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운여정(5)
- 草秋의 영원한 우정과 예술을 따라서(3) - -세한도의 탄생과 초추의 茶사랑-
우리에게 여행이라는 두 글자는 언제부터인가 친밀한 용어가 되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를 안고 길 떠나는 나그네에게는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고 풍류가 넘치기도 한다. 먼길에서 돌아 온 여행객들은 한결 성숙해짐을, 또한 새롭고 정겨운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학문을 이끈 두 정신적 지도자인 이 퇴계와 이 율곡 선생도 국내 각지의 산천 경계를 다녀 보고 여러 곳의 숨은 훌륭한 인물을 찾아 그들과 교유하면서 시를 읊기도 하고 기행문도 쓰면서 자기 학문과 사상의 질을 높일 수 있었다. 우리는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그 시대의 배경과 풍물, 그들의 문학과 예술과 사상을 느낄 수 있었고, 방랑시인 김삿갓이 전국에 남겨 놓은 해학시를 통하여 인생의 고뇌와 인간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의 유명한 두 시인 李 太白과 杜 甫의 시를 통하여 감동적인 旅情을 느끼곤 한다. 특히, 바람과 같이 태어나 바람과 같이 중국 각지를 주유하고 또한 바람과 같이 죽어간 이 태백을 우리는 최고의 풍류시인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詩仙, 酒仙이라고 부를 만큼 그가 살아 있을 때나 그의 死後에 있어서도 그처럼 찬란한 명성을 남긴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 (1747∼1832)는 37세 때인 1786년 9월 3일 독일 땅을 떠난 뒤 1년 9개월 동안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였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하여 눈과 마음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마음껏 호흡하였다. 이 여행은 괴테 자신의 다양한 예술적 체험과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낡은 관습의 틀을 벗고 진정한 예술가로 변모해 가는 내적 성숙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문화 발전 과정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동서의 훌륭한 선현(先賢)들은 이러한 여정을 통하여 자기실현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그 옛날 죄인으로 취급받은 분들이 집과 가족을 떠나 유배지에서 고난과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과 예술을 정진하여 좋은 작품을 남겼다.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다산 정 약용(1761-1836)은 유배기간(1801-1818) 초당에 묻혀 독서와 명상을 하고,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고, 호남 학자등 여러 실학자와 백련사의 혜장 스님, 일지암 초의 선사와의 인간적·사상적 대화를 통하여 실학사상을 완성하였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전반에 걸친 100여권의 훌륭한 책을 후세에 남겼다.
영조의 부마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자인 추사 김 정희(1786-1856)도 8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동안 학문과 시·서·화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위대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비록 귀양살이를 하더라도 집을 떠난 생활이기에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전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대학졸업을 앞둔 1965년 7월 어느 날 나는 친구 10여명과 함께 제주도 한라산을 등반한 적이 있었다. 목포에서 떠나는 정기 여객선은 제주까지 8시간정도 걸린다. 3일 후 태풍이 제주도에 상륙한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안심하면서 제주 행 여객선 창성호에 몸을 실었다. 목포를 떠나 해남 앞 바다를 거처 완도에 일시 정박하고 배는 제주로 향하였다. 잔잔한 바다에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며 거센 파도가 뱃전을 크게 때리기 시작한다. 배는 요동치고 사람들은 선실에서 배멀미를 견디면서 모두들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선실 한 가운데 풍채 좋은 노인 한 분이 곱게 한복을 입은 수명의 젊은 여인들의 수발을 받으며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배가 점점 강한 바람과 거센 물결에 선실 내에서도 일부 승객들은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 때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좌중을 이끌면서 승객들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승객 모두가 함께 합창할 수 있는 노래를 우리는 힘차게 불렀다. 그 노래 소리는 파도와 바람 소리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제주에 무사히 도착한 후 우리들은 근엄한 그 노인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 노인의 집은 한라산 입구 관음사 근처 삼천당에 있었다. 제주도는 물이 귀하나 이 곳은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이 분은 민속종교의 교주인 것 같았으며, 그의 시중을 들던 젊은 여인들은 교인이었던 것이다.
추사가 초의 선사, 허 소치, 이상적의 배웅을 받으며 제주도로 향하던 그 날도 갑자기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일어 키와 돛대가 제멋대로 놀아나서 배의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추사는 그의 품에서 쇠(지남철)를 꺼내어 방향을 맞춘 다음 도사공에게 키의 방향을 지시하고 의연하게 뱃머리에 앉아서 시를 지어 높게 읊으니 그의 소리는 바람과 파도에 지지 않았다고 한다. 배는 날 듯이 파도 위를 치달았다. 모두들 신기하게 느꼈다. 아침에 해남 관머리를 출항한 배가 제주도에 닿은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닷세나 때로는 열흘 정도 걸리는 제주도를 한나절만에 도착하니 제주도 사람은 날아서 건너 왔다고 크게 놀라워하였다.(완당 선생 전집에서).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제주도에 도착한 추사는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마을 적거지로 찾아가서 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대부분 돌길인 이 곳을 힘들게 찾아간 추사는 문득 자신의 처지도 잊고 겨울에도 푸르러 시들지 않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 푸른 바다 등 제주도의 남국 정취에 취하였음은 비록 귀양길에도 추사의 예술가다운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완당 金公小傳)
한라산 등반을 끝낸 우리 일행은 서귀포에서 서쪽 일주도로를 따라 제주도의 유명한 관광지와 선현의 유적지를 찾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중문의 천지연 폭포를 들렀을 때에는 젊은 비바리들이 아름다운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부끄러움 없이 목욕하는 신비로운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과연 石多, 風多와 함께 女多인 三多島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 30여 년 전의 한 모습이다. 그리고 천제연 폭포를 거쳐 남제주군 안덕면 해안 가에 있는 산방 굴사를 찾아갔다. 산방 굴사는 산방산의 해안 가 절벽에 있는 길이 10여m, 너비 50m, 높이 5m 쯤 되는 굴로서 천정에서 수정 같은 맑은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굴 안에 고이기 때문에 옛적부터 수도승들이 불상을 모셔놓고 수도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는 이 굴 허리를 감고 있는 구름을 타고 하늘나라에 인간의 소원을 기원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굴 앞엔 백여 년 이상이 된 듯한 거송(巨松)이 수문장같이 버티었고, 그 푸른 솔가지 사이로 용두암의 곱다란 잔디능선에 이어진 수평선, 그 잔잔한 바다 위에 멀리 보이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마라도와 가파도의 정경은 예술품 같은 경치이다. 이 굴사에서 보는 일모낙조(日暮落照)는 이곳 경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효종 6년(1653)에 네델란드 사람 하멜 일행이 표류하여 상륙한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추사는 이와 같은 남국의 절경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승화시킬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비포장된 길을 버스를 타고, 또한 돌길을 걸으면서 추사가 유배 생활을 했던 집을 찾았으나 그 옛집은 흔적도 없고 그 자리는 텃밭이 되어 조와 옥수수 등 가을 곡식이 자라고 있었다. 다만 제주도의 밭고랑과 산야에 수선화와 난꽃 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특히 추사는 수선화를 마치 백설의 대지 같다고 표현하여 자기 신세에 비유한 적이 있어 집터 주위에 있는 수선화는 더욱 쓸쓸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6백여 평의 대지 위에 초가 4동, 연자방아 1동과 전시관 등 추사의 적거지를 새롭게 단장하였다.
(제주 대정읍 추사가 머물렀던 유배지) 이 초가집은 적거지 근처에 있는 150여 년 전의 고가(古家)를 구해 다 복원하였으며 추사가 적거 생활 때 있었던 연자방아며 제주도 특유의 정문인 굵은 통나무 3개를 걸쳐놓은 정술랑과 정술랑을 받치는 돌 등 세심한 배려가 눈에 띈다. 전시관에는 추사작품 탁본 65점과 그 당시 사용했던 민구류 140여 점을 전시하고 있어 여기를 찾는 방문객에게 그의 예술과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종척권문(宗戚權門)에서 금지옥엽으로 태어나서 일찌기 학문에 진력한 추사는 타고난 천품과 아름다운 자태로 항상 주변의 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모으고 살아와서 세상의 어려움을 몸소 겪어보지 않았던 터에 안동 김씨와의 정치적 마찰로 갖은 수모와 고통을 받아 심한 충격을 받는다. 고결한 성품으로 평생 불의와 부정을 용납하지 않은 그가 안동 김씨의 독수에 걸려 옥사(獄事)를 겪으니, 그 참담한 심경이 어떠했을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의 정황을 추사는 '고문을 당할 때 선인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은 나무에 궤여 회초리를 맞는 욕을 당하는 고통인데 이 두 가지를 40여일 동안 참혹하게 당한 일을 고금(古今)의 어느 곳엔들 어찌 있었겠습니까?'라고 그의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로 알리고 있다.
그러나 고금의 역사에 정통하고 생사의 이치에 통달한 추사로서 이만한 곤욕쯤으로 적거생활에 흐트러질리는 만무하였다. 그는 귀양살이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을 각오하였다. 굳센 신념을 붓끝에 올려 불굴의 의지를 태연히 화폭에 담는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편이 닿는 대로 서책을 가져오게 하여 학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이 곳의 총명한 자제들을 모아 훈도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김구오, 강도순 등 이 곳 제자들을 기르친 덕분인지 제주도에 있는 이들의 후손들 손으로 훌륭한 적거지를 복원한 것은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든다.
그는 서울 집에 소장된 각종 장서와 중국으로부터 새로 부쳐 보내 오는 신간서적들을 받아 볼 수 있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새로운 책들은 권돈인과 조인영의 비호아래 문인 이상적(1804-1865)이 역관으로 연경을 내왕하며 심부름해 옴으로써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드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원의 종장(宗匠)답게 서울에서는 국왕 현종을 위시하여 여러 상공들이 추사의 작품을 끊임없이 요구해 오고 권돈인을 비롯한 친지나 제자들이 명품의 감정과 작품의 품명을 자문하는 인편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초의 선사의 우정어린 방문과 스승을 뒷바라지하고 그 밑에서 그림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허소치는 세 번이나 이곳을 찾아오니 그의 유배생활은 실상 적막할 틈도 없었다한다. 오히려 한양에서 속사(俗事)에 급급하느라 미쳐 보거나 읽지 못한 많은 책들을 차분히 읽게되고, 익히지 못하였던 서화의 여러 체(體)를 터득함으로써 그의 학문과 예술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얼마나 독서에 열중하였던가는 막내아우 상희(相喜)에게 보내줄 것을 독촉한 편지에 수록된 목록을 보면 짐작이 가능한데 국내와 중국의 시문, 율법, 주역 등의 각종 책들과 역대 서예의 이론과 실기를 집대성한 예술총서들이니, 추사가 학문과 예술수련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세한도(歲寒圖)의 탄생
추사의 많은 제자 중 우선 (藕船) 이상적 (李尙適)이 있다. 문채 풍류가 뛰어났으며 박학다재하고 詩·書에 능하였다. 대대로 역관의 가문에 태어나 그가 연경 나들이를 열 두 번 하는 동안 중국의 명사·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그들에게 추사의 근황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이 곳에서 새로운 책들과 귀한 물건을 갖고 와 추사에게 이를 보내어 스승의 무료를 위로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학문의 깊이를 더 빛내 주었다. 이 제자에게 추사는 크게 감명을 받고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추사의 뇌리에는 번개처럼 논어의 한 구절이 스쳐갔다. 그는 필현을 당겨 먹을 갈고 장지를 펴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장지 위에 밑둥이 부실한 노송 두 그릇을 그리고(秋), 한녁으로는 또 두 그루의 젊은 잣나무를 쳤다 (史). 노송 아래는 야트막한 한 채의 한옥을 그려 넣었다. 그림이 완성되자 전예체로 "세한도 (歲寒圖). 우선시상(藕船是賞)' 이라고 썼으며 완당(阮當)을 낙관하였다. 그리고는 그림 한 옆으로는 단정한 해서체로 제문을 써 내려갔다.
"지난해에 그대가 계미곡(桂未谷)의 <만학집>과 운자거( 子居)의 <대운산방문집>을 보내주었고 올해에 또 하경우(賀耕藕)의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주니,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하겠다 ……. 또 세상 사람들은 도도하게 오직 권세와 이익에만 쫓는 것이 예사인데 그대는 어렵사리 구한 책을 세도가에게 주지 않고, 도리어 절해고도 유배지에 있는 초체하고 마른 나에게 보내주니, 세간의 권세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마천의 말대로 '권세와 이익으로 얽힌 자는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진다' 고 하지 않았던가. 공자(孔子)는 '추운 겨울(歲寒)을 당한 후에야 소나무(松)와 잣나무(栢)가 다른 나무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하였으니, 松栢은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세한 이전에도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송백인 것이다. 송백에는 변함이 없으나 공자는 특히 세한 이후의 송백을 칭찬하였다. 이제 그대와 나와는 귀양살이 전이나 후나 더하고 덜 하고 가 없는 사이이다. 그러나 그대는 나의 귀양살이에도 불구하고 송백과 같은 변함없는 성의를 보였도다 ……."
이 세한도는 인편으로 한양의 이상적에게 전해 졌다. 이상적은 그저 은사로부터 정성어린 선물을 받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은 그 해 1844년 (헌종 10년) 10월에 동지사 이정응(李晸應)을 수행하여 북경에 갔다. 그는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청나라의 유명한 문인·학자들에게 보이고 詩文을 청하고 싶었다. 중국의 서화가·묵객 명류 들 70여명이 모인 연회장에서 이상적은 추사의 근황을 말씀드리고 이 세한도를 펴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림으로 쏠렸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천의 무봉한 선비가 철학적으로 스스로 승화시킨, 조선은 물론 중원의 고금을 통하여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대담한 선과 추상으로 단숨에 팽개치듯 그려진 문인화의 극치라고 표현하였다. 그림·글·글씨가 천하일품이려니와 더욱 뜻깊은 것은 완당 선생과 우선 선생의 고매한 인간관계라고 평하면서 그림의 말미에 열 여섯 명의 중국학자들이 발문을 썼다. 이상적은 그 세한도와 발문을 잘 가지고 와서 다시 제주의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자신의 그림에 열 여섯 명의 명사들이 쓴 발문을 보고 읽고 얼마나 감회가 깊었는가를 독자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자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나 그 작품이 제작된 1844년부터 지금까지 150년 동안 매우 기구한 이력을 겪었다. 우리 나라 서예계의 거봉이던 소전(素 ) 손재형은 1943년 10월 당시로서는 매우 큰 3천 엔을 갖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세한도를 보관하고 있는 일본학자 후지쓰까(藤塚) 박사 집으로 9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을 드리면서 세한도를 자기에게 양도할 것을 간청하였다. 미군의 공습이 점점 심해지자 후지쓰까 박사는 폭격으로 귀중한 세한도가 파손될 갓을 염려하던 차 손재형의 세한도 사랑에 감복하고 세한도를 원래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건 없이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세한도에는 손재형씨의 공적을 치하하는 오세창과 정인보 선생의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손재형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한 자금마련을 위하여 타인에게 양도하였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다시금 생각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추사가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가 한양과 중국의 연경을 돌고 돌아 다시 그의 적소에 되돌아온 후 두 달이 지났을 때, 일지암의 초의가 그를 찾아 왔다. 그가 가지고 온 차를 끓여 계속해서 차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추사와 초의의 우정은 차로 말미암아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추사는 차가 떨어지면 편지를 써서 차를 보내올 것을 독촉하니 초의는 그를 위하여 매년 곡우 때에 차를 만들어 허소치 편으로 때로는 인편으로 계속 공급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초의가 제주에 석 달을 머무르면서 그들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추사의 유배 중 허소치는 그에게 그림을 계속 배웠을 뿐만 아니라 추사도 해남 우수영의 신관호 대장에게 소치를 소개함으로써 그는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영광을 갖게된다. 소치는 기회 있는데로 헌종에게 추사의 근황을 들려주면서 간접적으로 구명운동을 하였다. 1828년 (헌종14년) 12월 그는 귀양살이에서 방면되었다.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은 英祖의 玄孫이 되고 추사는 영조의 外玄孫이 되므로 따지고 보면 그들은 8촌간이지만 추사가 연장자였다. 평소 대망을 꿈꾸고 있는 석파는 추사를 남달리 존경하였으며 허소치와 함께 그에게서 난치기 등의 그림을 배우기도 하였다. 해마다 추사의 배소에 하례편지를 보낼 정도로 석파는 추사를 항상 염려하였다. 귀양이 풀린 것을 안 석파는 이 기쁜 소식을 급히 인편으로 추사에게 알렸다. 석파의 추사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으며 대원군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추사가 살아 있었다면 추사는 중요한 개혁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온 이후 안동 김씨들이 감행하는 엄청난 비리를 목도하고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한다.
추사의 난화
(추사 제자 흥선 대원군의 난화) 추사는 일체 그들을 자극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광주 퇴촌에 있는 지우 권돈인 별장인 옥적산방에서 보내면서 「계첩고」를 짓고 작품에만 몰두하였다. 이때 임금은 추사를 영의정에 등용시킬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세도를 쥐고 있던 안동 김씨 쪽에서 이를 막기 위하여 권돈인과 두 동생과 함께 추사는 제주에서 돌아온 지 3년만에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년 만에 귀양이 풀린 추사는 세상이 싫었던지 과천에 있는 친자식 상우가 살고 있는 과지초당과 강남 봉은사를 내왕하면서 서예를 몰두하여 후학을 지도하는 한가로운 생활을 보낸다. 〈허소치의 몽연록〉
특히 추사는 봉은사에서 묵향 그윽한 방을 차지하고 예도에 몰입하고 한편 발우 공양과 참회를 행하는 등 불교생활에도 열중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봉은사의 판전(板殿)에 대한 현판을 써주고 나서(1856년9월) 그 해 철종 7년 10월 10일에 아무런 병 없이 71세로 서거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말 거인이 간 자리인 과지 초당은 세월의 무상함과 같이 현재는 비닐하우스만 덩그렇게 남아있을 뿐이다. 추사는 부귀영화도 한낱 헛된 꿈이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의미가 있는 대련(對聯) 글씨와 시귀(詩句)를 남겼는데 예산의 추사고택의 집 기둥에서 볼 수 있다. 『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 』
대팽두부과강채 (大烹豆腐瓜薑菜 )
고회부처아녀손 (高會夫妻兒女孫)
완당 김 정희와 초의선사는 결코 신비스런 인간이 아니다. 두 사람은 40여 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누다가 떠났지만 그들의 삶의 테두리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한편은 명문호족의 후예인데 다른 한편은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었고, 추사는 빼어난 유림인데 반하여 초의는 독실한 불제자였으며, 한쪽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도가의 와중에 있었고 한쪽은 산중에 첩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두 사람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이들이 그토록 친교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동갑(1786)내기 라는 것이요 둘째는 천성이 지극히 순수했다는 것이요, 셋째는 종교와 신분계급을 초탈했다는 것이요, 넷째는 예술의 본질에 투철했다는 것이요, 다섯째는 茶道의 진수를 체득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두 사람의 교유는 너무나 아름다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실한 우정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草秋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