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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진정성으로 빚어내는 시, 마음으로 담그는 된장
이 위 발 시인
- 10월이 끝나갈 무렵 산빛 고운 중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이위발 시인을 만나러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이육사 생가에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배경으로 키가 큰 시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맨 먼저 들었다 -
임애월 : 이위발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이위발 : 네,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내려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임애월 : 이육사문학관은 지금 공사 중이네요.
여기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계신데... 증축공사를 하고 있나봅니다.
지금 계절이 늦가을이라서 이육사 선생님 생가터에는 청포도 대신 감이 참 탐스럽게도 많이도 달려있네요.
이위발 : 네, 현재 이육사문학관은 2004년 개관을 하여 십년 만에 리모델링 및 신축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3대문화권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총 공사비가 229억 원 가량 소요됩니다. 기존 문학관을 증축하여 전시 공간을 넓히고, 200석 규모의 강당이 들어섭니다. 그리고 2개의 강의실과 영상실이 만들어지고, 80명에서 100명가량의 단체 숙박을 할 수 있는 생활관이 만들어집니다. 단체 숙박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주변에 없어서 아쉬움이 많았는데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육사 선생의 생가가 복원이 됩니다. 그동안 말이 많았던 생가를 입구 자 형태로 그대로 복원을 할 계획입니다. 시내에 있는 육사 생가는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기도 해서 완전히 변형이 되었고. 이건할 때부터 제대로 하지 않아 생가로서 역할을 할 수 없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지을 생가 육우당(六友堂)은 철저한 고증에 의해서 지어집니다. 또한 육사 선생의 시상지 윷판대와 육사 선생 묘소까지 탐방로가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엔 이곳 원천에서 이육사청포도가 상표를 달고 처음으로 시판되었습니다. 그동안 청포도 재배에 공을 들여 봤지만 계속 실패를 했는데, 농업기술센터에서 기술 지원을 받아 세 농가에서 재배를 하여 수확을 한 겁니다. 이육사청포도 작목반도 생겼습니다. 현재까진 수확량이 많지 않아 서울이나 전국에선 아직 맛을 보지 못하지만 점차 수확량을 넓혀 나갈 겁니다. 머지않아 이육사청포도 와인도 시판할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계획 중이긴 하지만 이 주변에 와인공장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육사 선생이 살아계실 때 청포도가 있었다는 사람과 집 뒤편이나 담장 옆에 심어져 있던 익지 않은 머루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칠월은 아직 포도가 익지 않은 시기라서 제 생각에도 그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 임 선생님이 보는 저 감은 이곳의 토종 감입니다. 저쪽 안으로 들어가면 백운지와 내살미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도 저런 감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임애월 : 아, 여기 토종감이어서 그런지 더 정감이 갑니다.
이육사청포도 와인이 생산된다니 그 향도 궁금해집니다.
훌륭한 시인 한 분이 이렇게 농업생산성에도 직접 영향을 주는군요.
이위발 : 그렇습니다. 그게 문학예술의 위대한 힘이겠지요...
농암 종택 쪽으로 이동해서 말씀 나누실까요?
임애월 : 안동의 가을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특히 청량산 자락을 돌아드는 낙동강 줄기와 농암 종택에서 바라보는 저 산 능선은 말 그대로 환상적입니다. 이런 비경이 안동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현보 선생이 지은 ‘농암가’가 있다던데 한 수 들려주시고요, 안동의 자연에 대해서 자랑도 좀 간단하게 해 주세요.
이위발 : 농암 이현보 선생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거쳐 어지러운 정치를 논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이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호조참판을 지냈습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예안(禮安)으로 돌아와 산수와 더불어 독서와 시작으로 여생을 보낸 분입니다. 농암가 중에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린다.//농암에 올라 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 구나//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라고 노래했습니다. 농암가 중에 대표적인 시조입니다.
임애월 :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은, 이육사 시인, 서원들, 또 하회마을이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선비와 지사의 고향이라는 느낌을 먼저 받게 되는데 사실이 그렇다고요? 안동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조상의 후손들은 기가 죽어 산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이위발 : 최초의 의병운동이 일어난 곳이 이곳 안동이고, 독립운동을 하시다 국가로부터 표창을 받은 분이 300여분이 되고, 공적이 밝혀진 분만 700여분이 넘습니다. 한일합방이 되자 전국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이 칠십여 분 되는데 안동에서만 이만도 선생을 포함해 열 분이나 됩니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이어 안동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집안은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문중을 여기에서 꼭 밝히고 싶진 않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임애월 : 네, 알겠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요...(웃음)
선생님께서는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셨는데요. 등단배경이라든지 그 당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이위발 : 제가 등단한 해가 1993년입니다. 그 당시 90년대 초까진 동인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여서 작품 토론을 치열하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인 중에 누가 등단할거라는 소문이 나면 밤잠을 설치기도 하던 때입니다. 제일 기억나는 것은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던 이승훈 시인이 알고 있던 제 이름은 이현진이었습니다. 족보에 올라가 있는 이름입니다. 제 본명이 이위발인데 학교 다닐 때 많은 놀림을 받다보니 사회에 나와선 족보 이름을 쓰던 때입니다. 당선 소식을 받고 현대시학 사무실로 갔더니 주간을 맡고 계시던 정진규 시인께서 필명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투고할 때 이현진으로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이름으로 나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던 중 사실 제 본명은 이위발이라고 했더니 그 이름이 시인 같다고 하시더니 곧바로 바꾸셨습니다. 사실 지금도 저를 모르는 분들은 제 본명이 필명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저는 ‘이위발’이라는 본명을 다시 찾아서 너무 좋습니다.
임애월 : 제가 듣기에도 ‘이현진’보다는 ‘이위발’이라는 이름이 분위기도 있어 보이고 더 멋집니다.
그 후 8년이 지나고 2001년에 첫 시집을 상재하셨으니 다소 늦은 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위발 :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망설여집니다. 사실 시상식 날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당일 시상식 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상패와 꽃다발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이 강남 서초동에 있었습니다. 차 막히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택시를 탄 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시상식이 끝나고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참석한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술잔만 기울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2차, 3차까지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는데 거기서 다시 한 번 사단이 났습니다. 정진규 주간님이 술에 취해서 먼저 가신 이승훈 시인에게 지나가는 말로 욕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정 주간님께 “왜 욕을 하시느냐”고 넌지시 운을 떼자, 버럭 화를 내시면서 술상을 엎었습니다. 그 장소가 당시에 유명했던 인사동의 ‘시인학교’라는 카페였습니다. 정주간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저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참으라고 하면서 제 팔을 양족에서 잡고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 시인이 송찬호 시인과 대구 영남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윤희수 시인이었습니다. 송찬호 시인은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윤희수 시인도 친한 형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젊은 혈기도 그렇지만 정주간님은 이승훈 시인과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막역한 사이였고, 나이도 연상이었기 때문에 욕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사부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등단하는 날 그런 사건을 만든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진규 시인에게 전화로 연락을 하자 현대시학 사무실로 오라고 했습니다. 사무실로 찾아간 저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시인이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직도 가슴에 꽂혀서 맴돌고 있습니다. 젊은 혈기에 본인의 정당성만 믿고 전체의 흐름을 읽지 못한 행동에 대해 자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이 3년이란 시간이었습니다. 등단지에도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첫 시집이 늦어진 이유도 여기에 연유된 겁니다.
임애월 ; 아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당시에는 무척 심각하셨을 텐데...... 지나간 문단 야사들은 듣는 이들에게는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웃음).
이승하 시인은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작품해설에서 ‘이위발 시인의 시는 극적구성을 갖는 것이 형식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서 시집 전체가 한편의 드라마’라고 평하셨는데, 「무성시대」, 「어느 모노드라마의 생」, 「마지막 휴머니스트」, 「오늘의 요리」 등 시나리오의 요소들을 장치한 작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위발 : 네, 첫 시집을 낼 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시를 쓰고 문예지에 발표하면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좀 더 극적인 요소를 넣어 시를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나 다 쓰는 그런 시 형식이 아닌 저만의 독특한 시적 형식을 추구해 보겠다는 치기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서서히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신인들도 등장하고, 이미 그런 모더니즘의 시적 세계의 반석에 올라 있던 황지우 시인, 박남철 시인들에게도 보란 듯이 저의 시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임애월 : 새로운 시세계를 개척하고 싶은 개척자적인 시정신이었군요.
작품 한편 한편이 짧은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은데 지금 읽어봐도 시집읽기로는 좀 낯설거든요.
첫 시집을 이렇게 파격적으로 상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위발 :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보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있었지요. 이 시집이 출간되면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기대와 관심은 시집이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어느 대학교 학생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석사 논문에 제 시집을 새로운 형식의 모더니즘이란 테마로 논문을 발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곤 끝이었습니다.
임애월 :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당대를 지나서 뒤늦게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 쓰기의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실 때 극적인 형식을 취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는지요?
이위발 : 도시에 살면서 늘 생각 끝에 매달려 있던 것이 슬픔이란 단어였습니다. 도시에 산다는 게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시 속엔 도시의 슬픔이 배어있었습니다. 그 슬픔의 연속성에 극적인 이야기로 한편의 비극을 담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애월 :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양식 중의 하나인 ‘극시’에서 ‘비극은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고 하였는데 이 선생님께서도, 파토스적인 카타르시스가 독자들에게 필요하다고 느끼셨나 봅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스스로 연출하고 자신이 연기를 하는 한편의 ‘모노드라마’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선생님은 스스로의 삶을 객관적으로 연출하면서 살고 계시는지요? 그러려면 엄청난 감정의 절제가 필요하겠지요.....
이위발 : 사실 그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삶을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태생적으로 사람에 따라 이미 주관이 개입되어 태어나잖아요.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것은 바꿀 수가 없겠지요. 본성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팔자소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삶의 균형을 위해선 자신의 주관적인 것을 어떻게 객관화시켜 균형을 맞춰 살아가느냐 그것이 중요하겠지요.
임애월 : 이 시집은, ‘눈알이 공중에 떠다니’는 등 난해하고 비정한 도시의 우울한 그림자들이 서로 엉켜 비명을 지르고 그 비명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환청을 일으키게 하는데요, 작품마다 지독한 패러독스와 감각적인 시어들이 살아 꿈틀거리며 다가와 폐부를 찔러대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도 함께 통증을 느끼거든요. 「도시의 아침」이나 연작시 「시뮬레이션」 등이 특히 그러네요, 이런 ‘시뮬레이션’을 연출하신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위발 : 어느 날 친구들과 단골 술집에서 술을 마신 후 화장실에 갔습니다. 늘 벽면 액자에 걸려 있던 뭉크의 그림 ‘절규’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두 눈이 누군가에 의해 파여져 있어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을 하자면 술에 취한 사람이 벽면의 액자를 깨트리고 난 후 유리가 없는 상태로 걸어 두려고 액자를 들고 보니 아무래도 그 그림이 이상하게 다가왔겠지요. 그래서 눈에다가 장난을 친 게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훼손된 ‘절규’를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눈이 공중에 떠다니듯 저를 한동안 가상현실을 떠다니게 만들었지요. 「도시의 아침」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주차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이웃사촌과 얼굴을 붉히는 일이 태반으로 일어나고, 집이란 공간이 곧 창살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밖으로 탈출하듯 나와 보지만 밖도 일반 다를 게 없습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도깨비 같은 도시의 아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임애월 : ‘구멍 뚫린 달’이나 ‘심장 속에서 거미가 알을 까’는 등 초현실주의적이고 환상적인 표현들로 이야기되는 작품 속의 도시는 도깨비 같기도 하네요.
이 시집의 낯선 형식을 가진 작품들 중 한편을 소개해 볼게요.
프롤로그
평등의 원칙을 내세우듯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법정 안, 재판장을 향해 피고석이 가운데 놓여 있고, 우측엔 변호사, 좌측엔 검사가 앉아 있다. 피고석 앞에 서 있는 시인, 불안한 듯 애써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재판장 : 사건번호 4441번 손해배상 청구 소송건에 대한 이 사건 소송측의 검사! 심문하십시오.
검 사 : 피고는 1999년 20세기 마지막 봄날, 밤 11시, 천안역 5킬로미터를 벗어난 지점 건널목에서 달리는 서울행 급행열차를 철로 위에 서서 정지시킨 적이 있지요?(...)그렇다면, 당신이 열차를 탈선시켜 소중한 생명을 살해한 후 사회불안을 조성하여 계획된 사건이지요?(...)재판장님! 여기 앉아 있는 피고는 세계화로 가는 이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라도 살인미수죄와 국가전복죄를 추가하여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아울러 법을 믿고 따르는 대다수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재판장 : 변호인 변론하십시오.
변호사 : 재판장님! 열차는 사람들을 태우고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려야 될 승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에서 정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과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묵살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역에 정차해 있는 완행열차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급행열차의 오만불손한 일방적인 통과 절차는 어떤 이유에 서라도 정지를 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양심이라는 것을 여기 피고석에 앉아 있는 시인의 행동으로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직업도 재산도 없는 이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인 이 가엾은 시인에게 무거운 죄의 굴레를 씌운다는 것은 우리들 양심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재판장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이 있길 바랍니다.
검 사 : 재판장님! 변호인은 리얼리스트도 아니면서 현실을 망각한 채, 변론을 맡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인 피고를 감싸고 있는 것은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에게 묻겠습니다. 피고는 급행열차를 전복시켜 타인의 소중한 생명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죠?(...)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열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해 도미노적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까?(...)
시 인 : (대답이 없다)
변호사 : 지금 검사는 유도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승객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고, 다행히 열차도 파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적인 피해와 시간적인 손해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법의 심판을 내리는 것은 가혹한 처분이라 생각되는 바, 피고에게 다시 한 번 재생의 길을 걷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곧 현명한 판단이라 사료됩니다.
검 사 : 재판장님! 변호사는 지금 여론을 조성하려고 하지만, 승객들의 정신적인 충격과 시간적인 낭비는 그 어느 것과 견주어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으며, 공무집행방해죄와 살인미수죄를 적용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라도 엄벌로 다스려야 된다고 봅니다.
재판장 : 피고, 시인.
시 인 : (고개를 든다)
재판장 : 마지막 진술하시오.
시 인 :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아우성이 오천 년 전부터 나돌고 있었지만, 우리가 만들어놓은 제도의 그물에 갇혀 허우적대는 이 슬픈 현실 앞에, 저의 돌출된 행동이 후세들에게나마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길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완행열차 승객들에게 놀라게 해드린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시인의 길 꿈꾸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도 죄송하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방청객 :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뜨악한 눈빛을 건넨다)
재판장 :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럼,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피고, 시인은 전혀 반성의 빛이 없이 평등을 사수하는 법정에서 오만불손하게 법관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이 시대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인 불안감을 조성한 바, 원고가 청구한 손해배상 십억 원을 지불 할 것을 선고하며, 이것을 이행치 않을 시 감옥에서 하루 이만 원씩 5,000일을 노동으로 대처한다.
시 인 : (고개를 떨군다)
재판장 : 그럼, 이것으로 본 법정을 폐정을 선언합니다. (딱, 딱, 딱)
검 사 : (의기양양하게 좌측 문으로 퇴장한다)
변호사 : (시인에게로 걸어간다) 시인, 최선을 다했지만 안됐네!
시 인 : 이 세상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나요, 그게 한계인 걸요...
에필로그
시인이 걸어가는 길,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찬 이슬 내리는 - 안동 교도소 - 무슨 죄 지었길래 - 갇히게 되었나요 - 안동시 교도소 - 찬 마룻바닥에 - 일심을 기다리다 사라져 갔나 - 편견은 안 오나요 - 영원히 안 오려나.
- 「마지막 휴머니스트」 전문
1999년 세기 말의 봄, 천안역을 그냥 지나치려는 ‘급행열차’를 정지시킨 시인의 행동이 재판에 회부되었군요. 실제 비슷한 사건이 있었나요? 아니면 이 시대의 시인들이 앞만 보고 내달리는 ‘급행열차’ 같은 현실을 잠시 정차시키고 곱게 단풍드는 산하를, 들녘을 둘러보게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이위발 : 이 시는 의도적으로 짧은 극으로 써 본 것인데요. 20세기 말 시대가 급변하게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삐삐’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급행열차처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앞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는 시인 같은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입니다. 이 세상에 분명하게 말하고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다가왔던 그때 그 시절이 있었습니다. 휴머니시트, 리얼리스트가 설 땅이 점차 사라져 가는 그런 세기말을 풍자한 극시입니다.
임애월 : 아, 그렇군요. 천안역이라는 현존하는 지명 때문에 혹시나 하고 여쭤봤습니다. 우문입니다. 이 시 「마지막 휴머니스트」에 등장하는 ‘시인’의 정확한 죄명은 무엇인가요?(웃음)
이위발 : 검찰이 주장하는 죄목은 공무집행방해죄와 살인미수죄이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시인의 죄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 놓았습니다.
임애월 : 마지막 부분 ‘편견은 안 오나요’에서 ‘편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감이 안 잡힙니다.
이위발 : 교도소에서 전해 내려오는 노래를 일부만 차용 한 건데 ‘일심’은 면회고, ‘편견(便見)’은 소식편자와 볼견자로 뜻은 ‘편지’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한자 조합이기 때문에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임애월 : ‘편견’이 한자어로 ‘편지’라고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동전을 투입구에 넣으신 후 레버를 힘껏 밀어보세요.
만일 투입구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 레버를 가볍게 툭툭 치신 후 넣어주세요.
제품이 없을 시에는 레버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기계를 180도 기울이면 동전이 반환됩니다.
(본 제품은 실용신안 및 의장등록을 필한 제품으로써 유사품의 제조, 매매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전문
위의 시는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데요....기계화되어버린 비정한 도시의 인간성 상실을 이야기한다고 저는 읽었습니다만, 작가의 창작의도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위발 : 이 시는 90년대 다방엔 거의 다 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던 재떨이입니다. 커피를 마신다기보다는 재미를 가장한 운세를 점치는 제품이었습니다. 동전 한 닢으로 자신의 운명을 보던 시선과 현실을 상징한 기계적인 것에 대한 조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입니다. 어떤 면에선 인생이 꿈을 꾸며 살기도 하지만 그 꿈이 허망하다는 것을 180도 돌린다고 해서 바꾸어 질수는 없습니다. 어떤 날엔 운세를 보는 행운마저 삼켜버린 동전이 나오지 않아 기계를 바닥에 치기도 해보지만 감감무소식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행위가 혼자 행하는 무언극처럼 삶의 한 부분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임애월 : 아하,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걸 해본 적이 있거든요. 부제가 없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설명이 좀 필요한 작품입니다(웃음).
시인님은 어린 시절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무성시대」에서 ‘스산하게 웃고 있는’ 그 ‘환상여행을 떠나’는 소년인가요?
이위발 : 유년시절엔 「무성시대」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시골 면소재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임시극장을 만들어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앞날에 대한 꿈꾸기보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공간에 대해 두려움이 더 앞섰던 것 같아요. 무술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멋있다는 생각보다는 내면의 쓸쓸함을 봤다고 해야 되나? 하여튼 줄거리보다는 그 인물에 대한 연민을 더 느꼈습니다. 무협영화엔 죽는 사람이 많이 나오잖아요. 칼과 혈흔이 난무하는 그 이미지가 어린 시선엔 스산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애월 : 세상을 보는 눈이 일찍 뜨였었군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귀향하신 지 십일 년 정도 되었다고 들었어요. 운영하시던 출판사 문을 닫으셨다고요?
이위발 : 훈민정음이란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100여종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당시에 도곡동 아파트 2채를 말아 먹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과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고, 물질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터득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임애월 : 네, 생각하기 나름이군요.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아파트 2채로 사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고향이긴 하지만 정착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귀향 후의 삶이 이전의 삶에 비해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이위발 : 많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고생 많이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절망하거나 이런 생각이 전혀 안 들었습니다. 서울에서와 달리 긍정적인 사고로 변해 간다는 것에 저 자신도 놀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미래의 제 인생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문학관 사무국장 일이 저한테 우연처럼 다가왔습니다.
임애월 : 고향의 너그러운 품 안이어서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으셨나 봅니다.
제2시집을 준비 중이시라던데...... 첫 시집 상재 이후 거의 15년만이죠? 물론 양보다는 어떤 시를 썼느냐가 더 중요합니다만..... 숙성기간이 좀 긴 편입니다.
이위발 : 제가 좀 게으른 편입니다. 다작 스타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시를 쓸 수 없는 시기가 있긴 했지만... 사실 등단 이전부터 시인이 되면 시집 세권에 시선집 한권 정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 꿈이 이루질 것 같습니다.
임애월 : 첫 시집이 주는 이미지가 제게는 워낙 강렬해서 두 번째 시집은 어떤 분위기일지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이위발 : 첫 시집이 주목을 받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저는 기대를 많이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안동으로 내려와서 쓴 시들은 첫 시집과 정반대의 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바뀐 겁니다. 사물에 대한 시선이 따듯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시집이 도시의 슬픔을 얘기했다면 두 번째 시집은 ‘자연 속에 녹아든 이미지와 말 걸기의 시도’일수도 있습니다. 시집이 출간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관심 있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임애월 : 감사합니다.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산문집 『된장 담그는 시인』을 작년에 펴내셨어요. 항아리들이 저리 많은 걸 보니 된장을 직접 담그시는 게 맞네요. 우리의 전통방식으로 담그신다고요? 그 과정을 좀 설명해 주세요.
이위발 : 간단하게 설명하면 전통된장은 12월경에 대두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 정월달 말날이나 닭날을 잡아 된장을 담급니다. 메주를 햇볕에 잘 말려 장독을 소독한 후 물로 깨끗이 씻은 후 3~4년 정도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고, 장을 담그고 난 뒤 간장을 따로 떠내 장 가르기를 한 후 메주를 으깨어 놓으면 맛있는 된장이 됩니다.
저희 집 산매골달분네 된장은 주변 환경이 된장 담그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된장과 소나무의 솔향은 궁합이 제일 잘 맞습니다. 항아리가 숨을 쉬기 때문에 솔향이 항아리를 통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된장의 깊은 맛을 내게 해줍니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 된장 담그는 장소로는 적격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 주변엔 닭이나 개, 소를 키우는 집이 없습니다. 된장은 냄새에 민감하기 때문에 아주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애월 : 네, 정성으로 메주를 띄우고 장을 담그시는군요. 당연히 사모님과 함께 담그시는 거죠? 주문도 가능한가요? 살짝 힌트 주세요(웃음).
이위발 : 사실 된장을 담그게 된 계기는 제 처갓집이 안동대학교가 있는 송천이란 곳인데 장모님 장맛이 그 동네에선 제일이었습니다. 된장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노후를 대비해서 장모님 계실 때 된장을 전수받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아름아름 알게 된 분들이 주문을 하면 택배로 보내줍니다. 지금은 조금씩 매년 담그고 있습니다. 주문을 하려면 제가 운영하는 다음 블로그 <된장 담그는 시인>에 들어오셔서 신청 하시면 됩니다.
임애월 : 아,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산문집을 읽어보면 ‘거미’나 ‘동박새’, ‘제비,’ ‘개구리’, ‘말똥굴레’, ‘감’, ‘안개’ 등, 힘이 없고 소박하고 불편한(?) 자연과 굉장히 친하시던데.... 물론 그래서 이런 시골로 거처를 정하셨겠지만,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진실로 자연친화적일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곳 산매골 생활도 자랑해 주세요.
이위발 : 제일 기분이 좋을 때는 아침에 대문을 열었을 때 다가오는 상쾌한 공기입니다.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시내에 살다가 시골로 들어온 지 5년이 지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신비스럽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이름 없는 풀과 나무들과 중얼거리듯 이야길 나눌 정도로 친해진 겁니다. 개구리 우는 소리가 웃는 소리로 들릴 정도가 되면 자연에 동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제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서 밝은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저는 이 선생님의 그 기분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저도... 복잡하고 난해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서 생활한 지 이제 10년이 넘었거든요.
선생님 첫인상이 조선시대 선비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안동분이어서 그런가 했는데,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정말 꼿꼿하고 준엄하게 유교정신을 받드는 선비셨다고요?
이위발 : 제 할배가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습니다. 제가 본관이 재령인데 신사임당에 버금갈 정도로 알려진 정부인 장씨, 장계향 할매의 일곱 형제분 중 다섯째 정우제 할배의 9대 주손입니니다. 이문열 소설가의 『선택』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분이 장계향 할매입니다. 어릴 때 할배한테 천자문을 배우면서 딴짓하다가 장죽 담뱃대로 머리를 맞으면서 자랐습니다. 할배한테 배운 사람이 책거리를 한다고 지게에 떡짐을 지고와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임애월 : 어쩐지 뭔가 남다르시다 생각했는데 대단한 가문의 주손이시군요.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우를 범하는 시인이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산문집 속의 그 진정성 있는 말씀에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이위발 : 시인의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그 속엔 자신만의 성찰이 있어야 되고, 시로서 말을 걸면 그 말로 인해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진규 시인이 저에게 비수처럼 이야기한 그 한마디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인간부터 되라’는 말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임애월 :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시인이라면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니고 있어야겠지요.
‘시는 어제의 고향이고 내일의 고향’이라는 구절 속에 선생님의 시론과 문학적 관점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고향’에 대한 애착이 크시네요.
이위발 : 고향은 과거와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의 시간과 줄긋기를 통해 끈
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끈은 이음만이 아니라 끊어짐일 수도 있기에 더욱 애절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무의식은 갈등과 긴장을 빚고 있습니다. 떠남과 돌아감의 사이에서 서성대는 한 저는 시어의 고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임애월 : 이 가을에 안동에 와서 인심이란 걸 가득 느끼고, 안고 갑니다.
안동의 아름다운 산하와 안동 시인님들의 따뜻한 마음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끝으로 신작시 한편 소개해 주세요.
이위발 : 네, 『그대 떠난 빈자리에』라는 시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고
구름장은 한군데도 틈새가 없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물결에
손금 같은 산봉우리들이 비에
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봄날 벌레처럼 의식은 벅찬 감흥으로 차올라
목련나무 잎들은 하나의 욕망이고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이었다
그대와 마주치는 신비한 순간
나뭇잎들도 물보라 되어
몰려오고 솟구치고 날아다녔다
눈물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
어떻게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들의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지고 있는데
임애월 :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시가 참 좋습니다. 특히 이렇게 아름다운 산하를 배경으로 들어서 그런지 더 감미롭습니다.
함께 자리해 주신 김윤한 시인님도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원 쪽에 오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제가 맛있는 소주 한잔 사겠습니다.
이위발 :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임병호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함께 동행해 주신 강희동 시인님도 감사합니다. 다음에 시간이 허락되면 꼭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선비와 지사의 고향,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에서 만난 이위발 시인은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인 ‘할배’의 손자다운 풍모를 지키며 진정성으로 시를 쓰고, 마음으로 된장을 담그며 ‘시어의 고향’을 지키고 있다.
집에 가서 쌈 싸 먹으면 맛있을 거라며 텃밭에서 직접 키운 어린배추를 뽑아주는 시인의 뒷모습에서, 아직 남아있는 이 시대의 따뜻한 인간애를 넘치도록 읽었다.
안동을 떠나올 때, 그가 부르는 노래 ‘'눈물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가 출렁이는 물빛 맑은 가을 낙동강 물줄기가 한동안 내 뒤를 따라왔다.
아무래도 안동의 그 따스하고 푸근한 사람냄새를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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