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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내가 ‘힐러’거든요?
미풍, 동해, 동수, 인하, 타환이었던 지창욱이 ‘힐러’가 되자 본모습을 드러냈다. 배우 지창욱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드라마 <힐러>를 꼭 다시보기 할 것. <힐러> 속 지창욱을 직접 확인해봐야 한다. 아낌없는 칭찬의 박수를 건네게 될 것이다.
내 이름은 서정후, ‘힐러’죠
정후와 영신이는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이젠 볼 수 없단다. 사실 그게 맞는 건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힐러는, 서정후. 서정후는 지창욱. 지창욱은 지창욱? 내가 지금 힐러와의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건가.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 ‘힐러’인가요?
‘힐러’같은 목소리에 혼자 뜨끔 놀라곤 했다.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귀를 쫑긋하며 바라봤다. 참 똘망똘망한 눈빛이다. 칭찬을 듣는 건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면서 쑥스러움에 몸을 베베 꼬기도 했다. 앗, 봉수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으면 박수도 친다. ‘진짜’ 갑작스레 생각난 게 있으면 말이 트여 쏟아내다가도 박수로 추임새를 넣는다. 웃음소리는 호탕했다. 하하하. 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더라. 웃을 땐 어떻게 웃었냐고? 아지트에 찾아온 영신이를 배웅할 때처럼 웃었다.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끝까지 좋은 기운이 따랐다.
오죽하면 감독판 블루레이, 디비디가 마지막 방송 날 완판됐을 정도다. 송지나 작가에게 <힐러>는 ‘언젠가는 써야할’ 작품이었다. 마침 이정섭PD가 송 작가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캐스팅은 착착 진행됐다. 대본은 10부에 달하는 분량이 미리 나와 있었다. 제작발표회 때부터 이 PD를 비롯해 출연배우들이 송 작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유지태는 17년 전 신인시절 송 작가의 단막극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에 대해 보답하고 싶었다는 그는 영신의 ‘키다리 아저씨’로 등장해 비주얼만으로도 훈훈해지는 ‘조카 사랑’을 뽐냈다. 이 PD와 <영광의 재인>에서 만난 적 있는 박민영은 인성 좋은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그의 강력 추천으로 캐스팅됐다. 촬영차 유럽에 나갔던 박민영은 기차 안에서 <힐러> 시놉시스를 단숨에 읽고 역 식당에 들러 바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송 작가는 지창욱을 우연히 영화 시사회에서 만나 모른 척 꿰뚫어 보는 선한 눈빛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몰아보곤 매번 발전하는 연기내공을 느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힐러 서정후’로 열연한 그를 더욱 입이 마르게 칭찬하게 됐다.
“저는 결과보다 그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번 작품에선 무엇에 집중해 봐야할까,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 있어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나. 노는 걸 좋아하는데 일하는 것도 좋아하긴 하나 봐요(웃음). 제가 표현하는 작업도 재밌고 그걸 알아주셨을 땐 기분 좋고.”
<힐러>가 호평 속에 끝났다.
시청률이 그 작품의 인지도가 되고 주연 배우에겐 대표작이 되는 지금, 시청률이 잘 나왔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테지만 <힐러>는 배우 지창욱의 제2막을 열어줬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시청률 때문에 흔들리진 않았어요. 성패를 떠나서 제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봤어요. 흔들리면 그건 책임감이 없는 게 아닐까요. 즐겁게 촬영했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작가님, 감독님, 배우들, 스태프들. 다들 절 많이 믿어주셨어요. 배우로서 신뢰감을 얻는 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구나, 알게 됐죠.”
정후는 무인도 살 돈을 벌기 위해 ‘힐러’로 활동했다.
하지만 밤심부름만 하던 그가 알게 된 사실들은 그의 소박한 꿈만큼 가볍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다. 드라마에 담긴 메시지만큼 배우 지창욱의 고민도 깊어졌다.
“쉽지 않은 대본이었어요. 고민하고 생각할 게 많았죠. 이해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어요. 작가님께 전화도 많이 드렸어요. 이건 뭐예요? 이건 어떤 의미예요 작가님? 대답을 듣다보면 재밌어요.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게 없었죠. 할 게 많았기 때문에 더 재미있었어요.”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이 느끼는 감정과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전달받고 싶어 그 배역을 만든 작가에게 종종 조언을 구한다.
“송지나 작가님의 대본은 읽는 재미가 있어요. 그래서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드린 적이 있죠. 작가님 대본을 받아본 게 너무나 큰 행복이었어요. 글에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어 어떻게 표현해야하는지 생각이 많아지고 지금 보면 아쉬운 것도 많아요.”
시청자 입장에선 아쉬울 게 없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아쉬웠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었다. 연기력 논란이 없었던 그가 무슨 고민을 한 걸까.
“송 작가님 대본에는 감정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지문이 길어요. 예를 들어, 정후는 사부가 죽고 나서도 눈물을 계속 참죠. 작가님의 의도는 우는 방법을 몰랐던 아이가 영신이라는 여자아이를 만나 눈물샘이 터진다는 거였어요. 여기서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모르는 게 뭘까,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 답을 내진 못했어요. 눈물을 참는 게 힘들었죠.”
정후는 옥상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게 좋다고 했다.
그래도 혼자 쓸쓸히 있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정후는 옥상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만의 공간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야겠단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정후는 굉장히 외로웠고 어쩌면 사람에 질렸을 수도 있어요. 정후는 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거죠. 그는 ‘저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해서 그들보다 위에 서서 바라보는 거예요. 정후가 말해요. ”사람들을 보면 표범 같은 동물 같은데 그들 사이에서 잘생긴 표범이나 잘생긴 호랑이를 찾긴 쉽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볼 때 조금 더 좋은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나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거죠. 정후는 외로운 사람인데도 외롭다 말하지 않아요. 나는 이래.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게 싫어. 이렇게 옥상에서 바라보는 게 좋은 것 같아.”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던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봤을까.
오직 둘뿐인 사랑이다. 용감하고 치열하게 타인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정후와 영신이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드러났다. 영신이와 정후는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았을까. 사부 말대로 좋아하는 사람과 아이 둘 낳고, 개 한 마리, 고양이 두 마리, 금붕어 세 마리 키우며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정말 예뻤어요. 그 둘은 서로를 굳게 믿었죠.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거예요. 두 사람의 믿음이 너무나도 예쁘고 좋아보였어요. 외롭고 상처받은 그들이 평생 믿을 수 있는 상대방을 찾았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잖아요. 저도 그런 사랑 하고 싶죠. 그런데 사랑이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웃음)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이러한 사랑에 열광하게 되나 봐요. ‘힐러’의 존재도 그래요. ‘힐러’같은 인물은 판타지나 다름없어요. 시청자분들은 그런 모습에 열광하고, 배우로서는 그러한 인물을 통해 직접 보지 못한 모습들을 상상해 그려나가면서 재미를 느끼는 거죠. ‘외로움’같은 결핍이나 콤플렉스도 그 배역을 맡을, 혹은 맡은 배우로선 큰 매력으로 다가와요.”
이 질문은 꼭 하고 싶었다. "지창욱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힐러’ 버전으로 말해주시겠어요?"
“밥, 축구? 침대. 돈...도 좋아하고요(웃음). 술, 커피도 좋아하고요. 노는 것도 좋아하고요. 만화책도 좋아하고요. 만화책, 그거... 다 볼 거예요. 싫어하는 건 청소, 설거지. (정후랑 비슷한데?) 네. 제가 정리정돈을 잘 못해요. 어머니께서 다 치워주진 않으세요. 더 이상은 안되겠다! 하면 제가 가끔 수습(?)만 하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공납금. 돈 꼬박꼬박 내는 걸 잘 못해요. 작품을 할 땐 거기에만 빠져 있어서 제 일상생활을 챙기질 못하는 거예요. 4개월 촬영하면 공납금이 4개월치 밀려있어요(웃음). 촬영이 끝나면 그것부터 재빨리 정리해요.”
올해는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라는 그, 더욱 즐겁게 일하기 위해 무얼 준비하고 있을까.
놀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친구들도 더 많이 만나겠단다. 여행은 안 가냐고 물으니 “가야 된다”고. 장소는 상관없다. 친한 사람들과 술이 있는, 한적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머물 예정이다.
“작품이 몇 개 들어왔어요. 꼼꼼히 잘 보고 다시 인사를 드려야죠. 제가 하려고 하는 건 모두 도전인 것 같아요. 아직 많은 경험이 없다보니까 매번 새로워요. 드라마에서 액션을 하기엔 시간도 없을 뿐더러 그때그때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힐러>에서는 ‘양보다 질’로 승부해서(웃음) 액션을 많이 보여드리진 못했어요. 제대로 된 액션 한번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회사원, 백수, 의사, 변호사. 하고 싶은 역할은 너무 많은데 몸이 하나라(웃음). 앞으로 하나씩, 다~(웃음)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