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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을 부르는 돌무덤
차 례
1.돌집을 세워라!
2.사냥을 나서다
3.사라진 아버지
4.나루목 고을
5.꽃뉘의 옥돌목걸이
6.마음 안의 하늘
7.보름달이 뜨다
8.놋쇠 한아비의 선물
9.우두머리 한곰의 꿈
10.마지막 돌무덤
11.나루목 고을 전사들
12. 움집 감옥에 갇히다
13. 꽃뉘의 선택
14. 있는 자리에서
1. 돌집을 세워라!
하늬뫼 허리를 감싸듯이 풀풀 퍼진 안개가 걷히고, 해가 금누리 고을을 비추었다. 조용하던 고을이 잠에서 깨어나 나붓나붓 기지개를 켰다. 모루도 잠에서 깨어 움집의 발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갈대로 엮은 발이 흔들렸다. 모루는 팔을 휘둘러 원을 그리며 들로 내달렸다. 같이 지내는 개, 머엉도 뒤따랐다. 머엉은 앞산에서 지내던 때를 기억하는지, 땅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산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댓바람부터 겅중거리기는…….”
어머니가 움집에서 나오며 군소리를 했다. 모루가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자, 머엉도 모루 손의 움직임을 따라 두 발 서기를 했다. 모루가 꼬리를 잡으려고 하자, 모루 뒤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때였다. 머지않은 곳에서 빛이 번쩍였다. 모루는 빛이 비치는 쪽을 보았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우두머리 한곰어른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는 모루가 사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 뒤로 장정 셋이 따르고 있었다. 높이 든 한곰어른의 청동검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무슨 일이지?”
모루는 집으로 뛰어갔다.
“돌만이 있는가?”
한곰어른이 움집 앞에서 아버지를 불렀다.
“어르신, 오셨어요?”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이어서 아버지가 발을 들추고 밖으로 나왔다.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자네가 서둘러 할 일이 있네.”
한곰어른이 멧돼지 한 마리를 바닥에 척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주저하자,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귀한 고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난 자네가 주위 고을을 통틀어서 으뜸가는 돌장이란 게 자랑스럽네. 그래서 말인데, 빠른 시일 내로 큰돌장이인 자네가 내 돌집을 세웠음 하네.”
한곰어른이 말했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돌집을요? 어르신, 그건 숨이 다한 뒤에 세우는 건데…….”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게나!”
한곰어른의 결심은 단단했다.
“자네가 꼭 맡아 주게나.”
한곰어른은 재차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집은 죽은 사람을 위한 돌무덤이었다. 숨이 있는 자의 몫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순리를 거역하는 일이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곧 날이 추워질 텐데요.”
아버지가 에둘러 말했다.
“추수가 거의 끝나 가니 장정들을 동원할 수 있을 거네. 눈썹달이 차올라 네 번 기울면 되지 않겠나. 내 그리 알고 있겠네.”
한곰어른은 손가락 네 개를 펴서 보이고는 돌아갔다.
“숨이 멀쩡히 붙어 있는데 돌집을 갖겠다니 어이없네요.”
어머니가 침묵을 못 견디고 말했다.
“…….”
“당신이 줄곧 해 오던 일인데 못할 게 뭐 있어요?”(앞에서 어이없다고 하고 바로 못할게 뭐있냐고 하니까 조금 이상해요.앞의 말은 모루가 묻는 걸로 바꾸는 게 어떨지요. 한곰 어른 돌집을 지어달라는 건가요? 식으로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지청구를 해댔다. 아버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알아요. 그냥 돌무덤이 아니라 고을 사람들이 우러르는 마음을 담고 있다는 거. 한곰 어르신도 우리 고을을 위해 힘쓰고 있으니 번듯한 돌무덤을 가져도 된다고 봐요. 숨이 붙어 있는 게 걸리지만 난 멧돼지 고기를 자주 먹을 수 있다면 개의치 않아요.”
“거참, 거참…….”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 한곰 어르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고을에서 쫓겨나겠지. 아휴, 그런 일 없게 하려니 청을 들어 주라고 하는 게 아니냐.”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한곰 어르신이 우두머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 자신의 청을 거절한 토기장이를 흠씬 두들겨 팬 다음 거적때기로 말아 하늬뫼 너머에 버렸지 뭐냐. 다행히 날짐승이 몰려들기 전에 정신이 돌아와 숨은 지켰지만, 소도로 달아나 평생 그곳에서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니? 아휴, 그 아들은 한곰어른과 또래였는데, 사냥을 데리고 나가서 사람을 일부러 다치게 했다고 몰아서 마을에서 쫓아냈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여 볼 요량인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술술 해 주었다. 아들인 들보가 한 살일 때 한곰어른이 우두머리 자리를 이어받았으니 벌써 열 두해 전의 일이었다. 모루는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몸서리칠 정도까지는 아직 체감하지 못할 거 같아요.)
소도는 하늬뫼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남대가람을 따라가면 아버지가 일하는 골짜기가 있고, 그 반대쪽 골짜기 입구에 큰 나무를 세워 북과 방울을 달아놓은 곳에 있다. 억울한 누명을 썼거나 쫓기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곳은 사람들을 함부로 잡아갈 수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 우두머리도 관여할 수 없으며, 제사장인 천군이 관리하였다. 천군은 그곳에서 일 년에 두 번 고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제를 올렸다.
“무슨 청이었는데요?”
모루는 궁금했다.
“한곰 어르신은 곡식을 담는 흙그릇에 힘 센 곰을 새기기를 원했다는구나. 자신을 상징하는 곰으로 말이야. 박달고을 우두머리가 지닌 청동검에 박달나무를 그려 넣었기 때문에 흥한다는 말을 듣고 생각해 낸 거지.”
“엄마, 한곰 어르신도 검에다 그리면 되잖아요. 왜 흙그릇에다 그리려고 했을까?”
“곡식을 담는 흙그릇에 기원을 새기면 농사가 잘 될 거라 믿었고, 농사가 잘 되어 곡식이 쌓이면 농사짓는 장정들이 덜 필요할 테고, 그 장정들을 싸움터로 데려 갈 수 있잖아.”
어머니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데도 아버지는 멀거니 하늬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원하는 대로 해주지.”
모루는 토기장이의 처지가 불쌍했다.
“하려다 망치는 게 태반이었지. 불길이 골고루 퍼지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게지.”
어머니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럼 청을 들어주려다 실패한 거네요.”
모루는 아버지의 처지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여기서 몸서리를 치면서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는 게 어떨지요.)
“아버지, 한곰 어르신의 말씀대로 해 주세요.”
“난 그냥 돌장이가 아니다.”
“알아요. 주위 고을을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큰돌장이죠.”
모루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난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굳은 의지가 보였다. (굳은 의지가 보였다고 직접 서술하기 보다 독자가 느끼게 묘사를 하면 좋을 듯 해요.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식으로요.)
‘내가 처음 돌 일을 시작할 때 한아비는 순리를 거역하지 말라고 당부했지. 금누리 고을이 탄탄하게 자리 잡기 전에 숨 있는 자가 돌무덤 욕심을 부린 적이 있는데, 뫼가 노해 밤새 울더니 산사태가 나서 돌장이의 숨을 앗아갔다는구나. 또 고을은 가뭄을 겪어야 하는 대가를 치렀단다.’
아버지는 가족이 불안해할까 봐 입 밖으로 나오려는 이야기를 꿀꺽 삼켜버렸다.
그때 천군이 손을 앞뒤로 크게 휘저으며 집을 향해 오고 있었다. 아랫배가 출렁거렸다. 목에 걸고 있는 청동거울에 햇빛이 반사되어 가슴께가 번쩍번쩍했다. 청동거울을 걸고 있지 않다면 영락없이 몸집이 넉넉한 이웃 아주머니의 모습일 터였다. (천군이 여자분이군요.)
“오늘 무슨 날인가 보네.”
어머니가 고개를 쭉 빼고 말했다.
“천군님께서 어인 일이세요?”
아버지가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새벽에 한울님께 축원 올리는데 고을이 불에 휩싸이며 큰돌장이님이 보여서…….”
“네, 근심이 생기려니 천군님께 현몽했나 봅니다. 글쎄, 한곰 어르신이 눈을 뻔히 뜨고 숨이 붙어 있는데 돌집을 지으라지 뭡니까? 넋 놓은 모루 아버지한테 그 말을 따르라고 했지만 어디 될 말입니까? 아이고, 천군님. 이제 어떡합니까? 한곰 어르신이 하라는 대로 안 하면 불 보듯이 뻔한 거 아닙니까?”(엄마 말투가 갑자기 습니다 체가 되면서 아버지가 말한 건지 어머니가 말한 건지 헷갈렸어요. 앞의 말투와 비슷하게 하면서 존칭을 하는 게 어떨지요.)
어머니가 하소연을 했다.
모루는 한곰어른의 계획을 막아줄 사람은 천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군님, 우리 아버지 지켜 주세요. 오래 전 토기장이 아재처럼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모루가 간청을 했다.
“그래, 고민해 보자꾸나.” (천군의 말투를 좀 다르게 하면 좋겠어요. 뒤에 나오는 천군 한아비와 자꾸 헷갈려서요. 아줌마천군이라면 좀더 주술사느낌이 강하면 어떨지요. 말도 좀 모호하게 선답식으로 하고요.)
천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머물다 돌아갔다. 어머니는 나물이나 야생열매를 채취하러 들로 나갔다.
모루는 꽃뉘가 생각났다. 꽃뉘라면 아버지 한곰어른한테 말해서 말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루는 재게 금누리 고을 정배기에 있는 한곰어른 집 울타리로 갔다. 꽃뉘가 달려 나왔다. 목에 건 옥돌목걸이가 도드라져 보였다.
“모루 오라버니, 어서 와.”
꽃뉘가 육포를 내밀었다. 모루는 건성으로 받으며 꽃뉘에게 말했다.
“꽃뉘야, 너네 아버지는 널 아주 어여뻐하지?”
“물론이지. 요즘 아버지 기분이 아주 좋아. 오솔 고을에 가서 많은 곡식에다 노예까지 데리고 왔잖아. 아버지는 누구도 엄두 못 낼 일을 할 계획이래.”
“그게 뭔데?”
“숨이 붙어 있을 때 아버지의 돌집을 세우는 거랬어. 그러면 박달 고을까지 힘이 퍼질 거래. 난 오라버니 아버지가 큰돌장이 어른이라서 좋아.”
꽃뉘가 흥감스럽게 말했다. 모루는 꽃뉘에게 돌집 세우는 걸 말려달라고 부탁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래서 망연히 육포만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꽃뉘가 방실 웃으며 말했다.
“난 두 해 잠을 자고 나면 모루 오라버니의 각시가 될 거야.”
모루는 육포를 먹다가 침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그 소리에 들보가 우거지상을 하고 나왔다.
“이 자식, 누이동생 주위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한 번 혼쭐이 나야 정신 차릴래?”
“할 말이 있어서 온 것뿐이야.”
모루가 두어 걸음 물러서며 대답했다. 들보는 같은 해 태어난 열세해 벗인데 한곰어른이 우두머리 훈련을 시키느라 데리고 다니면서부터 유세가 대단했다.
‘자식, 멧돼지만 봐도 오줌을 지리면서....’
모루는 얼마 전 사냥을 갔던 일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날 장정들도 두려워하는 멧돼지를 상대로 화살촉을 날려 명중시켜서 칭송을 받았다.
“왜 모루 오라버니와 놀면 안 되는데? 난 놀 거야.”
꽃뉘가 쌩하니 쏘아댔다.
“아버지가 한 말 잊었니? 박달 고을을 합친 다음에 그 고을 우두머리 아들과 혼인 시킬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 고을을 다스리게 할 거라고.”
들보는 꽃뉘가 철없이 느껴지는지 모루가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모루는 한곰어른의 계획 때문에 꽃뉘를 이웃 박달 고을로 가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난 내가 사모하는 이와 혼인할 거야.”
꽃뉘가 퉁퉁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들보는 꽃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루에게 눈을 부라렸다.
“괜히 큰 코 다치지 말고 썩 꺼져!”
“알았어, 간다 가.”
모루는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힘으로 들보보다 우세하지만 여튼 한곰어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직 돌 일을 가지 않고 누워 있었다. 지금껏 아버지는 남대가람 골짜기에서 돌 일을 해왔다. 그곳에서 돌칼을 만들고 활촉, 반달칼, 방추차도 만들었다.
그러다 우두머리를 비롯해 그 일가들이 죽으면 돌무덤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 중에서 우두머리의 돌집만큼은 존경의 표시로 아주 크고 높아서 하늘을 우러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 생각에 한곰어른이 혼란을 지피고 간 것이다. 숨이 멀쩡하게 붙어 있는데 돌집을 지으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 사냥을 나서다
어이 하나, 어이 하나.
우두머리 돌집이 없으니 넋이 머물 곳 없네.
아들 우두머리가 차일피일 미루다 도리를 못하니
고을이 쇠해져 재앙을 불러 왔네.
우두머리 넋이 고을을 지켜주면 흥할 것을
애통하다, 애통하다. 허이허이…….
‘그런 일이 우리 고을에 벌어지면 안 되지.’
한곰어른은 오솔 고을로 쳐들어가서 곡식 창고를 털고 장정들을 노예로 끌고 돌아오는 길에 본 서낭당 당군의 액풀이가 되살아나서 고개를 저었다. 오솔고을은 천군의 역할을 당군이 하는 것 같았다. 당군의 말처럼 오솔고을은 예전보다 힘이 많이 쇠해져 있었다. 별 저항 없이 창고 문이 열렸고 장정들이 무릎을 꿇었다.
한곰어른은 우두머리 교육을 시켜도 신통치 않는 아들 들보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당군의 말이 자신의 일로 들렸다. 자신의 숨이 다했을 때, 들보가 제대로 못해 고을이 쇠하면 안 될 일이다. 그래서 미리 자신의 돌집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큰돌장이에게 요구한 것이다.
한곰어른도 한아비의 한아비 우두머리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큰돌장이가 꺼리는 게 무언지 알고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 금누리 고을이 자리 잡기 전에 우두머리 자리를 노린 자들이 힘을 과시하려고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돌집 욕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장이들은 산에 있는 바위들을 캐내서 옮겨야 했다. 막상 캐서 옮겨와도 돌집 주인이 다른 걸 요구하여 산은 바위를 내주느라 몸살을 앓았다.
또 다 지어놓고도 다른 이의 돌집과 견주어서 만족스럽지 않으면 부수고 다시 짓기를 원했다. 돌집이 거대하면 자신의 힘도 장대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엄청난 산사태가 나서 돌장이들이 묻히는 일이 벌어졌다. 내리 돌일을 하던 모루네 한아비의 한아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돌장이들은 숨이 있는 자의 돌집은 짓지 않겠다고 했다. 액풀이를 할 때, 산자의 욕심이 불러온 재앙이라는 말이 그런 결심을 굳건하게 한 것 같았다. 돌집을 요구한 자는 멀쩡한데 재앙은 돌장이들이 당해야 하냐고 울분을 터뜨린 걸 보면.
우두머리도 돌장이들의 주장을 반겼다. 고을에 행세하는 사람들의 힘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힘을 키워 우두머리 자리를 넘보는 일을 차단하는 일 중에 하나가 살아서 돌집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금기되어 오던 일이건만 한곰어른은 또래인 모루보다 뒤처지는 아들 들보를 생각하자 조바심이 났다.
‘재앙이라……, 이게 다 우리 고을을 위해서야.’
한곰어른은 마음을 더 단단히 다졌다.
사람들의 등에 머무는 볕이 짧아지고 있었다.
“겨울 한파 전에 한 번 더 나갔다 와야겠군.”
한곰어른은 들에서 수확하는 것을 둘러보다가 겨울채비 사냥을 계획했다. 그리고 천군에게 사냥을 잘하고 올 수 있게 축원제를 부탁했다. 천군은 장정들에게 하늬뫼 가까이에 있는 제단을 깨끗하게 손을 보게 했다.
아침 햇살이 하늬뫼를 비추자, 고을 사람들이 제단으로 몰려들었다. 모루도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갔다. 돼지 한 마리가 제물로 올려져 있었다. 이윽고 허리에 놋쇠 허리띠를 두르고 목에 청동거울을 건 천군이 청동방울을 흔들며 제단을 빙빙 돌며 소리를 했다. 사람들도 천군을 따라 돌며 에헤야 디여! 한울님 은덕일세, 부분을 같이 했다. 모루도 리듬을 살려 따라했다.
한울님이시여, 한울님이시여!
땅을 밟고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우리네들
에헤야 디여! 금누리 고을을 보살펴 주는 한울님 은덕일세.
어진 한곰어른과 더불어
금누리 고을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도
에헤야 디여! 에헤야 디여! 한울님 은덕일세.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무탈하게 사는 것은
에헤야 디여! 에헤야 디여! 한울님 은덕일세.
창고에 곡식 가득하니
감사하고 감사하네.
창고에 고기 채우려니
한울님 이끌어 주소서, 주소서.
……
축원제는 고을 사람들의 한바탕 신명난 놀이판 같았다. 천군의 선소리에 사람들이 따라 부르고, 천군이 목소리를 높이면 사람들도 높였다. 또 천군이 목소리를 낮추면 사람들도 낮추고 천군이 손을 높이 들면 사람들도 높이 들어 하늘을 우러렀다. 또 천군이 빠르게 소리를 밟으면 사람들도 빠르게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몸에 신명이 퍼지는 것 같았다. 한참 신나게 돌던 천군이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그리고 청동방울을 흔들며 한곰어른을 쏘아 보았다.
“고광에 고기를 쌓지 않아도 되는데 어인 일이오.”
천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많이 있어서 흠이 될 게 뭔가?”
한곰어른이 손을 내저었다.
“먹이는 필요한 만큼 취하면 되거늘. 훠이 훠이! 물러나라.”
천군이 청동방울을 흔들며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얼마를 그러더니 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강이 온통 검으니 사냥 대신 남대가람을 따라 둑을 쌓으시오.”
“장마철 흙탕물도 아니고 검은 물이라니 무슨 뜻이오?”
“물이 생명을 다한다는 건 고을 사람들 숨도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하오.”
“우리 고을을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단 말이오?”
한곰어른은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박달 고을이 걸리긴 했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쳐들어 갈 생각이었다. 그 외에는 금누리 고을을 얕볼 고을이 없었다. 사냥을 한 번 더 나가려는 것도 창고에 먹을 걸 여유 있게 쟁여 놓은 뒤, 장정들을 모아 하늬뫼에서 훈련을 시킬 요량이었다.
“사냥을 나가면 장정들 숨이 위험하오.”
천군이 한곰어른에게 다가가더니 나지막하지만 힘주어 말했다. 한곰어른은 잠시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괜히 일을 그르치게 하지 마시오.”
한곰어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천군이 막을 땐 아직도 우두머리가 제사를 겸하는 작은 이웃고을이 은근히 부러웠다. 금누리 고을은 규모가 커지면서 한아비 우두머리부터 고을 제사는 천군이 하고 있었다. 한곰어른은 예전의 청동 방울 소리가 아련했다. (청동기면... 고조선인데 단군왕검은 제정일치의 권력자인데요...)
한곰어른은 천군의 말을 들을 의지가 없었다. 얼마 전에 이웃 오솔 고을에 가서 힘을 보여주고 와서 감히 그럴 고을이 없을 거라 확신한 터였다.
모루는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한곰어른이 자신의 돌집을 세우라고 말한 다음부터 아버지는 도통 말이 없었다.
“아버지, 정말로 이웃 고을이 쳐들어올까요?”
“쯧쯧, 천군의 말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되지. 한울님이 미리 보여줄 때는 예방하라고 그러는 건데.”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혀를 찼다.
“엄마, 한곰 어르신이 사냥을 가지 않겠죠?”
“아마도 고집을 앞세울 게다. 숨이 붙어 있는데도 자신의 돌집을 세우라고 하는 걸 봐라.”
어머니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스러워했다.
제단 터가 정리되고 고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곰어른은 장정들을 데리고 사냥 길을 강행했다. 장정들이 머뭇거리는 낌새를 보이자, 한곰어른은 청동검을 높이 들었다. 햇빛에 청동검이 번쩍 빛을 냈다.
“우리 고을을 넘볼 무리들이 없다는 건 너희도 알지 않느냐? 자, 나를 따르라!”
한곰어른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장정들도 힘을 내서 뒤를 따랐다. 어머니 말 대로 한곰어른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곰어른은 들보를 데리고 갔다. 모루도 데리고 갔는데 어느 날부터 부르지 않았다.
한곰어른이 사냥을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사냥터에서 날짐승의 공격을 받아 숨이라도 앗기는 일이 벌어질까 노심초사였다. 또 남대가람이 검게 되는 변이 생길까 두려워했다.
우두머리 자리를 이어받으려면 누구보다도 용맹해야 한다는 게 한곰어른의 생각이었다. 들보는 열심히 하느라 하는데 한곰어른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들보가 모루보다 못하고 못미더운 모습을 사건으로 보여주면 어떨까요? 계속 설명만 되어 있어서요. 굳이 들보와 모루를 경쟁구도로 가져갈 이유는 없어보이긴 해요. 그저 한곰의 눈에 들보가 부족한 걸로 보이는 걸로 되지 않을까 싶어요. 왠지 들보는 퉁퉁하고 덩치만 클 거 같은 상상이 되요. 모루는 말랐으면서 단단한 아이같고요. ^^)
3. 사라진 아버지
모루가 공터에서 수수를 훑고 있는데 꽃뉘가 찾아왔다.
“오라버니, 바쁘구나.”
꽃뉘가 수숫대를 집어 들었다. 손결이 희고 고왔다.
“넌 그냥 있어.”
모루가 말렸다.
“집이 너무 조용해. 조용하니까 불안해.”
꽃뉘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불안하냐?”
“천군님이 사냥을 가지 말라고 한 게 자꾸 걸려. 별 일 없겠지? 천군님 말대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떡해?”
꽃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너무 걱정 마. 아버지는 금누리 고을의 우두머리 어르신이잖아.”
모루도 말을 하면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난 아버지가 박달 고을을 쳐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들보 오라버니는 그렇게 해야 금누리 고을 사람들이 더 편하게 살 수 있대. 꼭 그래야만 할까? 박달 고을은 그들대로 우리 고을은 우리대로 살면 될 걸.”
꽃뉘 말이 모루 가슴에 머물러 결을 만들고 있었다. 꽃뉘는 한곰어른이나 들보와 성격이 달랐다.
“아버지 힘이 박달 고을까지 퍼질 거라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때는 뭔가 금방 이뤄질 것처럼 우쭐해져. 그런데 천군님이 반대하는 사냥을 나가니 걱정돼.”
“천군님이 청동거울을 가지고 있다면 한곰 어르신은 청동검을 가지고 있잖아. 괜히 번쩍하는 걸 지니고 있겠냐? 아무 일 없을 거야.”
모루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말했다.
“오라버니네 아버지는 아직도 시작하지 않으셨지?”
“지금까지 지켜왔던 생각을 바꾸려니 쉽지 않은가 봐.”
“난 오라버니 아버지가 돌집을 세웠으면 좋겠어. 안 그러면 아버지가 오라버니 가족을 노예로 부리려고 할 거야. 그게 두려워.”
꽃뉘 눈에 근심이 출렁거렸다. 모루도 꽃뉘를 집까지 배웅해 주고 돌아오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이 걱정되었다. 노예가 된다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고을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노예는 주인이 소유한 물건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주인이 죽으면 하늘 길에 시중들도록 무덤에 같이 묻히기도 했다.
한곰어른은 정복욕이 강해 이웃 고을을 쳐들어가 곡물을 바치게 했다. 하지만 박달 고을은 만만찮았다. 그 고을은 땅 넓이도 금누리 고을과 비슷했으며 고을 사람들의 협동심도 뛰어났다. 또 평야가 넓어 곡식의 수확량도 많았다. 한곰어른은 박달 고을만 차지할 수 있다면 매년 봄에 곡물이 부족한 것을 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기 위해 장정들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한곰어른이라, 아버지가 응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게 뻔했다. 모루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고민도 헤아려져 안타까웠다.
모루는 침묵하는 아버지에게 궁금해서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돌 일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의 한아비 한아비부터 내려온 일이지. 남대가람을 바라보고 서 있는 우두머리 한아비의 것도 그렇고 그 옆에 있는 것도 다 너의 한아비 한아비로 이어오면서 이룬 거지. 우두머리 한아비의 돌집을 세울 때는 정말 대단했다. 덮개돌을 얹을 때는 자그마치 장정 몇 백 명의 함성이 울려 퍼졌으니까. 고을 일을 보살피다 간 넋을 하늘로 보내드리는 의식이었지만 고을 사람들의 잔치이기도 했다. 돌집은 그렇게 고을 사람들의 정성과 존경이 담겨 있는 거다.”(아버지는 언제부터 돌일을 하셨냐는 질문에 답이 좀 다른 거 같아요. 모루 네 나이쯤부터라든가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거든요. 그런 답이 나오고 나서 집안 대대로 내려온 일이라고 하면 좋을 듯 해요.)
아버지 얼굴에 생기가 번졌다.
“전 아버지가 하는 돌 일이 자랑스러워요.”
모루는 자신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돌장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곧 풀이 죽어 어깨를 떨어뜨렸다.
“아버지, 꽃뉘 말이 자꾸 걸려요. 설마 노예로 부리지는 않겠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아버지는 얼굴에 불안이 가득한 모루를 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금누리 고을에 밤이 두 번 지나고 해가 떠오르자, 사냥 나간 한곰어른과 장정들이 돌아왔다. 우려했던 것은 다행히 비껴갔다. 장정 한 명이 멧돼지를 쫓다가 바위에서 굴러 발목이 부러진 것 외에는 다들 멀쩡하게 사냥을 마치고 수확물을 들고 돌아왔다. 한곰어른은 의기양양하게 천군을 찾아가 고라니 뒷다리 하나를 떨어뜨려 주며 은근히 윽박질렀다.
“앞으로 제대로 한울님 말을 전하시오.”
한곰어른은 천군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돌아서 나왔다. 그리고 모루 아버지한테로 왔다. 한곰어른은 모루 아버지가 그동안 돌 일을 하지 않은 걸 알고 있었다.
“자네, 내가 한 말 기억하겠지? 장정들은 필요한 만큼 모아 주겠네. 어서 시작하게나.”
“그게 숨이 있는 자의 몫이 아니니 다시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그동안 묵힌 생각을 비췄다.
“그걸 왜 모르겠나?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따르게. 안 그러면 험한 일을 당할 걸세.”
한곰어른은 청동검을 들어 번쩍이며 돌아갔다.
“당신이 뭘 망설이는지 알겠는데, 안 되겠어요. 어서 시작하도록 해요.”
어머니가 채근하며 조밥에 짠지를 곁들여 내왔다.
‘음, 하늘에 계시는 한아비가 보살펴 주시겠지.’
아버지는 자신을 아껴주던 한아비가 힘을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밥이 잘 안 넘어가는지 몇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대가람 골짜기로 향했다. 모루도 아버지를 따라 갔다.
남대가람 골짜기에서 돌 쪼는 소리가 리듬을 탔다. 작은돌장이 아재들이 돌을 쪼아 모양을 낸 다음 부드럽게 다듬고 있었다. 그것은 활촉이 되고 돌도끼가 되고 돌칼이 되었다.
“나오셨습니까?”
작은돌장이 아재들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너도 왔냐? 돌 만지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곧 손에 슬슬 익을 게다.”
칠보 아재가 모루를 반겼다. 칠보 아재는 아버지에게도 말을 건네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하던 일을 계속 하라고 이르고는 우두머리의 돌집에 쓸 덮개돌을 고르려고 바위를 살피러 나섰다. 모루도 묵묵히 아버지 뒤를 쫓아갔다. 여느 때 같으면 길이 험하다고 말릴 텐데 별 말이 없었다.
얼마를 가다 보니 너럭바위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바위의 결을 살폈다. 그 바위로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바위 결 틈새로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를 박았다. 몇 개를 둘러가며 박았다.
모루는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싸준 주먹밥을 꺼냈다. 아버지도 시장한지 일을 멈추고 모루가 펴놓은 주먹밥을 먹었다. 잔대 절임도 집어서 먹었다.
가까운 곳에 땀바구 열매가 보였다. 익어서 빨갰다. 땀바구는 찔레처럼 가시가 있고 열매가 콩만 했다. 열매는 파란색일 때 먹을 만했다. 빨갛게 익으면 퍼석거려 맛이 떨어졌다. 모루는 땀바구 열매를 땄다.
점심을 마친 아버지는 막대를 몇 개 더 박았다. 그리고 골짜기 물을 떠와 박아놓은 막대에 돌아가며 부었다. 그러면 나무가 물을 흡수한 뒤 불어나 바위를 결 따라 떼어내기 쉽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 뒤 골짜기를 내려왔다.
“형님, 쓸 만한 걸 골랐습니까?”
칠보 아재가 물었다.
“흠, 돌집 복은 있는 가보네. 저기 쯤 해서 돌 받을 준비를 해놓게나.”
아버지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작은돌장이 아재들은 아버지가 가리킨 곳에 부지런히 흙을 져 날랐다. 덮개돌을 옮길 때 굴러 떨어지면 깨질 것을 우려해 흙을 퍼 와서 바닥을 폭신하게 해놓아야 했다.
골짜기에서 쩍쩍 소리가 났다. 작은돌장이 아재들은 뫼가 우는 소리가 아닌지 귀를 기울였다. 근래에는 그런 일이 없어 잊히고 있었지만, 흙사태나 바위사태가 나기 전에 뫼는 미리 울어 알려 주었다.
“거참, 당장 덮개돌이 갈라지는 건 아닐 텐데 무슨 소리지?”
작은돌장이 아재들은 궁금했지만 흙을 나르느라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다음 날, 남대가람 골짜기로 간 아버지는 그 소리에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필요한 돌과 바위들을 캐다보니 나무나 바위들이 제 자리에 붙어 있지 못하고 주저앉으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너럭바위를 한 번 더 살피고는 무엇에 쫓기듯이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모루가 물어도 아버지는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모루는 답답해서 꼬리를 흔드는 머엉을 데리고 들로 갔다. 해가 뜨는 쪽은 하늬뫼가 버티고 있지만 남대가람이 보이는 들은 탁 트여 있어 가슴이 후련했다.
“오라버니!”
꽃뉘도 들로 왔다.
“어쩐 일이야?”
“우리 집에 천군님이 오셔서 아버지와 언성을 높이고 있어. 천군님이 오기만 하면 불안해 죽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목소리를 높이는데?”
모루는 아버지가 한곰어른의 돌집을 세우는 일을 하고부터 고을에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부쩍 늘었다.
“돌집 세우는 일을 중단하라는 거야. 안 그러면 고을에 재앙이 온다나?”
“뭐라고? 한곰 어르신은 뭐라고 하셔?”
“우리 아버지 고집을 몰라서 물어? 사냥 가는 것도 말리더니 멀쩡하게 잘하고 왔지 않느냐? 왜 자꾸 안 된다고 하냐고 화를 내시지.”
모루는 꽃뉘에게 집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왔다.
“아버지, 꽃뉘가 그러는데 천군님이 돌집 세우는 걸 중단하라고 하고 있대요.”
“나도 그러길 바란다. 뫼가 울고 있으니 걱정이다.”
“네?”
아버지도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때 천군이 찾아왔다. 한곰어른과 이야기를 한 뒤 바로 온 듯했다.
“어서 오세요. 그러잖아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천군은 아버지를 보자 청동방울을 흔들었다.
“어이 하나? 자네가 몸으로 막아야 하니 어이하나. 자네가 몸으로 막아야 하니 어이하나.”
“천군님, 무슨 말씀인지?”
아버지가 놀라 물었다.
“휴우, 강물이 검게 물들고 고을이 불에 휩싸이는 게 보인다네.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 돌집을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울님이 노한 거네. 필시 고을에 재앙이 닥칠 거네.”
“천군님, 제가 어떡하면 고을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었다. 천군은 뭔가 말하려다 침묵했다. 집 근처 작은 내에서 물을 길러오던 어머니가 둘의 대화를 듣고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일이에요? 모루 아버지, 혹시 부정 탈 일이라도 했나요? 그런가요? 아이고, 천군님. 어떡해요?”
어머니가 천군에게 매달리며 부정 탔으면 어서 풀어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러지 말게. 우리 모두 풀어야 할 문제라네. 그러니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게.”
천군은 긴 숨을 몰아쉬고는 돌아갔다.
모루는 잠깐 동안 벌어진 일이지만 가슴이 벌렁벌렁 했다. 한곰어른이 자신의 돌집을 세우라고 하지 않았을 때는 하루하루 평화로웠다. 한곰어른이 그 일을 하라고 말 한 뒤부터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모루는 어머니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어머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루 아버지, 심장이 벌렁거려 못 살겠어요. 해 줄 거면 얼른 마쳤으면 좋겠어요.”
“서둔다고 될 일인가? 순리가 있는데.”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죽 답답하면 그러겠어요? 얼마 전만 해도 한곰어른이나 천군님이 우리 집에 올 일이 없었잖아요. 뭐가 잘못되었는지, 이렇게 살다간 지레 숨을 놓아버리겠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약한 소리 하기는. 당신은 맘이 여려 탈이야. 모루를 봐서라도 어미가 건강하게 잘 살아야지.”
"저만 그런가요? 아비도 그래야죠.”
어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지 아버지 말을 맞받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약해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려운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잖아요.”
어머니가 눈을 살포시 흘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아버지 일 나가셨어요?”
“아니, 벌써 나가진 않으셨을 텐데.”
어머니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안 보이는데요.”
“근처에 있겠지.”
어머니는 쌀과 조를 섞어 화덕에 밥을 지었다. 모루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 준비가 다 되어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딜 가면 간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지?”
어머니 말에 모루는 발을 걷고 밖을 살펴보았다.
“엄마, 저기!”
모루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기다리는 아버지는 안 보이고 한곰어른이 장정들과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고, 무슨 일이라니?”
어머니는 놀라 정신이 반은 나간 것 같았다.
“돌만이 어디 간다고 했나?”
“아이고 어르신, 우리도 안 보여서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 고을에 살면서 그 부탁 하나 못 들어준다는 말인가? 괘씸한지고. 도망친 게 분명하니 보름달 뜨는 날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봉변당할 줄 알고 있게나.”
“아이고, 어르신. 도망이라뇨? 왜 도망을 치며 어디로 갔다는 건가요?”
어머니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늬뫼 골짜기까지 쫓아갔는데 못 잡았으니 도망이 아니고 뭐겠나? 오늘이 눈썹달 날이니 보름달 뜰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봐 줄 수 없네. 노예살이하거나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네.”
한곰어른은 어머니에게 꽝꽝 어르고 돌아갔다.
“이 일을 어쩌면 좋냐?”
어머니가 하얗게 질려서 탄식을 했다.
“엄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실히 모르잖아요. 그러니 정신 차려요. 아버지가 말했잖아. 엄마가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모루는 눈물이 흐를까 봐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는 이미 떠날 생각을 한 것인가. 모루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버지가 도망을 간 게 사실이라면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곰어른의 돌집을 세워주려고 덮개돌까지 정해 놓았는데. 어머니 말대로 부정 탄 것일까? 모루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모루는 어머니를 봐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어머니는 심하게 놀랐는지 앓아누웠다.
“내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야. 토기장이는 잡혀와 죽음을 당하고 그 아들은 마을에서 쫓겨나고 가족들은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네? 소도에서 평생 살았다면서요?”
“그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안 했던 거지.”
어머니의 낯빛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엄마……, 아버지는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잠시 어딜 가신 걸 거야. 그러니 차분하게 기다려요. 네?”
모루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엄마, 가람가로 나가 볼게요. 거기 가면 무슨 소식이 있을지 몰라.”
모루는 집을 나섰다. 가람을 건너 나루목 고을로 가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알고 있는 게 있는지 물어 볼 참이었다.
가람 가에 가니 모루를 알아보는 아재가 먼저 다가왔다.
“얼마나 맘 고생되었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꼬?”
“네?”
“너희 아버지 도망 쳤다는 소식 들었다.”
“누가 그래요? 아무 말 없이 가셔서 엄마도 무척 놀라고 당황스러워 하세요.”
모루는 아재의 말을 들으니 정말 아버지가 먼 곳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새벽에 한곰어른과 장정들이 누군가를 잡으러 가지 않았겠냐? 그게 바로 너의 아버지였다니, 참.”
아재는 모루가 안쓰러운지 머리를 쓸어주며 힘내라고 격려해 주었다. 혹시 나루목 고을에 가서 무슨 소식을 들으면 전해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모루는 어머니 생각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4. 나루목 고을
남대가람의 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갈대들이 무리지어 바람을 타고 있었다. 뗏목을 타고 나루목 고을로 가려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루목 고을은 남대가람 건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루목 고을은 저자 거리가 형성되어 있어 사람들은 곡물을 가지고 가서 소금이나 생활에 필요한 물건으로 바꿔 왔다.
남대가람을 따라 하늬뫼 너머에는 박달고을이고, 남대가람 서쪽에는 오솔 고을이 있었다. 고을을 벗어나 다른 고을을 갈 때는 고을 경계를 지키고 있는 장정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거기에 비해 나루목 고을은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다만 나루목 고을을 통해 다른 고을 사람들이 금누리 고을로 오면 그곳을 지키고 있는 장정들이 까닭을 물어서 들일지 돌려보낼지를 신중하게 결정했다. 그래서인지 나루목 고을도 이웃 고을과 두루 잘 지냈다. 물건이 오가는 나루터 역할을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루목 고을에 어려운 일이 닥쳐 나루터가 막히면 저자 형성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이웃 고을들도 불편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나루목 고을은 쳐들어가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모루도 뗏목을 타고 남대가람을 건너 나루목 고을에 가보고 싶었다. 다음에 아버지가 소금을 구하러 가는 날엔 따라가 보리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떠난 뒤 집은 어둠이 내려앉은 듯 적막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누워 있던 어머니는 움직일 만해지자, 아버지를 찾는다고 고을을 돌아다녔다. 남대가람 골짜기 작업장에도 가보고 하늬뫼 등성이에도 올랐다.
“엄마, 또 아프면 어떡해요? 집에서 기다려요.”
모루는 가슴이 아팠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말을 잃어갔다.
달이 점점 둥글어지고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까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노예가 되거나 고을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모루는 남대가람 가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고을을 벗어났다면 고을 경계가 심한 곳보다는 남대가람을 통해서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뉘가 다가왔다. 꽃뉘는 모루가 남대가람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릴 때마다 곁에 와서 함께 기다려 주었다.
“오라버니, 배고프지? 이거 먹어.”
꽃뉘는 생선살로 싼 주먹밥을 내밀었다. 머리로는 걱정이 가득한데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자 입맛이 살아났다. 모루는 주먹밥을 세 개나 먹고서야 멈췄다.
“다 먹어.”
꽃뉘가 더 먹으라고 권했다. 모루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렇게라도 배를 채우는데 집 떠난 아버지는 요기라도 하는지 걱정이 몰려 왔다.
“정말 도망가셨을까? 그게 믿어지지 않아.”
“오라버니 아버지는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야.”
모루는 꽃뉘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그날 아버지는 도망치는 누군가를 쫓아갔는데 잡지 못하고 돌아오며 오라버니 아버지를 떠올렸대. 그래서 혹시나 하고 집으로 달려갔는데 오라버니네 아버지가 안 보이니 그렇게 여긴 거지. 그런데 그 사람은 이웃 고을에서 잡혀 온 노예였대. 오라버니네 아버지는 어디 가신 거지? 우리 아버지 말로는 돌아오지 않고는 못 베길 거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오라버니를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들보 오라버니 말로는 그 일이 오라버니한테 불똥이 튈 거라고 했어.” (1.2장에서는 꽃뉘가 아주 어린애같이 보이는 데 여기서는 큰 소녀같아요.)
꽃뉘가 주섬주섬 말했다. 모루도 예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장 뛰어난 돌장이라는 걸 한곰어른은 자랑스럽다고 했다. 한곰어른이 요구하는 대로 했다면 그 자랑스러움이 이어졌겠지만 사라졌으니 괘씸한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처럼. 모루는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루는 밤 새 달빛을 보며 아버지 생각을 하다가 다음 날에도 남대가람으로 나갔다. 여느 날과 달리 한산했다. 물결을 보고 있으려니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눈물이 났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자신도 아버지를 이어 돌장이가 되어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복잡했다.
언제 왔는지 꽃뉘가 뒤에서 모루를 감싸 안았다.
“오라버니, 울지 마. 아직 보름달이 뜨려면 어두운 밤을 일곱 번 보내야 하니 오라버니네 아버지는 그 전에 돌아올 거야. 우리 아버지도 이웃 고을에 갔다가는 꼭 돌아오잖아.”
모루는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물을 훔쳤다.
다가오는 보름달 날은 한 해 동안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게 해 준 한울님에게 감사제를 지내는 날이다. 그 날 사람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가으내 말린 곰취나물을 무쳐서 가져오는가 하면 수수부꾸미를 부쳐 오거나 칡가루로 버무리를 해 오는 사람도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아버지도 좁쌀로 만든 술항아리를 잔치에 내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흘 낮밤을 노래 부르며 맛있는 걸 나눠 먹으며 즐겼다. 그래서 다들 보름달 감사제를 기다리는데, 모루는 그 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졸아들었다.
“야, 꽃뉘랑 놀지 말라고 했지? 말이 안 들려? 귀머거리냐?”
그때 들보가 나타나서 윽박질렀다. 모루는 속에서 불이 확 치솟았다.
“귀머거리? 차라리 귀머거리였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차라리 귀머거리였으면 좋겠다고!”
모루는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들보에게 다가섰다.
“왜, 왜 그래?”
들보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을 쳤다. 모루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참아. 우리 오라버니 성격 몰라서 그래?”
꽃뉘가 가운데 서서 말렸다. 그런데 그 틈으로 들보의 주먹이 모루의 눈으로 날아왔다.
“자식, 어디서 까불어. 봐라, 우리 누이동생이 누구 편인가.”
들보가 비열하게 웃었다.
“오라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누구랑 놀던지 무슨 상관이야? 오라버니는 아버지를 이어 우두머리가 되는데 관심을 쏟으면 되잖아. 왜 나까지 신경 쓰고 그래?”
꽃뉘가 소리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걸 몰라서 물어? 난 아버지의 뜻을 따를 거야. 이웃 박달 고을만 차지하면 우리 고을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고을이 되지. 그 고을은 네가 가서 다스리게 할 거야. 물론 박달 고을 우두머리 아들과 혼인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안심하고 금누리 고을과 박달 고을까지 다스릴 수 있잖아.”
“쳇. 누가 박달 고을로 간댔어? 내 생각은 묻지도 않고……. 그냥 어디로든 확 떠나고 싶어.”
꽃뉘가 화를 내고 달려갔다.
“잘 한다. 남의 누이동생 꾀어 물들일 게 없어 도망치는 걸 물들였냐?”
꽃뉘의 행동을 보며 들보가 이죽거렸다.
“이 자식이!”
모루는 악이 목까지 치받쳤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들보는 힘으로 모루를 당할 수 없는지 뒷걸음치며 헛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다 손에 잡히는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는 얼굴을 타격했다. 얼굴이 얼얼했다. 윗입술이 터져 피가 입속으로 고였다.
“야, 싸워보자고. 그렇게 떵떵거리는 네 놈 어디가 그렇게 잘났는지 끝장 날 때까지 붙어 보자고.”
모루가 얼굴이 벌게져서 다가가자, 들보가 더는 안 되겠는지 줄행랑을 놓았다.
“너도 별 볼 일 없네. 겁쟁이 녀석! 으아악!”
모루는 목울음을 토해냈다.
“아버지, 어디 가신 거예요? 엄마와 나는 어떡하라고요? 어서 돌아오세요. 어서 오시라고요!”
얼마를 소리치다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어머니 생각을 하니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루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왔다. 집 앞 공터에 말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보아 한곰어른이 왔다간 것 같았다. 아버지 흔적을 찾으러 온 듯했다.
모루는 어머니에게 날 밝는 대로 남대가람을 건너 나루목 고을로 갔다 오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모루의 몰골을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그렇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예전 같으면 등으로 손이 몇 대 날아왔을 것이다.
“엄마, 우리 고을을 떠난 사람들이 나루목 고을을 거쳐 가는 경우가 많대. 그러니 거기 가서 아버지를 찾아보려고 해요. 너무 걱정 말아요.”
모루는 손에 물을 묻혀 입술에 붙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쓰라렸다. 어머니는 말없이 등을 보이고 누웠다. 모루도 어머니 옆에 웅크리고 누웠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나루목 고을에 가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헛걸음을 하면 어머니는 또 얼마나 실망을 할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뒤척이다 그루잠을 잤는지 눈을 떠보니 밖이 훤했다.
어머니는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모루가 준비를 마치자, 어머니가 베보자기에 싼 주먹밥을 내밀었다. 그리고 눈으로 잘 갔다 오라는 인사를 했다.
“엄마, 정신없이 다니시지 말고 제발 집에서 기다려요. 얼른 갔다 올게.”
모루는 목이 메는 걸 꾹 참고 집을 나섰다. 남대가람에는 쉬고 있는 뗏목이 없었다. 모루는 뗏목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가람 물을 내려다보았다. 여름에 아버지와 함께 물고기를 잡던 일이 떠올랐다. 펄떡 거리는 놈을 꼬챙이에 꿰어 구워먹던 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그런 일상이 이제 아련한 옛일로 느껴졌다. 또 하늬뫼에서 머루나 다래를 따먹기도 했다. 온통 입가를 물들여서 아버지 일하는 골짜기로 내려오면 허허 웃으며 반겨주었는데 그것 또한 까마득한 일처럼 여겨졌다.
기다리던 뗏목이 왔다. 모루는 챙겨온 수수자루를 건네고 뗏목에 올랐다. 유유히 흐르는 가람 물을 보며 나루목 고을에 가서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가람 줄기는 앞으로 가다가도 어느 순간 허리가 휘듯이 휘돌았다. 그럴 때마다 가람으로 떨어질까 등줄기가 서늘했다. 뗏목장이 아재는 지금이 늦가을이니 망정이지 한여름이면 배암들이 뗏목을 타고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없는 말이 아니여. 언제는 꽃나이 젊은 연인이 서로 안고 있는 발밑으로 배암이 지나갔다니까. 둘은 놀라 가람으로 빠졌는데 배암은 자신이 손님인 양 떡하니 혀를 날름거리며 있잖어. 나라도 정신을 놓지 않았기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다니까.”
“아재, 그만해요.”
모루가 손사래를 쳤다.
“하도 얼굴이 굳어 있어서 실없는 말이라도 해 봤다.”
뗏목쟁이 아재가 헛웃음을 날렸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는 듯했다. 한곰어른은 아버지한테 돌집을 지으라고 하고, 들보는 꽃뉘와 어울린다고 싸움을 걸어오고, 모루는 며칠 사이의 일이 서글퍼 한숨이 나왔다. 한곰어른과 들보를 생각하면 꽃뉘도 보기 싫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그런 중에도 머리에 각인된 배암의 환영은 자꾸 눈앞에 떠올라 몸을 사리게 했다. 아버지 모습을 그려보는데도 혀를 날름거렸고 꽃뉘 생각을 해도 배암의 모습이 끼어들었다. 배암의 혀는 이내 들보의 무지막지한 주먹으로 변해 모루를 향해 날아왔다. 모루는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하고 머릿속을 비웠다. 그렇게 가람을 굽이굽이 돌아 드디어 나루목 고을에 도착했다.
뗏목쟁이 아재는 돌아갈 때 만나자고 하고 기다리는 손님을 태우고 떠났다. 아재는 그 손님에게도 배암의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모루는 사람들 발길을 따라 저자 거리로 갔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은 금누리 고을과 딴판이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것부터 달랐다. 저자거리에 놓인 물건들에는 가람에서 잡은 참게와 가람의 몇 배를 품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와 해초도 있었다. 또 벼, 수수도 보였다. 잔대 향이 나는 곳을 보니 잔대 외에도 모싯대와 엉겅퀴 뿌리 들이 놓여 있었다.
모루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한 곳에 눈길이 멎었다. 그곳에는 반달칼, 갈돌, 곱돌구슬 외에도 값진 놋쇠 허리띠, 놋쇠덩이 들이 있었다.
‘놋쇠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데…….’
모루는 잠깐 혼란이 왔다.
“얘야, 뭘 그리 넋 놓고 있느냐?”
놋쇠덩이를 닦고 있던 한아비가 물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흘려내려 바람에 날렸다.
“여기 있는 물건은 아무나 지닐 수 있는 건가요?”
모루는 놋쇠들을 가리켰다.
“아무나 뭣 하러 지녀? 지닐 사람이 지니면 되지.”
“그렇지요.”
모루는 물건을 구경하느라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그러다 아버지 생각으로 돌아와 가슴이 짜르르 아팠다. 새로운 물건에 정신을 판 것이 부끄러웠다.
‘휴우,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모루가 한숨을 토해냈다.
5. 꽃뉘의 옥돌목걸이
저자 거리 사람들의 발길은 무척 분주했다. 모루는 그들 틈으로 느적느적 걸으며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볼지 생각에 잠겼다. 딱히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놋쇠 파는 한아비에게 갔다.
“다시 올 줄 알았구먼.”
한아비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떻게요?”
“근심이 온몸의 기를 다 앗아가고 있어,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고 있는 형색이구나. 쯧쯧.”
한아비가 혀를 찼다. 모루는 울컥 눈물이 났다. 가슴에서부터 술술 한탄이 나왔다.
“한아비, 가슴 아파 죽겠어요. 제가 이렇게 아픈데 아버지는 더 아플 거예요. 집 떠난 우리 아버지를 찾고 싶어요. 아니,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보름달 날까지 안 오시면 엄마와 저는 노예로 잡혀 갈 거예요.”
“아무리 짓누르는 돌이라도 내려놓으면 되는겨. 마음 안에 하늘이 있잖어. 내려놓고 기다려. 아버지는 돌아올 거여. 그러니 마음 돌 내려놔라!”
“정말인가요?”
모루는 한아비 말을 믿고 싶었다.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다. 괜히 고생하지 말고 돌아가 기다려라.”
한아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아버지 소식을 물어보고 찾아 봐야겠어요.”
모루는 한아비 곁을 떠나 저자거리를 다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버지의 모습을 설명하고 보았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모루는 발도 아프고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어디 계신 거예요?’
모루는 아버지가 그리워 울컥했다. 돌아올 테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는 한아비 말을 믿고 싶었다. 모루는 힘을 내서 일어나 한아비한테 갔다.
“저저, 돌아가 기다리래도.”
한아비가 핀잔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오시겠지요? 정말이지요?”
“믿는 대로 되는겨. 어여 가 봐라.”
“믿는 대로 된다면, 전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걸 굳게 믿고 싶어요. 믿을래요.”
모루는 아버지가 돌아 올 거라는 확신을 품었다. 그리고 말을 늘어놓으면 확신이 사라질 까 봐 조심스럽게 자리를 떴다. 몇 발짝 가서 돌아보니 한아비가 손을 들어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모루는 돌아갈 뗏목을 기다렸다. 놋쇠 한아비 말이 강렬하게 각인이 되어서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좋은 일이 있냐? 아까부터 싱글거리고.”
소금자루를 진 아재가 모루에게 말을 걸었다. 아재는 뗏목을 기다리는 게 무료한 듯했다.
“희망이 생겼어요. 어둠이 걷히고 하늬뫼에 해가 떠오르듯이 제 마음에 푸르러졌어요.”
“녀석,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야지.”
아재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놋쇠 한아비는 참 신통해요. 어떻게 제 얼굴에서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을까요? 한아비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천군 한아비 말이구나. 원래는 다른 고을의 천군이었는데 혼인한 그 고을 우두머리 딸을 사모해서 밤에 도망쳤다는 얘기가 있어. 나루목 고을에 왔을 때 지니고 있는 건 제를 지낼 때 쓰던 청동거울과 청동방울들이었대. 그걸 바탕으로 놋쇠를 팔게 되었다더라.”
모루는 한아비가 놋쇠덩이를 닦던 모습이 생각났다.
“천군한아비셨군요.”
모루는 더욱 한아비의 말에 믿음이 실렸다.
“그렇지.”
“전 청동검이나 청동거울을 파는 게 이상했어요.”
“고을 우두머리가 지니는 청동검이나 천군들이 지니는 신성한 청동거울들을 어떻게 팔 수 있냐는 거지? 저자 사람들도 궁금해서 물어보았지. 한아비 말이 지내보니 누구나 마음 안에 하늘이 있고, 한울님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말도 했어. 처음엔 그 말이 무언가 했는데 소금 팔러 이 고을 저 고을 다니다 보니 정말 변하는 게 확실해. 이제 놋쇠 시대는 서서히 사라질 거야. 어떤 고을에는 놋쇠보다 철을 더 쓰고 있지. 철은 청동인 놋쇠보다 강해서 농사짓는 쟁기로 쓰이고 있었어. 보습이나 낫, 호미 등을 만들어 쓰던걸.”
아재는 보고 들은 게 많은 것 같았다. 모루는 마음 안에 하늘이 있고, 한울님이 있다는 말을 되새겼다.
“그런데 뭘 그렇게 읽었다는 거냐?”
아재가 물었다. 모루는 마음이 두둥 부풀어 올라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온대요. 곧 돌아온다고 했어요. 보름달 뜨기 전까지 돌아와야 하거든요.”
“금누리 고을 큰돌장이님 말하는 거냐?”
아재는 들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네, 우리 아버지예요.”
“사흘 전에 금누리 고을에 갈 때 뗏목장이한테 들었다.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금누리 우두머리 어르신은 왜 그러냐? 농사지을 땅이 넓어진 고을들은 점점 돌무덤을 짓는 장정 동원이 어려워져 다른 방법을 고민하는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모루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놀랐다.
“돌무덤 하나를 세우려면 장정이 많이 필요하고, 농사를 지으려면 또 일손이 필요하고. 그러니 방법이 나와야 하지 않겠냐.”
모루는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아도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 말은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뗏목이 들어왔다. 모루는 소금장수 아재와 헤어져 뗏목을 탔다.
“볼일은 잘 봤냐?”
뗏목장이 아재가 물었다.
“네, 나루목 고을에 가길 잘 했어요.”
모루는 밝게 대답했다. 마음 한 구석에 혹시, 하는 불안이 삐져나오려고 할 때마다 얼른 떨쳐냈다. 가슴 가득 차 있는 믿음을 놓을 필요가 없었다.
“잘 됐구나.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나?”
뗏목장이 아재가 말했다.
“아재, 배암 얘기 하려면 하지 마세요.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 배암이 제 몸을 감고 있는 듯해요.”
모루는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나루목 고을로 갈 때와 달리 바람이 상쾌했다. 모루는 아버지를 맞을 준비를 할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짚도 새로 말린 것으로 깔아놓고 손을 쬘 수 있게 불화로도 들여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왔다. 잘 가라.”
아재가 가람 가에 뗏목을 대며 말했다. 어느 새 해가 뉘엿 넘어가며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모루 오라버니!”
꽃뉘였다.
“어쩐 일로?”
“오라버니가 떠난 걸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꽃뉘 눈에 눈물이 찰방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우리 아버지가 모르는 게 있남. 오늘 천군님이 왔을 때 아버지가 말하는 걸 들었어.”
“천군님이 왜 오셨는데?”
“곧 감사제를 올려야 하니까 의논하러 온 거지.”
“그런데 네가 왜 걱정하니? 또 들보한테 얻어터지게 하고 싶어?”
모루가 퉁바리를 주었다. 그래도 꽃뉘는 무사히 돌아온 것이 기쁜지 방시레 웃었다.
“들보가 심술 나서 누이동생 모셔 가려고 난리 피울까 걱정되니 어서 집에 가.”
모루가 꽃뉘 등을 밀었다.
“괜찮아. 이젠 들보 오라버니가 그러지 않을 거야. 다시 그러면 콱 죽어버린다고 했거든.”
꽃뉘가 말을 하고는 머쓱해 했다. 그래서인지 모루를 따라오며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모루는 꽃뉘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아버지가 돌아 올 것을 확신하면서도 보름달이 뜨기 전에 와야 한다는 걱정도 섞여 있었다.
“나, 집에 간다고!”
꽃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래. 잘 가.”
모루가 손을 들어보였다. 그런데 꽃뉘는 바로 가지 않고 모루에게 다가오더니 목에 건 옥돌목걸이를 벗어 모루에게 걸어 주었다. 그리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이, 이건…….”
“가람에서 기다리며 오라버니가 오기를 빌었어. 그래도 안 보이기에 이 목걸이에 대고 맹세했어.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목걸이를 줘야겠다고. 이 목걸이는 아버지가 이웃 고을에 갔다 오면서 선물로 준 건데 이제 오라버니가 임자야.” (이건 좀 뜬금없는 상황같아요. 오히려 모루아버지가 돌아오신 뒤에나 모루가 이 마을을 떠날 때 주는 게 더 나을 듯해요.)
꽃뉘는 빠르게 말하고 종종 걸음을 쳤다. 모루는 꽃뉘에게 멍하니 서 있었다. 꽃뉘가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모루도 손을 흔들었다. 나루목 고을 놋쇠 한아비가 혼인한 우두머리 딸과 사모의 정을 나누다 고을을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루는 옥돌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집에 도착하니 초조한 모습으로 어머니가 반겼다.
“엄마, 내 말 잘 들어. 아버지는 반드시 돌아오셔. 언제, 어떻게 오시는지 알려고 하지 마. 나도 그것까지 말해 줄 수는 없어. 오시는 건 확실해.”
모루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어머니의 눈을 보고 말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바람이라는 표시였다.
“엄마, 그러니 이제 말 좀 해요.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모루는 어머니가 도통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어머니가 모루의 목을 가리켰다.
“그거 말이야.”
“어? 말을 하네.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모루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엄마, 아버지 돌아오면 다 잘 될 거예요.”
어머니는 모루가 하고 있는 목걸이를 만졌다.
“웬 거니?”
“아, 이거…….”
모루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숨길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말했다.
“엄마도 알잖아요. 꽃뉘 거라는 거. 오다가 만났는데 이걸 목에 걸어주더라고. 내가 돌아와서 반갑다나.”
“꽃뉘가 널 사모하는 가보다. 네 아버지도 날 사모한다며 목걸이를 걸어주었는데.”
“에이, 그냥 누이동생이에요.”
모루가 고개를 저었다. 모루는 복잡한 생각은 거두고 아버지 오기 전에 집 주위를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내일 새 짚을 깔아요. 불화로도 들여놔야겠어.”
모루는 밤하늘을 밝히는 달을 쳐다보았다. 달은 모루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제보다 더 살을 통통 불리고 있었다.
6. 마음 안의 하늘
감사제를 올릴 준비로 고을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추수를 마친 사람들은 넉넉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다 뭔가 가슴 한 쪽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가람 가에 세워진 돌집들을 보며 큰돌장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곰어른은 감사제를 지내기 전에 물을 막아놓은 보 둑을 손 봐야 한다고 집집마다 장정들을 불러냈다. 보를 만들어 비가 많이 오면 물을 가둬 놓았다가 논에 물을 보내 농사를 지었다. 고을 일에 참석을 안 하면 곡식이든 누에실이든 귀한 물건을 대신 내놓아야 했다. 그만큼 협동을 요구했다.
모루는 아버지 대신 보로 나갔다. 한곰어른 옆에 들보도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우두머리가 되려면 배워야 할 게 많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흙과 돌로 쌓은 보 둑을 차근차근 살폈다. 금이 가거나 물이 셀 낌새가 보이면 흙을 개서 발랐다. 모루는 연장을 들거나 허드렛일을 도왔다.
“안됐다. 네가 나오다니!”
들보가 옆에 와 깐죽거렸다. 모른 척하면 좋겠는데 그럴 위인이 못 됐다.
“아버지는 곧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 까불지 마.”
모루가 아랫입술을 악 물었다.
“눈에 보여야 온 줄 알지, 말로는 누가 그런 소리 못하냐?”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는 거야. 내 마음에 있는 한울님이 알려줬거든.”
모루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가 천군님이라도 되냐? 어떻게 한울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냐?”
들보가 빈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루는 놋쇠 한아비가 말해 준 마음 안의 하늘을 믿을 생각이었다.
보를 살피는 일이 끝나자, 한곰어른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좁쌀로 담근 술을 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고을 일을 잘 하면서 왜 공을 깎아 먹는지 모르겠어.”
갈증이 났는지 술을 벌컥벌컥 마시던 어떤 아재가 말했다.
“나도 그게 안타까워. 고을 사람들 입 풀칠하지 않고, 이웃 고을한테 당하지 않고 화평하게 살게 하면 그게 덕인데 말여.”
“누가 아니래. 그러다 숨이 다하면 고을 사람들이 번듯하게 돌집을 지어 줄 텐데.”
사람들이 한곰어른의 욕심을 못마땅해 했다.
“아마 연유가 있어 그런다지. 이웃 고을 당군 말이 그 고을이 죽은 우두머리 돌집을 세우지 않아서 힘이 쇠해졌다고 했다드만. 이 일 저 일로 세우지 못했었나 봐. 서낭 당군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우리 고을도 그런 일이 생기게 될까 봐 걱정이 된 거지. 그래서 숨이 있을 때 돌집을 지으려고 한 거고. 그건 넓게 생각하면 우리 고을을 위한 거라고 생각되네.”
이렇듯 우두머리의 행동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순리라는 게 있지 않나. 순리를 거역하면 변이 생기는 거네. 이번 큰돌장이님 일을 봐도 그렇다네. 큰돌장이님처럼 돌집 짓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어른도 드물지 않나. 그런 어른이 우리 고을을 떠났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칠보 아재가 말했다.
모루는 눈물이 나려고 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모루야, 힘들어도 잘 견뎌라. 네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안다. 아무 연유 없이 행동할 사람이 아니다.”
칠보 아재가 모루의 등을 쓸어주었다. 모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술자리는 점점 더 거나해져갔다.
모루는 계속 머물 까닭이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곤해서 누웠다. 하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늬뫼에서 밤새 날짐승들 울음소리가 들렸다.
날이 밝자,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확신을 지키기 위해 모루는 가람 골짜기로 갔다. 그곳은 작업하다 놔둔 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루는 잠시 하늘을 우러렀다. 누구나 마음 안에 하늘이 있다는 나루목 고을의 놋쇠 한아비의 말을 되살려 보았다.
‘난 내 하늘을 믿고 내 한울님을 믿어.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내 믿음을 믿어.’
모루는 뾰족한 돌칼을 들고 어른 키만 한 판판한 돌 위에다 소망을 새기기 시작했다. 하늬뫼에 해가 떠오르면 아버지의 웃음이 피어날 거라는, 웃음이 가람 골짜기를 울려 퍼질 거라는 믿음을 새겼다. 먼저 둥근 해가 그려지고, 둥근 아버지 얼굴이 그려지고, 둥근 눈이 그려졌다. 돌칼을 든 손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히고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는 피부가 까져 쓰라렸다. 모루는 판돌에다 그림을 그린 뒤 홈을 파서 새겼다. 그러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모루는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었다.
“모루 오라버니!”
꽃뉘가 왔다.
“오라버니 집에 갔다가 여기 있다는 걸 들었어. 너무 힘들게 그러지 마. 불쌍해 죽겠어.”
꽃뉘의 눈망울이 눈물로 지금지금거렸다. 모루는 꽃뉘의 고운 마음이 보여서 고마웠다.
“예까지 뭘 오고 그러냐?”
생각과는 다르게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내가 챙겨 줘야지 누가 오라버니를 챙겨 주겠어? 이거 먹어.”
꽃뉘가 머위 잎에 싼 수수범벅을 내밀었다. 꽃뉘의 정성은 참으로 지극했다.
“너처럼 세상 근심 없는 애가 왜 고생을 만들어 하는지 모르겠다.”
모루는 고을 우두머리 딸로 부족한 게 없는 꽃뉘가 왜 자신에게 살갑게 해주는지 궁금했다. 어려움을 겪으면 생각도 여러 갈래가 되는지, 예전에는 친한 것이 당연했는데 이젠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도 고민이 많아. 언제 박달고을로 갈지 모르잖아. 난 죽어도 박달 고을로 가지 않을 거야.”
꽃뉘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널 박달고을로 가지 않게 할게.”
모루는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 나왔다. 마음 안에 있는 하늘의 소리일까? 모루는 당황스러웠다.
“고마워. 모루 오라버니는 아버지 자리만 이어 받을 때를 고대하는 들보 오라버니와 달라. 그래서 난 모루 오라버니가 좋아. 사람 일은 모르니까 그 말 안 지켜도 원망 안 할게.”
꽃뉘가 새침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보내면 거절할 힘이 없다는 걸 위로 두 언니를 보고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언니도 그런 식으로 혼인해서 살고 있었다. 다른 고을 우두머리들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곰어른은 꼭 그렇게 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골짜기는 들녘보다 빨리 어둠이 깔렸다. 모루는 가람 골짜기를 내려왔다. 꽃뉘가 모루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따뜻했다.
“천군님은 아버지한테 남대가람을 따라 둑을 쌓으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없나 봐. 뭐가 두려워 힘들게 그러냐고. 아버지와 천군님의 의견이 달라 불안해.”
꽃뉘가 우울해 했다. 천군이 한곰어른을 만나러 왔다 간 것 같았다. 예전에는 한곰어른이 한울님 소리를 들으려고 천군을 찾아가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 들어 무슨 일인지 천군이 직접 가는 경우가 잦아졌다. 남대가람을 따라 둑을 쌓으라고 하는 건 박달 고을을 경계해서 말하는 것이다. 박달 고을이 쳐들어온다면 남대가람을 따라 와야 했다. 그래서 둑을 쌓아 놓으면 쳐들어온다 해도 방어하기 수월할 것이다.
모루는 꽃뉘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둥그렇게 몸을 부풀리는 달을 보는 게 두려워 바닥만 보고 걸었다.
집에 도착한 모루는 망부석처럼 발길을 멈췄다. 낯익은 발이 보였다. 심장이 쿵쿵거려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집 공터에 서서 모루를 보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
“모루야!”
아버지가 모루를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먼저 아버지를 맞이했는지, 음식 장만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당신, 어서 한곰 어르신께 갔다 와요. 저 달 안 보여요. 저게 당신 숨이 세 밤 남았다는 증표예요. 아휴, 심장 다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어요.”
어머니가 잔소리를 했다. 모루는 엄마가 건강해진 증표라는 생각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 우리들 마음 안에 하늘이 있대요.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한울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대요. 이렇게 아버지가 돌아온 걸 보면 그 말이 참말이었어요.”
모루는 좋아서 눈물이 찔끔 났다.
“걱정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 어서 갔다 오래도요. 그래야 마음이 놓여서 그래요.”
“가긴 가지만, 벌써 알고 있을 거요.”
아버지는 한곰어른의 집으로 향했다. 모루도 아버지를 따라갔다. 조금 전에 헤어진 꽃뉘가 간 길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리아리했다.
“아버지, 그동안 어디 갔었어요? 전 혼인하면 가족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예요.”
모루는 말 나온 김에 자기 생각도 말해 버렸다. 아버지가 무릎을 굽혀 모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린 게 아니야. 그럴 수밖에 없었어. 천군님이 우리 집에 온 날, 기억하지? 그때 천군님이 남대가람이 온통 검다며 고을의 재앙을 예언했을 때, 나도 그 말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곰어른의 돌집 짓는 걸 멈춰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대로 강행하다가는 하늬뫼에서도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밤에 천군님을 찾아 소도로 갔다.”
“아, 소도요?”
모루는 천군이 관리하는 소도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는 소도를 말하고 있었다. 소도는 고을을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억울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모루는 아버지가 소도로 갔을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래, 소도에 가서 천군님께 내 생각을 말했다. 가람의 재앙만 말하는데 뫼의 재앙도 있을 거라고. 천군님은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날 붙잡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곳에서 며칠만 있으면 한곰어른을 만나 결판을 짓겠노라고. 나는 곧 일이 매듭지어질 줄 알았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단다. 그곳에 한곰 어르신에게 쫓겨 들어온 장정 서넛이 한곰의 돌무덤 일을 아는지, 날 움집에 가두고 윽박을 질렀다. 한곰 끄나풀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나도 돌집 짓는 걸 중단하길 원하지만 맹세한들 지킬 수 있는 일도 아니잖냐. 그래서 원하는 답을 줄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천군이 호통을 쳐서 날 구해 주었지. 그런데 천군님이 전하는 소식은 절망적이었어. 한곰어른의 고집은 여전하고, 넌 가람 건너 나루목 고을을 갔다 하고, 곧 노예로 잡아 갈지 모른다는 말도 얼결에 하더라. 사냥을 말릴 때도 어긋나지 않았냐며 한곰어른이 큰소리치는 통에 천군님은 애를 태우기만 했다. 결국 천군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게 무리인 것 같아집으로 가겠다고 했지. 천군님도 가겠다는 날 붙잡지 않았어.”
“그랬군요. 난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었어요. 돌집 짓는 걸 하지 않으려고 도망쳤다는 말이 속상했어요. 도망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불안하고 초조했어요. 그런데 나루목 고을에 가서 놋쇠 한아비를 만나고 오면서 심지가 생겼어요. 아버지는 돌아온다! 이렇게 마음 안에 믿음이 가득 찼거든요.”
“그래그래. 믿어줘서 고맙다.”
아버지는 그제야 모루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어서 가요.”
모루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바라보기가 두려웠던 달빛이 참으로 은은했다.
7. 보름달이 뜨다
아버지는 한곰어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어르신, 걱정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곰어른은 아버지가 돌아 왔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그리 놀라지 않았다.
“흥, 달아나 봐야 거기가 거기지. 내 그늘을 벗어나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달아나다니요? 그건 아닙니다. 사정이 좀 있었을 뿐입니다.”
“보름달 뜨기 전에 왔으니 더 이상 캐묻지 않겠네. 그러니 되도록 빨리 하던 일을 계속하게나.”
한곰어른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곰어른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나왔다.
“아버지, 저 달빛이 참 요상해요.”
아버지와 나란히 걸으며 모루가 말했다.
“뭐가?”
“어제만 해도 저 달빛은 제 마음에 온통 어둠을 주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을 주고 있어요. 역시 놋쇠 한아비 말이 맞아요.”
“마음 안에 하늘이 있다는 거 말이냐?”
“네, 이제부터 제 마음 안에 있는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일 거예요.”
“녀석도, 한울님이 무슨 말씀이라도 하면 아비에게도 해 줘라.”
모루는 모처럼 함박웃음을 웃었다.
어머니가 집 안에 마른 풀을 깔아 놓았다. 불화로도 가운데 놓여 있었다. 모루는 불화로에 다가가 손을 쬐었다. 참나무를 태워서 나온 숯이 벌겋게 달아 포근하게 해 주었다.
“바짝 추울 때 어쩌려고 벌써 불화로를 들여 놨소?”
아버지가 한겨울을 걱정하며 불화로 곁으로 다가앉아 불을 쬐었다.
“걱정 말아요. 그동안 집 떠나 고생한 당신 생각해서 임시로 놓은 거예요.”
어머니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고맙소.”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화목한 분위기였다. 모루는 이렇게 오래도록 살았으면 싶었다.
다음 날 아버지는 돌 일을 시작하면 짬을 내기 어렵다며 움집의 지붕 갈이를 했다. 그 동안 지붕을 덮고 있던 풀은 낡아서 새로 해야 했다. 칠보 아재가 와서 거들었다. 낡은 지붕을 벗겨내고 풀들을 비가 새지 않을 정도로 켜켜이 두르고 칡덩굴로 단단히 엮었다. 거무칙칙하던 지붕이 반지르르해졌다.
그렇게 하루해가 훌쩍 저물었다. 어머니는 화덕에 돌판을 얹어 놓고 수수범벅을 만들고 말려 놓은 육포를 꺼내는 등 술상을 마련했다. 칠보 아재는 가으내 뜯어 말린 취나물이 쌉싸래하니 맛있다며 잘 먹었다. 모루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다가 얼큰해지면 한 데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게 신기해서 손으로 슬쩍 술을 찍어 맛보았다. 들큼했다. 이런 맛인데 어떻게 흥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형님, 이제야 맘이 놓이는구먼요. 어딜 가면 간다고 귀띔이라도 해 주고 가세요. 애간장 다 녹아들게 하지 말고.”
기분 좋게 좁쌀 술을 몇 자배기 마신 칠보 아재가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 일은 그만 입에 올리게. 낸들 맘이 편했겠나.”
아버지가 칠보 아재 자배기에 술을 따랐다.
“그나저나 욕심으로 하늘을 거스르면 안 되는데, 전 욕심 안 부리고 감사하며 살 겁니다.”
칠보 아재 말에 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드디어 감사제를 올리는 날이 왔다. 제단에는 곡식들이 올려 있었다. 울긋불긋 과실도 보이고 돼지 한 마리도 놓여 있었다.
그렇게 감사제 준비가 차근차근 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남대가람 골짜기로 가서 돌집 덮개돌이 될 바위를 살폈다. 나무가 물을 먹어 불어나면서 바위가 떼어내기 쉽게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불안한 주위 바위들을 건들지 않고 덮개돌을 떼어내는 게 일이었다. 아버지는 골짜기 밑으로 폭신하게 쌓여진 흙더미와 그 위에 놓인 풀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감사제를 올리는 곳으로 왔다.
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제단에서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천군이 먼저 소리를 하면 역시 고을 사람들이 제단을 돌며 소리를 따라했다. 한곰어른은 청동검을 들고 제단 옆에 서 있었다. 들보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하늬뫼에 높이곤 떠올라 우리 고을 보살펴 주시는 님은 누구인가?
크고 높은 한울님 은덕이라네.
남대가람 구비 흐르는 물 다스려 물고기를 주시는 님은 누구인가?
크고 높은 한울님 은덕일세.
너른 들판에서 곡식들이 잘 자라 열매 맺게 하는 님은 누구인가?
크고 넓은 한울님 은덕일세.
감사하세 감사하세.
한울님 은덕에 감사하세.
......
천군의 소리는 사람들 입으로 이어지고 이어졌다.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하늘에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고을을 환하게 비추었다. 사람들의 얼굴도 달빛만큼 넉넉했다. 그렇게 수십 번을 제단 둘레를 돈 다음 천군이 제단을 우러러 큰 절을 올렸다.
“한울님, 금누리 고을 서로 위하며 잘 살게 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우리 고을의 정성을 받으사 내년에도 풍성함을 내려 주소서.”
천군을 따라 고을 사람들도 큰 절을 올렸다. 그런데 어느 새 달무리가 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우르르 쾅, 천둥이 울었다. 사람들이 놀라 제단을 향해 절을 하고 또 했다. 달무리가 더 넓게 퍼지고 있었다.
“한울님이 비를 내리려나 봐요.”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하필 감사제를 올리는데 그러실까요? 지금껏 그런 날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그럴수록 천군은 하늘을 향해 비손을 했다.
“한울님.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고을 정성을 흡족히 받아 주소서. 한울님, 한울님.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어진 사람들입니다. 한울님의 은덕이 널리 퍼져 잘 살고 있으니 축복을 내려 주소서.”
그렇게 빌던 천군이 가슴에 통증이 오는지 손으로 눌렀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천군은 손을 들어 안심을 시키고 다시 한울님에게 기원을 했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고 감사제는 불안한 가운데 무사히 마쳤다.
표정이 굳어 있던 한곰어른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손을 높이 들어 고을 사람들에게 마음껏 먹고 마시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좁쌀과 수수로 빚은 술이 항아리로 나오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돼지고기 덩이들이 그릇에 담겨졌다. 고을 사람들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 권하며 푸짐하게 먹었다.
그렇지만 천군의 표정은 편안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얼굴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모루는 무슨 연유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마음 안 하늘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뭔가, 뭘까? 모루는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한울님을 느껴보려고 했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모루야, 너도 여기 와서 좀 먹어라.”
칠보 아재가 불렀다. 모루는 엉덩이를 털고 아버지와 작은돌장이 아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아버지가 없는 동안 서러웠던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좋은 날 왜 그러냐?”
아버지가 눈가가 촉촉해지는 모루의 어깨를 토닥였다.
“배고프지? 어서 먹어라.”
칠보 아재가 멧돼지 살을 뜯어 주었다. 모루는 받아서 소금에 찍어 입에 넣었다. 하지만 목으로 넘길 수 없었다. 결국 치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놀라서 모루를 품에 안았다.
“쯧쯧, 형님이 사라진 뒤 모루가 얼마나 맘 졸였으면 저럴까요? 그래, 쌓인 게 있으면 다 풀어라.”
칠보 아재가 모루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모루는 울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모루는 울음을 그쳐보려고 했다. 하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그 울음은 이미 자기를 떠난 것이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숨을 길게 내쉬어 보라고 했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니 겨우 진정이 되었다.
모루는 몸에 힘이 다 빠져 아버지 어깨에 기대었다. 근심 걱정 없이 평화만 있었으면 싶었다. 모루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설핏 남대가람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정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추수감사제를 축하해 주러 오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맨 앞에는 우두머리가 말을 타고 그 뒤로 말을 탄 장정들이 따르고 있었다. 또 걸어서 따르는 장정들도 있었다. 그들은 금누리 고을을 지키는 장정들을 쓰러뜨리며 감사제 제단을 향해 오고 있었다. (모루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건가요? 모루의 비범함이 힘이 세고 다부진 건지 아니면 영감을 받는 건지 골고루 다 가진 건지 좀 헷갈리네요. 주제에 맞게 한 방향으로 부각되면 좋겠어요.)
‘으악! 안 돼요, 안 돼!’
모루가 소리쳤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보던 모루는 숨이 멎을 뻔 했다. 정말로 희부연 새벽길을 말을 타고 오는 무리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무리였다. 남대가람을 지키던 장정들도 수에 밀려 막아내지 못 한 것 같았다. 고을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아우성을 쳤다. 사람들은 금세 낯선 장정들에게 포위가 되었다. 한곰어른은 무리를 막아보려다 어깨에 화살을 맞아 피를 흘렸다. 금누리 고을 장정들도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졌다. 술에 취해 있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한곰은 무릎을 꿇어라! 그동안 이웃고을로 잘 지냈는데, 괘씸해서 가만있을 수 없었다. 힘을 키워 우리 고을을 쳐들어오겠다고? 우리 고을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줄 알았느냐?”
박달 고을 우두머리였다.
“시키는 대로 따르겠으니 더 이상 사람들 숨을 앗지 마시오.”
한곰어른이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
“고을 사람 귀한 걸 알면 심성을 바로 가져야지.”
박달 고을 우두머리의 손짓에 무리들이 한곰어른을 결박하려고 에워쌌다. 그때였다. 한곰어른이 박달 고을 우두머리에게 잠시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박달 고을 우두머리는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느꼈는지, 청을 받아 주었다. 한곰어른은 뭔가 협상을 하는 듯했다. 그 결과 박달 고을 우두머리는 곡식 창고 다섯 개의 양과 무수한 장정들을 노예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박달 고을 우두머리 말에 아낙들이 흐느꼈다. 그런데 아직 박달 고을 우두머리 말이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큰돌장이를 데려가겠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어머니가 앞으로 달려가려는 걸 사람들이 말렸다.
“어떡해요? 모루 아버지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요?”
어머니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
모루는 박달고을 무리들한테 끌려가는 아버지를 쫓아갔다. 그러다 사람들한테 붙잡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으아아악! 아버지를 보낼 수 없어요. 한울님, 어디 계세요? 보고 있나요? 우리 아버지 가지 않게 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한울님…….”
모루는 목에서 쉐쉐 소리가 날 때까지 울부짖었다.
8. 놋쇠 한아비가 준 선물
고을에 난리가 난 것을 아는지 비가 흙바닥을 후려치듯이 내렸다. 이 비가 그치면 겨울 추위가 닥칠 것이다. 빗소리에 고을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섞였다. 장정들이 칡 줄기에 손목이 묶여 끌려가는 꼴을 당했으니 황망해서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어머니도 울음을 토해냈다.
“모루야, 네 아비 불쌍해 어떡하냐? 우리 고을로 노예들을 데리고 온 일은 있어도 노예로 잡혀 가는 일은 없었는데, 천군님이 그렇게 말해도 한곰 어르신이 듣지 않은 것도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없어서 그랬을 거다. 그런데 이제 어쩌냐?”
“엄마, 나도 억울하고 슬퍼. 그렇다고 울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지.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리 고을로 온 노예 중에도 자기네 고을로 돌아가는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모루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모루는 어머니가 앓아누울까 봐 걱정이 되었다.
“어흐흑…….”
“엄마, 내일 한곰 어르신을 만나 뵙고 올게요.”
“한곰 어르신도 정신 나가 있을 텐데 만나주겠냐?”
어머니는 우려했던 대로 앓아누웠다. 비는 추적추적 계속해서 내렸다. 마치 한울님의 눈물 같았다. 고을에 벌어진 난리로 고을 한아비들의 회의가 열릴 것이다. 그러면 한곰어른은 물론 천군도 책임을 추궁 당할 것이다. 어쩌면 한곰어른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천군은 몇 번 고을에 닥칠 재앙에 대해 말했다. 그걸 한 번도 헤아려 듣지 않은 한곰어른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곰어른의 외고집 때문에 고을이 굶주리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았다. 한곰어른이 큰 소리 떵떵치는 걸 들으면 어깨가 으슥해지기도 했으니까.
한곰어른은 숨이 붙어 있을 때 자신의 돌집을 가지면 고을의 힘이 더 흥할 거라고 생각하고, 말끝마다 이웃 박달고을을 쳐들어갈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발이 달려 박달 고을로 스며들어간 것이다. 욕심이 넘쳐서 화를 부른 격이었다.
박달 고을 사람들은 그 일로 뒤숭숭해 했을 테고, 우두머리는 어찌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당하기 전에 쳐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결정을 냈을 것이다. 그 날이 고을 사람들이 거의 모인 감사제 날이었다.
모루는 가슴이 답답했다. 놋쇠 한아비가 생각났다. 놋쇠 한아비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루는 날이 밝으면 나루목 고을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고을 한아비 회의가 끝나려면 며칠이 있어야 하니 한곰어른을 만나도 그 이후라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모루는 어머니를 위하느라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와 등을 지고 누워서 소리 죽여 흐느꼈다.
‘한울님, 우리 아버지는 맡은 일을 묵묵히 해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시련을 주시나요? 어서 집으로 돌아 올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언제 왔냐는 듯 하늬뫼 위로 해가 떠올랐다. 모루는 몸을 돌려 옆을 보았다. 어머니는 거동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낮은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숨이 떠난 걸로 생각할 정도였다.
모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구석구석이 쑤시고 아팠다. 아버지를 따라 가겠다고 울고불고 할 때 사람들이 말리느라 양팔을 우악지게 잡아서 그런가, 어깨를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통증이 왔다. 모루는 통증을 참으며 쳐진 발을 걷었다. 발 근처는 빗물이 튀어 흥건했다. 그래도 집이 언덕진 곳에 있어 빗물이 많이 스며들지 않았다.
“일어났구나.”
칠보 아재가 공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해는 났지만 땅이 질퍽거려 발목까지 흙투성이였다.
“아재, 일찍 웬일이세요?”
모루는 아버지 일로 온 걸 알면서도 물었다. 칠보 아재도 뾰족한 수를 갖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아버지 일로 상심이 클 게다. 우리도 충격인데 넌 오죽하겠냐? 그래도 어머니를 봐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네 아버지 문제는 우리도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 알고 단단히 마음먹고 생활해라.”
칠보 아재는 몇 번이나 당부를 한 뒤 먹을거리를 놓고 돌아갔다. 모루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모루 오라버니.”
언제 왔는지 꽃뉘가 앞에 서 있었다. 울었는지 눈두덩이 부어 있었다.
“뭐 하러 와?”
모루가 투박하게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서 왔어.”
“네가 왜 미안하냐? 네가 한 일도 아닌데…….”
“오라버니 아버지 일을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 우리 아버지 대신 내가 잘못을 빌게. 용서해 줘.”
꽃뉘 눈에 눈물이 자박거렸다.
“잘못도 없는 네가 용서를 비니 할 말이 없다. 알았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모루는 꽃뉘의 고운 마음이 느껴졌다.
“아주머니 편찮으시지?”
“그렇지 뭐.”
모루는 어머니 걱정에 아버지 걱정이 겹쳐서 몰려왔다. 아버지는 낯선 고을에 가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오라버니, 아주머니 드시게 미음 끓이자.”
꽃뉘가 화덕으로 갔다.
“할 줄 알아?”
모루가 물었다.
“그럼, 나도 각시가 될 텐데.”
꽃뉘는 쌀을 가져오라고 해서는 시렁에서 그릇을 꺼내 쌀을 씻고 돌을 골라냈다. 어깨 너머로 본 것은 있는 것 같은데 손 매무새가 서툴렀다. 모루는 꽃뉘가 그러는 동안 화덕에 불을 지폈다. 화덕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불이 잘 지펴지지 않았다. 생기침을 몇 번 한 다음 겨우 불이 붙었다. 그리고 쌀을 걸쭉하게 끓였다.
“엄마, 일어나서 이것 좀 먹어 봐.”
모루는 소금으로 간을 한 미음을 들고 어머니에게로 갔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예까지 웬일이냐?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냐? 어른들이 한 일인데.”
어머니는 일어나려다 다시 누웠다. 꽃뉘가 어머니 머리 밑으로 손을 넣어 일으켰다.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는 걸 알고 왔잖아. 엄마는 너무 허약해 탈이에요. 무슨 일이 닥쳐도 강해야 살아낼 수 있는데.”
모루는 숟가락에 미음을 떠서 어머니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어머니를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인데 정말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아주머니, 어서 드시고 기운 차리세요.”
꽃뉘가 어머니 손을 잡고 말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어머니 눈에 눈물이 흘렀다.
모루는 어머니가 미음을 몇 술 먹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어제 밤에 생각한 대로 나루목 고을에 갔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꽃뉘야, 부탁이 있는데 우리 엄마 밥 때 되면 챙겨 줘라.”
“어디 가려고?”
“응, 나루목 고을에 갔다 올 일이 있어.”
모루는 꽃뉘에게 부탁을 하고 그 길로 남대가람으로 나갔다. 모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혀를 차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들도 대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저 어려움을 견디다 보면 무슨 방법이 나설 거라고 말할 뿐이었다. 모루는 아이라도 그런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진심이란 걸 알기 때문에 감사하게 위로를 받아들였다.
얼마를 기다리다가 빈 뗏목을 타고 나루목 고을로 향했다. 금누리 고을 사람들은 나루목 고을이 하루거리라 좋다고 했다. 다른 고을에서는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아버지가 끌려간 박달 고을도 나루목 고을까지 사흘 거리였다.
모루는 뗏목 물길에 아버지 얼굴이 겹쳐져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박달고을로 달려가 아버지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하고 싶었다. 뗏목장이는 모루가 편안하게 울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 나게 노를 저었다.
나루목 고을에 도착했다고 뗏목장이 아재가 말해 주었다. 도착한 지 좀 된 것 같은데 오도카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재, 죄송해요. 전 다 온 줄도 몰랐어요.”
모루는 인사를 하고 나루목 저자로 향했다. 그곳은 여전히 분주했다.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고 사람들도 붐볐다. 모루는 나물 종류를 말려 파는 곳을 지나쳐서 민무늬 흙그릇을 파는 곳을 지나서 놋쇠들을 파는 한아비에게 갔다.
“한아비…….”
모루는 인사를 하려다가 울컥 눈물부터 솟았다.
“저저 가슴의 돌을 내려놓았더니 바위가 누르고 있구먼.”
한아비가 모루를 보더니 혀를 차며 기다려 주었다. 놋쇠로 만든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못 보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모루의 시선을 따라가던 한아비가 설명해 주었다.
“이게 철로 만든 호미라는 거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어. 놋 시대가 가고 철 시대가 오고 있는 거지. 여기 있는 물건들이 그걸 말해 주고 있잖냐.”
한아비가 모루의 마음을 읽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저번에 여기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만난 소금장수 아재의 말이 생각났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모루는 한아비를 만나니 의지가 되고 힘도 났다.
“이제 말을 해 보겠냐?”
“네, 마음 안에 하늘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말해 주지 않아도 알게 될 거다. 좋은 마음이 곧 하늘인 게야.”
한아비는 묻는 말과는 다르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노예로 잡혀 갔어요. 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을까요?”
“흠, 물 흐르듯이 흐르는 게 순리거늘…….”
한아비는 그 말을 하고는 가만히 있었다. 모루도 한아비 옆에 앉아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얼굴은 여러 가지 표정이 담겨 있었다. 평화로운 모습이 있는가 하면 볼에 심술이 그득한 사람들도 보였다. 눈이 선한 사람도 있고 눈매에 독기가 올라 있는 사람도 있었다. 모루는 그런 사람들도 다 마음 안에 하늘을 품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 보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모루는 해가 머리 위를 지나 한참 간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이 저렸다.
“얘야, 마음은 곧 하늘이고 또한 생각이다.”
한아비는 돌아서는 모루를 부르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모루가 놀라 뒷걸음을 쳤다.
“내가 쓰던 거다. 다른 건 궁할 때 임자를 만나 떠났다. 그래서 내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는데 임자를 만난 것 같다.”
놋쇠 한아비가 건넨 건 낡아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청동검과 청동거울이었다. 모루한테는 여전히 한곰어른이나 천군이 지니는 영험한 물건이었다. 그런 생각에 손에서부터 시작한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왜 주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다만 마음 안에서 ‘새 시대의 주인이 될 것이다. 새 시대의 주인.’ 이라는 울림만이 가득했다.
한아비는 받기를 주저하는 모루에게 물건을 베보자기에 싸서 건넸다. 모루가 일부러 보이지 않는 한 그게 우두머리나 천군이 지니는 영험한 물건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9. 우두머리 한곰의 꿈
고을 한아비 회의가 하늬뫼 골짜기 입구에 있는 천군의 집에서 열렸다. 그 골짜기를 타고 들어가면 소도였다. 입구에 큰 나무 막대가 세워져 있고 북이나 방울들이 매달려 있어 그런 곳이란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천군 집에는 고을 한아비들이 둥글게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그곳에 우두머리 한곰어른이 불려와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자네가 하고자 한 일이 있었다는데?”
맨 오른쪽에 앉아 있는 한아비가 말문을 열었다.
“그거와 이번 일은 관련이 없습니다.”
한곰어른이 말했다.
“허험, 숨이 멀쩡하게 붙어 있는데 돌집을 왜 지으려고 했나? 천군을 통해 중단하라고 전했을 텐데.”
“네, 들었지만 멈추지 않은 건, 우리 고을이 이웃 고을처럼 아들 대에 쇠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곰어른은 아들 들보에게 우두머리 훈련을 시켜보지만 흡족하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또 또래인 모루와 자꾸 비교되는 게 거슬린다는 것도 마음 안쪽 깊이 숨겨두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아비 중에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웃 고을 당군이 하는 말을 듣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허허, 확실하지 않은 이웃 당군 말은 듣고, 여기 있는 천군은 뭔가? 자네한테 몇 번이나 한울님 말을 전했다는데 왜 안 들었는가?”
천군에게는 질문이 그리 쏟아지지 않는 걸 보면 한아비들은 천군과 먼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천군은 회의에 관여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
“왜 대답을 못 하는가? 자네 아비가 우두머리로 있을 때도 자네 고집을 걱정했는데 기어이 화근을 만들다니.”
“자네라도 이웃 고을에서 힘을 키워 쳐들어 올 거라고 하면 가만있었겠나? 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나?”
한아비들은 회의가 아니라 한곰어른을 추궁하기에 바빴다.
“자자, 진정들 하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모아봅시다.”
처음부터 가만히 듣고 있던 한 한아비가 말했다.
“잡혀간 장정들을 어떻게 데려 올지 계획을 말해 보게나.”
한곰어른은 한아비들이 일시에 쏠리는 눈길이 버거운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간 시간을 주면 해결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한곰어른이 머리를 조아렸다.
“허허, 막연히 그러지 말고 자세히 말하게나.”
“아, 한곰이 지금껏 고을 사람들 굶기지 않고 잘 살게 했잖은가. 잘 한 일도 있으니 시간을 줘 봅시다.”
한 한아비가 한곰어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험, 이번 일을 잘 해결하게나. 지켜보겠네.”
다른 한아비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렇게 하자고 결론을 냈다.
한아비들이 자리를 떴다. 한곰어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을 비우시오. 재앙은 그리 쉽게 재우지 못하는 법이오.”
천군이 한 마디를 했다.
“고을 다스리는 일은 내 일이니 너무 간섭 마시오.”
우두머리 한곰이 뚝뚝하게 말하고 나왔다. 한곰어른은 이웃 작은 고을들을 정복해 나가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박달 고을이 쳐들어 온 것을 생각하면 속에서 열불이 났다. 박달 고을이 먼저 쳐들어올 거라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어서 돌집을 세워야 해.’
한곰어른은 어려움에 부닥치자, 돌집에 대한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 한아비 회의 때 추궁을 당했어도, 천군이 뼈 있는 말을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큰돌장이가 있어야 한다. 작은돌장이들은 큰 돌집을 지은 경험이 부족해 맡길 수 없었다. 한곰어른은 돌아오는 내내 큰돌장이를 데려오는 일에 골몰했다.
‘내 돌집만 지어지면 박달 고을을 가만두지 않겠어.’
한곰어른이 큰돌장이를 데려가라고 할 때 박달고을 우두머리가 옳다구나, 하고 웅한 건 자신도 돌집을 지으려는 속셈이 있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면 박달 고을은 더욱 흥할 테고 그때는 상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한곰어른은 마음이 급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더 급하게 하는 일은 박달 고을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금누리 고을은 믿을 수 없으니 박달 고을 아들과 꽃뉘를 혼인시켜 금누리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다. (박달고을 우두머리도 자신의 돌집을 짓고자하는 속셈으로 큰돌장이를 데려간 거라면 무엇을 준다해도 안 내줄 거 같은데요. 꽃뉘와 혼인을 시키겠다는 약속이라도 하고 왔어야 하는 건 아닌지요. )
“그럴 수 없어. 비겁한 놈 같으니라고.”
한곰어른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돌아오는 길목에 노예로 잡혀간 집의 아낙들과 아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곰어른의 계획을 듣고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어르신이 해결해 줘야지 어떡합니까?”
“제발 돌아오게 힘써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반드시 모두 데려 올 것이오.”
한곰어른은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힘주어 말했다. 사람들 눈빛이 매서운 걸 보고는 한곰어른은 얼른 걸음을 옮겨 자리를 피했다.
꽃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모루를 찾아왔다.
“오라버니, 우리 아버지한테 힘이 없으니 어떻게 해? 박달 고을 우두머리가 우리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들과 나를 혼인 시켜 우리 고을을 다스리게 한다는 말이 있대.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
꽃뉘는 날개를 잃은 한 마리 새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한테 달려 있던 혼인 문제가 이젠 박달 고을로 넘어가 있는 것이다. 모루는 울먹이는 꽃뉘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더는 안 되겠는지 한곰어른은 장정 다섯 명과 함께 말을 타고 박달 고을로 갔다. 담판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고을 사람들은 한곰어른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비록 큰 소리 떵떵 치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만 한곰어른 정도의 배포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곰어른은 박달 고을로 가서 다섯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붙잡혀 간 장정들은 보이지 않고 한 명을 데리고 왔다.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고생 몸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 살이 쏙 빠져서 눈이 퀭했다.
한곰어른은 다른 노예들에 대해 궁금해 하자, 지금은 한 명이지만 조만간에 모두 데려 오겠노라고 안심을 시켰다.
“당신, 돌아왔군요. 이젠 헤어지지 말아요. 아니 아예 어디 멀리 달아나 살아요. 심장이 두 번이나 떨어지니 도무지 살 수 없어요. 한 번만 더 놀라는 일이 벌어지면 저는 못 살아요.”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반겼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칠보 아재가 찾아왔다.
“형님, 다들 같이 오겠다는 걸 쉬어야 할 것 같아, 저만 왔어요.”
아버지는 칠보 아재도 안아 주었다.
“한곰 어르신이 돌집에 대해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요. 돌집만 지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도 그게 걱정이네. 나야 돌쟁이라 돌집을 짓는 일을 할뿐이지만…….”
아버지 얼굴에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모루는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때 놋쇠 한아비가 준 물건이 생각났다. 집 옆 창고에 꽁꽁 숨겨둔 것을 가져와 아버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다 마음을 눌렀다. 아버지가 그 물건을 보면 마땅히 지녀야 할 사람에게 주라고 할 게 뻔했다. 청동검은 한곰어른에게, 청동거울은 천군에게로 갈 것이다. 모루는 처음 받을 때 전율을 떠올리며 비밀로 하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몸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한곰어른의 돌집 짓는 일로 바빠졌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아버지도 말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꽃뉘가 와서 해 준 말은 박달고을을 위협하는 일을 절대로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조를 한 다음 곡식 두 수레가 더 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꿈을 포기할 수 없다며, 두고 보라는 말만 하셔.”
봄이 되면 창고가 바닥이 나서 고을 사람들이 허리띠를 조여야 하는데 두 수레에 또 두 수레가 갔으니 다가오는 봄은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한곰어른은 고을 장정들을 모아서 돌집 짓는데 힘을 보태라고 보냈다. 아버지는 남대가람 가에 있는 우두머리 한아비 옆에다 터를 잡고 땅을 파서 돌을 촘촘히 놓아 무덤방을 만들었다. 그 위에 뚜껑돌을 덮었다. 시신이 없는 가무덤방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루가 이 작업에 따라가서 일을 배우려고 할 것 같아요. 아버지곁에 더 있고 싶어서라도요.)
그런 뒤 고임돌 두 개를 구해 앞뒤로 장정들에게 끌게 했다. 둥근 나무들을 쭉 늘여놓고 앞에서 돌을 묶어 끌고 뒤에서 장정들이 밀었다. 그렇게 해서 고임돌이 도착하자 이번에는 장정들이 달려들어 고임돌을 양쪽으로 세울 수 있게 구덩이를 깊게 팠다. 어느 정도 파지자, 아버지는 고임돌을 구덩이에 세우라고 말했다. 장정들은 아버지 지시에 따라 착착 일을 진행했다. 한쪽 고임돌이 세워지자, 아버지는 다가가 발로 밟아 넘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다. 장정들이 달려들어 고임돌 주위를 밟았다. 또 한 쪽도 그렇게 세웠다. 이제 덮개돌을 가져다 얹으면 되었다.
덮개돌을 가져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덮개돌을 끌어올릴 수 있게 고임돌 위로 흙으로 둥글게 봉분을 만들어야 했다. 봉분이 만들어지면 그 위를 둥근 나무들을 놓아가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고임돌 위로 올려놓는 것이다. 덮개돌이 올려 지면 흙을 쌓아서 둥글게 만들었던 봉분을 다시 긁어내서 탁자 모양의 돌무덤이 되게 해야 했다.
장정들은 아버지의 지시로 남대가람 골짜기에서 흙을 져 날라다 쌓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하느라 한 달을 다 보내고 있었다.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고임돌 하나를 가져다 세우는 것도 며칠이 걸렸다. 그러다 두 개의 고임돌이 나란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이제 덮개돌을 올릴 준비를 다 마쳤다. 덮개돌 올리는 일은 아주 큰 일이라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대로 된 절차라면 숨이 다한 넋이 편안하게 머물라고 의식을 치르고 그 사람이 이룬 일들을 칭송했다. 하지만 지금 짓는 돌집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 세워지는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곰어른이 음식과 술을 내왔다.
“수고 많네. 큰돌장이는 어디 갔는가?”
“덮개돌의 틈을 보러 갔습니다. 곧 올 겁니다.”
칠보 아재가 대답했다.
“이거 들고 하게나. 이 일만 끝나면 내가 보란 듯이 보여 줄 일이 있네.”
한곰어른은 박달 고을을 쳐부수고 노예로 잡혀간 장정들을 데려올 거라는 말은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해서 자신의 힘을 회복하리라 다짐하고 또 했다.
한곰어른은 아직도 박달 고을 우두머리가 쏜 화살에 맞은 상처가 욱신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서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참기로 했다.
곧 돌집이 세워지고 있다. 그렇게 갈망하던 돌집을 눈앞에 볼 수 있다. 이 일은 아무리 힘자랑하며 쳐들어 온 박달 고을 우두머리라도 엄두를 못 낼 일인 것이다. 한곰어른은 돌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며 흐뭇했다.
이웃 박달 고을을 쳐부수고 노예들과 곡식을 실어 오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기에 바쁜 천군의 콧대도 꺾어 놓을 수 있을 터였다. 돌아가신 한아비는 왜 천군에게 제를 지내게 넘겨주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천군이 하는 일을 존중하며 잘 지냈지만 한곰어른은 그렇지 않았다. 절대적인 힘을 원했다. 그런데 사사건건 천군이 막아서니 마음껏 뜻을 펼 수 없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합쳐도 자신의 돌집을 짓는 건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다.
장정들이 배를 채우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났다.
“부탁을 들어 주어 고맙네. 이렇게 뜻이 맞으니 좀 좋은가.”
한곰어른이 직접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금누리 고을로 돌아 온 뒤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묵묵히 지시할 말만 했다. 예전에는 장정들이 힘내라고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워주기도 했다. 모루는 한곰어른의 돌집을 다 지으면 달라질 거라고 위안을 했다.
“자, 다들 좀 더 힘을 써 주게.”
한곰어른이 당부를 하고 돌아갔다.
“허참, 노예로 잡혀간 사람들보다 자신의 돌집이 더 중요한감.”
“누가 아니래. 그동안 고을을 위해 잘 하더니 왜 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 이 사람들아. 돌집 지으면서 부정 탈 소리 작작하게. 말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게나.”
사람들의 불평을 듣던 칠보 아재가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주의를 주었다.
“우리가 못할 말하는 겁니까? 지금 중요한 게 자신의 돌집 짓는 거냐구요?”
“예부터 순리를 거역하면 하늘이 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말에 몸이 굳는 듯했다. 돌 일을 할 때 한아비가 해 준 말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허허, 이 사람들이 못할 소리가 없어. 어서 일을 시작하게나.”
칠보 아재가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어진 사람들의 등을 밀었다. 불평이 언제 터질지 아슬아슬했다.
한곰어른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간 장정들이 언제 돌아올 수 있냐고, 어서 서둘러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 화살 맞은 곳을 만지며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 그럴 거라고 하면서도 마음에 불평이 쌓여갔다.
감사제를 올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막달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덮개돌을 나르고 얹는 일만 남아 있었다.
10. 마지막 돌무덤
꽃뉘는 박달 고을 아들과 혼인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지 모루를 자주 찾아왔다. 모루는 아무리 그래도 혼인은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닐 거라는 말로 위로해 주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런 일이 생기면 꽃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오라버니와 멀리 도망갔으면 좋겠어.”
꽃뉘는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진심인 것 같았다. 모루는 일을 저질러 어머니 아버지를 걱정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농담으로 받았다.
“하필 도망을 나랑 가냐?”
“날이 밝아 눈을 뜨면 생각나니까. 모루 오라버니가 좋으니까.”
모루는 뜬구름 같은 소리를 하는 꽃뉘가 안쓰러웠다. 모루는 꽃뉘를 두고 사모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나 돌아보았다. 누이동생처럼 대하고 있었지, 달리 사모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꽃뉘가 박달 고을 아들과 혼인한다는 걸 상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보내고 편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루는 생각이 복잡해서 얼른 접었다. 하지만 밤까지 꽃뉘 생각이 따라와서 뒤척이게 했다.
“아직 안 자냐?”
모루는 아버지 말소리가 반가웠다.
“네, 아버지.”
“난 이때껏 내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숨이 다한 자의 넋을 축원해 주며 돌집을 정성껏 세워 주었지.”
“네, 알아요.”
“그런데 요즈음 너무 힘들다.” (뭔가 의미있는 말을 모루에게 해주면 좋겠어요. 유언 비슷하기도 한 말로요.)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군도 한곰어른과 의견이 부딪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소도만 돌볼 뿐, 고을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모루는 고을의 우두머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 고을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자, 아버지는 남대가람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제 거의 돌집이 완성되는 거지요? 고생 많으셨어요.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웅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손을 들어 보이고 움집을 나섰다. 그 날은 장정 키 세 배나 되는 덮개돌을 안전하게 떼어내는 일을 하는 날이었다. 먼저 여럿이 덮개돌 부분을 칡 줄기로 몇 겹을 묶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당겼다. 덮개돌의 틈이 갈라지며 모양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함성은 곧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덮개돌이 움직이자 덮개돌과 잇닿아 있던 바위가 무너지면서 아버지를 친 것이다. 아버지 몸이 허깨비처럼 튕겨 나갔다. 눈 깜짝 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큰돌장이님! 큰돌장이님!”
장정들이 무너져 내리는 바위들을 피해 아버지에게 달려왔다. 아버지는 머리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형님, 어서 업히세요. 정신을 놓으면 안 됩니다.”
칠보 아재가 옷을 찢어 아버지 머리를 묶은 뒤 들쳐 업었다. 그렇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칠보 아재 등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집으로 왔을 때는 이미 아버지 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고, 무슨 일이래요? 모루 아버지, 눈 좀 떠 봐요.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어머니는 피가 흐르다 몽글몽글 달라붙어 있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어머니 가슴께도 피범벅이 되었다.
“형님이 놀라서 가던 길을 못 가십니다. 편안하게 가시게 보내 드립시다.”
칠보 아재가 어머니를 말렸다.
“뭐라고요? 보내드리자고요. 왜요? 왜 보내야 하는데요.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왜 보내야 하나요? 전 보낼 수 없어요. 모루 아버지 살려 내요. 어서 살려 내요.”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모루도 눈앞에 벌어진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부터 잘못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놀라고 당황스러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저 꿈이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쓰러지는 걸 보니 정신이 확 들었다. 지금 일이 꿈이 아닌 게 확실했다. 모루는 머리를 기둥에 마구 박았다.
“모루야, 너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칠보 아재가 안아 주었다. 모루는 칠보 아재 품에서 한 없이 울었다. 그러다 지쳐서 잠에 곯아 떨어졌다. 숨이 끊긴 아버지와 정신을 놓아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면 잠이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칠보 아재는 거적을 가져와 아버지를 덮어주고 같이 따라온 작은돌장이 아재들을 돌려보내고 옆자리를 밤새 지켰다.
모루는 자는 내내 남대가람 골짜기에서 돌칼로 그림을 그리고 돌을 쪼아 홈을 파던 판돌에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새기는 일을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밖이 훤했다. 아버지 시신은 거적으로 덮여 있었다. 모루는 목이 쉬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곰어른은 장정들 몇 명과 음식을 보내왔다.
사람들은 공터에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나눠먹고 술을 마시며 아버지가 얼마나 유능한 돌장이었는가를 이야기했다. 아버지와 있었던 일이 그들에게 벌써 추억이 되고 있었다.
장정들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간간이 웃기도 했다. 좋은 추억을 말한 게 틀림없었다. 모루는 아버지 일을 남의 이야기처럼 들어야 한다는 게 슬펐다. 화가 치밀었다.
장정들은 음식과 술을 마신 뒤 덮어놓은 거적을 둘둘 말아 어깨에 둘러멨다. 사고로 숨이 다한 사람은 자신의 돌무덤을 가질 수 없다 했다. 부정을 탔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루는 깜짝 놀랐다. 하늬뫼에 던져졌다는 그릇장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루는 장정들을 뒤따랐다. 겨우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또 쓰러졌다. 모루가 뒤따르는 걸 보고 칠보 아재가 말렸다.
“아버지 가는 길 배웅해야 하지만, 네가 걱정되어 그러니 남아 있어라.”
“아니요, 저도 갈래요. 저도 따라 갈 거예요.”
모루는 아주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목소리였다. 칠보 아재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장정들이 하늬뫼 등성이를 넘더니 거적으로 싼 아버지 시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모루는 앞이 까매졌다. 이럴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돌무덤을 평생 짓다가 정작 자신의 숨이 다했을 때는 날짐승 밥이 되어야 하다니!
모루는 원통하고 분통하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장정들이 서둘러 돌아가고 있었다. 시신을 내려놓고 자꾸 뒤를 돌아보면 넋이 편하게 갈 수 없다고 했다. 모루는 차마 아버지 시신을 두고 내려 올 수 없었다. 칠보 아재가 기다려 주다가 모루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가자.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지. 아버지 좋은 곳으로 가게 빌어 드리고 어서 가자.”
모루는 칠보 아재의 손을 잡았다.
“아재, 부탁이 있어요. 아재의 도움이 필요해요.”
모루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재, 아버지는 평생 돌장이로 살았어요. 다른 사람들 돌집을 지어주며 살았지요.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돌집도 없이 이렇게 뫼에 던져져 있어요. 아재, 저랑 아버지 돌집을 지어 줘요. 네?”
칠보 아재가 놀라는 눈치였다.
“돌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하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아재한테 부탁하는 거잖아요.”
칠보 아재는 모루의 말을 내칠 수 없었다. 평생 돌집을 지으며 살았던 큰돌장이가 자신의 돌집 하나 없이 뫼에 버려진다는 건 곧 자신들 처지일 수도 있었다. 돌장이 일은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칠보 아재는 거적을 둘러매고 남대가람 골짜기로 내려왔다. 모루는 그곳에 그림을 그리고 새겼던 판돌을 가리켰다.
“돌집 치고는 초라하지만 그래도 해드리고 싶어요.”
칠보 아재는 딱 어른 키만 한 판돌을 보더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일은 모루와 둘만이 아는 일이 될 것이다. 둘은 시신을 넣을 수 있게 땅을 팠다. 겨울이지만 땅이 덜 얼어 다행이었다.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뒤 작은 돌로 무덤방을 만들었다. 그 속에다 시신을 넣었다. 그동안 쓰던 돌연장도 몇 개 넣었다. 그런 뒤 널찍한 돌로 덮고 고임돌 두 개를 세웠다. 그리고 힘을 합쳐 판돌을 끌어 덮개돌로 올렸다. 욕심이 담기지 않은 아담한 돌집이었다. 덮개돌에는 모루의 소망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돌무덤이에요. 볼품없이 작지만 아버지를 보내는 아들의 마음을 담았어요. 제 마음이 느껴지나요? 제 마음이…….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맺게 해 준 하늘에 감사해요. 아버지, 사랑해요.’
모루는 아담한 돌무덤을 보며 마음으로 흐느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아재들이 신경 써 줄 테니, 너는 어머니를 돌봐 드리도록 해라.”
칠보 아재는 모루에게 당부하고 어둠이 깔린 길로 갔다. 모루도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모루를 반겼다.
“아버지는 같이 안 왔니? 어서 아버지 식사 하라고 알려라.”
어머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말했다. 얇고 평평한 돌에다 차린 상에는 아버지의 밥그릇도 놓여 있었다.
“엄마, 아버지는…….”
모루는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아버지를 찾았다. 모루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멀리 일하러 갔다고 말해 주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믿는 눈치였다. 칠보 아재가 어머니를 보더니 충격이 커서 아버지가 죽은 부분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절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했다. 모루는 어머니가 불쌍해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 야생을 길들여 집에서 길렀던 개, 머엉이가 날짐승한테 물려갔다. 모루는 정황이 없어 먹이를 잘 챙겨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아마 가슴에 오래도록 아픈 멍을 두 개 지니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아픔으로 가슴 에이는 모루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일이 또 벌어졌다.
눈이 푸지게 내려 고을이 하얗게 덮인 날, 한곰어른이 눈길을 내며 찾아왔다. 한곰어른은 어머니 증세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가만히 있더니 모루에게 말했다.
“아비 일은 안됐다. 숨이 붙어 있고 없고는 하늘이 알아서 하는 일이니 네 아비의 숨은 그게 다였다고 생각해라. 네 아비가 그렇게 되지만 않아도 돌집 짓는 일을 마쳤을 텐데 나도 아쉬움이 크다. 네 아비는 금누리 고을의 발을 묶는 약조에다 곡식 두 수레 몫이었다.”
한곰어른은 잠시 말을 쉬더니 나머지 말도 했다.
“이른 감이 있지만 아비 일을 아들이 내리 하는 건 알고 있을 게다. 날 풀리면 기운 차려 너도 돌 일을 시작하도록 해라. 그래서 아비보다 더 명성 있는 돌장이가 되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면 미리 모루가 돌일에 재능을 보여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며 배우고 있었다면 좋겠어요.)
한곰어른은 너무나 위풍당당하게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모루에게 돌 일을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루는 속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한곰어른의 숨을 앗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루가 불덩이를 누르며 가만히 있자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돌아갔다. 모루는 가슴을 쳐댔다.
‘당신이 보기에 아버지 숨이 그리 가벼워 보여? 곡식 두 수레에 장정 다섯을 보내 데려왔다고? 그건 당신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런 거지. 돌집을 짓고 싶은 욕심! 우두머리 핏줄들은 죽으면 며칠 걸려 의식을 하고 돌집을 지으면서 왜 평생 돌집을 지은 아버지는 날짐승 먹이가 되어야 하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데 왜 숨 가치가 다르냐고?’
모루는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놀랄까 봐 소리 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속을 누르는데 창고에 꽁꽁 숨겨둔 물건이 생각났다.
모루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아버지 만나러 갈까? 아버지 보고 싶지?”
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당연하지. 어서 아버지 만나러 가자.”
어머니는 모루 말에 신나서 옷가지를 싸려고 일어났다. 모루는 창고로 가서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보자기를 풀었다. 낡았지만 햇빛이 비추자 빛이 번쩍했다. 영험한 물건이라도 그동안 꽁꽁 싸놓으니 빛이 번쩍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모루는 그게 다 허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없어도 빛이 번쩍해야 그게 영험하지 그렇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물건을 영험하게 여겨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고 했어. 놋쇠 시대는 가고 철 시대가 오고 있다고 했어. 나는 새로운 시대로 갈 거야.’
모루는 청동검을 들어 바닥에 던졌다. 청동거울도 던져서 발로 밟았다. 밟고 또 밟았다. 그렇게 헌 생각들을 버리고 새 생각으로 채우리라 이를 악물었다.
“거기서 뭐하니? 어서 가야지.”
어머니가 다가왔다.
“갈 거야.”
“그게 뭐냐? 아버지가 뭘 만들다 말았나?”
어머니는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모루는 그 순간 놋쇠 한아비가 해 준 마음 안의 하늘을 떠올렸다.
‘그래, 이건 그냥 물건에 불과해. 내 마음이 그러면 그런 거야.’
모루는 정든 집 안을 마지막으로 눈에 넣다가 머리맡에 놓았던 옥돌목걸이를 가지고 나왔다.
“엄마, 아버지 일하던 곳에 들렀다 갈까?”
“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 아니었냐?”
어머니가 의아해 했다.
“가는 거 맞아. 아버지 만나면 남대가람 골짜기를 얘기해 주려고 그러지. 아버지도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모루 말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돌집은 눈을 소복하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모루는 덮개돌의 눈을 쓸어내렸다.
“어머나, 돌집이네. 작은 걸 보니 주인이 어린가 보다. 가람이 내려다보이고 하늬뫼가 둘러 서 있으니 자리 하나는 참 좋다.”
어머니가 돌무덤 가까이 다가갔다. 모루는 눈물이 나려는 걸 참았다.
“엄마, 이 돌무덤 주인은 행복할 거야. 그치?”
“그럴 것 같구나.”
어머니는 돌무덤을 쓸어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길이 아닌 곳은 가지 않았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괴로워하셨고요. 저도 훗날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을 그런 길을 만들기 위해 떠나요. 그 길을 찾으면 돌아와 고을 사람들과 함께 할 거예요. 그러니 외로워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늘 제 가슴에 있으니까요.’
모루는 아버지의 작은 돌무덤을 보며 마음으로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돌무덤을 쓸어주고 있었다.
“이제 가요.”
모루는 어머니를 부축해 뗏목이 드나드는 곳으로 갔다. 먼저 나루목 고을로 가서, 놋쇠 한아비가 말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고을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쉬운 길이 아니겠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음 안에 있는 하늘이 곧은 생각으로 알려 준 것이다.
“오라버니, 멀리 가는 거 아니지? 돌아올 거지?”
뗏목을 기다리고 있는데 꽃뉘가 달려왔다.
“네가 어떻게…….”
“오라버니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고……,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떠난다면 이리로 오리라 생각했고.”
꽃뉘는 품안에서 놋쇠덩이를 꺼내 주었다. 그것은 살 곳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받아 줘. 오라버니한테 꼭 주고 싶어.”
모루는 잠시 놋쇠덩이에 눈길이 갔지만 거절했다. 그걸 지니고 가면 그만큼 마음의 빚을 지고 가는 것이다. 꽃뉘가 눈물바람해도 어쩔 수 없었다.
뗏목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루는 먼저 어머니를 태우고 살아온 풍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뗏목에 올랐다. 뗏목이 뜨려고 할 때였다. 꽃뉘가 뛰어 들었다.
“오라버니, 나도 갈 거야. 날 박달 고을로 가지 않게 해 준다고 했잖아. 난 누이동생이라도 좋고 각시라도 좋아. 아무튼 오라버니 따라갈래.”
말릴 틈도 없이 꽃뉘도 일행이 되었다. 뗏목은 남대가람에 물결을 만들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 안의 하늘이 추운 겨울을 지나면 봄이, 따스한 봄날이 올 거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11. 나루목 고을 전사들
뗏목은 유유히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뗏목에 오를 때 뗏목 아재가 눈길로 무슨 일이지 묻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곁에 어머니가 있어서 자세히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물은 알맞게 결을 만들며 물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나루목 고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곧 아버지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는지 눈 속에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모루는 눈을 감았다. 당장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할 텐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지, 마음이 흔들렸다. 떠나왔지만 어떡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변하는 세상에 힘을 보태리라 다짐하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모루야, 우리가 가는 곳이 나루목 고을이냐? 거기에 네 아비가 있는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사르르 떨렸다.
“나루목 고을 맞아요.”
모루는 아버지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 저기 보세요. 곧 도착해요.”
꽃뉘가 사람들이 오가는 나루터를 가리켰다. 나루터에는 물건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과 짚으로 엮어서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러 저자거리로 가는 것 같았다.
“자, 내리시오.”
뗏목 아재가 소리쳤다. 모루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내렸다. 뒤를 꽃뉘가 따랐다.
“아재, 고마워요.”
모루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 마음 안에 희망을 품고 가지 않았느냐?”
“그랬지요. 그래서 다시 왔어요. 이곳에서 마음 안에 하늘을 찾으려고 해요.”
모루는 자신에게 하듯이 말했다.
“허허, 어려워서 원... 응원하마. 힘내서 소망하는 걸 이루도록 해라.”
뗏목 아재가 손님을 태우며 손을 흔들었다. 모루는 그제야 자신이 살던 금누리 고을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모루야, 어서 가자. 어디로 가면 되냐?”
어머니가 재촉했다. 모루는 천군아비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아는 곳이란 그곳 밖에 없는 터였다. 천군아비는 뭐라고 말할까, 모루는 자신이 없어져 어깨가 처지려는 걸 다시 곧추 세우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금누리 고을에 있어도 편하게 살 수 없는 것이다. 한곰어른의 명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노예로 끌려가 고생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모루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의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모루는 힘을 쏟으리라 다짐했다.
저만치 천군한아비가 보였다. 모루는 반가워 성큼 발을 내딛다가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주춤거렸다.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
어머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모루를 살폈다.
“아, 아니. 무슨 일은…….”
모루는 어머니를 안심시킨 뒤, 돌아보았다. 꽃뉘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따라온다고 여겼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엄마, 잠깐 여기 서 있어요.”
모루는 오던 길을 달려갔다. 머릿속이 실타래가 얽히듯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자신만 믿고 따라온 꽃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생각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라버니!”
길가 큰 바위 뒤에서 꽃뉘가 나오고 있었다.
“너어!”
모루는 꽃뉘를 보자, 긴장이 풀리며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니?”
“그, 그게... 그래, 볼일. 볼일이 생겨서...”
꽃뉘가 당황하더니 얼버무렸다. 모루는 소피가 마려워 그랬나 보다고 짐작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하고 사라져야지.”
모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야지, 그럴게.”
꽃뉘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모루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어머니에게로 갔다.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모루야...”
“엄마, 괜찮아. 괜찮으니 안심해요.”
모루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걸었다. 천군아비가 있는 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구먼.”
천군한아비가 모루 일행을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루는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었던 게 드러나고 있었다. 모루는 천군아비가 새 날이 올 거라고 한 말을 믿고 싶었고, 그런 날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떠나온 지도 모른다. 모루는 이번에는 어머니와 꽃뉘까지 세워놓고 천군아비에게로 갔다.
“한아비, 살길을 찾아 떠나왔어요. 길을 찾을 때까지 도와주세요. 새날이 오고 있다면서요?”
“힘들다고, 불의하다고 떠나는 것은 도피란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변화시켜야 하는걸. 끄응.”
모루는 그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생각하는데 천군한아비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앞서 걸었다. 모루가 따르자, 어머니와 꽃뉘도 궁금함을 참고 뒤따랐다. 천군아비는 어느 동굴로 들어갔다.
“흠, 며칠 지내면서 앞일을 생각해 보자.”
천군한아비가 그렇게 이르고는 갔다.
“모루야, 네 아비 만나러 온 게 아니냐? 왜 이곳으로 온 거야?”
어머니가 어리둥절해 했다.
“아주머니, 조금 기다려야 해요. 그렇지? 오라버니.”
꽃뉘가 나서서 말해 주었다.
“그런 거냐? 알았다.”
어머니가 편편한 곳을 골라 앉았다. 모루는 편안히 쉴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꽃뉘를 남겨 두고 저자거리로 나갔다. 천군한아비에게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한아비, 저번에 제게 말했죠? 새 세상, 새 날이 온다고요? 저도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쓰고 싶어요.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결심이 굳은 거냐?”
“네, 새 세상, 새 날을 찾고 싶어요.”
모루가 힘주어 말했다.
“그럼, 따라가 봐라.”
천군한아비가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장정 한 명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이 짐을 들고 따라와라.”
장정이 앞서 걸어갔다. 모루는 천군한아비를 바라보았다. 천군한아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루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짐을 지고 장정을 따라갔다. 평평한 들을 지나 산으로 접어들었다.
“조금만 참아라. 곧 도착할 거다.”
장정은 모루의 마음이 헤아려지는지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느 정도 더 가더니 장정은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곳은 자갈뫼 중턱에 있는 넓은 평지였다. 모루는 앞에 펼쳐진 모습에 놀라서 눈이 커졌다. 많은 장정들이 모여 활촉을 던지거나 돌멩이를 던져서 목표물을 마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부목어르신, 곡식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 자는 천군한아비가 보냈습니다.”
“어서 와라.”
장정들을 지켜보던 어르신이 모루에게 말을 건넸다. 장정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네, 아 네에.”
모루는 뒷걸음을 쳤다.
“천군한아비가 보낸 게 아니냐?”
모루는 그제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모루입니다.”
“놀랐을 게다. 이곳 장정들은 뜻을 같이 하는 전사들로 의로운 일을 위해 힘을 쓰는 자들이란다.”
부목어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그곳 장정들은 어느 고을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하며, 어느 고을이든 불의를 위해 힘이 필요하다면 그 고을을 위해 싸운다고 했다.
“부목어르신, 그게 새 세상, 새 날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가요?”
모루는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다.
“고인 물은 어떻게 되겠냐? 썩겠지? 썩은 물을 샘물로 물갈이 하면 그게 새 세상이 아니겠냐?”
부목어른신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했다. 그곳의 장정들은 자신이 살던 고을의 우두머리 횡포에 못 이겨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노예로 전락해 고생고생하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 탈출한 장정들도 있었다. 모루는 금누리 고을을 떠올려 보았다. 한곰어른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횡포를 부리고 있다. 돌집을 지으라고 윽박지르고, 꽃뉘를 박달고을 우두머리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고 하고, 장정들을 모아 힘을 키워 이웃고을을 쳐들어가 땅을 넓히고 있다. 그러다 고을 사람들의 목숨을 잃었고, 노예로 끌려가게 했다. 그런 일을 멈추게 해야 하는데...
‘그래, 불의를 위해 싸운다면 기꺼이 전사가 될 거야!’
모루는 심지를 단단히 했다. 그렇게 모루는 나루목 고을에서 의로운 일에 힘을 쓰는 전사가 되기로 했다. (이제 모루의 꿈은 의로운 전사가 되는 거군요.)
12. 움집 감옥에 갇히다
모루는 동굴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지쳤는지 잠이 들어 있었다. 꽃뉘가 불안한 얼굴로 반겼다.
“오라버니, 어디 갔다 온 거야? 애간장 타서 죽는 꼴 보려고 그래?”
“많이 걱정했지? 미안해.”
모루는 꽃뉘를 안아주었다. 꽃뉘는 모루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떨었다. 모루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자신을 따라온 꽃뉘가 안쓰러웠다. 기회가 되면 돌려보내리라 마음먹었다.
“오라버니, 어디 갔다 온 거야?”
꽃뉘가 눈망울을 반짝였다.
“응, 이제부터는 내 힘을 의로운 일에 쓸 거야. 의로운 일에 힘을 쓰려는 아재들을 만났어.”
모루는 그 말을 하는 순간,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의로운 일? 그 일인 뭔데?”
꽃뉘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화롭게 사는 세상, 자신의 일로 욕심 부리지 않고 함께 살기 위해 힘을 쏟는 세상을 만드는데 힘을 쏟을 거야.”
모루는 박달고을로 노예로 끌려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고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건 한곰어른의 욕심이 불러온 재앙이었다. 큰돌장이었던 아버지도 하늬뫼 등성에 버려질 값없는 목숨이었다. 모루는 하늬뫼 골짜기에 있는 아버지의 작은 돌집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또 한 번 어금니를 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오라버니가 하는 일이 생이별을 하거나 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으면 해. 지금도 많이 불안해.”
꽃뉘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루도 꽃뉘의 불안이 가늠이 되었다. 지금쯤 금누리 고을은 모루가 사라지고, 꽃뉘도 사라진 걸 알고 난리 났을 것이다. 평소 꽃뉘가 모루를 사모한 걸 아는 들보는 펄쩍펄쩍 뛰며 당장 잡으러 가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있게 하면 안 되지. 그런 일은 없어야지.”
모루는 자신에게 하듯이 말했다. 마음이 짠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모루는 자갈뫼 평지로 갔다. 그곳에서 모루는 도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아버지 큰돌장이처럼 도구를 만들었지만 돌이 아니라 철로 농기구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었다. 모루는 철로 만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철 농기구들은 농사를 짓는 부족들이 사용한다고 했다. 장정들도 각자 맡은 일을 하였다. 주어진 양만큼 하면 모두 모여 무술 훈련을 했다.
모루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으면 자갈뫼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걸 다 하면 만날 수 있다고 말해 놓았다. 불안해 하는 꽃뉘에게는 새 세상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 많으니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했다. 그래도 불안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는 걸 볼 때면 왜 따라와서 그러냐고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눈썹달이 보름달이 되어가던 어느 날, 부목어른이 장정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잘 들어라.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
“네, 말씀하십시오.”
장정들이 결의에 차서 부목어른의 말을 기다렸다.
“금누리 고을에서 요청이 왔다. 박달고을로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을 부탁했다. 직접 하자니, 싸움이 날 게 뻔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줘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뜻을 따라주기 바란다.”
부목어른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는 일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네, 금누리 고을의 사람들을 구하러 갑시다!”
모루는 금누리 고을이라는 말에 놀라서 나무토막처럼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느 고을에서 왔느냐, 무엇 때문에 오게 되었느냐,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고, 모루도 굳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천군한아비가 보냈다는 걸로 바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모루는 끌려간 사람들을 구출해 오는 일에는 동의가 되었다. 그런데 한곰어른이 반성을 하고 이 일을 부탁했는지 의심스러웠다. 한곰어른은 가만히 있는 박달고을을 먼저 건드린 장본인이다. 박달고을을 쳐들어갈 거라고 공공연히 큰소리치다가 도리어 박달고을에게 공격을 당했고, 그 싸움에서 져서 노예로 끌려가게 된 것인데... 모루는 고민이 되었다. 금누리 고을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떠나왔는데, 금누리 고을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모순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할 일이 밖으로 알려지면 행동하는 데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말조심, 행동 조심하도록! 행동개시는 내일 달밤이다!”
부목어른은 말을 마치고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금누리 고을은 주위 고을들에게 평판도 안 좋은 곳인데...”
“부목어르신이 깊게 생각하고 결정하신 거겠지.”
“그런데 우리를 어떻게 알았지? 금누리 고을은 부목어르신이 특히 경계하는 곳이라 알리길 꺼리지 않았나.”
“글쎄, 나도 그게 이상하긴 해.”
장정들이 하나둘, 움막으로 들어가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정들 중에 몇 명은 자갈뫼를 내려갔다. 움막에서 지내는 장정들은 다른 고을에서 모여든 것 같았다. 모루도 의로운 일이라며 힘을 보태자고 하는 부목어른의 결정이 의아했다. 그 일은 한곰어른의 욕심으로 벌어진 일이라 한곰어른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헷갈렸다.
모루는 착잡해져서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은 자갈뫼 자락에 있어서 하늬뫼 계곡에서 돌 작업을 하던 거리와 비슷했다.
“일은 힘들지 않았냐? 네 아비하는 일이 얼마나 중하길래 찾아와도 기다리라고만 하냐.”
어머니의 인내가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엄마,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조금만 지나면 다 알게 될 거예요.”
“뭘 알게 된다는 거냐? 비밀도 아주 큰 비밀인가 보구나.”
“엄마, 제발 건강 생각해야 해요. 건강해지면 다 말해 줄게요.”
모루는 어머니가 넋을 놓을까 봐 걱정이었다.
“어?”
꽃뉘가 보이지 않았다.
“흙그릇을 들고 나갔는데, 열매라도 따올 모양인가 보더라.”
어머니가 말해 주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돌아온 꽃뉘는 빈 흙그릇이었다. 그런데 쫓기는 듯 허둥거렸다.
“오라버니...”
꽃뉘가 모루를 보자,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 나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
꽃뉘가 눈을 피했다. 모루는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달밤에 행동해야 하는 일 때문에 캐묻지 않았다.
힘이 약해서, 지켜주는 이가 없어서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분명 의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금누리 고을 일이라면... 모루는 그 부분이 턱 걸렸다. 그리고 자꾸 마음 안에서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일었다.
천군한아비를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렇지만 자갈뫼 전사로 있는 한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치고 올라와 분심을 눌렀다.
그래서 모루도 달이 떠오르자, 전사들과 함께 박달고을로 소리 없이 들어갔다. 서른 명 정도 움직이는 터라, 노예들이 생활하는 움집을 빠르게 습격해서 움집을 지키는 장정들을 물리치고 노예들을 포박해 놓은 칡끈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곡식 창고 옆에 잡혀온 노예들이 묵는 움집감옥이 줄을 선 듯이 세워져 있고. 그 입구는 도망치지 못하게 박달고을 장정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부목어른이 몸을 낮추고 공격 신호를 기다리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행동 개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사들은 잽싸게 보초들을 제압하고 노예로 잡혀 온 사람들의 칡끈을 끊었다. 모루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보초들이 제압되는 게 이상했지만 다음 일이 급해서 더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노예들이 빠르게 움직여서 움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서 나가세요. 어서요.”
모루는 노예의 칡끈을 끊고 돌아서다가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움집 공터에 솔가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모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으하하하! 고맙소이다.”
한곰어른의 목소리였다.
“별말씀을요. 우리야 손해날 것 없으니 괜찮소이다.”
박달고을 우두머리의 응대였다. 모루는 눈앞에 펼쳐진 일에 놀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의로운 일에 힘을 쓸 거라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거라는 꿈을 가지고 있던 전사들이 도리어 칡끈으로 묶여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으아악, 이게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냐고요?”
모루가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날고뛰어도 넌 아직 애송이다. 그걸 모르고 까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심하구나. 불쌍해서 어쩌나.”
한곤 어른이 혀를 찼다. 악어가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더니 딱 악어의 눈물 격이었다. 모루는 움집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모루를 잡기 위해 한곰이 이런 일을 꾸민건가요? 그럴만큼 모루가 값어치가 있나요? 그냥 꽃뉘만 데려가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이러려면 모루가 금누리고을을 떠나기 전에 한곰에게 어떤 상처를 가하는 게 더 좋을 듯 합니다. 꽃뉘가 따라오는 것 말고도요.)
13. 꽃뉘의 선택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루는 몸이 욱신거려서 눈을 떴다. 억울하게 끌려온 노예들을 구하러 왔는데, 움집 감옥에 묶여 있는 처지라니!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꿈일 거야.’
모루는 고개를 저어도 보고, 살을 고집어도 보았다. 뭔가 잘못되어도 아주 잘못된 것인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지 몰랐다. 날이 밝으면 금누리 고을로 끌려갈 것이다. 그 다음은 고을을 배신하고 떠났다는 이유로 가혹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어쩌면 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는 중에도 꽃뉘가 걱정되었다. 모루는 꽃뉘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꽃뉘의 행동에 노발대발해서 한곰어른이 다른 고을로 혼인시키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한곰어른은 땅을 넓히려는 욕심이 강해서 꽃뉘를 그럴 목적으로 이용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맞은편에는 저항하다가 다쳤는지 전사 아재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재,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루는 너무나 허망해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꿈꾸던 세상이 이렇게 빨리 막을 내릴 줄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 날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수렁에 빠질 줄이야.
“누군가 우리 정체를 알고 함정에 빠뜨린 것 같다. 안 그러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거다.”
전사 아재는 고통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용당했어. 금누리 고을에서 노예를 구출해 달라는 청을 받아들여 왔건만, 금누리 고을 우두머리와 박달고을 우두머리가 합세해서 우리를 잡으려고 한 거였다는구만.”
“네? 왜요? 왜 그러는데요?”
모루는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거의 고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이지. 불의를 못 참아 목소리를 내거나, 우두머리에 저항하는 행동을 해서 노예로 전락하기 전에 도망친 이들이었어. 그러니 우두머리에게는 우리가 달가운 존재가 아니지. 그런데 우리의 존재를 어찌 알았을까? 누군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상대에게 우리가 먼저 노출되어서 불리한 일을 당한 거야.”
전사 아재의 말을 들으니 누가, 무슨 이유로 배신을 했는지 궁금했다. 만나게 된다면 사람 숨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의로운 일이 당신한테는 고작 이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부목어르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 보이는데...”
모루는 전사들을 이끌던 부목어른이 궁금했다.
“살아 있다면 우릴 구하러 꼭 올 게다. 기다려 보자.”
전사 아재의 말에 모루도 한 줄 희망을 가지고 싶었다.
모루는 이곳까지 온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달밤을 이용해 박달고을로 들어왔고, 움집감옥을 지키는 장정들이 별 저항 없이 달아났고, 수월하게 감옥으로 들어왔고 노예들을 풀어주었는데... 그런데 도리어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천군한아비는 이 상황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무슨 말을 해 줄지 궁금했다. 새 세상이 열리고 새 날이 올 거라고 했는데, 그런 세상을 꿈꾸고 떠나왔는데 이렇게 끝이 나야 하다니, 모루는 지금의 처지를 돌이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너무나 나약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어둑하던 밤이 서서히 걷히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날이 밝자, 모루는 금누리 고을로 끌려갔다.
"모루야, 모루야…….”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묶인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엄마, 어떻게...”
“밤에 금누리 장정들이 와서는 이리로 끌고 오더구나.”
“꽃뉘는요?”
“꽃뉘도 끌고 갔지.”
어머니가 힘겹게 말했다. 그러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흐느꼈다.
“어흐흑, 네 아비가 숨이 다했다는 게 정말이냐? 정말이냐고?”
어머니는 묶인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엄마, 그게…….”
모루는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숨이 턱 막혔다.
그때 들보가 나타나 거들먹거렸다.
“저만 살겠다고 떠나더니 고소하다. 꽃뉘까지 꼬셔서 가서는 죄만 더하고 꼴좋다. 꽃뉘가 이번에 큰 역할을 했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
“크크, 널 잡는 끄나풀이 되어 주었단 말이지. 너뿐 만이냐? 골치 아픈 반역자도 잡는 걸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잖아.”
“뭐라고? 끄나풀?”
“그래, 꽃뉘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
“…….”
모루는 그때까지도 들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꽃뉘는 처음부터 널 감시하는 끄나풀이었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어.”
모루가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오늘 밤 지나면 네 운명이 결정 날 거야. 아버지가 들에 나뭇단을 쌓게 하는 걸 보면 넌 이제 끝장이란 말이다.”
들보는 속 뒤집을 일이 바닥났는지 가 버렸다. 모루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꽃뉘가 끄나풀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아이고, 꽃뉘가 우리 있는 곳을 고자질했나 보다. 고약한 여식 같으니라고. 아니다, 그럴 꽃뉘가 아닌데……, 무슨 사연이 있을 게다.”
어머니가 꽃뉘를 탓하다가 꽃뉘를 감쌌다. 모루는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라 한숨만 나왔다.
“오라버니...”
꽃뉘는 밤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 사이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얼굴이 초췌했다.
“…….”
모루는 막상 꽃뉘를 보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줄 수 있느냐?”
어머니가 힘들게 물었다.
“죄송해요. 제가 나루목 고을에 도착해서 가고 있는데 어떤 아재가 저에게 다가와서는 협박을 해서…….”
꽃뉘가 더듬더듬 말했다.
모루는 나루목 고을에 도착했을 때, 뒤따라오던 꽃뉘가 안 보여서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그럼, 그때?”
“응, 오라버니. 나루목 고을에 도착했을 때 기억하지? 뗏목에서 내려서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날 다짜고짜 잡더니 바위 뒤로 데리고 갔어. 소리치지 못하게 윽박지르면서 오라버니가 하는 일들을 알려달라고 했어. 안 그러면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흔적 없이 해치겠다고 하면서...” (모루가 아직 자갈뫼 전사들에게 합류할지 안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루가 하는 일들을 알려달라니 좀 이상합니다. 한곰이 보낸 사람이라면 그냥 꽃뉘를 데리고 가면 되는 건데 말이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자갈뫼 전사들도 다 잡히게 하면 어떡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모루는 눈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쉿! 오라버니, 꼭 살아야 돼. 꼭 살아서 만나. 지금 고을 사람들은 한울님께 농사 잘 되게 해달라고 기원제 올릴 준비하느라 바빠서 무난히 갈 수 있을 거야.”
꽃뉘가 철검을 슬며시 내밀었다.
“어서! 날 이용해. 그 방법 외에는 살길이 없어.”
꽃뉘가 낮은 목소리로 재촉을 했다. 모루는 잠시 정신이 아찔했지만 곧 소리 나지 않게 움직였다. 철검으로 모루는 손에 묶여 있는 칡끈을 잘랐다. 그때 낌새를 느낀 보초가 다가왔다. 꽃뉘는 모루 손을 잡아 자기 목에 둘렀다.
“비키세요! 제가 다치는 꼴을 보려고 해요? 제가 다치면 아버지한테 목이 잘리는 일을 당할 거예요.”
꽃뉘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보초는 모루를 보고 다가서다가 꽃뉘를 보고는 어쩌지를 못하고 주춤거렸다.
“아주머니는 제가 모시고 갈게. 어서!”
모루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모루는 꽃뉘 덕에 감옥 밖으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남대가람으로 가. 아주머니는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모시고 갈게. 남대가람에서 만나.”
꽃뉘가 모루의 등을 밀었다. 모루는 남대가람으로 달렸다.
14. 있는 자리에서
남대가람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모루는 달리다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숨을 몇 번 토해야 했다. 또 달리다가 앞으로 꼬꾸라져 무릎에 피가 나도 통증을 느낄 여유가 없이 허둥거렸다.
“어서 이리로!”
남대가람에 채 다다르지 않았는데 누군가 모루의 팔을 낚아채듯이 잡아 옆 숲으로 데리고 갔다.
“칠보 아재!”
“쉿!”
칠보 아재가 입술에 손을 댔다.
“나도 함께 하기로 했다.”
“뭘요? 뭘 어떻게 함께 한다는 거예요?”
어둡던 앞이 희부연 하게 눈에 들어왔다. 모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갈뫼 부목어른과 전사들이 몸을 낮추고 모여 있었다.
“부목어르신...”
“우리가 희망하는 새날이 올 거다.”
부목어른이 낮지만 힘주어 말했다.
“어떻게요?”
모루는 한곰어른의 꼬임에 어이없이 당한 처지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기원제를 올릴 거다. 그때 출격이다!”
부목어른이 고개 짓을 하자, 칠보아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루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눈만 멀뚱거렸다.
“오늘 금누리고을로 쳐들어갈 거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고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알려 줘야 한다.”
부목어른의 손짓으로 전사들이 어둠이 거치기 전에 바삐 움직였다. 모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꽃뉘가 어머니와 함께 남대가람으로 온다고 했으니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같이 힘을 보태야 할 것 같았다.
“자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겠네. 여기서 기다리게나.”
부목어른이 모루를 장정으로 대해 주었다.
“부목어르신,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니다, 자네들이 잘 커야 앞날이 밝은 거네.”
부목어른은 모루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는 바삐 금누리고을로 들어갔다. 모루도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지만 도망 나온 처지라 금누리고을로 들어갈 수 없는 처지였다. 모루는 몸을 숨겨가며 남대가람으로 갔다.
날이 밝으면 자갈뫼 전사들이 행동을 개시한다고 했다. 많은 수가 아닌데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면서 두려웠다. 그러다 칠보아재가 돕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남대가람 근처 풀숲에 몸을 숨기고 어서 꽃뉘가 어머니와 함께 오기를 고대했다. 순간이 길게 느껴져서 불안했다.
그때 푸스럭 소리가 났다. 꽃뉘가 모루를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야, 여기.”
모루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렸다.
꽃뉘가 풀숲으로 왔다.
“오라버니...”
“엄마는, 엄마는 어디 계셔?”
모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어떡해? 아버지가 오라버니가 도망친 것을 알고 어머니를 고을에서 추방시킬 거래.” (제가 한곰이라면 모루가 도망친 것을 알고 꽃뉘가 도와준 걸 알았다면 꽃뉘를 가두고 감시할 거 같아요. 이미 모루를 따라 도망갔던 꽃뉘인데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놔두다니요. 이렇게 모든 일을 다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꽃뉘가 자유로운 건지.. 작위적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들보가 모루가 있을 법한 곳에서 소리를 질러서 알려주면서 모루를 도발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뭐라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모루가 몸부림을 쳤다. 고을에서 추방된 자는 다른 고을에서도 거두지 못했다. 그럴 경우 고을에서 요구하는 곡식이나 노예를 보내야 했다. 그것에 응하지 않을 때는 무력으로 응징당하는 걸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고을에서 추방당한 자는 갈 곳이 없어 결국 야생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엄마를 그렇게 되게 내버려둘 수 없어.”
모루는 금누리고을로 들어갔다. 고을 재단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재단을 높이 쌓은 주위로 바위들과 나무들이 둘러싸여 있었다. 농사와 사냥을 안전하게 잘 할 수 있게 한울님에게 재를 올리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곳에 모루 어머니가 손이 묶여 끌려나와 있었다.
모루가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꽃뉘가 모루 몸을 바위 밑으로 낮추게 했다.
“오라버니, 진정해. 방법이 있을 거야.”
꽃뉘가 속삭였다.
“기원제를 지낸 뒤 엄마를 고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공개적으로 추방하려나 봐. 그럴 수 없어. 막아야 해.”
모루는 주먹으로 땅을 내려쳤다.
한곰어른이 등장하고, 천군이 재단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손을 높이 들려는 찰라, 한곰어른이 청동검을 높이 올리며 나섰다.
“기원제를 하기 전에 고을에 불미스런 일이 있어서 처리하려고 한다.”
주위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금누리고을이 이 정도로 사는 건 누구 덕이냐? 다른 고을의 침입을 막아주고 먹고 살게 하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도망을 쳐서는 불순한 무리들과 어울리려는 자가 있었다. 그 자를 잡았으나 새벽에 감옥을 탈출했다. 반드시 잡아들여 죄를 물을 것이다. 오늘은 그 자의 어미를 처벌하려고 한다.”
한곰어른의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모루가 감옥을 탈출한 것이 불쾌해서 견디기 힘들어 하는 모습이었다.
“여기 있는 이 여인은 그 자의 어미로 함께 도망을 쳤다가...”
“잠깐!”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부목어른이었다. 그와 동시에 천군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칠보아재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한곰어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사이에 전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어서 저자들을 막아라! 어서!”
한곰어른이 소리쳤다. 한곰어른을 지키기 위해 장정들이 에워싸고 막으려고 했지만 고을 사람들의 물결과 전사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곰어른이 저항을 하다가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모루는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한곰은 들어라!”
부목어른이 앞으로 나서며 우렁차게 말했다.
“자네는...”
“날 기억하는가? 하하하, 자네 아버지와 똑같구만. 마음에 안 들면 몰아내고 노예로 부리고, 죽이고... 아직도 그러고 있나? 그 자리가 그러는 자리로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이 옆에 붙어다니는 이도 있다는 건 몰랐지? 일부러 꽃뉘에게 정보를 흘러 우리를 금누리고을로 불러들이게 했다는 걸.”
“뭐라고? 자네는 죽은 걸로 아는데, 어떻게...”
한곰어른이 부들부들 떨었다.
“자네와 친구로 지낸 세월이 안타깝구만. 자네의 힘이 줄어들까 봐 사냥에서 일부러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덤터기를 씌워 날 고을에서 추방한 네 아비의 일을 잊은 건 아니겠지? 사냥을 하다가 계곡으로 굴러서 다친 사람을 내가 그랬다고 말하는 널 나는 또렷이 기억하는데.”(앞에서는 한곰이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한 일이라고 했는데 뒤에는 한곰의 아버지라고 하네요. 정리가 필요할 듯 해요.)
부목어른은 분노에 차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금누리고을이 강한 고을이 되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용이 두 마리이면 힘이 분산되니까 힘을 뭉칠 수 없잖나.” (이부분은 아마도 들보를 세우기 위해 모루를 핍박하는 한곰의 모습에 개연성을 주기 위함인 거죠? 주욱 보다보면 모루는 그리 특별하지도 않아 보이고 아버지를 존경해서 돌장이가 되고 싶은 아이일 뿐인데요.)
한곰어른이 말했다.
“그래서 기원제를 마치고 선량한 고을 장정들을 노예로 보내려고 했나. 모의를 도와준 박달고을의 요구로 말이야. 주위를 봐라. 더 이상 불의에 따를 수 없어 일어난 사람들이 보이는가. 자네가 노예로 보내려는 장정들이 보이는가 말이다.”
“거무, 자네 왜 이러는가. 나와 이야기를 나눠 보세.”
한곰어른이 부드럽게 말했다.
“얘기, 무슨 얘기? 아비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한 얘기? 들보 앞길을 막을 것 같아서 모루의 날개를 꺾으려고 했나? 들보와 벗이며 꽃뉘와 친한 모루를 제거하기 위해 자네의 돌집을 세우라고 모루 아비인 큰돌장이를 몰아붙였나? 그러다 박달고을로 노예로 보내고, 아직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데려 오고. 어리석은지고! 고을사람들의 숨이 네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 그게...”
“왜? 겉으로 내세운 그럴듯한 이유가 아니고 속 진실을 꺼내니 놀랍나?”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와 완전히 다른 속 진실이라고 하니까 동의가 되어지지 않아요.)
부목어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부목어르신이 마을에서 쫓겨난 흙그릇 빚는 한아비의 아들... 그랬구나!’
모루는 그 순간 누군가 머리를 탁 치는 것 같이 지나간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자신의 집에 벌어진 일들이 한곰어른의 농간이라는 게 깨달아졌다. 눈에 불이 이는 것 같았다.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어르신한테는 우리 아버지의 숨이 그렇게 가벼웠나요? 으흐흑…….”
모루는 한곰어른에게 다가가며 울부짖었다.
“우리 애 아비도 돌아오게 해요!”
“박달고을로 노예로 보낸 장정들을 데리고 와요!”
“고을을 강하게 한다는 이유로 몹쓸 짓을 하다니…….”
고을 사람들도 분노를 토해냈다.
“저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가? 더 이상 자네의 빗나간 힘에 희생되지 않을 거네.”
부목어른이 손을 치켜들자, 전사들이 한곰어른의 손을 묶었다.
“우리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제발 우리 아버지, 살려 주세요.”
꽃뉘가 부목어른에게 애원을 했다. 한곰어른 옆에 끓어 앉아 있는 들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썩은 것은 도려내야 해. 안 그러면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거다.”
부목어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 우리 아버지 살려 줘. 우리 아버지 용서해 줘. 내가 벌을 받을게. 내가 벌을 다 받을게.”
꽃뉘가 모루의 다리를 잡고 사정을 했다. 부목어른과 전사들, 고을 장정들은 한곰어른을 움집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천군은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소도로 들어간 사람들을 고을로 나오게 했다.
며칠 뒤, 고을 한아비 회의에 부목어른과 고을 장정들이 참석하였다. 회의 결과 한곰어른은 사람의 숨을 경시한 죄를 물어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죄를 반성할 동안 소도에서 지내게 했다. 고을 사람들은 소도가 그런 곳으로 쓰이는 곳이 아니라고 반발했지만, 소도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왔고, 혼자 반성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장소라며 꽃뉘의 간곡한 부탁이 들어져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한곰어른의 빈자리는 꽃뉘가 감당을 하고 있었다. 들보는 무척 놀랐는지, 작은 일에도 깜짝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오는 걸 꺼리고 있었다. 모루 어머니는 남대가람 골짜기에 있는 작은 돌무덤을 날마다 보러 가서 쓰다듬다가 내려왔다. 돌무덤이 누구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꽃뉘는 선한 마음으로 고을 사람들을 살폈다. 먼저 한아비 회의를 열어 의견을 들은 뒤, 창고를 열어서 박달고을에 곡식을 보내 노예로 간 고을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다. 모루는 고을 장정들과 같이 고을 사람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고을을 지키는 데 힘썼다. 불의를 피해 떠나는 게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변화시켜야 한다는 천군한아비의 말이 가슴에 새겨 있었기 때문이다.
잘 읽었습니다. 한편의 서사 드라마네요. 시대적인 분위기가 잘 담겨 있어요.
여러번 수정하셔서 그런지 작가의 작의는 충분히 담겨있습니다.
1. 읽으면서 조금 의아한 건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 같은 데 생활풍경은 신석기정도로 보입니다. 청동기 시대면 제정일치의 부족국가로 초기고대국가정도 수준은 된다고 들었거든요. 고조선이 청동기 초기에 건국된 나라인데요. 전쟁 시 투구를 쓰고 청동을 박은 갑옷을 입고 청동구슬이 박힌 신발을 신고 말을 탔을 정도로 상당히 정교하고 섬세한 세공기술을 가진 나라였거든요. 방직기술도 있고 요리도 제대로 해 먹었던 걸로 생각이 되거든요. 고조선 후로 부여- 고구려로 시간이 흐른다고 볼 때 생활양식은 어느 정도 비슷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2. 모루라는 인물이 좀 모호합니다. 아버지를 존경해서 돌장이가 되려는 모루이지만 지도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한곰이 견제를 하는 이야기라면 앞부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모루는 훌륭한 돌장이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순수한 아이였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겪은 고난과 천군 한아비를 만나서 자신의 자질을 키울 수 있게 되어야겠죠? 돌장이보다 더 큰 뜻을 가진 인물로 지금 있는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아이로요. 그런 변화를 좀 더 뚜렷하게 보여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모루가 주인공인데 자꾸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작가가 등장하고 있어요. 좀더 모루의 시선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3. 꽃뉘의 캐릭터를 분명히 해야 할 듯 싶어요. 선사시대는 오히려 모계사회로 여성의 역할이 더 강했을 거 같은데요. 고려시대까지도 여성이 상당히 강하게 나오는데.. 여기의 모루 엄마나 꽃뉘는 다 약하고 조선시대가 바라는 여성성을 강조한 인물들로 보여서요. 나중에 꽃뉘가 마을을 다스리게 된다면 그 전에 그런 자질을 보여줘야 할 거 같아요. 계속 모루의 각시만 되려고 졸졸 따라다니는 캐릭터가 아닌. 아버지인 한곰의 잘못에 지적도 하고 들보보다 좀 뛰어난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모루에겐 약한 여자로 하는 건 어떨지요.
4. 아버지의 죽음까지 좀 이야기가 늘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모루가 찾으러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돌집을 짓기 전까지 내용은 없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좀더 속도감있게 긴장감을 주면 좋겠어요. 한곰이 아버지를 통해서 모루를 압박하려 하는 행동에 더 그럴듯한 이유를 주려면 아버지 도망편보다는 모루와 들보 사이의 어떤 사건(성인식이라든가)에서 고을 사람들이 모루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더 나을 듯 합니다.
5. 모루가 아버지의 돌무덤을 만들어드리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돌무덤을 만들어드리고 떠날 때 모루의 마음에서 돌장이의 꿈은 사라진 거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떠났다가 결국 다시 금고을로 돌아와서 고을을 지키면서 변화를 꾀하게 되는 걸로 이해가 됩니다.
뒷부분 내용을 더 넣으면서 앞부분과 좀 안 맞는 부분이 나오게 된 걸로 생각이 됩니다. 다시 촘촘히 수정하면서 엮으시면 감동적이면서도 좋은 작품이 탄생할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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