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1108 멧따 빠라미 (2)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붓다왕사 189강 - 멧따 빠라미 (2)
<붓다왕사>에서 멧따 빠라미(자애 바라밀) 하고 있습니다. 멧따(mettā)라는 것이 ‘뻬마(pema)’, 애정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뻬마가 3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3종류의 애정(뻬마)
(1) 딴하 뻬마(taṇhā-pema) - 이성간의 집착의 힘으로 하는 집착과 사랑.
(2) 게하시따 뻬마(gehasita-pema) - 가족애. 한 집에 사는 사람들간에 있는 딴하 뻬마. 이것도 로바죠.
(3) 멧따 뻬마(mettā-pema)입니다.
(3)번이 이 멧따로 인한 뻬마(애정)인 거죠. 진짜 바라밀이 되는 애정입니다. 이것은 같이 지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아무리 멀리 있어도 멀리 있는 사람이 편안하고 발전하고 좋으면 내 마음이 기쁘고 좋은 것. 나랑 상관없는 멀리 있는 상가에 보시하는 걸 보고 기분이 좋으면 이게 멧따 뻬마입니다.
남이 좋은 일 하는 것 보고도 내가 기분이 좋고 내가 기쁘면 같은 선업을 짓는 겁니다.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니 그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보시자가 보시하는 과정에서 그 신심이 식을 수도 있죠. 화가 날 수도 있고 하고 나서 후회할 수도 있고. 보시자, 즉 돈이 나간 쪽에서는 하고 나서 후회나 화가 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중간에서 그 돈으로 일해주는 봉사자들이 그런 마음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마음으로 일을 하면, 봉사자들이 받는 결과가 더 크기도 합니다. 법구경에도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남의 선업을 보고 내 마음이 기쁘면 그에 버금가는 선업을 짓는 겁니다. 이게 무디따죠. 브라흐마 위하라, 범천들이 사는 방법 4가지 중에서 무디따(muditā)입니다. 남이 잘 되는 거 보고 나도 기분 좋은 거. 멧따이기도 하고 무디따이기도 하고. 이게 멧따 뻬마입니다. 나와 가깝기 때문에 잘 되어서 기쁘고 행복한 게 아니라 멀리 있는 존재들도 잘 되면 행복하고 기쁜 것. 이게 멧따입니다. 앞의 두 개는 선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집착이기 때문에 선업이 아닙니다. 불선업입니다. 로바는 불선업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두 가지는 불선업에 들어갑니다. 죄송합니다. 두 가지는 불선업입니다.
세 번째가 멧따 바라밀에서 말하는 자애입니다. 앞의 두 가지가 있으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겠지요. 근데 뒤에 있는 자애는 그런 게 아니니깐 로바가 들어가 있지 않으니깐, 집착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깐 정확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른 거죠. 앞의 두 개와 세 번째는 다른종류입니다. ‘뻬마’이지만, 같은 ‘애정’이란 말이 붙지만 다른 종류의 애정인 거죠. 아비담마를 하든지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지, 하고 나서 세상을 보면 우리가 고귀하고 좋은 거라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다 고귀한 게 아니고 불선업이라는 듣고 배우지 않아도 위빳사나 지혜로 스스로 알게 합니다. 불선업이구나 하고 압니다. 어리석음에서 발단한 불선업이 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아비담마에서 보면, 위빳사나에서 보면 정말 한심한 일인 거죠. 어찌 그리 한심할 수가! 이렇게 되는 거죠. 이건 첫 번째 딴하 뻬마죠. 딴하 뻬마고 집착입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총을 드는 것, 이건 게하시따 뻬마이고. 로바에서 나온 잔인한 성냄 불선업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비담마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세간에서 보면? 대답 않겠습니다. 그 순간들에. 그 순간에 불선한 마음 로바물라 찟따(lobha-mūla-citta.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가 일어나고 도사(성냄)가 일어나는 거죠. 로바와 도사가 일어나서 그 순간에 살생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죠. 만약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럴 수 있죠. 전쟁이 나거나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나는 어떤 보직을 맡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윤회는 앞으로 많이 남아있으니깐 어디에 태어날지 알 수 없죠. 이번 생에 확실하게 수다원이 안 되면 경전에 나오는 ‘그 뒤로 계속 천상계와 인간계에 살다가 고따마 부처님 때 수다원이 되었다.’ 이 정도 되는 선업을 확실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전한 생에서 살다가 다음 부처님 때 빠르고 쉽게 도와 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최대한 안전한 것을 가장 안전한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인데 생이 남아있다는 것은 절대 안전한 선택이 아닙니다.
빔비사라왕은 타고나기를 아주 똑똑하게 태어났습니다. 똑똑하고 예의바르고. 보살인 싯다르타 왕자가 수행자로 떠돌 때 싯다르타 왕자의 인드리야(indriya), 감관을 통제하는 능력만 보고도 싯다르타 왕자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와 나라를 나누어서 통치하자고 제안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저 사람이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이런 걸 목소리만 듣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매우 고상하고 예의 바른 말을 썼습니다. 말을 할 때도 아주 예의 바르고 화낼 수 있는 자리에서도 화내지 않고 아주 고상한 언변을 썼습니다. 의사 지와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큰 국가 마가다 왕국의 왕이었고 아주 예의 바르고 게다가 수다원이었습니다. 수다원도 금방 되죠. 그런데 아주 고통스럽게 죽습니다. 아들에게 죽임 당하고. 그리고 수다원인데 그렇게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사천왕계에 태어나죠. 사천왕계는 아주 좋은 천상계는 아닌 거죠. 천상계이기는 한데 아비담마 위티뭇따(vīthimutta. <아비담맛타상가하>에서 ‘인식과정에서 벗어난 마음’의 장)에서 보면 가장 낮은 천상계입니다. 거기에 태어납니다. 생이 있으면 안전하지 못합니다. 어디에 태어날지 모릅니다.
그다음에 그 ‘사랑함’이라는 자애를 많이 증장시킬 때 청정하지 않는 집착, 딴하 뻬마 그리고 게하싯따 뻬마. 이것이 아닌 정말 청정한 자애 뻬마를 증장시켜야 된다. 자애관을 할 때, 그 딴하 뻬마 남녀간의 사랑과 게하시따 뻬마, 가족 간의 사랑. 자애가 아니라 진짜 자애, 자애 뻬마를 증장시켜야 된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자애관입니다. 가족간이나 이성 간의 자애는 자애가 아니다. 불선업 로바(탐욕)이다. 라고 나옵니다.
자애(자애)와 아도사(성냄 없음)
자애와 아도사(adosa. 성냄 없음)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자애는 빠라맛타로 보면 분명한 특성이 있다. 빠라맛타라는 것은 아비담마에 나오는 실재, 그걸로 분명하다. 빠라맛타 담마들은 하나씩 각자의 고유의 캐릭터가 있죠. 고유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애는 어디에 넣냐면 쩨따시까(cetasika. 마음부수)에서 아도사 쩨따시까(‘성냄 없음’이라는 마음부수)에 넣습니다. 자애라는 것은 아도사의 한 부분입니다. 아도사 전체는 아니고 자애가 아도사의 일부인 거죠. 아도사 전부가 자애는 아니다. 자애는 아도사의 일부, 그 안에 들어가는 부분집합입니다. 그래서 아도사 마음부수는 아비담마로 보자면 소바나 사다라나 쩨따시까(sobhana-sādhāraṇa-cetasika) 여기에 들어가죠. 모든 아름다운 마음에 다 들어가는 마음부수 19개에 들어갑니다. 아도사 쩨따시까는. 그리고 자애라는 것은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두고 자애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애는 자애 뻬마, ‘자애라는 자애’ 이거죠. 이것은 중생을 대상으로 합니다. 중생은 관념이지 않습니까? 빠라맛타 담마가 아니죠. 이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자, 여기서 분명한 것이 뭐냐면 자애경 아시죠. 부처님이 설하신 자애경(<숫따니빠따> 1.8.)에 보면 제일 마지막에 ‘계행과 지혜를 완벽하게 지닌 수행자는 잘못된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해서 다시는 잉태되어 윤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아나가미(anāgāmī)가 된다는 뜻입니다. 아나가미(아나함)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죠.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범천계에 태어납니다. ‘입태’라는 것은 욕계에 태어나는 거죠. 범천은 입태하지 않습니다. 빠띠산디(paṭisandhi. 재생연결)는 하는데 입태는 하지 않습니다. 욕계에 입태하는 이런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 아나가미가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 문단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자애라는 것이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하니까 위빳사나 수행방법은 아닙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애 수행(자애관)은 아나가미가 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나가미가 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자애가 있으면, 자애관을 하면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거죠.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가르치시길, 자애관을 하면 너희가 수행하는데 그 주변에서 도와줄 거라는 거죠. 그래서 장애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은 위빳사나를 해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를 하기 위해서 중생을 대상으로 자애관을 하는 거죠. 위빳사나의 대상은 빠라맛타 담마 4가지이고 자애관의 대상은 중생이라는 관념입니다. 대상이 다르니까 두 개는 다른 수행입니다. 자애는 사마타 수행이고 위빳사나는 위빳사나죠.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번뇌의 뿌리까지 자르게 해주는 위빳사나 수행. 이걸 해야지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거 해서는 절대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상이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걸 봅니다.
위빳사나 수행할 때 자애관을 합니다. 새벽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하는 이유는 수행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자애관을 해서 주변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해주는 거죠.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면 기분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걸 계속하고 있으면 [위빳사나의] 사띠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합니다. 이걸 계속하고 있으면 업을 계속 두텁게 짓는 게 되는 겁니다. 업을 더욱더 얇게 만들고 잘라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나한테 돌아올 업을 계속 두껍게 만들고 있는 게 합니다. 자애관을 하면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위빳사나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를 할 때 자애관을 계속 하는 것은 사띠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평소에 살 때 우리는 자애관을 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그래야 사이좋게 화목하게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는 세상에서 잘 지내는 이런 종류의 수행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수행인 거죠. 방향이 반대입니다. 위빳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들은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그걸 잘 아셔야 합니다. 반대 방향이라는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수행하면서도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정말 물을 거스르고 있는 거구나, 이런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고 편안하고 안온하고 행복하구나, 이러면 그건 위빳사나가 아니라 다른 걸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애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보시할 때 그리고 내가 계를 지키려고 할 때 ‘계를 어기면은 안 되지. 술을 마시면은 안 되지.’ 이렇게 계를 지키려고 할 때, 봉사할 때, 이런 남들이 보이는 눈에 띄는 선업들을 지을 때 이때는 중생을 대상으로 하죠. 봉사할 때 보시할 때 이때 자애의 마음으로 합니다. 자애 뻬마. 이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멀리 있는 존재에게 보내는 거죠. 가까이 있는 존재에게 보내는 게 아니라. 그런데 아도사, 즉 성내지 않음이 생길 때마다 자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자애는 아도사의 일부입니다. 일부이지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성냄이 없는 상태일 때마다 다 자애는 아닙니다. 자애라는 것은 중생이라는 관념, 우리가 상가에 보시할 때도 중생이라는 관념이죠. 이 관념을 대상으로 자애 마음이 나가는 겁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중생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신·수·심(몸, 느낌, 마음)을 대상으로 하지요. 위빳사나는 골치아픈 나를 대상으로 합니다. 난해한 나를. 이게 난해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가 자꾸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중생을 대상으로 하면 쿨한데. 이게 난해한 나를 자꾸 볼려고 하니깐 자꾸 엉뚱한 데로 빠집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보통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빠라맛타 담마를 대상으로 합니다. 자애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하죠.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도 아도사, 성냄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이 있죠. 특히 위빳사나 지혜라고 하는 생멸지나 소멸지가 생기고 이럴 때는 완전 아도사 상태인 거죠. 그 순간마다 찰나마다. 이 아도사 상태일 때 자애는 없습니다. 분명하게 아주 냉정합니다. 위빳사나는 일단 대상부터 냉정하지 않습니까? 나의 몸과 느낌과 생각(마음)을 남처럼 대상으로 봅니다. 중생에 대한 연민심이 생기면 그것도 대상으로 봐야 합니다. 위빳사나 할 때는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연민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애와 연민으로. 위빳사나할 때는 그것도 대상이 되는 거죠. 그것도 생각이니깐. 생각, 생각, 생각. 이렇게 쳐냅니다.
“중생들의 발전과 번영을 원하는 마음. 이것이 아도사 쩨따시까이다. 그래서 이 아도사 쩨따시까를 자애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마음부수 52개 안에 자애라는 마음부수가 없지 않습니까?이 자애라는 마음이 있기는 있는데. 이것을 마음부수 52개 빠라맛타 담마에서 찾자면 아도사 쩨따시까가 되는 거죠. 하지만 모든 아도사 마음부수가 자애는 아니다. 그렇죠. 앞에서 말한 칸띠 바라밀에서 칸띠(참음)가 있을 때 아도사 쩨따시까로 이것을 가질 수 있다. 칸띠라는 것이 인내이죠. 이때도 ‘성내지 않음’이지 않습니까. 칸띠는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성냄을 참고 있는 상태가 칸띠는 아닙니다. 칸띠 바라밀에서 말하는 인욕 바라밀은 성냄을 꾹 참고 누르고 어디 두고 보자, 이러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비가 있고 자애가 있는 그런 마음상태일 때 칸띠입니다. 칸띠, 인욕해서 기회를 틈타서 보복하면, 그건 칸띠가 아닌 겁니다. 칸띠는 그런 마음 없이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현명한 마음기울임)로 내 안에서 다 소화시켜야 이게 칸띠입니다. 두고 보자, 이렇게 하면 이건 성냄인 거죠. 성냄을 품고 있는 원한인 거죠. 칸띠가 아닌 거죠.
칸띠(인욕)도 아도사(성냄 없음)입니다
그래서 칸띠도 아도사 쩨따시까로 볼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칸띠는 아도사 쩨따시까입니다. 성냄을 품고 있는 칸띠는 아도사가 아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성냄이 없어야 합니다. 참을 때 기분 좋게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일단 자애는 중생의 발전을 원합니다. ‘중생들이 행복하고 번영하기를’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자애입니다. 자애를 많이 많이 하려면 자애하기에 편안한 대상에게 자애해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이성이나 가족에게 일단 집착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족에 대한 집착이 있지요. 이런 대상을 대상으로 서늘한 자애를 증장시키기 어렵겠지요. 또 자애를 증장시킬 때 미워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자애를 증장시키면 안 합니다. 자애관하면 안 합니다. 그러면 화만 나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고 적당히 좋아하는, 적당히 그냥 그저 그런 대상을 대상으로 두고 자애관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점점 커지면 나중에는 나의 적, 원수에게도 자애를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가 있겠죠.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필사자: 익명
편집자: 담마삐야
* 2022-11-08 인터넷(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73
일부용어 수정.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