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얼굴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로 24세의나이에 순교한 김대건신부의 얼굴은 북방게일까 남방게일까?
1971년 가톨릭의대가 촬영한 머리뼈 시진을 근거로 가톨릭의대 한승호 교수와 서울교대 조용진교수가 제작 복원햇는데 확연히 차이가 낫다, 그러나 앞으로 김신부의 사진이 나타난다면 누구의 흉상이 더 실제와 같은지 밝혀질 것이다 김신부가 1842년 프랑스 세실 제독의 통역관으로 발탁되 난징조약 참관인으로 조인식때 참석해 찍은 사진이 어딘가에 잇을 것으로 기대하고있다2001, 7, 13
황사영 백서 원본 한국에 온다 2001, 7, 13
황사영백서는 1925년 당시 조선교구장인 뮈텔 주교가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자 79위 시복식 기념으로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한 이후 교황청 민속박물관 문서고 에 보관되어왓다
황사영백서란-황사영이라는 당대의 촉망받던 젊은 학자이자 열열한 천주교 평신도가 1801년 일어난 신유박해를 피해 충북배론의 김귀동집에 잇는 토굴에 은신하면서 한국 천주교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기위해 베이징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같은 해 9월까지의 신유박해 자료를 수집해 10월29일완성한 서한, 백서는 그해 12월2일 밀사편으로 베이징에 보내질 예정이엇으나 사전에 발각되 11월5일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압수됐다 백서가 발각되는 바람에 체포되 서소문에서 능지처참됐으며 압수된 문서는 의금부에 보관되다가 (1894년 옛문서를 파기할 때)갑오경장당시 발견되 발견되 당시 뮈텔 주교에게 전달됐고 1925년 조선순교자 79위 시복식때 로마로 보내졌다
에이3용지보다 약간큰 가로60Cm 세로40Cm 크기의 백색비단에 1만3300여자의 한문을 깔끔하고 정성어린 필치로 편지형식으로 담고잇다, 여기에는 중국인 周文謨신부의 자수와 처형 를 비롯해 최창현, 정약종, 강완숙 등 신유박해 순교자 30여명의 순교열전이 기록되잇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는 나름대로의 방안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조선을 청나라에 병합하는 등 서양선박의 파견등을 통한 무력 시위 등을 주장해 외세의 힘을 빌려 신앙의 자유를 추구한 내용등이 담겨 반 민족적이라는 논란이 돼 왔다 뮈텔주교는 이것을 로마에 보내기 직전 이건영으로 하여금 원문을 필사케하고 이 필사본을 바타응로 실물크기의 동파능ㄹ 제작햇다 현제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 되어잇는 것은 이때 만든 필사본과 동판이다, 전시 9월1일-30일
원본은 76년만의 귀환을 마치고 다시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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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8. 황사영 백서와 외세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란?
외국군대 요청, 종교수호인가 민족배반인가
국가를 넘어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며, 민족을 넘어 타자(他者)와 함께 하는 삶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입니다. 학계의 논쟁거리 중 하나인 '황사영(黃嗣永.1775~1801) 백서(帛書) '는 이 화두를 풀어 나가는 데 좋은 거울이 됩니다. '황사영 백서'는 국가와 개인의 갈등을 서양 문물 도입 초기에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신앙의 자유를 내건 이 백서가 민족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연대를 호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변호합니다. 이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백서에 보이는 독선과 폭력을 지적하며 관용과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외국의 군대 동원과 같은 폭력적 수단을 써도 좋은지 묻고 있습니다. /편집자/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조선땅 신앙의 자유 위한
천주교 청년의 순진한 꿈
오늘날 '유엔탄원서' 성격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역사적 사건도 없을 겁니다.
"조선이 계속 신앙의 자유를 불허하면 청나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해야 하며, 서양의 큰 배 수백척과 군대 5만~6만명을 보내 조선 조정을 위협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백서를 중국 베이징(北京)의 가톨릭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것은, 당시 지식인은 물론 지금의 우리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황사영의 인척이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마저 황사영을 역적으로 매도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훈련을 받았고, 불우한 근대사에서 외국 군대의 침입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임을 배운 우리 세대의 경우에는 황사영이 처한 딱한 상황을 이해한다 해도 그의 계획을 민족 반역 이상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황사영이 민중을 혹사․착취했던 세도가들에게 맞섰음에도 남한의 민중 사학자들이나 북한 사학이 그를 맹목적인 사대주의자 내지 외세 의존적인 환상가라고 혹평하는 것도 바로 근대사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민족주의적 감정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황사영이 외세를 끌어들이려고 계획했다고 말할 때 하나의 커다란 허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찍이 한국 가톨릭 역사의 권위자인 조광(고려대․한국사) 교수도 지적했듯이 그 당시에는 황사영 등 박해받는 조선의 가톨릭 교도들이 끌어들일 만한 외세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혁명(1789~1799)과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서 무력화돼 1801년 스스로가 반도의 괴수라 칭했던 나폴레옹과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하는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교황청이나 서구 국가들이 청나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주기를 바라고, 청나라가 신앙의 자유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은 황사영의 생각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순진한 착각이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반대로 18세기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제사를 금지시키려고 했던 교황청의 조치에 대로해 20만여명의 신자를 거느렸던 중국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을 계속 강화했습니다. 특히 가경(嘉慶: 1796~1820) 연간의 박해가 심해 거물급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교자의 최후를 맞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나 19세기 초반 조선의 가톨릭 탄압 정책의 상당 부분은 바로 청나라 금교(禁敎) 정책의 전례를 따른 것이기도 했지요.
제국주의 세력들이 총칼을 앞세워 중국에서 선교의 자유를 요구하게 된 것이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이후의 일이니, 그 전에 순교한 황사영을 외세 침략의 앞잡이로 보는 것은 엄청난 비약입니다. 설령 백서가 베이징의 가톨릭 주교에게 전해졌다 해도 죽어가는 조선 가톨릭의 처절한 외침에 응할 만한 외세는 사실 전무했습니다.
충청북도 제천 배론(舟論)의 토굴에 숨어 체포와 죽음을 앞두고 "큰 배들이 와서 이 박해를 멈추지 않는 한 조선의 교회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는 절망 섞인 꿈을 꾸었던 천주교 청년 황사영. 청나라 정세나 서구 지리도 알지 못하면서 교황청과 청나라 황제를 세계의 중심이자 공평한 조정자로 -중세의 세계주의적.보편주의적 이상대로-인식했던 그의 몽상적인 신앙 자유의 획득 방안을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할 권리와 필요성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요?
그가 꿈꾸었던 큰 배 파견이나 조선에 대한 감독이 보편적인 정의를 대표하는 세계 중심(교황청.청나라)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면, 그의 절박한 절규는 요즘 식으로 보면 유엔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사
자신과 가치관 다르다고
폭력으로 누르는 건 안돼
종교적 관용․대화가 열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 16세에 진사가 된 신동의 손목을 잡고 정조(正祖)가 한 말입니다.
임금의 옥수(玉手)가 닿았던 손목에 붉은 천을 감고 다녔던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황사영. 그는 17세 되던 해 양반 관료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천주교에 입교해 신유(辛酉)박해 무렵에는 교계의 핵심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그가 쓴 이른바 '황사영 백서'는 신앙의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려 한 목적의 정당성과 외세를 동원하려 한 수단의 결함 때문에 평가가 엇갈립니다. '흉서''매국의 계책''외세 의존의 반국가적 행위''몽상''매국적 편지'와 같은 혹평과 함께 '조선교회 구출의 원대한 계획''인권존중 옹호의 텍스트''인권선언서'와 같은 찬탄이 엇갈리는 미해결의 화두(話頭)로 남아 있습니다.
황사영의 인물됨에 대해서도 '전대미문의 역적''민족 반역자''민족 허무주의자''유럽에 대한 사대주의자'와 같은 악평이 있는 반면 '신시대의 건설자''선각적 지식인''훌륭한 순교자''사회변혁.사상변혁을 시도한 개혁운동가'와 같은 호평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전체. 밤새 물이 새는 제방을 고사리 손으로 막아 마을을 수몰의 위기에서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도록 강요받으며 자란 30~40대들은 전체(국가와 민족)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교육받았지요.
그런데 고사리 손으로 제방의 균열을 막는 일이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일인가요. 혹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빌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 한 독재정권의 최면 걸기는 아닙니까? '개인'은 국가나 민족에 봉사해야 하는 종속적 존재가 아니며,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상식입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역사를 보는 눈도 바뀌는 법. 결국 개인의 발견이 없는 한 우리에게 진정한 근대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국가권력의 횡포에 맞서 개인의 기본권인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려 한 백서의 역사성도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고 봅니다. 저 또한 백서를 인권 선언과 국제적 연대의 이정표로 재평가할 수 있다는 데 생각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황사영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자신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서양 군사력이라는 또 하나의 물리력을 빌리려 했다는 점에서, 상대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조선왕조 지배층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는 전통적 제사 관습을 부정한 천주교의 일방적 포교전략이 자초한 것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논란 많은 백서 사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는 세계 정세에 어둡던 박해 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었으며,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화적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쇄신과 화해(2000년 12월 3일)')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고 참회함으로써 미래에 대비하는 천주교단의 과거 반성은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기를 꿈꾸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는 듯합니다. 자기만의 가치와 신념을 고집하며 지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명분 아래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면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관용과 대화만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힘이 아닐는지요.
2003.03.19 10:59 입력 / 2003.03.19 11:05 수정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란?
천주교 박해 막아줄 서양軍 요청
北京 주교에 보내려던 비밀문서
1801년 작성된 '황사영 백서'원본(왼쪽 위)과 부분확대 사진.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이 흰 비단에 썼기 때문에 '황사영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현재 로마 교황청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801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가 박해받던 상황(辛酉邪獄)과 그에 대한 대책으로 서양의 군사력을 요청하는 내용을 중국 베이징의 가톨릭 주교에게 건의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압수당한 비밀문서다. 흰 비단(가로 62㎝×세로 38㎝)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이 글을 쓴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능지처참 당한 것을 비롯해 1백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고, 4백여명이 유배당했다. 황사영은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한데, 다산도 이 사건 때문에 전남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지금부터 2백년 전의 사건이지만 이른바 '황사영 백서'의 역사적 의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돼 왔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 오늘 우리 사회 근대화의 명암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는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문물이 '서학'이라는 이름하에 변화를 꿈꾸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전파되는 시기였다. 천주교와 서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학문.신앙 등에 대한 개인의 자유가 국가.민족 등 전체 조직의 질서와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이 사건은 잘 보여준다.
황사영이 서양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박해를 막아달라고 요청한 대목 때문에 이 백서는 외세 의존적이며 민족 반역적 사건으로 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재해석이 진행되고 있다.
이 서한에서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으로 요청한 내용은 ▶서양제국의 재정 원조▶베이징 교회와의 긴밀한 연락▶선교사의 조선 입국 허용을 위한 로마 교황의 중국 천자에 대한 협조 서신 발송▶조선 교회의 안정을 위한 조선에 대한 중국의 보호와 간섭▶서양 함대 및 병력의 조선 파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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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카톨릭, 그들의 교리에도 하자가 많지만 선교의 방법에서도 많은 우를 범했다. '황사영 백서'는 카톨릭 사대주의자들의 적나라한 얼굴이다. 2005년 말에서 2006년 초까지 황우석 박사를 붕괴시키려 하는 세력의 핵이 카톨릭이다. 40년대 베트남 카톨릭의 행태와 식민지 시대 조선 카톨릭, 임진왜란 침략의 앞잡이 왜카톨릭.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사, 탐험자-여행자-선교사-서양이주인-제국군대 상륙의 순서에서 보듯 카톨릭은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정신적 도구였다. 현대에는 형해화되었어도 대단한 아집의 독기를 방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