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상주 이야기
정양모 신부 / 신약학
나는 음력으로 1935년 11월 6일 경북 상주군 사벌군 목가리 144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1995년 올해로 이순(耳順)으로 접어들었다. 귀가 순하다니, 무슨 뜻일까. 골똘히 그 뜻을 새기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에 이어 이순이라 했으니, 이제 하늘의 뜻을 노여워하지 말아야 하는 연륜이란 뜻인가? 아니면, 남이 나를 헐뜯는 소리가 들려도 별로 노여워하지 않아야 하는 연륜이란 뜻인가? 아리송하기만 하다.
호적에는 내 생년월일이 1936년 4월 21일이다. 내가 태어난 무렵만 해도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서,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렸다. 내 경우에는 다섯 달쯤이나 잘 버티니까 큰할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께서 사벌면 사무소 호적계에 가서 호적에 올렸을 법한데, 생각나지 않으니까 아무 날짜나 둘러대셨던 것 같다.
지척이 천리라는 속담대로, 나는 1970년 이후 좀체로 고향에 들르지 못하고 있다. 노부모님과 동기들이 모두 이향한 까닭이다. 그러다가 1995년 5월 19일 상주시 계림동성당에서 모처럼 강론을 하게 되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모내기 철임에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이 찾아와서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 무렵에 들은 고향 소식들을 몇 가지 엮어 보고자 한다.
사벌공소와 두 수녀
상주군 사벌면 내에는 상주시 계림동성당에 속한 공소가 여섯 개 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1983년 4월 2일자로 사벌면 소재지 공소에 수녀 두 명을 파견하여 6개 공소 교우들을 돌보게 하고 있다. 1995년 현재에는 배 헬레나, 김 루시아 두 분 수녀님이 지원해서 일하고 계시다. 요즘 같은 농번기에는 신자들이 수녀들을 찾아올 리 만무하다. 그러니 수녀님들이 몸빼 입고 맥고모자 눌러 쓰고 양팔 걷어붙이고 들판에 가서 모심고 김매는 교우들과 어울리신다. 목수 · 석수 · 건축기능공으로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신 예수(마르 6,3), 천막 짜는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비를 마련한 사도 바오로(사도 18,3)를 무척 닮은 모습이다. 더더욱 이들 갸륵한 수녀님들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처신하고, 이방인들에게 이방인처럼 처신한 사도 바오로를 몹시 닮았다(1코린 9,19-23). 말로 베풀기[言辭施]보다 몸으로 베푸는(身施) 농투성이 수녀님들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자랑이요, 나아가서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다. 이분들이 걸어서 6개 공소를 돌본다는 소식이 들리기에 금년 4월 여러 교우들과 성직자들이 성금을 모아 12인승 중고 봉고차를 선물했더니 훨씬 수월하게 일하신단다. 참으로 흐뭇하고 흥겨운 일이다. 수녀님들은 6개 공소 교우들에게서 다달이 1인분 생활비 33만 원을 받아 사시는데, 모자라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견딜 만하다며 웃으신다.
화령성당과 농촌 총각
경북 상주에서 충북 보온으로 가다 보면 소백산맥 산중에 상주군 화서면 소재지 화령장터가 나온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닷새 마다 그럴듯한 장이 섰으나 지금은 아침나절에 잠시 장이 서는 한촌에 지나지 않는다. 본당 주일 미사 참석자라야 어린이들까지 포함해서 60여 명, 주일 헌금은 10만 원 남짓하다.
1993년 겨울,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 수녀님 두 분이 지원해서 화령성당에서 두 달 간 살았고, 1994년 8월 하순에는 같은 회 유기서원 수녀 50여 명이 일주일 간 농촌 연수를 했으며, 그해 9월 초순부터는 이 마리, 김 루시아, 이 발비나 세 분 수녀님이 농민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 화령성당 살림이 곤궁한 까닭에 수녀님들은 한 분만 생활비 40만 원(성당 부담 20만 원, 안동교구청 부담 20만 원)을 받고 생활비 부족분은 이 마을 저 마을로 품을 팔아 보탠다. 1994년 당시 화령성당 주임으로 계시던 신대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수녀님들 얼굴에는 영락없는 귀티가 흐르고, 살결은 온실 속의 백합이요, 몸매는 허리 굵은 농촌 아낙이 아니라 콩나물 같은 연약 체질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건가.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수녀님들의 삶은 그것이 아니었다.… 주일을 뺀 나머지 요일엔 어김없이 들판에 나가 살았다.… 지금은 여느 농민 아낙 뺨칠 정도로 선수가 되어 있다. 또 눈오는 겨울철에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공부도 가르쳐 주고 눈싸움도 하고 등산도 하며, 그러다가 틈나면 이곳저곳의 공동체도 방문하면서 수녀가 아닌 농민의 참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올해에는 약간의 땅도 구입하여 직접 농사를 지어 보겠다는 것이 수녀님들의 소망이다(『성서와 함께』, 1995년 3월호, 100쪽).
시골 노총각들이 장가를 갈 도리가 없다는 한탄만큼 안타까운 일도 드물다. 사벌에서나 화령에서나 단지 농사꾼이라는 죄목 아닌 죄목 때문에 짝을 못 구하는 노총각들이 적지 않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화령성당 소속 정의선이라는 선배 교우가 후배 교우 정재섭의 짝을 구해 주려고 안동교구 주보 「공소사목」에다 공개적으로 호소했을까. 그는 자기 후배가 훤칠한 키에 다 인물 좋고 일 잘하는 상일꾼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소개문은 썼다.
1959년 5월 17일생. 가족은 환갑이 되지 않은 어머니와 도시에 사는 형, 군대 간 동생, 역시 도시에 정착한 막내 동생 등 네 형제 중 둘째로서 지금은 땅을 지키는 어머니를 모시고자 트랙터, 경운기, 관리기 등 농기계로 5천5백 평의 논밭을 경작하는 중농 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집은 3백 평의 대지에 도시처럼 입식 부엌이 된 방 네 칸의 한옥입니다. 학교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농촌에 정착하여 고향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신념 속에 사는 착실한 후배입니다….
정재섭 노총각을 구해 줄 천사가 나타났는가 궁금해서 공개 구혼 두 달 뒤에 화령성당 김영식 신부님께 여쭈어봤더니, 신부님과 당사자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몇몇 교우 아가씨들이 전화를 했고 한 아가씨는 화령까지 찾아왔으나 혼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지 속의 오지, 다인성당
다인은 사벌이나 화령보다 더 심한 오지다. 연부역강(年富力强)한 권상목 신부님이 농촌 공소 15개가 딸린 다인성당을 지키고 있다. 권 신부님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펴내는 『빛두레』(1995. 2. 26)에다 우리 농촌의 실상을 생생히 그렸다.
농촌 본당에서 첫 사목을 하다 보니 느끼는 것도 많고 헷갈리는 것도 많다. 그 헷갈리는 정도가 순전히 경험 부족에서 나온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몇 가지 넋두리로 푸념을 하고자 한다.
우선 헷갈리는 것은 농촌 현실이다. 고놈의 우루과이 라운드(UR) 파고가 한바탕 몰아붙이면서 저마다 살아남는 길을 모색한 것이 비닐하우스 특수작물이다. 고소득 품종이라는 명분 아래 논이 밭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다 해결된 것은 아닌듯하다. 이제 더 이상 벼농사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결론 앞에서 저마다 특수작물(밭작물)로 승부를 거는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하기야 논농사보다 밭농사 소득이 거의 4배라는 엄연한 결산 앞에서 할 말도 없겠지만. 그렇다면 이제 쌀 보기를 어물전 꼴뚜기 보듯 하면 이거야말로 더 심각한 사태라는 것이 뒤늦은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어찌해야 좋을는지….
두번째로 헷갈리는 것이 가정 현실이다. 지긋지긋한 농사일을 자기 대로 끝내고 싶어하는 가정이 한둘이 아니어서, 자녀들은 이미 타지로 유학(?)을 내보내거나 아니면 이미 준비중이다. 농활이라고 찾아오는 도시의 학생들이나, 그들 앞에서 어물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농촌 학생들이나 농사일이 서투른 것은 마찬가지다. 이제 농촌의 아이들에게도 호미자루 쥐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어떤 때에는 그런 부탁을 하기조차 미안스럽다. 혹시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들조차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을지 모를 일이다. 어찌해야 좋을는지….
세번째로 헷갈리는 것은 본당 현실이다. 정부의 잦은 실농 정책으로 포기를 마지막 선택으로 택한 이들에게 그래도 ‘하느님은 농부’이시고, ‘생명을 돌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은총의 기회란 말은 더 이상 써먹기가 이젠 거북스럽다. 집안 일손 하나 구하기 힘든 형편에 주일이라 찾아온 자녀들 일 시켜야 한다고 곧장 집으로 달려가는 신자들의 뒷모습을 보고서, 한 번 거들어 주지 못하여 주일 파공(罷工) 지키라고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어찌 해야 좋을는지….
마치 이놈의 현실을 말해 주기라도 하듯 뉘엿뉘엿 해질 무렵에 수녀님 한 분이 맥없는 표정으로 질문을 해온다. “여기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각오했던 질문이라 주저없이 대답해 버린다. “그냥 함께 있어 봅시다.” 대책 없는 대안 앞에 더 이상 서로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서로는 웃어버린다. 마치 대단한 진리를 발견한 듯이, 아니면 화두에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이 말이다.
대오각성해야 할 우리 겨레와 정부와 교회
널리 알려진 일이거니와 역대 정부가 농정을 잘못한 결과 우리나라 식량 사정은 지금 말이 아니고 앞으로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1993년 현재 우리나라 식량 자급도는 34퍼센트에 불과하다. 쌀만은 아직 자급되고 있지만, 쌀 수입 제한 기한 10년이 지나면 쌀 생산 기반마저 무너질 염려가 있다. 이미 콩 자급도는 10퍼센트 밑으로, 참깨 자급도는 5퍼센트 밑으로 떨어졌다. 1989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가 발족되면서 우리밀이 생산되고 있으나 밀 생산량은 고작 4천 톤, 수입밀 3백50여 만 톤의 0.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우루과이 라운드 파고가 본격적으로 밀려오면 우리나라 식량 생산을 더더욱 줄어들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이북 2천만 동포의 식량까지 해결해야 할 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식량 자급도가 34퍼센트에 불과하니 66퍼센트는 수입에 의존한다. 1993년도 우리나라의 식량 수입은 세계 13위, 그 액수는 자그마치 97억9천8백만 달러나 된다. 더군다나 수입되는 식량이 제대로 검사를 거치지 않으니 보통일이 아니다. 1993년 미국에서 수입된 밀에서 허용기준치의 1백32배나 되는 농약이 검출되었고, 1995년 미국에서 수입된 오렌지에서 메치타치온 등 18종의 살충제가 검출되었다고 한다. 미국이 문제가 많은 나라이지만, 식품의약국(FDA)을 두어 식량이든 약품이든 자국민 안심하고 먹을 만큼 철저히 검사하게 하는 제도는 매우 훌륭하고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본받아 마땅하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우리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여러 부서의 공직자들은 무엇보다도 식량, 약품, 물, 대기에 신경을 곤두세울 책무가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 분야가 상공업이라면, 상공업계의 이득 일부를 농업과 환경 보전에 돌리는 정책이 아쉽다.
우리 겨레와 정부는 크게 깨달아야 한다. 지금처럼 농업을 경시하고 농민을 홀대하면서 좋은 식품을 공급받기 바란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 교회도 대오각성해야 한다. 철저히 교구 독립 체제로 인사와 재정을 운영한 결과 교구 간의 불평등은 상상을 넘어선다. 이러고서야 어찌 바깥 세상을 향해서 정의를 부르짖을 수 있겠는가.
나날이 피폐해 가는 농촌 교회를 꿋꿋이 지키는 젊은 신부님들, 자원해서 농민들과 어울려 사는 수녀님들이 애틋하고 불쌍하고 자랑스럽다.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