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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출생, 세계여행 전문가, 한밭대학교 ‘세계문화기행’ 지도교수, TJB 모닝와이드 라이프 인 출연, |
말레이 제도의 문화를 읽다
- ① 인도네시아
이 대 영*
■ 흔들리는 봄
사월의 가출! 듣기만 하여도 흔들리는 문장이다. 그것도 모든 것을 팽개치고 해외로 나갈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행복이 또 어디에 있을까나? 문득, “당신은 우리 가족이 아니라 동거인이야!” 라는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이 흔들리는 봄을.
밤공기를 가르는 캐리어의 소음도 오늘은 봄의 소나타로 들린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이다. 아파트를 둘러보니 각 동마다 두어 집 정도가 불빛을 내보내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이륙시간이 7시여서 4시 30분 인천행 공항버스를 예약해 놓았다. 걱정과는 다르게 아파트 정문 앞에서 쉽게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택시기사는 50대 중반의 깡마른 남성이었다. 캐리어 싣는 것을 보고 그는 나에게 해외에 나가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작년에는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에 다니느라 매우 바쁘게 보냈으며, 이번에는 싱가포르를 기점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둘러 볼 계획임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울러 필리핀의 치안, 베트남의 교통, 캄보디아 사회의 부패상 등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러는 사이, 택시는 어느덧 공항버스 정거장 가까이에 있었다. “사업하시는 분이냐?”는 택시기사의 질문에 나는 서둘러 “그렇습니다!”라고 답하며 보조가방을 챙겼다. 출발 10분전이었다.
버스대합실의 풍경은 여전했다. 일찍 도착하여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이미 도착한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택시에서 내려 허둥대는 사람도 있다. 누가 가져갈까봐 캐리어를 다리 사이에 꼭 끼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합실 밖에다 세워놓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그 영역을 오랫동안 벗어나는 일은 없다. 화장실을 들락날락 하는 이도 있고, 의자에 앉아 새벽잠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있다.
버스에 올랐다. 사월의 가출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선진 도시 및 대학 탐방의 성격을 띤 것이기는 하나, 벚꽃 몽우리가 탱글한 계절에 시도하는 가출이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 인도네시아의 바탐섬
“여기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국립경기장입니다!”
중학교 시절, 농구나 축구게임이 있을 때마다 들려오던 흥분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우리 집에는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한 대 있었다. 생산지가 어디인지, 몇 년 식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를 뒷산 소나무에 매어 놓고 꼴을 뜯기며 듣던 어린이 연속극 ‘태권동자 마루치’는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마루치의 태권도 실력에 파란 해골 13호가 나가 떨어져 아픈 신음을 쏟아 내면 나는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었다. 또한, 자카르타 국립 경기장에서 들려오던 아나운서의 ‘꼬~올!’이라는 외침에 귀를 쫑긋하며 즐거워했던 기억 또한 생생하다. 인도네시아의 이미지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 내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 바탐섬(Batam Island)으로 가기 위해서는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Singapore Changi International Airport)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5시간 20여 분이 소요되어 도착한 창이공항은 비교적 한산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나는 바탐대학에서 나온 관계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히잡(hijab)을 한 무슬림계 대학원생으로 석사과정에 재학하고 있다고 했다. 바탐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페리 터미널(Harbourfront Ferry Terminal)로 이동해야 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했건만 공항에서 미처 땅을 밟아 보기도 전에 택시로 이동하는 형국이다. 40분 정도 외곽도로를 달린 후에야 도착한 페리 터미널은 작고 우중층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운전기사에게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자 그는 외모와는 다르게 수줍은 얼굴을 했다. 입국 수속 장소는 3층에 있었다.
▲ 페리 터미널(Harbourfront Ferry Terminal)
▲ 리플렉션 케펠 베이(Reflections at keppel Bay)
페리 터미널은 1985년에 설립되어 처음에는 두 척의 페리호 운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오늘 날에는 6개의 페리 터미널에서 15개의 여객선이 4개의 루트로 1일 35회 운행하고 있었다. 50여 분의 배를 타고 이동하기 위해 나는 또다시 입국심사 절차를 마쳐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짧은 거리라지만, 어차피 국가 간의 이동이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20km를 항해하여, 드디어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위치한 워터프런트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유년시절에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만들었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국립 경기장도 없었지만 나에게는 감회가 남달랐다.
바탐섬에는 대학에서 제공한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집에서 바탐섬에 이르기까지 무려 9시간이나 걸린 여정이었다. 그러나 바탐섬의 해안가에 자리한 씨 푸드 레스토랑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피로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식당 바로 아래에는 바닷물이 출렁이었으며,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혼성 그룹이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바탐국제대학교에서 마중 나온 아우구스티나(Augustinga Fitrianingrum) 국제교류부장이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녀 역시 히잡을 한 작은 체형의 무슬림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신기하고 낯선 느낌도 있었지만, 2억 5천만 명의 인구 중 87%가 이슬람교도인 이 나라에서 히잡을 한 여성을 만난다는 것이 이상할 까닭도 없었다. 약간 검은 피부에 눈에서 영리함이 배어 나오는 그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큰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바탐섬의 위치, 인구, 산업 등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사이, '빈땅(Bintang)' 맥주와 인도네시아의 전통요리 모둠이 나왔다. 인도네시아식 바비큐와 꼬치요리, 코코넛 치킨 수프와 볶음면, 튀긴 새우 등의 요리는 나를 행복한 시간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너무 이국적 분위기와 맥주에 취해가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며 어설픈 영어들을 더듬더듬 쏟아 냈던 것 같다. 내가 술을 권하자 그녀는 술잔 대신 코코넛을 들어 건배를 하며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곳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은 칠리 크랩이었다. 인디카 품종의 쌀에 비벼먹는 게 요리는 바다의 풍성함이 흠씬 배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아우구스티나 국제교류부장과 헤어져 가이드와 함께 도착한 곳은 바탐 뷰 비치 리조트(Batam View Beach Resorts)였다. 200여 개의 객실을 갖춘 리조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한국의 대중가요가 들려왔다. 레스토랑 옆에 위치한 라이브 쇼 무대에서 들려오는 연주 음악이었다. 환영해 주는 그들에게 다가가 같이 시간을 즐길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밀려오는 피곤함과 내일의 일정 탓에 유혹의 문고리를 아주 단단히 걸어 잠그기로 했다.
바탐 국제대학교(Universitas International Batam)는 사립대학으로 2000년에 설립되어 60여 명의 교원과 4천여 명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명이 시사 하는 바대로 국제 캠퍼스 구축 및 복수학위와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중점을 두고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회의장에서 만난 교직원들은 밖에서 만났던 일반 동남아시아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특유의 미소와 친절, 그리고 여유로움이 있었다. 특히, 국제교류회의장 테이블 위에 놓인 ‘론똥(Lontong)’은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바나나 잎으로 싼 쌀가루를 쪄낸 것으로 마치 떡처럼 보였다. 간도 맞는 듯하여 간식으로 먹을 만했다. 내방객을 대하는 그들의 친절함 하나하나가 마음에 다가왔다.
도서관과 국제교류원 등 대학캠퍼스를 둘러 본 후, 바탐 시내에 위치한 '메이 스타(May Star)' 쇼핑몰에 들렀다. 점심을 먹기 위함이었다.
주방에 오리고기 바비큐가 통째로 걸려 있음에 주목하며, 나는 나시 짬부르(Nasi Campur)와 소또 아얌(Soto Ayaam)을 주문했다. ‘짬부르’는 섞는다는 의미로 일종의 비빔밥 종류이다. 나는 사전 지식으로 고소함과 매콤함이 어우러져 제법 맛이 나는 음식임을 알고 있었다. ‘아얌’은 닭고기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기에 소또 아얌은 고추가 가미된 닭고기 수프로 비빔밥과 어우러질 듯했다. 풍성하고 맛있는 점심식사였다. 식사 후 쇼핑몰과 마사지 샵에서 문화체험을 하고 나서야, 나는 벌써 저녁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저녁은 아우구스티나 국제교류부장과 함께 하는 자리가 되었다. 어제의 해물요리와 비슷한 메뉴였지만 특히 입맛을 돋우는 음식은 골뱅이였다. 골뱅이 속을 빼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국내에서 맛본 통골뱅이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로만 기억되던 인도네시아에서, 무슬림 복장을 한 초롱한 여인의 눈을 이따금 바라보며 빈땅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파도소리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 바탐 뷰 비치 리조트로 돌아 온 시간은 12시에 이르고 있었다.
이튿날, 다소 몸과 머리가 무거웠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1층 로비에 나가 외국인들과 댄스를 즐기고, 코리안 송으로 연주에 맞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한 이유도 있을 터였다. 밖은 아침햇살에 푸른 바다와 야자수가 빚어내는 이국적 정취로 가득 차 있었다. 산책로를 걷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린 고양이와 왕도마뱀이 서로 경계하며 긴장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왕도마뱀은 2m 남짓 되는 것으로 아마도 어린 고양이를 노리고 있었던 듯싶다. 인기척 소리에 놀란 왕도마뱀이 이동을 시작했고, 나는 카메라를 그의 머리 가까이에 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날름거리는 촉수와 ‘쉿쉿’ 하며 내뱉는 기분 나쁜 소음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그의 곁에 붙어 있질 못하게 만들었다. 행여, 이 소름 돋는 행운과 또 조우할까를 경계하며, 나는 해안가로 나섰다. 맞은편에는 몬티고 리조트(Montigo Resorts)가 특이한 3층 빌라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1km의 전용해변에 인접한 이 리조트는 88채의 현대식 빌라시설을 갖추고 있어 싱가포르와 연계한 신혼지로 꽤 알려진 곳인 듯했다.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목조건물이 있어 살펴보니, 바로 씨 푸드 레스토랑이었다. 그 레스토랑을 통과하여 이어지는 해안가로는 인도네시아 전통 가옥풍의 빌라식 객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곳을 보니 예전에 학생들과 함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빌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아누크 빌(Shinanouk Ville)에서 선박을 이용해 1시간 이동한 뒤 머문 코 롱 산로엠(Koh Rong Sanloem) 아일랜드는 문명과 외떨어진 자연의 공간이었다. 목조로 지어진 원두막 같은 방갈로 앞에 산호초 화이트 샌드 비치가 길게 이어지고, 해먹에 누워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이란 더 없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늦은 시각, 해변에서의 놀이와 게임으로 지친 학생들을 지금 앞에 보이는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모이게 하여 밤늦도록 맥주 파티를 하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여전히 나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바닷물이 섬 사이로 흘러드는 곳에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충남 공주 출생, 문학박사, 소설가,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지도교수, 저서 한국전후 실존주의 소설연구, 유폐된 자아의 소설연구 등, 소설 사마산, 빈터 외 다수, youngdaele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