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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기온이 한동안 양호할 것으로(8도~15도) 예상되고 있어 감사하네요.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니 다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라면서 오늘의 큐티 시작합니다.
9장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관한 한 사건을 41절이나 할애하며 다루고 있습니다.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이유를 묻게 합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맹인 같은 당시의 세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영적인 어두움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긴 합니다만…
2절의 제자들의 질문(“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은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뭔가 안 되고 있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34절에서도 그것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즉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반대편에 선 번영신학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그러한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즉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리고 이 말씀은 9장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시면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눈을 뜨게 되는 전무후무한 일(32절,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6절,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절, “이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11절,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4절,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절,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17절,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25절,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30절,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를 보내신 이의 일”(4절)이라고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밤이 오기전 낮에 하여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원래 빛이신데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에 중점을 둔 표현입니다. 그 빛 비추심에는 세상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여러분의/저의 빛이 되고 계십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빛이 되고 계시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어둠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을까요? 예수님과의 소통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건,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을 대하면서도 배타적인 입장을 고집하고 있는 바리새인들…
이념, 신념, 규범에 함몰되다 보면 볼 것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눈을 뜨는 것과 같습니다.
맹인이 눈을 뜰 때 그에게 믿음이 있어서 눈을 뜬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엡 2:8-9) 믿음조차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맹인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스스로를 영적인 엘리트로 자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신들 앞에 주님이 계셨지만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39-41절).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41절,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10장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주님은 문을 통하여 들어오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불쑥 오신 분이 아니라 족보를 따라 오신 분입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한 예언을 따라 오셨습니다. 반면 마귀와 그의 졸개 귀신들은 계통도 없고 도적처럼 강도처럼 우리의 삶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제1 경계 대상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문이시라네요! 그것은 우리 또한 덜컥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만세 전에 택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록 예수님처럼 족보가 공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에 나게 되었고, 누군가의 인도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보이지 않는 족보가 확실한 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결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경우 주변으로부터 ‘독자적으로/주체적으로’ 살라고 강요 비슷한 걸 받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어느새 독자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요 불순종이요 불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살라는 세상의 소리보다는 우리의 삶의 길잡이인 성경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그 ‘읽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면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 대화가 바로 우리의 숨통입니다. 비로소 우리 생명이 숨을 쉬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잠만 잔다면 그 생명은 원래의 가치를 벗어난 식물 인간처럼 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과 소통하며 주변에 생명의 빛을 비추며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원래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절도며 강도요”(1절), “절도요 강도니”(8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10절) 등 10장에서는 계속해서 절도, 강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계속해서 자신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 주시려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꾼들이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활동을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를 통해 그런 것과 관련된 수많은 실적들을 쌓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번번히 그들에게 당했고, 지금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도들이 또한 그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깨어 근신하라’고 하는 말씀은 다름 아닌 그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인식할 때 만이 제대로 된 방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9절의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미국의 유명한 IN & OUT(인 앤 아웃) 햄버거의 모토가 되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예수님은 또한 10장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무려 4번(11절, 15절, 17-8절)이나 언급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원래는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육신을 입으신 것 때문에도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동정녀를 통한 탄생은 죄의 대물림에서 제외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은 죽지 않으시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죽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순전한 제물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17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시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를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으로 끝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분이 부활하셔야 그분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고전 15: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18절,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느니”
‘있다’(ἔχω)는 말이 둘 다 현재형(헬라어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버린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현재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때에 예수님은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계속 유지될 그런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현재형이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모든 권세를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는 아버지와도, 성령과도 모든 것이 단절되었습니다. 죄인들이 가야 할 길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도록.
26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내 양이 아니라는 것은 영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보다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 획일적인 분류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적어도 이 논쟁속에서의 유대인들은 사탄의 영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만(“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사탄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영이 쫓겨날 때 참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임하셔서 예수님과 또한 하나님과 또한 성령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28절,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이 말씀은 복음의 outline을 알고 있는 우리가 너무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단순히 뭔가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이 갖는 무게감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옵니다.
28-29절,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2중으로 보증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손에서도 또한 아버지의 손에서도 빼앗을 수도 없다면 사탄이 무슨 수로 우리의 영생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것을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고, 하나 된 것을 하나 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성모독이라고 몰아붙이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행하는/행한 것을 보고 판단하라’(37-38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응대해 보지만 유대인들은 막무가내입니다. 이처럼 영이 다를 때는 일치점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한 시편 82편에서의 신들은 인간 재판관들(“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참 재판장이신 반면에 그들의 판결은 굽어 있어 대조됩니다. 하물며 그들을 신들이라고 했는데,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고 예수님은 반문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강수가 흐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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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삶 가운데 충만하길 간절히 소망하며 그능력을 의지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케 하옵소서!!
영을 따라 사는 삶, 성령이 충만한 삶 되시길 빕니다!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가질 수 없다는 말씀에 공감이 되어요. 전적인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오늘 본문 속 맹인은 모범적 자세를 보여주었어요.
맞습니다. 나의 삶이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삶인가를 늘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살피는 목자이자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문이기도 합니다. 이 문 앞에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나뉩니다. 맹인을 안식일에 고쳤다는 사실앞에 바리새인들도 나뉩니다. 대부분은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과 가르침이 성경과 합함을 보이는 수많은 증거에도 귀와 눈을 닫아버립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예수님께 고침받은 자가 볼때 ‘이상’합니다.(9:16,30)
예수님을 부인하는 대다수 바리새인들과 달리, 고침받은 자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계속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이름만 알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었지만 고침을 받은 후 ‘선지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그의 이해가 깊어집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만난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경배를 드립니다.(9:11,17,33,38)
우리의 믿음은 기적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와 내 주위의 사람의 믿음을 단단히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의 앞날을 예비하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처럼, 기적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우리에게 허락된 오늘 하루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양으로 살아가면 되겠습니다.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돌보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눈 뜨는 것 뿐아니라 믿음으로 이끄시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선한목자가 될수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양치기시잖아요?^^ 분명히 선한 목자가 되실 겁니다^^!
세상에서 맹인된자 보다 영적인 세상에서 맹인된 자들이 더 안타까운 모습이네요. 맹인은 예수님이 그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분이 생명의 빛임을 알아보지 못하네요.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빛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맞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이 훨씬 심각하지요! 우리도 영적으로 어두워지지 않아야겠고, 볼 만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