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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문학 5호, 신년호
대죽리 모동헌 백치영감
김 영 욱
야트막 야트지도 막한
저기 보이는 높지도 그렇다고 얕지도 않는 산이 보인다.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과 안성시 일죽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10미터의 노승산(老僧山)으로 정상은 장수봉(將帥峰)이다. 설성 면민과 이웃 면민의 가벼운 등산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노성산 시민공원 주차장 솔밭에서 시작해 원경사라는 절 앞을 지나 쉼터바위, 병풍바위, 고란초 전망대, 말머리바위, 정상인 장수봉에 올랐다가 병목안교로 하산하여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등산 코스는 2킬로미터로 90분이 소요된다. 주차장에는 가볍게 요기를 할 수 있는 찐빵, 잔치국수, 순대, 막걸리를 파는 매점이 있다. 매점의 아주머니가 매우 친절하고 서글서글해서 부담 없이 앉아서 순대 안주를 시켜 놓고 막걸리를 마시며 등산으로 흘린 땀을 보충할 수 있다. 너무 인사불성으로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금물이다.
공자의『논어』옹야(雍也) 편을 보면,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동(知者動), 인자정(仁者靜), 지자락(知者樂), 인자수(仁者壽)”라는 말이 나온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인자한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인자한 사람은 장수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 했던가. 노승산을 오르고 내리는 요산요수의 사람들치고 노승산의 전설을 모를 리 없겠지만, 아직 노승산을 올라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성면의 유래와 노승산의 전설을 들려주고 싶다.
“옛날 어느 해에 큰 흉년이 들게 되었지요. 몇 십 년만의 큰 가뭄으로 논밭이 바닥을 드러내고 곡식들이 타들어가자 산의 동쪽 마을[山東地域] 사람들은 하나 둘씩 굶주림과 전염병에 허덕이게 되었죠. 이 때 어느 노스님 한 분이 나타나서 매일같이 산의 서쪽 마을[山西地域]로 탁발을 나가 공양미를 얻어가지고 와서는 산의 동쪽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거든요. 그 노스님은 바위굴에 살면서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기뻐했고 베풀기를 즐겨했죠. 그러던 어느 해 겨울에 눈이 몹시도 많이 내렸지요. 매일 마을로 내려오시던 노스님이 며칠 동안 마을에 나타나지 않자 걱정한 주민들이 노스님을 찾아 나서게 되었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산을 뒤져 찾아보니 노스님은 탁발한 바랑을 맨 채 마을로 오는 산길의 눈 속에 묻혀 입적하였던 것이지요. 이에 주민들은 노스님의 시신을 거두어 화장을 한 후 분골을 산 위에 뿌렸죠. 이런 일이 있은 후 주민들은 노스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생각하며 산을 보고 “노스님! 노스님!”하고 부르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산 이름을 “노스님이 입적한 산”이기에 노승산(老僧山)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지금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노송산(老松山)’ 혹은 ‘노성산(老星山)’이라고 하고 행정상 공식 명칭은 노성산이구먼요.”
노승산이 있는 설성면은 이천시 남부로 모가면의 아래쪽이며 장호원읍의 서쪽에 있다. 설성면과 장호원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설성산이 솟아있는데, 산꼭대기에 산성이 있다. 옛날 신라가 성 쌓을 마땅한 곳을 찾기 위해 이천지방의 여러 산을 돌아다니다가 설성산에 와서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성이 쌓여진 자리에만 돌아가며 띠를 두른 듯 흰 눈이 내려 있었다. 그래서 눈의 자취를 따라 쌓은 성이 ‘설성(雪城)’이다. 설성산이라는 이름도 설성에 의해 유래되었고, 오늘날 설성면 명칭도 설성산에서 유래되었다.
설성면에는 금당리, 행죽리, 장능리, 제요리, 신필리, 장천리, 자석리, 암산리, 송계리, 상봉리, 수산리, 대죽리 등 열두 개의 법정리가 있다. 그리고 설성면의 진산은 노승산이다. 노승산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주된 출입로는 설성면사무소 소재지 금당리 문화마을에서 시작되고 끝이 된다.
1970년대 이후 줄곧 논의되는 지구온난화로, 올해 2025년도 어김없이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신선한 바람이 부는 처서가 지나자 노승산 색깔이 나날이 달라지더니, 단풍이라면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의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을 최고로 치는데, 거기에 비하면 볼 품 없다 할지라도 갈색 단풍이 들었다. 노승산 북쪽 아래 안성, 일죽으로 빠지는 4차선 도로는 더욱 차량으로 붐빈다. 무엇을 싣고 달리는지 모르지만 절반 이상이 화물트럭이다. 저 씽씽 거리며 달리는 트럭은 몸집이 너무 큰 데, 뒤집히지 않고 무사히 평택항으로 가서 수출품을 무사히 선적할까.
그렇게 가끔 헛된 망상을 하는 사람은 ‘모동헌(慕東軒)’이라는 집에 사는 백치 영감이다. 원래 강릉 사람으로, 강릉에서 80여 리 떨어진 오대산 기슭 연곡면 삼산리에서 살다가 쉰여덟에 이천 대월면 송라리로 이사 왔다가 예순 한 살에 설성면 대죽1리로 와서 근 10년을 살고 있으니 칠십 고개를 넘은 셈이다. 처음 대죽리로 이사 올 때만 해도 백치영감은 60대 초반의 청춘이었다. 그 때 백치 영감은 고향 강릉을 잊지 않으려고, 고향 강릉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쪽을 사모하는 집’, 즉 ‘고향 강릉을 그리워하는 집’이란 의미로 택호를 ‘모동헌’으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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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대죽1리는 50여 가구가 있었는데 이장 김연년은 백치 영감보다 두 살 더 많은 신묘생(辛卯生, 1951)이었다. 새마을지도자는 정명근, 부녀회장은 김옥자이었고, 노인회장은 김성현이었다. 그리고 60세 이상 된 주민들로는 윤덕기, 안월승, 안대균, 정태선, 이재철 정태식 등이 살고 있었고, 고령의 노인들로는 이장원, 권영세, 김영재, 이강인 어르신이 살고 있었다. 60세 이하의 젊은이로는 정준화, 김인배, 정연관, 박병민 씨가 살고 있었다.
상근이 엄마라고 부르는 젊은 할머니가 이장 사모님 신경숙 여사와 같이 백치 영감의 집 모동헌을 찾아와서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인심 좋고 살만한 곳이라고 마을을 소개해 주었다. 그 후 알고 보니 상근이 엄마는 여장부였다. 대죽1리 부녀회장을 오랫동안 했고 설성면에서도 알아주던 부녀회장이었다. 항상 논밭으로 일을 다닐 때는 ‘사발이’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짓는 농사는 다르다농원에서 오이, 블루베리 등을 생산했는데, 오이는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정말 맛이 있었다.
한동안 가수 이자연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우리가 살면 천년을 사나 사랑행복(무명장수) 꿈꾸며 백세를 향하여 멋지게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친구들 어깨(술잔)를 부딪치며 아싸아싸 춤을 추어요. 노래에 맞추어 쿵작쿵작 박수를 치며 쿵 짝짝 신나게 신나게 노래를 불러요. 구구팔팔 팔팔팔 백세를 향하여” 라고 부른 노래 <백세시대>가 있었다. 그 노래는 전국적으로 주부가요교실이나 경로당 노래교실에서 불러지곤 했다.
대죽1리 경로당에서도 매주 한 번씩 있는 노래교실에서 할머니들이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사랑에는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라고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불렀는데,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우렸다.
그즈음 때마침 겨울이어서 백치 영감은 경로당에 가서 한동안 마을 노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신변잡담으로 지냈다. 시골 노인들의 신변잡담이라는 게 별난 건 아니었다. 누구는 몇 살인데, 누구하고 동갑이고, 처갓집은 어디고, 아들이 서울에서 잘 나간다든지.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얘기로 떠들썩했다. 그렇지만 자질구레한 얘기일지라도 그 속에는 노인들이 살아온 경륜으로 삶의 애환이 담겨있었다. 어느 노인이 백치 영감에게
“김씨! 김씨는 처갓집이 어데야?”
“화성시 비봉면이지요.”
“어떻게 강원도 강릉 사람이 경기도 화성으로 장가를 들었는가?”
“펜팔을 했죠!”
“응, 펜팔이라? 서로 편지질을 해서 지금 사는 마누라하고 인연이 맺어졌단 말인가?”
“그렇지요. 1970년 무렵이니까 제가 나이 18세 무렵이지요. 마을 공회당에 4-H클럽 모임방에 갔더니, 공회당 바닥에『새농민』이란 잡지가 굴러다니고 있었지요. 그 책을 뒤적거리다가 맨 뒷부분 마지막 장이 ‘펜팔’란이었는데 주소와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요. 서울에서부터 제주도까지 전국각시도의 남녀들이었죠. 여자들 주소만 훑어보다가 한 여자를 볼펜으로 꼭 찍었지요. 그래서 그 여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갔는데도 답장이 없는거죠.”
“응, 그래서 포기하고 다른 여자란 펜팔을 했단 말인가?”
“아뇨! 오기가 생겨서 다시 편지를 연거푸 서너 번 날렸죠. 그랬더니 답장이 왔거든요. 그래서 계속 편지를 주고받다가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죠. 그리고 서로 결혼도 하기로 약속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육군훈련소지만, 그땐 논산 제2훈련소인데 그리로 입영하라는 영장이 나왔죠. 그래서 군대에 간 뒤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까봐 여자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놓고 군대 가려고 무작정 여자의 집으로 쳐들어갔지요.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맨 마음으로는 도저히 쳐들어갈 수 없어서, 마을 입구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두병이나 병나발을 불고, 고급 약주도 한 병 사가지고 여자의 집 대문까지 갔는데 이미 날은 저물어 대문을 꼭 걸어놓아서 밀어도 열리지 않았지요.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아 발길질을 했지요. 그랬더니, 나중엔 장모님이 되었지만, 나이 먹음직한 여자가 나와 문을 열어주면서 어떤 놈이 남의 집에 와서 행패냐고 그러기에 얼른 마당으로 들어가 꿇어 앉아 넙죽 절을 하면서 ”장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딸을 달라고 했죠. 그러나...”
“그러나 저러나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
“쫓겨났지요. 그렇지만 오기 바람에, 다음에 또 쳐들어가고, 쫓겨나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군에 입대했죠. 그런데 내가 제대를 할 때까지 펜팔하던, 그 여자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았죠. 그래서 제대하자마자 집으로 가지 않고 여자의 집으로 갔지요. 그때야 장모님이 결혼을 허락해 주어, 우리 속담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듯이 서둘러 결혼했죠. 결국 전 오기로 장가를 갔거든요.”
“그랬었구먼”
백치 영감은 한씨 부인과 결혼한 지 근 40년 가까이 되었다. 젊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환갑이 지나서는 한씨 부인이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건강에 좋다는 여러 가지 산수유 엑기스, 구기자 엑기스, 양파 엑기스 등의 건강보조식품을 챙겨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메가 쓰리(Omega 3)' 한통을 내밀면서 꾸준히 복용하면 혈액순환이 잘 돼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하루 한 알씩 아침 식후 복용하던 오메가 쓰리였는데, 그만 복용하기로 했다. 오메가 쓰리는 흰색 플라스틱 병에 넣어져 있었다. 300정이 담겨 있었는데 절반인 150정 이상을 복용했으니, 150정 정도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병을 검정색 비닐봉지에 넣어 마을회관 옆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래 놓고도 괜한 생각에 그랬구나 하면서 도로 꺼내 오려고 쓰레기 통으로 달려갔으나 ‘지나간 버스 손들기’라고 이미 청소차가 와서 쓰레기통을 싹 비워갔다. 후회가 막심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백치 영감의 부인 한씨 부인은 펄쩍 뛰었다. 팔팔하게 오래 살라고 오메가 쓰리를 사다주었더니, 내다버리다니, “내가 60이 다 되어가도 왜 이렇게 직장에 다니는 줄 알아요? 그게 다 오메가 쓰리 덕분이야!”라고 앙탈을 부렸다. 그래서 백치 영감은 오메가 쓰리를 복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말했다.
“내, 엊그저께 목일신 선생의『목일신 전집(睦一新 全集』을 사러 서점에 갔지. 그 책을 사고 나서, 그만 오려고 했는데, 멀지 않아 우리나라 노인들의 수명이 늘어 백세를 사는 백세시대가 온다고 하잖아. 그래서 백세청춘 비법을 팔아보려는 장사꾼들이 많아졌어. 그와 반대로 백세청춘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래서 건강서적 코너에 가서 이 책 저 책을 잠깐 들춰 보았는데, 아 놀라운 건강장수 비법에 기절하고 자빠질 뻔 했잖아!”
“허구헌날 책밖에 모르는 서치(書癡) 양반아! 목일신 전집은 뭐고, 무슨 책을 보았기에 자빠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 얘길 들으면 알게 될 걸! 우선 목일신 선생에 대해 얘기하자구! 당신, 초등학교 1학년 다닐 때 ‘따르릉 따르릉’이라는 노래 배웠지?”
“뚱단지 같이 ‘따르릉 따르릉’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요?”
“자전거 하면 몰라, 자전거!”
“으응,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지나갑니다...”
“맞아! 자전거라는 동요지. 그런데 누가 지었는지 아느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모르겠구먼요.”
백치영감은 196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 음악 시간에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되는 동요「자전거」를 배워 불렀다. 자전거는 세 살배기 어린이부터 팔순 노인까지 모두 알고 있지만, 이 가사를 쓴 사람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때론 한씨 부인으로부터 ‘서치’라고 놀림 받는 백치 영감도 최근에야 목일신 선생이 자전거의 작사자는 것을 알았으며 1913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1986까지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400여 편의 동요와 민요를 작사했다는 것과 선생의 출신 고흥군에서 지원해 ‘목일신 전집’이 간행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목일신 선생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신흥학교에 다니다가 항일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삐라를 만들어 뿌렸다. 결국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퇴학을 당했고 일제의 만행을 삐라로 알린 죄로 시위현장에서 체포당했다. 전주교도소에서 한 달간 복역한 뒤 고향 고흥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동요를 짓기 시작한다. 그 후 일본 칸사이 대학을 졸업했다. 1929년 동아일보에 동요「참새」가, 1930년에 조선일보에 동요「시골」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여보, 그러니 따르릉 자전거 노래를 지었다는 이가 목일신 선생이라는 거요?”
“그렇지. 항일운동도 했지. 동요 ‘자전거’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3년에 지었지.”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서요
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셔요
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
오불랑 꼬불랑 고개를넘어
비탈길을 스르륵 지나갑니다
찌르릉 찌르릉 이자전거는
울아버지 사오신 자전거라오
머나면 시골길을 돌아오실제
간들간들 타고오는 자전거라오
“원래 ‘자전거’의 원작 가사지. 해방 후 초등학교 저학년용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는 자전거는 국정음악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원작의 일부를 수정했어. 즉 ‘찌르릉 찌르릉’이 ‘따르릉 따르릉’으로 ‘저기 가는 저 영감’이 ‘저기 가는 저 사람’으로 바뀐 거야.”
따르르릉 따르릉 비켜가셔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가는 저사람 조심하셔요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따르릉 따르릉 이자전거는
울아버지 장에갔다 돌아오실때
꼬부랑 꼬부랑 고개를 넘어
비탈길로 스르르르 타고온다오
“동요 ‘자전거’의 원작을 수정한 것으로 오늘날 부르는 자전거 노래거든. 올해 2015년,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이라고 요란하게 떠들었잖아.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일제강점기 때 친일했던 놈들의 자식들이 자기들의 애비 죄를 먼저 반성하고 떠들어야 되는데, 한심하게 그런 반성은 없다카이, 제기랄... 그러니 세상 엿 같다 이거야. 이 땅에는 아직 을사오적(乙巳五賊) 같은 놈들이 수두룩하지. 씹팔좆도...”
“여보, 무슨 육두문자를 쓰시오?”
“열 받아서 머리 뚜껑이 열려서 그래. 해방이 된 후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은 땅땅거리고 잘 사는데, 아니 오늘날까지 잘 사는데, 제기랄 독립운동가나 항일독립군과 그의 후손들은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못 살았잖아. 지금도 못 살고 있잖아. 생각해보더라고, 애국지사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있다고...”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십여 년
가정도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럽게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 선생의 시詩지. 일제에 의해 모진 고문으로 고초를 겪을 때, 선생은 지필묵을 가지고 오라고 호통을 치며 고문관들에게 시 한수를 지어 보인 시야. 그러다가 더 심하게 고문을 당해 다리병신이 되어 16년간 감옥생활을 하며 스스로 호를 ‘앉은뱅이’란 뜻의 ‘벽옹(躄翁)’으로 지었던 선생이야. 그래서 내가 존경하는 조선의 마지막 애국선비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해방 후에는 통일운동을 하느라고 집 한 칸 남기지 않고 대쪽같이 살다 간 김창숙 선비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있다고, 아유 열 받아 죽겠네!“
“여보, 이젠 뚜껑 닫아, 그런다고 누가 당신을 애국자라고 할 사람 없어. 그러면 그럴수록 불만투성이의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욕해. 그러니 긍정적으로 살자고. 어떻게, 늙어갈수록 꼿꼿하게 그러는지 모르겠어. 당신도 젊었을 때 높은 사람한테 아부 잘 했으면 호의호식할 텐데, 그놈의 지조가 어디 밥 잘 먹여주던가요?”
“에이 그만 두자고, 정치적인 얘기만 나오면 당신과 나는 언쟁이니, 이젠 그만두고 건강코너에서 본 책이 무슨 책인고 하면, 회춘해서 여자를 죽이는 방법인데 호르몬 칵테일 요법으로 최고의 정력을 가질 수 있다거나, 면역요법과 기氣치료는 모든 신체 세포를 젊게 할 수 있다 등등, 그리고 장수하면서 자나깨나 끈질기게 서로 배꼽을 맞춰가며 섹스하는 방법에 대해 써 놓은 책인데, 독자를 현혹하려고 책 말미 뒤에 무슨 FDA와 외국 유명한 대학의 검증서(Certificate)까지 첨부하였더군.”
“아니, 당신은 콩으로 메주를 쑨 데도 잘 믿지 않고 늘 부정적인데 그런 걸 믿어요?”
“물론 안 믿지. 요즘 텔레비에서 떠드는 것 못 보았어?”
“뭘요?”
“백수오(白首烏) 말이야!”
“백수오니, 하수오니, 이엽우피소니 나오는데, 내가 어디 그런데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백수오는 중국, 일본 약전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한약제인데, 진짜 백수오 약재를 쓰지 않고 가짜 백수오 이엽우피소를 써서 건강식품을 만들어 팔아서 온 나라가 들썩이게 했잖아! 문제는 백수오가 여성 갱년기에 좋다고 해서 시중에 많은 백수오 건강식품이 광풍을 일으켰어. 그러니 여기저기서 나도 너도 여러 제품들이 쏟아졌지. 그렇게 되자 홈쇼핑에서도 한의사가 아닌 의사들이 나와서 직접 하수오를 입에 침이 마르고 닿도록 극찬을 하며 광고를 했잖아. 그게 알고 보니 가짜 백수오 제품이었지. 그러니까 텔레비,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를 통해 나오는 건강식품에 대해 무조건 믿는 건 금물이라니까! 당신도 홈쇼핑에서 건강식품은 안사지만 이 번 일로 반성해야 돼!”
“반성은 무슨 반성을 하라는 거요?”
“전번에 산 고기구이 판 같은 것은 실용성이 없어서 사놓고도 썩히고 있으니, 갔다 내버리든지 해야 할 것 아니오!”
“다 필요해서 샀는데, 내버리긴 왜 버려요!”
“골동품으로 두려고, 그러면 맏손자 현우에게 물려주면 되겠네!”
“당신은 꽈배기처럼 가끔가다 속을 비틀어대는 데는, 뭐가 있어. 제발 그러지 맙시다. 다 필요해서 홈쇼핑에서 사니까요.”
그렇게 백치 영감 내외는 티격태격 왈가왈부하다가는 급기야 한씨 부인은 다시는 영감탱이의 건강을 위해선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영감탱이를 위해 이젠 관절에 좋다는 쇠비름효소, 해독효능이 뛰어나 장에 좋다는 매실효소, 동맥경화증, 고혈압 및 각종신경통, 그리고 당뇨에 좋다는 솔잎효소, 여러 가지 성인병 예방에 좋다는 뽕잎효소, 항암 효능이 탁월하다는 개똥쑥효소 등을 담그지 않기로 했다.
남은 술을 하루 실컷 마시면 안 마신다는데 이놈의 영감탱이는 어찌된 판인지 입에 술만 대면, 브레이크 잘 안 듣는 똥차처럼 기본이 닷새나 퍼 마시고, 좀 더 길게 푸면 일주일, 그리고 어떤 때는 보름가량 주야장차 내리 마셔댔다. 아예 곡기를 끊은 채 오직 술로만 그렇게 보내다가 술이 깬 후에는 후회를 했다. 이제부터 술을 끊겠다는 레파토리는 기본이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술자리를 찾아다니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정다운 친구가 술을 마시자고 청해도 가지 않겠노라고, 그런 말을 누가 믿느냐고 하면 똑 소리 나게 금주하겠다는 각서까지 써서 벽에 붙쳤다.
그 꼴을 보다 못해 한씨 부인은,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내 영감탱인데 어쩔 수 있나 하면서 그동안 술 마시다 기력이 쇠해진 영감탱이를 위해 사골 뼈를 사다가 고아준다든가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보하는 데는 옻닭이 최고라고 옻닭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오늘은 영감탱이가 괘씸했다. 그 오메가 쓰리가 어떤 오메가 쓰리인가. 전번 초등학교 여동창생들이 계를 모아 동남아여행을 갔다가 사온 외제품이었다. 한씨 부인은
“차라리 내 던질 것이면 나라도 먹게 놔둬야지...?”
불쑥 한마디를 뱉었다. 그러자 백치 영감은
“외국 걸 어떻게 믿어! 그 속에 가짜 백수오 이엽우피소보다 더 무서운 물질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아. 그래서 폐기 처분 했거든. 그리고 백세 건강비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건강코너에서 나건강(羅健康) 박사가 지은 <나의 건강 지키는 방법>이란 책을 이리 저리 넘겨보다 건강과 장수에 대해 ‘어떤 건강방법이나 비법을 쓰면 건강하면서 장수하고, 어떤 건강방법을 안 쓴다고 단명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알았구먼.”
“도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지 알지 못 하겠네요. 혹시 당신 쥐약 먹은 건 아니겠지요?”
“버얼건 대낮에 쥐약은 무슨 쥐약이야.”
백치 영감은 술을 마시는 것을 ‘쥐약을 먹는다’고 한다. 따라서 한씨 부인도 술을 쥐약이라고 한다. 이들 부부의 술의 은어는 ‘쥐약’이다. 그런데 쥐약이라는 말로 어떤 24시 편의점에서 소동이 난 적이 있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아침 해장술에 취한 백치 영감이 한 잔 더 걸쳐야 한다고 오전 열 시 쯤에 24시 편의점에 가서 ‘쥐약’을 달라고 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여학생은 “할아버지, 여기는 쥐약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그러자 백치 영감은 쥐약을 잔뜩 쌓아놓고도 주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렸다. 행패랬자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고, 그저 아르바이트 학생 보고 “너는 집에 에미, 애비 어른도 없냐, 핼애비도 없냐?”고 고함을 쳤을 뿐이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학생이 휴대폰을 들고 뭐라고 그러더니 금세 경찰 순찰차가 달려왔다. 차에서 내린 경찰관은 여기는 쥐약을 파는 곳이 아니고 과자 음료수 빵을 파는 편의점인데 왜 쥐약을 안 준다고 소란을 피우느냐고 하면서 술이 너무 취했으니 집이 어딘지 연락을 해서 모셔가도록 하겠다고, 그래도 백치 영감은 경찰관에게 쥐약을 주면 집으로 걸어서라도 가겠다고 경찰관의 호의를 뿌리쳤다.
경찰관은 백치 영감이 술이 취해 자살하려고 쥐약을 찾는 줄 알고 극구 순찰차에 태워 강제로 귀가 조치하려고 했으나 암만해도 백치 영감이 편의점에서 쥐약을 찾는 게 이상해서 “쥐를 잡는 게 쥐약인데 쥐약을 무엇에 쓸려고 하느냐?” 묻게 되었고, 백치 영감은 “한 잔 더 마셔야 한다”고 하자 그때서야 눈치 빠른 경찰관이
“할아버지, 이제 알았어요. 쥐약이 쥐약이 아니고 소주구만, 그렇지요?”
“그래 맞다. 소주, 소주다!”
“할아버지 소주를 쥐약이라고 하면 어떡해요?”
“우리 집에서 할멈과 나는 소주를 ‘쥐약’이라고 그래. 소주를 마시면 쥐약 설먹은 쥐처럼 어리어리 비실거리니까 소주가 쥐약이거든.”
그러면서 백치 영감은 네댓 병의 소주를 사가지고 고맙게도 경찰 순찰차를 타고 집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씨 부인은
“쥐약을 안 먹었으면 무슨 헛소리래요?”
“헛소리가 아니여! 장수란 오직 스스로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지. 어떤 비법이나 묘방이나 특별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여. 그리고 그걸 모르거나 그걸 못 지켜서 수명이 단축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거야.”
“말을 듣다보니, 결국 그렇군요.”
“뭐가 그렇다는 거야?”
“결국, 세상엔 장수의 비결을 알지 못해 빨리 죽게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나 진배없는 말이구먼요?”
“옳거니, 이젠 머리가 돌아가는구먼. 장수의 비결은 그렇게 어렵고 특별하고 까다로운 방법이나, 값비싼 묘약이나, 학술적인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그저 생활 주변에 있다나, 그러니까 첫째는 뭐니뭐니해도 균형 잡힌 식사로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거야. 그 다음엔 적당한 운동이고, 금연, 금주...........”
“그래서 결국, 오메가 쓰리를 패대기친 건, 그 오메가 쓰리에 이엽우피소 보다 더 무서운 물질이 있을까 해서 먹지 않겠다. 그리고 술을 끊고 꼬박꼬박 균형 잡힌 식사를 해서 건강을 지키겠다는 말씀이오?”
“그렇지!”
“그런데, 쉽게 쥐약을 끊을 수 있을까. 한두 번 금주한 게 아니고 수천 번이나 금주선언을 한 당신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소!”
“그려, 당신 손가락에 장을 지질 날이 올 거야”
“술만 끊는다면, 제발, 그랬으면 좋겠소.”
“아무렴... 요샌「백세인생」이란 노래도 있더구먼.”
‘육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 말라고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저 세상에서 또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텐데 또 왔냐고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극락왕생 할 날을 찾고 있다 전해라/ 백오십세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나는 이미 극락세계 와 있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아요’
“참으로 백세인생의 노래처럼 사람의 욕심이란 한정 없지. 누구나 오래 살길 바라지.”
“그러니, 당신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되죠. 밤에 자다 말고 가끔 다리에 쥐가 나서 죽겠다고 소리치잖아요. 그러니 내, 내일 오메가 쓰리를 사올 테니 꾸준히 먹어봐요. 혈액순환에 도움이 될 테니까. 알았어요?”
백치 영감은 마지못해
“제기랄, 알았어!”
라고 겸연쩍어서 고개를 돌리고 텔레비전을 켰다. 백치 영감은 뉴스 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꼭 KBS 뉴스를 본다. 때마침 뉴스 시간이라 황교안 국무총리가 나와서 메르스가 수그러들었으니, 이젠 걱정 말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자며 국민들을 격려했다.
지난 5월 20일 첫 확진환자가 나온 이후 69일만에 나온 발표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불안에 떨어야 했고 한국을 찾아오던 중국 등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고 굵직굵직한 큰 행사들이 취소되고, 사람들이 국내 여행은 물론 대중이 모이는 극장, 대형마트, 시장, 식당 등에 가지를 않고 외출을 자제하는 등 국가의 경제가 위축되어 어려움에 처했다. 그런데 뉴스를 보던 백치 영감은 “저것도 뉴스냐?” 하면서 적어도 황교안 국무총리는 메르스가 발생 했을 때 우왕좌왕했던 늦장 대응에 대해 사과를 해야 했고 책임질 사람의 문책도 할 것이라고 말해야 했는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저 큰 재난이었던 메르스 사건을 두루뭉실 넘겨버리려는 모습이 당혹스럽고 불편했다.
백치 영감은 리모콘을 들더니 텔레비전을 팍 커버렸다. 그리고 한씨 부인에게
“난중일기를 알아?”
라고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다. 한씨 부인은 이놈의 영감탱이가 또 열 받아 머리 뚜껑이 열렸나 보다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그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책이잖아요?”
“그려, 그런데 이순신 말고 또『난중일기(亂中日記)』를 써서 남긴 사람이 있어. 누군고 하면 반곡 정경달(盤谷 丁景達, 출생사망 미상) 선생이야. 그 난중일기에「제반곡정공난중일기(題盤谷丁公亂中日記)」라는 발문이 있는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 선생이 썼지. 그 발문의 내용에는 오늘날 메르스 사태를 겪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글이 있거든.”
“어떤 교훈인데요?”
“정말로 지금 정부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지. 다산 선생은 발문에서 ‘대체로 재난이란 숨겨서는 안 된다. 병을 숨기는 사람은 그 몸을 망치고, 재난을 숨기는 사람은 그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대체로 숨기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지. 생각해보더라고 지금까지 정부는 메르스의 초기에 늦장 대응으로 허술하게 대처하였고, 사실을 숨기고 감추어 민심을 안정시킨다는 헛된 생각을 했지. 그래서 일이 더 크게 벌어지는 사태가 되었지. 정부는 이번 사태의 계기로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어야 하고 확고하게 재발방지책을 세워야 되리라...”
“아유, 서치 영감탱이를 데리고 사는 내가 괴로워요. 무슨 일이든 꼭 씹고 넘어가는 성격을 고치고, 늘그막에 성질 좀 뜯어 고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요!”
“그럴까. 백세건강비법 중에 한 가지가 긍정적으로 사는 것인데, 그게 잘 될까. 에라 모르겠다. 정치에 신경 끄고, 사회비리에 눈 감고, 그렇게 살라고...”
그 후 백치 영감 역시 <백세시대>에 걸맞게 백세고지(百世高地)를 향하여 각개전투(各個戰鬪)를 해왔다. 엎드려 쏴! 쪼그려 쏴! 서서 쏴, 낮은 포복, 높은 포복, 철조망 통과, 적진지를 향해 수류탄 안전핀 뽑아 하나, 둘, 셋 던져 꽝! 뭐 그런 군사적인 전투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구구팔팔 팔팔하게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에 대한 전투였다. 때로는 완전군장에 천리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 고개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 네다섯 여섯 일곱 고개, 여덟아홉 열 고개를 넘어 칠십 줄에 들었다. 을사년(乙巳年)으로 만 칠십 세가 되었다.
2025년, 을사년 벽두에 보건복지부에서 백서를 발표하길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를 지나 초고령화 국가로 접어든 만큼 날로 치매 환자들이 증가하는데 별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전에 치매를 예방하는 방법이 지고지선의 최고 방법’이라고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귀띔을 했다.
백치 영감도 그의 부인 한씨도 예전보다는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백치 영감은 화장실에 불을 켜고 들어갔다가는 나올 때 끄지 않고 나올 때가 가끔 있는가 하면 외출할 때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매고도 넥타이를 찾고, 심지어 지갑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나가서 버스를 타려다, 그만 집으로 지갑을 가지러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다. 전에는 심훈의 시「그날이 노면」, 김소월의 시「진달래」,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 박인환의 시「목마와 숙녀」등을 줄줄 외워 낭송했건만, 어느 날부터 시를 낭송할 때 한두 줄 빼 먹고 다음 행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예를 들면 심훈의 시「그날이 오면」을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 같이/ 종로의 인경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라고 낭송했는데, 나중에 청중들이 지적하길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다음에 두 줄을 빼놓고 낭송했다고 해서 확인해보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다음에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를 빼놓고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로 건너뛰었음을 알고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기억력 쇠퇸가. 아니면 치매의 전초인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한씨 부인도 백치 영감과 똑 같다. 화장실에 불을 끄지 않고, 좀 거시기한 말이지만 팬티를 갈아입고도 갈아입지 않은 줄 알고 홀라당 벗어서 세탁기에 넣는가 하면, 라면을 끓인다고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다른데 신경을 쓰다가 냄비를 까맣게 태운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백치 영감은 ‘혹시 나와 한씨 부인이 치매에 걸리지 않았나’ 걱정이 슬그머니 앞섰다. 그래서 도대체 ‘치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치매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본 결과 ‘치매’는 ‘정상적이던 지능이 대뇌의 질환으로 저하된 것’인데 의학적으로는 ‘기억 장애, 이해력과 계산 능력의 저하, 같은 말이나 행동을 계속하는 것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분석한 백치 영감은 자신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치매는 아니고 기억력의 저하인 건망증이니, 치매 예방을 위해 기억력을 증진 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 남들은 치매예방을 위해 노인정에 가서 속칭 국민오락 고스톱을 친다든가 오관 패를 놓는다든가 하지만 백치 영감은 화투에 별 취미가 없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치매예방가(癡呆豫防歌)’. 즉 ‘치매를 미리 예방하는 노래’를 지었다..
‘
“도깨비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두 마리
도깨비 두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세 마리
도깨비 세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네 마리
도깨비 네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다섯 마리
도깨비 다섯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여섯 마리
도깨비 여섯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일곱 마리
도깨비 일곱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여덟 마리
도깨비 여덟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아홉 마리
도깨비 아홉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열 마리
................................................
도깨비 아흔 일곱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아흔 여덟 마리
도깨비 아흔 여덟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아흔 아홉 마리
도깨비 아흔 아홉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백 마리
.................................................
도깨비 구백 아흔 여덟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구백 아흔 아홉 마리
도깨비 구백 아흔 아홉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야 할멈아 몇 마리지?
일천 마리”
백치 영감은 이렇게 치매예방가를 지어 할멈 한씨 부인과 하루 두 번씩 불렀다. 부르는 방법은 백치 영감이 “도깨비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하면, 한씨 부인은 “두 마리”로 대답 하는 방식으로 천 마리가 될 때까지 부른다. 또 반대로 한씨 부인이 “한 마리 도깨비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여보 영감아 몇 마리지?” 하면 백치영감은 “두 마리”로 대답해서 천 마리가 될 때까지 불렀다. 그런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천 마리 씩 두 번씩 이천 마리의 도깨비를 머릿속에 뛰놀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뇌 운동을 시켜준다는 위안으로 백치 영감과 한씨 부인은 치매 걱정을 하지 않고 긍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한씨 부인은 금새 갈아입은 팬티를 홀라당 벗어서 세탁기에 넣는 일이 없었고, 백치 영감 역시 외출할 때에는 꼭 지갑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웃에 치매예방가를 보급하기로 했다. 바로 앞집의 김영재 어르신, 이강인 어르신, 정준화 씨에게 전했다. 그들도 쌍수를 들어 좋은 방법이라고 화답했다.
김영재 어르신은 6.25 전쟁 때 공군 전투조종사가 되려고 경부선 열차를 타고 사천기지로 가다가 전의역에서 열차사고가 났다. 그래서 제 시간에 가지 못해 조종사의 꿈을 접고, 대신 육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그 후 예비군 중대장, 설성농협 조합장 등을 역임했으며, 젊었을 때 술이라면 지고 가라면 가지 못해도 마시고는 갔다는 강골이었다. 무엇보다도 음력으로 갑오년(甲午年, 2014년) 12월 24일, 양력으로 을미년(乙未年, 1915년) 2월 12일에 지은 지 62년 된 집에 불이 나서 전소되는 대재난을 당했지만, ‘다 내 부덕’이라고, 모든 걸 운명으로 돌리고, 다시 집을 짓고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서 금주와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백세를 바라보는 아흔 다섯의 고령이지만 아직 정정하다. 백세시대의 백세를 완주하고도 남을 건강이다.
여든일곱의 고령 이강인 어르신 역시 10년 전에 아흔아홉 살의 모친을 모시고 살았다. 거실 벽에 “부모를 양로원에 보내는 자식은 불효자이니 부모를 양로원에 보내지 말고 집에서 봉양하자”란 뜻의 글을 써 붙이고 모친을 지극 정성껏 봉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 식전에 사발이를 타고 논밭의 농작물을 한 바퀴 돌아보고 저녁에는 대죽1리와 수산3리 사이의 뚝방 길을 열심히 자전거로 달린다. 구십 세를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백은 청년 못지않다. 너무나 팔팔해서 아직도 팔씨름을 당할 자 없다.
예순 아홉의 정준화씨는 백치 영감보다 두 살 아래지만 10년 전에는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면서 수군거렸으나 어느 날 ‘나보란 듯이’ 똑 소리 나게 술과 담배를 끊고 마을 앞 뚝방 길과 뒷길을 걷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꾸준히 해 새사람이 되어 신수가 훤하게 되었다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자자하게 받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영동이는 결혼해서 아들딸을 두고 행복하게 산다.
여하튼 대죽1리 노인들은 백세고지 점령을 위해 각개전투의 모범 전사로 열심히 살아간다. 백세고지를 향하여 돌격 앞으로, 앞으로! 대죽리 마을은 집집마다 ‘치매예방가’가 울려퍼졌다.
...............................
백치 영감은 도깨비 구백 아흔 아홉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났는데. 영감아 몇 마리지? 천 마리까지 보다는 좀 더 어렵게 더하기에서 곱하기로 셀 수 없이 많은 도깨비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도깨비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한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한 마리
도깨비 두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두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네 마리
도깨비 네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세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열두 마리
도깨비 열두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네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마흔여덟 마리
도깨비 마흔여덟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다섯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이백마흔 마리
도깨비 이백마흔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여섯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천사백사십 마리
도깨비 천사백사십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일곱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일만 팔십 마리
도깨비 일만 팔십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여덟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팔만 육백사십 마리
도깨비 팔만 육백사십 마리가 길을 가다가 또 아홉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여보 할멈아 몇 마리지?
칠십이만 오천칠백육십 마리
칠십이만 오천칠백육십 마리 도깨비가 길을 가다가 또 열 마리를 만나서 곱하면, 할멈아 몇 마리지?
칠백이십오만 칠천육백 마리”
실로 놀라웠다. 도깨비 한 마리서부터 열 마리까지 만날 때 곱했더니 무려 ‘칠백이십오만 칠천육백마리(7,257,600)’라. 그런데 백 마리를 만날 때까지 도깨비를 만들려고 했지만 칠백이십오만 칠천육백마리가 열한 마리, 열두 마리, 열세 마리, 열네 마리를 만나 곱해 질 때부터 천만, 억, 조로 급속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집안으로 도깨비가 가득 차서 더 이상 도깨비 만들기를 포기했다.
백세고지를 점령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치매예방의 정신적 건강도 중요하지만 육체적 건강도 중요했다. 돈 안 들고 할 수 있는 운동이 걷기와 등산이었다.
그래서 백치 영감은 한씨 부인과 매주 한 번은 마국산이든, 노승산이든, 설성산이든, 산에 오른다. 그리고 매일 저녁 무렵 대죽1리와 수산3리 사이에 있는 뚝방 길을 한 시간 쯤 걷는다.
그런데 백치 영감은 칠십이 넘었어도 열 받으면 머리에 뚜껑이 열리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노승산에 정상 장수봉에 올랐을 때다.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장수봉’이라고 새긴 표지석 앞에 둘러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꽁초를 숲 속으로 던져버렸다. 백치 영감은 그 꼴을 보고 젊은이들을 조용히 타이르고 야단을 치려고 했다. 그러기 전에 우선 노승산의 장수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젊은이들도 올라오다 노승산의 특별한 볼거리로 말머리 바위를 보았겠지. 이천시 모가면의 마국산, 설성면의 노승산, 장호원읍의 설성산, 이 세 산에는 옛날에 힘센 장수들이 살고 있었거든. 이들 세 장수는 하루 이틀이 멀다하고 힘겨루기를 하는 게 일상이었지. 100킬로그램 쌀가마니 들고 오래 서있기, 이천 설봉산까지 빨리 달려갔다 오기, 닭다리싸움, 팔목씨름, 높이뛰기, 창던지기 등 여러 종목으로 힘겨루기 내기를 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마국산에서 바위를 깨고 늘씬한 명마가 태어났지. 이를 본 세 장수들이 서로 차지하려는 욕심이 생겨 날이 새고 눈만 뜨면 서로 다투었어. 하지만 세 장수들은 저마다 따로 신령스럽고 기묘한 힘을 가진 자들이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 그래서 힘겨루기 시합을 해서 1등은 말머리, 2등은 말 몸통, 3등은 말꼬리를 나눠 갖기로 했거든. 결국 힘겨루기 시합에서 노승산 장수가 1등을 해서 말머리를 차지했구먼. 이제 젊은이들에게 본격적인 말을 해야겠어! 젊은이들! 짱구 공자를 아는가?”
그 중에 등빨이 좋은 놈이 젠체하느라고
“암니다. 그런데 공자가 짱구, 돌대가리란 말입니까?”
“돌대가리 뜻의 짱구가 아니고, 공자는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뒤통수가 툭 튀어나온 머리야. 그래서 짱구 공자라고 그랬어!”
“그런 말 처음 듣습니다.”
“그래. 그 짱구 공자선생이 오늘날로 말하자면 환경보호주의자요 환경운동가였어. 그래서 산을 사랑했다니까.”
“그런 말도 처음 듣습니다.”
“하기야 처음 들을 테지. 짱구 공자선생이『논어』옹야 편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 했거든. 그럼 이 말도 처음 듣는가?”
“글쎄요.”
“그것도 모르는 놈들이 어떻게 산에 댕겨! 요산요수란 ‘지혜로운 사람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물을 좋아 한다’는 뜻은 공자의 자연보호 사상이야. 그것도 모르는 놈들이 왜 산에 왔나? 당장 아까 버린 담배꽁초 주워 가지고 하산해! 하산 안 하면, 파출소에 전화를 한다. 이놈들아!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뭔데, 이 산의 주인이오. 우리를 산에서 내려가라 마라 야단이오!”
“이 산은 설성면민이 아끼는 산이고 사랑하는 산이야. 그래서 면민들이 나서서 아름답고 깨끗한 산으로 가꾸는 산이야. 너 놈들처럼 산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는 너 놈들은 이 산에 오를 자격이 없는 놈들이니, 빨리 숲 속에 던진 꽁초나 주워 가지고 하산해라! 당장!”
그렇게 당장 담배꽁초를 주워가지고 하산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그들은 백치 영감을 뻔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중 우락부락하게 생긴 놈이 일어나더니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백치 영감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반말로 인상을 쓰며
“할아버지,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야!”
그 말에 더욱 열 받아 머리 뚜껑이 열린 백치 영감은
“이런 후레자식 보았나, 어디 한 번 붙어보자는 거야 뭐야. 너 놈들은 산에 대한 예의도 없냐. 산에서 금연은 상식이야. 만약 할 수 없이 담배를 피웠으면 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말고 싸가지고 하산해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래도 너 놈들이 잘 했다는 거야. 망나니 같은 놈아 한 번 붙어보자!” 하고 백치 영감이 그 놈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옆에 있던 한씨 부인은 겁에 질러 백치 영감을 붙들고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해야 된다고 했으나, 백치 영감은 이놈들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나머지 놈들이 일어나 백치 영감에게 달려들었다. 백치 영감은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눈앞에 별이 번쩍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백치 영감은 젊었을 때의 기백으로 그놈의 목덜미를 껴안고 너 죽고 나 죽자고 늘어졌다. 수많은 발길질을 당하면서 그놈의 목덜미를 팔로 조이면서 놓지 않았다. 한씨 부인의 우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마침, 그때 대여섯 명의 건장한 중년의 등산객이 올라왔다. 등산객들은 우선 백치 영감을 구해야 했다. 119에 인명구조 헬기를 요청했다. 그러는 사이 젊은 놈들은 모두 도망을 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씨 부인은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혀 방금 눈앞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등산객들에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얼마 안 있어 119 인명구조 헬기가 노승산 정상 상공을 선회하더니 장수봉에서 북쪽 하산길 아래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헬기장에 큰 바람을 일으키면서 착륙했다. 소방서 구조대원들이 응급조치 장비를 들고 정상인 장수봉에 올라왔다. 구급대원 중 한명이 백치 영감의 혈압을 재보고는 급히 이송해야 한다고, 대원들을 재촉했다. 한씨 부인은 응급용 인명구조 들것에 실려 헬기장으로 가는 백치 영감의 뒤를 허겁지겁 엎어지며 자빠지며 따라갔다. 헬기장에 도착한 구급대원들은 들것채로 백치 영감을 헬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보호자인 한씨 부인도 뒤따라 탔다. 급히 이룩한 헬기는 성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며칠 째 오대산의 진고개에서 무섭게 찬바람이 몰아쳤다.
백치 선생의 제자 김봉식의 엄마 마산댁이 사망했다. 과부로 주막을 벌려놓고 술장사를 했지만 인심 좋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만 마을의 남정네와 불륜을 저질러 마을 사람들의 눈 밖에 났다. 그래서 죽어도 누구 하나 문상 오는 사람이 없었다. 단 봉식이 엄마와 불륜 관계인 박동섭이라는 사람이 왔다갔을 뿐 봉식이 혼자 엄마의 시신을 지켰다. 봉식이 엄마와 같은 배에 태어나고 아버지가 다른 동복(同腹) 형 장성만과 누나 장성숙에게 전보를 쳤는데 오지않아 장사를 지낼 수 없었다. 시신을 아랫방 구들목에 안치해 놓고 왕골자리 거적으로 덮어 놓고 있었다. 백치 선생은 문상을 갔다가 봉식이 혼자 시신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때마침 방학 때라 장례를 치를 때까지 도와주기로 했다.
밥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소주 됫병을 사다 놓고 건빵을 안주로 술만 마시며 이삼일을 기다려도 봉식이의 동복 형과 누나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기다릴 순 없었다. 장례를 치루기로 했다. 마을 어른 네댓 사람이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마산댁과 의남매를 맺어 평소에 오빠, 동생하던 사이었고, 그들은 모두 주막에 드나들던 단골 술꾼들이었다.
아침 대신에 술을 마신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해 두 사람은 마산댁이 평소에 입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다른 사람들은 가마니 양옆을 터서 길쭉하게 펼쳐 양 옆에 2미터 정도의 긴 막대기를 끼어 들것을 만들어 앞뒤에 두 사람씩 들 수 있도록 손잡이를 만들었다.
마산댁이 마을 뒷산의 공동묘지로 떠나야 할 시각이다. 봉식이 엄마 마산댁이 부잣집 마나님이라면 25명이 메는 꽃상여를 타고 갈 것이 건만, 술 팔아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했던 마산댁은 가마니 떼기 들것에 누워가야 했다. 아들 봉식이는 마지막 집을 떠나는 마산댁 시신 앞에 술잔에 술을 부어 올리며 눈물을 몇 방울 떨구었다. 하늘에는 눈발이 선 음산한 날씨였다.
공동묘지로 올라가자면 밤나무 숲을 지나 가파른 언덕배기를 지나야 된다. 그런데 언덕배기를 올라가다가 한 사람이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들것의 손잡이를 놓았다. 연쇄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손잡이를 놓게 되자 들것이 땅에 곤두박질치면서 시신이 떼굴떼굴 굴러 언덕배기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아래로 내려가 시신을 수습해 다시 들것에 눕혔다. 가파른 언덕배기로 올라가자면 너무 힘이 들 것 같아 마을로 가는 길을 통해서 공동묘지로 올라가려고 마을 초입을 지날 때 난관에 부딪쳤다. 마을 사람들이 부정한 년의 시신이 마을을 지나게 되면 마을에 부정을 타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며 시신을 옮기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여태껏 험난하게 살아온 마산댁은 가는 길도 험난했다. 들것을 든 사람들은 되돌아 다시 밤나무 숲을 지나 언덕배기로 올라가기로 했다. 사람들은 아까처럼 시신을 굴릴까봐 혼신의 힘을 다해 올라갔다. 그곳에서부터는 경사가 완만한 산부리가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 공동묘지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
아침을 술로 때운 어른들이 또 소주 됫병을 두어 병 놓고 퍼질러 앉아 평소 마산댁이 잘 부르던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어린 나를 울려 놓고 떠나가는 내 님이여/ 이제 가면 오실 날짜 일 년이오 이 년이오/ 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 고향으로”을 부르는가 하면, 마산댁이 세상에 남긴 흔적을 얘기하느라고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더니, 땅을 파서 매장할 생각은 않고 모두 널부러졌다.
백치 선생은 이러다간 오늘내로 장사지내긴 다 틀렸다 싶었다. 그래서 봉식이를 데리고 곡괭이질과 삽질을 번갈아 바꿔가며 꽁꽁 얼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을 어른들은 술이 취해 널부러져 엎어지거나 자빠져 꼼짝도 않고, 겨울의 짧은 해는 자꾸 빨리 기울어져 갔다. 아무리 땅을 파고 파헤쳐도 마산댁의 시신을 땅 속 깊이 묻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도 시신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흙은 푹 덮어줄 만큼 땅을 팠다.
백치 선생은 봉식이와 함께 마산댁의 시신을 구덩이로 옮겨야 했는데 숨 떨어진 시신은 엄청나게 무거워 들 수 없었다. 그래서 들것을 끌다시피 구덩이로 옮겨서 마산댁의 시신을 땅 속에 안치했다. 그리고 봉식이 보고 흙을 세 삽만 먼저 머리, 배, 다리 부분을 덮으라고 시킨 다음 함께 흙을 덮었다. 그때서야 널부러져 있던 어른들이 일어나 흙을 긁어모아 조그맣게 봉분을 만드는 것으로 마산댁의 장례는 끝이 났다.
서산에 해가 반쯤 걸터앉았다.
백치 선생은 마산댁의 무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에 자는데 꿈에 마산댁이 나타났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요?”
“봉식의 선생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하튼, 이 죄 많은 여자를 편안히 쉴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에미 잃고 홀로된 봉식이를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마산댁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봉식이는 백치 선생의 집에 숙식을 한 달 간 하다가 어떻게 연락이 닿은 동복 누나가 찾아와서 부산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후 봉식이 엄마 마산댁의 꿈만 꾸면 좋은 일이 생기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이 일어났다.
곱게 차려 입은 마산댁이 백치 영감의 손을 잡고
“걱정 마셔요. 걱정 말고 일어나셔요.”
몸을 흔들었다. 백치 영감이 눈을 뜨고자 했으나 눈이 떠지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으로 머리와 얼굴에 붕대를 감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어느 곳인지도 몰라서
“누구 없소! 누구 없어요?”
라고 겨우 말했다. 침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씨 부인이
“당신, 깨어났군요. 걱정 말아요. 돌에 머리를 찍혔으나 다행히 뇌는 손상이 되지 않았데요. 그리고 머리를 찍히면서 눈동자가 충격을 받아 출혈이 되었으나, 치료하면 괜찮데요. 다 하나님이 돌보았지요.”
“도대체 여기가 어디요?”
“병원이죠. 서울대학교 분당병원이라오.”
“내가 병원에 왜 왔소?”
“노승산에서 일어 난 일 모르오?”
“아, 그랬구나! 그놈들은 어떻게 되었소?”
“줄행랑 도망을 쳤지요. 당신도 잘못이 있어요. 이젠 쓸데없이 열 받는다고 머리 뚜껑 열지 말아요. 퇴원하면 다시 백세고지를 향해 가자구요.”
“그래야지...”
서울대학교 분당병원을 퇴원해 대죽리 모헌동 집으로 돌아온 백치 영감은 아무리 세상이 아니꼬운 일로 열 받게 하여도 머리 뚜껑을 열지 않고 긍정적인 삶을 살기로 했다. 그리고 노승산도 열심히 오르내리기로 했다. 백세 고지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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