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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잘 놀다 가자
손 중 하
살다 보니 인생이 종착역쯤 온 듯하다. 그런데도 두려움 없이 편안하다. 그저 지금이 좋다. 숙제가 없어 좋고 그저 자유로워서 좋다. 가끔 원고 내달라는 것과 강의 청탁만 없다면 더 좋겠다만은, 어디 그런 양념 없이 인생이 단맛을 알겠는가.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하고 달이 어제보다는 살쪄있다. 이런 날은 바닷가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낚싯대와 화로, 장작, 와인 등 몇 가지를 차에 실어둔다. 날씨가 찰지 몰라 보온할 수 있는 기구들을 더 챙기고 덤으로 낯선 친구를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와인잔도 하나 더 챙겨 넣고 인터넷에서 남해 쪽의 섬을 찾아본다.
금오도, 언젠가 가본 적이 있는 섬이다. 비렁길을 걷던 생각이 난다. 5코스 중에 1코스만 둘러보고 왔으니 금오도를 다시 가고자 한다. 그쪽 일기 상황을 보니 일주일 정도는 지낼만한 날씨다. 어제 강의도 끝냈고 홀가분한 상황에서 2박 3일 정도 머물다 오면 딱 좋은 곳이다. 배 시간을 알아보니 돌산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까지 가는 배가 12시에 있다.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면 배 시간에 맞출듯하다.
가을의 터널을 뚫고 지나는 운전의 맛도 아직은 할만하다. 안전 운행의 기도를 끝내고 여행에 장단을 맞추라고 아들이 깔아준 음악을 켜고 낯익은 삶의 장소에서 낯선 장소로 작은 이사를 해본다. 진산에서 여수까지 30여 개가 넘는 터널을 지나 신기항에 도착하니 아직 한 시간의 여유가 있다. 신기항 여기저기에 빈 배들이 밧줄로 묶여있다. 빈 배를 보고 있으려니 중국 전국시대의 장자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데 반대편에서 어떤 배가 다가온다. 빈 배가 주인 없이 자기 배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배 주인은 그 배와 부딪칠까 봐 살짝 비껴간다. 얼마쯤 가다 보니 또 다른 배 한 척이 자기 배를 의식하지 못한 채 다가온다. 빈 배가 아니라 사람이 탄 배다. 소리를 지른다. “여보시오 배가 부딪칠 것 같으니 조심하시오!” 그래도 못 들은 척하고 더 가까이 다가온다. 이쪽 배 주인이 화가 나서 더 큰 소리로 외친다.
인생은 나와 다른 타인과 같이 살아가야 함에도 화를 내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먼저 온 배는 빈 배였고 후에 온 배는 사람이 탄 배였는데 역시 삶은 비우지 않으면 욕심이 생기고 화가 생기고…….
장자의 빈 배와 사람이 타고 있을 때의 배의 이야기다. 세상을 빈 배처럼 바라보고 나 자신도 빈 배가 되어보면 어떨는지.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인생의 절반을 넘어 예까지 오게 되었다. 무엇에 쫓기는 듯 살아왔다. 가난을 벗어나기에 바빴고, 무식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바빴고, 소유와 집착에 바빴다. 육체와 정신이 동거하지 못한 채 별거하며 살아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늘 하늘은 말한다.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삼가고 목소리는 높이는 것을 경계하라. 내가 좀 불편해도 주변을 평화롭게 하는 배려를 품어라. 그러면서 자신에게 다짐한다. 자존심을 버리고 불필요한 일에 고통받지 말자.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싸우며 초조하게 살지 말자고…….
장자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편안해지는 방법 세 가지를 말한다.
1. 착한 일을 하더라도 소문내지 말 것
2. 악한 일을 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가 아닐 것
3. 무슨 일을 할 때는 중간의 입장을 기준으로 삼을 것
이렇게만 산다면 이제는 자신에게 여유를 주어도 괜찮을 듯싶다. 이런 여유를 가진다면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터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관계에서 나는 소리도 귀 거슬림 없이 들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하늘의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바로 외로움 대신 자기 성찰을 통해서 혼자됨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익숙함을 배우는 것이다. 인생 전반을 살아가는 동안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던 곳에서 벗어나 다를 곳을 한번 바라보며 또 다른 낯선 곳을 익숙하게 하는 과정이 내게 하나의 축복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나는 필시 집시의 인자를 타고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자신을 괴롭히는 극기 훈련 같은 일들은 그만두고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야겠고, 이것이 내 인생의 후반을 위한 시작이자 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행복을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행복하여지자는 당찬 생각이 나를 자꾸만 내몬다.
비록 내 모든 이야기를 공감해주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자연은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여유 없게 빽빽하게 채우지 말고 여백을 주어보라고 말해준다. 세상 눈치 보며 빙빙 돌지 말고 영혼이 탈진하기 전에 나를 바로 세우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내가 나에게 친구가 되어 손을 내밀고 눈물과 위안이 되어 주라고 말한다.
이만하면 이번에도 집을 떠나오기 잘하지 않았는가.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금오도 여천항에서 오는 배가 신기항으로 들어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뱃고동 소리는 낭만이라는 색깔이 칠해져 있다.
차를 배에 싣고 15분 정도 지나니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항에 도착, 배에서 내려 직포 쪽으로 가서 둘레를 한번 둘러보고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낚시채비를 하고 미리 와 있는 다른 분들의 조황을 살펴보고 한 자리를 차지한다.
역시 바다는 마음을 다 담아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품었든 상관없이 다 받아 주어서 좋다. 해불양수(海不讓水)라 했던가. 그래서 바다에 오면 혼자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별이 하나둘 떠오르고 제법 살이 오른 달도 중천에 미리 떠 있다. 낚시할 마음이 없다. 그저 차츰차츰 밝아지는 별과 달을 보며 나도 그들에게 신호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에서 화로와 장작을 꺼내 불을 피우고 접이식 테이블을 펴고 누군가가 와서 친구 해줄지도 몰라 의자 두 개를 펴 놓고 와인을 꺼내놓고 잔까지 챙기니 역시 낚시하던 한 친구가 낚시를 접고 곁에 와 앉는다. 이렇게 만나는 친구는 나이와 상관없이 낯설지 않고, 바로 죽마고우처럼 자기의 속내들을 털어놓는다. 홀짝홀짝 와인과 함께 서로의 이야기들을 마시다 보면 술보다 이야기에 취하게 된다. 지난주에는 낚시터에서 만난 순천의 친구 내외의 초대로 거금도 바닷가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임실에 사는 친구다. 낚시의 초보인 나에게 낚시하는 법과 제법 잘되는 낚시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나는 고기를 잡으러 낚싯대를 바다에 담그는 게 아니라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낚싯대를 잡는다. 언젠가 나는 낚시터에 온 사람들에게 나는 고기 낚는 법을 배우고 나는 그들에게 별과 달과 바다에 둘러싸여 오우아(吾友我)를 논하며 ‘이 세상 잘 놀다 가자’라고 동의를 구할지도 모른다.
달이 지기 전, 별이 지기 전 오늘 밤도 혼자든 둘이든 그저 잘 놀다 가자.
여기 금오도에서…….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할머니의 꽃 마음
김 순 길
한여름의 찜통더위가 온몸을 휘감는다. 숨쉬기조차 벅차다. 이처럼 견디기 어려운 더위에 여름방학을 맞이함은 고갈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쁨이다. 고대하던 방학을 맞아 초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수영장에 등록했다.
내가 등록한 ‘아쿠아’ 수업 다음 시간에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영 수업이 시작된다. 우리 ‘아쿠아’팀은 백 명에 가까운 많은 인원이라 늦게 움직이면 샤워할 자리도 없다. 서둘러 자리를 잡아야 한다. 막 샤워를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몰려서 들어온다. 수영장에 입실하기 전, 샤워는 꼭 하고 가야 하는데 자리가 없다. 이곳저곳 할머니들 틈새를 살피는데 저기서 어느 할머니가 “아이야, 이리 와!”라고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얼씨구나 구세주를 만난 듯 급히 달려온다. 아이를 불러드린 할머니는 마치 오늘 아침 집에서 자기 손녀에게 해주듯이 아이의 긴 머리부터 감긴다. 수영복을 벗기고 타올에 비누칠을 하여 몸을 씻긴다. 마치 자기 손녀에게 해 온 숙달된 솜씨이다. 몸을 통째로 맡긴 아이는 한 꺼풀 찌든 때를 벗기니 광채가 나는 듯하다. 마치 꽃을 피우려던 꽃봉오리가 햇볕이 없어 못 피다가 할머니의 사랑을 받아 만개한 모습이다. 한 아이를 말끔히 씻겨 탕에 들여보내고 뒤에서 서성이는 다른 아이를 또 부른다. 이번에도 똑같이 머리를 감기고 몸을 말끔히 씻겨 탕에 들여보낸다. 다시, 세 번째 아이를 불러 씻기고 수영복을 입혀 탕에 들여보낸다. 할머니는 자신의 몸을 씻을 생각도 못 하고 세 아이를 연달아 씻기는 것이 보기에 안타까웠다. 네 번째 아이를 또 부른다. 할머니 앞에 온 아이는 당돌하게 “제가 할래요”라고 말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그래 너 참 똑똑하다”라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나는 속으로 “저 아이는 집에서 교육을 잘 받았구나! 자기 일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습관을 들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수영복을 벗으려 아등바등하는데도 벗겨지지 않는다. 아이는 비싼 소매가 달린 물방울무늬가 새긴 긴 수영복을 입었다. 소매가 꽉 끼어서 쉽사리 벗겨지지 않는다. 할머니가 힘을 다하여 간신히 벗겼다.
네 아이를 마치 자신의 손녀인 듯 아무 거리낌 없이 말끔히 씻긴 후, 탕에 들여보내는 할머니의 얼굴빛은 사랑을 마음껏 베푼 흡족한 모습이다. 사랑의 명약을 먹은 환한 모습이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장남, 장녀는 한없이 믿음직하고 든든하지만, 막내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나 또한 언니, 오빠보다 더 많은 긴 세월을 보살피지 못했기에 막내는 늘 안쓰럽다.
어느 날, 손녀하고 대화를 나누던 중 할머니는 “너희들이 엄마보다 더 사랑스럽다.”라고 했더니 손녀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정말이에요?”라고 반문한다. 손자, 손녀가 더 사랑스러운 것은 아마도 내리사랑인가 보다. 네 아이를 씻겨 탕에 들여보내는 할머니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세월을 말하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데서 묻어 나오는 사랑의 꽃향기는 못다 핀 손자 손녀들의 꽃봉오리를 더 곱게 피우리라.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12),
수필집 향원의 열매, kimsk3527@hanmail.net
학습 체험기
김 기 태
❙색소폰 학습기
악기 중에서 색소폰은 불기가 힘이 드는 악기다. 입문하기는 쉬워도 제대로 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온 차에서도 소리가 다르고, 부는 장소에 따라 다르고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독주를 잘한다고 합주를 잘 부는 것도 아니고, 합주를 잘한다고 독주를 잘 부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시인과 수필가의 차이쯤 된다.
고가인 악기가 소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소리를 좌우하는 것은 악기, 피스, 리드, 리카춰, 부는 이의 구강구조. 그리고 연주자의 습관이 좌우한다. 전문가는 피스와 리드를 노래 따라 바꿔가며 연주하기도 한다. 그만큼 예민한 악기다.
독주는 감성을 살려 맛깔스럽게 불러야 하지만, 합주는 자기 영역만 악상기호에 의해 정확하게 불러야 한다. 오늘날 색소폰 부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전공자가 적다는 것도 문제다. 나이 든 학원 원장들은 대부분 군악대 출신이 많다. 젊은 원장 중에 간혹 색소폰을 전공한 분이 있는데, 우리나라 음대에는 색소폰을 가르치는 학과가 없다. 기악과에서 소수 색소폰 전공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도자 양성에도 문제가 많은 것이다.
색소폰은 음이 불안정하여 아직 오케스트라에 정식으로 참여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가르침도 정립이 안 되었다. 먼저 색소폰 피스를 입에 무는 방법부터 차이가 있다. 오리주둥이로 윗니로 피스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눌러주고, 아랫입술은 리드의 떨림을 느낄 정도로 6:4로 힘을 주어 물어주는 방법과 입꼬리를 당기고 텐션을 준 아랫입술 위에 리드를 올려야 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랫입술의 활동이 소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독주는 소리내기에서 서브 톤, 칼 톤, 비브라토, 벤딩, 꾸밈음 등 각종 기교가 필요하지만 필요한 부분에만 한두 번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며, 합주는 악상기호를 잘 숙지하여 디테일하게 단원들이 입을 맞춰 불러야 편곡자의 의중을 잘 표현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합주에서는 표준음, 스타카토, 텐유트, 엑센트를 구분하여 부는 일이다. 표준음의 길이는 3/4 길이로 불고 나머지 1/4은 공명을 주며, 스타카토는 표준음의 2/4로, 텐유트는 표준음의 4/4로, 엑센트는 표준음의 3/4으로 불 돼 강하게 불어야 한다. 이 부분만 잘 표현해도 ‘아마추어 연주자에게는 격 있는 연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서 멜로디를 강약 중강약으로 표현하며 연주할 수 있으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고 강하게, 쎄게, 크게를 구분하고 약하게, 여리게, 작게를 구분하여 소리를 낼 수 있다면 대단한 실력자라고 생각된다. 요즘 공연을 할 때 대부분 반주기를 틀어 놓고 떼창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이 합주의 기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색소폰을 가지고 공연한다 해도 키보드와 드럼 그리고 일랙과 베이스 기타가 참여하여 기계음 없이 지휘자의 지휘로 이루어진 공연이 진짜인 것 같은데, 길거리 공연이나 색소폰 경연대회에서도 보면 반주기만 틀어 놓고 떼창을 하고 있다.
대전 색소폰 동호회에서 합주에 참여하는 분 중 최고령자는 중학교 교장을 지내신 88세 된 할아버지가 계신다. 악보를 보기 위해서는 시력이 좋아야 하고, 합주는 남이 부르는 것도 잘 들어야 하기에 청력도 좋아야 한다. 혀와 손도 잘 따라가 주어야 한다. 이와같이 몸의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
나이가 많으셔서 허리가 아파 노래 한 곡을 서서 부르지 못하지만 결격 사유는 되지 않는다. 앉아서 부르면 되기 때문이다. 1시간 연주를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으시다. 더구나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치매에 걸릴 확률도 떨어질 것 같으니 좋은 것 같다.
노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바쁘다면 행복한 삶이다. 공연하기 위해 음향기기를 운반할 때 힘이 달려 돕지는 못하지만, 용돈을 아껴 단원들에게 가끔 밥이나 간식을 사면 된다. 취미생활은 적당히 바쁘게, 젊게 사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러다 너무 오래 사는 것도 문제겠지만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동호회 사무실로 출근을 한다.
살짝 미치면 인생이 즐겁기 때문이다.
❙서각(書刻) 학습기
일본에서 탄생하여 한국인이 더 좋아하는 것 중에 화투놀이가 있다.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비와 똥의 月이 바뀌었지만 비光에 숨은 뜻을 아시는 분은 많지 않다. 버드나무 이파리 밑에 우산을 든 사람이 있고 개구리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추사 김정희만큼이나 유명한 일본의 오노도후((小野道風)라는 서도가(書道家)가 있다. 어느 날, 붓글씨 쓰기가 지루하여 정원을 거니는데, 청개구리 한 마리가 수양버들 나무에 오르려고 점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높아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바람이 불어 수양버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땅으로 가까워지니 그 찬스를 이용하여 개구리가 나뭇가지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방에 들어가 개구리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해서 일본에서 유명한 서도가(書道家)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비광(光)에 담긴 이야기다.
붓글씨를 쓰는데도 한국은 서예(書藝)라고 하고, 일본은 서도(書道)라고 하며, 중국은 서법(書法)이라 한다. 그렇듯 붓글씨 하나에도 서로 다른 의미를 둔 것 같다. 그리고 붓글씨를 나무에 새기는 것을 서각(書刻)이라 한다. 대표적인 것이 궁궐이나 절에 걸린 현판이고, 우리나라에서는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최대 성시를 이루었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서각에는 정도가 없다. 옛날에는 팔만대장경과 반야심경 등을 글씨를 각(刻)하는 기능에 치중했다. 양각에서 나무의 절삭 부분 각이 우리나라가 좀 크고, 중국이나 일본은 직각으로 절각하는 것이 다른데. 최근에 이르러 기능보다는 창작에 더 관심을 가지며 발전시키고 있다. 서각에도 세분화 되어 전통서각 현대서각 입체서각으로 나누어 섭렵하게 되었다.
서각을 하려면 균형미와 여백 그리고 색(色)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하는데, 서각은 우리의 정서에 맞는 것 같다. 서예는 숙달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서각은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 도전해 볼 만하다. 나도 15년을 독학으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대전시 초대작가도 되었다. 예술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우리 젊은 세대의 감각으로 하는 서각(書刻)이 계승발전 되기를 기대하는 분야이다. 서각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전통 예술이기 때문이다.
❙생활공예 학습기
한때는 정신없이 살아야 했다.
육체적으로 고된 삶이었지만 토목 현장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남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다. 나는 한 달 만근하며 일하는 일 중독자였다. 휴일도 없었다. 새벽 다섯 시에 집에서 나와 밤 11시에 들어가야 했다. 기능공도 아닌데 대부분 지하철 현장에서 근무했으니 밤에 돌발 사고가 발생하면 비상이 걸렸다. 특히 지하에 묻힌 상수도가 새벽 3∼4시가 되면 수도관 안에 압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파열이 자주 생긴다.
하루 종일 긴장 속에서 생활하지만 예비군 교육하는 날은 쉬는 날이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인정해 주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나를 알아주는 분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만 믿어" 이 한마디에 목숨 바쳐 일하는 것이다.
나를 예쁘게 봐준 분이 두 분이 계셨다. 나를 나답게 살게 해준 분들이다. 그래서 30년 세월을 무사히 보냈다. 내가 바쁜 생활을 보내고 나서 그분들이 생각나 찾아보니,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세월이 그랬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살아가는데 고마우면 밥 사는 일이고, 그리고 서각(書刻)하다 남는 자투리 나무로 차 쟁반을 만들어 선물하는 일이었다. 나이가 들면 자식들은 성장해서 부모 곁을 떠나 두 부부만 남으니 둘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해서다. 선물한 차 쟁반이 150개 정도는 될 것 같다. 차 쟁반이 그 집에 가서 귀여움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 집 사정이고 내 마음은 편했다. 지금도 나이 든 나를 친구로 대해 주는 보보스 색소폰 앙상블 회원들이 좋아서 만들고 있다. 전동기가 내 손목에 무리를 주기도 하지만 기분은 좋다.
❙초상화 학습기
오늘은 내가 섭렵하고 있는 일곱 번째 취미 활동인 초상화 이야기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4시간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요즘 붓이 가는 길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 같다.
초상화는 화법이 다양하지만 제가 그리는 화법은 좀 특이하다. 바탕은 비단 인견으로, 그 인견을 액자에 붙이고 나서 505 목공 본드를 물에 희석한 후 바르고 말린 후에 그림을 그린다. 먼저, 연필로 본을 뜨고, 그리고 유화물감인 검정색을 세필에 묻혀 입히고 세필이 주 작업이 되어 그려가기 시작한다. 작업순서는 왼쪽 눈에서 오른쪽 눈으로, 그리고 코와 입까지 가는 것이 순서다.
초상화는 사실주의로 있는 그대로 그리며, 모델의 인품이 나타나도록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눈·코·입은 초상화에 있어서 절대적 영향을 주는 요소다. 흑백 초상화는 물감이 검정색이지만 물감과 석유를 잘 배합하여 명암을 표현한다. 석유를 많이 찍으면 색이 진하게 나오고 적게 찍으면 옅게 나온다. 반복해서 붓을 한 곳에서 돌리면 색이 윤기가 나고 안정이 된다. 보통 초상화에서 색의 밝기가 7~8가지로 표현이 되지만 하루에 다 그릴 수 없으니 다음 그림을 그릴 때까지는 석유가 날아가 처음 그린 색하고는 다를 수도 있다. 경험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 붓은 끝으로 또는 뉘어서 붓의 배로 밀어 그리는데, 시계방향으로 이어 그림 하나 그리면 세필의 수명은 끝이다. 마지막 날은 전체 그림의 명암을 고려하여 조정하는데, 최근에 그린 불국사 석굴암에 있는 부처님은 40시간이 걸렸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그지없이 행복하다. 이렇게 적당히 바쁘게 즐기며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젊은 날을 뒤로하며, 지금도 나를 찾아가는 중이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 마을 촌장, 수필집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blog.daum.net/ondong
곡선과 직선
배 수 자
어느 여름날 아침, 뒷산 공원을 산책하다가 두 갈래의 길을 만나게 되었다. 두 갈래 길의 기로에 서서 한참 고민을 하다가 자연적인 곡선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의 여유로움과 인정은 직선보다는 곡선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직선에도 많은 장점이 있겠지만 사회, 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하고 성장하는 오늘날에는 더욱 곡선의 인정미가 절실하게 그리운 마음이다.
곡선의 길을 따라 산책하다가 산등성이의 중간 지점에 서게 되었다. 문득 1970년대의 농촌 마을이 떠올랐다. 농경사회에서는 모든 지형이 자연 생태 그대로였다. 농촌의 천수답은 곡선의 논둑길이 농작인의 소유 경계를 나타내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곡선의 논둑길에 내려앉은 길을 걸을 때 풀벌레 소리와 곡식이 무르익어가는 냄새에 도취 되어 곡선의 정감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농촌 마을의 논둑길은 곡선의 자연 상태를 벗어난 딱딱한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마을의 형태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직선적인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자동차가 달리는 고속도로 역시 직선적이다. 직선적인 문화는 편리하고 시간적으로 빠르다.
하지만 그전에는 농촌의 모든 모습이 자연적인 곡선이었다. 초가의 처마와 지붕의 용마름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사람의 메마른 감정과 마음을 훈훈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옛날 농촌의 가옥을 보면 대문이 없는 곳도 있고 울타리는 대나무, 소나무, 싸릿대로 만들어 마을 전체가 평온하고 마음이 열려 인정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대부분 농촌의 가옥은 직선과 직각으로 꾸며져 있는 곳이 많아져서 이웃의 정을 못 느낀다. 서양의 산을 보면 대부분 날카롭고 직선적이지만 한국의 산을 보면 곡선적이어서 더욱 부드러움을 준다. 그래서 눈이 많이 와도 한국의 산들은 눈이 녹을 때면 서서히 흘러내리지만, 서양의 산들은 눈이 녹을 때면 갑자기 눈이 떨어져 내리면서 산사태를 많이 가져오는 것이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도 한국은 굽이굽이 흘러가지만, 사양의 골짜기는 가파르고 빠른 속도로 물이 흘러가면서 강한 물살로 인하여 심한 경우 주변의 시설물들을 쓸려가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2,744m의 백두산이다. 백두산 역시 완만함으로 이어지는 곡선이다. 서양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m의 에베레스트산이다. 이 산은 영국의 측량사였던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산인데, 무서울 정도로 직선적이다. 한국의 산은 곡선적이어서 인간의 따스한 인정이 느껴진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다정다감한 인정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하여 사양의 산들은 그 웅장함에는 놀랄만하지만 가파르고 날카롭다. 그러기에 가까이하기가 두렵고 그 두려움만큼 산에서의 사고도 빈번하다.
한국의 유적 건축물과 서양의 유적 건축물은 어떠한가? 한국의 유적 건축물은 대부분 부드럽고 섬세하며 곡선적이다. 그중에서 함양 칠선계곡에 있는 ‘서운정사’는 황금색 단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단청은 타원형이며 부드럽게 늘어뜨린 처마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또한 계곡의 적막을 울리며 만물을 생동하도록 깨어나게 하는 풍경소리에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는 인정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서양의 건축물은 인정미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중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 중의 하나인 로마의 건축물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적들은 뾰족하여 날카로움을 보인다. 예를 들면 파리의 에펠탑만 보아도 거의 직선적이어서 끝이 뾰족하여 부드러움이나 여유로움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본래 한국의 문화는 곡선적이었다. 그러나 사회 문화가 발달하면서 직선적인 현대 문화로 변화되었다.
곡선문화에는 자연스러움, 부드러움, 이웃 간의 인정미 등이 있으며 무를 칼로 베듯이 딱 자르는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 곡선문화가 직선문화로 변화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나 행동이 직선적으로 바뀌었다. 이해관계는 더욱 날카로워지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너와 나’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곡선의 마음속에는 부드러움과 인정이 있고 직선의 마음속에는 날카롭고 계산된 삶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인류의 문화는 발달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문화 속에서 인간의 마음만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인정이 살아있게 되고 ‘너와 나’보다는 ‘우리’라는 문화가 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시인, 문학박사, 수원 곡반초 수석교사, 제4회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시들지 않는 꽃, 수필집 만남의 심미학 등
인생유전(人生流轉)
진 재 훈
아들에게서 이번 시험도 결과가 좋지 않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문자가 왔다.
마침 식구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 여러 가지로 마음이 착잡했는데, 아들의 공무원 시험 불합격 소식까지 더해지니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다. 벌써 올해로 세 번째 본 시험이었다.
아들과 술 한잔을 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쉽게 시험을 계속 보겠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녀석이 시험을 마치 현실 도피처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나는 시험에 여러 번 실패했지만, 그때마다 더 분발하고 강하게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다.
40년 전 대학 졸업 후, 원하던 시험에 계속 낙방을 하여 한 해 등록금과 맞먹는 고시원 비용 문제로 아버지와 다툼 끝에 집을 뛰쳐나온 적이 있다. 힘들게 농사를 지어 한 해 대학생 셋을 가르치셨던 아버님의 입장에서는 자식 공부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돈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인 듯하다. 지금은 아버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 당시엔 집안 사정 얘기를 하시는 아버지 말씀이 무척 서운하게 들렸다. 그날 나는 무작정 밤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고, 결국 원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새로운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 인생길이 갈린 것이다.
주변에서 나와 아버지는 단아한 체격이나 끊고 맺는 성격이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은 전혀 딴판이다. 체격은 건장한 운동선수 감이나 일에 관해서는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것 같다.
아들이 세상에 나온 것은 순전히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장남이라 매년 여름 휴가는 항상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한해는 강원도 설악산에서 휴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오대산 진부령휴게소에 잠시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님께서 아내와 나를 앉혀 두고 “내가 빈손으로 가정을 꾸려 5남매 모두 대학을 보내고 결혼시켰으니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아들 셋에 친 손자가 하나 없으니 그것 하나 서운하다면 서운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우리 부부는 초등학교 다니던 딸이 둘이나 있었지만, 더 늦기 전에 자식을 하나 더 갖기로 마음을 먹고 낳은 자식이 지금 아들이다. 우리에게는 너무 귀한 자식이라 너무 어려움 없이 키우다 보니 그런 건 아닌가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세상을 떠나시기 며칠 전, 아버지 곁에서 병상을 지키던 나는 잠시 주무시는 틈을 타 보호자 휴게실로 잠깐 나온 적이 있다. 그 때 마침 TV에서 전국 노래자랑 방송 중이었는데, 지금은 작고하신 사회자 송 해 선생님과 어린 여가수가 ‘아버지와 딸’이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그 가사 내용이 어찌 그리 내가 처한 상황을 대변하듯 심금을 울리던지 TV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시집가던 날 눈시울을 붉히며 잘 살아라 하시던 아버지, 사랑합니다 우리 아버지~ (중략) 공든 탑을 쌓듯이 소중하게 키워온 사랑하는 딸아 내 딸아~
마치 아버지께서 내게 사후 앞일을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말씀처럼 들렸다.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셨고,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는 날엔 아버지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고 그리운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결혼하시고 본가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이웃 동네로 살림을 나셨다. 제삿날 어김없이 아버지는 어린 아들인 나를 데리고 걸어서 할아버지 댁에 가시곤 했다. 자정 무렵 제사를 끝내고 아버지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개구리 울음소리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하늘의 별 무리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졸리고 피곤했지만 업힌 아버지의 등이 따스하고 포근했던 느낌도 아스라하다.
결혼하고 나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학창시절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보름에 한 번꼴로 시골 부모님을 찾아뵙고 술 한잔 하며 바둑 두기를 즐겼다. 바둑 실력이 비슷해 승패가 서로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완승을 거두는 날이면 아버지께서 승부욕에서인지 밤늦게까지 계속 대국 요청을 하시면 어머님은 다음날 아들 회사 출근에 지장을 줄 텐데 빨리 집에 보내라고 막 역정을 내신 것 같다.
한 해 여름에는 아버지께서 느닷없이 어디를 가자 해서 따라나섰더니 깊은 산중에서 사슴 피를 먹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바로잡은 사슴뿔을 잘라 거기서 나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피가 몸에 그렇게 좋다며 나를 데려간 것이다. 아마 회사 일로 얼굴이 조금 상해 보여서 그러셨던 모양인데, 아들에 대한 깊은 속정이 느껴져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자식은 일곱 살까지만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일생 효도를 다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식이 부모의 욕심대로 자라주길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나도 젊은 날 시험에 실패해 부모를 실망시키고 속상하게 했던 지금의 아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은 수많은 변수와 변수가 뒤섞여 어떤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아들의 공무원 시험준비가 길어지며 뒷바라지하는 나도 힘들지만, 아버지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받은 만큼 보다 더 많이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아버지께 받은 만큼은 지원할 예정이다. 친손자를 끔찍이 아끼셨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아들의 시험 실패로 잠시 마음 한켠에 좋지 않은 생각을 한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아들아, 아빠는 아직 건재하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열심히 노력해서 네가 원하는 목표를 내년엔 꼭 성취하길 바란다. 사랑한다~ 아들 파이팅!”
* 충북 청주 출생, 금강불교대 수료,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22), jhj43211@naver.com
화순 여행
이 명 년
추석 전날이었다.
‘이틀 후면 자식들을 다 보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는데 난데없이 막내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우리 추석 다음 날 제주도 갈 거야!”
“너의 가족 모두?”
“아니, 나하고 지수만! 공항에서 만나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재차 물었다.
“무슨 말이니?”
“엄마 딸들이 다 모여 엄마랑 함께 제주도 간다고! 비행기 예약도 다 끝냈어요.”
“난데없이 제주도는 왜?”
“엄마 예전에 살았던 곳 가보고 싶으시다면서요? 그래서 손녀 둘, 딸 셋, 엄마 이렇게 여자들만 여섯이 함께 2박 3일간 다녀오기로 결정한 거야. 제주공항에서 만나요.”
“그래 생각해줘서 고맙다!”
제주도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생각뿐이었고, 갈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뜻밖에 세 딸을 통해 이루어져 추석 다음 날, 나는 부푼 마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40여 년 전, 나는 제주도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화순에서 몇 년간 머문 적이 있었다. 가끔 그림을 바라보듯 예전의 풍경과 삶의 현장이 아름다움으로 눈 앞에 펼쳐지곤 한다. 나는 남편과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서울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몇 가지 신기한 일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하는 섬 생활에 3개월 정도는 모든 것이 낯설고 기후도 맞지 않아 불편한 일이 많았다. 제일 불편하고 두려웠던 것은 돼지우리에 나무로 걸쳐 만든 뒷간이었다. 변을 보러 가면 돼지가 반기면서 변을 받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놀라서 돼지우리로 떨어 질뻔한 적도 있었다. 긴 막대기를 휘저어 못 오게 할 때도 있지만, 돼지 먹이가 사람의 변이기 때문에 돼지는 먹이를 먹으려고 잘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똥 돼지의 맛이 최고라고 했다.
제주도는 섬이라 습기가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옷을 말리는데도 애를 먹었다. 옷을 빨아 널어놓으면 마르기는 해도 해수가 날려와 끈끈해지곤 했다. 그래서 옷을 입을 때마다 개운치 않아 짜증이 났던 기억도 생생하다.
내가 제주도에 와서 자리 잡은 곳은 삼방굴 뒤쪽에 있는 화순이라는 마을이었다. 지금은 얼마나 변했을까? 바닷가 모래사장, 바닷물이 나가는 모양이 너무 신기해서 가끔 바닷가에 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썰물 때가 되면 드러나는 물속바위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조개도 줍고, 미쳐 물을 따라나서지 못한 낙지도 가끔 잡았다.
바닷가에서 늘 만나는 이들이 제주의 해녀였다. 바다 인근에 거주하며 깊은 바다 물속을 안방 드나들 듯 뛰어 들어가 미역과 톳을 따오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바다의 영웅처럼 보였다.
제주도에서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은 용천수였다. 바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솟아나는 소금물이 아닌, 마실 수 있는 흘러넘치는 우물로 위 탕은 먹는 물, 중간은 음식물 씻는 물, 아래는 빨래하고 목욕하는 곳으로 이용했다. 계단식 우물로 맑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른 봄이면 땅을 비집고 둥그런 고개를 불쑥 내미는 고사리도 꺾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점점 산속으로 들어갔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방목해 놓은 소들이 고사리를 피하여 풀만 골라 뜯어 먹는 모습이었다. 자기 몸에 해가 된다는 것을 그들은 어찌 알았을까?
어린아이들은 학교가 쉬는 날이면 한 손에 깡통을 들고 얕은 산길을 오르며 돌을 뒤집었다. 나는 그런 행위가 너무 궁금해서 다가가 물어본 적도 있다. 아이들은 집게를 들고 와 돌을 젖혀 지네를 잡았다. 제주에는 유별나게 뱀이나 지네가 많았다. 돌만 젖히면 그들이 있었다. 지네는 독이 많은데, 아이들이 잡는 즉시 독도 제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지네는 아이들이 한약방에 팔아서 학용품도 사고 용돈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립심을 기르는 것을 보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되짚으며, 화순에 도착한 나는 너무 놀랐다. 내가 머물렀던 곳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이 관광객 중심으로 개발되어 완전히 변모되어 옛날 초가 돌담집은 눈을 크게 떠도 찾을 수 없다. 같이했던 이웃들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해변도 금모래만 남아있고 주변도 많이 바뀌었다. 우물터는 한참을 헤매어 찾아보니 용천수 자리가 풀장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예전에 용천수는 산간에 빗물이 고여 바위 사이사이 흐르면서 정수되는 약수라고 했다. 약수를 이용하여 풀장을 만든 것이었다.
엄마의 마음을 읽고 모처럼 함께한 딸들과의 여행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지난날, 남편과 같이 생활했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되새겨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변모된 환경을 보면서 옛 정취와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사라졌음에 아쉬움도 남는 시간이었다. 먼 기억의 한 편으로 밀어 넣었던 시간을 다시 살려, 나에게 즐거움을 준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뚝섬
시간의 수레바퀴는 멈출 줄 모르고 달린다.
모처럼 올라온 서울 성수동(뚝섬), 반평생 삶을 꾸렸던 내 생활의 터전이다. 내가 이곳을 떠난 지 벌써 십여 년이 흘렀다. ‘뚝섬’은 내 나이 이십 대, 뚝섬 토박이와 결혼하여 반세기를 온갖 정을 다 쏟고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마을에서 함께했던 이웃도 다 떠나고, 예전의 흔적은 작은 골목 몇 군데 빼고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다, 새롭게 들어선 빌딩 숲에는 활기 넘치는 젊은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분주히 드나들던 골목길과 한강의 산책로를 걸으며 마음 깊숙이 간직한 앨범을 들추어본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한강 변 빨래터이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옛 모습 속에 많은 추억을 담은 장소이다. 그 당시만 해도 동내길 모퉁이에 공중수도가 하나씩 있기는 해도, 대다수 가정은 집에서 수돗물이 아닌 마당 한 편에 펌프를 박아 물을 사용했다. 그러기에 빨래하기가 힘이 들어 강변이 빨래터가 으뜸이었다. 이곳에 가면 찰석찰석 바윗돌을 들이받아 은빛 가루로 산산이 부서지는 물살을 만날 수 있었다. 아낙들은 강가에 사방으로 흩어져 누워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빨랫감 한 개씩을 깨끗하게 빨아 주변에 널어 강바람에 말렸다. 무거운 마음까지도 강물에 다 털어놓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여인들의 모습이 선하다. 빨래터는 동내 젊은 여인들이 너 나 없이 나오면 서로 수다를 떨며 이웃과 친교를 맺는 장소가 되곤 했다. 갓 시집온 어린 새댁이나 몇 살 위의 이웃 형님들이 하나둘 빨래를 머리에 잔뜩이고 와서 힘든 시집살이의 고달픔과 서러움을 다 털어 강물에 쏟아 흘려버렸던 곳이 빨래터이다. 털어놓을 수 없는 삶의 아픔도 다가오는 물살을 ‘찰석찰석’ 빨래방망이로 내리쳐 다 쏟아 물살에 흘려보냈다. 가슴속에 맺힌 서러움을 다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낙네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로 가족들을 대할 수 있었다. 빨래터에 나온 이웃들이 모두 친구가 되어 가끔은 서로 각자 집에서 만든 빵이나 떡 같은 간식거리도 가져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즐겁게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고 부르며 반가워하고 못 만나면 아쉽고, 섭섭하고 그랬다. 빨래터는 유일하게 이웃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활짝 열어놓았던 곳이다.
이른 봄이면 수원지 뒤쪽 강가 모래흙 벌에서 뜯어오는 물 쑥 뿌리 나물은 맛도 일품이지만 움츠리고 추운 겨울을 난 사람들에게 쌉쌀하고 고소한 맛이 생기를 돋운다. 가끔은 이웃과 강가에 들어가 바위 돌에 붙어사는 다슬기도 잡았는데, 한강 개발 후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회변화의 흐름에 따라 어느 날부터 작은 공장이 하나, 둘 줄을 이어 들어섰고 삶의 환경이 조금씩 바뀐 것이다.
서울을 두르고 있는 한강을 바라볼 때마다 내 나이는 이십 대로 되돌아간다. 상추밭, 오이밭, 무, 배추밭. 호박밭이 눈 앞에 펼쳐진다. 밭 귀퉁이에 만든 움막은 마을 남자 어른들의 놀이터였다. 또한 채소밭은 살림이 어려워 품팔이로 생활했던 여인들의 유일한 일터이기도 했다.
뚝섬은 강물이 삼면을 둘러싸고 흐른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 물은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은 중랑천이 흘러들어와 한강과 합쳐진다. 뚝섬유원지 앞 강변 나루터도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다. 영동교 개설 후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강남 봉은사나 선릉으로 아이들과 함께 소풍을 갔었다. 말이 뛰어 달리던 경마장 모습이 지금은 아름다운 숲으로 변하여 휴식공간이 되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거리로 거듭난 강남은 젊은이들이 뚝섬에서 수영으로 넘나들던 곳이었다. 이제는 무섭게 높아진 물줄기와 여기저기 걸쳐진 긴 다리로 아주 먼 이방인의 땅으로 생각된다. 이곳 남자들 다수가 가끔 수영으로 한강을 가로질러 압구정을 넘나들며 즐겼던 곳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옛 모습은 사라지고, 아름답고 삶이 편한 지역으로 바뀌었다.
뚝섬은 여전히 내 젊은 날의 열정과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세월은 흘렀어도 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내 가족과 이웃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는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시대의 변화로 편안하고 마냥 즐거운 삶을 살면서도 힘들었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가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내 가족과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 전북 여산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부문 신인상, 수필집 『뚝섬길』, echlmn@hanmail.net
칠십 년을 살고 보니
노 복 래
옛말에 인생칠십고래희 (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이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는 말이다. 의술과 과학의 발달로 100세 시대인 지금은 격세지감의 말일 수도 있겠으나, 탈 없이 살아온 지난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의 삶을 계획해 본다.
나는 한학을 공부하신 조부모님과 교육자이신 부모님 슬하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해 왔다. 학교 졸업 후에는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세상의 어려운 물정을 잘 모르며 살았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가슴 속엔 언제나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간직하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나의 첫사랑 여인이었던 어여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큰아이를 낳았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 어엿한 대한민국의 청년이 되어 입대하였다. 아들이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되자 북한군의 도발로 비상사태가 선포되어 우리 가족은 마음을 조렸다. 사태가 심각하여 아들은 완전군장을 한 채 일주일 이상 비상 대기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들은 힘든 시간을 약으로 삼아 건실한 청년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나는 학창 시절, 윤봉길 의사와 안중근 의사 등 애국지사의 자서전을 읽고 감명을 받아 전쟁 발발 시 최전선으로 나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다는 각오로 살아왔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늘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며 살아온 듯하다. 또한,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알라’고 말한 세계 최대 문학자 <괴테>의 명언대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여 칭찬하고 배워가며, 하루에 한 번 좋은 일을 하여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왔다,
공직에 근무할 때 대형프로젝트를 2년 이상 추진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비위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비록 나의 잘못과 책임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책임질 일이었다. 나는 선임자로서, 그리고 상급자로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모든 것을 짐으로 안고 감으로써 거기에 연루되었던 공무원 4명이 모두 무사하게 공직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주변 사람들은 세간으로부터 공공기관과 조직이 비난을 받지 않도록 큰일을 해냈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퇴직 후 인생 2막의 길은 그리 평탄치 않은 가시밭길이었다.
이제 모든 일이 과거가 된 지금 “삶이 아픔을 주고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행복한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다”라는 말을 생각하며, 인생은 매 순간이 선물이라고 여기고 모든 분께 감사하며 살아간다.
이제 인생 3막을 맞이한 지금 나에게는 새로운 꿈이 있다. 세간의 사람들은 나이가 칠십인데 무슨 꿈이 있느냐고, 그것은 노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한때 건강이 나빠져 고생했으나, 아내의 지극한 정성으로 지금은 많이 회복하였다. 최근에 주변의 새로운 분들과 인연이 되어 공부하고 꿈을 가질 수 있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면 허점투성이가 많지만 이를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의 삶은 돌다리도 두드리며 걷는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이제 덤으로 살아갈 인생 3막의 미래를 설계하며 새로 시작한다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련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말을 나는 좋아한다. 또한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 님의 “재물은 흐르는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는 명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고 싶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공생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라는 말이 있듯 멋진 바보로 살아가고 싶다.
필리핀 여행을 다녀와서
올해에 칠순이 된 우리 부부를 필리핀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는 둘째아들 창희가 초청하여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마닐라에서 국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 수현이의 방학 기간에 맞추어 아들이 휴가를 받아 창희네 식구와 함께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아들이 아시아나 항공 왕복 비즈니스석을 미리 예약해 놓고 eARRlVAL CARD도 전송해 주고, 원헬스 패스 작성요령 등을 상세하게 작성하여 카톡으로 보내 주었다.
출발 첫째 날, 우리 내외는 비행기 이륙 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인천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해외여행이라 마음이 설레고, 한편으로는 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비즈니스석을 예매하였기에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진행하기도 수월하였고, 아들이 미리 알려준 대로 비즈니스 라운지를 찾아 들어가 음료수 식사 등을 제공받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좋았다.
해외여행을 여러 번 다녀왔어도 비즈니스석 이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별도 통로를 이용하고, 좌석 간 공간이 넓어 다리를 편하게 뻗을 수 있고, 여승무원들이 항상 미소를 지으며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주니 ‘돈은 많이 들어도 이런 맛으로 비지니스석을 이용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공항에서 마닐라 공항까지는 2,600km로 4시간 소요되어 밤 11시경에 현지에 도착하였다. 미리 마중 나온 아들과 운전기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했다. 아들의 포드 신형 차를 타니 기분이 좋아 피로가 달아났다. 마닐라의 야경을 보고 우리도 전기를 절약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고속도로로 30여 분 달려가니 아들이 살고 있는 ‘아얄라 알라방’ 빌리지에 도착하였다. 필리핀은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해서 평소 걱정을 했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출입구에 검문소가 있어서 외부인을 통제하고 있었다. 미국의 ‘베버리 힐즈’를 모델로 하여 조성한 안전한 지역이라는 설명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집에 도착하니 며느리 혜영이와 현지 도우미 아주머니, 강아지 ‘노꽁’이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강아지가 다른 사람들이 오면 짖어대는데, 주인의 부모인 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고 식구들 모두 한바탕 웃었다. 강아지가 영물인 것을 새삼 알았다. 그리고 집 안에 정원과 조그마한 수영장도 있고 분위기 있게 사는 것을 보니, 매우 기분이 좋았다. 아내가 바리바리 쌓아간 선물 보따리를 풀며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둘째 날 아침, 며느리와 손자와 함께 빌리지 내 산책을 했다. 도로가 비슷하여 처음엔 길을 잃을 수 있다고 안내를 하며 필리핀의 역사와 문화 등을 설명해주었다.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굿모닝 뽀’라고 인사하였다. ‘뽀’를 붙이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칭의 표현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이었다.
아침 밥상 차린 것을 보고, 집에서 먹는 것과 똑같아 깜짝 놀랐다. 며느리가 미리 시어머니께 자문받아 그렇게 준비한 것이란다. 그 정성이 기특하고 갸륵하여 기분이 좋았다. 때마침 ‘할로윈데이’라 그 지역의 문화를 보고 즐길 수 있었다.
오후에는 마닐라에서 최고급인 ‘오카다 호텔’로 이동하여 쇼핑하고, 가족사진도 찍고, 저녁 식사는 한국식당 ‘고려‘에서 했다. 대기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어 식당에 들어가니 대형벽면에 훈민정음이 표기되어 있어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하였다. 필리핀 식당 문화는 고기를 직접 구워주는 등 서비스가 좋았다.
식사 후에는 호텔 호수 분수 쇼를 관람했는데 형형색색 장관을 이룬다. 5년 전 아내와 두바이 여행에서 보았던 것보다 기술이 발달한 모습이었다.
셋째 날, 마닐라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발라이 보라카이섬으로 이동했다. 비행기 안에서 손자는 기내에 비치된 자료를 꺼내어 읽으며 비상시 대비요령 등을 설명해주는데 기특했다.
마닐라 공항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려 ‘까띠글란’ 공항에 도착하니 예약해 놓은 ‘상그릴라 리조트 스파’에서 차량과 보트가 대기 해 있다가 우리 일행을 안전하게 안내하고 이동시켜 주었다.
원주민들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상그릴라 리조트에 도착했다. 이 리조트는 보라카이섬에서 제일 좋은 휴양 시설이라 한다. 수속을 마치고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바로 창문 앞에 야자수 열매가 풍성하고 새와 원숭이들이 노닐며 짙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모습이 마치 지상낙원 같았다.
넷째 날, 은은한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어보니 평온한 아침 바다, 평화로운 망망대해가 펼쳐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리조트에서의 식사는 인종이 다른 관광객들과 어울려 색다른 풍경 속에 다양한 고급 메뉴를 즐길 수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장으로 가서 온 가족이 함께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곳곳에 안전요원이 배치되어 있었고, 타올과 음료를 제공하여 불편함이 없었다. 피부 색깔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오후에는 상그릴라 차량을 이용하여 바라가이 섬에서 최대 인파가 모이는 ‘디몰’에 가서 하얀 백사장도 거닐고 발 마사지를 받으며 휴식을 한 후, 한식당인 ‘금강산’에서 삼겹살과 소주로 피로를 달래었다.
다섯째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아내가 “파란 바다 위에 무지개가 떴다”고 좋아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평화로운 바다에 뜬 무지개 밑으로 이름 모를 기선이 여유롭게 지나간다. 우리 가족은 아침을 먹고 바닷가로 나가서 보트도 타고 수영도 하며 즐겼다.
해 질 무렵에는 상그릴라 최고의 명소 ‘시네라 레스토랑’에서 사진도 찍고 와인을 마시면서 만찬을 즐겼다. ‘버키카’로 이동하여 리조트에 와서 당구와 탁구를 치며 보라카이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는 당구를 자주 쳐본 것 같은데 우리 부부는 경험이 없어 당구봉 잡는 법 등을 배워가며 깔깔대고 웃었다.
여섯째 날, 상그릴라 리조트를 떠나는 아침 아들과 며느리는 아쉬워하며 ‘키홀’이라는 명소로 안내하였다. 바다 입구 큰 바위에 홀이 있는 곳이라 기념사진 찍기가 좋아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가족 기념사진을 찍는데 바위 홀 사이로 바람이 세게 불어왔지만 사진 기사가 잘 촬영해 주었다.
상그릴라에서 제공하는 보트와 자동차를 타고 ‘까띠글란’ 공항으로 이동하여 마닐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 아래 반달이 두둥실 떠간다. 하얀 뭉개구름 아래 잔잔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과연 신이 아니면 이런 풍광을 그 누가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은 후에는 시내 야경을 보기 위해 몰리토몰을 돌아보았다.
일곱째 날, 마닐라 시내로 나가 유서 깊은 마닐라 대성당과 성곽도시 인트라붓스, 산티아고 가든 등을 말 마차를 따고 둘러보았다. ‘성 어거스틴 ’성당은 몇 차례의 전쟁과 지진이 있었지만 파손된 적이 없는 기적의 교회라고 했다. 마닐라 대성당에 기록된 역사를 손자가 읽고 해석하여 수현이의 영어 실력에 모두가 놀라며 기뻐했다.
신도시 ‘보니파시오’로 이동하여 ‘청담’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한국산 소고기 등심을 먹은 후, 신시가지 거리와 공원을 산책하였다. 신도시답게 거리와 공원이 품위 있게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귀가하면서 랜드마크 대형 쇼핑장에도 들렀다. 필리핀에서는 쇼핑하면서 공연 등도 관람하고 식사도 즐기는 대형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 규모와 인원이 엄청났다.
마지막 날 아침, 손주의 피아노와 첼로 연주를 들으며 이별의 위로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며느리와 손자가 12월에 한국에 온다니 위안이 된다. 아들 내외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서 출국 수속을 밟아주고 안전하게 탑승하도록 도와주어 무사히 귀국 하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보다도 아들이 이국땅에서 자리를 잡고, 손자를 양육하면서 며느리와 알콩달콩 잘살고 있는 것을 보고 감사했다. 한편으로는, 여행 내내 살아생전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필리핀의 경로우대와 장애인 우대 정책이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민들의 여유 있고 친절한 행동, 만나는 사람에게 웃으며 존대해 주는 문화는 깊은 인상으로 남을 것 같다.
*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
현)(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