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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관계의 가치를 떨어뜨리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생태적 위기가 근대성의 윤리적, 문화적, 영적 위기의 발발이나 발현을 의미한다면, 모든 근본적인 인간관계를 치유하지 않고는 우리가 자연과 환경과 맺은 관계를 감히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에 견주어 인간이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우리가 모든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존중하게 합니다. 알고 사랑하며 대활할 수 있는 '너'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언제나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피조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사회적 측면은 물론, 하느님이신 '당신'께 마음을 여는 초월적 측면을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계가 분리된다면, 이는 생태적 아름다움으로 위장된 낭만적 개인주의로 내재성 안의 숨 막히는 단절이 될 것입니다.
120.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자연 보호와 낙태의 정당화도 양립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임신으로 불편과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도 인간 배아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에 존재하면서 때로는 성가시거나 귀찮게 하는 약한 존재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새 생명을 받아들이려는 개인적 사회적 정서가 사라지면 사회에 소중한 또 다른 것들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121. 지난 수 세기 동안 전개된 그릇된 주장을 극복할 새로운 종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고유한 정체성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진리의 보화에 충실하면서,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역사적 상황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는 그 영원한 새로움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실천적 상대주의
122.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는 그릇된 생활 양식을 낳습니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저는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실천적 상대주의가 "교리적 상대주의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면 당장의 유익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나머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따라서 만연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인간의 무한한 힘의 숭배와 더불어,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상대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서로를 희생시키며 살아가고, 환경 훼손과 사회의 부패를 낳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123.상대주의 문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거나 빚을 명분으로 노예로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질병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익에 보탬이 안 되는 노인을 유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이 경제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내적 논리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러한 힘이 사회와 자연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저마다의 욕망과 즉각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 외에 객관적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없다면, 인신매매, 조직 범죄, 마약 매매, 피의 다이아몬드 매매, 멸종 위기 동물 가죽의 매매를 어떻게 제한하겠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장기를 팔거나 실험에 이용하려고 구매하고, 부모의 바람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는 것도 이러한 상대적 논리와 같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쓰고 버리는' 논리가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하려는 무절제한 욕망 때문에 쓰레기를 양산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해로운 행위를 방지하는 데에 정치적인 조치나 법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문화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때, 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거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용 보호의 필요성
124. 인류를 배제하지 말아야 하는 통합 생태론에 대한 모든 접근에서 노동의 가치를 포함시키는 것은 필수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이를 잘 설명하셨습니다. 창조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에 사람을 두시어, 그곳을 잘 보존하게(돌보게) 하셨을 뿐 아니라 열매를 맺도록 (일구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장인이 "한 세대의 골격을 유지합니다" . 현실에서, 피조물의 현명한 발전을 촉진하는 인간의 개입은 세상을 돌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께서 사물에 심어 넣으신 가능성이 전개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땅에 약초를 마련해 놓으셨으니,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
125. 우리가 인간과 그 주변 세계의 올바른 관계를 성찰하려면 노동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말할 때, 현실에 대한 인간 활동의 의미와 목적을 묻게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체노동이나 농업뿐 아니라 사회 연구 개발부터 기술 개발 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존 현실의 변화를 포함하는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형태의 노동은 우리가 다른 존재와 맺을 수 있고 또 맺어야 하는 관계의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아사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에 대한 관상적 찬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영성도 노동에 대한 부요하고 건전한 이해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예를 들면, 샤를 드 푸코 복자와 그 제자들의 삶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6. 우리는 수도 생활의 위대한 전통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본디 수도 생활은 도시의 타락을 피하고자 세속을 벗어나는 것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사막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사막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나중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은 그의 수도승들에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영적 독서와 더불어 육체노동도 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영적 의미를 담은 육체노동의 도입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묵상과 노동의 상호 작용으로 인간의 성숙과 성화를 추구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을 실천하면 환경을 더욱 잘 돌보고 존중하게 되어, 세상을 건전한 냉철함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127. 우리는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관상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잃으면 노동의 의미를 왜곡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인간은 "물질적 복지를 도모하고 윤리적 향상을 추구하며 영신 기능을 계발할 수 있느"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언제나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은 이렇게 개인의 다양한 성장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창의력, 미래 설계, 재능 계발, 가치 실현, 타인과의 대화, 경배와 같은 삶의 여러 측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의 사회 현실은, 편협한 기업 이윤과 모호한 경제적 합리성을 뛰어넘어, "계속하여 모든 사람의 안정된 고용 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요구합니다.
128. 창조 때부터 우리는 노동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노동을 점진적인 기술 발전으로 대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것입니다. 노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의 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은 언제나 위급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임시방편이 될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노동을 통하여 존엄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커다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는 일종의 기술 발전을 촉진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일자리를 기계로 대체한 결과, 생산 비용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을 거슬러 행동하는 또 다른 길이 될 뿐입니다. 또한 일자리의 감소는 "모든 사회적 공존에 필수적인 신뢰, 의존, 법규 존중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사회 자본'의 점진적인 손실"로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다시 말해서, "인적 손실에는 늘 경제적 손실이 따르며 경제적 역기능에도 늘 인적 손실이 따릅니다." 단기간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기업 행위입니다.
129. 지속적인 고용 보장을 위해서는 생산의 다각화와 기업의 창의력을 고무하는 경제의 증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마련해 주는 다양한 소규모 식량 생산 체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땅과 물을 적게 사용하고 쓰레기도 적게 배출합니다. 이는 소규모 경작지 과수원, 농원, 사냥, 야생 작물 채취, 지역적 어업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규모의 경제는, 특히 농업 분야에서 영세농들이 결국 자기 땅을 팔거나 전통적 생산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영세농들이 다른 다양한 생산 방식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지역 시장과 세계 시장의 접근이 어렵고 판애와 운송의 기반 시설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정 당국은 군소 생산업자들과 그들이 생산하는 품종의 다양성을 투명하고 확실하게 지원하는 조치를 취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입니다. 기업 활동은 부를 창출하고 모든 이를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고귀한 소명입니다. 기업이 특히 일자리 창출을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필수 요소로 여긴다면 그 활동 지역의 풍요로운 번영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연구에서 비롯한 생물학적 혁신
130. 제가 말씀드린 인간과 피조물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전망에서는 이성과 지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외적 요인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경우,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경우, 인간이 동식물계에 개입할 수 있고 동식물을 이용할 수 있지만,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동물에 대한 실험이 "합당한 한계를 지키고, 인간 생명의 치유와 보호에 이바지할" 때에만 정당하다고 가르칩니다. 교리서는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동물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며 마구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모든 동식물의 이용과 실험은 "피조물 전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 합니다.
131. 여기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균형 잡힌 입장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교황께서는 과학과 기술 발전의 혜택이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책임 있게 참여해야 할 인간 소명의 숭고함"에 대한 증거라고 강조하시면서도 "우리는 생태계의 한 영역에 개입할 때에 그러한 개입이 다른 영역에 미치는 결과와 미래 세대의 행복에 대하여 모두 마땅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유전학과 같은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 분자 생물학을 연구하고 응용하고 그 기술을 농업과 산업에 적용하여" 얻은 혜택을 교회가 높이 평가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이 그와 같은 개입의 부정적 영향을 간과하는 "무분별한 유전자 조작"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도 지적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의력을 제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에게 그 창의력을 발휘하지 말라고 할 수 없듯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위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능력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커다란 위험을 지닌 형태의 힘을 보여 주는 인간 활동의 목적과 효과와 맥락과 윤리적 한게에 대하여 끊임없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32. 바로 이러한 틀 안에서 동식물계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에 관한 모든 성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물질세계의 잠재력을 착취하려는 생명 공학을 통한 유전자 조작이 포함 됩니다. 신앙이 지닌 이서에 대한 존중은, 생명 과학이 경제적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연구를 통하여 생물의 구조와 그 가능성과 변형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주의를 촉구합니다. 어찌 되었든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피조물의 본질에 따라 자연이 발전하도록" 자연에 영향을 주는 개입은 정당합니다.
133. 의학이나 농업 분야의 식물과 동물 유전자 변형에 대하여 일괄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위험은 그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부적적하거나 지나친 기술 적용 때문에 발생합니다. 사실 유전자 변형은 자연에서 자주 발생되어 왔고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개입으로 비롯된 변형도 현대적 현상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동물 길들이기와 교잡 육종과 더불어 오래된 여러 일반적 관행들이 있습니다. 유전자 변형 곡물의 과학적 개발은, 식물 게놈 변형을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박테리아의 관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어 현재의 기술적 진보가 이룩한 빠른 속도와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러한 속도가 수세기에 걸친 과학적 발전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여도 비교되지 않는 것입니다.
134 비록 유전자 변형 곡물이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없고, 일부 지역에서는 그러한 곡물의 이용이 경제 성장을 가져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었지만, 여전히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대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이러한 곡물이 도입되어 비옥한 농토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습니다. 이는 "개간 농지 부족으로 직접적인 생산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군소 생산자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많은 농촌 일꾼들은 결국 도시의 빈민가로 이주하게 됩니다. 유전자 변형 작물의 증산은 복잡한 생태계 망을 파괴시키며 생산 작물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현재와 미래의 지역 경제에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 나라에서 곡물 생산과 그 재배에 필요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을 독과점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번식력이 없는 종자가 생산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의존성은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농민들은 대규모 생산자에게서 그 종자를 구매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135. 분명 이러한 문제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그에 관련된 모든 윤리적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가능한 정보를 고려하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때로는 정보가 모두 제공되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인 특정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선별됩니다. 이는 다양한 문제들에 관하여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균형 잡힌 신중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만듭니다. 직간접적으로 균형 잡힌 신중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만듭니다. 직간접적으로 어느 모로 관련된 모든 이(농민, 소비자, 행정 당국, 과학자, 종자 생산자, 농약 살포 농지 근처 주민 등)가 자신들의 문제를 알리고, 현재와 미래의 공동선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믿을 만한 충분한 정보를 얻는 논의의 장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독립적이고 학제적인 연구를 위한 자금 지원 노력이 필요합니다.
136. 다른 한편으로, 일부 생태 운동에서는 환경의 온전함을 수호하고 과학 연구의 제한을 정당하게 요구하면서도, 때로는 동일한 원칙을 인간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 배아를 연구할 때 모든 제한을 넘어서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도할 수 없는 인간 가치가 인간의 발전 수준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이처럼 기술이 위대한 윤리 원칙들을 경시하면 결국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장에서 살펴본 대로, 윤리를 배체한 기술은 자기 힘으로 스스로 통제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