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휫필드와 그의 설교

 

오덕교/합동신학교 교수

 

18세기 교회지도자 가운데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그의 업적에 비하여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와 함께 기독교 역사적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5-1791)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5-1758)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영국의 복음적인 각성운동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주역이었던 휫필드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복음적인 각성운동을 일으킨 18세기의지도자 가운데 조지 휫필드 이상 주목할만한 인물은 없다. '휫필드는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부흥운동가였고, 미국 최초의 종교적인 영웅이었으며, 그 시대의 이적(marvel of the age)이었다.'

그는 22세에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25세에 신대륙에서 대각성 운동을 일으켜서 미국인의 80퍼센트가 그의 설교를 한번 이상 들었고, 1천만명 이상이 그의 설교로 인하여 각성했다. 그는 시대적인 요청을 재빨리 파악하였고 영적인 전쟁을 성실히 수행한 신앙의 웅장이었다. 그래서 존 라일(J. C. Ryle)은 말하기를,18세기의 인물들 가운데 그의 이름 앞에 다른 사람을 내세운다면 불공정한 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생애가 설교에 미친 영향

휫필드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의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토마스 휫필드(Thomas Whitefield)와 엘리자베스(ELizabeth)의 7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휫필드는 포도주를 판매하는 상인이었으나 2살이 채 안된 아들 조지를 남겨두고 죽었다. 그후 그의 어머니는 당시의 전통을 따라 카플 롱덴(CapelLongden)이라는 사람과 재혼하였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 탓인지 휫필드는 소년시절에 거짓말을 좋아하고, 욕설과 하찮은 농담을 잘하며, 안식일을 범하며, 극장에 드나들고, 카드놀이를 좋아하고, 연애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 였다. 그러나 12살이 되던 1726년 휫필드는 세인트 매리 드 크립트 문법학교(St. Mary de Crypt Grammar School)에 진학하면서 설교자로서 자질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그는 라틴어를 공부하고, 연설하는 것과 연극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연기자로 소질을 키웠다. 특히 연설과 연극공연에는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여인숙 경영이 어려워지자, 학교를 쉬고 1년 반 이상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푸른 앞치마를 두르고 접시를 닦고 방을 청소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일년 반 동안 전문적인 심부름꾼이 되었다.”


1728년 어머니가 불행스러웠던 카플롱덴과의 결혼생활을 정리하면서, 휫필드는 여인숙을 떠나 세인트 드 크립트 문법학교에 재등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학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1732년 옥스포드 대학교에 속한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가난하였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독학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스스로 낮아지는 법을 터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웨슬리 형제가 인도하던 홀리 클럽(Holy Club)을 알게 되었고, 동료들과 신앙적인 교류를 가지면서 정신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흘리 클럽 단원들과 교제하면서, 휫필드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와 카스타누자(Castanuza)의 「영적 투쟁」(Spiritual Combat), 스쿠갈(Scougal)의 「인간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Soul of man)과 같은 책을 읽었다. 이런 책들을 통하여, 그는 반로마천주교도가 되었고, 극기를 종교의 전부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주 세 번씩 기도하고 한 주간씩 금식하여 건강을 잃을 정도였다. 철저한 자기 훈련과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체험하고자 하였지만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휫필드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회개치 않는 자를 부르심」(Call to the Unconverted), 조셉 알린(Joseph Alleine)의 「회개치 않은 자들에 대한 경고」(An Alarm to the Unconverted), 윌리엄 로우(William Law)의 「진지한 부르심」(Serious Call)과 매튜 헨리(Matthew Hen교)의 성경주석을 읽으면서 점차로 영적인 무지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는 1735년 5년간의 고행 끝에 그의 동료들 중 최초로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금욕주의에서 벗어나 구원의 확신을 얻은 휫필드는 죄 가운데 죽어가는 이들에게 복음증거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설교운동

휫필드는 복음증거의 사명을 의식하고 1736년 여름, 영국성공회에서 집사로 안수받았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받고 자라난 글로스터의 세인트 메리 드 크립트 교회당에서 첫번째 설교를 행하였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많은 청중을 보는 순간 당황하였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나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중학교시절에 익혔던 연설, 대학시절에 죄수들을 방문하여 권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얻은 경험들이 내게 말할 수 없는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을 되살리므로 지나치게 움츠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를 진행하면서 성령의 불길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비록 20대 젊은이의 미숙한 설교였으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15명이 개종하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러한 체험은 그로 하여금 설교자로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휫필드의 웅변적이며 영감이 넘치는 설교를 통하여 회개운동이 일어나자, 런던 주변에 있던 여러 교회들이 그를 초청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연극적인 설교 전달방식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전달 방식을 통하여 거들남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다.


휫필드는 1736년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했지만, 항해가 지연되어 1738년 2월 2일 대서양을 건넌다. 처음에 그는 영원히 선교사로 헌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지아에서 3개월간 머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선교사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738년 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739년 영국성공회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고 영국국교회를 섬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런던 주변의목사들은 그가 설교하는 것을 금하였다. "휫필드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기존 교회들이 교회당 문을 굳게 닫았기 때문에 그가 택한 방법은 옥외에서 설교하는 것이었다. 1739년 2월 브리톨(Bristol) 근교의 킹스우드(Kingswood)에서 교회에서 소외당한 광부들을 위한 옥외집회를 열었다. 역사상 최초의 이 옥외집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와 청중 사이에는 나무로 만든 강단이나 틀에 박힌 설교원고가 없었다. 그는 딘지 웅변적으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요지를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설교하였다. 그 결과 광부들의 두 볼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 중 수백명이 곧 깊은 회심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그 사건이 말해주는 것같이, 확실하고 철저한 회개로 복된 결실을 맺었다. 그들의 변화는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명백했다." 이렇게 시작된 야외집회는 새로운 운동이 되었고, 그가 서는 곳은 어디든지 강단이 되었다.

대각성운동

1739년 8월 휫필드는 신대륙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항해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설교할 장소로 필라델피아를 택하였다. 그의 선택은 지혜로운 것이었다. 필라델피아는 신대륙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경제의 중심지요, 가장 개화된 도시였다. 1739년 11월 6일 휫필드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서 설교할 때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교회당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옥외로 나와서 설교해야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여행하면서 집회를 가질 때마다 모이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졌다. 필라델피아에서는 8천명, 필라델피아 근교의 작은 도시 네샤미니(Neshaminy)에는 5천명이 모였고, 팩스 매너(Fagg’s Manor)와 같은 작은 마을에도 1만 2천명이나 모였다. 휫필드의 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은 퍼져 나가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그가 가는 곳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이 모여들었다. 휫필드는 1740년 가을6주간에 걸쳐 뉴잉글랜드 순회전도를 떠났다. 뉴잉글랜드신문들은 휫필드의 부흥운동을 들 뉴스로 게재하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과 사람들을 통하여 널리 퍼져나가자, 그가 가는 곳은 어디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보스톤에서는 몰려온 사람들을 수용할 장소가 없었고, 마블헤드(Marblehead)와 세일럼(Salem)과 같은 해안도시에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의 소식을 듣기 위하여 사람이 사람 위로 걸어 다닐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휫필드는 1740년 10월 17일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매사추세츠의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설교하였는데, 에드워즈는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매번 눈시울을 적시곤 하였다. 이와 같은 부흥운동을 통하여 뉴잉글랜드 인구 30만명 가운데 25만명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이러한 휫필드의 부흥운동을 후대의 학자들은 '대각성운동' (Great Awakening)이라고 부른다.


휫필드의 개혁주의와 웨슬리의 보편속죄론

신대륙에서 전도운동을 마치고 1741년 3월 영국에 도착하였을 때, 휫필드는 요한웨슬리의 지독한 공격을 받았다. 웨슬리형제는 알미니우스주의자로, 모든 인간은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은 보편속죄설(universal salvation)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1739년 3월에 행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휫필드의 개혁주의신학, 특히 예정론을 비판하였다.


“하나님의 은혜 또는 사랑으로부터 나온 구원은 모든 사람들 안에서 자유로운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유롭게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답하기를, ‘아니요 그것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만 자유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아주 적습니다. 더 많은 사람은 죽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은 영원히 죽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교리는 '우리의 복된 주' 요, '의로운 그리스도 예수' 이시며 ‘모든 은혜와 진리로 가득찬 성부의 독생하신 아들’을 위선자요, 사람을 속이는 자요, 상식이 없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정론이라는 무서운 교리 가운데 분명히 포함된 신성모독입니다.”


그러나 휫필드는 철두철미한 칼빈주의자로 웨슬리 형제의 알미니우스주의를 배격하였다. 휫필드는 1740년 12월 웨슬리의 알미니우스 사상에 반대하면서 31쪽 분량의 팸플릿을 작성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울이 베드로의 외식함을 책망한 것을 기억하면서,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죄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여 왔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친애하며 존경하는 이여! 내가 당신이 크게 잘못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한다 하여 나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귀하가 이 교리에 대하여 제기한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신실하게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아무런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이여, 참으로 귀하는 그 설교에 귀하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나도 친구담지 않게 그러한 궤변의 저자가 귀하라고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도 그처럼 경솔한 짓을 그만두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읽는데 전념하십시오. 은혜 언약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귀하의 육적인 궤변을 버리십시오.”


휫필드는 직접적으로 웨슬리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여 웨슬리의 사변적인 보편속 죄설을 비판하였다. 결국 휫필드와 웨슬리는 1741년 갈라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웨슬리를 따라갔지만, 웨일즈 지역의 휫필드 추종자들은 1743년 웰쉬 칼빈주의적 감리교 연합(Welsh Calvinistic Methodist Association)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휫필드는 그 모임의 초대의장이 되었다.

후기 설교운동

휫필드는 1741년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같은 해 11월 14일 엘리자베스 제임스(Elizabeth James)라는 과부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742년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순회설교를 하고 런던에서 목회하였다. 161744년은 휫필드에게 매우 힘든 해였다. 그의 4개월 된 아들이 죽었고, 침실에서 폭도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게 되었다. 그해 8월, 그는 아내와 함께 아픈 몸을 이끌고 신대륙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설교를 멈출 수 없었다. 1745년에서 1748년 사이에 제3차 미국순회 전도여행을 하였고,1748년 이후에는 영국과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서 순회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1751-52년에 4번째 미국 전도여행을 하였다. 휫필드는 1770년 9월 30일 34년간의 성공적인 전조사역을 마치고 뉴잉글랜드의 뉴 햄프셔(New Hampshire)에서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휫필드가 지상에서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위하여 설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때 그는 집안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촛불이 꺼질 때까지 설교한 후 숙소로 들어갔다. 그날 밤 주님의 품에 안겼는데, 장례식에는 6천명 이상의 성도들이 참석하였다. 에벤에셀 포터(Ebenezer Porter)는 휫필드의 비명(碑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714년 12월 16일 영국 글로스터에서 출생하여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1736년 목사안수를 받고, 34년간 목회하는 동안 대서양을 13회나 건넜고, 1만 8천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십자가의 군병으로서 겸손하고 경건하며 정열적이었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자신의 유익과 휴양과 평탄과 생명보다도 그리스도의 명예를 우선시하였다. 기독교 연설가로서 그의 깊은 경건성과 사심없는 열성,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은 행동과 언어에 전례 없는 기운을 주었다. 그의 웅변은 대담하고 강렬하며, 예리하고 대중적이었다. 영감 받지 못한 이는 아무도 그처럼 설득력있고 위엄있는 동기에 의하여 큰 군중에게 설교하거나, 강한 영향력으로 복음의 순수한 진리들을 청중들의 가슴에 굳게 심지는 못했다. 그는 비할 데 없이 수고스러웠던 그의 생애를 영원한 안식으로 갑작스럽게 바꾸어 천식으로 1770년 9월 30일 죽었다."

조지 휫필드의 설교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와 미국 등지에서 가는 곳마다 휫필드처럼 전폭적인 인기를 누린 설교자도 교회 역사상 없었다. 그는 설교를 시작하여 마칠 때까지 34년간 청중을 사로잡았고, 동일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의 인기는 수그러진 적이 없이 설교를 시작하던 날과 세상을 떠나 주님의 종으로 가던 날이 같았다. 그가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 그를 에워싸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이처럼 군중의 귀를 사로잡고 언제나 쉬지 않고 설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결코 평범한 설교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무엇이 휫필드로 하여금 이처럼 영향력있는 설교자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그의 설교가 바로 인격에서 배어나왔기 때문이었다. "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해서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였다.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열면서 5시와 6시에 설교하곤 하였다. "이같은 신앙적인 인격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칭찬의 대상이었다. 30여년 가까이 교제한 바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휫필드가 “모든 선한 사업을 집행해가는 가운데 순수했었고, 사욕이 없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사로 잡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라일은 휫필드가 “사려깊고, 거짓없이 겸손한 사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불같이 사랑하였고, 주의 일에 대하여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끝까지 극기한 사람”이었으며, “놀랄 만큼 공평하고 바른 눈을 가지고 있었고, 한결같이 기쁘고 명랑한 심령의 사람”이었으며, 보기 드물게 “자애롭고 보편적이며 너그러운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설교의 내용과 구조

신앙적인 인격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다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감이 넘치는 설교는 훌륭한 내용과 구조가 구비되어야 한다. 휫필드의 설교는 일반적인 부흥사들의 설교와는 달리 성경적이며 교리적이며 복음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언제나 죄, 인간의 심성, 예수 그리스도, 성령, 회개의 절대적 필요성, 믿음, 거룩함과 그 외의 성경이 제시하는 것만을 전하였고, 한결같이 순수한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행한 설교의 교의는 엘리어트(R.Eliot)가 그의 영결예배에서 행한 설교에서 지적한 것처럼 원죄, 거듭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 성도들을 궁극적인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선택과 같은 것이었다. “휫필드의 옹호자로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주의 찰스톤 독립 회중교회(Charleston' s Independent Congregational Church)목사였던 조시야 스미스(Josiah Smith, 1704-1781)도 휫필드의 설교 교의가 원죄, 칭의, 중생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휫필드는 이와같이 원죄와 칭의와 중생과 같은 청교도적인 교리를 설교하였다. 그리고 설교구조도 청교도의 패턴을 따라 서론, 주제의 배분(division of the subject),적용 그리고 결론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적용은 설교의 맨 나중에 나오기도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수시로 하였다.

설교 전달의 기술

훌륭한 설교가 되려면 내용과 구조도 중요하지만, 전달하는 이의 자질에 따라 설교의 효과가 증감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설교자가 전달기술을 가지지 못했다면 역사가 동반되지 않는다. 휫필드는 설교 전달의 기술을 통달한 설교자였다. '황금 입을 가진 설교자' 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이 설교자의 은사는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휫필드는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설교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천부적인 설교자 휫필드의 특징적인자질이 무엇이었나 살펴보자. 첫째 로, 휫필드는 풍부한 음성과 음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of the Pulpit)라고 불린다. 들판이나 거리에서 모인 옥외집회에는 보통 2만 5천명에서 3만명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청중이 그의 설교를 듣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하면, 휫필드가 필라델피아에서 설교할 때 3만 5천명이나 몰려와 시청에서 프론트 가(Front Street)까지 가득 메웠는데, 청중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휫필드가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설교할 때는 그 배 안에 탔던 사람들만 아니라 그 옆을 지나가던 배에 탄 사람들도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로, 휫필드는 풍부한 성량 외에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였다. 그는 음성사용법, 제스처의 역할, 말의 기능을 익히 잘 알아서 소포타미아 라는 말만 가지고도사람을 웃기고 울릴 수 있었다. 당시개력(David Garrick)이라는 유명한 배우는 휫필드의 제스처를 가리켜 “그의 얼굴은 언어 자체”였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휫필드처럼 “오!”라고 말할 수 있다면 100달러를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후배 배우들에게 휫필드의 집회에 참석하여 많은 것을 배우라고 권하였다. 휫필드는 보다 효율적으로 자유자재로 설교하기 위하여 원고없이 강단에 섰다. 그는 1739년 2월 2일자 일기에 “원고없이 설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내 자신은 그렇게 하도록 나를 억누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에, “나는 원고 없는 설교에 의하여 더 큰 빛과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지 않으므로 성령을 소멸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원고에 얽매이는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부자유스럽지만, 휫필드는 원고없이 설교하였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설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를 '우리' 라는 피상적인 대상에게 행하지 않고. ‘당신’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하여 설교하였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영적인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흉내내기만 해도 역사가 나타나곤 하였다. 델리모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어느 마을에 술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는 사람들을 흉내내기를 잘하는 한 웨이터가 있었다. 어느 날 회원들이 그에게 휫필드의 설교를 흉내낼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망설였다. 사람들의 강요에 못이겨 웨이터는 조심스럽게 휫필드를 흉내냈다.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회개하지 않는 한 여러분 모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 짧은 설교는 술집 문을 닫게 하였고, 그들은 다시 술집을 찾지 않았다.


셋째로, 휫필드의 설교는 한결같이 명료하고 간결하였다. 그는 난해한 논증과 번잡한 사유로 청중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길고 복잡한 문장을 피하여 쉽고 간결하게 말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요점만 말하였다. 간결한 성구, 적절한 설명, 타당한 예화가 그가 쓰던 주된 무기였으며 청중의 수준에 너무 어렵게 보이는 단어를 사용하치 않았다. 존 라일은 이것이 바로 그의 설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지적하였다. 넷째로, 휫필드는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뛰어난 묘사를 설교에 사용하였다. 그는 눈으로 보는 듯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수있는 훌륭한 웅변가의 능력을 가진 설교자였다. 자기의 주제를 완벽하게 극적으로 표현하여 청중은 휫필드가 전하는 설교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설교의 말씀을 살아있는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묘사는 그 어떤 사람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설교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그가 설교한 것과 같이, 회중들이었고, ‘보았고’, ‘느꼈고’, ‘들었다’는 것이다. 예일대학교의 교수인 해리 스타우트(Harry Stout)도 휫필드의 설교가 주로 연상과 연극화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요소가 그를 영향력 있는 설교자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사실상 이러한 연상과 연극적인 사실 묘사는 설교를 더욱 생생하고 실제적이게 만들어 많은 감화를 미쳤다. 한번은 영국에서 설교할 때 냉담하고 권위적이던 체스터필드(Chesterfield, 1694-1774)경이 청중 속에 앉아 있었다. 휫필드는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가련한 상황을 눈먼 거지로 비유하면서 설교하였다. 휫필드가 “눈먼 거지는 자신을 인도하던 개를 잃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밤길을 걸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음의 벼랑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라고 죄인의 모습을 설교할 때, 청중은 숨소리를 죽이며 설교에 압도되어 있었다. 눈먼 거지가 죽음의 벼랑에 떨어지는 순간을 묘사할 때, 체스터필드 경은 벌떡 일어나 달려가면서 큰소리로 “소경이 떨어진다! 소경이 떨어진다!”라고 외쳤다. 아담스는 휫필드가 설교하면서 침몰하는 배를 묘사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은 생명선으로 옮겨 타려고 부지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다섯째로, 휫필드의 설교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으며 설득력이 있었다. 델리모어에 의하면, 보스들메 사는 어떤 한 사람이 우스갯거리를 얻기 위하여 휫필드의 전도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한 가지 소재만 얻으면 돌아오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였기 때문에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휫필드의 설교를 다 들어야 했다. 흥미거리를 얻으려다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다. 또 아담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휫필드가 조지아에 있는 고아원을 위하여 헌금을 호소할 때 프랭클린은 처음에는 한푼도 연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뒤 휫필드가 설교할 때, 그는 동전을 헌금하리라 결심하였다. 설교를 계속하는 동안 은전을 연보할 생각을 하였으나, 헌금대가 그 앞에 놓여지자 프랭클린은 그의 동전과 은전, 그리고 금전까지 다 연보하고 말았다.”


휫필드는 이와같이 설득력이 뛰어난 설교자였다. 회의주의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도 휫필드의 설교에 몰입되어 빈정대는 것을 잊었다. 그는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20마일이나 되는 길을 오가야 했으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였다. 휫필드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설교하였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의 말년에 그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였던 코낼니우스 윈터(Cornelius Winter)에 의하면, 휫필드는 설교를 눈물을 흘리지 않고 끝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18세기, 하나님이 보내주신 말씀의 사자조지 휫필드의 생애와 그의 설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는18세기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이 내려주신 특별한 그릇이었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수많은 죄인을 회개시킨 사람도 없었다. 귀족과 천민, 부자와 가난한 사람, 배운 자와 무식한 사람들이 다 나와서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새롭게 각성하였다. 실용주의자 벤자민 프랭클린이 말씀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회의주의자 데이비드 흄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자세를 가질 수 없었던 것도 바로 휫필드 때문이었다. 그의 복음적인 신앙운동은 영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집단의 생성과 발전의 기초가 되어 노도광풍처럼 밀려오던 자연신교와 합리적인 신학사상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가 이러한 이단과 회의론자들과 싸운 방법은 냉엄하고 무미건조한 비평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전파하는 삶이었다.


또한 그는 도시선교와 지역선교, 구역조직, 야외전도, 가정선교, 사회봉사와 같은 진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현대 목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더구나 그의 칼빈주의적인 신앙과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설교방식은 19세기에 와서 찰스 스펄전의 개혁주의적인 신학과 ‘오감에의 호소’(sense appeal)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휫필드의 삶과 설교는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지도자들, 특히 설교자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휫필드와 같은 말씀의 사자들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말씀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