 알몸을 요구하던 부끄럽지만 그리운 시절이었습니다. 큰 길을 건너 다음 블록에 이르자 사뭇 다른 풍경이 전재되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보따리 장사들이 풀어 놓은 상품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으며 그 맞은편엔 붉은 비닐천으로 만든 포장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나는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한 때 짐승처럼 처다본 적도 있었습니다. 인생의 변두리에 몰려 저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몸에 기름을 붓고 한강교에서 투신한다면 중앙일간지 신문 모퉁이에라도 화려함을 장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지요. 그 짐승처럼 보였던 닥지닥지 붙어 있는 어느 포장마차 앞에서 나는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이화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포장마차의 이름은 분명히 이화원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공복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화원엘 들를 생각에 밥 한 톨 먹지 않은 하루였던 게지요. 나는 두 발 달린 짐승이 되어 한강교로 가지 않고 그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다행스럽게 포장마차 안에는 손님이 있지 않았습니다. 두어 사람이 급히 비우고 나간 듯한 라면그릇이 단무지 두어 개를 담은 채 백열전구를 반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외로 포장마차의 주인은 젊은 부부였습니다. 뚱뚱하고 볼기짝이 남산만하며, 불어 터진 손가락으로 국물을 퍼주는 노파를 생각했던 나에게 있어 그 동안의 삶이 얼마나 편협적이고 이타적이었나를 생각하게 하는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소주 한 병과 오뎅 이천 원어치를 시키고 내부를 둘러보았습니다. 나는 포장마차의 양 측면에 홍등이 걸려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이화원이었습니다. 두 젊은 부부는 연신 무언가의 대화를 나누며 안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작은 둥지, 그곳은 그들 부부의 작은 둥지이며 삶의 터전이며 미래를 위한 산실이기도 했지요. 소주 한 잔이 미끄러지듯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가자 내장이 움찔하는 느낌이 복부로 전해왔습니다. 나는 오뎅국물을 바로 한 모금 떠 넣었습니다. 다소 덜 우려내서인지 싱거운 듯도 했으나 따뜻함이 온 몸으로 흘러들어 기분을 묘하게 만들어 주는 마력이 있었습니다. 소주 반 병을 비운 나는 여주인에게 이 곳이 왜 이화원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그 여자는 피식 웃으면서 옆에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저 쪽 번화가 옆에 있던 이화루를 아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난다고 대답했더니 그만한 업소를 한 번 운영해 보는 것이 꿈이며, 이화루라는 지명이 운치 있고 낭만적이지 않느냐고 되물어 왔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답하자 여자는 남편이 명문대학 중국어과 출신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강조하였습니다. 외교통상부 공무원이나 중국과 무역업을 하는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하는데 조직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남편의 성미라 거금 오천만원의 권리금을 주고 이 일에 매달리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학원에 나가 강의도 해봤지만 푼돈 밖에 되지 않거니와 학원 강사나 포장마차 영업이나 둘 다 장사이긴 마찬가진데 굳이 넥타이로 목 조르고 분필가루를 먹어가며 살아갈 필요가 무어냐는 것이었지요. 뜻밖의 세상 사람들을 만난 나는 소주 한 병을 더 시켰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먹는 술 이었습니다. 술뿐만 아니라 나는 거기에서 홍등의 아름다운 불빛과 만수산과 불향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곤명호에서 지나간 시간들을 곱씹으며 포장마차를 나설 때 내 눈은 이미 충혈 되어 진한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난 듯 느껴졌지만 겨우 여덟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불어 오르는 지방을 몸 밖으로 흘려보내며 걷는 사람, 어설픈 지진에도 넘어갈 듯한 광대뼈가 몸무게를 유지해 주는 볼품없는 사람, 자궁까지 바람이 술술 들어가는 끼 있는 아줌마, 별별 사람들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오피스텔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김 사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나 차려입은 한 여인이 오피스텔 문을 빠져나와 큰 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지요.
오피스텔의 경호는 그리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초저녁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제재를 받지 않고 나는 507호의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지요. 나는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한 번 만져보고 피식 웃고 말았지요. 터질 듯이 뛰고 있어야할 심장이 요동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인종을 누르려던 나는 현관문의 도어를 살짝 돌려 보았습니다. 현관문은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잠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25평 정도의 공간에 주방과 텔레비전 그리고 소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타인의 공간에 들어 왔음에도 나는 전혀 낯선 감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내 것이어야 할 공간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야 한다는 당위감에 나는 이리 저리 눈을 돌렸습니다.
나는 닫혀 있는 방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습니다. 낮 익은 얼굴이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김 사장은 아마도 출근을 한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들이 출근할 것을 생각하여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나갔겠지요. 나는 침대로 다가갔습니다. 그 곳에 밴드마스터가 누워 있었습니다. 나의 이화원을 강탈하고, 나를 감금하고, 나의 인생을 망쳐놓은 짐승이 길게 누워 있었습니다. 파주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를 깨워 자초지종을 묻고 이화원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용서를 빌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감금하고 성적 노리개로 삼으며 온갖 수모와 지옥의 끝을 경험시킨 짐승이 다시 살아난다면 아마도 나는 아까 먹었던 오뎅국을 황천길에 쏟아 놓아야 할 듯싶었습니다. 나는 군청색의 악어 가방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방에서 자져온 긴 식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잠자던 그가 긴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하품을 두어 번 하더니 양팔을 뻗어 길게 기지개를 켰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눈을 번쩍 떴습니다. 순간 나는 공포를 이루는 세포들이 머리로 몰려오는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내가 짐승의 숨통을 끊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먹이가 될 위기의 순간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응시하고 있음을 의식한 듯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얼굴을 의식한 듯 놀란 눈으로 몸을 일으키려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목을 향하여 식칼을 내려 꽂았습니다. 칼끝이 빗나갔는지 그는 심한 고함을 질렀습니다. 나는 그 소리에 쾌감을 느끼며 그의 몸 어딘가를 향해 칼을 내려 꽂았습니다. 깊숙하게 들어가는 감각이 손잡이의 끝으로 전해왔습니다. 저항하려던 몸뚱어리가 힘을 잃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몸을 뒤틀며 떨어져 내렸습니다. 나는 그의 머리털을 잡아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일그러진 형상에 이미 그의 눈은 풀려가고 있었습니다. 파주에서 풀려가는 나의 몸을 연거푸 발로 차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발로 그의 몸을 걷어찼습니다. 심한 통증이 발끝으로 전해왔습니다. 어쩌면 발톱이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는 침대를 잡고 일어서려 버둥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달려가 사정없이 그의 몸을 찔러댔습니다. 축축한 혈액이 방바닥을 물들이고 처절한 절규가 경찰을 부르기까지 나의 몸짓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의 삶이 하얗게 부서져 방안 가득히 부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 젊은 날은 아득한 밤 속으로 달려가고 말은 게지요.
▣ 진잠의 담벽
유성나들목을 빠져 나와 호송차는 좌회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산과 서울만 알고 살았던 나는 푸른 수위를 입고 닭장을 영낙없이 닮은 법무부의 차량에 실려 또 다른 닭장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유성을 통과하여 어느 정도 왔다싶었을 때, 산 아래 큰 건물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건물에는 시립정신병원이란 간판이 정신을 혼란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오갈지는 모르지만 간이정거장에는 학하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교도소에 갔다가 다시 정신병원으로 올 지도 모를 만큼 극심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숨이 멋은 듯한 느낌에 질식하기도 하고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어둠을 찾아 몸을 떨곤 했습니다. 1심공판정에서도 이 증상이 나타나 잠시 정회하는 소동까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판사의 감성을 자극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무기징역형을 언도 받게 한 지도 모르지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가뿐 호흡만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국선변호사가 간절하게 항소하기를 권했지만 나의 의식에는 오직 죽음으로 내 생을 마감하는 것이 모든 이를 위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잠교도소의 담은 역시 높았습니다. 허허벌판 위에 지어진 진잠교도소는 신축 이전한 곳이라 생각보다는 깨끗한 건물이었습니다. 진입로에 들어서자 두 명의 초병이 나와 검문 없이 거수경례를 하고는 들어가 관련 부서에 보고하는 듯 했습니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왼쪽 우리에서 노니는 사슴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이 곳은 감옥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정원이 꽤나 잘 가꾸어진 학교 같은 교도소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이 교도소 내의 수감자 중 정원사만도 수십 명이 된다는 사실에 나는 실소하고 말았지요. 그야말로 교도소는 인종백화점이었었던 셈이지요. 교도소의 담벽은 높았습니다. 그 담벽에는 푸른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까치가 자유롭게 노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높은 철문을 들어서고 그 철문이 다시 잠기고 나서야 호송차는 멈추었습니다. 우리는 교도관의 지시대로 하나 둘 차에서 내렸지요. 포승줄로 이어진 모습이 마치 줄줄이 엮여 일제시대 형장으로 가고 있는 모습과 동일했습니다. 이십세기에 고무신을 신고 있는 모습하며, 눈만 휑하니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교도소 초년생들이었습니다. 내 가슴에는 3020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잔디가 심어진 넓은 교도소 내의 정원은 각종 분재와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화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꽃들은 수인들의 독으로 피어 난 아름다운 자태였겠지요. 우측에는 변호사 접견실과 교도관들이 운동 할 수 있는 탁구대가 두어 대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철문을 지나 두 개의 철문을 더 지난 다음에야 회의장인 곳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교무과장인 듯한 이가 진잠교도소의 부대시설 현황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에 이 곳에서 지켜야할 생활 수칙과 영치금 및 면회 등과 같은 기나긴 교무계장의 설명을 들은 후에 우리는 각자의 방을 배치 받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법무부 색인이 있어야만 물품을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공간에서 서태후는 귀양살이를 시작하게 된 셈이지요. 이 곳에는 나와 같이 형량을 받은 무기수가 200여 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 재소자도 200여 명이 수감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방의 재소자들에게 간단히 나의 이름을 소개하자 그들은 고맙게도 나를 방의 아랫목인 공간을 내어 주었습니다. 방장을 잘 만난 덕도 있지만 교도관의 나의 신상에 대한 설명과 처우방법에 대한 사전교호가 있었겠지요. 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무기수가 들어 왔을 때는 초범이나 잡범이 처음 내실했을 때 치루는 호된 입방식의 절차가 없었습니다.
영치된 지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공황장애 증상을 보이자 나는 병동으로 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감방과 병동을 세 번이나 오간 후에 나는 정상인으로 돌아오는 듯 했습니다. 불교 또는 천주교 교화위원들이 나를 접견하고 불경과 성서를 놓고 갔지만 나는 아무 것에도 의지하거나 생명을 구걸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서태후가 아닌살인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시간이 끝나고 취침 사이렌이 울려 퍼진 한 참 후에 나는 동료들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모두가 곤한 잠에 취해있는 듯 평온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선 웃옷을 벗어 목에 둘둘 감은 후 조여 보았습니다. 호흡만 곤란하지 어느 순간에 손을 놓아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을 끼우는 구멍에 머리를 넣어 보았으나 옷이 찢어져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묵묵히 팬티를 벗어 내렸습니다. 역시 법무부가 지급한 하얀 팬티였지요. 나는 팬티의 양끝을 잡아 한 번 단단한지를 확인한 후 다리를 넣는 한 쪽을 택하여 목에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바퀴 돌린 후 엄지손가락을 나머지 한 쪽 구멍 틈새에 걸었습니다. 목에 꽉 쪼이는 느낌이 전해져왔습니다. 그래도 약간은 느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다 검지손가락을 두어 번 돌리고 다른 틈새에 밀어 넣자 순식간에 기도가 막혀 버렸습니다. 몇 십 번의 몸부림과 지옥과 천당을 오고간 끝에 결국 나는 죽지 못하고 동료들의 고함으로 달려 나온 어느 교도관의 등에 업혀 병동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산소호흡기가 입에 씌워지고 한 동안이 자나서야 나는 풀어진 영혼을 수습하여 긴 잠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길은 참으로 멀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목숨은 참으로 길고 질긴 것이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몰골은 한 마디로 해골형상을 닮고 있었습니다. 목은 푸른 멍과 응혈된 검은색이 죽음의 문턱에 다가온 한 여인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팬티를 감았던 손은 온통 먹빛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예전에 어머니가 나를 보고 ‘모질고 또 모진 년’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다시 방으로 돌아오던 날 세 명의 수인들은 새로운 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어음 사기죄로 들어 온 천안에서 온 김씨 아줌마, 빚을 갚지 못해 몸으로 때우고 있는 보령에서 온 홍씨 아줌마, 술집동료와의 말다툼 끝에 칼을 휘둘러 상해죄로 살고 있는 처녀 아닌 노처녀 오양은 나의 몸을 만지며 위로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들은 영치금을 털어 내가 좋아 하는 사식을 넣어 주기에 바빴으며 교도관들도 특별하게 우리에게만 좋은 반찬을 배식해주는 아량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죽어가던 세포들을 하나 하나 재생시키고 있었습니다. 특히 학사고시동으로 특별 배치되어 검정고시반과 학사고시반 수강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나는 생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진학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그들의 배움에 대한 갈망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학사고시동 수감자들은 그야말로 교도소 내에서 선택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한 방에 세 명 꼴로 배치되어 각자가 사용할 수 있는 책상이 있었고 독서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그야말로 학교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수업은 정확하게 11시 50분에 끝나 점심시간이 주어지고, 오후 1시부터 수업에 들어가 4시 50분에 끝나는 일과였습니다. 물론 다른 동에 수감된 재소자처럼 의무노동시간도 없었으며, 수업시간에도 자유롭게 종교활동도 할 수 있었으며, 수업이 없을 때는 자습시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규율이 있다면 수업시간을 엄격히 지키는 일이며 자습을 할 때도 군인들처럼 허리를 바로 세운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곳에서의 생활은 3년이 주어졌는데 2년에 통과할 수 있는 시험도 생활의 연장을 위하여 계획적 시험을 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서로 반장이 되기 위하여 특정인을 비방하는가 하면 참고서를 독차지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결손가정 출생이 대부분이었고, 사회에서 학벌에 대한 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이라 학업성취도와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지요. 나는 그 곳에서 무기징역의 거의 모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모범장기수라는 호칭도 얻었고, 푸른 수위가 민방위복장과 같은 황토색 수위로 바뀌었습니다. 왼쪽에는 반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방도 비록 두 평 남짓하지만 독실을 쓰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검정고시반에서 공부하여 영어과 학사고시를 통과한 재소자이며 나의 제자는 신학대학을 졸업하여 목사의 길을 걷고 있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입안에 사탕을 물고 면회장에 나갔을 때, 친정어머니의 등에 업힌 딸이 울면서 사탕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더라며 사탕하나 줄 수 없는 어머니의 한스러움을 토로하며 울던 앳된 엄마도 출소를 했습니다. 나와 같은 해에 입감되어 십 칠년간을 매주 거르지 않고 면회를 오던 시골노파가 어제 죽었다는 슬픈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내가 학사고시동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 이화원에서 고시를 준비하던 검사가 된 아르바이트 여학생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도 뒤늦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입감된 지 만 18년이 되던 날 나는 2년의 형기를 감형 받아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진잠의 담벽이 아닌 공주교도소에서 이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이 교도소 내에서의 조직의 재건을 막기 위하여 6개월마다 교도소를 옮겨 수감되듯이 나 또한 새로운 출발을 위한 번거로움을 제거하듯 공주교도소에서 새로운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공주 금강교를 넘어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어디로 갈까 하고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출소를 앞두고 며칠 동안은 부산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만나보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전으로 버스로 나아가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간을 대합실에서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급기야 나는 기우는 햇살을 발견하고 무작정 대전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자 버스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든 나의 의식 속으로 바람의 언덕이 나타났습니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몽돌을 실은 바람과 뱃고동과 파도소리가 나를 잠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 외로운 섬
바람의 언덕 옆에 있는 선착장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몇몇 중년의 부부 또는 젊은 연인들이 외도행 유람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불현 듯 섹스라는 용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들은 어제, 오랜만에 둘 만의 시간을 갖고 알몸을 부둥켜 앉고 섹스를 한 후에 곤히 잠들었겠지요. 그리고 여독이 풀리지 않은 이른 아침에 무언가를 먹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워 이곳에 왔을 겁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라는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리에 힘을 모아 괄약근을 조여 보았습니다. 축축한 소금기가 가슴을 훝고 지나갔습니다. 아직은 살아 있었습니다. 아직은 더 쓸 수 있는 젊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가슴을 한 번 만져본 후에, 나는 여객선터미널에서 빠져 나와 대 ․ 소병대도의 전망대로 이어지는 큰 길을 향해 구부러진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미 외도 보타니아는 내 마음 속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인공의 냄새로 뒤덮인 섬, 날이 밝자마자 사람의 발자국에 눌려 숨 가쁘게 지나다가 밤만 되면 사람이 그리워 해풍의 울음을 새벽까지 토해내는 외로운 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울다 못해 아침햇살에 붉은 피를 모아 바다에 흘려보내는 그 섬은 이제, 달거리하는 순진한 처자를 만나 몇 개의 섬을 더 만들어야 외로움을 벗어나겠지요. 그러기에 그 섬은 내가 찾아가 어떠한 위무도 위안도 주고받지 못할 곳이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외로운 섬과 마주하고 있는 내도에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묵묵히 외도를 내조하고 있는 주목받지 못하는 견실한 섬이 바로 내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학동몽돌해변의 축소판이라 칭해지는 여차몽돌해변을 둘러본 후, 명사해수욕장을 거쳐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우선 가야할 곳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었지요. 어머니는 집에서 멀지 않은 금정구 청룡동에 자리한 범어사에 계셨습니다. 내가 출소하기 일주일 전에, 판사가 되어 있는 예전의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어머니의 근황을 알려주고 갔습니다. 어머니는 머리를 깎고 사회와의 일체의 인연을 끊은 채, 경내에서만 생활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불행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이 당신의 아파트 한 채만은 나에게 명의변경을 해놓고 세속과 절연을 결심하신 것이었습니다.
통영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운전사 바로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출발하기까지는 채 오 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거제도로 가는 큰 길에 접어들어 나들목으로 접어들면서 스르르 잠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구상하고 준비해야 하는데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만나고 서울로 올라가 목사님을 뵈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부산에 집이 있으니 세입자를 설득하여 내 보낸 후, 어머니를 설득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쉽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은 모릅니다. 진잠의 또는 공주의 담벼락에서 구상했던 모든 것들이 머리 속에서 하얗게 부서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화장하지 않은 서태후가 미소 짓고 있군요.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민가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서태후가 나를 위무해 주려하나 봅니다.
한 송이 아름다운 모리화
한 송이 아름다운 모리화
그 향기 가지마다 가득하고
그 향기 하얀색 사람마다 칭찬하니
너를 한 송이 꺾어다가
친구에게 보내고 싶구나
모리화 모리화.
- <중편소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