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봉사자 학교 강의
(2001년 9월)
(장익 주교님 강의 요약)
..... (중 략) 예수께서는 뒤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 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 시쯤이었다. (중 략) 그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떠나가시려던 참에 필립보를 만나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중 략) 그가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 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다. (요한 복음 1장 35-46절)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다른 말씀이 없으시고「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읽은 구절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고 사람들과 만나서 같이 지내면서 보는 것입니다.
봉사자 학교 첫 시간입니다. 기본적으로 알고 들어가야 할 이야기가 적합할 것 같아 백주간의 역사, 진행 방법, 성격과 방법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공헌 중 하나는 ‘모든 교우들에게 성경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이는 대단한 의미가 있고 역사적으로 모든 이에게 남는 일입니다. 라틴어 성서, 라틴어 전례...... 신자들은 성사 생활만 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이처럼 성서가 잘 읽히지 못했던 여러 이유는 어렵고, 부피도 크고, 인간의 부정적인 면까지 쓰여져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알아듣지 못할까하는 우려도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교와의 종교 분쟁이 나면서 성사를 인정하지 않고 각자가 양심 안에서 만나는 믿음, 오직 말씀만이 개인의 구원을 가져온다며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성서를 보아야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역사 속의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이며 그 관계가 어떠해야 하나 전달하고자 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서를 잘 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에 그 내용이 감동적인 면도 많지만 상상도 못할 좋지 않은 내용도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판관기의 인물을 평가해 점수를 매겨 보았었습니다.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판관들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단점이나 어두운 면을 통해서도 그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성서를 ‘통’으로 봐야 합니다.
성서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전달하시고자 역사 안에 강생하시고 사람으로 들어오시어 스스로를 전하시고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았나하는, 전달하시는 하느님과 거기에 화답하는 인간의 관계의 역사의 기록입니다. 종교적 고전인 성경은 사적인 말씀처럼 들리지만 보편성을 지니며, 모두의 생명을 위한 구원의 공동체성을 띤 말씀임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따라서 상황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읽고 나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며 그때에 주신 말씀이 열매를 맺습니다. Thomas Moore를 36년간 철저하게 연구한 체임버스라는 사람이 그를 아는 앎과 연구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Moore를 만나서 관계를 가지며 그를 알았던 사람과의 앎과는 다릅니다. 즉 연구해서 아는 앎이 있고 만나서 관계를 가지면서 아는 앎이 있는데 이는 구분됩니다. 즉 인간적인 관계를(함께 읽고 나누는 것) 가지면서 알아 가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성서를 읽는 목적은 기도 속에서 내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에는 첫째로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내 소리는 잠재우고 가난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들리게 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해도 또 내 입에 단 것만 받아들이고 쓴 것은 뱉으려 해도 안됩니다. ‘통’으로 성서를 이해하고 성서 말씀으로 성서를 풀어야하고, 내가 성서를 무기나 연장으로 써먹으려고 외워도 안됩니다. 둘째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들리고 문자만 가지고 하면 안 보입니다. 요즘 백화점 신심이니 슈퍼 신심이니 하는 소비사회의 새로운 형태의 신심 단어가 등장하는데 신앙은 내가 골라잡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자는 길라잡이로서 내 역량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르침이 없도록 반드시 일러주시며 그것을 믿도록 해야 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나도 따라하면서 인도하고 같이 기도하는 동반자입니다.
백주간의 내력은 이렇습니다.
마르셀 르 도르즈 Marcel Le Dorze(2001년당시, 83세) 파리 북부 출신의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님께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1949년 공산혁명 때에 추방 당해 일본 우에노 난민촌에 머물며 봉사할 때 입교자가 많아지자 우에노 본당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 영세자의 기쁨을 지속시키고자 성서를 강의하였는데 졸기만 하는 신자들에게 다음 주에는 읽고 와서 이야기해 보라고 하자 토론장이 되어 버려 토론회를 지양하고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보고 그리고 기도해보라는 과정을 거치며 여러 해 동안 다듬어 지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또 너무 자신 입장만 이야기하는 것에서 중요한 것을 집고 넘어 가기 위해 복습과 예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1년이면 끝날 수 있으려니 하였으나 2년에도 안 되었고 그런 중에 우에노 본당의 이런 성서 모임의 소문을 들은 다른 교구의 신부님이 그 이름을 물어 보시다가 그럼 100주간이라고 하면 되겠다는 데서 백주간의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수정과 보완을 거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0년 전 3월에 도입되어 분도 출판사에서 출간하면서 성서 모임을 하시는 분들을 모시고 분도 회관에서 1박 2일로 설명회를 가졌고, 제가 본당 신부로 있던 세종로 성당에서 네 개의 반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일본보다 활기 면에서나 수적인 면에서나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도르즈 신부님께서 작년 5월에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곧 회복은 하셨으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후임으로 크리스티안스 신부님이 책임을 맡게 되었고, 저도 큰 일을 맡아 걱정도 많이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흐름대로 해보니 121주간이 되었고 교재도 처음에는 낱장으로 나누어주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92년 2월 박숙안 까리따스 수녀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고, 한국어본 3권이 영어 불어 일어로 다시 번역되었습니다.
봉사자는 그룹원 들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스스로 능동성을 가지도록 신경 쓰며 결석한 사람들을 챙겨야 합니다. 백주간은 이렇게 실재로 경험에서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에 본당에 맞게 변형시키면 결국 무너지게되니 되도록 백주간의 규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예습은, ~을(를) 생각하며 읽어보십시오. 라고 하고 예습용으로 추천하는 책으로 손희송 著 「신앙인」「나에게 희망이 있다」를 권합니다.
복습은 인쇄된 유인물을 생각도 해보았으나 정답은 아니고 각 그룹마다 특성이 있는데 그것만을 생각하고 마는 결점이 있습니다. 도움책의 소제목만 보아도 복습이 가능하고 누락된 부분은 봉사자의 짤막한 보충도 가능합니다. 가끔 길잡이 책을 함께 읽으면 잔소리 없이 효과를 봅니다.
봉사자를 위한 도서로 Thelma Hall 著 「깊이깊이 말씀 속으로」 Bianchi 著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를 추천합니다.
처음 백주간을 시작하는 본당에서 봉사자의 파견 요청이 오면 바람직하기는 전부를 마치는 것이 좋지만, 그러기에는 불가능하고, 못해도 모세오경이라도 해야 하지만 한동안만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균형 있고 탄탄한 좋은 봉사자를 계속되는 파견 요청에 어떻게 대어야 하는지 큰 숙제입니다. 봉사자 학교를 시작한 것도 앞을 내다보고 한 일입니다.
성서 주간이 돌아오면 백주간을 본당에 알리는 유인물을 보낼 예정입니다. 내년에 10주년 기념 행사에 좋은 의견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개정판 공동번역성서는 의역하여 문장이 수려하나 원문에서 멀어집니다. 200주년본은 그대로 옮기기는 하였으나 귀로는 껄끄럽습니다. 원문도 3가지나 됩니다. 이렇게 성서가 언어상의 원문과의 관계 때문에 자꾸 개정되게 됩니다만 전례상으로 아직 통일을 못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임승필 신부님의 노력으로 2005년까지 새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장익 주교 강의, 2001년 봉사자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