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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추억 사이
김 현 주
며칠 전의 일이다.
볼 일이 있어 대전역 부근 지하상가에 들렀다가 태블릿 PC의 커버와 액정화면 보호 필름을 사왔다. 필름이 두 장이어서 한 장을 쓰고 나머지 한 장은 나중에 쓰려고 나름 잘 두었다. 그런데 그 속에 그날 쓴 영수증을 넣어 두었는데 갑자기 그게 필요해 찾으려 하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불과 하루 전의 일인데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내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내가 둘만한 곳을 다 뒤져보다가 결국 남편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어디다 두었는지 보았느냐구. 식탁 아래쪽에 두는 것 같았다기에 차분히 앉아 꽂이에 꽂아둔 파일들을 하나하나 뒤적여 찾아냈다.
요즘 깜박거리는 건망증이 유독 심해진 것 같다. 아직 나이 탓이라기엔 이르지만 확실히 과거의 내가 아니다. 금방 무얼 하려하다가도 정말 어이없이 깜박 잊곤 한다. 메모를 하기도 하지만 메모한 것조차 잊으니 소용이 없다. 그러다보니 내가 어딘가에 무얼 두고도 번번이 남편에게 묻기 일쑤다. 되도록 비슷한 것끼리, 그리고 사용 빈도에 따라 나름 생각해서 두지만 잘 찾지 못한다. 이제 내가 나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자주 이런 상황을 겪다 보니 남편은 나의 변화가 내심 당혹스러운 듯하다. “요새 왜 그러는 겨?” 그러면 우스갯소리로 “나중에 내가 당신 보구 ‘누구세요?’ 할지도 몰라”라고 말하지만 나 역시 이런 자신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전에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면서 치매에 대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대학교수이며 작가였던 한 여인이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거기서 그 여인은 남편에게 부탁한다. 자신이 더 기억을 잃기 전에 요양원에 보내 달라고.
그녀의 남편은 부탁을 들어준다. 요양원에 입원을 시키고 매일 면회를 가는데 어느 날 아내가 다른 노인의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다. 휠체어의 남자를 가리키며 “남편을 돌보아야 해서 가야한다”며 실례한다고.
자신의 앞을 무심히 지나쳐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하는 그 노년의 신사 생각이 났다. 그 영화를 보며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허망한 일인지 가슴이 찡했는데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살면서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늘 좋은 일만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기억을 할 때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입력하여 저장하는 기억의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실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안 좋았던 일들도 오래 지나면 가장 좋고 아름다웠던 일로 미화되어 기억되곤 한다.
월요고사로 힘들고 지겨웠던 고교시절도 지금은 풋풋하고 순수했던 여고 시절로 기억된다. 싸우며 티격태격했던 친구나 형제자매들과의 시간도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으로 변화시킨다. 우리의 기억이란 것이 자정작용이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해 우울하고 힘든 부분은 정화시켜 제거해 버리고 좋은 부분만 아름답게 기억시켜주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과거는 추억으로, 추억은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옛날 물건을 뒤적이다보면 불현듯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주는 어떤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땐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 본다. 이런 저런 생각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그 당시엔 나름 힘들고 어려웠던 것 같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좋은 때였구나 싶다.
직장을 다니느라 육아를 위해 할머니와 살았었다. 아이 둘을 맡겨 놓고 출근을 했다가 돌아오면 피곤함으로 온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기만 한데 집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그러니 종일 아이를 봐주느라 고생하신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 보다는 짜증이 났다. 지금처럼 체력이 좋고 건강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땐 모든 것이 힘에 부쳤고 삶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겨우 저녁을 해먹고 아이들과 놀아주다 씻겨 재우고 나면 나 역시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곤 했다. 그렇게 가정과 직장을 양립하며 사느라 좋은 줄 모르고 힘들어했다. 그런 그 시절들이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고맙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전적으로 연년생의 두 아이를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키워주신 나의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지도 못한 채 늘 툴툴거리며 불평만 했던 그때의 나를 돌이켜보니 너무 죄송스럽고 면목이 없다. 철없는 손녀딸의 투정을 묵묵히 참아내며 곁에 있어주신 할머니, 세월이 흐르고 나 역시 노년을 향하며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새삼 느껴지며 그리움이 사무치게 파고든다.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자란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편하고 좋았다. 할머니도 내가 결혼해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고 말대로 십여 년을 함께 살은 셈이다.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과 회한이 서늘한 가을바람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이렇게 옛 기억은 아련한 추억으로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을 선물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불쾌하고 끔찍한 기억조차도 이제는 관용과 아량으로 담담하게 반추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세월이 약이란 말은 이런 때에도 유용한 듯하다.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살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내가 어떻게 각색하여 저장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노년이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와신상담하듯 오래전의 일을 곱씹으며 원수를 갚겠다든지 앙갚음을 할 생각으로 산다면 과거의 일로 현재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한다.
부처님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다 했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그러할 뿐인 것이다. 어떤 일을 겪든 그건 내 삶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살다보면 인생은 곧 한 편의 영화처럼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난 식탁 앞의 탁상용 카렌다에 해야 할 일들과 약속을 빼곡히 적는다. 혹시라도 약속을 깜박 잊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 나름 애를 쓰고 있지만 메모를 하고도 그걸 보지 않아 잊는 경우가 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데 모든 기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누군가가 나이를 이유로 들며 변명하는 것이 듣기 싫었지만 나 역시 예외가 아님을 실감한다. 그래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하고 싶은 것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힘들고 슬픈 이야기 보다는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많이 담아두려 한다. 그래서 한가롭고 느긋한 시간 속에서 하나, 둘 그림책을 꺼내 보듯 추억을 돌이키며 미소 지을 수 있는 나날이고 싶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다. 제각기 살길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요즘처럼 이 말이 시의 적절하고 시대를 대변하는 말도 없는 것 같다. 저성장, 고위험시대에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비상시국까지 겹쳐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안 그래도 힘든 경기침체와 불황,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길어진 위기의 시대에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며 평범한 일상마저 강탈해 가고 있다.
개인적이기 보다는 함께 모이고 단합하는 걸 좋아하는 우리의 정서에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낯선 생활지침이 어리둥절하고 어색하기 그지없다. 일체의 단체 활동을 중단하고 집콕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우울한 일이다. 그렇게 지내기를 몇 개월 하다 보니 이제 코로나19 전과 후의 생활이 확연히 달라질 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오던 전통적인 사회적 통념이나 제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적응하기 마련이어서 어느새 마스크를 쓰고 친근한 접촉행위를 피한 채 조심조심 바이러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고 있다.
가족의 개념 또한 예전의 4인 가족 프레임이 무너지고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는 실정이다. 표준가족 해체의 가장 큰 원인은 저성장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현실 앞에 우리는 각자 자기의 삶을 찾을 궁리를 한다.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는 결혼을 하는 대신 1인 가족이 되어 솔로라이프를 즐긴다. 가족에 대한 희생을 숙명으로 여겼던 가장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오로지 자녀양육과 가정을 위해 자신의 삶이 없던 현모양처는 사라지고 책임감과 의무를 내려놓고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며 원하는 삶을 위해 하루가 바쁘다.
아픈 남편의 병간호를 위해 몇 년을 지극 정성으로 살림에만 매진하던 친구가 도파민의 충전이 필요하다며 이제부터 자신의 삶을 위해 틈만 나면 밖으로 나오겠다하여 웃은 적이 있다. 노년 또한 늙음은 삶의 환승일 뿐 종착이 아니라며 여전히 도전하는 신 노년, 꽃 중년의 삶을 지향한다. 인생은 오로지 자신이 즐기고 누리고 느끼며 사는 것 만큼만이 나의 것이다. 이러다 보니 가족 간 ‘따로 또 같이’라는 명제아래 참여하되 서로 간섭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렇게 각자의 행복과 생존을 찾아 나서자 오히려 가족의 형태가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지게 된다. 일명 테트리스 가족! 테트리스 게임을 안다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본인의 삶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고 가족과의 유대를 통해 빈틈을 끼워 맞춤으로써 자신의 인생이 더욱 안정적이고 가족끼리의 결속력도 생긴다는 것이다. 이 테트리스 가족이라는 낯선 형태가 건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유와 행복, 평등을 인정할 때 건강한 가족일 수 있다. 도미노 가족이 아닌 테트리스 가족으로의 변화가 저성장으로 경제적 위기 상황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 낼 수 있는 건실한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될 것이다. 전에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을 이기적이라 비난했다면 이제는 긍정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인다. 삶의 중심에 내가 있고 내가 행복해야 나와 연결된 모두가 함께 행복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로 우리들의 삶은 해체되고 가족끼리도 이상 증세가 보이면 서로 떨어져 생활하고 식사도 따로 하는 기현상을 연출한다. 자가 격리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낯선 용어들을 들으며 우리는 딴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생활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그리고 국가나 정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실감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에 대해 고마운 줄 모르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적인 대유행을 겪으며 이 어려움이 어느 개인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며 각자 조심하고 잘 사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나라가 모범적으로 방역을 잘 하여 피해를 최소화 한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애쓰는 방역당국과 의료진이 있어 우리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이번 일을 통해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자부심이 생겼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선진국이라 여겼던 나라들도 강대국이라 큰소리쳤던 나라들도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 처참히 무너지는 걸 보며 인간의 나약함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도 우리를 두렵게 한다.
4차 산업혁명이니, AI인공지능이니 하며 빠르게 변해가는 현실 앞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가끔은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적응을 하든 그러지 못하고 도태되든 우리는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흘러가게 된다. 이러한 다변화 시대에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만의 필살기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예전처럼 은퇴하여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60여 년 의사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며 자신의 가장 큰 실수가 나머지 30년의 은퇴 후의 삶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제2의 인생, 인생 후반기도 전반기의 삶만큼이나 중요하고 준비를 필요로 한다.
어느덧 100세 시대를 넘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140세를 산다하니 우리의 인생에 대한 설계도 바뀌어야 할 듯하다. 준비되지 않은 노년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말이 있다. 그 준비는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건강, 사회적 활동, 가족관계, 친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라 낙자생존(樂者生存)이라는 우스갯말도 있듯이 ‘인생은 즐거워라, 차차차’를 외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우울 모드로 세상의 고민을 다 끌어안고 살기 보다는 유머와 위트가 있는 삶이 훨씬 건강하고 활력적이다. 특히 요즘처럼 살아가기 팍팍한 때는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와 느긋함이 필요하다. OECD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와 행복지수 또한 낮다는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노력보다 행복해지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이라 생각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고 사회보장이나 복지도 선진국을 향해 가고 있다. 너무 먹고 사는 일에 연연하여 자신을 돌아 볼 겨를 없이 살기 보다는 각자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코로나 19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 불편을 야기 시키지만 이런 시간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각자도생!
각자 자신의 삶을 잘 경영하며, 후회 없고 아쉬움이 없는 삶을 살기를 응원한다.
※ 대전 출생, 수필가, 한밭문학회 사무국장, hl3evs@hanmir.com
울 엄마
박 형 순
사방은 어둑했다. 불빛은 환한데, 아마도 내 마음이 어두웠던 모양이다. 어머님의 얼굴을 이승에서 보는 마지막 염습 시간이었다.
손수 만들어 놓으셨던 삼베 수의를 입힌 몸에 양팔을 밀착시켜 일곱 매로 묶인 채 어머님은 반듯이 누워 계셨다. 어머님은 숨소리만 없으실 뿐, 곤히 잠드신 편안한 모습이셨다. 삼베로 온몸이 감싸이고 얼굴만 드러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 89년 성상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홀로 37년의 힘든 세월 속에 엉겨 붙은 주름살 무늬들이 나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울컥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엄마의 얼굴을 비비며 끝내 나는 목 놓아 울어야 했다. 그러고 나니 약간은 마음이 진정 되었다.
어머님은 지난 2016년 8월, 추석명절을 지내고 담도암 판정으로 1년여 간 투병생활을 하셨다. 어머님과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받기 위해 충남대 병원에 들러야 했다. 응급실에서 영양제 투입을 하는 동안, 나는 어머님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모자지간의 정도 듬뿍 쌓았다. 언젠가는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 엄마젖을 빨아보기도 하면서 장난도 쳤다. 그러셨던 어머니가 ‘어찌 친구 같은 아들을 남겨 두고 눈을 감으셨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왔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나는 영 엄마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 급하지 않으니 집에 가 있으셔도 됩니다!”라는 담당의사의 말만 없었어도 나는 어머님 곁을 지켰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 세 시 쯤, 날카로운 핸드폰 소리에 잠이 깼다. 어머님이 위독하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통보였다.
내가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어머님은 눈을 감으시고 아무 말씀 없이 침대에 누워계셨다. 근래, 초췌했던 얼굴 보다는 한결 편안한 모습이셨다.
나는 어머님의 임종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홀로 보내드렸음에 마음이 아팠다. ‘어머님은 3남 3녀 자식들 중, 한 사람도 못보고 홀로 쓸쓸히 저승길로 어찌 가셨을까’를 생각함에 7월 6일이면 3주기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1980년, 아버지께서는 대장암으로 1년여 투병하시다 엄마에게 모든 생의 짐을 남기시고 유명을 달리하셨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시골 힘든 일을 하시며 3남 3녀를 책임지셨으니 실로 대단한 분이시다.
홀로 농사일을 하시며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가르치다보니 집에는 항상 돈이 부족했다. 그럴 때면 이 집 저 집 돈을 구하러 다니시며 땀 흘리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가끔 아들 둘을 앞에 앉혀놓고 “너희들이 그래도 지금 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은 할머니가 모든 것을 이뤄놓고 가신 덕분이다.”라는 말을 강조하며 훈계하곤 한다.
“나는 원 없이 자식들 사랑을 받고 떠나는 것이니, 지금 가도 여한이 없다” 하시며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되레 나를 안정시켜 주시던 엄마……
너무나 긴 세월, 홀로 견뎌야했던 세월이었건만 “아버지 곁으로 춤추고 가면 아버지가 새살림 차리지 않고 나를 반겨줄까?” 하시며 걱정하셨던 천진난만한 너털웃음이 여전히 생생하다. 아마도, 어머님은 이승의 걱정거리를 모두 떨쳐내신 홀가분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극락에 가시어 아버지를 만나셨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을 떠나시기 전, 춤을 추며 저승길을 재촉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하늘나라에서 반가이 만나셨을 내외분의 영면을 비는 마음이 다소 가벼워진다.
“같이 사는 동안 행복했다! 내가 가걸랑 너희 내외 금슬 좋게 사는 것만이 애미의 가장 큰 바램이다.
그동안 엄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으니 애미에게 잘해주거라.
큰애야, 내가 딱 아쉬운 것은 손자며느리를 보고 갔으면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구나! 이 쌈짓돈을 손자 애들 폐백 받을 때 할머니 몫으로 전해주거라”
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시던 그 모습이 아마도 생의 마지막 소망이 아니었나 싶다.
“꼭 손자에게 전해줄께요. 덩실덩실 춤추며 아버지 만나시면 쾌히 반겨주실 겁니다. 울 엄마…… ”
* 충북 청원 출생, 충남대 영문과 졸업, 문원미디어 대표, moonwon8@hanmail.net
소중한 자산
이 명 년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와 함께 사는 나를 부러운 눈으로 보며, 복이 많다는 말을 하는 이웃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나 온 삶을 뒤돌아보며 답을 찾는다. 그것은 내 선택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자녀로 삼으셨고,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내 생을 주장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새 생명으로 태어날 때, 가정과 부모와의 만남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은 지음받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가 세상에 첫 울음을 터트렸을 때, 힘들고 어려울 때도 불평이 아닌 감사로 사셨던, 밝은 성격의, 욕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으셨던 좋은 부모님과의 만남을 주셨다. 그리고 일곱 형제들 속에서 다섯째 자리도 정해 주셨다.
우리 가족은 고모, 언니, 오빠가 한 울안에 어우러져 북적대며, 시끌벅적하게 지냈다. 각각 사고가 다른 이십여 명의 대가족이었다. 그럼에도 일상의 행동이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아끼고 보살피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잘 따르고 순종하는 예의와 질서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올곧은 마음자세와 씀씀이는 늘 모든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가난한 삶을 이어가는 이웃들이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일 때, 그분은 곳간을 열어 남김없이 이웃과 나누며 상생의 의미를 보여주셨다. 또한,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자상함이 있으셨다.
할머니는 젊은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 큰며느리를 보셨다고 했다. 그 후, 나의 아버지 소유의 넓은 터에 집을 지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우리 집보다 작은 집에서 사시면 안 된다고 중간채로 내려오고 안채를 비워 부모님, 형님가족 모두 한 집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 일로 할머니가 한 울안에서 20여 명의 많은 가족을 거느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께서는 집안의 질서를 잘 잡아 화목한 삶을 유지했다.
우리 할머니는 잘났던 못났던 며느리로 이 집에 들어오면 안방주인으로의 대접을 톡톡히 해 주셨다. 딸이 세 명이 있어도 올케 흉을 볼 수 없었다. 사랑하는 딸이라고 무조건 편들지도 않았다. 올케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치도곤을 당했다. 아들이 바람을 피우면 해결사는 할머니였다. 아들이 바람을 피운 집을 찾아가 이부자리를 마당에 꺼내놓고 불을 질러 태우셨다고 한다. 남의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는 요물이라고 단칼에 끊어 놓아야한다며 혼을 내셨다고 했다. 내 집으로 시집을 온 며느리에게는, 장차 이집을 이끌어 가문을 일으킬 주인이라며 귀한 몸으로 대했다. 올바른 사고로 가족들을 품어주시는 폭넓은 마음의 소유자이면서도, 아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면 단번에 그 생각을 고치도록 교육하셨다.
지금은 부모조차 자식들 집에 마음 놓고 드나들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행복해야 할 가족 관계가 어디서부터 사랑이 메말라지고 황폐해졌을까?’ 일터에 나가고 빈집이 되어 있는 가정에서 혼자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생명들, 그들은 희생과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많은 이들은 손자 손녀를 예뻐하면서도 거두고 돌보는 일은 귀찮아하고 힘들어 한다. 그래서 할머니를 만나러온 손자손녀에게 “너희 집에 빨리 가라”고 내모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핵가족 단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야기되는 잘못된 사고의 결과들이다. 이기적 사고에서 표출되는 행동들이 혹여 순진하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본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해, 내가 여섯 살 때인 듯하다. 당시에는 흉년이 들어 집집마다 먹을 것이 없었다. 가난하여 밥을 굶는 가정이 부지기수였다. 멀건 풀떼기도 못 먹은 아이들은 산에 있는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쌀 한 톨도 아껴야 한다는 소중함을 일깨웠다. ‘밥알 하나라도 버리지 않겠다.’는 의식이 평생 동안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식이 시작된다. 먼저 눈으로 보고, 다음에는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머리로 깨우쳐 정신으로 자리하면서 모든 것이 마음속의 자산으로 쌓이게 된다. 어릴 때 많은 가족 속에서 자란 환경 덕분에, 나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7남매 맏며느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어우러져 탈 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랄 때 함께했던 가족들을 통해 보고, 듣고, 부닥치며 생활에서 얻은 경험들이 마음의 자산이 되어 오늘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를 아들 며느리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기초가 되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삶을 같이 해왔고, 그리고 같이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기쁨을 공유하고 행복을 나누며 남은 생을 잔잔하게 살고 싶다.
※ 전북 여산 출생,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수료, echlmn@hanmail.ne
나의 할아버지
노 복 래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일제치하인 1907년 5월 6일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부모님 두 분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불우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셨다고 한다. 그러나 불굴의 도전정신과 근면, 성실함으로 시대를 앞서 살아가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할아버지께서도 끼니를 이을 양식이 없어 보리죽으로 연명하셔야 했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낮에는 물론, 밤에도 남의 집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친구들이 비아냥을 해도 오로지 “가난을 자식에게까지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아버지를 대학교육까지 시키신 분이시다.
아버지께서는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신 후, 전라남도 나주로 교직 발령을 받으셨다. 장손인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실과 검소를 몸에 익히며 자랐다. 할아버지는 주로 논농사를 지으셨는데,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과 후에 농사일을 도와드렸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가을 밤, 할아버지를 도와 볏짚가래를 정리할 때 굽은 허리를 펴시며 그분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이 고생을 않고 도회지로 나가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은 농촌에서 사셨지만 마음만은 더 큰 꿈을 향해 도시생활을 동경하며 사셨던 것 같다.
여름철 농한기에는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창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그 시조의 의미도 모르면서 장단을 맞추며 듣기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그 시조는 희대의 명기 <황진이>가 세종대왕의 증손자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하여 지어 부른 시조라는 것을 알고 새삼 놀랐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께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학을 배우시고 풍류를 즐기는 멋진 삶을 사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가을 날, 저녁 무렵의 일이 생각난다. 아내와 나는 합덕 장터에 다녀오시는 할아버지를 마중 나간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내가 반갑게 인사를 했음에도 할아버지께서는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걱정이 되어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라고 여쭈었더니 당신께서는 그저 미소만 지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점심을 잡수시지 않고 그 돈으로 온 식구가 같이 먹으려고 명태를 사 오신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몸보다 가족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신 분이셨다,
우리 집에서 합덕 장터까지 나가려면 10km나 되는 자갈길을 걸어야 한다. 허기진 배를 참아 가며 그 험한 길을 다녀오신 할아버지의 가족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온다.
할아버지께서는 평소, 가훈으로 ‘성실, 근면, 감사’를 강조하셨다. 이를 몸소 실천하신 할아버지께서는 87세까지 치열하고 숭고한 삶을 사시다가 1994년 1월 15일 소천하시어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다.
지금은 뵐 수 없는 곳에 계시지만 할아버지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린다. 또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애와 교육열로 건강한 일가를 이룬 할아버님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내 삶의 이정표로 삼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일상생활에서 원만한 가족관계,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말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말’의 힘이 너무나 크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촌철살인(寸铁杀人)이라는 말도 있다. 한 번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엎질러진 컵의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렇기에 성현(聖賢)들은 삼사일언(三思一言)하라고 가르치고, 성경에서도 “입안에 파수꾼을 두어 말을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말을 실수하여 상처를 받고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특히, 나이가 들면서 자존심이 강해진 탓일는지 모르지만, 하찮은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면 삶의 활력을 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무엇이 있을까? 무슨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의 생각을 적어본다.
첫 번째 아름다운 말은 ‘보고 싶어요.’라는 말이 아닐까?
‘보고 싶어요.’라는 말에는 ‘사랑한다.’는 말과, 볼 수 없기 때문에 애절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유행가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실려 있는 것이 아닐까?
두 번째는 ‘미안해요.’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해요.’라는 말 속에는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 앞으로 변화 하겠다.’라는 다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가까운 사이 일수록 ‘미안해요’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겠지만, 용기를 내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세 번째는 ‘고마워요.’라는 말이 아닐까?
‘고맙다.’라는 말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행복을 부르고 겸손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보고 싶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라는 아름답고 좋은 말을 가족과 문인, 지인들에게 많이 하면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
(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
아버지와 진달래꽃
전 월 득
세월이 빠른 것인지, 나이가 많은 것인지 올봄은 유난히 빨리 찾아온 느낌이다. 무자비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강타하여 하늘 길까지 막아 놓았어도, 따스하고 온화한 봄날은 스멀스멀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생명들은 앞을 다투어 피어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사람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영산홍에 밀려 관상수로 대접받지 못한 진달래 한 그루가 아파트 소나무숲 한 쪽에 서 있다. 연분홍 옷고름을 입에 물고 수줍은 새색시가 되어 방긋이 미소 짖는 모습에 주민들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마치 어릴 적 우리 아버지를 모시고 온 듯 반갑고 예쁘다.
내가 여덟 살 쯤 되었을까?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서울 생활에 익숙하신 아버지께서는 6.25 전쟁을 피하여 시골에 안착하셨다. 그러기에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 특히 어정쩡하게 나뭇짐을 지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날, 아버지는 깨끗한 한복 바지저고리를 차림으로 엉성한 나뭇단을 지게에 묶어 산에서 내려오셨다. 지게 위에는 딸에게 주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곱고 탐스런 진달래 꽃 한 다발이 얹혀 있었다. 그 꽃은 내가 생후 처음 받은 꽃 선물이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 기뻐 옆집 숙이에게 달려가 자랑하고는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한잎 두잎 따먹었었다. 그리고는 남은 것은 꽃병에 나란히 꽂아놓고 봉우리가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았던 어린 날의 추억이 아련하다. 묵묵하셨지만 꽃을 좋아하시고 가족을 사랑하신 아버지께서는 울 안 가득 여러 종류의 꽃을 심고 가꾸셨다. 농사일은 잘 모르시니 꽃가꾸기를 좋아하셨을 것이다. 또한 자녀들의 정서를 위한 최선책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어릴 적 꽃밭에서 친구와 놀았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여 언제 어디서나 같은 꽃을 보면 그 옛날 고향집 뒤뜰과 앞마당 우물가에 곱게 피어 있던 아름다운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한다.
중절모를 즐겨 쓰시던 아버지께서 외출에서 돌아오실 때면 신문지에 돌돌 쌓인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어김없이 따라왔다. 이름 봄 뒷문을 열면, 맨 먼저 반겨주던 새하얀 매화가 송알송알 나란히 한들거리던 작은 꽃송이들도 눈에 선하다. 울밑 양지바른 곳 여기저기서 뾰족하고 튼실한 새싹들이 기운차게 솟아오르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아버지를 먼저 불렀다. 어느새 등 뒤에서 삭정가지를 꽂아 주시며 밟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시기도 하셨다. 더워지는 여름이 오면 “이쪽에는 빨강색의 함박꽃이 피고, 저쪽에는 하얀색의 백합꽃이 피어 은은한 향기가 이웃마을 까지 퍼져 나갈 것이다.”하시던 말씀이 생생한데, 어느덧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지나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이의 수만큼 세월은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세월은 빨리 지나가고 있다.
그 시절 장난감이라고는 돌멩이와 사금파리가 전부였다. 풀꽃을 따서 밥을 짓고 진흙을 파서 떡을 만들던 천진했던 나에게, 아버지 서랍속의 하모니카는 요술장난감으로 동네에서 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입에 대고 삑삑거리며 논두렁 밭두렁을 쏘다니는데, 저쪽 개울가에서 버들가지 한 움큼을 꺾어 오신 아버지께서 기다란 피리를 만들어 주셨다. 항상 책을 보시고 서예만 하시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었겠지만 하모니카를 제자리에 넣어두라는 야속한 말씀은 나에게 상처가 되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점잖으셨던 아버지께서 뜻밖에도 길고 짧은 여러 개의 버들피리를 만들어 입어 물고 이상한 멜로디를 만들며 갸웃거리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 나는 동생한테 빼앗기지 않으려 하모니카를 대신한 버들피리를 움켜쥐고 하나씩 번갈아 입에 물고 힘껏 불며 좁다란 논둑길을 따라 할머니 댁을 오르내렸다. 와글거리는 개구리 소리에 장단을 맞추고, 뻐꾸기가 또랑또랑 울어대면 나도 따라 즐거이 노래를 불렀다. 어스름 녘 굴뚝에는 엄마의 밥 짓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순하디 순한 오남매가 둥그렇게 모여앉아 누구 입이 더 크랴 한 입 두 입 밥수저 오르내리던 어린 날이 이어졌었다. 해마다 봄이 오고 진달래꽃이 필 때면 반쯤 기울어진 아버지의 나뭇짐이 눈에 어른거린다.
올봄에도 고향 한 켠에는 아버지의 흔적들이 생생히 피고 지고, 예쁜 꽃들이 주인 없는 빈집을 지키며 그윽한 향기들을 허공에 뿌리고 있을 것이다.
긍정의 힘으로
예기치 않은 인류의 재앙인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평화롭던 일상은 제약되고 나름의 생활방식이 요구되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나는 평소 여러 가지 취미생활과 홈패션을 경영하면서 바쁘게 살았지만 야무진 살림꾼은 아니었다. 알토란같은 또래 친구들이 광내고 조물거릴 때, 나는 시절 없이 붓글씨나 쓰러 다니고 오카리나 배우기 등 엉뚱한 일에 몰두하며 살았던 것이다. 늦은 나이를 탓하지 않고 팔랑거리던 나에게 몹쓸 놈의 악행이 모든 열정을 잠재우고 약 3개월의 긴 시간을 집안에만 머물게 하였다. 불가피한 여유를 누리며 긍정의 힘으로 집안일을 꼼꼼히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베란다 창고에서 뽀얀 먼지로 분칠을 하고 있을 소외된 애물단지들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수십 년 전, 남편과 여행지에서 살까 말까 우문하며 데려온 애교쟁이들이 ‘까궁’ 하듯 튀어 나왔다. 나는 까맣게 잊었던 지난날의 추억을 소곤대며 타임캡슐이 열린 듯 그리움에 잠겨보았다. 소중했던 날들이 바람같이 지나가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길지 않다는 생각에 잠시 고뇌에 젖어 막연한 감성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창고 정리를 마치고 장롱 속은 안녕한지 살며시 열어 보았다. 다소곳이 기다린 듯 나의 날개들이 각각 자녀들의 사랑을 감싸 안고 자랑스럽게 예쁜 미소로 눈을 맞춘다. 어느 하나 빼내어 정리할 수 없는 애틋함으로 하나하나 입어 보며 거울 앞에 다가섰다. 아들딸의 첫 월급, 며느리의 첫사랑이 묻어있는 분에 넘치는 예쁜 옷들이 어느새 세월이 지나 흰서리 내려앉은 내 몸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 처절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은 청춘이라지만 육신의 변화는 어찌할 수 없는 애처로운 현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장롱 속 서랍을 열자 남편의 빈 자존심이 고이 잠자고 있었다. 겸연쩍어 눈 찡끗하며 열어보이던 그를 대한 듯 뜻밖의 반가움에 뭉클한 회한이 밀려왔다. 낭만적인 삶과 유비무한의 삶을 대립하며 치열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립고 애잔한 맘으로 휑한 자존심을 다독이며 두툼히 채워 놓았다. 함께 즐기려던 꿈은 포말처럼 사라지고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둔 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은 아리고 슬픈 일이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안식을 기원할 뿐 아무것도 공유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텅 빈 가슴으로 창밖을 보니 하늘엔 뭉게구름 유유히 흘러 다니고 따스한 4월의 목련꽃은 올해도 여전히 피고 있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하루에도 수천 명씩 사망자가 늘어나고 거대한 미국과 유럽선진국들이 속수무책 허둥거리며 코로나 바이러스와 전쟁 중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암울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코로나19가 종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낚싯대에 놓친 물고기가 더 크다는 말이 있듯이, 올해의 봄은 유난히도 일찍 찾아와 갖가지 꽃들이 탐스럽게 만개하여 집안에 발목 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갈증을 호소하는 상춘객들은 틈을 비집고 꽃구경에 나서고, 지자체들은 앞 다투어 관광지를 봉쇄하며 사투하고 있다. 모두들 힘든 상황을 서로 배려하며 지혜롭게 행동한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해진 환경에 순응하며 구석구석 집안 정리를 하고 서툰 글을 써보며, 긍정적 사고로 순연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또 다른 일상에 적응하고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은 듯하다.
손주는 내 사랑
지구온난화 여파로 삼한사온이란 단어도 사라지고 동화같이 아름답던 겨울의 낭만도 사라진 것 같다. 세월 따라 기후는 변해가지만 해마다 변치 않고 찾아오는 졸업과 입학시즌이 있다. 특히 올해는 외손녀의 중학교 졸업식과 세종시에 거주하는 둘째 손주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 전날 손주가 할머니께서 오시기를 원하여 날마다 집 앞에서 퇴근하는 아들과 함께 저녁에 들어갔다. 멀리 사는 딸집보다 가까이 살고 있는 아들집에 가서는 숙박할 일이 흔치 않았다. 몇 년 전 병원에서 퇴원하여 10여 일 머물다 온 후로 오랜만에 간 것이다. 현관에 들어서자 알뜰살뜰 깔끔하게 정돈된 며느리의 센스까지 쌓으며, 온가족이 즐기는 한화구단의 야구모자들이 가지런하고 선수들의 싸인 볼 수십 개가 아롱다롱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제비새끼들이 한 둥우리에 모여 짹짹거리듯 오순도순 살고 있는 모습이 정겹고 예뻐 보였다. 대전 본가에서는 자주 만나지만 내가 모처럼 아들집에 합류하고 보니 약간 어색하기까지 하였다.
모든 것이 바뀌어가는 문명사회에 졸업식 장면도 예전과 다르고 음식문화도 달라졌다. 내 자녀들 때만해도 졸업식 날 자장면이면 족하던 것을 이제는 맛집을 찾아 아들 가족과 샤브향으로 갔다. 큰 손주는 중 3이 되면서 사춘기에 접어든지라 별 말이 없이 우직하고 늠름하기만 하였다. 둘째 손주가 내 옆에 앉아 끓는 물의 온도에 맞춰 고기와 야채를 건져주며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서브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던 짓을 손주와 바뀐 것이다. 어느새 몸도 마음도 훌쩍 자란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나는 그만큼 늙어 가리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둘째 손주를 데리고 대전으로 왔다. 영어학원에 다니기 싫어서 중단하였다니 중학교 입학 전까지 데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개구쟁이 삼형제를 데리고 힘에 버거운 며느리의 고충도 덜어주고 형과 동생사이에 낀 둘째 손주의 마음도 헤아리면서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손주는 얽매였던 학교생활을 마치고 느슨해도 되는 할머니 집에 도착하자 헐렁한 실내복을 갈아입으며 너무 편하고 좋다며 안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휴대폰으로 게임을 맘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압권이었을 것이다. 어김없이 내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소파에 비스듬한 채로 숑숑 삑삑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신이 났다. 모르는 척 몇 시간 기다려준 다음, 저녁식사 후 낮에 있었던 졸업식 장면에 대한 글짓기를 하자고 아이패드를 내밀었다. 서슴없이 받아 들더니 토닥토닥 자판소리와 함께 그럴싸한 감성으로 졸업풍경을 그려놓았다. 순간 깜짝 놀라 반신반의 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동질감을 느끼며 내 고도의 전략이 통할 것 같은 느낌으로 칭찬을 연발하며 할머니와 함께 지낼 기간에 대하여 계획표를 짠 것이다. 월, 수요일은 수학문제풀기, 목·금요일 탁구배우기, 토·일요일은 교회가기, 도서대출하여 읽고 동시 짓기 등 약 두 달 간의 계획을 야무지게 세우고 실천하기로 하였다. 나 역시 손주와 함께 동기 부여할 기회를 찾으며 미루던 책읽기를 하게 되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나는 손주와 비교대상이 아닌 듯 느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느꼈지만 어려운 낱말 맞춤법에 대해서는 나를 넘지 못하였다. 번번이 소리 나는 대로 편하게 써놓아 받아쓰기를 반복하며 채근하였다. 책을 읽어도 건성으로 읽고 게임에 몰두하느라 관심 없는 것이 안쓰럽고 걱정스런 일이었다. 다행이 수학을 가르치는 숙모가 손주는 수학머리라고 격하게 칭찬해주었다. 손주 역시 소인수분해 문제가 재미있다며 할머니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또한 탁구장 관장님도 3∼4주 레슨을 해주시더니 운동감각이 남다르다고 은근히 칭찬하며 기뻐하셨다. 나는 손주보다 2∼3개월 앞서 탁구장에 다녔지만. 몇 주 만에 손주는 나를 압도하였다. 레슨 후 할머니와 한 시간씩 연습하는데 처음엔 하나도 넘기지 못하던 것을 두 개 다섯 개 열 개를 주고받으며 기분이 상승되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바삭하고 따끈한 치킨도 함께 먹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보상을 해준다는 것과 ‘Give and Take’를 말해주고 싶었다. 사내아이치고 참 하고 순진한 편이다. 무슨 반찬을 해줄까? 물어도 그냥 할머니 편하고 좋은 걸 하시라며 제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형제 중 가운데에 끼어 양보와 배려가 몸에 익숙해진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착한 것이 예쁘긴 하지만 장차 인사이더가 되려면 자기주장을 소신 있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타이르기도 하였다.
할머니 집에는 손주들을 위한 비밀창고가 있다. 여럿이 모일 때는 서로 선호하는 과자를 누가 먼저다 할 것 없이 꺼내먹고 하더니 며칠이 지나도 열어보지 않았다. 또한 천 원짜리 만 원짜리 잔돈을 여기저기 흘려 놓아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혹여 철없는 시기에 순간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바로 잡겠다는 할머니의 노파심을 불식시켜 준 것이다. 바르게 키우고 올곧게 자라준 손주가 예쁘고 며느리가 고마웠다. 올 해 열세 살,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보내고 꿈을 항해 전진하기 바란다. 꿈을 묻자 요리사가 꿈이라고 한다. 의아스러워 유명한 호텔 셰프가 되려면 영어를 잘해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원어민 선생님과 대화는 가능하니 요리만 잘하면 된다고 자기 논리를 주장한다. 가끔 ‘맹’한 짓만 한다고 며느리가 하소연하여 내심 걱정했는데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잘 할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그러한 마음이 언제 돌아올지 기다려진다. 지난 12월 크리스마스 때, 예술의 전당에서 손주와 호두까기인형 유니버설 발레단 공연을 관람한 것이 좋았었다. 이번 신춘음악회에도 갈 예정이었다. 졸업축하 기차여행도 하고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뜻하지 않는 국가의 재앙이 닥쳐왔다. 중국 우한에서 촉발된 코로나 감염병이 대구 신천지 교회를 통하여 확산되고 있었다.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 마스크 착용은 필수이고 환자와 근거리 접촉자는 격리되고 단체모임이 불가하며 건물이 폐쇄되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만 하여도 하루에 몇 백 명씩 감염자가 속출하고 사망자가 빈번히 나오면서 모든 일상이 중단되고 발이 묶였다. 중학교 입학식은 연기되었지만. 시민들과 거리두기가 시작되었으니 손주도 집으로 가야 했다. 손주와 행복했던 두 달 간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 보내기 전날, 좋아하는 삼겹살을 굽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며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면류를 먹을 땐 후루룩 거리지 말고, 여럿이 식사할 때는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아야 예의바른 사람이 되는 거라고 잔소리도 많았었다. 이제는 보낸다는 생각에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닥쳐올 사춘기를 잘 넘길 지 두렵기도 하였다. 영어학원에 다니기 싫다는 손주를 데리고 와서 책 읽기를 채근하고, 쓰기 싫어하는 받아쓰기를 강요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였다. 때론 협박성 발언도 하면서 네 앞날을 위한 거라고 설명했지만 손주의 마음속에 어떻게 새겨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빗나간 사랑이 가슴에 상처가 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침대가 있는 커다란 빈방이 있어도 나와 한 이불을 덮고, 발을 부비며 삼행시도 지어보고 끝말잇기도 하면서 깜깜한 밤에 말로 쓰는 ‘입’ 시를 지어 보기도 하였다. 길지 않았지만 함께한 손주와의 시간은 참으로 소중함이었다. 먼 훗날까지 할머니와 행복했던 순간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손주가 여름방학을 기다리듯이 나도 여름방학을 기다려 본다.
※ 충남 부여 출생,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수강, 서예가
그린부
오 월 석
나는 해마다 365개의 구슬을 꿴다. 나에게 동그란 한 알 한 알의 구슬이 모두 귀하다. 201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있는 진주 도매시장에 자주 갔었다. 그곳에는 내 단골집이 있었고 비교적 싸게 진주목걸이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친척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주었었다. 나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기 보다는 같은 일이라도 새로운 방식을 찾았을 때 기쁨을 느낀다. 발명가들이 지구에 없던 새로운 물건을 만들었을 때의 기쁨을 조금 이해가 된다. 진주목걸이를 사는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나만의 방식을 찾아보았다.
여름에 여성들이 시원한 옷 위에 걸친 이미테이션 진주목걸이를 길게 목에 두르고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예쁘다. 나는 진짜 진주를 세 가닥을 엮어 긴 진주목걸이를 만들도록 하였다. 중국 가게에서 진주목걸이를 만들 때 사용하는 액세서리가 값어치가 없어보여서 중국에서 구입한 진주목걸이를 한국에서 14K 연결고리로 바꾸어 보았다. 그런데 진주목걸이를 꿰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진주를 한 알 꿰고 매듭 한 번하고, 또 한 알 꿰고 매듭 하는 방식이어서 목걸이의 움직임이 부드러운 반면, 한국의 보석가게에서는 실을 꿴 바늘로 모든 진주를 한 번에 통과시키는 바람에 목걸이의 움직임이 뻣뻣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나는 한국에서 14K 액세서리를 4-5만원 주고 사가서 중국가게에서 연결하였다. 목걸이 제작용 실로 한 알 한 알 매듭을 지으니 길고 부드러웠다. 물건이든지, 대인관계든지, 일이든지, 취미든지 내가 가치 있다고 느낄 때 행복은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3개월 전부터 나는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했고 이제는 내 삶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대학캠퍼스의 남동쪽 끝자락에 테니스장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쯤 이곳에 테니스장을 만들었다. 테니스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동남쪽으로 클레이 코트가 4개, 왼쪽에는 진녹색 하드코트가 2개 있었고, 하드코트 안쪽에는 테니스를 혼자 연습할 수 있는 벽치기용 테니스장이 있었다. 테니스장은 체육부 선생님이 최고의 상태로 관리하여 보기에도 정갈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내가 테니스를 하지 않던 때는 신경 쓰지 않던 장소였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해외 출장을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운동은 하고 싶은데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한 때는 교내에 직원 배드민턴 동아리를 구성하고 회장을 맡아 봉사활동을 하던 때가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배드민턴은 동작이 빨라야 하고 또 라켓이 파리채와 비슷하기에 동아리 명칭을 ‘빨리채’로 하여 기발하다는 얘기를 받았었다. 그 당시에 나는 캠퍼스를 동분서주하며 회원을 모았고 회원이 4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동아리를 만들어 놓고 체육관 사용 허가를 받기까지 답답한 2개월을 보내면서 포기하려고도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허가를 받아 냈다. 체육관 사용허가 승인을 받고 3-4개월 정도는 회원들이 열심히 참가하여 6개 코트를 모두 사용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이 6시에 정시 퇴근하기가 어려운지 호응이 점차 줄어들었고, 더불어 나의 열정도 서서히 식어갔다. 어떤 날은 혼자서 체육관 문을 열어 놓고 수 십분 동안 회원들을 기다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 허무한 마음으로 체육관 문을 닫고 돌아서기도 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경험한 후, 나는 단호하게 동아리활동을 접었다. 나의 결정에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었으나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빨리채’에 가입하며 새로 라켓과 배드민턴 전용 운동화를 구입한 회원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빨리채’를 운영하면서 행복했고 또 회원들에게 열심히 봉사 했기에 후회도 없었다. 다시 테니스라는 생소한 운동을 하려니 몸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3월 초에 테니스장에 가서 조용히 회원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말에 고향에 들러 40년 지기 친구와 얘기를 나누던 중에 혹시 예전에 치던 테니스 라켓이 있는지 물었다. 친구는 최근 몇 년 간 바쁘고 흥미가 없어져 치지 않는다고 하였고, 바로 자가용 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라켓을 내게 건네주었다. 친구는 운동신경이 출중한데다가 테니스를 전공한 체육교육과 학생에게 오랫동안 레슨을 받아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내가 테니스를 배운 뒤 자기에게 도전하면 언제든지 받아주겠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 라켓을 받아 뿌듯했다. 이제 라켓을 쥐고 테니스장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2020년 3월 11일, 테니스동호회 총무를 보는 친구에게 연회비 24만원을 송금하면서 정식으로 테니스동호회에 가입했다. 좋은 테니스 코트를 사용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학교 교직원이기에 가능했다. 처음으로 테니스장에 나간 날 고수들은 게임에 심취하여 초심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난 서운해 하지 않았다. 진녹색 하드코트에서 여자 두 명, 남자 세 명이 레슨을 받고 있었고 그들을 ‘그린부’라 하였다. 테니스를 배우는 초보자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 ‘그린부’였다. 나는 그린부 회원들을 따라 연두색, 노란색 공을 번갈아 가며 치면서 라켓 잡는 법과 동작을 배웠다. 배드민턴과 비교하면 라켓이 너무 무거웠다. 우리를 가르쳐 주는 코치님은 학군단에서 근무하는 교직원이었다. 도 코치님은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한 만능스포츠맨이었다. 골프, 당구, 볼링, 테니스 등 많은 운동을 섭렵했으며 실력 또한 수준급 이었다. 그린부는 월, 수요일에 도 코치님으로부터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금요일에는 자율적으로 운동을 하면 된다. 그런데 틈만 나면 그린부의 수준을 높여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테니스를 시작한 이래로 거의 결석을 하지 않았다. 특히 토요일 오전에 치는 테니스가 가장 재미있었다. 운동도 운동이지만 좋은 사람들끼리 운동도 하고 맛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하는 테니스는 내가 내게 주는 선물과 같았다. 테니스장 구석의 그늘에 모여앉아 동호인들과 함께 먹던 보리밥의 맛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난 그날도 즐겁게 웃으며 복식게임을 하였다. 테니스장 관중석에는 하얀 아카시아 꽃들이 아름답고 향기를 뿜어내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고수인 친구가 테니스 네트를 살짝 넘겨 오른쪽 구석으로 보낸 공을 나는 받아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달려가 치려는 순간, 누군가 뒤쪽에서 내 종아리를 세게 때린 느낌을 받았다. 마치 세게 던진 종아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보았다. 그런데 나의 파트너인 마달 형이 우두커니 라켓을 들고 서 있을 뿐, 나에게 야구공을 던진 사람은 없었다. 사태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왼발 종아리 근육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한 발짝 내 디딜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고, 연습생 형이 다리를 주물러 주었으나 통증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다리 근육이 뭉쳐 오그라든 느낌이 들었고, 키가 더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다. 종아리에 갈수록 고통이 더해져 나는 자아비판을 하고 말았다. 평소에 체력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테니스 경기 전에 충분히 스트레칭을 하지 않은 것 등이 문제였다. 평소에 등산이나 조깅을 꾸준히 했더라면 근육이 파열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속에 나도 중년이 되어 쇠약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년 겨울에 나를 친동생처럼 생각해주시는 누님 가게에서 술을 마시며 가수 박상철의 ‘중년’ 이라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노래를 듣고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노래가사를 통해 거울에 비친 초라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름은 세상을 빛나게 하고/또 어떤 이름은 세상을 슬프게도 하네/…… 한때 밤잠을 설치며 한 사람을 사랑도 하고/삼백 예순하고도 다섯 밤을 그 사람만 생각했지/한데 오늘에서야 이런 나도 중년이 되고 보니 세월의 무심함에 갑자기 웃음이 나오더라......”
이 노래를 듣고서 내 이름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빛나게 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었다. 하여튼 나의 몸은 중년의 연령에 걸맞게 변하여 몸의 신진대사의 활성도가 떨어지고 있음을 운동을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중국 진나라 말기 장수인 ‘항우(項羽)’는 “칼은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을 뿐이니 오래 배울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저는 만인(萬人)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항우만큼의 기개는 아니어도 나또한 체력만큼은 또래 친구들과 비교해 뒤쳐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12개 반이 참가하는 체육대회에서 400계주에서 항상 스타트 선수로 뛰었는데 야구부 선수들과 1, 2위를 다투었고, 대학을 다닐 때는 무거운 배낭 위에 텐트를 걸쳐 매고 여러 날 지리산 자락을 누비고 다녔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친구들은 나를 80년 대 후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었던 영화 《코만도》의 주인공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축소시켜 놓은 몸이라고 했었다.
테니스를 하면서 마음은 아직도 20대인데 몸이 보조 맞추기를 거부하여 자중하며 치고 있었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내가 하던 복식경기에 대타로 연습생 형이 들어가 마무리를 지었다. 우리 팀이 이겼는지 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어떤 이들은 중년의 나이에 너무 과격한 운동이라고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테니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빨리 치료를 끝내고 다시 그라운드에 우뚝 서게 될 날을 곱씹었다. 한의원에 가니 한의사님이 왼쪽 종아리 근육파열이라고 한다. 침총으로 종아리를 수 십 바늘 난사 당한 뒤 부황으로 피를 뽑는 것 같았다. 나는 엎드려 있어서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진짜 침으로 십여 방을 맞았다. 나는 전기치료를 받은 뒤 병원 문을 절룩거리며 나섰다. 나는 거의 2주 동안 나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다녀야 했다. 월, 수, 금요일 저녁에 테니스 경기를 구경하며 자진해서 심판을 보는 것으로 테니스를 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랬다. 얼마 뒤 그린부 회원들과 고수 회원님들의 염려 덕분에 나의 종아리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테니스가 준 아픔보다 테니스가 준 기쁨이 더 크기에 난 테니스 회원이 된 것에 무척 만족했다. 그러던 중 테니스 그린부는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하여 단합대회를 계획하였고 쇄골 부상과 결혼준비로 바쁜 닉네임이 ‘도발’인 회원을 제외한 7명 전원이 참가하기로 하였다.
감포로 떠나는 그린부의 첫 여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행 회비도 이틀 만에 전원이 납부하여 여행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경상남도 경주시 감포에 있는 ‘소풍펜션’은 여행 얘기가 나오자마자 마달 형이 예약했다. 테니스 회원 중 그린부 즉, 초보자는 총 8명이다. 테니스를 시작한지 겨우 2년 이내에서부터 나처럼 3개월이 채 안 되는 회원도 있다. 우리는 각자 닉네임을 정해서 사용함으로써 테니스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을 패러디한 닉네임이었다. ‘마달’, ‘권코비치’, ‘도미니크리’, ‘세레나허’, ‘연기스’, 나는 ‘오더러’로 이름 지었다. 초심자의 자세로 운동하겠다는 ‘연습생’, 회원으로 가입하자마자 선배들을 이기려는 도전정신이 강한 친구에게는 ‘도발’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마달 형은 그린부의 여행에 재미를 더하고자 토퍼를 제작하기로 하였고, 나는 옆에서 훈수를 두는 호사를 누렸다. 나는 토퍼라는 단어를 최근에 처음 들었다. 토퍼는 특별한 이벤트를 할 때 쓰는데 특히 결혼 프러포즈, 생일 때 케이크에 꽂아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간략하게 새겨 넣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용도로 쓰이며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제품디자인이 끝나면 레이저 커팅기로 제단하면 완성된다. 토퍼 제작은 마달 형의 능수능란한 컴퓨터 디자인 솜씨로 뚝딱 만들었다. 왼쪽 상단에 ‘사랑해요’라고 썼고, 중앙에는 ‘감포로 떠나는 그린부 첫 여행’이라고 썼으며, 맨 아래쪽에는 여행에 참가하는 회원들의 닉네임과 날짜를 써 넣었다. 마달 형은 여행 출발 전에 흰색과 코발트색 아크릴로 토퍼를 제작했다.
순탄했던 우리들의 여행은 떠나기 일주일 전 한 가지 일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그린부가 여행가는 것을 다른 회원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야 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갔다 와야 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하였다. 우리들만 가는 것이 눈치 보인다는 회원, 모든 회원에게 공지 하자는 의견, 공지 하지 말자는 의견 등 자신의 생각을 카톡에 올렸다. 이 코로나 시국에 공개적으로 가는 것이 부담된다는 회원도 있었다. 결국 내가 테니스동호회의 주회원인 지니포바 님과 도 코치님에게 그린부의 여행을 말하였고, 혹시 다른 회원들이 그린부의 행방을 물으면 여행 갔다고 사실대로 이야기 해달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감포로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감포의 시원한 바닷소리를 듣고 있었다.
드디어 2020년 6월 6일 오전 10시, 대전에서 그린부 7명이 감포로 출발했다. 1박 2일의 일정은 무(無)로 가서 무(無)로 돌아오자는 슬로건을 갖고 모두 짐을 최소화 하였다. 카니발 9인승은 실제로 9명이 타기에 좁았고 짐을 실으니 더 비좁았다. 자연스럽게 자리가 정해졌고 밤새 생수를 얼려온 착한 세레나허가 맨 뒷자리로 들어갔고, 난 혹시 뒷자리 승객이 불편할까 베개를 두 개 준비해 두었다. 앉기에 좁고 불편하면 가로로 누우라는 나의 작은 배려였다. 다행히 세레나허는 잘 적응하였고 불편함 없이 자리를 잡았다. 운전대는 내가 잡았고 옆에는 마달 형이 앉았다. 키가 큰 권코비치와 연기스는 두 번째 줄, 연습생 형과 도미니크리는 세 번째 줄에 앉았다. 우리는 화창할 날씨에 신선한 경부고속도로의 공기를 가르며 감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중간에 두 번 휴게소에 들렀고 평사휴게소에서 생 라면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난 졸음운전을 하지 않기 위하여 아침을 적게 먹었었고, 점심에도 라면 일부를 권코비치에게 양보하며 식사량을 줄였다. 감포로 가는 동안 회원들은 여러 가지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고 때로는 트롯으로 귀를 적셔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거의 세 시간 만에 경주 IC로 나갔는데 차가 정체되어 도착시간이 너무 늦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다행히 행운의 여신이 우리 편이었다. 2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정체구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감포항으로 갔다. 감포항 수산물 시장은 한산한 편이었고, 해산물이 신선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엄청남 크기의 가리비, 백고동을 샀고, 갑오징어는 마달 형이 개인 돈으로 구입했다. 무엇보다도 마달 형의 시선을 멈추게 한 것은 광어나 도다리처럼 생겼으나 그 어종보다 더 고급 어종인 이시가리였다. 이시가리는 머리 부분이 두꺼비처럼 생기고, 입술이 두꺼우며 온 몸에 돌기가 나있는 물고기로 뼈가 연하여 버릴 것이 없는 어종으로 돌도다리라고도 한다. 권코비치가 지갑을 열면서 나는 처음 이시가리를 먹어보게 되었다.
그린부 회원들이 수산물시장에서 쇼핑하는 동안 나는 부둣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아주머니 가까이 다가가서 그물이 어떤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하는지 물었다. 아주머니 대신 옆에 계시던 퉁명스럽게 보이는 선장아저씨가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 그물은 아구를 잡는 것인데 길이가 100m, 폭이 2m 정도고 바다 속 60m까지 투망하여 아구를 잡는다고 하셨다. 난 농촌 일은 조금 알지만 어촌 일은 문외한이었다. 아주머니의 앉아계신 모습에서 허리가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구력을 요구하는 노동의 대가는 농촌이나 어촌이나 마찬가지로 신체의 고통을 동반한다.
감포면 소재지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저녁에 먹을 음식을 장만했다. 메모지에 적었던 대부분의 음식은 샀는데 냉동새우와 황태포를 사지 못한 채 숙소로 향했다. 숙소인 소풍펜션은 감포항에서 차로 겨우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여자들은 3층 작은 방, 남자들은 4층에 큰 방을 배정했다. 4층 숙소는 방, 거실, 베란다로 구분되어 있었고 커다란 거실의 구석에 싱크대가 있었다. 방은 충분히 넓었는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화장실이 한 개이고 문고리가 고장 나서 안에서 잠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베란다가 널찍하여 20명 이상의 인원도 수용할 만했다. 베란다에 놓인 튼튼한 두 개의 나무 테이블 가운데에는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짐을 풀어 놓고 확 트인 베란다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동해바다였다. 베란다에서 건물 1층을 내려다보니 수영장 있었고 옆으로 테이블과 파라솔이 4세트 놓여 있었다.
소풍펜션의 주인은 마달 형이 잘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나와도 구면(舊面)이었다. 올 1월 초에 안면도에서 민박집을 운영했었고 내 아들 병택이와 형택이가 바지락 잡는 것을 도와준 친절한 가이드였다. 안면도 민박집을 떠나 경주 감포에 와서 새로 둥지를 튼 것이다.
팬션집 주인 부부가 손발이 척척 잘 맞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우리는 서둘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둘러앉아 이시가리와 소주의 만남을 주선했다. 술이 술술 들어갔고 쫀득쫀득한 이시가리의 식감을 즐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건배를 외치며 연신 술잔을 들어 목운동하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난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으며 덜 취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린부 회원들 모두 마달 형이 만든 토퍼를 배경으로 핸드폰의 셔터를 눌러 오늘의 행복한 감정을 기록했다.
소주와 이시가리를 1차라 했으면 바닷가에 가서 마신 맥주와 과자는 2차였다. 난 맥주를 맛있게 마시기 위해서 여행오기 전에 그릇가게에 들러 예쁜 플라스틱 투명 잔을 7개 사두었었다. 동해바닷가에서 석양은 볼 수 없었지만 힘찬 파도소리를 들었고 깨끗한 바닷물에 발을 담구고 힐링을 했다. 마달 형이 바닷가를 둘러보다가 해삼 같은 흐물거리는 물건을 잡아 두 손을 들어올렸다. 형은 연신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물건을 건져 올렸다. 내가 가까이 가서 물어보니 그 것은 바다달팽이로 불리는 ‘군소’였다. 나도 동참하여 바닷가를 살펴 두 마리를 잡아 총 열 마리를 잡았다. 군소는 보라색 액체를 분비하여 내 손을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저녁에 내가 군소를 칼로 손질하여 삶았는데 내장을 빼고 삶으니까 그 크기가 100분의 1로 줄어들었다. 군소의 맛 또한 씁쓰름하여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모두들 맛을 한 번 본 것으로 의미를 두었다.
3차로 베란다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는데, 나는 구운 소시지 한두 개를 먹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을 끝냈다. 이미 내 몸에 상당량의 술과 음식이 자리 잡고 있었고 도저히 더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로마인처럼 더럽게 먹은 음식을 토하고 다시 먹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신체리듬의 명령에 복종하여 조용히 방에 들어가 누웠다. 그린부 회원들과 더 많은 시간 감포의 밤을 즐기고 싶었으나 내일의 안전한 귀가를 위하여 참았다. 방에서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누우니 밖에서 회원들의 웃음소리와 파도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무슨 요리를 해서 먹는지 뚝딱뚝딱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지만 내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새벽 6시에 눈을 떠서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어제 먹었던 그렇게 많은 음식들이 벌써 소화가 다 되었는지 뱃속이 허전했다. 얼큰한 라면국물을 먹으니 속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해장이 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일어나 움직이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일어났고 7시 30분 정도에는 모든 회원이 테이블 주위에 앉았다. 연습생 형은 어제부터 요리를 담당했는데 칼솜씨가 훌륭하여 확인해 보니 한식요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아주 유용한 기술을 배워 놓으신 것 같다. 마달 형이 아침부터 맥주 한 병을 시작으로 해장을 하였고, 이어서 다른 회원들이 모두 참석하여 어제 먹다 남은 소주 세 병까지 동원하여 아침의 해장파티는 찐하게 시작되었다. 연습생 형이 만든 돼지두루치기는 해장술의 일등 안주감이 되었다. 그리고 어제 지나쳤던 대형 마트에 들러 냉동새우를 샀고 결국 마달 형의 감바스를 맛보았다. 올리브기름에 새우와 마늘이 듬뿍 들어갔고 새우를 식빵에 올려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마달 형의 북어국과 감바스를 끝으로 모든 회원들은 만족하게 놀고, 먹고, 마시며 그린부의 첫 여행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1층 커피숍에서 모닝커피를 주문했더니 남자 주인이 무료로 주려하기에 정중히 사양한 뒤, 다시 주문을 넣어 계산했다. 지인이라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서로 불편함이 없는 것이다. 바닷가 파라솔 밑 테이블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하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권코비치 동생이 커피를 마시면서 수차례 이야기를 했다. “너무 좋네요.”, “너무 좋네요” 주위를 둘러보니 그린부 회원들 모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풍펜션은 지인카드로 오후까지 사용할 수 있었으나 모두들 연장하기를 원치 않았다.
대전으로 가는 길에 감포항 수산시장에 들러 마달 형이 커다란 가리비와 꽃새우를 사서 두 개의 스티로폼 박스에 나눠 담았다. 나는 수산시장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경주 IC에 들어가기 전에 경주빵과 찰보리빵을 한 상자씩 샀다. 혼자만 재밌게 여행 갔다 온 것에 비하면 식구들에게 너무 작은 선물이었다. 찰보리빵은 매형네 식구와 나눠 먹고 경주빵은 테니스 회원들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대전에 올라오는 내내 그린부 회원들 중 잠을 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모두들 내가 졸음운전을 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그린부 첫 여행의 행복한 여운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난 그린부 회원들의 마음이 후자이기를 바랬다. 모두들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1박 2일을 보냈고, 누구 한 명 노는 사람 없이 같이 차리고 먹고 치우면서 진정한 단합의 시간을 가졌다. 일곱 명 모두 술을 마실 줄 알았던 것도 우리의 동질감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다. 대전에 도착해서 마달 형이 먼저 차에서 내렸고 내가 운전하느라 고생했다고 스티로폼 박스 한 개를 남겨 놓았다.
최근에 읽은 책 《용서》에서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자신만 생각하고 타인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매우 좁은 공간만 차지하게 된다. 그 작은 공간 안에서는 작은 문제조차 크게 보인다. 하지만 타인을 염려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자동적으로 넓어진다. 이때는 자신의 문제가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성인이나 훌륭한 종교지도자 만큼 타인을 생각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테니스장에서 같이 땀 흘리며 함께 스트로크, 백핸드, 발리, 스매싱, 서브를 배우는 그린부 회원들을 염려하고 싶다. 그들이 나의 관심과 염려를 귀찮아 하지만 않는다면 그들과 삶, 행복, 건강, 자기개발, 술, 사랑을 논하며 내 마음의 공간을 무한대로 넓히고 싶다. 올해도 이미 170여 개의 구슬을 꿰었고 한 알 한 알이 각기 다른 크기 다른 모양으로 영롱한 빛을 내고 있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 moon5865@hanbat.ac.kr
바이러스 백신은 카아키색
이 대 영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백화점 주변마저 한산하다. 입춘을 맞이해 올 해도 어김없이 꽃샘추위가 찾아 왔다. 행인들은 저마다 마스크로 입을 봉한 채 눈을 허공에 달고 어딘가로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
‘30년 만의 만남이라니......’
지하철역 쉼터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나는 핸드폰을 보고, 또 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지하철역사의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도 처음이려니와, 누군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 시간도 아득하다.
전철에서 내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그들 또한 한결같이 마스크로 입을 막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기에 분주하다. 나는 개찰구에 시선의 끈을 놓지 않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상행선이 아닌 하행선 열차였던 모양이다.
군대 동기인 그를 만난 것은 정확하게 30년 전이었다. 제대 후, 대학원에 다니며 서대전사거리에 위치한 대입학원에서 국어강의를 하고 있을 때, 그는 어느 리조트 회사에 입사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홍보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회사 동료 네 명과 함께 교무실로 찾아 와 리조트 홍보팸플릿을 돌렸지만, 백면서생이었던 나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변변히 차 한 잔도 못했던 그와의 만남 이후, 마냥 세월이 흘러 버렸다. 내가 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늘 영상에 잡히곤 했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통해 백마부대 전역자 모임인 ‘백마전우회’ 카페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멀게는 월남전에 참여했던 선배 기수로부터 최근에 전역한 후배기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연들을 글이나 사진으로 올려놓고 동기나 선후배들을 찾고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인성이 좋았던 그도 댓글과 전화번호를 올려놓고 대화방에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서울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여전히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마라톤 행사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의 안부 전화 후 한동안 그를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의 딸 결혼식 초대장을 받았다. 예식장이 인천인데다가 동행할 사람이나 아는 사람도 없던 터라 축의금만 전달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참석했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초등학교 여자동창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나와의 만남을 위해 하루 일찍 내려온다는 것이 고마웠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은행으로 달려가 5만 원 권 몇 장을 출금했다. 그리고 내 지갑에 고이 모셔 두었다. 그에게 술 한 잔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철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오랜 만의 만남이어서인지 자신의 얼굴을 쉽게 알아보라고 기차 안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기 때문이다. 갈색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카키색 군복을 입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상으로 올라오는 무리 속에서 갈색 모자를 찾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없었다. ‘다음 열차로 들어오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모자를 쓴 그가 멀찍이 떨어져 나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퇴색한 배낭을 멘 등산복 차림이었다.
술집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쇠고기를 두 접시나 시키고, 식탁에 소주병이 꽉 찰 정도로 술을 마셨다. 노래방에 가서도 노래는 부르지 않고 군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 호프집에서도 군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입대한 것은 폭염으로 연병장이 절절 끓던 8월 중순이었다. 그 해는 유독 남북관계가 미묘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2월에는 북한군 현역 대위가 MiG-19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했으며, 10월에는 미얀마 아웅산 묘역 폭파사건으로 긴장이 고조 되던 시기였다. 10월에 자대배치를 받고 내무반에서 잠을 자던 첫날부터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그럼에도 모포를 뒤집어쓰고 세상모르고 자다가 선임병에게 혼쭐났던 이야기로부터, 신병교육대, 백마하사관학교, 팀스피리트 훈련, 공지합동훈련, 200km행군, 매복 근무, 도봉산 유격장에서의 일화 등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와 나의 현재의 신분이나 사는 형편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20대의 기개 넘치던 전우가 되어 있었다. 그와 내가 나눈 이야기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잠재우고 밤을 카키색으로 물들였을 것이다.
자정 가까이 되자, 어두운 거리가 터덕거리는 사람들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어느덧 내 몸에는 군복이, 발에는 군화가 신겨 있었다.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신병교육대에서 머리를 땅에 받고 배웠던 군가가 흘러나왔다. 낮고 힘차게 퍼져나가는 나의 목소리는 아마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국경너머로 쫒아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웃 사람들
봄빛을 가득 머금은 하늘이다. 멀리 보문산이 한결 선명하게 보인다. 한 층만 더 올라가면 대전 시내 전경이 시야에 들어올 듯도 한데, 아파트 앞 동 지붕에 가려 뒤 베란다로 나가야 더 잘 보인다. 산을 멀리하다보니 걸음걸이가 자꾸 뚱뚱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27개동으로 구성되어 2,398세대가 살고 있다. 또한 바로 옆 아파트에는 22개동에 2,199세대가 살고 있으니 가히 아파트촌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여 대전에 온 후로 나는 줄곧 개인주택에서 살았다. 이곳으로 이사하기 직전, 잠깐이나마 5층 아파트에서 생활한 적은 있었지만, 내가 16층 높이에서 살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사 온 첫날, 새로 들여 온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하자니 꼭 하늘에 ‘붕’ 떠 있는 느낌이라 잠자리를 뒤척였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20층으로 설계되어 있는 아파트에 20여 년 살다보면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엄마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아이들이 자라 숙녀가 되고, 어느 날 아이를 낳아 아파트에서 조우하게 되면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내가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게 된다. 많은 세대들이 이사를 오고, 또 가기도 하지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 세대들을 보게 된다. 바로 재래시장에서 자리를 깔고 장사를 하는 토박이들이다. 이 아파트는 재건축시공을 하여 2002년 준공을 보기까지 대전에서 꽤 인지도가 있던 아파트였다. 비록 연탄을 때야 하는 5층짜리 17평 주공아파트였지만, 아파트가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라 인기가 있었다. 물론, 이곳도 재건축 당시 시공사와 원주민들과의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97년 9월, 도로매입비 등 일부 공사비 부담을 둘러싼 시공
23사와 조합의 마찰로 10%의 공정을 보인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 때, 새로 이사 갈 집을 구하려던 나는 아내와 함께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아 간 적이 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격한 외침과 꽹과리 소리, 그리고 묘한 분위기에 묻혀 구경도 못하고 발길을 돌린 기억이 있다. 이후, 이곳 아파트를 구입하여 이사를 왔으니,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 전혀 우연은 아닌 듯하다.
출퇴근 시간에 주로 승강기를 통해 만나는 이웃들은 매번 같은 층에서 타고 내림에도 다음에 만날 때는 또 몇 층에 사는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선 우리 집과 같은 층을 사용하는 가구는 오랜 교직생활에서 퇴임한 후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분들이 이사 오기 전에는 아들 하나를 둔 부인이 수학 과외를 하며 살았었다. 그러고 보면 16층은 교육의 맥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바로 위층에는 약사를 하시는 노부부가 사시다가 근래에 이사를 갔다. 칠순 노인임에도 건장하여 걸을 때마다 쿵쿵 울려 애를 먹었는데 속이 후련하다. 그 전에는 내 큰 딸의 초등학교 은사가 은행에 근무하는 남편과 살다가 떠났으며, 최근에는 7층 아주머니의 아들이 이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7층 아주머니 또한 이곳 토박이다. 그와 친해지게 된 것은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출근길에 아파트 문을 나서던 나는 우회전 하던 중 건널목 신호등에 멈추어 섰고, 아주머니는 왼쪽에서 오는 차량만 주시하다 미처 내 차가 멈춘 것을 모르고 차 후미를 추돌한 것이었다. 차량에서 내린 아주머니와 나는 안면이 있었던 터라 멋쩍게 웃고야 말았다. 가벼운 흠집 정도면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뒤 범퍼가 깨져 후방카메라가 덜렁 나와 있었다. 그날 범퍼를 새로 교체하는데 50만원이나 들어 못내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그것도 아주머니가 통장이체를 두 번이나 하여 50만원을 되돌려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 후, 거의 매일 도배 일을 나가는 그를 승강기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때로는 농담도 주고받게 되었다. 남편 없이 억척스럽게 일을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대단하다!’는 말을 직접, 또는 속으로 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돈을 모아 아들에게 아파트를 사주었다니 가히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다. 바로 아래층 아주머니와는 화장실 누수 때문에 안면을 텄다. 리모델링 공사 후 아래층에서 누수현상이 생겨 이를 수리하느라 왕래하다보니 친숙하게 되었다. 새벽마다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남편은 있는듯한데 아저씨 얼굴을 본 적은 없다.
아래로 내려가 1층에는 축구선수를 꿈꾸는 꿈나무가 살고 있다. 조석으로 축구공을 친구 삼아 기술을 익히고, 20층까지 오르내리며 체력을 단련시키고 있다. 5층에는 외국인 교환교수가 살고 있는데, 2년마다 새로운 외국인이 입주하여 그들과의 대화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8층에는 착한 두 딸을 둔, 이웃과 나눔을 가질 줄 아는 부부가 살고 있으며, 10층에는 은행에 다니는 멋쟁이 노처녀가, 12층에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살고 있다. 13층에는 세 딸을 둔 잉꼬부부가 오랫동안 살고 있으며 20층에는 몸짓이 풍만한 모녀가 멀리 나가 일하고 있는 가장과 세대를 구성하고 있다.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고층아파트도 이처럼 나름대로 삶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아파트도 하나의 동네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녀의 양육에 정보를 교환하고, 시장을 보고 돌아올 때 만나는 이들에게 바구니 속에 있는 것을 꺼내 나눌 줄 아는 인정이 있는 동네이다. 간혹, 부녀회와 동 대표, 혹은 관리소 관계자들과의 갈등, 경비직에 대한 인격비하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 어찌 분쟁이 없겠는가. 아파트에도 시골동네와 같이 입구와 출구가 있고, 탁구장이나 헬스장, 골프연습장과 같은 운동장도 있다. 담 밑에는 야트막한 산과 같은 둔덕도 있고 나무들도 울창하게 자란다. 아파트 관리소는 마을회관이며 우리들의 이웃이 있고, 어르신과 새싹들이 드나드는 삶터이다. 그러기에 아파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타인이기에 앞서 이웃이며, 현재, 함께,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내 아이들도 결혼을 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드나들 것이며, 누군가는 이를 보고 또 색다른 감정을 가질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 아파트를 떠날 것이며, 내가 살던 자리에 누군가가 와서 둥지를 틀 것이다.
나와 이웃, 그리고 미래에 이곳에 둥지를 틀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