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4장 1-6절
찬송가: 597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오늘 본문 말라기 4장은 말라기 선지서의 마지막 장이면서 구약성경 전체의 마지막 장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이 전하는 메세지는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이 이르면, 본문에서는 그 날을 용광로 불 같은 날로 묘사하는데, 그 날이 오면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가 용광로 불 같은 것에 타버리듯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않고 다 태워져 버릴 것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심으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는 것 같이 구원받은 자들이 기뻐 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흔히 노아의 때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 심판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 내용이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축했고 성전을 건축한지 70년 만에 무너진 성벽도 재건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 자신은 스스로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생각했기에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서 곳곳에 보면, 오리발 내미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들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죄를 지었다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까 반문하고, 흠없는 제물을 바쳐야는데 더러운 제물을 바쳤다 하면 언제 우리가 더러운 제물을 바쳤습니까 항변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할 수 있습니까 반문하고, 돌아오라 하면 언제 우리가 나갔다고 돌아오라 합니까 라고 따집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말해서 돌아오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계시지만, 실은 집나간 자녀가 돌아올때까지 학수고대하며 동구밖에 나가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랑에 방점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의 방점은 무서운 심판에 있는 게 아니라 참고 인내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에 있습니다.
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통해서,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무서운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심판받은 이유는 한결같이 그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본래 강팍하고 완악했습니다. 죄의 본성 그대로 놔두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타락한 인간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인간의 죄의 본성인 강팍함과 완악함을 씻어주실 수 있습니다.
용광로 불같은 날이 임하는데, 그 날에 모든 교만한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을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자신이 교만한지 악을 행하고 있는지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서 곳곳에서 이런 말씀들이 나옵니다.
1:6절, “…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7절,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2:17절,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3: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3:13절,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지적하시고 잘못을 알려주시면, 깨닫고 겸허히 받아들이면 되는데, ‘하나님, 저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이러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합리화 합니다. 마치 사울이 다메섹에서 꼬꾸라지기 전,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면서 내가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반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가 살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임하시지만, 각자 처한 상황 따라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용광로 불 같은 무서운 모습으로 임하시는가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공의로운 해로 임하셔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시는 치료자로 역사하십니다.
지구를 비추는 태양은 하나입니다. 똑같은 태양이 지구를 비추고 있지만, 그 태양이 어떤 지역에서는 밀림을 이루게 하고 어떤 지역은 풀한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을 만들기도 합니다. 밀림에 비추인 태양은 왕성한 광합성 작용을 일으켜 아마존과 같은 거대한 밀림을 만들고, 사막에 비추인 태양은 모래를 더욱 뜨겁게 만들어 생명체는 도저히 살 수 없게도 만듭니다. 똑같은 태양이 치료하는 광선이 되기도 하고 파괴하는 광선이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태양이 비추었지만, 완전히 다른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 지역의 상태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대 사회에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포로를 끌고 오면서 시민들에게 전쟁에서 이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때 개선 행렬대 안에 향을 피웠습니다. 피어나는 연기로 개선행진을 만방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지만, 개선행렬에 참여한 군인과 시민에게 향냄새는 기쁨과 감사를 느끼게 하는 승리의 향기였습니다. 그러나 끌려오는 포로에게는 죽음의 냄새이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향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승리의 기쁨을,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상징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날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승리와 기쁨의 날로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4절 이하입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날이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안되려면,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역할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한다고 했습니다. 돌이키게 한다는 말은 회개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회개는 가던 길을 멈추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잘못을 지적받으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집 나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품어주듯이 우리를 품어주실 것입니다.
어제 정한조 목사님께서 구약성경에는 거대한 두 물줄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은 누리려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물줄기와 또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백성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고, 때로는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바로 세우시려고 하시는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물줄기입니다. 인간의 물줄기와 하나님의 물줄기가 경쟁하듯이 흘러 내리는 것 같지만, 결국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물줄기가 더 크고 위대하기에 세속적인 인간의 물줄기를 덮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입니다.
말라기 선지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속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400년 후, 당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발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주님께 돌아가는 은총의 자리가 되어,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거룩한 성전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뜨거운 태양이 죽음의 사막을 만들기도 하고, 생명의 밀림을 만들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떤 이에게는 심판의 용광로 불 같은 날로 임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공의로운 해로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회복과 치유의 날로 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우리 삶의 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이 되게 하시고, 우리 삶의 목적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생명을 건져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로 쓰임받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