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cafe.daum.net/tknewsnjoy/NUiX/322
성령
싱클레어 퍼거슨/ 김재성 옮김 IVP 조직신학시리즈
목차:
1장 성령과 그의 내력 2장 그리스도의 영 3장 성령의 선물 4장 오늘날의 오순절? 5장 질서의 영 6장 재창조의 영 7장 성결의 영 8장 성령의 교통 9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10장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 11장 우주적인 영
역자서문
성령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적으로 정리된 교과서가 아브라함 카이퍼 이후로 약 100년 만에 출간되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파마다, 심지어 목사마다 정리되지 않은 온갖 성령론을 주장하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은 그런 혼돈을 치유할 수 있는 훌륭한 해답서이다.
이 책은 현대의 성령론에 대한 수많은 조류와 사조를 각주에서 일일이 참고하고 논평하고 점검하면서,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령론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순절과 성령의 은사 이해에서 이미 주목할 만한 저술과 논문을 발표한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Jr. 아들)도 이 책이야말로 개혁신학의 발전을 보여 주는 놀라운 책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성경적 안목으로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주고 있다. 경험이나 전통, 혹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관행에서 성령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교회의 문서들과 신학자들의 설명에서 찾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정리된 본서의 내용은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1998년 9월 합신 연구실에서 김재성.
정리자 주: 퍼거슨의 성령론을 읽으면서 필자가 감탄을 한 점은, 이 책이 다소 스콜라적인 정통 개혁 조직신학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재편성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그간의 많은 학문적 발전의 결과와 논의가 이 책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퍼거슨의 깊은 신약 신학적인 연구 결과도 들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퍼거슨의 깊은 영적 체험이 그의 학문과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직결된다. 혹자에게는 이 책이 정통의 틀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정통 개혁 신학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 신학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다가 후배들에게 정리를 해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정리록을 만들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김재성 교수의 탁월한 번역(어려운 말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의 깊은 내용을 쉽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노파심 때문이다. 먼저 번역서를 읽고 이 정리록을 읽으면 이해가 쉽게 되고 배운 것이 기억에 남을 것을 희망한다.
가끔 나타나는 괄호에 들어 있는 말이나, ??? 이후에 있는 말은 정리자가 이해를 더하려고 붙인 말, 혹은 요약이다. 송다니엘(하이델베르크 개혁교회 목사)
5장 질서의 영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은 회복의 영이다(성령님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러 오셨다). 성령은 이처럼 새로운 창조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로운 지배권을 회복하실 자로서 봉사하도록 예수님을 구비시켜 주셨다(고전15:45-491)) ?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금이빨로 바뀌는 곳에서는 인간의 탐욕이 부추겨지고, 넘어지는 곳에서는 인간이 물건이 된다. 비인격적인 역사는 인간적 혹은 사단적이다! 새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믿는 자들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그날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은 마지막 날의 영광을 향하고 있으므로 종말론적이며, 종국에는 하나님이 새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신 영광을 모든 피조물에게서도 완성하신다. 그러나 그 영광이 이미 믿는 자들 안에서 회복2)되고 있으므로 반(半) 종말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는 이미와 아직 이라는 긴장 속에서 산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활동은 물 위에 퍼지는 동심원의 물결처럼 역사를 통해서 퍼지고 있다. 구약 시대와 같이 신약 시대에도 성령의 활동은 구원론적이요 공동체적이요 우주적이며 종말론적이고, 개개인의 변화와 교회와 세상의 통치,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에 대한 시사는 이미 사도행전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속주요 주님으로 믿게 되고, 새로운 주님의 공동체는 성령의 활동 안에서 형성되며, 장차 올 새 시대의 권능이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현시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히2:4; 고후12:12; 행3:1-10;5:12)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서 수치스러운 삶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옮겨지려면, 거기에는 분명히 기나긴 여정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성령의 길과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가?
구원의 서정
신학사에서 보면, 먼저 신론과 기독론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야 구원론의 문제에 대한 자세하고도 비평적인 탐구가 이루어 졌다. 교부시대에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에 관한 질문이 압도적이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론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들이 추구되고 제시되었다. 칭의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전적 해설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 말기에야 공포되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어떻게 구원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은, 불가피하게 그 구원의 개인적인 적용에 관한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 신학의 주된 관심은 구원의 은혜를 성례에 연계시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의롭게 되는 과정(processus justificationis)에서 교회의 제사장적인 사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은 7성례의 시행에 한정되어 버렸다.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이것을 볼때, 일곱 성례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성령은 교회의식의 시행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은 주로 칭의의 과정에 집중하였으므로, 죄인이 은총을 받기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비중을 두었다: ·선행적 은총(gratia praeveniens3))을 받아 의지가 죄를 미워하고 의와 칭의를 사모하는 쪽으로 움직이게끔 하다 보면 그에게는 상습적으로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진다. (선행적 은총은 아무에게나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따라서 성례를 은총의 수단이라고 한다. 성례를 계속 받으면서 죄를 미워하게 되면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habitus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가톨릭은 사람을 교회와 예식, 시제에 단단히 묶는다. 사제 없는 구원은 없다! 신교에서는 만인이 제사장이다. 은혜론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가틀릭에서는 ?공짜는 없다“이고, 신교는 ?오직 은혜로“를 가르친다) ·죄에 대한 완전한 비탄이 결여된 불완전한 애통은 고해성사라는 수단으로 보충된다. ·평생토록 충분한 은총을 단번에 받을 수 있는 의식이란 없다(따라서 가톨릭은 ?오직 은혜로 단번에 칭의를 받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칭의를 향한 지속적인 과정에서 정규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들의 칭의 개념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justum facere)을 뜻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고, 간주되고, 구성되는 종교개혁적 개념은 없었다. 즉 칭의가 내적인 의로움과 혼동되고, 법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개인이 완전한 성결에는 못 미치기 때문에 결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드물게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계시 없이는(성자) 누구도 칭의의 복을 확신할 수 없다.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면, 특별한 계시 없이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칭의 문제는 마틴 루터가 해결했다. 그는 많은 정신적 영적 투쟁을 통하여 중세적인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롬1:16-17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분출되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기 위한 자신의 업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루터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의 전환이었고, 이 깨달음은 종교개혁의 초석이 되었다 ? 전혀 다른 구원론)
제2세대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로 불린다. 칭의는 의로움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gratia infusa) 전가되며, 스스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 양도된 것이 (루터가 발견한) 칭의의 본질이다. 칼빈은 이 새로운 이해를 구원과 적용시켜 성령의 역할을 회복시켰다. 칼빈은 구원에 관해서는 성례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례가 말씀과 성령의 활동에 종속되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칼빈은 ?어떻게 성령이 개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을 적용하는가4)?에 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므로 이것은 구원의 서정5)이라는 표제 아래서 논의되어 왔다. 서정이라는 말은 일련의, 한 가지 계열로 된 연속된 구조를 의미한다. 구원의 서정이란, 구속의 적용에 관해서 사용될 때,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구원을 부여해 주실 때, 구원의 다양한 측면이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특히 ?어떤 방법으로 그 다양한 구속 적용의 측면들(중생, 회심, 칭의, 성화와 같은)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면에서의 내적인 일관성과 논리성을 밝혀 보려는 시도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주지해야 할 점은, 정통신학자 사이에도 관점이 일치하지 않으며, 이것이 소모성의 논쟁으로 발전될 위험도 있고, 점차적으로 이 개념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은연중에 표출되기 마련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는 방식을 좌우하는 사고틀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성령이 개인에게 역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논리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어떤 순서인가?
구원의 서정: (예정) ? 소명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양자됨 ? 성화 ? 성도의 견인 ? 영화 학자에 따라 순서가 바뀔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에서는 회심과 신앙이 중생에 앞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정리자 주.
구원의 서정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배열이다. 서정에서 드러나는 순서는 시간상 어떤 것이 먼저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논리적인 연관성과 본질상의 순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6).
영어권 전통에서 구원의 서정에 대한 고전적 사례는 초기 청교도 신학자인 윌리엄 퍼킨스(1558-1602)의 저작 황금 사슬에서 발견된다. 그는 구원의 모든 다양한 측면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주로 롬8:28-30, 특히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바울의 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퍼킨스는 이것을 서로 나눌 수 없는 연속적인 것, 즉 구원의 ?황금 사슬“안에서 하나로 묶인 것으로서 그 안에서 구별되는 요소들로 보았다. 사실 퍼킨스의 도식은 스스로 닫힌 형태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는 외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목회적인 탁월함을 가지고 있고, 많은 좋은 영향을 끼쳤지만, 근래에 이 유형은 심각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롬8:28-30과 같은 구절들은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의 순서에 관해 언급한다기 보다도 오히려 구원으로 말미암는 복의 풍성함과 충만함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 왔다. 벌카워는 여기에 성화가 빠져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여기에서 전혀 다른 요소들의 순서를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만약 이것이 구원의 순서를 지칭한다면 성화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사슬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될 때,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은 구원론의 핵심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빼놓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의 열매들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슬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연합으로 연결시키는 일이 좀 더 근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예를 들자면, 이 도식에서는 선택은 중생의 원인이며, 이어서 중생은 믿음의 원인이 되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불변하고 필연적인 결과는 성화와 견인이다. 각각의 경우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모호하고 심지어는 축소되고 만다.
따라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분과 우리의 연합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관심의 초점이 우리 안에 무엇이 이루어졌느냐에만 있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와 그분의 연합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르만 리델보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의 설교에는 구원의 인간론적인 적용에 대한 자세한 교리인 구원의 서정의 조직적인 발전 단계와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 이는 바울의 교리의 특징이 학문적인 의미에서 조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의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구원의 서정이라는 개념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신학을 거론할 때에는 질서 정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원리, 혹은 모델을 사용하여 성령 사역의 순서가 추론되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전체 사역에 핵심적인 개념 안에서 더 좋은 모델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엔 크리스토)
성령의 핵심적인 역할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분을 우리와 연합시키고 그분의 몸 안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약에서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7)? 유지시키는 것이 성령 사역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구조화함에 있어서 우리가 채택할 모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모든 측면은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방식에 관계되어야만 하고,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의 서정의 가장 두드러진 동기이자 중추적인 근본 원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에 위치해 있고, 칼빈이 기독교강요의 제3권을 시작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그분이 불쌍하고 곤궁한 인간들을 부요하게 하려고 주신 그 은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계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떨어져 계시는 한, 그분이 고난 당하신 모든 것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들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가 없는 채로 있게 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 안으로 접목되어야 하고(롬11:17),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갈3:27)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될 때까지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복음주의 신학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강조점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야말로 성령의 사역을 고찰할 때 뼈대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전1:5(?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그분 안에서라는 말을 그대로 지키는 것을 그분에 의해서 라는 말로 바꾸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우리가 그 몸의 일원이기 때문이요, 우리가 그안에 접목되었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우리가 그분과 하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분은 성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칼빈은 여기서(그리고 유사한 다른 주석에서도) 구원의 복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그저 그 복들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직접 참여함으로써만 우리의 것이 된다고 여겨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접근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더 나은 성경적 관점을 대변한다. 구원의 복은 성령을 통해서, 배타적으로, 즉각적으로, 동시적으로,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다. 바울의 용어로 말하면, 그분 안에서(엔 크리스토)만 구원의 복들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한 완성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도 우리의 것이 된다(엡1:3이하)
이러한 접근은 구원의 서정에 대한 해석의 주류를 이루는 일련의 묶음 또는 원인론적인 사슬 구조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떨어져서는 복음의 축복들을 생각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심과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구원의 사슬상 현재의 체험에 두게 되는 주관주의가 배태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구원의 적용의 다양한 부분은, 신약 사상에 광범위하게 나타나 있는 생동감 있는 종말론적 차원(그리고 긴장)을 지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령의 사역을 해석하는 중추적인 원리가 될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 사람들은, 또한 한편으로 이 세상 즉 육체에 의해서 지배되는 곳에서 살고 있으므로, 거기에는 구원의 현재 체험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8)?이라는 특성이 있다. 사슬 모델에서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므로, 이 긴장 관계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예컨대, 중생의 결말에 이르면 믿음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반대로, 구원의 측면들 각각에는 아직 완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부분들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사슬 모델은, 이미 시작된 것은 또한 완전히 성취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구원론의 각 측면에는 종말론적(이미, 그러나 아직) 구조가 들어있다: ·중생이란 현재적 실재이지만, 이것 역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마19:29) ·성화 역시 죄의 지배로부터 이미 급격하게 그리고 단번에 결별이 이루어졌지만(고전6:11; 롬6:1-14), 이것 역시 완성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살전5:23). ·영화도 미래에 완성되지만, 이미 이곳에서도 그리고 지금 은혜와 영광의 성령이 임재하심을 통해 시작되었다(고후4:18) ·칭의 역시 이미 완성되고 완벽한 실재이면서 또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양자됨 역시 우리 몸의 구속, 곧 아들로 양자됨(롬8:23)을 우리는 기다린다.
모형과 근원이신 그리스도
이렇게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구원의 복들이 지닌 동시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실상 바울 신학의 종말론적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9).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그 신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적용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덕인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얻으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형이요 근원이 되신다) 이러한 교훈은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 점에 관련하여 사도의 사상에 담긴 핵심은 바울의 경우, 우리의 구속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써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롬6:3이하; 엡2:5-6; 골2:12-13;3:110)). 이처럼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우리도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대표적으로 이루어졌다. 믿는 자들에게서 이것이 현실화되거나 실존화 되는 것은 중생이나 회심에서이다. 이들 두 가지 순간, 즉 그리스도와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시간적으로는 떨어져있으나 논리적으로 묶여 있다. 양쪽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 ? 우리의 영적 투쟁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2) 바울은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으로 보았다11). 그분의 죽으심은 진정으로 죽음의 모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았고,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죄의 삯으로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죽은 것으로 생각된 그리스도가 일으킴을 받았고, 건져졌고, 보호를 받았고, 부활을 통하여 구출되었다.
3)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서 믿는 자들에게 구속의 적용을 설명하고자 사용된 범주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에 대한 구속의 적용은 그리스도께 대한 구속의 적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칭의로 간주된다(딤전3:15).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죽음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다. 2.바울은 또한 이 부활은 예수님의 양자됨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활은 그분으로 하여금 권능있는 메시아적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했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새로운 시대의 사람으로 양자가 되셨다12). 3.부활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의 성화에 근본적인 것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성화의 점진적인 측면이 아니라 결정적인 측면을 유념하고 있는데, 이는 죄의 영향권으로부터의 점진적인 해방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주는, 죄의 지배권으로부터의 급격한 구원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죄의 지배권 아래 들어갔다. 부활에서 그분은 그 지배권에서 구출되었다. 이 구출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우리의 성화의 근거이다. 4.부활은 그리스도의 영화를 이루었다.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그분의 육의 몸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빌3:21)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그분의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를 함께 소유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것들은 그분의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의 모든 측면이며, 그분에게 그것들이 동시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들이 즉시, 종말론적으로, 동시에 우리의 것이 된다.
물론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는 구속의 적용에서 각각 구별되는 범주어이며 우리는 결코 이것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들을 각각 동떨어진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그분의 부활하신 영광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한 가지 사건의 측면이요 부분들이며,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고 성령의 권능으로 획득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은덕(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을 우리도 성령을 통해 누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통한다. 그리고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결합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다양한 전치사들은 그 연합의 긴밀성과 범위를 강조한다.
1) 위해서(hyper) 믿는 자들은 하나의 연합의 끈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롬5:6,8; 8:32; 고후5:21). 이러한 연합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그분이 하신 일이 곧 그들의 것이 된 것을 의미한다.
2) 함께(syn) 그리스도의 구속의 순간들에서 믿는 자들은 그분에게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순간들 가운데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사건들은 그들의 현세적 삶에서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갈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롬6:4: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롬6:8: 그와 함께 산다.
3)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은 바울 사상의 특징이자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전부를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동의어와 같다. 신자는 ?아담 안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 오게 되었다.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담이 대표성을 가지고 행한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요, 우리가 죄를 통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아담과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유비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대표적으로 나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것이 실제로 나의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세 가지 차원: 그리스도와 연합은 세 가지 순간, 곧 영원한 순간, 성육신의 순간, 실존적 순간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르지만 보완적이다.
1) 영원한 순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의 언약적인 연합 안에서 복을 받아,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선택되었다(엡1:3-4,11-12). 이 연합에는 우리의 개인적인 실존을 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으로 돌이켜 생각해야만 할 초월적인 차원이 있다. 여기에는 주권적이요, 단독적인 결정이 놓여 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산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택하신 것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선택하신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은 어거스틴이나 여러 신학자들이 총체적 그리스도(totus Christus)라고 옛,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떨어질 수 없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2) 성육신의 순간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로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1.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 안에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 그분은 우리 구원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몸을 입으셨다. 이는 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하신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이것들(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2.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그의 육체에 접지되어 있고 그 연합의 수행자인 성령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 사역의 위대한 순간들이 함축하는 것들은 우리가 함께 공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죽임을 당하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였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에서 연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중보자로서의 그분의 신분에도 연합된다. 그분과 연합으로, 우리의 신분은 급격히 바뀌었다. 더욱이 그분이 우리의 육체적인 실존을 거듭나게 하시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켜 가는 이상, 우리의 인격은 그분이 우리를 영광의 최종 단계로 변화시키실 때까지 점진적으로 바뀔 것이다(빌3:21)
3) 실존적 순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초시간적으로 의도된 이 연합은, 성육신에서 구체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하심과 그에 관련된 믿음을 통해서 비로소 실존적인 실재가 된다. 이 실재는 신자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연합의 충만한 실재는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연합시킬 때, 우리의 실존 안에 자리하게 된다. 바울의 특유 표현 중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비록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까지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대상(엡2:3)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다. 오직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언약적 목표가 우리 안에 현실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함축된 의미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적용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전반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 가지 요점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역이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물려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칼빈은 이를 잘 그려내고 있다(II,16,9):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됨을 알 수 있다(행4:12).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부분들을 다른 데서 찾아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구원을 알기 원한다면, 이것은 그분의 것(고전1:30)이므로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만족이라면, 그분의 희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결하게 하심은 그분의 보혈에서, 화해는 그분의 지옥에 떨어지심에서, 육체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분의 무덤에서, 생명의 새로워짐은 그분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 안에 모든 종류의 선이 풍성하게 넘친다. 그러므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샘에서 우리에게 충분한 양을 채우자.
두 번째 함의는, 신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된 것으로,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지난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의 생활에 더 이상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영에 속한 사람이다(롬8:9). 우리의 과거는 아담 안에서의 과거다. 우리의 현재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 있다.
셋째로,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인성 안에서 그분이 우리와 연합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구원받은 인성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목표이다. 이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점차로 참되고도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령의 성화시키는 사역을 논할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를 훌륭하게 언급한 바 있다.
이 연합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따라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 안에서 행사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분에게 일어났던 일의 복제이자 재생산이다. 객관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도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못박히고, 죽임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킴을 입는다. 그들은 다소간 그들의 주님의 경험을 공유한다13).
정리: 성령의 역사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을 통한 우리의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6장 재창조의 영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우리가 중생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단원은 중생과 회개를 다룬다)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묶는 일에는 성격상 다양한 차원이 있다. 바울이 말한 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계“에 들어가는 것이다(고후5:1714)). 이는 죄와 사망의 옛 질서, 즉 육체와 마귀에 의해 지배 당하는 시대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새로운 질서에 길을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이 이루는 상호 결합은, 출애굽 때와 안식의 땅에 들어갈 때 나타났던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 간의 옛 언약적 결합에서 어렴풋하게 예시된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메시아의 사역에 근거한 것으로, 새로운 인성을 창조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생명은 다양한 차원을 가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약 성경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그분의 죽으심, 부활, 승천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간의 상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창시자이므로 단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하나님이 기원인 것)은 본질적으로 믿음(인간이 수납하는 것)과 양극단을 이루는 양면적인 것이다. 중생과 믿음의 실타래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 성령은 이 두가지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이것은 별도로 분석되어야 하지만, 실존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 끝나고, 어디에서 신자의 행동이 시작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중생과 회심이라고 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종말에 완성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신자들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에 의해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의 내주하심을 통해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주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활 양식을 낳게 될 것(겔36:24-27)이라는 옛 약속은 성취된 것이다.
칼빈의 가르침 가운데 중생이란 용어는, 성령이 신자의 생애 전 과정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새롭게 하심을 지칭하는 것15)으로 사용되었다. 칼빈은 중생이 묘사하는 실재는 회심, 회개의 경우와 동일한데 단지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17세기의 많은 저술가들은 유효적 소명과 중생을 동의어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직 복음주의 신학의 지속적인 발전 과정에서 중생은 좀 더 제한적인 의미, 곧 하나님의 주권과 은밀한 사역에 의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심을 가지도록 돕고 있는데, 이것이 합당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벗어날 때, 거듭남이라는 이 용어는 성경적인 근거로부터 동떨어져서 주관적이며 심리적인 것이 되고 만다16).
신약은 중생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복음주의 구원론의 구조에서 중생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 탄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된다(복음주의 구원론 비판!: 정리자 주17)). 그러나 중생을 뜻하는 용어인 팔링게네시아는 신약에서 단지 두 차례밖에 쓰이지 않았다. 마19:2818)에서 이 단어는 ?만물의 새로워짐“을 암시하며, 우주의 재탄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팔링게네시아는 마지막 부활이요 하나님 아들의 양자됨의 실현이며, 그들의 몸과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며(롬8:19이하), 의의 본향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설립이다. 이는 우주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약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팔링게네시아는 딛3:519)에서 바울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20)?이라고 한 말에 나타난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같은 의미로 보는 중언법, 즉 두 가지 표현이 한 가지 개념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인데, 그렇다면 개인의 중생과 새로운 세대의 도래 사이의 놀라운 관계를 시사해준다. 왜냐하면 바울은 ?새롭게 함(아나카이노시스, 롬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용어를, 현존하는 세상 질서와 다가올 시대가 이루는 대조를 강조하면서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헤르만 리델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문맥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성령의 부어주심은 ?전형적인 종말론적 용어“이다. 이것은 바울이 중생을 좀 더 넓은 문맥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시작된 부활의 새로움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중생의 결과로 나타나는 새롭게 됨은 단순히 내적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사물의 현재 질서에 대한 새로운 질서의 침입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둘째 사람이며 첫 열매인 종말론적 아담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써 초래된, 밖으로부터 혹은 위로부터의 변혁을 의미한다(고전15:45).
1. 새로운 창조 ? 새 생명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생각은 신약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요한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주제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이 탄생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은 훗날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요한의 신학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특징짓는 설명 방식인데, 이는 사도 바울의 글에 나타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과 같다.
중생은 원인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벧전1:3). 이치상 어떤 존재이든 그와 동류를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우리의 중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이다.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그분이 돌아오실 때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분은 마지막 때에 이룰 부활 ? 중생의 첫 열매이다. 우리는 마지막 추수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이미 성령 안에서 연합의 끈을 통해서 첫 열매에 참여한다(롬8:23). 여기에 중생의 종말론적 본질이 강조되고 있다.
2. 하나님의 단독 사역
신약 성경의 설명은 중생이 성령의 주권적이고 단독적인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태어난다는 비유는 그 자체에 급격하고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암시를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이 결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단독사역(divine monergism)은 다른 곳에서 반명제 형식을 통하여 설명되어 있다. 즉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서이다(요1:12). 아래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것이며, 육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움 없이는 잉태하거나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이,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생의 사역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3. 중생의 측면들
중생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의 사역은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지적인 조명을 포함한다. 이전에는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이것을 기름부음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받은 결과로 진리를 안다고 말한다(요일2:20). 그들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일2:27).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것을 공유하며, 인간 중개인이 없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은 옛 언약에서 제사장들, 선지자들, 왕들을 통해서 전달되던 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둘째로, 중생은 죄에 의해서 지배되던 본성에 속박되었던 의지가 자유롭게 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중생에서 핵심적인 요소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도록 인간의 의지에 성령이 능력을 주는 것21)이다.
셋째로, 중생에는 깨끗이 씻어 낸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물로 거듭난다“(요3:5)는 구절의 가장 유력한 해설이다. 성령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동시에 심령을 깨끗게 하신다. 중생에서 일어나는 씻음은 딛3:5과 함께 고전6:11에서도 강조되었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이 되었다“ 여기서 씻음과 거룩함은 중생과 같은 것이다. 중생과 더불어 인간의 욕망들은 갱싱되고 깨끗하게 씻긴다. 성령의 새로운 시대와 그 실재들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영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따라서 중생에서, 성령의 사역이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의 범위는 총체적이다. 거듭나는 사람은 전인격적인 개인이다. 중생은 개인의 삶의 근본적인 욕구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그의 존재 중 손대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중생의 범위는 부패한 전 영역에 해당된다.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렘17:9)는 말씀에 근거해서 신학자들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악해질 수 있는 만큼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는 죄의 영향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패를 역전시키는 것이며, 비록 중생한 개개인이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는 않지만,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씻으시는 사역에 의해서 영향을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중생은 새로운 심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4. 성령의 주권
어떻게 성령이 새로운 탄생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의 사역은 신비롭고 주권적이다. 성령의 사역은 바람과 같아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역에 의해 알 수 있다. 성령의 임재는 오로지 그 결과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우리는 믿음과 회개의 표현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생에 대한 고전적인 개신교 신학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사람의 인격의 온전성(우리는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는다)이나 하나님의 단독 사역의 필요성(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우리 자신의 의지로는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중 어느 것도 타협하지 않는데, 이는 올바른 입장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생명으로 예정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인정한 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실제로 불러서 또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영적으로 또한 구속적으로 계몽하신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게 하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다. 선을 원하게 하는 절대적인 권능으로써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가까이 나오게 하신다. 이때에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며 은총으로써 그것을 원하도록 변화를 받는다22).
우리가 여기서 직면하게 되는 긴장의 초점은(하지 않으려는 자들로 기꺼이 하도록 만드는 것)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개입(의지)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에 속한 것이며, 성경의 영감과 섭리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역할의 신비로움과 유사하게, 여러 면에서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은 인간 행동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기초가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비록 개인의 중생이 추상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정신적이고 의지적이고 감정적인 능력들에 대한 성령의 작용이 개인의 인격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은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가지 피조물이요 전인격적인 존재이다. 성령은 지식, 의지, 감정이라는 넓은 맥락 가운데서 활동한다. 결과적으로, 비록 중생이 요한에 의해서는 주권적이며 단독적인 사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반을 향해서 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마음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설득되고, 감성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이나 배려로 인하여 감동을 얻으며, 이로 인해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개인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되고(회개),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된다(믿음). 그러나 믿음과 중생은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우리에게 개입하고, 우리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행동 수준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단독적이며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개념을 희석시키지 않은 채, 어떻게 중생이 말씀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듣는 자가 의지적으로 말씀을 수납해야 한다) 신약 성경의 기록자에게는, 성령이 중생의 유효적인 원인인 반면에 말씀이 중생의 도구적 원인이라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인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능력을 포함한 전인격의 변화에 관여하기 때문에, 말씀의 외적 계시에 의해 성령의 내적 조명이 수반되는 일이 전적으로 타당하다. 믿음이 지식을 포함하는 까닭에, 성경에서는 믿음이 복음의 가르침과 연관되어 등장하기 마련이다. 중생과 그것이 가져다 주는 믿음은 오로지 신적인 주권에 의해 다른 요소들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모체로 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5. 믿음, 하나님의 선물
한가지 더 신약에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열매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지도를 받는, 그리스도를 향한 전인의 행동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지만, 우리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그분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행동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본문이 엡2:8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 은혜는 우리의 행동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관여시킨다. 믿음이란 우리의 능동적 반응이다. 즉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받게 되지만, 행위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에 관련되지만,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엡2:9)
워필드는 이 문제의 핵심을 잘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믿음의 구원하는 능력은 그(믿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거하고 있는 전능하신 구원자 안에 있다. 성경에서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이러한 지성의 틀이나 마음의 태도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보상을 요청할 만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리적인 행위로서의 공식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23).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 구원하는 권능이 믿음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이 신뢰하는 대상 속에 들어 있다. 이는 벌카워가 다른 곳에서 이와 관련하여 기록한 바와 같다:
믿음은 단 한 순간도 건설적이거나 창조적이지 않다. 오직 약속의 실재 안에 유일하게 오로지 머물러 있을 뿐이다.
회개
믿음과 회개는 중생에서 성령의 사역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측면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에게 회심할 때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에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믿음과 회개라고 하는 두 가지는 회심에 있어서 본질적이기 때문에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믿음은 항상 참회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라면 언제나 믿음을 동반한다. 믿음과 회개, 두 가지로 표현되지 않는 중생은 없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반항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믿음과 순종의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회개는 이러한 인식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먼 나라“에 머물게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2. 회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로운 규정의 빛 가운데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란, 뉘우치는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면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 본연의 자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생각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극되고, 죄의 참된 특성에 대한 인식으로 촉발된다. 이것은 하나님께 중심을 두는 반응이다. 참으로 이것은 참되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첫 출발이다. 회개는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회개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필수적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이것은 용서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우리의 성화를 포함한다. 따라서 그것은 회개에 포함한 바 죄로부터의 돌이킴으로 구원받는 자들을 성화의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 변함없이 죄악된 행실을 계속 허용한다면 구원은 주어질 수 없다. 그러나 회개가 믿음처럼 구원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회개는 칭의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받아들여지고 구원자로서 좌정하신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회개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회개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다. 회개는 동일한 개인이 죄를 중지하는 것이다. 둘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회개의 징표들
회개의 체험은 개인마다, 그들의 죄에 대한 표현이나 자의식이 그러하듯이 매우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몇 가지 요소를 추론해 볼 수 있다.
1. 회개의 순간에 성령은 죄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가지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감정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롬6:2124)). 죄에 대한 그러한 태도는 구체적이다. 회개는 불순종의 영 가운데 걸어온 길을 벗어나서 순종의 영 가운데로 돌아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해 구체적인 순종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신30:225)). 이점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이 육체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족된다고 말할 때, 회개를 거듭난 심령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롬8:3-4). 여기에서 회개는 순간의 행동에 제한되지 않고, 지속적인 생활 양식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2. 회개에서 성령은 또한 자아에 대한 변화된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회개는 옛 생활에 대한 죽음이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회개의 첫 단계는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회개는 근본적이고도 과격한 변화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실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육체의 정욕들을 함께 못박음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는 영구한 변화이다. 이것은 육신이 그 욕망을 성취할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이고 새로운 삶으로 살리는 일은 개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난다.
3. 회개는 또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께 대한 변화된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처음의 두 요소 어느 것도 이것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참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죄악을 따진다면 어느 누구도 설 수 없다. 그러나 죄 용서가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기 위함이다(시130:4). 복음적인 회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시작되어 지속되면, 항상 용서의 약속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된다.
성경 신학에서는 개인의 자율적인 죄의식을 회개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회개를 향한 격려는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아더 와이저에 의하면,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전적인 유형을 시편 51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편은 죄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으로 시작하고 있다.
·참된 회개는 불가피하게 상한 심령을 포함한다(시51:17). 그것은 감정이 고조된 상태가 아니라, 자만심과 자기 방어가 깨어지고 부서진 상태의 심령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에 대한 희망으로 이끄는 데서 나온다. 회개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중심의 진실함과 깨끗한 생활(시51:6-7), 정결함과 새롭게 하심을 향한 새로운 열망, 깨어진 자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바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대한 열망(13)도 여기에 수반된다. ·마지막으로, 참된 회개는 은혜의 맥락에서 나오기 때문에, 예배로 인도하고, 예배할 힘을 불어넣는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5)“
믿음과 회개는 중생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국면들일 뿐 아니라,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특징들이요 열매이다. 참으로 성화의 전 과정은, 다름 아니라 중생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되어가고 믿음과 회개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점점 드러나게 되는 과정이다.
7장 성결의 영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성령께서는 중생한 자들 가운데 이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역사하신다. 그분의 목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롬8:29)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Christiformity): 성화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칭의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중생의 씨가 자라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외적으로 작용해서 삶의 열매가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그분의 모양대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존재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귀한 신분으로부터 떨어졌으므로, 구원과 성화(구원의 외적 열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 형상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성령의 역할: 성령은 하나님의 형상을 수치스러운 죄악으로 망쳐 버린 자를 변화시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덧입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4)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화가 우리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될 때 의도되었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 일이 현재에는 원칙상으로, 미래에는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와 그리고 아직 사이의 긴장).
구약 성경에서의 거룩
?거룩하게 하다’라는 히브리어 카다스는 구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개인의 소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은, 다른 목적과 용도로 사용되던 사람과 사물을 하나님이 다시 취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말이다.
언약과 성화의 관계: 구약에 나타난 언약들은 바로 이러한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피로써 인쳐진 그 언약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가족 관계로 만든다. 아니, 가족 관계를 재창조하고 재건한다. 파괴된 하나님의 가정이 하나 된 가족의 모습과 형상을 드러내도록 재창조되고 회복된다. (언약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간다. 따라서 언약과 성화는 불가불의 관계가 있다) 이는 출애굽에서 언약이 시행될 때에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양자삼으신 사건이었다(롬9:4).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가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점점 더 반영하여서 그분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어야만 한다. 언약 관계의 핵심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혹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역시 거룩하라“, 즉 ?가족적인 닮은꼴의 현상을 나타내어라“ 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표출하는 것: 구약 율법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출하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 하나님이 이들을 양자 삼으시고, 아들들이 그분의 충만하고도 궁극적인 영광을 표현하는 데까지 나가도록 율법을 주셨는데, 이것은 초기의 걸음마 단계를 포함하고 있다. 옛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가정은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며 때로는 강한 금지어들로 표현된 레위적인 율법 조항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모세의 시대가 그 자체로 영광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그것에 뒤따라오는 성령의 새로운 사역을 핵심으로 하는 새 언약의 뛰어난 영광과 비교해 볼 때에는 이제 아무런 영광도 갖지 못한다(고후3:7-18)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한다26).
신약 성경에서의 거룩
신약에서 성화의 동기, 목표, 형식은 비록 그 내용이 좀 더 충분하게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규정되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에서와 동일한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목표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엡4:24; 골3:10). 형식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기 계시를 설명하는 데 이어 그분에게 순종하는 삶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제 동기, 목표, 형식은 더욱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옛 언약에서 불분명하고 부분적인 형태로 계시되었던 것들이 새 언약에서는 분명히 설명되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은 언약의 목표(telos)이다.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에서 새로운 순종의 구체적인 내용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일은 장차 다가올 결말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8:29). 성화는 그것을 생산해 내는 변화이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이 ?나는 나의 영으로 너희로 하여금 나를 닮도록 변화시킬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대체되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너희는 하나님의 집에 소속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맏형이 되시며, 그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셔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너희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니 그와 같이 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변화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틀림없이 이렇게 변화된다.
1. 우리를 위하여 성화되신 그리스도 ? 성화의 창시자
성화의 기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27),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이 전 생애를 통해서 자신을 죄인의 위치에 두려고, 죄인의 이름과 성품 두 가지를 취하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생애 동안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하셨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가 행한 죄의 죄책을 담당하셨다. 그분은 이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평생 거룩하게 사셨고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셨다. 신약은 예수님을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화의 창시자, 곧 선구자(히2:10)로 본다. 무엇보다도 먼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거룩함이 그분 안에서 드러났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죽지 않으시고 자신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게 하시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셨으며, 우리와 연합함으로써 우리의 인성 안에서 그분이 이룩한 성화를 이루신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성화의 창시자이며 근원으로 보며 성령을 그 집행자로 볼 때, 성화의 두 번째 요소에 대해서 바른 근거를 가지게 된다.
2.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
성육신이 있기 전까지 성화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불분명하고 아직 형성 단계에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다양한 율법은, 그것의 목표가 항상 거룩함, 즉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었으나, 이러한 메시지가 신약에서 처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이제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되었다. 신약은 이것을 설명할 때, 가장 결정적인 구속 사역들 안에서의 그분과의 연합을 특별히 강조한다(갈2:20; 골2:6-3-17; 롬6:1 이하)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와 믿는자들의 연합에서 성령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도움을 준다. 바울은 여기에서 성화의 핵심이 죄로부터의 구출과 의로움 가운데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라고 설명한다: 이전에 죄와 맺은 관계는 끝이 났다. 그리스도 인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롬6:7,18)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
5:12-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속 사역의 풍성함을 아담의 죄와 비교함으로써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인상적으로 드러낼 것이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여기에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한 부정을 한다: ·그러한 사상은 복음의 핵심을 파괴한다. 바울은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은총이 지배하는 생활 양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본질이 바뀐 사람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의 범주에 속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다. ·성령이 그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창조한 연합의 끈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새롭고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킴을 받고, 계속해서 셩령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새 생활을 부인하고 옛 사람처럼 계속 죄 안에 머무는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성령의 어떤 사역으로 인해 신자들이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는가?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란 개인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하였다는 정체성을 공적으로 확인 받는 시점의 표시이다. 그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새로운 권위 아래 들어간다. 그들은 이것으로써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a)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죽으심이다(6:10). 죽음은 죄의 삯이다. 그리스도는 그 삯을 지불하셨고, 십자가에서 죄의 속박에 대해 복종하셨다. 그분은 죄의 지배하에 들어가셨고, 그 모든 요구를 짊어지고 죽으셨다. 이제 죄는 더 이상 우리의 대속자인 그리스도에게 요청할 것이 없게 되었다. 모든 삯이 그분의 죽음으로 지불되었다. 죄가 요구하는 바는 이제 소용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죄에 대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죽음을 공유하게 되므로,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 죽음 안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우리 역시 죄의 속박에 대해서 죽었다. 죄의 통치는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신하가 아니다.
b)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삶으로의 부활이다(롬1:3-4; 고전15:45)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그분과 연합했으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죄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 가운데 계속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물 세례에 담긴 성령 세례의 모든 중요한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성령 사역의 중요한 표현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6:6-7 이 구절은 성령 사역에 대한 화려한 묘사로서 몇 가지 중요한 표현들을 내포하고 있다.
1) 옛 자아(사람) 옛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 아담 안에서의 전 존재를 의미한다. 그때 나는 육체 가운데, 죄의 지배하에, 율법의 저주 아래, 죽음의 운명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일이 대표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일어 났으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와 함께는 실존적으로 실현되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분과의 연합이다. 이러한 연합은 구속사적으로 갈보리에서 일어났고, 그 의미가 실존적으로는 중생, 회개, 믿음 가운데 성령의 의해서 우리 안에서 실현된다. 후자의 실현은 앞서 일어난 사건의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28). 바울의 다른 표현은(갈2:20):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 ·사는 자는 그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의 생명 가운데서, 그를 위해서 자신을 주시고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2) 죄의 몸 옛 자아의 죽음으로 인한 직접적인 열매는 죄의 몸이 ?무능력하다고 간주된다“는 것이다. 죄가 지배력을 행사하고 우리의 존재를 다스리는 통로인 우리의 육신이 드디어 굴복하게 되었다.
3) 무능력하다고 간주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죄의 값을 온전히 치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죄의 소유물이 아니다. 몸은 더 이상 죄의 수단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편이므로 신자는 죄에 종노릇 하지 않는다.
4) 죄로부터 자유함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했는가? 이것은 성화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질문이다. 먼저 잘못된 이해는: a) 유사-완전주의(quasi-perfectionism): 죽은 자는 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석의학적으로나 실존적으로 불가능하다. 바울은 신자가 죄에 대하여 면제된 자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b) 법정적 의미: 죽은 자는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었다고 했을 뿐, 죄책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이 말하는 초점은 죄가 가져오는 죄책이 아니라 죄의 지배 혹은 다스림이다.
믿는 자에 대한 죄의 권리가 종국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의 내재적인 본성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현존이 근절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죄와의 관계에서 성령 안에서의 모든 현재 생활을 특징짓는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통치는 이미 종말을 고했지만 아직 그의 실존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성령의 인도 아래서 살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6:3-10에서 설명한 일련의 선언에 의해서 확정된다. 여기서 바울은 중간기에 사는 생활에 있는 것들을 묘사하는 6:11-14의 명령에 덧붙여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새로운 실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통치는 끝났고, 당신은 죄에 대해 죽었음을 알아라(6:11) ·죄가 당신을 실존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그것은 당신에 대해서 아무런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6:12) ·당신의 몸이 죄가 가져다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에 매혹되어 죄의 종 노릇 하는 데 드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6:13)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자라는 당신의 새로운 신분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켜라. 몸의 지체들을 주님의 병기로 드려라(6:13)
은총의 요구와 의무들은 은총의 신적인 사역만큼 광범위하다. 중생 ? 믿음 패턴은 애초에 성령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사시킨 통로로서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지속된다. 복음의 명령(Imperatives)들은 그 설명(Indicatives)들과 동일한 영역에서 작용한다: ·하나님은 인격 전체, 즉 몸과 혼과 영을 거룩하게 만드신다(Indicatives). 따라서 신자들은 인격 전체, 즉 몸과 혼과 영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Imperatives). ·하나님은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시고 행하신다(Indicatives). 그러므로 신자들은 순종과 성별된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해서 살고 죄에 대해서는 죽는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실천해 가야만 한다(Imperatives).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영광과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보장이 그 교리에 결부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 산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죽지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안에 살지 않는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29)
3. 그리스도를 본받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이다. 성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을 포함한다. 따라서 복음의 명령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구체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전13장에 기술된 거룩한 사랑의 생활 역시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에게 참여한다는 사실이 이런 모방을 가능하게 한다. 신약의 권고들은 그 모방의 구체적인 형태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 parenesis(paraenese). 권고
4. 육신을 대항하는 영
성령의 인도로 신약의 많은 권고를 실행하며 사는 삶은 저항이나 방해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에 의해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죄된 육신을 입고 살고 있다. 성령 안에서의 생활은,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 가운데의, 즉 지난날의 죄에 대한 불가사의하고도 끈질긴 집착으로 점철된 육체적 실존 가운데서의 삶이다. 우리를 통치하던 죄와의 과격한 결별은 이미 일어났으나, 죄와의 최종적인 결별은 ? 죄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는 면에서 ?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완벽하지않다. 영화의 마지막 단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역, 새로운 시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존재의 질서는 여전히 옛날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긴장, 갈등 그리고 투쟁이 신자의 신분상 주된 특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육체와 영의 싸움이다.
육체는 존재하는 세상 전체이다. 육체는 분열된 세상 질서로서 현시대와 아담과 함께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기 전에, 육체를 따라서, 육체 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육체 가운데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이 대립은 철저하면서 완전한 것이다.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생각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런데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여전히 성령 안에서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육체는 여전히 ?성령에 반대되는 것을 바란다“(갈5:17).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조차도, 육체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배되어 온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실존 가운데 사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갈등이나 긴장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바울의 두 가지 선언을 대조시켜 본다:
갈2:20 롬7: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스도인의 현재 신분에 대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가 여기에 있다. 초 개인적(인격적)인 육체- 영의 갈등이 신자들의 존재 안에 깊은 반향을 남기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마음속에 머물러 계신다. 그러나 죄 역시 그 안에 머물러 있다. 두 개의 동등한 힘이 존재하며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지배한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긴장과 갈등은 더욱 치열하고 절실하다. 성화의 과정에는,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될 근본적이고도 깊이 뿌리박한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을 깔보게 되면, 우리는 완전주의로 빠져버리거나 구원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를 갖도록 만들고 말 것이다. 이 갈등을 다루고 있는 고전적인 장면은 롬7:13-25에 들어 있으며, 곤고한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전체 해석이 달라진다.
연구: ?곤고한 사람“은 누구인가?
전통적 견해: 자서전적-실존적 접근 방법.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삶을 언급하고 있다는 견해로서,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종교개혁자들이 지지하고 있다(이 견해는 ?인간 의지의 무능력“이라는 사상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오늘날 심각하게 이 견해는 도전을 받고 있다.
반대 의견: 구속적-역사적 접근 방법.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신을 보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헬라 교부, 아르미니우스 주장. 오늘날 알미니안 주의자들. 이 주장은 1929 큄멜의 ?로마서 7장과 바울의 회심“ 이후 현대 신학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다. 즉 롬7의 ?나“는 엄밀하게 말해서 수사학적 비유 속의 인물이라는 말이다. (이 견해는 거듭난 후에 자유 의지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는 사상에 바탕을 둔다)
?자서전적-실존적 접근 방법“이 지지받는 이유
1)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사용하는 바, 강렬하고 직설적인 표현들은 심리적으로 볼 때, ?나“라는 인물이 허구적인 비유 속의 인물이라는 견해를 어렵게 만든다. 이 표현들은 매우 사실적이다. ·더욱이 과거 시제로부터(롬7:6-13) 현재 시제로(7:14-25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 전환되는 문맥에 나타나는 ?나“라고 하는 주격의 연속성은, 극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의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설사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현재 시제로 갑자기 그리고 일관성 있게 전환한 사실은 그런 견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2) 6-8장의 사고 구조를 고려할 때(어거스틴 전통). ·바울은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6장에서 바울은, 신자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나 아직 죄의 현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는 못하였음을 논증하였다. 결과적으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싸우는 운명적인 전투에 임하고 있다. 은혜의 강력한 구출이 성령 안에서의 강력한 싸움을 설정한다. ·7장의 구조도 이와 유사하다: o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 죽었다(7:4) o그러므로 율법의 정죄하에 놓여 있지 않고, 이제 율법으로 벗어났다(7:6) o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으로서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율법은 펄펄하게 살아 있다). o문제는 가장 훌륭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율법의 기준에서 보면 완전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육체 안에 있는 한, 그들에게는 율법이 정죄하는 것이 있으며, 그들을 죄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려는 요소가 남아 있다. o따라서 부활이 오기 전까지는 죄와의 투쟁이 있을 뿐 아니라, 율법에 관련해서는 좌절의 감정을 피할 수 없다.
이 (곤고한 자가 신자라는) 관점은, 이 문단에 등장하는 특정한 진술에 담긴 의미를 고려할 때, 더욱 지지를 얻는다. ·바울은 롬7:1-17에서 참된 자아와 자신 속에 거하는 죄를 구분하면서, 스스로를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시키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관점은 신자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는 ?성령 안에서“ 자신의 육체 가운데서의 타락을 인식하는(7:18) 삶의 조망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있다. ·7:25 하반절에서 오직 신자에게 해당되는 이중성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문제는 계속해서 모순으로 남아 있다. 바울은 자신을 두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신자에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원칙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7:25 상반절에 이어서 나온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두 가지 법, 두 차원, 두 세계: 그러면 이 두 가지 법 사이에 살고 있는 신자의 갈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을 이해해야 한다. 이 모순은 이 세상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는 우주적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는 현시대와 다가올 시대 간의 충돌이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들 두 차원은 바울의 정신-신체적인 존재의 내부를 싸움터로 삼아 각각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마음은 성령의 의해서 새롭게 되었다. 그는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 ? 바울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감. 여기에서는 새로운 원리가 적용됨. ·그러나 그는 죽음의 몸인 그 몸 안에서(갈2:20) 살아가고 있다. 육체의 지배를 받아, 혹은 육체를 따라 살아 간다는 의미에서 육신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물리적인 몸이 불변하는 것처럼 육체의 본성은 불변하는 것이다 ? 그가 육신에 있는 한, 육신의 원리의 지배를 받음. 즉 죄를 부추기는 육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완전한 순종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러한 깨달음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야기시키는 긴장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견뎌 낼 수 있다.
반론: 그러나 다음과 같은 표현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성령 안에서의 생활에 대해 묘사한 것들과 조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성령이 임하기 전의 사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새 언약적 믿음의 관점에서 본 옛 언약의 사람이다. ·나는 죄 아래서 노예처럼 팔려갔다(7:14). ·나는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혔다(7:23)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7:24) ·나는 본성상 죄의 법을 섬기는 종이다(7:25)
그러나 이러한 진술들은 단순히 바울이 자기 존재 내부의 내재적인 모순을 의식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육체의 지배하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을 때에도 지속해서 그 안에 죄가 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과 죄의 동시적인 내재가 섬뜩한 모순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사실을 심지어 모순되는 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사실 표현!). 그는 비록 현재 악한 시대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그는 아직 죄의 영향이 미치는 장소(육신)를 떠난 것이 아니다.
주의할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절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관점의 총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특별한 하나의 관점에서, 즉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영적인 법(7:14,16)에 비추어서 자신을 조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빛 가운데서 볼 때, 비록 신자라 하더라도 그 안에 죄가 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죄는 아직도 머물러 있고, 반항아로서의 죄의 본성과 노예화시키는 근성은 변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바울이 아직 그것에서 완전히 구출되지는 않은 것처럼, 그는 성령 안에 있는 자로서 자신이 율법의 정죄 아래 죽었으나 아직 그 요구에 따라서 볼 때에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점: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와 육체에 의해서 마비된 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양자의 영의 인도하심과 내주하심이라는 빛 가운데서 육체의 잘못된 행실을 죽여야 할(롬8:13이하; 골3:4)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 갈등에서 양측의 세력이 동등하지 않다.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서 다스리신다.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내적인 측면에서 육신과 성령의 갈등은 실재한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함에서 성장해 나가면서 육신이 굴복하는 징후들을 일생에 걸쳐 경험하게 된다. 죄어 빠져 있던 지난날과의 결별이 일어날 때, 그것과의 갈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되는 것이다. 2.이것은 영속적인 실재이다. 그러나 신자가 그 강도 면에서 항상 동일한 수준으로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아니다. 롬7:14-25에 나타난 전망은, 비록 이것이 본질적인 전망(perspective)이지만, 신자가 자기 자신을 조망하는 유일한 전망은 아니다. 3.이 갈등이 해결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성령의 내주하심 가운데서 구원의 보장을 이미 소유하고 있지만, 현재의 신자는 죽음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의 성화에서 놀라운 점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는 성령의 임재가 갈등이 일어나는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점이다. 몸의 구속, 곧 양자됨을 간절히 기다리는 가운데 내적으로 탄식하는 자는 성령의 첫 열매들을 가진 자이다(롬8:2330))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와 함께 부활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육신을 죽이고 영 가운데 살라는 명령을 수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신약 복음(indicatives)의 약속 아래서, 복음적 명령(imperatives)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이러한 투쟁 가운데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또한 성령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연합되어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육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는 방법을 터득해 나갈 것이다31).
5. 성령과 율법 (율법과 복음)
롬7장에서 율법 아래서 신음하는 ?곤고한 나“와 8장의 ?정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율법에 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혹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발생한다: 복음은 율법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그리고 오순절과 시내산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 구약 율법은 폐기 되었는가?
우리는 이미 오순절과 시내산 사이에 대립적인 병행 관계가 있음을 고찰한 바 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거룩한 하나님 존전에 올라갔으며,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로 가지고 왔다.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이 내려왔으며, 성령께서 사람들의 심령에 법을 쓰셨다.
베드로는 이런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데, 그는 시내산적 경영과 오순절적인 경영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청중에게 이것이 요엘2:28-30의 성취라고 지적하고 있다. 율법 아래 존재했던 지난날의 차별이 사라졌고,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경영이 시작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시내산의 시대가 끝나는 상징으로 보인다. 신약에는 이러한 전제를 확정 짓는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예컨대 요한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왔으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요1:17). 독립된 문맥에서 읽게 되면 이 구절은 분명히 율법의 폐기를 시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도 율법의 폐기를 가르쳤다는 혐의를 받아 고발당하였다(행21:28). 그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이 얼핏 보면 이 점을 가르치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3:28).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롬6:14-15).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 아래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롬8:2) ·… (이외에도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신약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과 율법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 예로, ?폐기“라는 요소와 함께 연속성이라는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마5:17-20). 사실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데(롬13:8-10), 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신령하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표장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에게 성취되는 것이다(롬8:3-4)
율법의 구분?
이러한 외견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주의 신학에서 모세 율법의 세 가지 차원32)을 구분하였다: 시민법적인 요소, 제사법적인 요소 그리고 도덕법적 요소이다. 모세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첨가된 것으로서 한시적인 경영을 위한 법으로 의도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과 선택받은 백성의 언약적인 관계에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분이 계획하신 것들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 즉 1) 약속하신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서 나오실 때까지 구별된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2)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들을 어긴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은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1.도덕적인 요구들(십계명)을 통해 구속주가 필요함을 계시함. 2.제사법적인 요구를 통해 구속의 희망을 주고, 3.시민법적 요구를 통해 구속주가 나오게 되는 민족을 하나님을 위해 보전해 주었다.
율법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모세 율법이 근본적으로 인간 삶에 대한 영구한 하나님의 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율법은 (영구한 가치를 가지는 동시에 또한) 한시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십계명도 하나님의 영구한 뜻을 당시의 상황에서 재생산해 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알아야지만 계명들의 본래의 의미, 즉 인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깨달을 수 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고전적인 구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바울도 십계명의 도덕법을 다른 계명과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율법이 주어질 때 분명했던 점은, 모세의 통치 시대에 통치의 근본 원리로 다같이 기능했던 율법이 특정한 적용점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적용점도 바뀌게 되자 시민법과 제사법은 무용하게 되었고, 도덕적 차원33) 은 영원하며 따라서 새 언약의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도록 남아 있다.
율법에 대해 또 한가지 알아야 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율법의 지위가 새로운 언약 아래 변했다는 것이다. 율법이 새로운 방식으로 내면화되리라는 것이 옛 언약 아래 하나의 큰 소망으로 주어졌다.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율법의 명령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바울은 폐기가 아니라 완성의 원리를 강조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6:6)라는 옛 언약의 설명이 하나님의 백성 앞에 규범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예례미아가 강조한 것처럼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17:1,9). 율법이 아니라 죄가 마음에 새겨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약속이 필요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렘31:33-34)
옛 언약의 배경 내에서 조망한 새 언약의 경험에 대한 기대는, 새로운 시대에 이르러서는 명령된 것, 즉 ?마음속에 있는 율법“이 성취되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와 사역 안에 있는 특별한 요소로 보인다. 마음에 있는 율법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뿐인 새 언약의 실재에서 드러나는 두 측면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선언의 핵심이 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율법은 참으로 모세로 인해서 온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며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언약의 신자들은 모세의 경영하에 있던 신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도덕법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대신에 그 불법의 형벌을 당하시고 그 법령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법을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 속에서 그 법들을 성취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란 없다. 성령의 사역은 율법의 정죄가 아니라 그것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내적인 법으로 연결된다(고전9:21).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써 거룩한 율법은 신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6. 나라(Kingdom)를 거스르는 나라(kingdom)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론적 분위기로 인도한다. 그들은 천국의 영역에서 살아간다(엡1:3;2:6). 그러나 이곳은 악한 날을 직접 대면하는 곳으로서 종말론적 갈등의 영역이기도 하다(엡6:12-13). 성령 안에서의 삶은 마지막 날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요, 그 특징은 고통하는 때로 표현된다(딤후3:1). 성령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시작된 다양한 차원의 갈등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육신과 성령 사이의 전쟁 외에 또 다른 차원의 갈등을 접하게 된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출발은 종말의 시작이자 마지막 날의 전쟁의 출현을 표징하고 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라고 묻는다. 광야에서 그분을 유혹하던 사단을 그리스도가 물리치신 사건은 마지막 날의 승리가 미리 침투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확정되고 보장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았다. 중간기(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교회는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속에서 살 뿐만 아니라, 육체와 영의 갈등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두움의 세력과 대적하여 발전되어 나가는 전쟁 지역 내에서 살고 있기도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지옥의 문들과 마주 서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굳게 머물러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지배의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병행점이 있다. 인간 안에서의 죄의 지배력은, 아직 그 현존이 완전히 말살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효화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단을 정복하시고, 무장을 해제시키셨다(골2:15; 엡2:2). 교회와 신자들이 사단의 세력들과 충돌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이 충돌은 신자 속에 있는 죄의 지속적인 현존 때문에 더욱 격렬해진다.
그러므로 육체-영의 갈등과 나라-나라의 갈등이 일직선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단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요14:30)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머물고 있는 곳에 어둠의 나라와의 접촉점이 있다. 이런 ?착륙 공간“은 죄를 지으려는 우리의 지속적인 성향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사실을 무시하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
사단은 우리를 시험하는 자요, 우리를 대항하여 (하나님께) 고소하는 자요, 우리를 삼키려고 찾는 자이다(벧전5:8). 이런 이유로 성화의 이러한 요소에서 핵심적인 명령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14:38)는 것이다.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넘어진 길에 관련된 사람은, 그를 돕다가 똑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갈6:1)
7. ?겉 사람’의 죽음과 속 사람의 소생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어진 종말론적인 긴장과 갈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차원을 창출한다.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은 바울이 옛 겉 사람의 죽음과 속 사람의 소생을 수반한다(고후4:1634)).
바울은 이 점을 의도적인 선언 가운데 암시한 바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부활-죽음 그리고 죽음-부활이라는 교차대구법의 구조에서 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따라서 새로운 삶을 사는 자로서,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고, 이미 시행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함께 나눈다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의 생활 방식에는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즉 죽으심과 부활을 따라가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의 부활 시에 정점에 도달하게 되며, 그때에 그리스도의 몸의 영광과 같이 변형되고 바뀔 것이다(빌3:11,21)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지닌 이런 측면을 언급하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통을 성사시키는데, 이는 모두 죽임(mortificatio)과 소생(vivificatio)으로 구성되는 이중적 혹은 양면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내적으로 성화는 죄에 대한 죽음 혹은 거부와 새로운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다. 외적으로 성화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핍박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지는 죽임, 그리고 궁극적으로 부활의 소생을 포함한다35).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박해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신자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살전1:7). 그들의 경우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 그분과 연합한 모델로서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분명히 전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죽임과 생명의 소생이라는 이중적인 측면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령에 의하여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그분의 백성을 인도한다(롬8:29).
바울은 이 원리의 세부 사항을 고린도후서의 중요한 세 구절에서 자세히 풀어놓았다.
1)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에서 ?슈퍼 사도들“(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연약성“을 경멸했다: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고후10:10). 그들은 바울이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고후10:10).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을 그리스도와 유비시키면서, 그분도 연약하셨음을 지적함으로써 반박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반드시 연약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분의 구원하시는 권능은 십자가의 연약성을 통하여 표현되었다(고전1:25이하).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묶였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이 넘칠 뿐 아니라 동시에 그분 안에서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약함은 자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약함은, 연약한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말미암는 직접적인 결과요 열매이다.
따라서 이런 것이 성화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 이르기까지 회복이 완성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고후 4:7-12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임(mortificatio36))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0-12)
여기에는 죽음과 생명의 대조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핵심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그 삶 전체의 결정적인 패턴이었듯이, 이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사역의 목적이며 그러한 삶의 결정적인 패턴이 된다.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죽음을 통한 생명“의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전인(全人)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성화의 견지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죽음 곧 외적인 죽음에 넘겨진 것은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즉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선행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의 결론으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죽음(즉,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노라“. 밀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만 한다(요12:24). 그 결과 생명이 다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데, 이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3) 고후1:5
바울은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 이미 고후1:5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거기서 그는 성령의 기름 부음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 넘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달라서 대속이나 속죄의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 참여하는 우리의 교제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이 점차적으로 완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다(참고. 골1:24)
이 원리는 단지 롬8:29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을 풀이해 본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를 그와 닮은 가정의 일원으로 재생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방식을 통해 역사 하신다. 주님이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는 것과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바로 그 패턴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유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성령이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 계획이다. 그분의 죽으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함께 심어지고,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하듯이(롬6:5), 믿는 자들은 그분의 부활 가운데도 이와 같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두 참되며, 종말의 날에 최종적으로 충만하게 실재로 드러날 것이다.
1)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 인간을 최종적으로는 부활을 통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수 있도록 회복하심. 3)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이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독특한 교리를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이 선행적 은총은 누구나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의 결단에 따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 10)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7)
정리자 주: 복음주의자들은 결신자를 강조한다. 빌리 그래함이 설교를 한 후에 결신자들은 강단 앞으로 초대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본인의 결단과 중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은 비췸(Illumination, Erleuchtung)을 얻고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비췸을 통해 결단하고 순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교회는 수없이 많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냈으며, 그들은 교회성장(가짜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18)
?με?? ο? ?κολουθ?σαντ?? μοι ?ν τ? παλιγγενεσ??.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4)
롬6:20-21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6)
정리자 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 연약한 그들의 수준에 최대한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율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7)
정리자 주: 내가 보기에는 퍼거슨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애매하게 해석하는 것 같다. 요한복음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저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신다(?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로 밑에서 칼빈은 이 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하였다. 또한 퍼거슨은 히2:11을 ?예수님이 스스로를 성화시키셨다“고 해석하였는데, NA27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사본은 없다. 본문은: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하게 되는 자들“이다. 즉 본문에 ?거룩하게 하다“의 목적어는 없는데, 그리스도 자신을 거룩하다의 목적어로 취하는 것보다 죄인을 목적어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성경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성화시킨다“는 말을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놓는“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렇다면 퍼거슨이 계속하여 예수님을 창시자(아르케고스)라고 한 것에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32)
퍼거슨은 지금 율법의 세 가지 차원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실상은 세 가지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의 세 가지 차원(기능, 용도)이란, 정치적(시민적) 용도, 정죄적 용도, 제3 용도를 말한다. 33)
이곳에서 퍼거슨이 혼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번역의 오류인지 모르겠다. 시민법, 제사법, 도덕법은 율법의 종류이지, 율법의 차원은 아니다. 차원이란 말은 한 가지 법에 세 가지 기능이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서 ?도둑질하지 마라“라는 한 도덕법은, 정치적, 정죄적, 제3 용도의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36)
불가타에 모르티피카티오로 번역됨. 이 단어는 앞에서 칼빈이 사용한 죽임(살인)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죽임이란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한다. 즉 항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었고, 또한 그분은 종국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신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죽임을 항상 몸에 감싸듯이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 |
출처: 생명나무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