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강단을 지키고 있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설교자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필자가 이런 주제의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다만 체험과 느낀 것들을 중심으로 설교의 중요성을 동역자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펜을 들게 되었다.
나를 바꾼 설교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에 들은 마경일(馬慶一) 목사님(작고)의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라는 설교를 필자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시 신학교 졸업반이었는데 졸업 후 진로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은 졸업반 학생들이 공통으로 겪는 것이지만 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굴곡이 심했고 크게 실망스러운 일들이 있어서 마음이 심하게 무거웠고 어두웠다.
모교에서는 졸업식 전 날 시내의 한 교회를 빌어서 졸업생들을 위한 졸업예배를 드리는데 마 목사님의 설교는 그 졸업예배에서 들은 것이었다. 마음상태가 그랬기 때문에 처음에는 설교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설교 본문 가운데 한 구절을 딴 제목이 “내가 새벽에 깨리로다”가 아니고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새벽이 의인화(擬人化) 되어 있는 점이 흥미를 끌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억울하게 쫓기는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같이 어렵더라도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새벽을 깨우는 자세로 극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졸업 후에 어려운 일들이 계속되었지만 이 설교를 기억하며 감당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설교가 없었다면 그 시기를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딸 셋을 주셨는데 이름을 지을 때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를 한 자씩 한자로 바꾸고 돌림자와 결합시켜 아영, 욱영, 일영이라고 하였다.
북방선교를 설립목적으로 하는 방송 기구에 봉직하고 있을 때 중국이 개방정책을 취한 것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중국선교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 방송사가 중국과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관계로 필자가 일선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설교를 기억하며 중국의 영적 어둠을 깨우는 일에 열심을 냈고 지금은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북한선교에 임하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거창고에 국어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학교의 교장은 전영창(全永昌) 님이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설교자를 들라고 하면 필자는 이 분을 첫 손가락에 꼽고 있다. 전 교장님은 일본과 미국에서 여러 신학교를 거쳤지만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다. 미국 유학중에 6․25를 만나자 즉시 귀국해서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거창고를 책임 맡아 농촌교육에 헌신하느라고 목사의 길에 들어설 계기가 없었고 또 고인의 성품이 워낙 강직해서 특정교단의 계율에 매이기 싫어했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고인의 설교는 주로 학생들을 상대로 한 훈화와 학교 부설인 거고교회에서 행해졌다. 말하자면 “재야설교가”였다. 필자는 그 학교의 학생신앙지도도 거들고 있었는데 어느 해 종교개혁기념주일을 전후해서 거고교회에서 한 번은 필자가, 한 번은 전 교장이 설교를 한 일이 있었다. 필자는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전 교장은 “종교개혁은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데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는 주제로 설교하였다. 본질을 찌르는 설교였는데 필자는 허(虛)를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일의 영향으로 설교를 할 때 주변을 맴도는 설교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을 붙드는 설교를 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정말 잊히지 않는 것은 1971년 졸업식에서의 설교(훈화)이다. 당시 전 교장은 경남도교육위원회로부터 사립학교 교장임용승인 취소 처분을 받은 “해직교장”의 처지였다. 3공화국시절해직교수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해직교수들이 생기기 전에 이렇게 해직교장이 먼저 생겼다. 임용승인 취소 처분의 명목은 무자격 교사 채용 등 몇 가지였지만 실상은 학생들이 3선개헌 반대 데모를 했고 학교가 교육위원회의 지시에 고분고분 순응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졸업식을 맞이했고 고인은 전(全) 교장이 아닌 전(前) 교장의 자격으로 한 시간 넘는 설교를 하였다. “히틀러를 보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보라, 악의 세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악의 세력은 여름날 초가지붕 위에 풀과 같다!” 하면서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른바 군사독재 시절에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보통 용기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전 교장은 이 처분을 받고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이 진행 중어서 조심해야 할 처지였다. 필자는 예언자적 설교가 어떤 것인지를 이 때 전 교장을 통해 똑똑히 보았다. 학교에서는 이 설교 전문을 담은 교지(校紙)를 2,000부 발간하였다. 당시 전교생이 360명이었는데 2,000부가 순식간에 동이 나서 1,000부를 더 찍었다.
전 교장은 소송에서 이겨 복직하여 그의 “정의는 이긴다”는 설교가 진리임을 보여 주었다. 그 뒤 거창고가 참 교육을 하는 명문교로 알려지게 된 것 역시 마찬가지의 일이다.
그 분은 1975년 패혈증으로 59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그 때 학생들의 가슴에 지금도 남아 울려 퍼지고 있다. 지금 일산의 한소망교회를 담임하면서 한국교회의 중진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 류영모 목사가 그 때 학생 명이었는데 그가 전 교장의 설교를 통해서 받은 영향은 그의 저서로 오랫동안 꾸준히 보급되고 있는 「꿈대로 되는 교회」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책에서 류 목사는 “전 교장선생님의 설교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 부족한 설교를…….
작년의 일이다. 당시 섬기고 있던 목양교회의 신년축복성회에 평택제일교회 주청환 목사를 강사로 청했다(이야기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실명을 든다). 필자는 가창고 교사에 이어 1972년부터 두 해 반 동안 수원 삼일상고 교사로 있었는데 주청환 목사는 그 때 그 학교의 학생이었다. 주청환 목사는 신년축복성회의 첫 설교에서 본문을 읽고서 교인들과 필자를 번갈아 보면서 “유 목사님,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학생이던 몇 년, 몇 월, 며칠, 그 때 국어선생님이셨던 목사님이 이 말씀을 가지고 이런 제목으로 설교하셨는데 그 설교를 듣고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당시 필자는 주 목사를 담임하거나 그의 교실에 가르치러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 학교의 대학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일종의 과외학습반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그 학교는 상업학교이어서 입시를 지도할 교사가 별로 없었는데 필자는 전임지에서 국어과목 입시지도에 전력하다가 전근해 왔기 때문에 그 반에서 한 달인가 두 달인가 가르친 것이 전부였다. 간혹 학생 채플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었는데 주 목사가 말한 설교는 그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그 학교는 강당이 없어서 특별한 예배는 인근의 종로감리교회를 빌어서 채플을 드리지만 보통 때는 설교자는 방송실에서 마이크를 상대로 설교를 하고 담임교사들이 반에 들어가서 감독을 하는 방송 채플을 드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마 그런 예배였을 것이다. 그 때 주청환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한 편의 설교가, 더구나 그 부족한 설교가 이렇게 사람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것인가?” 너무 놀라서 주 목사가 말한 설교 본문과 제목을 놓쳐버린 점이 지금도 아쉽다.
재작년 6월에 분당 할렐루야교회에서 열린 NCOWEⅣ라는 선교대회에 참석했다. 집회 하나가 끝나고 참가들 사이에서 섞여서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인사를 하며 “아무개입니다. 목사님이 하신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나가 지금 사역 잘 하고 있습니다.”하고 사람들 틈에 섞여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때도 몹시 놀라며 그분이 사라진 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한편의 설교가 듣는 이의 생애를 바꾸거나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어찌 이 뿐이겠는가? 다만 필자가 겪은 일이기에 실감 있게 적을 수 있어서 여기에 소개할 뿐이다.
독일의 실천신학자 한 분이 “그 교회는 설교자의 강단을 따라가고 그 민족과 나라는 교회를 따라간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확대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설교에 대한 단상들
지면이 남은 것을 이용하여 설교에 대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 두어 가지를 적어본다.
출판계에는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양서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베스트셀러일수록 독자에게 영합하고 상업성에 충실한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설교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아니 설교의 세계에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한 것 같다. 선교 매스컴의 발달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설교를 풍성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그런 현상을 더 심하게 볼 수 있다. 교인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를 관심을 갖고 TV에서 시청하다가 인공감미료가 너무 들어간 유해한 음료를 마시는 것 같은 같은 위험을 느낀 일이 있다.
베스트셀러 같은 설교가 못되더라도(필자 같이 부족한 설교가가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인공감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생수와 같은 설교를 하고 싶다.
교인들에게 “설교는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설교자의 혀에 담아서 전하는 것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경청하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설교생활을 돌아본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내 혀에 담아주신 말씀인가?” “나는 과연 하나님이 내 혀에 말씀을 담아 주시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 하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아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요즘 설교집 발행을 준비하느라고 과거에 한 설교들을 정밀하게 살피는 시간을 갖고 있다.또 과거에 한 설교를 손질해서 다시 사용하느라고 그렇게 하기도 한다. “아, 참 정리되지 않은 설교를 했구나!” 느낄 때가 많다. 심지어는 “이것을 설교라고 했던가?” 자괴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 일을 통해 뒤에 이런 후회가 없도록 매 편의 설교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있다.
설교자의 삶이 냇물이라면 설교는 냇물 안에 있는 돌과 같다. 돌이 없으면 물은 부딪히는 것이 없이 쉽게, 잘 흘러갈 것이다. 설교에 대한 부담은 돌과 같이 설교자를 늘 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냇물에 돌이 없으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
하나님께 아름답고,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는 설교자들이 되자!
[<PREACHING>2008년 4월호 “설교자가 설교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