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도 해도 너무하네"
얼마 전 저는 정말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믿겨지지 않았고, 그 다음엔 분노했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말할 수 없는 우울함과 무력감을 느꼈어요.
제가 일하는 병원의 저녁 식사시간은 5:30부터 6:30분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따로 저녁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직원식당 바로 옆이 병동약국인데 간호사들이 저녁을 먹으러 내려온 김에 약을 타가기 때문이죠.모든 병동에서 내려와 찾다보니 맘 편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식당에 내려오기 전에 처방을 넣고 약국에 찾아와서 '어느 병동 약을 챙겨 달라' 요구하지요.
그리고 조금 있다 와서 찾아가겠노라 하고 식사를 하러 갑니다. 그런 상황이라 저희는 따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할 시간이 없어요. 정해진 식사 시간이 끝나면 식당도 문을 닫기 때문에 교대로 먹고 오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한 사람이 병동약국으로 두 사람 몫의 식판을 들고 오지요. 그리고 약국 안쪽 테이블에 앉아 허겁지겁 먹다가 간호사가 호출하면 바쁘게 나가서 응대를 합니다.
이런 상황인데 얼마 전 약제과 인트라넷에 노무위원장 이름으로 알림이 떴답니다. 야간약사들이 약국 내에서 저녁을 먹는 것에 대한 컴플레인이 여러 명으로부터 들어왔으니 먹지 말라는 것이었죠. 저는 그날 근무가 아니라 직접 보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날 근무였던 동료가 그걸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났나 봅니다. 그래서 0번을 눌러 교환을 통해 노조위원장을 바꿔달라고 해서 한바탕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처음에는 원래 이런 사안은 병원장까지 올라가야 하는 건데 자기 선에서 주의를 주는 거라고 하드라지요. 그러면서 '어디서 보기 흉하게 식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냐'며 자기는 그 꼴을 못 보겠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동료가 '그럼 우리더러 저녁을 먹지 말라는 소리냐'고 되물었더니 교대로 먹고 오라고 하더랍니다. 다시 동료가 '간호사들이 저녁 먹으러 오면서 약을 타가기 때문에 교대로 먹고 올 시간도 없다'고 항의했더니. 저녁을 집에서 먹고 오면 되지 않냐고 하드라지요.
기가 막힌 동료가 '난 집에서 병원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집에서 저녁을 3시에 먹고 출근하라는 소리냐'고 물었더라죠. 그랬더니 그제야 그럼 그냥 하던 대로 저녁을 먹으라고 황송하옵게도 허락을 해주시더랍니다.순간 제 귀를 의심했어요.동료에게 '이런 말을 정말 노조위원장이 했다는 말이냐'고 물었어요. 교환에게 노조위원장인지를 바꿔달라고 했고 노조사무실과 연결이 돼서 통화를 했으니 노조 사람 맞지 않냐고 되묻더군요. 몇 번이나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노조 측이 아니라 병원 관계자가 아니냐고 물었지만 이래저래 확인해본 바로는 노조위원장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가 야간 근무를 하면서 가장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식사 시간이에요. 야간 약사는 '근로계약서'에 식사시간에 대한 조건이 기재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날 때 알아서 때워야 하지요. 아무리 그렇다지만 식판을 들고 왔다 갔다 해야 하고 식사 도중에 간호사나 환자가 오면 숟가락 놓고 바로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 그 상황은 참 구질구질하게까지 느껴집니다.
어떨 때는 저녁 한 끼 맘 놓고 먹지도 못 하면서 이렇게 돈을 벌어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어요. 간호사들이 요청한 업무를 하다보면 저녁 배식을 받아놓고도 밥이며 국이 다 식어버릴 때가 부지기수에요. 너무 바쁘면 저녁 배식 시간을 아예 놓치고 나중에 편의점에서 컵라면 같은 걸로 때울 때도 비일비재하지요.
교대로 먹고 올 시간마저 없는 이유는 병동약국의 특성상 응급실 퇴원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간호사들의 편의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간호사들이 약사가 식판을 들고 오가는 것과 저녁을 먹다가 도중에 나와서 응대를 하는 것에 컴플레인을 걸었다고 하네요. 다른 것도 아니고 보기가 싫다는 이유로요.
그래요. 정해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게 아니라 식판을 들고 오가는 게 보기 싫겠죠. 창구에서 호출하면 음식 냄새 풍기면서 후다닥 튀어나오는 것이 볼썽사나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노조라면 아무리 약사가 노조원이 아니라 해도 식사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의 편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보기 안 좋다는 이유로 저녁을 먹지 말고 집에서 먹고 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지요. 생각이 이 대목까지 미치자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 그 자체였습니다.
그 전화를 제가 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동료처럼 단순하게 항의하고 이제껏 했던 대로 밥을 먹기로 하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이게 노조에서 할 소리냐, 당신이 하는 소리가 어떤 의미인 줄 아느냐, 보건의료노조가 아니라 민주노총 지도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 이렇게 제대로 대응을 했어야 했는데... 며칠 동안 분을 삭이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대체 노조가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체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걸까. 제가 본 노조원들은 그래요. 노조원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신의 직장'을 넘어서 '신도 다니고 싶어 하는 직장'에 입사하기까지 치열한 입시경쟁과 취업경쟁을 뚫고 승리한 위너인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조합이란 입사하면 자동으로 가입하게 되는 직장의 부속기관 정도의 의미 같아요.
80년대 치열하게 싸워 노동권을 쟁취했던 앞선 세대와 달리 '정규직 노동조합'은 그것 또한 직장에 옵션으로 딸려오는 타이틀일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직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피견직 노동자가 눈에 들어올 리 있나요.
사석에서도 정규직 노조를 강하게 비판하다보니 주위에서는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민주노총에 대한 무차별적 적대감으로 무작정 민주노총을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제 주장은 아주 간단하거든요. 민주노총 지도부는 조합원 개개에 대한 지도력부터 회복하라는 겁니다. 그 조합원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노동현실에 대해 동일한 인식을 하고 동일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자신들과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까지 보장받지 못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는 같은 노동자'라는 이야기를 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민주노총 내부에서부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거죠.
과거에 투쟁으로 민주노총이라는 결실을 얻었다는 이유 하나만을 내세워 현재의 진보진영에 영향을 미치려는 지도부들의 이런 저런 말과 행동들을 보고 있자면 인생 참 날로 먹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그들의 과거를 인정한다는 것과 별개입니다. 현재의 정세는 그들의 현재 모습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거죠.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압니다. 과거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싸운 거잖아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싸워서 얻어내야만 하는 환경. 지금 그런 환경은 비정규직들에게 놓인 현실이지, 입사와 동시에 모든 것이 주어지는 정규직의 현실은 아니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정규직 노조원들이 비정규직과 연대해서 비정규직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란 말처럼 쉽지 않겠죠.
많은 조합원들은 그럴 이유도, 의미도, 의지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민주노총은 더 이상 진보진영에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요? 자신들이 이미 얻어낸 기득권으로 진보진영을 향해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는 돼먹지 않은 월권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겁니다.
당신들이 이제껏 단결해서 투쟁하고 이뤄낸 모든 것은 존중한다. 그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그 자체일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지금 현재 민주노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할 것인지를 말해 달라.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역시 보여 달라.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총은 과거의 결과물일 뿐이지 현재와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엇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왜 우리 당은 하지 못 하나요.
하나 되는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요? 좋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규직 노조가 단체협상을 할 때 자신들의 임금 인상보다 비정규직의 임금과 처우에 대해 누구보다 앞서 투쟁해준다면, 부당해고를 당해 길거리에서 기약 없는 투쟁을 하는 비정규직 해고자들을 위해 거리로 함께 나와 준다면, 그런 모습을 보이는 민주노총이 앞장서서 하나 되는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자고 말한다면,
저부터 그 당에 입당할 겁니다. 신문광고 한번 내려면 당직자들이 쇼핑호스트로 빙의해서 김 팔고 홍삼 파는 이 돈 없는 정당, 당직자 월급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쳐 저래 가지고 생활이 될까 당원 입장에서 걱정해야 하는 이런 영세한 정당 이런 초라한 노동당 때려치우고 민주노총의 힘 있고 돈 있는 정당에 저부터 입당할래요.
민주노총 조합원이 80만 명이래요. 그렇다면 계약해지의 두려움에 떨며 열악한 처우에 형편없는 저임금으로 생활을 견디는 이 땅의 비정규직은 몇 명인가요? 그리고 고용시장에서 밀려나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바쁜 영세자영업자들은 또 몇 명인가요? 노동당이 그런 사람을 제대로 품어본 적 있나요?
내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노동당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고, 자고 일어나면 의식주 걱정에 교육문제까지 골머리를 썩을 때 내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어쩜 이렇게 내 속을 알아줄까 하는 정책이 나오고, 복잡한 머리, 무거운 어깨, 답답한 마음을 당원들과 만나 나누고 그것을 통해 힘을 얻고, 이 당 안에서 내가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동지들을 만나 나의 방식대로 운동을 하고, 우리 이런 제대로 된 정당 해본 적 없잖아요.
정작 당원들도 이끌어내 본 적 없으면서 어딘가의 누군가를 그렇게 애타게 부르는 걸 보면 이제는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게 어디고 그들은 누군가요?
가끔 좌파들은 참 관념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정세 판단대로 세상이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허세. 자신이 생각하는 구도가 아니면 운동은 사멸하게 될 거라 믿는 망상. 당 바깥사람들과 원탁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공허한 미래를 말할 시간에 지금 우리 당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노심조가 탈당할 때 따라 나서지 않은 이유를 저에게 묻는다면, 뭘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는데 이 당은 실패했다고 단언하는 그들의 착오에 동의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때가 되면 또 만나고... 그런 게 정치의 속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들이 탈당할 때 보인 무책임함을 되돌아보면 그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매우 의심스러워요. 몇 달을 보이콧 하다시피 손을 놓아버리고 형편없는 근태를 보인 지금은 떠나간 당직자들. 떠나가며 불이라도 싸지르듯 자료들을 폐기하고 떠났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참 기가 막혔습니다.
이건 명분, 대의, 이념, 사상을 떠나 상도덕의 문제에요. 하루하루 밥벌어먹고 사는 직장인들은 감히 그렇게 못 하거든요. 그리고도 유급휴가, 퇴직금까지 알뜰하게 챙겨먹고 떠나셨다고 하니 더더욱 놀랄 뿐이죠. 단언컨대 그런 사람들을 다시 받아주는 직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커지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 우리 힘으로 일어서고 우리 힘으로 일궈내고 그렇게 커진 후에는 탈당한 사람들과도 민주노총과도 만날 수 있겠죠. 끊임없이 당 외부의 사람들을 향해 구애를 하며 기웃댈 시간에 그 동안 못 해본 걸 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