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설립 12주년을 맞아 우리 본당에서는 10월 5일 전 신자 기차 성지순례를 하였다. 삼개월 동안 계획하고 혼신을 다해 준비했던 순례의 시작은 우리 아파트 바로 앞 장자대로에서 덕소까지 가는 전세 버스를 타는 것으로서 시작되었다.
6시 30분에 밖으로 나와 보니 버스 한 대는 벌써 인원이 다 차 먼저 떠나고 나와 남편은 두 번째 버스에 올라탔다. 모두들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집을 나섰음을 알 수 있었다.
↑ 명찰을 나누어 받고 명찰과 같은 색깔의 깃발 앞에 모여 있다. 우리 5구역은 파랑색이다.
열차 호수 별, 구역 별 인원 점검 후 열차에 탑승하였다. 우리 5 구역은 6 호 차량에 앉도록 되어 있었다. 지정된 좌석은 없고 5구역은 뒷 쪽에, 같은 차량에 배정된 10구역이 앞 쪽에 모여 앉았다.
애당초 가기로 했던 사람 들 중에 몇몇이 오지를 못하여 좌석의 여유가 있었다. 나중에라도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빈 자리를 채울 수도 있었겠지만 신청자 모두를 위한 여행자 보험을 들어놓은 상태라 그 외의 사람은 갈 수가 없었다. 얼마나 이 순례의 안전을 위해 빈틈 없이 준비를 했는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8시경에 열차가 출발하고 잠시 후 신부님의 말씀과 묵주 기도가 있었고, 오늘 하루의 일정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총구역에서 준비한 김밥과 우리 5구역에서 마련한 간식이 배분되었다.
아침 식사를 한 후의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나누어 받은 나바위 성당(국가지적문화재 사적 318호) 소개 책자를 읽어 보았다.
나바위는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가 되어 조국에 입국하며 첫 발을 디딘 축복의 땅이다. 1836년 12월, 15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844년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월 선교사들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고 그들이 거처할 집을 마련코자 서울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1845년 4월 선교사를 모셔 올 목선을 구입하여 11명의 교우와 페레올(고)주교, 다블뤼(안) 신부와 함께 타고 갔던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끝에 1845년 10월 12일 밤 8시경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 나바의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나바위로 정박한 이 일을 페레올 주교는 그의 편지에서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다.
그러고 있는 동안 기차는 계속 달리고, 차창 밖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황금 물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11시 20분 강경역 도착. '구역별 깃발을 따라 함께 이동하세요.' 오늘의 기수인 5구역 사도회장 세르바시오 형제님. '어르신들은 엘레베이터를 타세요.' 여성 구역장 그라시아가 두 분 뒤에 바짝 붙어 에스코트 하고 있다. 강경역을 나서면서 걷기가 부담스러운 분들 50 여 명은 강경역에서 대기 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성지로 직접 가게 되어 있고 나머지는 차가 다니는 도로를 잠시 통과하여 뚝방길을 걷는 도보 1시간 정도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반듯하게 정비된 금강. 자전거도로가 나 있고 강변에는 억새가 하얀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며 햇빛에 반짝이고, 코스모스와 구절초 등이 걷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강경은 서해안과 연결되는 하항 도시로서 내륙교통이 불편하던 때에는 물자가 유통되는 요충지였는데 철도가 발달하면서 부터 다른 지역으로 상권이 넘어가 이제는 젓갈 시장으로서만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십자가와 김대건 신부님의 영정과 유해를 모신 이들이 순례행렬의 맨 앞에 있고 그 뒤를 구역별 깃발을 따라 걷는 행렬의 끝이 100m도 더 되었다. (성질이 급한 남편 스테파노가 앞질러 가서 찍어 준 사진임)
충청남도 강경에서 출발한 도보 성지순례가 전북 익산시로 넘어 오고 있다.
↑ 구름 한 점 없이 개인 파란 하늘, 사정 없이 쏟아지는 따가운 햇빛, 하나 둘 웃옷을 벗기 시작하고 양산으로 햇볕을 가려 보기도 하며 부지런히 걷는 순례객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1시간 만에 드디어 도착한 나바위 성지, 아이들도 신이 나는지 기뻐서 뛰고 있다.
↑ 성지에 도착하여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와 영정앞에 깊은 절을 드린 후,
먼저 점심식사부터 하였다. 500 명이 넘는 인원이라 밖에서 줄을 섰다가 자리가 나는대로 들어가 식사를 하였다. 먼 길을 걸어와 시장하던 터라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특별히 쌈에다 젓갈류를 곁들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식사 후 미사 시작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어 구역별로 십자가의 길을 하기도 하고 자유 시간을 갖기도 했는데, 잠시 둘러 본 성지의 여러 면를 사진에 담아보았다.
↑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서 바라본 성당의 정면과 해설
↑ ↓ 성당의 측면
↑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초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장약슬 여셉) 신부가 1906에 신축 공사를 시작해 1907년에 완공하였다. 설계는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하고, 목수 일은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 양식은 한옥의 전통 양식을 취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용마루 부분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벽돌조로 붙여 고딕식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 1922년 회랑 기둥 밑 부분을 석조로 개조하여 오늘까지 보존되고있다.(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18호)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다.
↑ 미사 강론 때 성지 신부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인데 중국인 기술자들은 자기들이 지은 건물에 표식을 남기는 습관이 있는데 바로 유리창문을 팔각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팔각 유리창은 중국 건축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당의 위측 채광창들을 보면 8각형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시 30분 미사가 시작되었다. 성모 동산에 차광막을 치고, 의자를 놓고 앉아 야외미사를 드렸다.
미사 집전은 본당신부님과 성지 신부님이 합동으로 하셨는데 강론은 성지의 요한 신부님께서 하셨다. 성가대, 복사, 예물 봉헌자가 다 갖추어져 교중 미사를 방불케 한 미사였다. 이 미사는 주일 미사 특전 미사로 봉헌 되었다. 미사 예물은 기차에서 미리 봉헌하였고 미사 중 헌금은 성지 개발은 위한 것이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미사를 시작하시면서 김대건 신부님께서 첫 발을 디디셨던 이 성지에 와서 당신께서 사제가 되셨을 때의 첫 마음을 되돌이켜 보면서 그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나바위 성지를 첫마음 성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바위 성당 신부님께서는 김대건 신부님 일행이 태풍을 만나 애당초 목표지점인 인천이 아닌, 단속에서 안전했던 나바위로 오시게 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고통 가운데서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자고 하셨다. 또한 성모상이 모셔진 자리는 암자가 있었던 곳인데 이 성당 부지를 매임하면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셨다.
↑ 성당 정문 방향에서 안젤라(오른쪽)와 함께 기념 사진 한 장을 찍고...
↑ '성지 개발을 위한 젓갈 바자회'에 들려 점심 식사 때 맛을 봤던 낙지젓 두 통을 구입하였다.
성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강경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한결 가벼웠다. 한 번 와 본 길인데다 햇빛도 강렬하지 않았고 바람도 선들선들 불어 주었다.
길 아래 논에서는 낟알이 탱글탱글한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농사일에 문외한인 눈으로 보기에도 풍년임을 알 수 있었다. 올 해에는 태풍이 하나도 한반도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는데 뒤늦게 24호 태풍 '다나스'가 올라온다니 제발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넘어가기를 바랄뿐이다.
길 옆에 나즈막히 피어 있는 코스모스, 구리한강시민공원에서처럼 보는 사람을 압도하지 않고 겸손하여 또 다른 아름다움과 가을의 정취를 맛보게 해 주었다.
5시 30분 경 기차가 강경역을 출발 하고, 열차 한 구석에서는구역별로 가장행렬을 준비하고 있는데, 예상치 않았던 조명효과가 창밖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장관이었던 노을을 카메라에 담는데는 실패하였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다. ↓
드디어 가장 행렬 시작...
↑ 2구역이 준비한 어우동
7구역은 각설이 행렬로 엿을 판매하며 짭짤한 수입도 올리고 1등 상을 거머쥐었다.
글래머 여인(여장 남자)의 뇌살적인 포즈
곤룡포를 입고 백성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연발 하시는 이상한 임금님. 올커니! 백성이 곧 하늘이니 부디 만백셩을 섬기는 성군이 되시옵소서.
성가대 단장의 고혹적인 몸매와 표정. 의상비는 참 저렴하게 드셨겠네요.
폭소와 박수갈채 속에서 퍼레이드가 끝나고 저녁 식사로 떡과 바나나 구운 계란이 배분되었다. 사목회에서는 족발과 맥주 음료수 등을 카트에 싣고 다니며 판매 하였다.
아침부터 잠을 설치며 떠난 순례길, 피곤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맥주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기차가 영등포를 지나고 노량진에 근접해 있을 때 창밖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이 바로 그 유명한 여의도 국제 불꽃 축제 날이었던 것이다. 기관사 님은 한강철교에서 차를 10분 정도 멈춰 불꽃놀이를 코 앞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성지순례의 대미를 장식해준 불꽃놀이, 이는 지난 석 달 동안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준비해 주신 신부님 수녀님을 비롯한 사목위원과 구역장님들과 봉사자들의 수고에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축포였다.
신문에 난 사진 한 장을 찍어 올려 본다. ↓
아래 사진 은 토평동 성당 홈피에서,,,
기차는 예정 시간인 9시보다 15분 일찍 덕소역에 도착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모두 무사히 집까지 왔다.
가을 행락철인데다 개천절이 있는 주말 연휴기간에 이처럼 편안히 오고 갈 수 있었던 것은 기차를 이용해서이기도 했지만 모든 일정을 물흐르듯 매끄럽게 진행해 주신 봉사자 분들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분들의 수고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