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道)위에서 길(道)을 찾다
손 중 하
사람들은 누구나가 꽃길을 걷기를 원한다. 하지만 스스로 꽃길을 만드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나 아닌 타인을 위하여 꽃길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심이 인다. 내가 걷는 길이 꽃길이 아닐지라도 그냥 평범한 길이라도 걸림 없이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평범한 길 걷기도 녹록지 않다. 사람이 사람 대접받고 살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보니, 차라리 개로 태어나 개 대접받고 살다 가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의 길이 아닌 짐승과 같이 쓰는 공용의 길이 되어 그 길을 걷는 걸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생김새만 다를 뿐이지 개를 가족 구성원의 호칭처럼 부르고 있으니 ‘짐승의 도(道)나 사람의 도(道)를 구별해서 뭘 하겠는가?’ 싶다. 사람 길이 아닌 개구멍 길로 다니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이 세상 생명이 있든 없든, 모든 길은 같이 쓰는 공용의 시대가 열렸으니 편할 법도 하다. 하기야 앞으로는 사람 장례식장, 개 장례식장 구별 없이 함께 사용하는 장례식장이 머지않아 도래할지도 모른다. 개도 자식이라 부르고 있으니 어쩌면 머지않아 호적에도 올리고 재산 상속도 할 일이다.
사람 길(道)을 상실한 시대, 어쩌면 편안한 시대가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럭저럭 살다 가면 되는 세상, 애써 사람 길을 만들 필요 없이 공용의 시대가 도래하니 반겨 맞을 일인가도 싶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 길을 되찾고 싶은, 또 다른 꽃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만들거나 찾아내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가슴에 꿈틀거리고 있는 걸 보면, 아직은 사람답게 살고 싶은 욕심 하나가 가슴 한쪽에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경찰청이 매년 발표하는 ‘범죄 발생 및 검거 현황’의 검거율을 보면 살인, 성폭력, 강도 등을 총칭하는 강력 범죄의 경우 90%가 넘는 검거율을 보인다. 참 잘도 찾아낸다. 지인 중에 범죄를 검거하는 부서에서 근무하는 형사가 있었다. 그분께 어떻게 범인을 잡느냐고 물었더니, 잡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길에서 지키고 있다가 검거한다는 것이다. 범인도 다니는 길이 있어서 그가 잘 다니는 길에서 지키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 세상에 길 아닌 곳으로 다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년 시절 시골에 살 적에 앞산에 덫을 놓아 토끼를 잡아본 적이 있는 나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산 짐승도 아무 데나 다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길이 있다. 그 다니는 곳에 덫을 놓아 산 짐승을 잡듯 범인 역시 그가 다니는 길에서 지켜 서 있으면 애써 찾아다니지 않아도 쉽게 검거할 일이다. 어찌 동물이나 사람만 길이 있으랴. 바람도 길이 있다. 바람이 다니는 길이다. 바람길이라고 해서 찬바람 더운 바람이 함께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다. 찬바람 길이 있고 더운 바람길이 있다. 같은 밭일지라도 찬바람 길에 나무를 심으면 얼어 죽지만 더운 바람길에 나무를 심으면 얼어 죽지 않는다. 우리는 비행기나 배가 다니는 길을 항로라 하고 장기나 바둑알이 다니는 길을 행마라 부른다. 철새들도 항로처럼 그들만의 길을 따라 이동한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길 위에서 생활한다. 공동의 길이 있고 개인의 길이 있다. 육신 길이 있고 정신의 길이 있다. 가슴에서 터져 나와 입으로 만든 길, 가슴에서 빚어 나와 눈으로 만든 길, 그 어느 길이든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어 살고 있다. 그 정신적인 길을 집안 내력이라고도 말하고 가풍이라고도 말한다.
오지 마을 여행 중에 목이 말라 어느 외딴집을 찾게 되었다. 산 중턱 넓은 터에 30여 평 되는 빨간 지붕에 하얀 벽 색깔의 본 체 말고도 정자가 있고 주변에는 여름꽃들로 가득했다. 집 둘레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나무들이 어떤 종류는 익어가고, 어떤 종류는 이제 과일을 맺고, 어떤 종류는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는 것으로 보아 넉넉함이 묻어났고, 때 이르게 피어난 코스모스꽃들이 주인보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듯 보였고, 그 꽃길 사이로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어깨에는 예초기를 메고 아직 중년으로 보기에는 좀 청년 같은 동안의 얼굴로 미소를 띠며 어서 오라고 반겨 맞는다. 마치 예약된 손님이거나 친구이거나 한 것처럼 반겨 맞으니 나 또한 그가 오랜 지인처럼 말 섞기가 여유롭다.
“물 한잔 먹을 수 있을까요?”
“네, 어서 오십시오.” 그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이리로 앉으시지요. 이곳이 우리 집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랍니다.” 하며 돗자리가 깔린 정자로 안내한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코스모스꽃 몇 송이를 따더니 정자 옆 물항아리에 그 꽃잎을 띄운다. 오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띄워 놓았을 것이라며 말을 건네더니, 안채로 들어가 한참 만에 옷을 갈아입고 다과상을 차려왔다. 같이 먹자 했더니 그는 금식 중이란다. 1년에 한 번씩 1주일간 금식하는데 지금이 금식 기간이란다. 여행 중에 목이 말라 물 한잔 얻어먹으러 간 집에 낯도 모르는 초면의 여행객에게 이런 대접을 해 주다니 대체 이분을 어떤 분일까? 어떤 분이시기에 금식 기간에 그것도 예초기 메고 일하다 말고 옷 갈아입고 이렇게 곱게 곱게 연인 맞이하듯 낯선 사람을 받아들일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길 하나를 찾았다. 누구나가 쉽게 낼 수 없는 길을 그는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과상을 물리고 주변을 구경삼아 보다가 안채의 현관 앞에 걸려 있는 현판 하나를 보았다. 옥호였다.
‘라이터쟁이 아들의 집’
옥호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하여 집주인에게 물었더니 옥호 그대로 자기는 라이터쟁이의 아들이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자기 아버지가 시장터 입구에서 라이터를 수선하는 라이터 수선공이었고, 자기의 별명은 그의 아버지 직업을 따다 붙여 ‘라이터쟁이의 아들로 살았단다.
‘라이터 수선공’, 부서진 라이터를 수선하여 불꽃을 일게 만드는 사람, 그는 진정 한 사람, 그 아들을 빛이 나게 했다. 목마른 행인에게 물 한잔이 아니라 다과상을 차려 내주는 사람, 그가 만들어 내는 길은 내가 여행길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내 영혼을 춤추게 하는 길이었다.
길(道)이 아닌 곳으로 다니는 사람들,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만드는 사람들, 산짐승 잡을 때만 덫을 놓는 게 아니다. 길을 벗어나 인도가 아닌 짐승 길로 다니는 사람들, 그곳에는 덫이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놓은 덫이 있기도 하고 신이 놓은 덫도 있을 거다. 남이 놓은 덫도 있을 게고 내가 놓은 덫도 있을 것이다. 그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정도를 걷고 정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오늘 밤 자고 나면 길을 찾으러 또 차에다 이 가방 저 가방 주섬주섬 싣고 떠날 것이다. 여행지 어딘가에서 함지박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가득 담아 냇가에서 사금 줍듯 버럭 걸러내듯 덫 놓은 길 걸러내고, 짐승 길 걸러내면 내 영혼을 춤추게 하는 영혼의 길 하나 낚아 올릴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오늘 밤 고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수필집 ≪국화꽃 베개≫,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못다 한 사랑
김 순 길
오늘 ‘균’은 멀리 떠나갔습니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먼 나라로!
이 세상에서 버거웠던 무거운 짐 다 벗어버리고 소중한 아내만 홀로 남긴 채 무심히 홀로 가 버렸습니다.
내가 ‘균’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회 중등부 모임에서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어머니와 누나를 남겨둔 채 아버지를 따라 월남했습니다. 나를 만나면서 북한에 있는 누나가 더 보고 싶고 그립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를 친 누나처럼 따랐습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때 교내에서 후배와 S(Sister)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균’은 자연스럽게 나의 B(Brother) 동생이 되었습니다. ‘균’은 매사에 똑 부러지고 통솔력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줄곧 반장으로 학우들을 리드했습니다.
나는 대학 시절 고2, 3학년 성적으로 무시험 추천을 받아 서울에 있는 명문여대 약학과에 특차로 합격했습니다. ‘균’도 2년 후, 서울 K대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집을 떠나 서울에 있으면서도 밀리는 공부와 어려운 생활에 한 번 만나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나는 직장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균’은 나의 고등학교 4년 후배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나의 남편에게 처남이 되었고, 나는 그의 부인에게 올케가 되었습니다.
오늘 나는 그의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하나님께 부디 천당에서 편히 쉬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국화꽃 한 송이를 덩그러니 바쳤습니다. 그간 인연을 맺은 지 7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건만 못다 준 사랑에 설움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눈물을 억지로 참다가 참배를 마치고 몇 걸음 뒤돌아 나오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가 정중한 모습으로 다가와, 나에게 하나의 청이 있다고 간구합니다. ‘균’에게 70년에 걸쳐 못다 한 사랑을 그녀에게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한없이 낮아져서 간청하는 그녀의 겸손한 말은 하늘에서 내려보낸 천사의 말 같았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현명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떠나감은 70년의 긴 끈을 단단히 이어 더욱 아끼고 사랑하며 의지하도록 곤곤히 맺어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나는 “그래! 우리는 비록 힘이 약하지만, 서로 합하여 70년에 이어 못다 한 사랑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보자”라고 다짐해 봅니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수필부문 신인상(2012),
수필집 향원의 열매, kimsk3527@hanmail.net
보스(Boss)의 품격
김 기 태
영화 <친구>는 어려서 절친한 친구였던 사이가 커서 각각 다른 조폭의 보스가 되었다. 패권 싸움에서 친구는 부하를 시켜 다른 조폭의 보스인 친구를 죽인다.
법정에 선 보스에게 변호사는
"부하들에게 살해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해라. 그러면 사형은 면할 수 있다."라는 조언을 했다.
법정에서 판사가 물었다.
"피고가 죽이라고 시켰나?"
친구는
"내가 시켰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변호사가
"왜 시켰다고 했느냐" 물었다.
보스가 말하기를.
"쪽팔려서"
두목은 그런 거다. 부하는 아무나 해도 두목은 아니다.
작은 조직의 하찮은 조폭 두목이래도 부하 대신 죽을 수 있는 자(者)라야 한다.
자기가 다 해놓고 문제가 생기면 “부하가 했다”고 하는 자는 개보다 못한 졸(卒)이다.
본인도 죽고 조직도 죽는다.
시골에서 빚을 지고 야반도주한 어느 집 아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머리는 좋아 합격했는데 인성이 모자라 자신이 살아가는데 힘들게 하는 형님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형수한테 집안일로 일반인도 하기 어려운 언어를 사용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시장이 되고, 도지사가 되고,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근소한 표 차이로 떨어졌다.
떨어지고 나서 숨도 돌리기 전에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나가 국회에 입성하더니 야당 대표가 되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살아 온 흔적 속에서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좇다 많은 문제가 튀어나왔다.
시장이 업무를 보던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은 조폭의 사진이 등장한다.
공금을 사적인 돈으로 착각하고 유용하는 등 공직사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밝혀졌다. 그런데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한다. 답하기 어려우면 침묵으로 일괄했다. 외국에 나가 골프를 쳤으면서 같이 간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잘못된 흔적에 연루된 사람이 네 명이나 자살하고, 수많은 측근이 법정 구속되기도 하였다. 본인도 한 달에 두세 번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나가야 할 판이다. 여기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도 그동안 재야 선배 지도자들이 걸어 온 길에서 한참 벗어났다.
그의 행적을 보면 독재와 싸운 것도 아니고, 민주화에 몸 바친 일도 없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사회운동가인 척하면서 몸 바쳐 목적을 위해 세상과 싸운 것이다. 지도자의 덕목과 리더의 자질에서 도덕과 윤리가 보이지 않는 위선적인 사람이었다.
법을 배웠기에 법을 피해 가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이다. 그 행적만으로도 지도자의 반열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사람의 행동 뒤에서 이상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보다 더 많이 배우고 똑똑한 주변 사람들도 그의 잘못된 업보를 덮어 주려다 보니 모든 일이 자꾸 꼬여만 간다. 경험도 미천한 무리가 당을 장악하고 돌격대처럼 움직이다 보니 지는 싸움만 하고 있다. 듣기도 민망한 상식을 벗어난 개딸들이 그 앞에 서서 수박을 깨고 있다.
여론도 덩달아 춤을 춘다. 국민도 그런 것 같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마이크 앞에 선 사람들의 입을 보면 북한의 대남 방송을 보는 것처럼 말이 험하고 수준도 낮다. 입꼬리에 힘이 들어가고 저자거리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 튀어나온다. 눈에 살기도 들어가 있다. 그 모습에 한국의 정치가 개판이 되었다.
조폭의 보스보다도 못한 행동이 오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충남 서천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밥로스. 초상화, 생활공예, 수필가, 전)계룡건설 토목 본부장, 현)온동마을 촌장,
저서『삶의 시방서』,『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그려』,『하고집이』등
UN의 날에
1950년 6월 25일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은 일요일 아침에 탱크를 앞세우고 밀물처럼 밀고 내려왔다. 해방 후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다가 준비하지 못했던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그때 우리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군인과 군수물자를 제공한 나라가 22개국이었으며 참전한 군인도 195만여 명이고 그중 15만 명의 귀중한 인명이 희생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우리를 지켜주다 많은 사람이 사망한 것이다.
뉴질랜드 같은 경우는 20만 명이 참여하여 전체 군인 중 90%가 참전하였다.
그리고 휴전이 된 후 올해까지 70년이 흘렀다.
우리는 그 후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하였고, 잘살게 되면서 우리나라가 지금 휴전 중인지 아니면 종전이 되었는지 모르고 착각하고 오늘을 살고 있었다.
그동안 도와준 공도 모르고 미군을 철수하라고 떠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단독으로 북한과 대적할 힘을 갖추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북한은 전쟁에 패배한 후한이 맺혀 핵무기까지 개발하였다. 우리는 우리 특유의 객기만 부리는 꼴만 보여주었다.
정신 나간 좌파들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북한은 핵 실험을 하고 그 핵탄두를 실어나를 미사일 시험을 하는데 우리는 새총 쏘듯 현무만 서해안에 쏘고 있었다. 결과 북한은 핵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든 상대를 향해 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재래식 무기만 가지고 하늘만 쳐다봐야 했다.
순진하게 북한에게 햇볕정책으로 일관하며 북한을 지원했는데, 그들은 그 돈으로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핵 개발에 몰두한 것이다.
그렇게 70년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자력으로 북한의 위협을 막지 못하고 참전 16개국 국방장관들이 모여 한국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동으로 참전한다고 결의하는 것을 보며 70년이 지나고 경제는 10위권으로 들어왔어도 자력으로 그들을 막지 못하는 우리 모습이 6.25 전쟁을 닮았다.
10월 24일. UN의 날에 관 주도나 보수단체에서 UN의 날 기념식을 행한 곳이 있는지 뉴스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6.25 때 참전해서 우리를 지켜 준 나라에 고맙다고 감사의 보답을 하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배은망덕한 국민이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유대인처럼 자기 나라를 지키는데 잔인한 민족도 없다. 성인이 되어 자기들에게 총을 겨눌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까지 서슴없이 죽였다. 우리는 36년간 일본의 강점기를 보내면서 치를 떨고 살지만, 그들은 몇천 년을 핍박을 받아 골수에 한이 스며 있었다. 땅 없는 설움을 겪었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전쟁을 확전시키지 않으려고 뛰다 보니, 바이든 대통령만 바빠졌다. 이참에 이스라엘은 살아가는데 귀찮게 하는 가자지구를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스라엘은 면적이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면적밖에 안 된다. 승용차로 달려 봐야 두 시간이다. 그런데 주변 아랍국가 모두와 동시에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한다. 과거에 그렇게 싸워 승리한 경험도 있었다. 외국에 나가 있는 국민까지 경쟁적으로 입국하여 총을 들고 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가 전쟁 중이다. 두 전쟁을 지원하는 미국이 힘들어한다. 우크라이나는 세상 여론이 이스라엘 가자지구 전쟁으로 뒤 켠으로 밀렸다.
우리는 종전이 아니고 휴전인 상태인데, 동 면사무소에서는 지방자치제가 된 후 일 년에 주민 위안잔치로 2억 원 이상을 사용하며 흥청망청이다. 시골 면사무소에서도 1인당 행사경비가 10만 원이나 된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엄청난 금액이 놀고 즐기는데 소비된다. 자력으로 전쟁을 방어할 힘도 없으면서 도와준 미국 보고 철수하라 하면서 놀기에 바쁘다. 어쩌자는 말인지 모르겠다.
10월 24일, 대전 보문산 UN 기념탑에서는 UN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참뜻을 기리자는 마음으로 보수단체에서 기념식을 개최했다. 우리 보보스도 그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에 참여하여 의식 곡과 축하공연을 연주하였다. 이스라엘에서 피신해 온 손자 손녀도 함께했다.
우리에게는 전쟁이란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일어난다면 누가 도와주러 올 것인가 걱정이 된다. 이 배은망덕한 나라에 말이다. 자력으로 방어할 힘도 없고 대비도 못하는데, 70년 전이나 후나 똑같은 상황에서 김정은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착잡하다.
맨해튼 입성기
해외에 나가는 일은 가슴이 떨리는 일이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다르고 다양하게 사는 그곳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행사에 몸을 맡기고 단체 관광을 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아내와 둘이 방문 목적으로 뉴욕에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휴대폰에 번역기 앱을 깔고 사용법도 익히고, 예상 질문을 만들어 모범답안도 작성하여 준비도 하였지만, 막상 입국 절차를 받기 위해 입국수속대 앞에 서니 가슴이 떨렸다.
케네디 공항에 내려 입국수속을 하고 있는데,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 두 사람 앞에 있던 입국자가 수속을 끝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순간 망설였으나 흑인 남자의 인상이 좋아서 그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Thank you“
흑인은 한국말로 질문을 하고 나는 영어로 인사를 하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두려웠던 가슴이 쑥 내려앉는 기분이다
흑인 담당관은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의외라는 듯 아들이
"입국 수속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한다.
“별로!”
“오!”
사실 이민자 가방에 가득 채운 옷이나 생필품 그리고 한국 음식. 그중에 된장, 고추장, 젓갈류와 건어물이 많아 걱정한 것이다.
가방을 오픈하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특히 서양 사람들은 냄새나는 한국 음식과 젓갈류 오징어를 싫어한다는데...
지금은 건강식으로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지만, 아직은 일부일 것 같고...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수속이 빨리 끝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니 마음이 놓인다.
지하 차도를 빠져나오니 맨해튼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맨해튼 38St 2 Ave에서.
수학여행
전 월 득
학창 시절의 백미는 현장 체험 가는 날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학교 근처에 있는 출발 장소로 달렸다. 아침 식사를 못 하고 오는 반 친구들과 선생님께 드릴 간식으로 따뜻한 콩설기를 준비해 뛰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볍고 즐거웠다.
수학여행이란 용어가 나에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고 3학년 학생 신분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으며, 이는 특별한 일인 것이다. 출발지에 도착하자 우리 반은 7호 차라고 담임 선생님께서 손짓하며 기다리고 계셨다.
늦은 나이에 과감하게 시작한 나의 학교생활은 하나하나가 새롭고 활기가 넘친다.
몇 달 전부터 수학여행지를 정하는데 학생 대부분이 늦깎이 성인들이기 때문에 의견도 분분했다. 모두가 웬만한 곳은 다녀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와 경주 불국사 두 군데로 압축하여 의사를 묻는데, 모두 한두 번씩은 가본 곳이라 한다. 안 간다, 못 간다, 설왕설래하다가 나는 단일 코스인 경주를 선택한 것이다
제주도는 여러 번 다녀왔고 막내아들이 살고 있으니, 또 가야 할 기회가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경주는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지만 갈 때마다 동행하는 사람들이 다르니 느낌도 달라서 내심 기대하는 바가 컸다. 나는 단짝 친구와 예쁜 빵모자를 사고 이벤트성 가면도 준비해서 수행 여행의 추억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주도로 가는 팀과 절반으로 나눈 인원으로 다른 반 친구들과 섞여 동승한 버스에서 조용히 앉아 경주까지 갈 때는 지루함도 있었다. 만약 어릴 때였다면 얼마나 조잘거리며 들뜬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버스는 경주 불국사에 도착하였다. 대부분 굳은 표정이었지만, 단체 사진을 찍으며 화사해진 얼굴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삼삼오오 인증샷을 하는 것은 동심이나 늦깎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불국사, 첨성대, 천마총, 성덕대왕 신종, 경주국립박물관 관람, 점심 식사 등 빡빡한 하루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준비해 간 가면을 나란히 쓰고 기념 촬영을 하는 것은 색다른 느낌으로 재미있었다. 주변에 서 계신 컴퓨터 선생님을 부르며 멋진 포즈를 취하고, 예쁜 후배하고도 사진을 찍었다. 평소 조용하던 친구도 손 하트를 그리며 밝게 웃는 모습이 정겨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버스 안에서 갤러리에 남겨진 사진들을 보았다. 첨성대 앞에서 찍은 사진이 지난 4년 전 문우들과 갔을 때보다 왠지 썰렁하고 허전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주변을 장식하던 핑크뮬리가 말끔히 사라진 탓일까? 2019년의 심한 지진 피해 때문인가? 덩그러니 우뚝 서서 천년고도 신라 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첨성대의 위용은 장엄한데, 내가 느끼는 기우인가? 괜한 생각도 해보곤 하였다.
제주팀이 보내준 카톡 소리와 함께 그곳의 이미지도 함께 공유하며, 나도 질세라 여러 컷의 사진을 보내며 흥미롭던 장면을 전송하며 뜻깊은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마음속에 새긴 풍경들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 놓고, 가끔 꺼내 보며 오래도록 간직하려 한다.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가을, 옥천
가을빛을 따라나선 한밭문학회 문우들과의 하루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빛에 물들어가는 나, 시를 사랑하며 문학을 즐기는 문인 열 명이 교수님의 안내로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과 인근 지역을 두루 견학하기로 하였다.
일행은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무르익어가는 가을 길을 달렸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까지 달리는 동안, 차창 너머의 신선한 바람이 우리 모두를 낭만 속으로 젖어 들게 하였다. 우담 노 작가님 차 뒷자리에 앉은 세 여인은 잠시도 입을 닫지 않은 채 도란도란거리며 나들이를 즐겼다.
앞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던 오 문우님도 가끔 뒤를 돌아보며 추임새를 넣으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우리 문학회에 처음 합류한 오 쌤은 나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신입 회원이다. 시가 좋아 글을 쓰고, 문학을 즐기며 깊이 있게 공부하려는 속 깊고 성격 깔끔한 젊은이로 교수님과 회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특히 이번 학기에 새로 등록하신 분들이 많고, 여행에 동행할 수 있어서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을 보니 청량제를 마신 듯 개운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일행은 옥천 읍내의 한적한 곳에 있는 정지용 시인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아담한 건물 앞에 시인님의 대표작, 일본 유학 시절 조국의 고향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승화시킨 ‘향수’를 이동원 님의 노래비로 악보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구절구절마다 애틋한 언어에 좋은 곡을 붙여 감성 있게 부른 노래는 온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그 시절에도 음반이 다수 판매되었다며 교수님께서는 그 우수성을 평가해주셨다.
그 앞에, 둘러선 우리 문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릴 적 향수를 그리며 잔잔하게 합창했다. 언제 누가 불러도 가사와 곡이 감미롭고 감동적이다. 문학관 내부에 들어가니 1910년 현대 시를 기점으로, 20년대 낭만주의 김소월, 한용운, 30년대 모더니즘 김영랑, 김기림, 백석, 정지용, 이상 등 유명시인들의 시대별 인물사진이 걸려 있었다. 옆에는 시를 낭송하는 작은 부스가 준비되어 있어, 음성 고우신 남 선생님께 시 낭송을 부탁드렸다. 굵고 나직한 목소리로 운율을 살리며 천천히 향수를 낭송해주시니,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더욱 곱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창밖 잔디밭에선 병남 문우님이 소프라노의 울림으로 멋지게 한 곡 뿜어내어 박수갈채를 받았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고 출출해질 무렵, 지완 시인님의 페이로 야들야들한 옥천의 맛 묵밥을 먹기로 하였다. 빛 좋은 노란 조 막걸리를 곁들이며 후룩후룩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나는 막걸리 한잔을 받아놓고 수저로 홀짝거리는 맛도 즐거웠다.
식사 후엔 국모이셨던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방문했다. 조선 시대 사대부 건축 양식으로, 金 정승 宋 정승 閔 정승 삼정승이 살던 집을 부친 육종관 님께서 1918년에 매입하였다고 한다. 1925년 육영수 여사가 태어나 1950년까지 살았다고 하였다. 기와집 십여 채가 위채, 아래채, 안채, 사랑채, 연당 사랑채 등이 있고, 집 앞 연못에는 연꽃이 화사하게 피었던 흔적으로 꽉 차 있었다. 군데군데 두레박 우물터가 네 개나 있고 연자방아와 집채만 한두 개의 뒤주가 인상적이었다. 뒤뜰 후원의 넓은 잔디밭에는 붉은 산수유가 열매를 맺어 잘 관리되고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오늘은 억수로 운이 좋아 평거 김선기 화백의 서화 개인전 관람도 할 수 있었다.
여섯 시간 동안 계속 써 내려간 천자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창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나도 서예를 조금 하면서 성균관 유림전과 시립미술관에 출품할 때, 꾸준히 연습해야 했던 생각도 번뜩 스쳐갔다. 차라리 정교한 글씨를 따라 쓰는 것은 쉬운 거라며, 교수님께서는 그 누구한테도 사사 받지 않고 모든 작품 하나하나를 창작하시는 것을 자랑스럽게 당당히 설명해 주셨다. 더 놀라운 것은 또 다른 데 있었다. 제23대 순조임금 상량문 필사본을 완성하여 인릉 정자각 중수기 봉안식에 참여할 때의 힘들고 중요했던 과정을 설명하는데 흥미진진하였다. 훼손된 원본을 컴퓨터로 출력을 하여 쓴다는 것은 창작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였다. 전지(2m×70cm) 200여 장에 연습하고, 곱디고운 붉은 명주 비단(6~8m)을 4개월에 걸쳐 완성하여 인릉 정자각 중수기 봉안식에 참여한 것에 대한 자존감을 피력하면서, 덤불 같던 머리칼이 다 빠지고 온몸이 골 병들어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했었다는 후일담을 전하는 모습이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다.
계획대로 부소담악 둘레길을 걷고, 가을빛에 채화된 배경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었다. 가을이 오듯, 인생의 가을 길에 들어선 지긋하신 나이임에도 카메라 앞에 서면 꽃받침, 사랑해요, 손 하트를 그리며 즐거워하였다.
아름다운 가을이 나의 가슴으로 깊게 스며든 소중하고 값진 하루였다.
갑사 가던 날
공주 추 갑사 가는 날, 문학기행 가는 맛이 쏠쏠해진 요즘 날씨마저 우리 편이 된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언제나 약속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뛰어나가니 우담 작가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미안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며 한밭대 S동 209호 실에 도착하니, 응접실엔 벌써 반가운 문우들이 미리 오셔서 화창한 날씨를 소제로 여행의 복된 날을 즐기고 계셨다. 건강과 개인 사정으로 이번 학기에 함께하지 못했던 김 회장님과 백오 작가님이 오셔서 더욱 반가웠다.
나는 대전에 오래 살았지만 가까이 있는 공주 갑사에 가는 일은 처음이라 기대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평소보다 참석인원도 많아서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티, 타임을 마치고 세 대의 승용차에 빼곡 이 나누어 타고 공주 갑사를 향하여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였다. 서늘한 가을 날씨는 누릿한 단풍을 만들고 이따금 부는 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발끝에 채 인다. 주차장에 내린 일행들과 함께 천천히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걸었다. 순간 포착에 능통한 백 작가님은 카메라 렌즈를 돌리며, 우리 일행을 일주문이 보이는 위치에 한 줄로 세우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유명세와 다르게 영롱하게 물든 단풍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천년 고찰을 찾아가는 길목에는 늙은 나무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서서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두 아름이 거뜬히 넘을 정도로 큰 갈참나무는 감성이 풍부한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서 묵묵히 길목을 지키며 세상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듯하였다.
교수님의 절친이신 건양 사이버대 박 교수님께서, 친구를 잘못 만나 불려왔다며 위트 있는 언변으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를 위해 운행도 도와주시고, 해박한 지식으로 갑사에 대한 해설을 낱낱이 해주셔서 여행은 더욱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깊지도 높지도 않은 산 중턱에 아담한 고찰, 추 갑사가 있었다. 협소하지만 사찰마당에는 애호가들의 사진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용한 절간 같다는 말이 있듯이 스님도, 보살님도 보이지 않는 평화로운 사찰을 먼발치서 돌아보고 하늘에 맞닿은 계룡산 앞의 갑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찍었다. 불교 신자이신 문우님들은 경내에 들어가 불전을 올리고 합장하는 모습이 정겹게 보였다.
갑사에서 좌측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 외진 산속에는 갑사 철 당간이 있었다, 신라 시대의 당간이라고 하였다, 철로 만들어진 유물이 깃대처럼 높이 솟은 채 잘 보존되어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25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가볍게 일렁이는 바람에도 고운 낙엽 한 잎이 힘없이 떨어져 머리 위에 앉는다. 투덜대는 무릎을 달래며 고운 나뭇잎 한 개를 주웠다. 곱게 물들어 땅으로 내려오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내 인생의 길도 마지막까지 고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여행의 백미라면 먹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으니 모두 들 맛집을 찾았다. 넓은 식당으로 열네 명의 문우들이 한자리에 앉아서 고유의 맛을 지닌 도토리묵과 해물파전, 된장찌개로 어릴 때 길 드려진 입맛을 자극하며 노랗게 숙성된 좁쌀 막걸리 한 잔씩을 들며 훈훈한 담소에 젖을 무렵이었다. 예고한 대로, 점심값을 내신 김순길 회장님은 나이를 초월한 소녀 같은 목소리로 애송시를 낭송하여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주며 박수를 받으셨다. 저절로 흥겨워진 자리에 음성이 성우 못지않으신 낭송가 남 선생님께 좋은 시 한 편을 낭송해 달라는 교수님의 부탁이 있었다. 중후한 음성으로 멋진 낭송을 해 주시고, 계절에 맞는 ’가을‘ 이란 가곡까지 멋지게 불러주셨다. 이어서 백오 작가님과 두엣으로 멋진 앵콜 곡을 불러주시니 우리들의 가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환호하며 오병남 문우님도 꾀꼬리 같은 소프라노 음성을 자아내며 도심 속에서 텁텁했던 마음을 정화해 주었다.
날씨도 청명하여, 단풍놀이 나온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는 와중에도 우리 일행이 사용 중이던 넓고 쾌적한 식당에는 외부 손님이 한 팀도 들어오지 않아 우리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일행은 좋은 장소에서 마음껏 누린 보답 차원으로 주인이 굽고 있는 밤 빵 한 봉지씩을 사 들고 동학사에 있는 멋진 카페로 이동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살기 어렵다면서 밥값보다 비싼 커피숍은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공간이 넓은 야외 테이블에서 하늘과 바람과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따끈한 아메리카노와 커피 라떼 한 잔씩을 마셨다.
멋진 시월의 마지막 날, 마음 넉넉한 사람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며 건강하게 살아 있기에 오늘이 있음을 감사하였다.
헬스클럽 풍경
노 복 래
올해 여름. 그 무덥고 지루하던 시간도 자연의 순리 앞에 고개를 숙이고 가을을 지나 이제 겨울로 들어서나 보다. 나무들도 잎을 떨궈 몸짓을 줄이고, 꽃들도 씨앗을 땅속 깊이 묻는 시간이다. 사람들도 병원을 찾아 백신접종을 하고 근력을 키워가는 중이다.
우리의 삶에 건강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렇기에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개인의 취향에 따라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등산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수영을 좋아하고, 또는 골프를 즐긴다. 모든 사람이 오로지 등산만 좋아한다면 어떻게 될까?
명산은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이며, 자연 또한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수영만 좋아한다면 도시 곳곳은 수영장 시설로 넘쳐나고 수질오염이 가속화될 것이다.
지구촌 아니 우주 만물이 신비하고 조화롭듯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취미도 다른 것을 보면,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신 앞에 감사와 경외심이 절로 생긴다.
나는 학창 시절에는 태권도를 배우며 심신을 단련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걷기를 생활화하며, 일주일에 세 번은 헬스클럽에 다닌다. 요즘은 24시간 운동할 수 있는 헬스장이 생기어서 시간 부담 없이 샤워와 운동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헬스장 이용의 장점은 많다.
그중 첫 번째는 그곳에 가면 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이 운동하고 있는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기(氣)를 받는 느낌이 든다.
두 번째의 장점으로는 우천 시에도, 공휴일에도, 또는 새벽이나 밤에도 구애받지 않고 운동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는 젊은 트레이너들이 시간을 쪼개며 운동을 지도하는 것을 보며 배우는 점이 많다. 비록 나이는 들어가지만 나도 새로운 꿈을 꾸며 도전하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일흔 살이 넘은 나를 보고 아내는 젊은 사람들이 운동하는데 누가 되지 않도록 양보하며 운동하라고 늘 충고한다. 운동 중 나이 많은 분들을 만나면 초록은 동색이라고 서로가 반갑게 인사하며 친해진다. 며칠 안 보이면 안부가 걱정되기도 한다.
‘옥에도 티가 있다’라는 우리말 속담처럼 헬스장 다니는 데도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종종 있다. 특히 공휴일이나 밤늦은 시간에 이용하면 그렇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사용한 운동복이나 수건 등을 정리 정돈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버리기가 일쑤이다. 물론 내가 눈에 보이는 대로 정리를 하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질서와 매너를 지킬 줄 아는 기본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정에서의 교육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교권 확보 요구도 근본적인 문제는 가정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해 본다. 얼마나 시달리고 괴로웠으면 젊은 선생님께서 죽음을 선택하셨을까. 내가 공부했던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자식이 소중하고 보석 같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 더 채찍하고 연마시켜야 빛을 더 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공동체 사회에 적응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훈련의 기초는 ‘가정교육’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세계의 우뚝 선 일류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
«상상의 힘»(2022) 수필부문 신인상, 현)(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
신원사 탐방기
한밭대 평생교육원에서 수강하고 있는 ‘문학창작과 기행’ 반에서 저물어가는 가을을 마음에 담기 위하여 민족의 역사가 함께 숨 쉬는 고찰 계룡산 신원사 탐방을 계획하였다.
11월 중순, 갑자기 겨울이 온 듯 날씨가 춥고 스산하여 내심 걱정했는데, 탐방 당일 봄 날씨처럼 기온이 올라가고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우리 문인들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서로가 칭찬하며 기뻐하였다.
오전 10시 강의실에 도착한 문우님들은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오늘의 일정에 대해 상의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서로 얼싸안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 매우 좋았다.
한 가족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일행은 들뜬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청명한 날씨와 주변의 풍광을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신원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주차를 마치고, 은행잎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오솔길을 걸었다.
모처럼 은행잎 낙엽이 쌓인 길을 걷는 것도 멋진 추억으로 남으리라. 단체 사진과 개인 사진도 많이 찍어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천안 병천에서 사시는 팔순이 넘으신 한상은 문우께서는 일찍 오셔서 산행을 즐기고 계시었다. 경찰 간부로 공직생활을 퇴임하신 후 일흔이 훨씬 넘은 연세에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시고, 졸업하신 학구파이시다.
시 낭송인 남동원 문우님과, 수필가 이명년 문우님과 동문수학하신 방송통신대 국문과 동기이시다.
우리 문우님들의 열정과 수준을 가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만학도 세 분께서 열정적으로 공부하시던 학창 시절 경험담을 듣노라면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난다. 나도 무엇인가 새로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
계룡산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 ( 651년) 고구려 승려인 보덕화상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도 오셔서 청법 하신 역사 깊은 고찰이다.
중악단(보물 제 1293호)은 조선 태조 3년(1394년) 태조 이성계의 왕명으로 무학대사께서 지으셨고, 1879년(고종 16년) 명성황후의 서원으로 재건되었다 한다.
명성황후께서 직접 중악단에서 기도의 힘으로 순종을 회임하셨다고 하며, 을미사변 (1895년 10월) 때 일본 마우라 공사에게 시해당하신 명성황후 추모 천도제를 지금까지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여행의 백미는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논어반에서 같이 공부하시던 통이 크신 류주현 문우께서 정원이 넓고 분위기 좋은 명품 식당을 사전 예약해 놓으셨다. 마침 김순길 전 회장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해 오신 오색 과일과 함께 금상첨화의 식사를 즐기었다.
정담을 나누며 멋진 식사 후 일행은 계룡산 연천봉이 보이는 자연 속의 정원으로 이동하여,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시 낭송과 가곡 등을 부르며 춤을 추고, 멋진 가을날을 즐기며 우정을 쌓는 좋은 시간을 보냈다.
가을 해가 짧음을 아쉬워하며, 또한 동영상을 촬영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내년 새 학기 봄날에는 더 좋은 곳으로 문학기행을 가는 꿈을 가져 본다.
언제나 동행의 기쁨을 함께하는 모든 문우님께 감사드린다. 올가을은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많은 인연과 기쁨을 얻었다. 가을 햇살이 마음 깊이 스며든 훈훈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