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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구원은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로 표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1은 칭의(稱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義)를 부어 넣으심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으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轉嫁)시킴으로써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satisfaction, 속상[贖償])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답은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가(轉嫁)되고 믿음으로만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앞에서 의로운 자로 용납하십니다”라고 한다.
칭의의 성격
칭의(稱義)는 몇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칭의는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인 것이다.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罪責, guilt; 법적 책임)이 없어지고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이 없어지는 것이며, 성화는 죄성 혹은 부패성이 극복되는 것이다. 또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면적, 인격적 변화이지만, 칭의는 사람의 법적, 신분적 변화이다. 칭의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사람 밖에서, 법적으로,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는 칭의의 법정적 성격이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었다. 천주교회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주입(注入)을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가 법정적 선언임을 보인다.
칭의 혹은 ‘의롭다 하다’는 성경 용어가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다음의 여러 구절들에서 분명하다.
출애굽기 23:7,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의롭다 하다’는 히브리어 히츠디크는 정죄(定罪)라는 말과 대조되는 법적, 재판적 용어이지, 사람의 내면적 의(義)의 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의롭다 하다’는 헬라어 디카이오오 δικαιόω도 법적, 재판적 의미를 가진다. 로마서 8:33, 34,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둘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골자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결론을 내리노라].” 로마서 4:4, 5, “. .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셋째로, 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로마서 5:1, 9,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원어(디카이오덴테스 δικαιωθέντες, 부정과거분사)는 문법적으로 반복이나 진행의 의미가 아니고 단순한 사건을 나타낸다.134)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곧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본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완료시제).”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τετελείωκεν 테텔레이오켄, 완료시제).”
그러므로 칭의는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의 정도에 관계되지 않는다. 작은 믿음일지라도 진실한 믿음이라면 칭의를 얻기에 충분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하신다.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원죄와 및 세례 받기 전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지만, 세례받은 후의 죄들에 대해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계속적 칭의 혹은 증가적 칭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성경적이지 않다. 한편, 신정통주의도 칭의가 즉각적이지만 또한 반복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칭의의 수단
사람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칭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들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로마서 3:21,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로마서 4:4, 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기조메다 λοgιζόμεθα, 결론을 내리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엑스 에르곤 노무)가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디아 피스데오스)이다.
그러나 믿음이 의로 간주된다고 해서(롬 4:3, 9),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거나 믿음 자체가 효력을 가진다고 볼 것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칭의의 수단일 뿐이며 그 효력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다시 말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 때문에’(디아 피스틴)가 아니고 단지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이다. 어떤 이들(알미니우스주의)은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고 본다. 그러나 믿음은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연결쇠와 같다. 물론 객차가 가려면 먼저 연결쇠로 기관차와 연결되어야 하지만, 객차를 끄는 것은 연결쇠가 아니고 기관차이다(박형룡, 구원론, 299쪽).
야고보서 2:14-26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충돌한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使者)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복음과 야고보의 교훈을 충돌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적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임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율법적 행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구별하며 구원 진리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참 믿음이 사랑으로 행동하며 의에 순종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로마서 6:17, 18,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한편, 야고보는, 율법 폐기론이나 혹은 그것이 빠지기 쉬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반대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선행을 동반함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구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죄인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런 문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순종의 행위를 인용한 것이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 시대에도 성도들에게 적용되었는가? 그렇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이 은혜의 구원을 암시하였다(창 3:21). 아담과 하와의 아들 아벨은 양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4:4).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는 구약 시대 성도에게도 이 원리가 적용됨을 증거한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없다고 증거한다(롬 3:20). 또 요한계시록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하기를, “구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는, 이 모든 점들에서, 신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와 동일하다”(11:6)고 하였다.
칭의의 때
신자는 언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택한 백성들을 위한 칭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 계획되어진 것이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확립되었지만(롬 4: 25), 그들을 위한 칭의가 영원 전에 이루어졌다거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죄 없다고, 의롭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실 것이지만, 성도들의 칭의가 그 때 이루어진다고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죄인의 칭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리실 의롭다는 선언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미 받은 칭의의 확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놀라운 복
칭의는 참으로 놀라운 복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며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롬 5:1-2). 또한 성도는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롬 6:18, 22). 우리를 억눌렀던 무거운 죄짐이 벗겨졌다. 우리는 옛 죄를 반복해서 고백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과거의 죄를 기억하고 낙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가 심지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갈라디아서도 이 진리를 분명히 증거한다(특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다시 정죄함이 없다(롬 8:1).
칭의는 가장 큰 보화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때문에 이 귀한 보화와 비교할 때 자기에게 유익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기며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빌 3:7-9). 또 그것은 그가 빌립보서에서 강조한 기쁨의 이유요 성도의 감사와 감격의 삶의 원천이다.
그러나 방종치 말아야
그러나 성도는 반(反)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의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율법주의)은 성도에게서 확신과 기쁨과 자유를 빼앗아가고 우리를 율법의 멍에 아래 두지만, 반대로 율법을 소홀히 하고 율법을 범하는 것을 큰 죄로 여기지 않는 생각(반율법주의)도 경계해야 할 큰 오류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이제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롬 6:1-2, 15).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롬 6:18, 22).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죄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하며(갈 5:13), 만일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야고보서는 선한 행함이 없는 입술만의 믿음의 고백은 헛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분명히 구원의 증거이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요일 2:3, 4), 중생한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은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요일 3:6, 9-10).
이 모든 말씀을 통해 분명한 것은,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그 복을 누리는 자마다 반드시 한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소요리문답 34문답, “양자(養子, 자녀로 삼으심)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에 들고 그 모든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가집니다.” 중생이 새 생명의 시작이라면, 양자는 새 신분의 시작이다.
양자의 근거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된 것은 자연적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자연적 관계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도 두어 구절에서 그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17:28-29, “너희 시인 중에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그러나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이러한 자연적 관계에서가 아니고, 특별한 언약적 관계에서다. 신명기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예레미야 31:9,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중생과 칭의의 구원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12-1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로마서 8:9, 13-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4:4, 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양자의 특권
양자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특권을 누린다.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너희는 더 이상 외인(外人)도 아니요 손[이방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함께 동료 시민들]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들]이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된 특권은 다음과 같다: (1) 양자의 영을 받아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간다.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라디아서 4:5-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2)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와 공급함을 얻는다. 마태복음 6:31-32,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 징계는 받으나 버림을 당하지 않고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얻는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에베소서 1:13,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4) 영광의 천국을 상속받는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後嗣)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영생의 천국]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천국, 눅 12:32]을 이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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