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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믿음의 새 출발(롬 4:1~3, 16~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ㄱ)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
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로마서 4장에 이름이 자주 나오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홉 번 나옵니다.
로마서 전체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열한 번 나오는데 두 번 빼고는 모두 4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 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4장 시작 부분에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로 말미암은 언약”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1절에서는 아브라함을 육신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다시 성경을 보면 “육신으로” 앞에 어깨 번호, 정식 이름으로는 각주 번호 1)이 붙어 있습니다.
성경 맨끝의 각주를 보면 “1)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라고 나옵니다.
각주를 예전에는 ‘난외주(欄外註)’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사본들이 있는데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라고 되어 있는 유력한 사본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더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입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은 한걸음 더 나가서 모든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말씀이 있고, 16절 뒷부분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그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예전에 교회학교에서 많이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지금도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이 노래입니다.
많이들 아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중에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데요
오른팔 들어요 왼팔 들어요 고개를 흔들어요
저는 어떻게 이 노래가 교회에서 불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었고, 창세기 25장을 보면 아내 사라가 죽은 다음에 후처 그두라를 맞이하여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여섯 명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 가운데 하나는 키가 크고 나머지는 작다는 것은 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노래 덕분에 머리에 깊이 새겨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말입니다.
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름은 대부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9절 뒷부분,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1절 앞부분,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13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오늘은 로마서 강해 여덟 번째 시간인데 그동안 이 시간에 네 글자로 된 단어 하나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이신득의(以信得義)’입니다.
이신득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모범을 보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조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오리지널입니다.
여러분, 이신득의라는 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기억을 하고 있으면 언제인가 이해가 됩니다.
더 나가서 그것이 몸으로 느껴지는 체험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군대생활을 할 때 어느 수요일 밤에 웬일인지 교회가 몹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대를 빠져 나와 근처 골목에 있는 교회에 갔습니다.
군인이 외출을 하려면 절차가 복잡한데 그때 복무하고 있던 부대는 좀 자유로웠습니다.
그냥 부대 안에서 입는 작업복 차림에, 비가 오고 있어서 우비를 걸치고 나갔습니다.
작은 교회이어서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수요일 예배에는 교인들이 참석하는 교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날은 비가 와서 더욱 그런 것 같았습니다.
교회에 농담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 비 오는 수요일 밤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로마서를 가지고 이신들의, 우리 공로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열심히 말씀하셨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다가 입대를 했으니까 그 사실은 알고는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 밤에 그 사실이 강하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그 진리가 온몸을 적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예배 마치고 나오면서, 제가 군인이었으니까 이름 모르는 그 목사님에게 힘차게 거수경례를 하고 싶었습니다.
교회에서 그러는 것은 어색해서 아주 힘있게 악수를 했습니다.
그날 체험 때문에 지금도 제가 이신득의를 자주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비롯해서 오늘 본문에도 여러 번 나오고, 로마서 이곳저곳에 나오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신득의, 이 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절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18절의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들은 말씀은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2)
그런데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지도록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식을 바랄 수가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내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3절에는 엘리에셀을 “내 집에서 길린 자”라고 했습니다.
뒤의 이야기, 이삭이 태어난 뒤의 이야기이지만 창세기 24장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 24:4) 당부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늙은 종은 성실하게 그것을 이행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 엘리에셀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과연 상속자로 심으려고 할만합니다.
하나님은 아니라고 그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고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15장 4절에서 8절까지를 읽어 드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러분, 믿음이 흔들릴 때 밤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밤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며 믿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바랄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하는 일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18절의 말씀에 이르러서 무릎을 치며 ‘나, 수지 맞았다’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여러 교회나 모임에서 통일선교에 대해서 종종 설교합니다.
그럴 때 에스겔서 37장 17절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나 신명기 2장 3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를 본문으로 택하는 경우가 맘많습니다.
성경에는 ‘통일’이라는 말이 에베소서에 꼭 두 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하나, 에베소서 1장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통일은 안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래 많았는데 요즘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분단이 오래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고, 최근에는 신냉전이라는 말이 나오고 남북 관계가 험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한반도의 통일은 바라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본문은 통일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초월적 통일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께서 빠른 시일 안에 초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주실 것이다. 그것을 믿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앞으로는 통일에 대해서 말할 로마서 4장 18절도 본문으로 택해야 하겠다 바라기 어렵지만 바라고 믿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했습니다.
설교 준비는 제목과 본문이 정해지면 반은 끝난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좋은 본문을 발견했으니까 수지 맞은 것이지요.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성도 여러분이 수지 맞아야 하는데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가 먼저 수지 맞아 죄송합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단순히 ‘고향’이라고 하지 않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연고가 깊은 곳,. 지연과 혈연이 얽힌 곳이라는 뜻입니다.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 조카 롯,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서 모은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소유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문명이 발달한 곳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지금 이라크 지역입니다.
하란을 떠날 때 나이 칠십오 세(창 12:4),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제일 어려운 점, 하나님은 ‘어디로 가라’ 하시지 않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아야 사전 조사를 하고, 가는 길도 파악하고 살 곳도 마련하고 출발할 텐데 막연하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모하기 그지없는 지시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아브라함,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다”라고 싶었는데, 열다섯 글자, 너무 길기 때문에 “아브라함, 믿음의 새 출발”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한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서 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인 24장의 2절과 3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한 것을 이스라엘 역사의 새 출발, 믿음의 새 출발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믿음의 새 역사를 이어나갈 것을 당부합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다음은 사도행전입니다.
스데반이 공회에 잡혀왔습니다.
최후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역시 아브라함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리고 스데반은 이어서 요셉, 모세, 다윗의 이야기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잘 아시는대로 믿음 장입니다.
거기에 믿음으로 산 조상들의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디,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 그 가운데에서 분량을 제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10절까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새 출발을 한 일은 성서에서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성경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원역사’라고 부릅니다.
‘역사 이전의 역사’라는 듯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한 12장부터를 ‘역사적인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하지 않았다면 성경 기록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새 출발을 하면 그의 삶이 바뀝니다.
그의 생애가 바뀝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믿기 이전과 믿은 이후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태신앙(母胎信仰), 부모로부터 믿음을 물려받아 나면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돌이켜 보면 신앙의 결단을 한 때가 있습니다.
또 그런 때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기도 하고 ‘제2의 탄생’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새 출발을 하면 그의 집안이 바뀝니다.
아까 읽은 여호수아서 24장의 말씀에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데라는 우르에 살면서 우상을 만들어 팔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어느 날 아버지가 없을 때 신당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만든 많은 우상을 망치로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큰 우상의 손에 그 망치를 올려 놓았습니다.
돌아온 데라가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아들 아브라함을 불러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까 신당에서 우당탕 큰 소리가 요란하게 났는데 저 큰 우상이 다 부순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데라가 더 화가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우상이 어떻게 다른 우상을 부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런 우상을 왜 섬기며 만들어 파느냐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새 출발을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집안은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집안이 되었습니다.
한 지역에 복음이 들어가면 그 지역이 변화되고 새로워집니다.
이런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을 지역교회사라고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과 복음이 들어온 이후의 역사는 성격이 다르다고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너무 기독교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 기독교의 역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냐, 자화자찬이 심한 것이 아니냐 하기 쉽습니다.
저도 ‘그런 것이 아닌가?’ 스스로 경계하면서 살펴보기도 하는데요, 기독교가 우리나라 역사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을 비정상적인 국가라고들 많이 말합니다.
저는 북한선교를 하면서 북한의 여러 형편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NGO로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도 했는데 북한이 비정상적인 국가라는 말에 누구보다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외톨이 나라, 고립된 나라라고도 합니다.
북한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통일과 북한복음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때로는 복음화 없는 통일, 거기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통일’이라고 하지 않고 ‘통일선교’ 또는 ‘복음통일’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면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됩니다.
오늘은 주일인데 주일은 한 주일의 첫날입니다.
그래서 달력을 보면 주일이 한 주일의 제일 앞에 인쇄되어 있습니다.
주일을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면 그 주일이 지난 주일과 다른 주일이 됩니다.
로마서 4장은 끝부분에서 아브라함만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에서 끝절인 25절까지를 봅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아 믿음으로 매일, 매주 새롭게 출발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