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등 학교장 현장 연수 결과 보고서 후당 전 보 규
1. 연수 일자 : ‘2000. 7. 13(목)~ 7. 15(토) 2박 3일간 2. 연수 장소 : 거창, 통영, 거제시 3. 참석 대상 : 경산 관내 초․중등 학교장(초등 26명, 중학 11명, 고등 5명) 42명 4. 연수 주제 : 새 학교 문화 창조를 위한 교육 현장의 문제점에 대한 공동 해결 방안 5. 연수 결과 보고 내용
가. 상쾌한 출발과 알찬 여정 7월 13일(목) 08:00 제1 승차장인 경산 공원 테니스 코트에서 11명의 회원을 싣고 출발한 연수단은 우리 교육청 관계자와 교육위원회 윤영조 의장의 환송을 받으며 제 2집결지인 대구 남부 정류장 옆 승차장으로 달렸다. 제 2집결지에서는 대구 시내에 거주하는 회원들이 일찍 나와 서로의 인사를 나누며 그간의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경산교육청 학무과장과 초등 담당 장학사 여러분이 우리 연수단 일행의 장도를 전송하고자 나오셨다. 이때가 출근 시간인지라 모두들 바쁠 시간인지라 다들 바쁠 터인데 다른 시․군에서 보기 힘든 전경이라 생각되었다. 그 중에서도 진량초등학교 심상준 교감 선생과 직원 한 분이 맥주와 음료수 몇 박스를 준비하여 이번 8월말로 정년퇴임을 하시는 박영서 교장 선생을 전송하고자 나오심은 다른 교장 선생들의 시선을 끌만 하였다. 이번 현장 연수를 위해 경산대학총장의 특별 배려로 대학 버스를 제공받아 연수 첫날부터 상쾌한 출발을 함으로써 이번 연수의 알찬 결실을 예고하였다. 본 연수 단장인 무학여고 이병희 교장 선생님께서 본 연수 취지와 그간의 추진 과정을 설명하셨고, 그 뒤를 이어 회원 개별 소개와 함께 연수단 회원을 태운 버스는 88고속도로를 기분 좋게 달렸다.
나. 경남의 명문 거창고등학교 탐방 12: 20경에 1차 중간 귀착지인 경남교육청 관내 고등학교 중 전국적으로 이름난 사학의 명문인 거창고등학교에 도착하였다. 강당에서 도재원 고등학교 교장선생을 대신하여 전성은 중학교 교장 선생의 구김 없는 학교현황 소개와 이형원 교감 선생의 보충 설명으로 본교가 명문교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우리 회원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특히 본교는 1956년 전영창 선생님이 빚으로 넘어가는 학교를 인수하여 현 풀무원 원장이신 원경선 선생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새로운 학교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주시민 육성”이라는 교육목표 아래 “진리를 사랑하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인류 평화를 추구하는 하느님의 동력자가 되게 한다”는 교육이념에 걸맞게 인간교육과 진로교육에 매진하고 있었다. 전교생이 500명인데 출신 중학교만 해도 330여 개나 된다고 하니 명실 공히 전국 각지에서 모여 던 학생들을 모두 기숙사에 합숙시켜 개성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통하여 졸업 예정자 중 20% 이상을 서울대학에 진학시키며, 거의 100%가 4년제 종합대학에 진학한다니 시골 오지의 지방에서도 가히 명문교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 학교라 하겠다.
다. 퇴계 선생의 시혼이 서려있는 수승대 점심시간도 잊은 체 1시간 30분간 학교운영에 대한 질의와 답변을 듣다보니 시장기를 느꼈지만 우리 일행은 강행군으로 거창의 명승지인 수승대에 도착하였다. 수승대는 위천면 한살리 750-3에 위치한 곳으로 삼국시대 때 백제 사신을 신라에 보낼 때 전송하던 곳이라 하였다. 1543년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을 지나시다 경관의 수려함을 격찬하는 시구 속에 수승대(授勝臺)라는 글귀가 있어 그때부터 수송대(授送臺)를 수승대(授勝臺)라 개칭하여 불렀다고 한다. 우리는 간단한 점심을 하고서 유원지를 둘려보니 흐르는 냇물이 과히 천하의 명경지수이며, 아름답게 축조된 석축 제방과 조화를 이룬 각종 위락 시설과 수련대 등은 국민 관광지로 손색없어 이방인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다만 이런 곳에 안내판이나 홍보 책장을 무딘 눈으로 찾지 못해 아쉬움이 있어 여행에서 돌아온 후 거창군 공보실로 전화를 하였더니 행정서기 강영자 님의 친절한 설명으로 알게 되어 너무 고마워 거창군 부군수님에게 전화를 드려 직원들이 보여 준 친절과 복무 자세에 대한 감사함을 전해 드렸다. 올 8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이곳 수승대에서 국제 연극제가 열리게 되어 있어 국제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됨으로써 더욱 유명세를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곳이기도 하다.
라. 노래 실은 연수 버스, 열기 품는 현장 연수 퇴계 이황 선생의 영기가 서린 수승대를 뒤로하면서 지난 해 경남에서 태풍의 피해로 많은 인명을 앗아간 지리산 대원사 계곡을 향했다. 그간 학교경영에 골몰하시며 주어들은 구수한 재담과 틈틈이 익힌 십팔번 애창곡은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쉰 세대와 신세대의 차이가 이런가 보다 싶었다. 도롯트나 민요이면 쉰 세대요, 빠른 탬프나 째즈나 랩 등의 신곡 퍼레이드를 벌려야 신세대 반열에 끼워준다고 하더니, 이런 현장연수를 위해 한 곡 정도는 신곡 발표를 선보이기도 해봄직 하려마는 하나같이 슬로우 도롯트나 흘러간 노래 가락이니 어찌 우리 일행을 쉰 세대라 아니 하리요. 그나마 다행한 것은 여 교장 삼총사가 이따금 가곡을 멋지게 불려 분위기를 돋우니 감칠맛이 났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무학고등 이병희 교장의 구수한 재담과 구성진 노래 가락과 청천초등의 김광웅 교장의 다양한 레퍼트리는 우리 회원 중에서도 압권 이였다. 이 두 분이 무려 30여곡이나 경창하는 바람에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였으니 그 열기는 가히 짐작을 하고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마. 恨 맺힌 智異山 大元寺 계곡 굽이굽이 돌아 찾아간 곳은 그 어디메뇨? 우리나라 산천 경지 치고 금수강산이 아닌 곳이 그 어디메뇨? 해발 800여 미터를 팽이처럼 원을 그으며 높은 고도를 올라갔다 다시 내려가며 탄성을 지른 대원사 계곡! 비구니 참선 도량과 늙은 소나무의 비경이 조화를 이룬 대원사!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9년(기원전 658년)에 평원사라는 이름으로 연기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으나, 숙종 11년(1685년)에 운권 선사가 대원암을 짓기 시작한 후 1890년 고종 27년에 혜흔 선사에 의해 역사가 시작되어 크게 중수하여 오늘의 대원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이곳이 빨치산 근거지로 이용되는 등 이데올르기 대결의 장이 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이와 같이 깊고 긴 계곡이 자연의 피해인 지난해 태풍 때 피서 차 야영하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한 맺힌 곳이기에 우리 일행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삼가 옷깃을 여미며 숨진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일선 현장에서 학생들과 야영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어 캠프를 설치할 때 지형지물과 입지 조건을 선정할 적에 경종으로 받아드릴 현장 체험의 계곡이라 숙연한 마음으로 그곳을 둘려보았다. 더위도 식힐 겸 우리는 양말을 벗고 잠시 지친 발을 냇물에 담그니 그 시원함을 어디에다 비길까? 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는 육로로 2km 정도나 가야한다기에 시간에 쫓기는 나그네들은 대원사 계곡을 뒤로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바.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상의 도킹 작전 우리 교육청 이갑덕 교육장이 오늘 급한 업무가 있어 아침에 우리와 함께 출발하지 못했다. 모두 못내 아쉬웠던 차 오전 업무를 급히 마무리하시고 오후에 업무용 차량으로 우리가 가는 경유지를 찾아 쫓아 합류하시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매한 나로서는 달리는 차들끼리 중간에서 어떻게 접속할지 자못 궁금하였다. 그러나 현대 정보 통신의 총아인 핸드폰이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우리가 국도로 고성을 벗어나 남해 고속도로를 달릴 때 핸드폰으로 몇 번 서로 연락이 오고 갔다. 마지막 통화에서 현재의 위치와 달리는 방향을 이야기해 주니 그 쪽에서 몇 분 후 어느 지점에서 기다리겠다는 응답이 날아왔다. 아마 20여분을 달렸을까 통영으로 가는 길목에 교육장 관용차가 비상 라이트를 켜 놓고 우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영화에서나 봄직한 007 작전을 방불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 열기를 품어내는 분임 토의 누가 말하였던가!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교장 선생님들이 초․중으로 나누어 「학교 바로 세우기를 위한 학교장의 역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과 자성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가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열기를 가하며 논의된 내용을 유형별로 묶어보면 학교경영의 투명성 확보와 책무성 고양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학교 경영의 투명성 확보에는 소극적 개념의 투명성과 적극적 개념의 투명성으로 대별할 수 있었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 재정의 공공성과 효율성이라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쫓고 있었다. 그래서 소극적 개념의 투명성은 학교 재정의 투명성으로 지칭되면서 예산 집행의 공공성을 강조하였고, 적극적 개념의 투명성은 학교예산 및 시책의 효율성을 강조하였다. 미래를 예측하는 선견지명과 미래를 대처할 수 있는 학교 경영을 들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예산 집행의 투명성이 중요할 것 같으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바르게 예측하고 투시하여 시행착오나 우회로 인하여 시간적 경제적 낭비 요소를 없애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장의 올바른 교육 철학과 이념에서 출발한 경영 전략과 업무의 추진력이 관건일 것이라는 점에서 이의가 없었다. 책무성 고양은 교원의 사기 앙양과 올바른 근무 자세이다. 교단이 흔들리고 교권이 유린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일선교사들의 사기는 추락할 때로 추락해 교직 수행에 대한 포기 내지 방기 현상이 팽배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선 현장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어느 누가 지키겠는가? 마지막 교육에 대한 충정의 발로로 우리 교단을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신념으로 교원의 소명 의식과 책무성을 고취하여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도 높았다. 그래서 우리 교원의 안이함만이 능사가 아니라 힘들고 고된 과업이라도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겠다.
아. 해상 도시 거제를 향하여 늦게까지 열띤 토론으로 밤잠을 설친 일행은 뜨이지 않은 눈을 비비며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때우고 환상의 해상 도시인 거제를 향했다. 거제도는 399㎢의 면적에 175,000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원래 멸치잡이 등 어장을 이용한 해양 수산업이 성행하였으나 몇 십 년 전부터 옥포만을 중심으로 조선 사업이 조성되면서 중공업이 발전한 거제도는 이제는 관광 사업까지 가세하여 연중 불황을 모르는 거대한 섬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해안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도로와 정돈된 조경이 이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였으며, 항구 근처의 크고 작은 배는 해양 한국의 위용을 자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굽이굽이 돌아 일행은 해상 관광을 하기 위하여 장승포에 도착하니 첫눈에 바다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을 한눈에 엿볼 수 있었다.
자. 유수한 역사의 거제도 야경 거제도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아방강역고’라는 서집에서 보면 변환 12개국의 삼한 시대에 독로국(瀆盧國)이라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거제라는 이름도 클 거(巨)와 건널 제(齊)로 큰 섬이라는 뜻이고, 종래의 한산섬 등 100개가 넘는 섬이 있어 많을 거(鋸)와 거제 계룡 산하 구백만이라는 구전에 따른 구제할 제(濟)의 뜻으로 거제(巨濟)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옥포대첩이나 6.25 전쟁 때 피난민 구호나 포로수용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같은 경상도이지만 남해안의 억센 사투리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첫음절에 나타나는 강한 어투와 둘째 셋째 음절의 감칠맛은 남해 간수를 연상케 하였다. 투박한 억양이며, 거친 방언이 거침없이 쏟아질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지 못해 우리들끼리 눈짓을 하며 웃곤 하였다. 통영 별미인 해물 잡탕과 진한 소주 맛은 그 중에서도 일미이며, 부두 가의 야경은 육지 나그네의 정감과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 충무공의 우국충절이 서린 한산도가 지척에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난중에 장 군께서 지으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라는 시구를 한 곡조 읊조리고 싶었다. 남들이 이야기하여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바닷가의 밤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한기를 느끼게 하며, 어떤 곳은 아열대 현상으로 잠 못 이루어 하는 이 밤도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의 조화는 알고도 오르는 지고!
차. 환상의 섬 해금강 탐사 일행은 장승포에서 아시아호 유람선을 탔다. 비가 올 듯 말듯하며 애를 태우니 우산을 준비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긴 고동소리와 함께 일행을 태운 유람선은 항구를 뒤로하며 연안을 돌아 해금강을 향한다. 노자산 끝 봉우리가 바다 깊숙이 잠기는 듯하다가 해상의 요정처럼 한 떨기 부용이 피어 솟은 듯하며, 아침 햇살이 동해에서 뜨면 천태만상의 만물상이 장관을 이룬다는 해금강! 원래는 칡이 많이 나는 섬이라 하여 갈도(葛島)라고 하였다고 한다. 중년의 선장이 안내를 겸하였다. 포구에서 해금강까지 20여분이 소요하지만 널리 공개하지 못할 국가 비상 석유 비축장이나 고위층 어른들의 별장, 전직 대통령의 생가 등 거제도의 섬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보고였다. 입심 좋은 선장의 안내방송은 많은 여운을 남기지만 타향에서 온 나그네의 귀를 쫑긋 세우기는 충분하였다. 더구나 해금강 돌섬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경우는 1년에 며칠 밖에 없는 데 오늘의 날씨가 비가 올 듯 말듯하나 파도가 잔잔하여 순풍에 돛 단 배가되어 순항할 수 있었고, 섬 안쪽까지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선장의 항해 솜씨는 유람선을 운행하는 고도의 기술과 상업성까지도 가감하여 승객들의 박수까지 유도하는 직업의식까지 불러 일으켰다. 멀리서 기암의 자태를 자랑하는 해금강은 이름 그대로 바다의 금강산 이였다. 울퉁불퉁한 기암절벽마다 사연과 형상이 조화를 이루어 조화옹의 신비함을 깨닫게 하고, 이름 모를 형형색색의 야생화초는 끈질긴 생명력을 뿜어내니 아름답다 못해 신기하게 느껴지며 보는 것마다 가는 곳마다 자연의 신비에 감탄할 뿐이었다.
카. 흐리듯 취하듯 한 비궁(秘宮)의 외도(外島) 해금강에서 외도까지는 10여분 정도 소요되었다. 중간에 선장의 구수한 재담과 함께 승선한 손님들에게 목걸이용 비표를 나누어주며 신비의 비궁에 들어갔다. 비경에 현혹되어 옆길로 세거나 호리듯 취하여 다른 배를 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과연 외도는 천상의 비궁이었다. 아열대 식물과 잘 조화된 조각 공원인 이곳 외도는 4,000 여 평의 천연동백림과 선인장, 유리카, 코코아 야자수 등 3,000여종의 수종이 한국의 파라다이스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서울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어느 부부교원이 이곳을 왔다가 섬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전 재산과 퇴직금 모두를 털어 섬을 사서 이루어 낸 섬 조경의 극치였다. 과연 천상의 비궁을 지상에 옮겨 놓았다고 할까? 선착장에 닿자마자 첫걸음부터 천상을 들어 온 느낌이다. 거대한 괴목으로 조각한 「외도」라고 아로새긴 푯말부터 어리듯 하였고, 아열대 지방의 정원수와 천자만홍의 화단을 보면 천궁을 월경한 듯 하다. 섬을 일주하다 정상마루의 휴게소에서 마시는 한잔의 음료수는 천상의 선인들이 마시는 불로장생의 감로주로 착각되어 초라한 이 나그네도 어느새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을 듯하다. 외도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지능이 조화를 이룬 천혜의 걸작이라 어느 속인이라도 한번쯤 이 섬에 들어서면 천궁의 비경이 무엇이며, 별유천지 비인간임을 맛보는 듯할 것이다. 속세의 범부가 비궁을 거널다 보니 휴대폰으로 우리 학교 여 선생님들의 맑고 낭랑한 안부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에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타. 민족의 한을 뿌린 포로수용소 유적관 거제도를 막 빠져나오려다 보면 거제시 신현읍에 소재한 포로수용소 기념관을 들리지 않을 수 없다. 동족의 비극인 6.25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에 지난해 8월 15일 개관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관은 반공 교육과 전쟁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비극의 산 교육장 이였다. 정치적 노선이나 이념이 무엇이기에 동족끼리 친공과 반공의 포로로 갈리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인한 살육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며, 카인의 후예이기에 동족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곳 거제 수용소에서만 지금의 거제 시민 규모인 173,000명이나 수용하였다니 그들의 처참한 생활상은 아니 보아도 선하게 알듯하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듬해 휴정 협정을 조인할 무렵 모든 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대통령의 포용력과 큰 정치의 구현이 세인의 경탄을 자아내기하기도 하였다니 우리 선열들의 선명한 예지를 맛볼 수 있었다.
파. 아쉬웠던 귀향 길 포로수용소 유적관 관람을 마치고 중식은 그 부근 어느 식당에서 들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깔끔한 식단에 진수성찬 이였다. 거제시 청사가 바로 앞에 있어 그런지 분위기도 괜찮았다. 남해 일미인 한우갈비에 특유한 밑반찬은 우리들의 미각을 돋웠고, 누구의 지시랄 것 없이 경로를 우대한 좌석 배열은 경산 관내 교장 선생들의 수준을 보는 듯 하였다. 오래 만에 긴 여정의 휴식을 취하며 그간의 정담도 나누다가 오후 3:00시경 버스를 탔다. 10여분을 달리다보니 일행 중 어느 교장 선생이 안경을 식당에 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알고 도움을 청하자 ‘버스를 되돌려 찾아오자, 식당에 전화를 하여 우편으로 배달해 달라고 하자, 버리고 새로 사라’ 등의 우수개소리도 쏟아졌으나 재치 있는 금락초등 박 총무가 핸드폰으로 그 식당으로 연락을 취하자 식당의 종업원이 문제의 안경을 가지고 우리 버스를 쫓아와 건네주었을 때는 관광지의 접객업소의 고객 관리와 높은 수준의 서비스 정신에 기입 박수를 받을 만 하였고, 얼마의 수고료도 한사코 마다하는 직업 정신에 우리는 경의를 보냈다. 마산을 거쳐 구마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는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더니 대구에 들어서니 우리의 귀향길을 환영하듯이 구름 덥힌 하늘 사이로 파란 하늘도 보였다. 2박 3일의 현장 연수가 긴 듯 짧은 듯 아쉬움을 남긴 체 대구에 내려서는 한국관 맞은편의 청곡리 식당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와 함께 교육장님의 격려의 말씀과 단장의 해단 선언으로 2박 3일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삼삼오오 짝지어 귀가 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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