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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42기 분포도이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습니다
남한에 있는 40기 능이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편 이야기 입니다
홍유릉에서 덕혜옹주 묘로 가는길 담장 철망에는 특별기획전으로 덕혜옹주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1916년 4월 1일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위하여 덕수궁 안 준명당(浚眀堂)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하였고
쿄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로 촉탁하였다.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설치하였다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시절 함께 재학중이던 급우에 따르면 “옹주가 공부를 잘 하였으며, 특히 습자에 능하였다”고
회상하며 옹주는 동요를 짓는데에도 능하였다 한다
1920년 4월 1일부터 궁 내에서 심상소학교 1학년 과정을 3인의 학우들과 같이 교육 받다가 1921년 4월 1일 경성에 머문
일본인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된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였다
일출심상소학교에서는 일본복식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통학할 때에는 일본 복식을 갖추어 입었는데
옹주는 주로 몬쓰키와 하카마를 착용하였다.
학교의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덕혜옹주는 유학 이전에 이미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고 한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으며
1025년 1월에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음을 통고한다. 같은 해
3월 28일에 경성을 출발하여 3월 30일 도쿄에 도착하였고 4월 14일에 여자 가쿠슈인(女子学習院) 중등과 2학년에 입학하였다
1929년 5월 30일 모친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 6월 2일 귀국하지만 귀인 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라 귀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복상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상하지 못하고 6월 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옹주는 1930년 봄 무렵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되었다.
1931년 조현병 증세는 호전되어 같은 해 3월 27일 여 가쿠슈인(여자 학습원) 본과를 졸업하였다
1929년 귀인 양씨의 장례식에서
대마도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소 다케유키<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는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순일본식으로 거행되었다.
덕혜옹주는 결혼 당초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으며, 그녀의 조현병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당시의 모습을 본 이에 따르면, 전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1932년 8월 14일에 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으나, 1956년 8월 26일
딸 마사에는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덕혜옹주는 출산 이후 조현병(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 다케유키는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옹주와 이혼하였다
덕혜옹주는 1946년 이후 15년 가까이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귀국 당일 김포공항에 유치원과 소학교 동창 민용아(閔龍兒)와 당시 72세의 유모 변복동(卞福童)이
마중을 나왔고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조선 제27대왕 순종의 비) 윤씨를 만난 후에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같은 해 2월 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 1967년 5월 4일 병세가 안정되어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이후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였다.
전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관계자들에 의해 면담이 거부되었다.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경에 창덕궁 수강재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 입구 입니다
덕혜옹주 묘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국왕의 사친(私親 왕의 자리에 오른 왕의 친부모)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합니다
덕혜옹주는 왕족에 속하므로 일반의 무덤처럼 묘비와 상석
망주석과 장명등으로 이뤄진 석물이 전부 입니다
망주석에는 세호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다람쥐처럼 느껴지도록 너무나 닮았습니다
세호란 무엇인가
작은 호랑이랍니다
<세호>가 묘 앞 양쪽에 세워져 있어 땅의 기운이 너무 많이 올라 오면, <세호>가 아래로 기운을 눌러주고
땅의 기운이 내려가면<세호>가 기운을 끌어올려 준답니다
능 앞 좌우의 망주석을 잘 보면 기운을 아래로 내려주는 세호,
기운을 올려주는 <세호>의 방향이 위, 아래 다르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명등은 능침의 중심 시설로 멀리 조산 또는 안에 축을 맞춘다 합니다
덕혜옹주는 조산26대왕이신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입니다
덕혜옹주 묘 입구쪽으로 이동하여 의친왕 묘로 갑니다
의친왕의 가족관계
의친왕 묘 입니다
의친왕(본명 : 이강)은 조선 26대왕이자 고종황제와 귀인 장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9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해 10월에 귀국하였다. 1895년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해
8월에는 특파대사자격으로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대학교 특별과에 입학하였으며, 1905년 4월 미국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해 6월에 적십자사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安東)에서 일본경찰에게 발각당하여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뒤 여러 차례 일본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의친왕은
고종황제와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입니다
의친왕 묘의 망주석과 장명등
지난 8월 21일에 의친왕 묘를 찾아왔을 땐 비공개 묘였습니다. 묘 주변의 무성한 잡초들로 봉분이 안보여
담장 철망 사이로 손을 집어 넣어 풀들을 제치고 의친왕 묘 봉분를 담았던 사진 입니다
임시 공개(9월 13일 ~ 11월 30일)를 하고 있을 땐 묘 주변이 넓다랗게 잡풀들이 베어저 깔끔하였습니다
의친왕 묘에서 덕혜옹주 묘로 갈 수 있는 소롯길 입니다
의친왕 묘와 덕혜옹주 묘 출입구 입니다
출입구에서 바라본 덕혜옹주 묘
의친왕 묘와 덕혜옹주 묘 출입문을 나가면은
산책로와 덕혜옹주 묘 경계를 이루는 담장 철망엔 의친왕과 덕혜옹주 사진 전시화가 열리고 있습니다
의친왕 묘와 덕혜옹주 묘로 갈 수 있는 출입문 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제27대 숙종 임금의 국장 모습을 그린 의궤 입니다
(사진을 클릭하여 보세요)
숙종 임금의 국장 행렬도 입니다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홍유릉에서 덕혜옹주 묘로 오가는 산책로엔 아주 작은 문인석이 있습니다
으아하여~
문의하여 보았드니
누군가가 막연하게 그냥 갔다 놓았다고 합니다
덕혜옹주 묘가 있는 위치를 홍유릉 후문쪽에서 담아보았습니다
산책로에 전시되고 있는 덕혜옹주 사진전을 홍유릉 후문쪽에서 담아보았습니다
홍릉(고종황제와 황제비 명성황후 합장 릉)과 침전 사진은 덕혜옹주 묘에서 홍릉으로 되돌아와 찍었습니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의 공식 영정 입니다
명성황후는 사진과 초상화는 전해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른쪽 길따라 홍릉 침전과 홍릉 후문을 통하여 덕혜옹주 묘소로 갈 수 있습니다
홍유릉을 출입할 수 있는 대문인 삼문(三門)으로 가는 길 입니다
홍릉 연지 입니다
홍릉 연지 입니다
홍유릉으로 출입할 수 있는 삼문(三門) 입니다
홍유릉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삼문 입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같은 뜻의 취지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국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조에 기명 조인한다.
【한일병합조약의 의의와 평가】
한일합병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래부터 무효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5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게 마땅하다.
둘째
이 한일합병조약이 한국측과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일합병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때 그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 무효임을 재확인하였다.
조선 제26대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고종황제의 어진
다시 찾은 홍유릉과 덕혜옹주의 묘 관람기는 여기까지며
계속 올려지는
4부에서는 고종황제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묘를 찾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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