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박정희 유신 정권에 의해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이전까지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막을 내리고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등, 새로운 학생운동의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운동권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다른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은 대학생활 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은 대중가요의 향유를 거부하고,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전까지 자신들의 노래문화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게 되었고, 이는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를 성립시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민중가요는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향유층과 별도의 존재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로 이 시기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민중가요문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민중가요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그 노래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운동권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래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스텐카라친], [러시아농민가] 등에 75년 이후 [훌라송], [정의가] 등이 운동권 노래로 덧붙여졌다. 한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교회운동의 발달을 통하여 기존의 복음성가나 외국의 반전운동, 인권운동과 관련한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당시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생운동권에 유입된 노래로는 [우리 승리하리라],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믿음 치솟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노래들은 얽매임과 해방, 구원의 의미들을 사회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으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로의 지향과 의지를 담고 있다.
김민기의 노래 역시 이 시기 운동권 학생들에게 대중가요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방송금지조치로 인하여 대중가요로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김민기의 노래들을 운동권 학생들은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고, 김민기의 노래들 중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 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또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 이후, 실제 노동자들과 접하게 되면서 노동자의 모습이 지식인들이 책에서 읽고 머릿속에서 그려온 민중들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기층민중에 대한 연민주의적 시선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한 결과로 우선 그 양식에서 민요풍의 노래가 등장을 하는데 이는 민요풍의 노래가 민요가 지니고 있는 민중성과 역동성을 빌어온다는 점에서 자연히 이전 포크풍의 노래와는 다른 질감을 가질 수 있었다([작업장 타령](안혜경, 85년경), [서울길 2](김지하 시·오용복 작곡, 82년) 등). 그러나 아직 이들 노래 역시 여전히 설명적이었다.
85년 이후,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대개는 노동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노래들로는 [귀례이야기](이성지 작사·작곡), [깜박잠], [우리 이야기](김보성 작사·작곡), [밥, 자유, 평등, 평화](김보성 작사·김용수 작곡), [대결](박노해 시·김보성 작곡)과 노래로 하는 라이프 스토리라 할 수 있는 [살아온 이야기](노동자 공동창작·김용수 정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노래들은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노래에 비해 구체성이 확보되었고, 투쟁적인 노래가 한 두곡씩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노동자의 일상을 힘들면서도 역동적이고 힘차며, 비참함의 표현에 있어서도 직설적이면서 질기디 질긴 생명력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고, 연약하며 무력하게 표현하고 있어 노동현장보다는 대학생들에게 더 많이 불려졌다. 이 시기는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만들어지기는 아직은 어려운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실제 노동자들이 좋아한 노래는 [사노라면]과 [불나비] 등과 같이 대중가요 중에서도 보다 더 대중적인(그런 의미에서 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식을 차용한 노래들이었다. 노동자들이 실제로 좋아하며 즐겨불렀던 노래들은 그 가사가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감수성에 잘 맞았고,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이 잘 살아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노동가요의 시작, 노동자 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88년부터 92년까지)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노동가요의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살펴 본다면 먼저 근대 음악사, 노래사이래 최초로 이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 노래문화, 노래운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 중심으로 대중화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즐겨부르던 노래들이 노동현장으로 유입되어 왔던 이전과는 달리 노동현장의 노래가 역으로 대학가의 노래를 주도하게 된 점이 그것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7, 8, 9월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들의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의의는 노동자 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성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87년 이전까지는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 문화가 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따라서 작품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 시기 광범위한 투쟁공간에서 불려질 노동가요가 제대로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는 주로 행진곡으로서 [님을 위한 행진곡], [늙은 군인의 노래], [노동해방가], [광주출정가], [진군가], [동지] 등이었다. 그 외에도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노란셔츠의 사나이], [막장을 간다(전선을 간다 개사)] 등,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노동자노래단(이하 노노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하 예울림)은 기존의 노래운동의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그 때는 노노단과 예울림 외에도 전국적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노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때이고, 노동자 노래패들도 구로, 인천, 울산, 거제 등에서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동지여 내가있다](마산),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의 노래가 이 시기에 발표되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전국에 퍼져 나갔다. 노동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이러한 투쟁 공간 밖에 없었고, 따라서 행진곡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에도 [단순조립공], [짤린 손가락], [공장엔](이상 김호철), [나의 이야기], [친구야], [서울에서 살꺼야](이상 안혜경) 등 꽤 여러 편의 일상가요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투쟁의 현장에서 불려졌던 투쟁가요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의 퇴조,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졌으며,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아마도 공권력 투입, 대량 구속, 자본철수, 공장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탄압으로 대중운동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체 내지는 침체되면서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 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려진 노래를 굳이 꼽는다면 [철의 노동자](안치환), 그리고 이전의 작품 중에서는 [단결투쟁가]와 [진짜 노동자 2]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 노래의 공통점으로서, 투쟁의 주장보다는 세곡 모두 ‘멋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자연 집회와 파업도 그 이전보다 줄어들자 집회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90년도에 들어서면서 대공장 노동조합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노래의 정서도 선이 굵은 중년 남성의 정서들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었다.
대중들과 폭넓게 전문노동음악으로
만나기 위한 통합, 꽃다지 창립
노노단과 예울림은 이렇게 대중운동의 상대적인 침체 속에서 범주가 확장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일상공간에서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다양한 노래로, 또한 노동자적 대중성과 전문성이 놓은 음악으로 다가가기 위해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91년 12월 노노단, 예울림 합동공연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땅, 아름다운 노래(약칭 평평아)”을 통해 본격적인 통합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2년 3월 1일 통합 창립당시 총 회원은 33명. 창립 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해 92년 8월초 [민들레처럼],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 수록된 1집 음반(비합법)을 제작하고, 9월 음반 발매 기념공연을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좌표 1992’라는 제목으로 올리게 되었다.
92년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정파논쟁에 휩싸이고 많은 사람들이 조직을 떠나갔으며 다시 운동판 전체의 침체로 이어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신의 줄서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남은 사람들을 추스리고 동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 심정을 [전화카드 한 장], [바위처럼>], [창살 아래 사랑아], [통일이 그리워], [꽃다지3] 등에 담아 비합법 2집을 제작하고, 93년 9월에 음반발매기념공연 <동지>를 세종대 대양홀에서 올리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공연의 형식은 대형무대에서의 집체극 형식이었다.
93년 가을은 문화운동에 있어 중요한 시점이었다. 93년초 노동자문화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오던 연합체, 협의체 조직들이 발전적으로 해소하면서 예술운동의 중심축을 개별 장르 단체들로 옮겨 놓았다. 또 각 단체의 예술적 성과로 대중성과 전문성을 심화 발전시킨다는 기조 하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연행예술단체들도 상대적으로 열린 대중적 공간을 전술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모색들을 하기 시작했다. 꽃다지 역시 기획실을 강화하고 전문적인 관리를 위해 매니저라는 개념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고, 음악단체로서의 자기 위상을 정립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합조직이나 집회에서만 불려지는 노래가 아니라 일상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로 노동가요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노력들을 시작했다. 그리고 93년 12월말에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 한마당에서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라는 제목으로 집체극 형식이 아닌 소규모 콘서트 양식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게 되었다. 그 후로 꽃다지는 콘서트에서 이 형식을 계속 고수했고, 여타 음악단체들과 노동자 노래패의 공연 양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대중화 시도, 합법공간으로의 진출
94년, 음악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진 성과를 바탕으로 노동가요로는 최초의 합법음반 제작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노동가요가 더 이상 집회에서만 불려지는 노래가 아닌 삶의 현장 곳곳에서 밀접하게 함께 하는 것임을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리고, 타 계층을 이미 검증된 건강한 노동가요의 정서로 견인하며, 공식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설문조사를 통해 노동가요에서 명곡이라고 꼽힐 만한 노래들을 엄선하였다. 그러나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욕심을 많이 내다보니, 편곡과 연주에서 그동안 꽃다지에서 함께 음악을 해온 반주반이 아닌 외부의 세션들을 쓰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단지 세련됨만이 아닌 새로운 음악적 느낌을 더 살리고, 보다 전문적인 영역을 개척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국음반’이라는 딱지를 달고 발매된 이 음반은 심의에서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설문을 통해 15곡 가량을 심의에 넣었는데,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은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가사 내용을 문제삼아 반려처리를 해버렸고, [단결투쟁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노래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문민정부에서 문화정책으로 발표한 몇 가지 항목들을 첨부하고 평론가들의 의견과 함께 재심의를 넣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는 정태춘 선배가 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하여 문민정부로부터 고발을 당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헌법재판소에 사전심의에 대한 위헌신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이런 과정 중에 사단법인화된 민예총의 세종문화회관 입성투쟁의 성공과 공연이 같이 이루어지면서 공윤은 끝내 모든 노래를 한글자의 수정도 없이 모두 통과시켰다.
대중운동 주체의 확장, 예술에서 문화로
90년대 중반의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민주노총의 출범이었다. ‘노동자=제조업 노동자’라는 기존의 관념을 깨고 노동자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던 많은 세력들이 노동대오에 합류하게 된 상황은, 이에 따른 준비를 창작단위와 연행단위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70년대 경공업 중심의 제조업 여성사업장에서 80년대 중공업사업장의 남성 노동자가 중심이 되었고, 90년대 이 후에는 사무, 전문, 공공 서비스 노동자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노동대중의 요구와 정서가 다양하게 포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 이전처럼 노래 한 곡이 집회 등의 공간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든가 하는 경향은 사라지게 되었고, 업종과 지역, 환경에 따라 더 많은 일상가요들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인간, 투쟁하는 노동자상을 담은 노래들이 더 이상 창작되지 않았고, 일상영역에서의 문화향유라는 측면으로 노동가요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은 노동자, 민중이라는 기본적인 규정만이 아닌 환경, 여성, 교육, 청소년 등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나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노래를 예술작품의 하나로 바라보면서 작품 속에 노동자성, 민중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몰두하던 창작의 고민들이 일상의 문화, 집회의 문화, 투쟁의 문화 등 예술을 접하는 시공간과 유통구조까지를 포괄하는 전체 구조적인 문제와 일상 생활의 방식이라는 문화적 측면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꽃다지 역시 이러한 음악적 지향과 생산력의 문제, 재생산구조의 문제, 교육 체계의 문제 등에 대한 논의 끝에 96년부터는 솔로가수도 배출하고 총괄 관리하는 구조로서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노래를찾는사람들에서 독립한 안치환의 대중적 성공을 모델로 한 솔로가수들이 독집음반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꽃다지 출신의 류금신, 노래마을 출신의 이정열, 노래를찾는사람들 출신의 권진원 등을 시작으로 단체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이 솔로로의 전망을 모색하고자 독립했고, 기존의 음악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창작곡으로 음반을 발매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솔로가수들이 등장하여 단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빈 지점들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꽃다지 출신의 서기상이 선, 후배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제작한 1집 음반([세상속으로], [파도], [타는 목마름으로2] 등), 역시 꽃다지 출신인 윤미진([희망은 있다], [그대에게 가는 길], [우리동네], [눈] 등), 노래마을 출신의 이지상([사이판에 가면], [귀향], [철길] 등)과 연영석([돼지 다이어트], [구르는 돌], [칼국수와 바카스] 등), 박준([세상을 멈춰라], [민주노총가], [옆을 쳐다봐] 등), 정윤경([시대], [주문], [조성만]등), 박창근([깃발, 그속엔], [짬뽕], [이유] 등)이 바로 그들이며, 그 외에도 조국과청춘 출신의 곽주림, 천지인 출신의 손현숙 등도 자신만의 음악색깔로 대중적인 토대를 꾸준히 형성해 갔다.
창작자들 역시 한 단체에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단체를 떠나 개인 창작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면서 이전처럼 어느 단체의 작곡가 누구로 대표되는 각 단체의 색깔들이 점차 옅어지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단체를 중심으로 수용자층이 형성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부산의 일터와 대구의 좋은 친구들, 소리타래, 최도은과 노래선언4 등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활동해왔던 집단들 역시 지역과 업종 등 자신들의 대중들을 보다 명확하게 하는 창작물을 만들어가면서 지속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보여왔고, 노동가요 작곡가의 선두 주자였던 김호철, 유인혁, 윤민석 등의 활동도 여전히 진행되어 다양한 음악적 층위를 형성해 갔다.
2000년대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2000년에 들어오면서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중심으로 노동문화의 공공적인 유통구조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지속적으로 활동해왔던 창작단체와 개인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단체와 개인가수들, 그리고 그간 활동을 중단했던 개인창작자들이 왕성한 창작활동과 음반작업을 통해 100여 곡에 가까운 신곡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중운동의 흐름이 집중되어 있지 않고,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이 화두로 던져지면서 제각기 자기대중들을 조직해가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음악형식이나 주제면에서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노래가 대중들의 삶 속에 자리잡아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로 인정해야 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창작집단들이 대중의 삶의 본질을 파악하고 보다 밀접하게 접근해 들어가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이의 극복을 위해서 창작단위와 수용자 대중들이 만나는 다양한 접점을 창출하고 소통체계를 확보하면서 삶의 노래, 진실의 노래가 더 많이 창작되어 우리 삶과 정서를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들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2002년, 꽃다지 10주년을 계기로 노동가요의 지평이 확장되고 더 많은 대중들과 함께 소중한 자산들을 지켜내고 즐기면서 이 후의 전망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꽃다지 10주년 행사는 꽃다지와 꽃다지를 거쳐간 사람들뿐 아니라 현재 활동하고 창작단위를 아우르고 그 자리를 통해 보다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