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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행 구간은 트랙실거리가 16.22km 입니다
보광사 일주문 에서ㅡ 됫박고개 ㅡ 64번송전탑 ㅡ 367.9m헬기장 ㅡ 헬기레펠 훈련장 ㅡ 부대후문 ㅡ 박달산 ㅡ 달구니고개 ㅡ 168봉 ㅡ 채석장 ㅡ 장지산(163봉) ㅡ 석불입상(용암사) ㅡ 용미1리 정류장까지
오두지맥 2구간 4부 입니다
증말정말 갑짜기 가심이 뻥 뚫리도록 앞이 확 터집니다
거대한 채석장으로 폭넓게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곳 입니다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일대 입니다
장지산(163봉)에서 석불입상이 있는 용암사로 진행을 하게되지요.
그리고 용미1리표지석과 한민고등학교 입간판이 있는 곳에서 오늘 산행을 마감하게 됩니다.
돌봉산은 용미1리표지석에서
시작하여 다음 구간에 오르게될 첫번째 봉우리 입니다
방금 조망을 즐겼던 곳에 4등삼각점이 있네요
삼각점 곁으로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아랫 부분 왼쪽과 동일 합니다
윗사진 오른쪽 부분과 동일 합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오를 장지산 163봉 입니다
앵무봉과 북한산 봉우리들 조망을 할 수 있었던 장소를 떠나
163봉인 장지산으로 진행 합니다
월롱산과 기간산은 다음 다음구간으로
월롱역에서 오두산통일전망대 구간을 진행할 때 오르게 되는 산 입니다
위 사진과 동일 합니다
위 사진과 동일 합니다
위 사진과 동일 합니다
군 훈련장을 지나고
군 훈련장에는 남근바위도 있습니다
뒤돌아 보고
오늘 마지막으로 오른 장지산 163봉 입니다
나무들로 꽉막혀 조망도 없는 163봉 장지산에서
용암사로 하산을 서두럽니다
이곳에서 너댓발작 내려가면
용암사 석불입상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곳 입니다
파주용미리석불입상 입니다
석불입상 안내글에 뭐라고 쓰여 있나 한번 읽어 볼까요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용미리석불입상
정의
고려의 원신궁주(元信宮主)가 석불을 조성하고 그 미륵불에 빌어 자식을 얻었다는 전설
역사
이 전설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곧 고려 선종이 후사를 얻기 위해 원신궁주를 들였다고 하는 대목이 나타난다
줄거리
고려 13대 왕 선종이 후사를 두지 못해 원신궁주를 후궁으로 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기를 두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궁주가 이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종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 사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은 “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궁주에게 태기가 있어 기다리던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고 한다
분석
이 전설은 용미리 장지산 미륵불의 조성 내력을 담고 있다. 함께 지어진 사찰과 연계해 볼 때 이 전설은 사찰연기담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찰연기담으로서의 <용미리석불입상전설>은 왕자의 탄생과 맞물려 기자(祈子)의
대상이 되고, 기원을 통해 자식을 얻는 것과 연계된 여러 변이형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고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이 석불 앞에서 득남기도를 해 이승만을 낳았다고 하는 것도 한 예이다. 곧 득자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기존의 전설에
바탕을 두고 아무개도 이 석불에 빌어 자식을 얻었다든가, 이렇게 얻은 자식은 크게 된다더라와 같은 파생담이 나타난다.
한편, 김용덕은 미륵불 신앙에 대해 분석하면서 용미리 석불을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특징
애초 이 전설은 용미리 석불의 미륵불로서 이적 시현과 불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하였을 법하다.
왕가의 후손을 석불 조성의 공덕으로 두게 되었다고 하는 점도 나타나지만,
그보다는 미륵불을 통한 후세의 안정과 번영, 불국토 지향 의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전설상에 석불의 원력으로 왕손이 탄생하였다는 대목으로 말미암아 기자석불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따라서 인근 사람들이 후사를 구하기 위해 이 석불을 찾아와 기자발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세를 구원하는 부처로서 미륵불이 자식을 점지하는 신통력을 지닌 기자불로 변모한 것이다
의의
용미리 석불의 조성 내력과 사찰연기적 성격이 담긴 전설이다.
석불을 조성하여 득남을 이뤘다는 사례로 후대인들에게 자식을 비는 대상이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집필 : 박종익(朴鍾翼)/충남대학교 교수
참고문헌
미륵불 신앙의 현장 연구(김용덕, 한국언어문화43, 한국언어문화학회, 2010)
출처
경기문화재총람(경기도, 2006)
파주시지(파주시, 2009
위 안내글에 등장하는 고려 제13대 선종 가계도를 그려보겠습니다
고려
제11대 문종
:
:........... 제12대 순종(첫째 아들 1083년7월 즉의~1083년10월 승하, 3개월 재위) ㅡ 제13대 선종(둘째 아들)
: ㅣ
인예왕후 이씨 정의왕후(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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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왕후(순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문종이 심하게 미워한 까닭에 친정으로 쫓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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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장경궁부(인예왕후의 조카)는 순종이 왕위에서 승하 후 외궁에서 거처하면서
자신의 노비와 간통하다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남
제13대 선종(둘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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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비(자녀 1녀) (선종이 국공원에 있을 때 결혼했다가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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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숙왕후 이씨(자녀 1남 2녀, 헌종, 공주, 수안택주) ㅡ 제14대 헌종
ㅣ
후궁 원신궁주(자녀 3남, 한산후 윤, 왕자, 왕자) ㅡ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李資義)가 한산후를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가 밝각되어 원신궁주와 세 아들 모두 유배되어 귀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궁 원신궁주가 석불입상에 불공을 드리고 낳은 한산후)
제14대 헌종(부친 선종, 모친 사숙왕후 이씨)은 혼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과 자식이 없다
석불입상의 기도발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기자전설(祈=빌 기, 子=아들 자, 傳=전할 전, 設=말씀 설)에 의해
지금도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이 석불입상이 고려시대 작품으로 알려저 있는데, 1995년에 발견된 불상의 명문에는
조선 세조(1465년)와 왕비(정희왕후)의 이름이 기록된 미륵불로 밝혀졌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려 제13대 선종(재위:1083~1094년)시대와 조선 세조(재위:1455~1486년) 년대가 380년의 차이가 있어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어느쪽 석불인지 대전 문화재청 문화재관리위원님에게 문의를 하였습니다.
불상의 명문에 조선 세조 이름과 왕비 이름이 새겨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년도가 기록되지 않아 학계에서 후세 사람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여 진다며
여러 고증으로 봐서 고려시대 불상이 맞다고 문화재관리위원님으로부터 알려저 왔습니다
오늘은 5월 24일 일요일
내일은 5월 25일 음력으로 4월 초팔일 부처님 오신 날로 석가 탄신일이라
대웅전 앞뜰에는 불자님들이 소원을 빌며 연등을 줄줄이 메달아 두었군요
석불입상에서 계단을 따라 삼성각으로 이동 합니다
삼성각 바로 곁에 있는 동자상과 칠층석탑이 있습니다
동자상과 칠층석탑에 관한 유래의 안내문은 이러 합니다
용암사 대웅보전 앞뜰 좌우에
대통령 박정희가 기증하였다는 석등이 있습니다
대웅전 좌측 석등 기둥에는
구국통일 위하여
천일기도 광명등
대통령 박정희
라고 새겨저 있으며
대웅전 우측 석등 기둥에는
국태민안 위하여
천일기도 광명등
대통령 박정희
라고 새겨저 있습니다
봉덕사종 하면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계시지요
봉덕사의 종, 또는 에밀레종 말 입니다
봉덕사에 있던 종을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지요
종명(鐘銘)에 기록된 1000여 자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인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 다음대인 아들 혜공왕(惠恭王 7년)이
뒤를 이어 771년에 이르러 구리 18.9톤을 들여 완성한 성덕대왕신종이라 합니다
이 종은 봉덕사(奉德寺)에 달았으나 수해로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에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다가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고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이 동종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되었습니다
성덕대왕신종 또는 봉덕사종이라는 이름 외에 어린아이를 희생시켜 제작하였다는
에밀레종으로도 더 잘 알려저 있지요
종명의 주제는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그리고 영원히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경주 봉덕사종을 본 따서 만든 종을 용암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눈에 띄네요
일주문 방향 입니다
신의 영역에서 일주문을 벗어나니 세속 입니다
2015년으로부터 930여년전인
고려시대에 조각된 석불입상이 있는 용암사 입구 입니다
지맥꾼이라면 으레이 만나게되는 "고급 음식점 양지가든" 입니다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는 용미1리 버스정류장 입니다
여기에서
서울역 ~ 문산간을 오가는 703번 버스를 타고 삼송역이나 구파발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한민고등학교 옥상 전체에 거대한 태양광 집열판을 설치하여 전력으로 사용하고 있나봐요
용미1리 표지석과 한민고등학교 입간판이 있는 곳이 다음 구간 들머리 입니다
코스는
용미1리 표지석 ㅡ 돌봉산 ㅡ 매봉 ㅡ 오산리 고개 ㅡ 오산리 기도원 ㅡ 103봉 ㅡ 100봉 ㅡ 군부대 정문 ㅡ 월롱 과선교 ㅡ 월롱역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는 용미1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1분만에 문산에서 서울역으로 운행하는 703번 버스가 와
30분을 달려 삼송역사거리에서 내려 3호선 삼송역에서 전철로 환승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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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꼼꼼하신 무을형님표 산행기 잘 보고 갑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일산조님
과찬에 부끄러워 지네요
고려시대 가계도를 그려 보았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오색 채운 대단한 열정 입니다. 역사 공부까지 하려니 머리 아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