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프리 허그
신외숙
명동 한복판에서 Free hug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아마도 여대생이지 싶었다. 날씬하고 귀염성 있는 얼굴이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언젠가 그와 비슷한 광경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서른 살쯤 된 남자였는데 백화점 앞에서 중년의 여자가 나타나 남자를 품에 안아 주었다. 따듯한 미소를 안고서. 그리고 나서 한참 후 초로의 노인이 나타나 남자에게 뭔가 귀엣말을 나누며 안아 주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박수가 터지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절대 고독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빈 가슴을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 나타나 안아 주며 정(情)을 표시해 준 것이다. 지금도 그때처럼 어디서 몰래 카메라가 지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입안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서,
여자의 표정은 그야말로 진지했다. 여전히 두 팔로 팻말을 들고서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나타났다. 손에 커다란 풍선을 들고서.
꼬마는 풍선을 여자에게 내밀며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는 여자의 품에 담싹 안겼다. 허리를 껴안고는 행인들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카메라 프래쉬가 터지고 카메라 앵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방송 제작진이 나타났다. 오늘 방송도 성공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들어 볼에 뽀뽀를 해주고는 제작진과 함께 사라졌다. 거리는 다시 사람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로 가득해졌다. 아! 세상은 아직까지 살만한 것인가 보다. 악이 득세하고 불의가 판치는 그래서 종말이라고 떠들어대도 지구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북극곰과 물범과 그린랜드 고래가 사라지고, 일본에서는 대규모의 강진이 발생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도 여전히 지구는 돌아가고 있다. 가난한 가슴을 끌어안고 내일을 걱정하며 지구의 온난화를 견디고 있다. 명동은 언젯적부터 명동이었을까.
어느 시절, 어느 때부터 번화가의 몫을 담당했을까. 문단야사에 따르면 50년대 초반부터 문인들이 명동에 자주 모이면서 많은 일화가 생겼다고 한다. 배고픈 문인들이 명동에 있는 다방에 모여 줄담배를 피워 물면서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며 동지애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문단의 두뇌들이 모여 나라의 장래를 놓고 끊임없는 공방이 오갔을 것이다. 그런 모든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지금 그 명동에 수많은 발걸음이 오가고 있다.
밀리오레 앞길에 조각물이 보인다. 소매치기와 격투를 벌이는 경찰관과 함께 싸우다 죽은, 의인이 숨진 곳이다. 그 의인이 숨진 곳에 조각물을 만들어 행인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과연 몇 사람이나 그 동상을 보며 자신의 무딘 양심을 탓할까.
세상은 점점 의인이 사라지고 있다. 악인이 득세하고 불의가 정의를 핍박하고 거짓이 진실을 사기쳐 먹는 세상이다. 그나마 세상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는 건 법 제도가 있어 약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게중에는 그 법마저 교묘히 이용해 약자를 더 큰 수렁으로 밀어 넣는 후안무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믿는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밝아오는 법. 시대의 의인은 살아 반드시 악의 세력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것을. 명동 한복판을 지난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북을 둥둥 치며 지나는 종파(宗派)가 보인다. 무당 복장을 하고서 지나는 노인 일행도 있다. 흰 소복을 한 채 지나는 여자들도 있다. 상(喪)을 당한 유족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극배우들이다. 명동은 건물마다 쏟아내는 음악이 광풍처럼 흐르고 있다.
길거리는 노점상들이 다 차지하고 발걸음마다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텅 빈 가슴을 열어 보이며 서로 서로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돈과 문화, 젊음과 방종이 무리지어 흐르는 명동이다. 사람들은 외로운 가슴을 안고서 서로 안아 달라고 호소한다. 의류점이 사라지고 핸드폰 기기를 파는 통신점 앞이다. 다섯 살쯤 됐을까. 남자 아이가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앉아 있다.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매달려 있다. 아무데도 못 가게 아예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이거 못 놔?"
"못 놔."
"너 자꾸 그러면 맞는다."
"그래도 못 놔."
여자와 아이는 누가 더 끈질긴가 내기를 하는 것 같다. 곁을 지나는 여자가 말한다. 엄마나 아들이나 똑같군. 하긴 어디 가겠어 그 엄마에 그 아들이지.
"빨리 놔."
"못 놔."
"너 진짜 맞는다."
"그래도 못 놔."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진다. 여자는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사람들이 여자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웬만하면 아들 뜻대로 해주지.
"엄마가 안아줄 테니까 이거 놔."
"정말? 정말이지."
아이는 엄마의 다리를 감고 있던 팔을 놓더니 대뜸 품에 안겨든다. 여자는 아들을 안고서 명동을 지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사람들은 웃으며 모자(母子)를 바라본다. 싸움은 어이없게도 아들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노래를 부른다.
"뒷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개구리 됐네……."
예닐곱 살쯤 됐을까, 커다란 아이를 가슴에 안은 남자가 명동을 지난다. 아이는 키가 키고 몸집이 크다. 아빠가 안기에 많이 커버렸다. 아빠의 가슴에 안긴 아이는 노래를 부른다. 두 손으로 아빠의 가슴을 때려가며 노래를 한다. 남자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행인들을 향해 눈빛으로 말을 건넨다. 이렇게 잘 생긴 아들 본 적 있어?
딸아이를 가슴에 안고 지나는 여자, 남자도 있다. 아이는 품에서 자란다. 부모의 따스한 사랑의 공기를 마시며 안위와 배려를 먹고서,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며 자란다. 안정감과 따스한 사랑의 공기를 마시며 몸과 마음이 성장한다. 세상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컴퓨터의 가상세계가 현실로 둔갑하면서 기계문명이 사람을 조종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 삭막한 기계문명은 인간사이의 정마저 차단하는지 사람들은 저마다 외로움을 호소하며 쾌락으로 대신하는 경향마저 있다. 쾌락과 감정은 과연 어떤 함수관계로 작용하는 걸까.
감정은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논리를 따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비논리고 이해가 아닌 상호의존적인 감정관계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사랑을 이해하고 감정의 쾌락으로 해석한다. 사랑을 부요한 감정놀음 따위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냥 그때 그때 감정에 충실한 것을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젊은 치들이 버스 안이나 전철 안에서 마구 키스를 해대고 포옹을 하고 심지어 가슴속에 손을 집어놓고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적극적으로 애정공세를 펼치고 난리도 아닌 것이다. 어린 치들은 한술 더 뜬다. 중학생쯤 되었을까. 암튼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애송이들 같았다. 이 어린것들이 공부한다 핑계대고 도서관에 온 모양이다. 밥을 먹고 나더니 여자애가 휴지를 꺼내 남자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더니 아예 가슴에 폭 파묻혀 기대는 것이다.
입술이 남자애의 얼굴에 점점 다가가는데 이건 눈뜨고는 목불인견이었다. 부모가 누군지 한심했다. 저런 것을 자식이라고 뼈빠지게 돈벌어 대고 도서관 가서 착실하게 공부 잘하는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 보냈으니, 하긴 세상에 자식에게 속지 않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바탕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깔려있는 것을 누구도 부정 못 할 것이다. 저 어린 치들마저도. 여자애는 일부러 그랬는지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난 팬츠를 입고서 그 다리를 남자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남자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더니 남자의 손을 끌어 가슴 쪽으로 옮겨가는 게 아닌가. 세상 말세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도서관에서 어린것들이 흉측스럽게 애정행각을 벌이다니, 그는 자리에 일어나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야! 이것들아 하라는 공부들은 않고서."
그 다음은 모르겠다. 너무 흥분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대 소동이 벌어진 것 같은데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소리와 욕설이 오가고, 암튼 아수라장이 된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안에서 자책이 일었다. 왜 내가 남의 감정놀음에 끼어 들어 난리를 쳤단 말인가.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남의 집 아이들에게.
하긴 남녀공학인 어느 대학에서는 강의시간에도 남녀가 붙어 앉아 키스를 하고 가슴속에 손을 넣고 만지는 바람에 수업방해가 된다고 인터넷 사이트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남의 애정표현의 자유를 왜 침해하냐고 큰소리를 치더란다. 그러자 다른 학생 왈 "야! 그럴 것 같으면 너희들은 아침부터 모텔로 갈 것이지 학교는 뭐하러 오냐?" 말 되는 소리였다.
"여기는 너희 집 안방이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야."
그러자 어디선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방예의지국 좋아하시네. 현대가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사랑에 목말라한다. 자신의 마음을 보듬어 줄 상대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닌다. 사람에겐 사랑 받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그 욕구를 채움 받지 못하면 마음에 상처가 침입한다. 그래서 모두가 사랑받기 위해 혈안이 돼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잘못된 행태가 바로 불륜이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남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열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때에 따라 간이고 쓸개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다 내어 줄 용의도 있다. 상대가 부르면 불원천리도 달려간다. 그녀의 정신은 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현재의 남편에게도 충실한다. 사랑 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다.
그녀는 잠시라도 남편의 사랑과 관심이 멀어졌다 하면 미칠 듯이 괴로워한다. 그리고 속옷을 새로 산다. 헤어스타일을 바꾼다 온통 법석을 떤다. 눈물을 흘리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하소연한다.
"그이한테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 요즘 통 내 곁에 가까이 안 온다니까."
애인한테도 마찬가지다. 잠시 전화가 뜸하면 제가 먼저 안달이 난다. 연신 전화를 넣어 몸이 아프네 우울증이 생기네 하며 온갖 관심을 유도한다. 그래도 상대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아무래도 암인 것 같다며 눈물 콧물 흘리며 난리가 난다. 그녀의 마음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늘 변화무쌍하다. 자식도 안중에 없다. 언제나 사랑하는 남자에게만 집중한다. 그녀의 행태를 지켜본 친구가 말했다.
"너의 사랑의 종말은 무엇이니?"
그러다 그녀는 바로 그 친구의 남편과 바람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이 물었던 사랑의 종말의 주인공한테. 어느날인가부터 남편의 태도에 이상을 느낀 그녀는 미칠 듯이 괴로워하며 그 이유를 캐묻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뭇머뭇하던 남편이 나중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난 니가 지겨워, 늘 사랑 타령이나 외워대는 니가 견딜 수 없이 짜증이 나, 넌 남자를 지겹게 하는 여자야, 알겠어 이게 바로 그 이유야."
그 말에 여자는 발작을 일으켰다.
"내가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튿날 남자는 아내의 친구인 애인한테 말했다.
"글쎄 어제 바로 그 난리를 치렀다니까."
"그래서 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 말씀하셨어요."
"미쳤어? 그걸 말하게."
"그런데 걔는 제 주제도 모르고…… 한심한 년."
"주제를 모르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뭐가 마찬가지예요, 난 남편 이외에 남자는 당신뿐이라구요."
"그럼 당신 친구는?"
그는 아내라는 호칭 대신 당신 친구라는 표현을 했다. 그건 그녀를 만날 때만 사용하는 칭호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걔는 벌써 여러 명의 남자를 거친 상태라구요."
"뭐라구?"
남자는 분노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당신도 마찬가지이면서."
이번에는 여자가 되받아 치며 말했다.
"남자하고 여자하고 같아?"
"뭐가 다른데요?"
여자 역시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날 그들은 싸움만 티격태격하다 헤어지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아내의 부재에 놀랐다. 분명 집안 어딘가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핸드폰을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좀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에 그는 계속 핸드폰을 넣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내 이것들을 당장."
남자는 아내의 친구인 애인한테 전화를 걸었다.
"당신 우리 집사람 지금 이디 있는 줄 알지, 빨리 대."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지금 서울에 없을 텐데요."
"뭐라구?"
"지금쯤 강원도나 아님 남쪽 바닷가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텐데."
"네 이 여편네를 당장."
"그런데 왜 그렇게 흥분하시고 그러세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닐 텐데요."
여자는 일부러 화를 돋구기라도 하듯 느물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남편과 합의이혼하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당신도 그쯤 해서 마음 정리하세요ㅡ 이미 마음이 떠난 여자 붙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또."
"또 뭐?"
"제가 있잖아요 제 친구와는 이제 호적 정리를 하실 때도 된 것 같은데."
그 말에 남자는 할 말을 잊었다.
"당신도 그리 떳떳하진 않잖아요, 서로 피장파장 아닌가요?"
"애들 문제는 어떡하고."
남자는 다소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 엄마한테 데려가라고 하세요. 그게 순리 아닌가요?"
"순리라……."
그러다 남자는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럼 당신은?"
"전 이미 합의이혼하기로 결정했어요, 당신 결정만 남았어요."
일이 너무 빠르게 쉽게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집사람이 순순히 이혼해줄까."
"해줄 거예요, 자기도 원하는 바니까."
"그건 당신이 그 사람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
"만일 이혼 안 해주면 쌍벌간통죄로 고소하세요." "그런 다음에는?"
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집 나간 줄 알았던 아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또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섹스어필하다. 특히 하체가 성적 매력을 물씬 풍긴다. 남자들은 그녀의 하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둔부에서 발목까지 이어지는 S라인은 예술적이다. 그녀 역시 사랑 받고 싶어 몸부림을 한다.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잠시도 자유가 없다. 늘 외모 가꾸기에 바쁘고 교양 있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기에 지식 소양도 높다. 사람들은 늘 궁금해한다. 그녀의 남편은 얼마나 행복할까. 저런 절세가인을 아내로 두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러나 남편을 만나 보면 금새 실망한다. 그녀의 남편은 평범하다 못해 약간 못생긴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대인관계도 원활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능력도 뛰어나지 않다. 미인을 차지하기에 부족한 면마저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헌신적이리만치 잘 하는 편이다. 아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집안일도 도맡아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사랑에 목말라한다. 어릴 때 사랑받지 못하고 산 원한이 사무치기 때문이다. 바로 애정결핍증이 그 원인인 것이다.
그녀는 생부로부터 버림받았다. 생부는 그녀와 본처를 두고 떠났다. 그에겐 결혼하기 이전부터 예정된 사랑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예정된 사랑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홧김에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그러니 그 결혼 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다, 생부는 허구헌날 놓쳐버린 옛사랑을 두고 눈물 흘리며 괴로워했다. 처자식은 아예 뒷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잃었던 옛사랑이 찾아왔다. 기적처럼.
생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옛사랑을 따라 나섰다. 그때 생모는 이미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뱃속에 든 생명만 아니었다면 그 년놈이 보는 앞에서 혀 깨물고 죽고 말았을 거라는 푸념을 그녀는 어린 시절 내내 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홧병 때문에 나이 오십도 되기 전에 죽었다.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에 심장 발작을 일흐킨 적도 여러번이었다.
"쳐 죽일놈,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결혼을 말았어야지, 왜 남의 멀쩡한 가슴에 불을 지펴? 그 년놈들 죽어도 옳게 못 죽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이 오십에 이르도록 피부와 자태가 고왔다. 선한 눈매와 균형 잡힌 몸매와 또 그에 걸맞는 학식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로선 교양과 미모를 겸비한 인테리에 속했다. 그러나 결혼 한번 잘못한 죄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어머니는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재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니 남자 자체를 불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 아무리 잘난 놈도 필요 없다. 또 속에 진짜 좋아하는 년 따로 숨겨주고 뒤통수치고 달아날 게 뻔하다."
생부로 인한 분노가 모든 남자들에게 확산된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무관심과 생부에 대한 분노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빼어난 외모를 그대로 빼어 박은 그녀는 어딜 가나 남자가 따랐다. 그러나 그녀는 생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사랑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순교자처럼 그는 사랑에 너무 진지했고 그녀의 마음에 합당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당신 하나면 된다."
남자의 결혼 조건이었다. 그녀와 남편은 서로 서로 사랑 받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고 몸매 관리는 꼭 했다. 집안은 엉망이어도 외모 가꾸는 데는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직장생활은 두 번째였다. 늘 아내에게 최선을 다했다. 퇴근해 돌아오면 집안청소부터 했고 음식도 잘 만들어 아내에게 대접했다. 아내의 옷도 손수 다림질했고 태어날 아기를 위해 태교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나서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당신한테 최선을 다하니 당신도 나에게 관심 갖고 사랑해 달라." 어젯밤 만취한 그는 아침부터 몹시 기분이 나빴다. 회사에 들러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는 자동차를 몰고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그가 속한 회사는 아버지가 오너로 있기 때문에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굵직한 일은 큰형이 처리하고 그는 회사에서 진행되는 큰 수주 건수를 맡아 했다.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아야 그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적임자가 바로 그였다. 왜냐하면 그의 외모는 영화배우나 웬만한 모델 못지 않게 뛰어 났기 때문이다. 그의 속사정을 듣고 나면 아! 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그의 생모가 영화배우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본처 소생이 아닌 혼외 정사로 낳은 서자 출신이었다. 그의 성장과정이 어떠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가족은 그에게 결코 오너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겉으로는 온화한 척 친절을 베풀어도 상속문제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댔다. 그때마다 그는 열외의 대상이었다.
널랑은 아예 넘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형제간의 피 터지는 재산 싸움에 말려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후계자 수업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마음 편한 걸 삶의 제일순위로 삼았기 때문에 직장에서의 승진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형제들은 그의 그런 성격을 철저히 이용했다. 외모가 뛰어난 그를 중요한 수주 계약이나 체결 때만 간판 스타로 이용했다. 그걸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시끄러운 걸 체질상 싫어하는 그는 모든 걸 알고도 넘어갔다. 친부의 예리함과 생모의 섬세함을 닮은 그는 어릴 때부터 늘 혼자 지냈다. 외로움은 그의 친구이자 천적이었다. 그는 나이 삼십이 넘어서도 늘 병적인 외로움을 앓았다. 그와 함께 독한 이기심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이기심이 강할수록 사랑 받고 싶은 욕구도 강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때묻지 않은 건강한 사랑. 손익을 따지지 않는 순수한 사랑, 그런 사랑에 목매달고 싶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사랑하길 두려워했다. 상처받는데 넌더리났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삼십이 넘자 가족들은 그룹 차원에서 결혼을 서둘렀다. 이른바 정략 결혼이었다.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경쟁사와 결혼을 통한 인맥을 맺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자는 일종의 계약 같은 것이었다.
그는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맞선 자리에 끌려갔다. 처음에는 그 의도를 몰랐다. 양가 집안에서 골프 회동이 있는데 후계자들도 참석한다고 했다. 그는 그런 자리를 몹시 싫어했지만 친부의 강력한 권고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친부가 부성애가 가득 담긴 애절한 눈빛으로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눈빛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었다.
"중요한 자리다, 애비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번만큼은 따라다오."
그때까지만 해도 맞선자리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냥 중요한 모임이라는 것만 인지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골프가 끝나고 나서였다. 양가 소개가 있는데 빼어난 미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야말로 S라인에 얼굴이 막 하강한 천사 같았다. 다소곳한 태도에 말씨도 부드러워 TV사극에 나오는 왕비 같았다. 자연스럽게 양가 집안의 혼사 문제가 나왔다.
"따님 인물이 워낙 출중하십니다."
그의 친부가 일부러 덕담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 집안에 영화 감독하는 조카 아이가 있는데 저 애를 영화배우 시키라고 하도 조르는 바람에 거절하느라 애먹었습니다."
가끔씩 TV에 얼굴을 잘 내미는 그는 전자제품을 대량으로 수출한다는 모 재벌 총수임이 틀림없었다. 총수는 그를 향해 미소 진 얼굴로 말했다.
"그쪽도 우리애에 비해 결코 만만치 않군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역시, 영화배우 모델 못지 않게 잘생겼습니다."
"그런가요, 하긴 쟤 인물은 즈이 엄마를 닮았습니다."
"아! 아!"
그제서야 생각난 듯 총수는 무릎을 치며 하하대고 웃었다. 그의 생모가 영화배우 출신이란 걸 그제서야 눈치 챈 것이다.
"혼사란 모름지기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게야, 둘이 오늘 서로 대화도 나눠보고 잘 해보려므나."
그들은 둘을 남겨놓고 퇴장해버렸다. 한쌍의 원앙새가 따로 없었다. 둘이서 거리를 나서면 영화 촬영 온 줄 알고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둘은 서로 서로 만족했다. 양가 집안은 물론 성격이나 외모 또한 대만족이었다. 그야말로 차이 없는 균등이었다. 자연스럽게 혼사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서자 저쪽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이유는 뻔했다. 재산 상속에 있어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시 신중히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본인들의 의사가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여자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동안 교제하면서 신중하게 그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만큼 실리 계산에 밝은 사람들도 없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의 외모에 끌려 교제를 계속했는데 재산 문제가 불거지자 집안의 의사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후일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의 집안보다 더 월등한 재산가에게 맞선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여간 타격을 입은 게 아니었다. 그녀를 백퍼센트 신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지도 않았다. 요즘 여자답지 않게 조신하고 이해심도 많고 무엇보다 예의가 바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 씀씀이가 있었다. 굴곡 없이 자란 탓인지 심성도 고왔다. 그러나 그건 그의 순전한 착각이었다. 일단 사랑이라는 안경을 쓰고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여자와는 헤어지자는 인사도 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여자 쪽에서 서둘러 없던 일로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삼 개월 뒤 그녀는 미국 유학을 끝마치고 귀국한 또다른 재벌 2세와 웨딩마치를 올렸다. 삼 개월이라면 정말 눈 깜짝할만큼 빠른 시일이었다. 그는 아직도 이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미래를 향해 힘찬 발돋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에게 있어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세상 못 믿을 게 여자 마음이라는 흔한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그 일 이후 그는 더욱 어영부영 살았다. 집안 일에는 더욱 신경을 안 썼다. 여행과 방종으로 일관했다. 그건 그의 형제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초연한 척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내부적으로 갈급한 욕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체가 매우 모호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그 욕구에 시달렸다.
그는 어느날 거리를 지나다 팻말을 들고 서있는 여자를 보았다.
Free hug
아!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거다. 그건 어찌 보면 전적인 배려라는 뜻도 담고 있었다. 아니 무조건적인 신뢰라는 뜻도 숨어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무조건 나를 안아 달라. 순수한 박애적인 의미도 숨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빙글 빙글 웃기만 할 뿐 선뜻 다가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용감하게 뛰어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여자를 안았다. 아악! 여자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어느날 그녀는 보았다. 자신의 마음 안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마음 속에 들리는 울음의 정체를. 그 슬픔의 근저를. 그건 바로 수치심이었다. 그 수치심과 함께 열등감이 사랑 받지 못했다는 소외감과 함께 묶여 있었다. 그녀의 생각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혼자라는 것이었다. 그건 아무와도 화합할 줄 모르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공포였다. 그 허기진 영혼 속에 비수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이었다.
그녀는 항상 마음이 조급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조금만 지체되면 당장 욕부터 나왔다. 그날도 바로 그런 날이었을 게다. 지갑 속에서 동전이 짤랑거렸다. 벌써 십 분이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버스가 오지 않았다. 다시 오분이 지났다. 그녀는 속에서 부아가 났다.
다른 버스는 잘 오는데 오늘따라 잘 오지를 않는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팔이 아프고 다리가 저렸다. 이러다 버스 환승 못하는 거 아냐? 신호등마다 빨간불이 켜진 모양이다. 차량 정체 현상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자 그냥 차로를 무단횡단 하는 사람마저 생겨났다.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그때였다. 그녀 눈앞을 휙 스쳐 지나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버스였다. 버스는 눈 깜짝할 사이 그녀 앞을 지나 사거리로 달려갔다.
"아이고 저놈의 버스."
당장 입에서 욕부터 나왔다. 눈이 빠지게 기다렸더니 그냥 가버린 것이다. 속에서 불길 같은 것이 치솟았다. 저 놈의 버스가 미쳤나 왜 그냥 가? 아이구 속 터져.
그녀는 두 달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 상태였다. 이번에 그만 둔 이유는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 때문이었다. 신입사원인 미스현은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로 인물이 빼어났다. 입사하자마자 당장 남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평소에도 여직원들에게 불친절하고 매너 없기로 소문난 총무과장도 그녀에게만큼은 온갖 친절을 다 베풀었다.
심지어 자판기에서 손수 커피도 빼다 줄 정도였다. 총각 사원들은 모두 그녀에게 목을 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인에다 뒷 배경도 좋았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진의 멤버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일등 신붓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남자 직원들이 미스 현과 그녀 둘을 놓고 입방아를 찧어대는 것이었다.
"저 새로 들어온 미스 현하고 저 노처녀 미스 성 말야, 너무 대조된다고 생각지 않아?"
그것은 곧 미인인 미스 현에 비해 그녀의 외모가 훨씬 뒤떨어진다는 일종의 야유였다. 얼굴과 몸매를 비교해 가며 입방아를 찧어대는 축은 주로 총각 사원이었다. 또 잠자리의 비유를 들어가며 농담거리로 삼는 축은 유부남 사원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무슨 가십거리라도 만난 듯 그녀가 듣건 말건 입에 올렸다. 지금이 어떤 시댄가. 70년대 80년대 군사정권 시대도 아닌데, 어디서 여자 몸매를 거론해 가며 성적농담을 즐기는가. 그녀는 분노와 함께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망할 새끼들아, 집구석에 가서 니 여편네랑 여동생들한테나 말해라."
그 이후에 쏟아져 나온 말들은 그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희한한 것들이었다. 한참 욕설을 퍼붓고 나자 그녀 자신도 어리둥절했다. 듣고 있던 직원들도 어이가 없는지 말했다.
"그러게 어서 결혼을 하라니까, 그럼 이런 저런 소리 안 듣고 편하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갖고 살면 되잖아."
옆자리의 민대리가 말했다.
"그러게 말야, 성(聖)처녀 결혼할 날짜는 언제일지 궁금하단 말야."
유부남인 부장이 그녀 곁을 지나며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 저나 남자들이 눈이 삐었지 저런 처녀를 그냥 곱게 놔두고 말야."
그 의미를 파악할 사이도 없이 그녀 입에서 또다시 폭포수 같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집기와 서류 뭉치가 부장 앞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그와 동시에 직원들은 미쳐 날뛰는 야수를 보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러니 여적 싱글이지"
키 155센티에 허리 28인치 몸무게 50킬로가 그녀의 몸매였다. 아무리 허리를 졸라매도 27인치가 안 됐다. 음식조절을 하면 26인치가 되겠지만 그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오직 식탐으로 해결했다. 폭식이 그녀의 식습관이었다. 얼굴은 그다지 밉상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선한 인상도 아니었다. 그날 사건 이후로 그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난리를 치고 다시 직장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만 참았어야 하는데,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 식으로 일자리를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려보냈다. 인덕이 없으려니까.
그곳을 그만 두고 나니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백수 노릇도 한두 번이지 그녀는 날마다 자신과의 결투를 벌였다. 사실 그녀는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체질이었다. 비교적 활동적인 체질인데 대인관계에 매번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항상 폭풍전야와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이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발걸음을 올려놓자마자 그녀는 버스카드 판독기를 읽었다. 환승입니다.
천만다행이었다. 마침 자리가 있어 앉았다. 앉고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더면 욕을 하고 난리 치는 게 아니었는데. 스스로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늘 조급한 자신에게 화가 나고 그로 인해 끝도 없이 후회감에 시달렸다. Free hug 사실 그 단어는 어찌 보면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명동에서의 사건 이후 그는 심각한 병적 외로움을 앓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뒤바뀌면서 감정이 급물살을 탔다. 기쁨과 슬픔, 안정과 번민이 수시로 그의 가슴을 요동쳤다. 한 순간은 기쁨과 환희로 극한 행복감에 취하는가 하면 얼마 안 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불안이 파도처럼 몰려드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파도타기를 하면서 그는 심각한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그 갈급증이라니…….
절해고도에 갇혀, 그는 숨 쉴 힘조차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군중 속의 외로움? 그것과는 또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는 가끔씩 자리에 누워 병을 앓았다. 열이 오르고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증상이 한동안 이어졌다. 병원에 가 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 했다. 의사의 말로는 심인성 증상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가 말했다.
"아무래도 조울증 초기 증세 같다."
그러면서 친구는 종교를 가질 것을 권유했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야 해, 네 마음을 신께 의탁하도록 해라."
뜬금 없는 말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나보고 마인드 콘드롤을 하라고 해라."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니가 너무 불안해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친구는 이제 정신과 병원을 개업한 지 일 년 되는 신출내기 의사 였다.
"요즘 우울증 환자가 속출하는 시대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했다. 마음 관리를 잘해라."
"나 좀 한번 안아 주고 가라."
그는 돌아서는 친구를 향해 말했다.
"뭐라구?"
친구가 눈을 치뜨며 말했다.
"나 한번만 안아주고 가라구."
그의 절박한 눈빛을 대하자 친구는 결심한 듯 다가오더니 두 팔로 힘껏 안아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추구할 게 있다면 평안이라고 하더라. 네 마음을 신께 맡기고 자유해라."
친구는 그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그는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여의도 강가로 갔다. 마포대교 건너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젠장 마음을 어떻게 맡기라는 거야.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는 받지 않겠지만 행복은 없는 거랍니다."
언젠가 들은 말이 생각났다. 누구였더라. 그는 기억 체계를 동원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강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다. 쏟아지는 도심의 불빛에도 강은 여전히 어두웠다. 고수부지 한 끝에 주차장이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아마도 밤차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같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오리배가 보였다. 장난감같이 오리배는 밤에 묶여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단과 매점이 눈에 들어 왔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매점으로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왔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그 음률이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주변이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빛줄기가 어둠을 조각내면서 음률이 점점 강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허기지고 갈급한 영혼에 만족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치고 상한 영혼들이 그 빛줄기 가운데로 몰려들고 있었다. 강물 속에 뛰어들기 위해 신발을 벗었던 청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숙자로 보이는 노인과 걸인이나 다름없는 중년 여인도 눈물을 떨구며 강가에서 이리로 오고 있었다. 그들 머리와 가슴 위로 커다란 십자가 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밝아오듯이 그들 영혼 위로 자유가 임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가슴을 포근히 감싸는 기운이 있었다. 안정된 기쁨과 영적 충만이었다. 그때 그는 언 듯 한 단어를 떠올렸다. 프리 허그.
그건 인간을 향한 신의 의지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한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얼마 전, 이혼 수속을 끝내고 인생 막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생각했던 위자료는커녕 입고 있던 옷만 간신히 걸친 채 집 밖으로 끌려나갔다. 남편과 자식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그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왕따 신세가 되었다. 그녀에겐 모두가 적대자로 변한 셈이다. 그녀는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그녀 뒤로 방금 전 자살을 시도하려 했던 청년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강가에서 마지막을 밤을 보내려 했던 사람들도 하나씩 따라 올라갔다. 그 행렬은 마치 무슨 행사를 치르는 것처럼 길게 이어졌다. 그들 머리 위로 또다시 강렬한 십자가 불빛이 쏟아졌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합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 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쑥 앞다리가 쑤욱 팔딱 팔딱 개구리 됐네」
그 옆에는 언젠가 명동에서 Free hug 간판을 들고 서있던 여자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강한 햇살을 받으며 강하고 안전한 절대자의 품속에 안기고 있었다. 변치 않는 절대자의 품속에. 그들 귓가에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프리 허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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