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재조명 기획22]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조선 영조의 사부, “경한재 곽시징”
김헌규 기자
충남일보 2016.05.01 18:15
영조의 어린 시절 스승이 이 고장 천안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하다.
영조 임금이 어린 영인군 시절에 스승은 청주 곽씨 경한재 곽시징(淸州郭氏 景寒齋 郭始徵)이다
당시 목천군 근동면 웅동으로 현재는 천안시 병천면 관성리 독가말이다. 오래전부터 청주곽씨 웅동파가 있을 정도로 집성촌을 이뤘으며 현재도 대부분 곽씨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곽시징의 본관은 청주(淸州)며 자는 경숙(敬叔)이고 또는 지숙(智叔), 호는 경한재(景寒齋)다. 세거지는 목천(木川)으로 아버지는 사헌부집의를 지낸 지흠(之欽)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도사(都事) 옥)의 딸이다.
곽시징은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다. 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글공부에 전념했다. 송시열이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그 원통함을 상소하였고, 스승이 사사된 뒤 태안(泰安)에서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694년(숙종 20) 목천의 옛 집으로 돌아와 도(道)를 강론하는 여가에 산수를 즐기며 자적(自適)하였다. 이 무렵에 광기천변에 정자를 짓고 경한정(景寒亭)이라 하고 향우지인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노년을 줄긴 듯하다. 천안의 많은 서적들이 경한재 곽시징이 광기천 변에 정자를 짓고 경한정이라 했는데 훼손되어 위치를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이 따르면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주춧돌과 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민가가 있다 전한다. 그곳이 바로 병천면 도원리 307번지이다.
곽시징은 1703년 목릉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고, 연잉군(延?君 영조 英祖)이 어린 시절 사부(師傅)로 천거되어 한동안 연잉군을 가르쳤다. 목천 고을에서는 곽사부라 부른다.
그 뒤 별제(別提)·이인찰방(利仁察訪)을 역임하고, 말년에는 공주(公州)의 둔촌(遯村)에 집을 지어 살았으며, 임종 때에 부녀를 물리치고 시중드는 자가 정침(正寢)의 병풍을 거꾸로 설치한 것을 꾸짖으며 자리를 바르게 하고 세상을 떠나니, 계사년(癸巳年, 1713년 숙종 39년) 4월이었으며, 향년이 70세다.
처음에 공주의 둔촌(遯村)에 장사 지냈다가(지금은 세종시 고운동 장군봉이다) 목천(木川)의 선영 아래 곤향(坤向)의 산록으로 개장(改葬)하였다.(현 천안시 병천면 관성리 독가말(웅동))
또한 둘째 딸이 영특하여 어려서 부모님 무릎에서 지은 시가 회자되어 세상에 전하며. 성장하여 광산 김철근(光山 金鐵根)에 출가하여 가정을 꾸몄다. 우암이 이 시를 보고 기특하여 칭찬하며 청창이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도암 이재(陶菴 李縡)는 내가 지금 지어도 이렇게 지을 수는 없다 하면서 선비의 시라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총명하여, 나중에 부근(夫君)이 죽자 묘지명(墓誌銘)을 지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청창이 죽으면서 아녀자의 글이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하면서 그동안의 글을 모두 태우고 죽어 전하는 것이 없다.
요행이 천안향토회 연구사 김종식선생에 의해 묘지석과 행장을 종손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사부 곽시징 묘갈명(師傅 郭始徵 墓碣銘)에 의하면 “경한재(景寒齋) 곽(郭) 공이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두 분 선생의 문하에 있으면서 예의를 익히고 의리를 지켜 학자(學者)들의 미목(眉目)이 되었는데, 유독 공은 남모르게 스스로 수양하며 세상에 드러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공의 휘(諱)는 시징(始徵)이고, 자(字)는 경숙(敬叔)인데, 뒤에 지숙(智叔)으로 고쳤다. 곽씨(郭氏)는 시중(侍中)인 곽상(郭祥)에서 드러나 청주(淸州)를 관향으로 삼았으며, 본조에 들어와서 곽추(郭樞)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 찬성(贊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고조 휘 회영(懷英)에 이르러 시정(寺正)으로 승지(承旨)에 추증되었으며, 휘 설(說)을 낳았는데 첨정(僉正)으로 최종 직질은 가선 대부(嘉善大夫)이다. 휘 희태(希泰)를 낳았는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지흠(之欽)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이니, 4세(四世)가 모두 문보(文譜)에 올라 청백(淸白)과 문한(文翰)으로 일컬어졌다.
비는 창녕 성씨(昌寧成氏)인데 선교랑(宣敎郞) 성준웅(成俊雄)의 딸이며, 계비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도사(都事) 김옥의 딸인데, 공은 김씨의 소생이다.
사부였을 때에 지금의 주상(영조(英祖)이 연잉군으로 잠저에 있었는데, 가르치려 나아갔을 때 예조에서 강학(講學)하는 의절(儀節)을 빠뜨렸으므로, 숙종께서 처음에 공에게 찬정(撰定)하도록 하였다.
예가(禮家)의 공부에 뜻을 두어 의심나는 글과 바뀐 의절(儀節)은 세밀하게 긁어내어 분석하고는 그 이룬 학설에 나타내어 분변하기를 정밀하게 하고 근거하기를 상세히 하는 데는 비록 옛날의 전문가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만년에 공주(公州)의 둔촌(遯村)에 집을 지어 살았으며, 임종 때에 부녀를 물리치고 시중드는 자가 정침(正寢)의 병풍을 거꾸로 설치한 것을 꾸짖으며 자리를 바르게 하고 세상을 떠나니, 실로 계사년(癸巳年, 1713년 숙종 39년) 4월이었으며, 향년이 70세다.
처음에 공주에 장사지냈다가 목천(木川)의 선영 아래 곤향(坤向)의 산록으로 개장(改葬)하였다.
원배(原配)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현감(縣監) 이필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곽재적(郭載績)ㆍ곽성적(郭成績)ㆍ곽하적(郭夏績)이고, 딸은 신협에게 출가하였다.
다시 통덕랑(通德郞) 청송(靑松) 심익형(沈益亨)의 딸에게 장가들어 3녀를 낳았는데, 생원(生員) 김철근(金鐵根), 현감 박필언(朴弼彦), 사인(士人) 이현우(李顯祐)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곽치적(郭治績)이고, 딸은 이명상(李命相)에게 출가하였다.
곽재적의 아들은 생원 곽원진(郭元鎭)과 곽유진(郭維鎭)ㆍ곽보진(郭普鎭)ㆍ곽여진(郭與鎭)이고, 딸은 이단상(李端常)ㆍ한준수(韓浚遂)에게 출가하였다.
곽성적의 아들은 곽진일(郭鎭一)ㆍ곽진구(郭鎭九)ㆍ곽진만(郭鎭萬)ㆍ곽진억(郭鎭億)이고, 딸은 안종신(安宗臣)에게 출가하였다.
곽하적의 아들은 곽진표(郭鎭杓)이고, 김철근의 아들은 김득호(金得好)ㆍ김득추(金得秋)이며, 고유진의 아들은 고태제(高泰濟)이고 그 나머지 손자와 증손 남녀는 모두 어리다.
김종식 연구사는 “오래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송곳 같은 절의로 옳은 길은 살다 간 사람들이 대접받고 회자되는 세상 이었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보다는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러한 세상 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료제공] 김 종식 청주곽씨 족보소장. 곽 노욱 청주곽씨 목천종중. 곽창신 청주곽씨 웅동파종중.
[참고문헌] 청주곽씨 대동보. 사부곽시징 행장
곽시징1644(인조 22)∼1713(숙종 39).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숙(敬叔) 또는 지숙(智叔), 호는 경한재(景寒齋). 세거지는 목천(木川). 아버지는 사헌부집의 곽지흠(郭之欽)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도사(都事) 김옥(金鋈)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송시열이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그 원통함을 상소하였고, 스승이 사사된 뒤 태안(泰安)에서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694년(숙종 20) 목천의 옛 집으로 돌아와 도(道)를 강론하는 여가에 산수를 즐기며 자적(自適)하였다. 1703년 목릉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고, 이어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연잉군(延礽君: 英祖)을 가르쳤다. 그뒤 별제(別提)·이인찰방(利仁察訪)을 역임하고, 만년에는 공주에 거주하였다. 그는 특히 예서를 깊이 연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