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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야외 갤러리
손 중 하
유월 들어 날씨가 예전의 중복 더위만큼이나 무덥고 햇살도 뜨겁다. 무덥다기보다 뜨거운 날씨에도 나는 바쁘기만 하다. 바쁨 속에 쉼표도 사용하고 느낌표도 사용하며 더러는 마침표도 꺼내써야 하는데, 도무지 마침표를 찍을 시간적 공간이 나지 않는다. 늘 작품 때문에 머릿속은 진행형이다. 그러다가 피곤하다 싶으면 팰리세이드를 애인 삼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하는 삶, 그리 싫지 않다. 오늘도 그랬다. 매주 화요일 지역 주민을 위한 역사 문화 강의가 끝나면 수강생들과 이곳저곳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문화를 즐기기도 하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사들여 오기도 한다. 또한, 오가는 길에 찻집에 둘러 수다도 떨고 갤러리에 들러 전시품을 골라 오기도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이 날은 수강생들이 여행 중 아름다움으로 기억해 둘 만한 곳이거나 음식으로 소문난 곳이거나, 아니면 누구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생소한 곳으로 떠나곤 한다. 그래서인지 수강생들이 염불보다 잿밥에만 더 맘이 가는듯하지만, 나 역시 수강생의 안중보다는 내 갤러리에 전시될 미완의 작품을 찾거나 아이디어를 찾는 생각에 더 몰두해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 탑사, 이곳을 찾은 것은 역시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찾아온 곳으로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마이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곳은 누구나가 한두 번은 다녀간 곳으로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이산보다 내가 수강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마이산 앞에 숲으로 가려져 있는 이 산은 오는 사람마다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산이다. 그 산 이름을 알고 있는 분들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 산은 슬픈 전설이 있다.
마령면을 찾는 관광객이 마이산만 쳐다보고 자기는 어느 사람도 본 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철철이 고운 옷으로 갈아입어도 여기를 찾는 관광객은 마이산만 바라보고 감탄을 할 뿐 자기를 바라보고 칭찬 한마디 없는 것이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이 산이 밥마다 `나도 산이다.`라고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단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그 산 이름을 ‘나도산’이라 이름 지어주고 고사까지 지내주니 울음을 그쳤다는 전설이 있는 이 산, 나도산!
내가 지금 전시회를 진행 중인 곳에 전시될 미완의 작품 그것은 바로 나도산처럼 울부짖는 미완의 작품,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러면서도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는 작품을 찾는 작업, 그것을 찾으러 섬이나 포구 또는 오지 또는 오일장을 찾아 나선다. 내 완성된 작품에도 나도산처럼 내 생각이 덜 미치거나 완성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눈길이 가지 않는 작품들이 나도산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내 야외 갤러리에서도 여전히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기에 새벽부터 하는 일은 갤러리에 나가 그 소리를 나직하게 하거나 그 소리를 잠재우는 일이다.
한 작품 한 작품 공들여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을 늘 보완하고 수정하고, 그러면서 내가 만든 작품에 감탄도 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이 작업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느리면서도 때로는 서두르는 진행형이다. 이 작품에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내 노후의 마지막 작품전시회이며 개인전으로 여는 갤러리라서 손님이 찾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갤러리 주변에는 새들도 찾아올 수 있도록 새집을 만들어 달아주거나 행여 나비 떼가 찾아올지 몰라 그들의 휴식 공간도 만들어 준다.
오늘같이 햇볕이 뜨거운 날에도 작품의 채색에 도움이 된다면 작품을 옮겨 놓거나 부분 부분을 햇살이 들도록, 또는 햇살을 감추어 주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 갤러리에 전시하는 이 즐거움, 이것이 나답게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의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생각난다. 그는 그답게 가난, 고통, 고립 그리고 그의 생전에 누구도 그의 작품에 관심이 있는 미술애호가들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앤디 워홀(Andy Warhol)처럼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지 않고 자기의 작품세계를 구사해 나갔다.
나다움의 그림이 아닌 대중에 부합하는 그림을 그린 앤디 워홀은 행복했을까? 끝내 권총으로 자기의 삶을 마감한 자기다운 그림을 그리며 일생을 마친 고흐는 행복했을까? 인정, 사랑, 돈, 명예, 이런 걸 얻으면 행복한 삶이었을까?
수없이 물음표를 던지며 내게 던지는 이 물음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작품세계에서는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부를 꿈꾸는 것도 아니며 사랑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정을 받으려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비즈니스 아티스트가 아닌 에고의 아티스트로 세상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이 작업은 고독하기에 더 행복한 작업이다.
굳이 나다움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을 필요도 없다. 자연을 찾아 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찾아 나다움을 표현하는 일, 그래서 그것을 갤러리에 전시해 놓고 나다운 가치를 누구를 향해서 손짓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작업복 차림의 나를 정장 차림으로 갤러리에 불러내어 굳어진 얼굴에 미소를 그려내게 하는 곳, 이곳이 내 갤러리의 전부다. 그래서 온갖 세상의 미소를 찾아 나서는 작업부터 시작한 것이 홀로 있음의 여행이다. 그렇다고 굳이 꾸준함과 집념을 보태어 내 삶을 노동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바람처럼 또는 구름처럼 흘러 머물러 얻는 작업,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 작품세계는 놀이의 산물이다.
내 갤러리의 작품은 내 힘으로 얻어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자연과의 합작이다. 하지만 내 소유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작품 중에는 늦가을부터 준비하여 늦가을로 끝이 나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2월에 시작하여 유월에 끝나는 단기성 작품도 있다. 가장 짧게 걸리는 작품은 4월에 시작하여 유월에 끝나는 작품이다. 내 작품에서는 눈으로만 감상하는 작품이 아니다. 맛과 향기까지 있는 이 작품은 오직 내 갤러리 안에서만 오감으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가뭄이 계속되는 이 뜨거운 날씨에 오늘의 갤러리에는 어떤 미각에 어떤 향기를 보태어 작품을 표현할 것인가. 오늘 작업은 세밀한 작업이 아니라서 20호 붓을 들고 하늘과 땅을 보며 머릿속 물감을 팔레트에 섞어본다.
내일은 주말, 쉼표를 꺼내 들고 만지작거리는 오늘 밤이 참 좋다.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신약을 먹어보렴
김 순 길
싱그러운 6월, 연둣빛 나뭇잎이 검푸른 빛으로 생기가 더욱 돋는다. 아침에 눈을 뜨자 곧장 정원으로 향한다. 어제까지 꽃망울로 알알이 맺혀있던 수국 꽃봉오리가 밤새 이슬을 머금고 얼마나 속살을 내미는지 보고 싶다. 이 꽃들은 나와 함께 이사하여 10여 년을 보냈다. 그간 햇빛, 수분, 자양분이 여의치 못한 험지에서 철 따라 예쁜 꽃이 펴줘 감사하다. 올해에는 예년보다 풍성하게 300송이 정도의 꽃봉오리가 맺혔다. 보는 사람마다 아름다움에 취한다. 꽃과 함께 아침을 여는 하루는 마음속 깊은 미소를 머금고 싱그럽고 상쾌하다. 각기 방울진 꽃봉오리에서 무슨 색의 꽃이 피려나? 호기심과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며칠이 지났다. 드디어 엷은 꽃잎으로 덥혔던 봉우리는 수줍은 듯 속살을 살며시 내민다. 빨간빛, 연보랏빛, 진보랏빛, 옅은 하늘빛, 하얀빛 각양각색으로 저마다의 얼굴을 내밀고 해맑게 웃는다. 향기는 그리 짙지 않아도 소담스럽고 풍성함이 마치 종갓집 맏며느리 상이라고나 할까? 한번 꽃이 피면 꽤 오랫동안 볼 수 있어 좋다. 6월에 피기 시작하여 몇 달을 보고 즐긴다.
꽃들의 싱싱함도 욕심처럼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한다. 우리 인간들도 젊음과 건강을 마음처럼 오랫동안 유지하기 어렵다.
아들은 그리 건강하지 못한 편이다. 그래서 건강 유지를 위해 많은 영양제에 의존한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결과가 미약하게 보이는데도 약들에 의존하는 게 안타깝다. 나는 아들에게 효험 있는 신약들을 권한다.
“아들아! 세상에는 몸에 좋은 영양제도 많지만,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팔지도 않는 효험이 큰 신약은 바로 네 마음속에 있단다”.
첫째, 웃으면 나오는 ‘엔돌핀’이다.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특효약이다. 웃으면 만복이 깃든다고 한다.
둘째, 감사하면 나오는 ‘세로토닌’은 우울증을 해소해준다.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고 한다. 살아가는데 행복하냐? 불행하냐? 는 감사함에 좌우된다.
셋째, 운동하면 나오는 ‘멜라토닌’은 불면을 없애주어 꿀잠을 자게 한다.
넷째, 사랑하면 나오는 ‘도파민’은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된다. 살아가면서 서로의 결점을 보듬어 주고 아픔을 어루만지며 살아라. 사랑하는 사람의 종이 되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다섯째, 감동하면 나오는 ‘다이돌핀’은 만병통치약이다. 이 세상에서 어느 무엇보다 탁월한 특효약이다.
바로 네 마음속에 있는 신약을 먹어보지 않으렴.
웃고 감사하면서 운동하고 사랑하고 서로 감동을 주고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보자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몸이 따르지 않을까? 성격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건강을 좌우한다. 오늘의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고 진액을 먹고 오래오래 건강한 삶을 살아보렴.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수필부문 신인상(2012), 수필집 향원의 열매, kimsk3527@hanmail.net
지구 온난화에 대한 생각
김 기 태
지구가 변하고 있다. 기온이 올라가니 지구의 남극과 북극에서 얼음이 녹아 수천 년 보이지 않던 땅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빙산이 녹으니 이상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다 수위가 올라가고 수온이 올라가면서 기상이변이 생긴다. 하루 600mm 이상 집중폭우가 내리는 곳도 많이 생기고, 승용차와 집이 넘어갈 정도의 강풍도 불고 있다. 인도에서는 6월인데 기온이 50도를 넘기는 곳도 생겼다. 지구의 생태계가 동식물이 잘 적응하며 살아왔는데, 지구온난화로 이제는 편안한 삶이 힘들게 될 것 같다.
한반도에도 기온이 올라가 갈수록 더워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전조증상으로 소나무에 재선충이 돌기 시작하였다. 소나무에 발생하는 재선충은 아직까지 백약이 무효다. 그동안 재선충이 발생하면 반경 2km 내에서는 소나무를 벌목하여 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소각하거나 파쇄해서 처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문제는 재선충이 발생한 지역이 방제를 통해 병균을 박멸하여 원상태로 복원된 곳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방제의 주역은 국가 기관인 산림청 소관이지만 지금까지 재선충 발생 지역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방제 시기도 국민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인가 보다. 대안이 있다면 재선충이 발생한 지역의 소나무를 벌채하고 그곳에 다른 수종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 정책도 예산 범위 안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홍보도 부족하여 국민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온난화 영향으로 해발 700m 이하에서는 소나무가 자랄 수 없다고 한다. 해발 700m는 강원도 태백시청이 앉은 자리다. 우리가 말하는 청정지역 임계점이기도 하다. 충청도에는 이보다 높은 산도 드물다. 일설로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침엽수가 모두 포함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활엽수를 심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지금 산림청에서 추천하는 대체 수종 중에는 편백나무, 측백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베트남 왕릉에 가보면 주변에 소나무가 있다. 그렇다면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700m 이하에서의 소나무가 자라랄 수 없다는 말에도 의문이 간다. 또한 편백나무나 측백나무는 아열대성 기후에 문제가 없는지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 산림을 총괄하는 산림청은 대전 종합청사 안에 있다. 그리고 지방 산림청이 원주, 공주, 영주에 있고, 그 산하에 국유림 관리소가 있다. 곳에서는 국유림 관리와 재선충을 담당하고 있고, 사유림은 도청 산림과와 군청 산림과에서 사유지 임야를 관리하고 있는데 사유지 관리에 대한 홍보도 너무 부족하다.
논과 밭처럼 농업경영체 제도가 있는데 산주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다. 전답의 직불금처럼 직불금 제도도 있었는데 아는 이가 별로 없다.
또한 기후변화에 대한 국가 차원의 연구도 미흡한 것 같다. 기후 변화에 어떤 수종이 영향을 받는지도 연구해야 할 일이고 우리 토양에 적합한 수종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산에 같은 수종만 심어도 생태계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호주에는 레드트리라는 나무가 있다. 붉은 나무란 뜻인데 성장 속도가 빠르면서 재질이 단단하여 재목으로 적합하다고 한다. 소나무와 비교해서 5배의 성장 속도를 보여주고 있어 25년이 지나면 벌목 허가가 나오는데 세 그루만 베도 집 한 채를 거뜬히 지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경제림인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산에 푸르름으로 뒤덮여 있어 꽃이 없다. 나비와 벌이 먹을 꿀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와 새삼스럽게 아카시아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다음은 유실수다. 상수리 도토리가 밤나무 재배하는 것보다 편하고 수익성도 좋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국가 기관에서 연구하여 국민에게 보급해야 하는데 아직 들은 바가 없다.
우리 국민은 기후 변화 대처에 발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귤나무 재배가 서산까지 올라왔다. 사과나무도 철원까지 올라갔다. 제주도에서 재배하뎐 작물들이 육지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연구소도 없는 국민이 개인적 사비를 들여가며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일군 쾌거다.
지금 재선충 지역에서 벌목해서 반출하는 나무 가격은 일반지역 나무 벌목해서 판매하는 나무 가격의 절반 수준이다. 재선충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죄 없는 재선충 지역 산주가 아닐까 생각된다.
벌목하고 임야를 가진 사람이 농업경영체로 등록하려면 상수리나무는 300평, 편백나무는 3,500평 등 수종에 따라 면적이 다른데 이런 점도 읍면 사무소에서 잘 인지하여 농업경영체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국민에게 홍보해서 산주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좋겠다. 산림청이든 산림과든 민원인으로 찾아가 물어보면 속 시원하게 설명을 들을 수가 없다, 담당업무가 아니라는 말만 돌아온다.
산림정책은 백 년을 기다려야 하는 사업이다. 일본은 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베면 일본 전체 인구가 2년은 살 수 있는 자원이라고 한다. 그런 사명감으로 산림을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건설부 장관님에게 고함
장관님!
분당 정자동에 지은 아파트가 30년이 지나 노후화되었다고 재개발 지역 1순위로 책정했다고요?
방송에 나와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데 그렇다면 국민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태어나 평생 집 하나 마련하는데 목숨을 걸었지만 30년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헐고 다시 지어야 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젊은이는 지구를 밟고 그 위에 올라서서 꿈을 펼치는데 혼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는데 그 젊은이가 집 하나 구하는 것에만 정열을 다 소비한다면 국가의 장래도 없고, 젊은이의 미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관님은 콘크리트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우리나라 구조물의 수명이 일본 강점기에 타설한 콘크리트보다 강도가 강하지 않은 이유는 아십니까?
성수대교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했는데 그 이유는 알고 계십니까?
장관님은 정확히 아셔야 처방도 나오고 대책이 나오는데 아직도 손을 놓고 가갸 거겨하며 재개발이 무슨 큰 정책이나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화가 나려고 합니다.
콘크리트의 강도를 좌우하는 것은 배합비가 좌우하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모래와 자갈입니다.
시멘트와 철근은 옛날보다 발전된 상태이고 또 강도를 증가시키는 혼화재도 개발되어 사용하고 있는 중이고요.
시방서에 보면 모래와 자갈은 씻은 모래, 씻은 자갈이 원칙입니다. 강모래 강자갈이지요.
현장에서 채취하여 체가름해서 사용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모래 자갈이 강에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필요한 모래양은 자급자족이 안 되는 실정입니다.
특히 모래는 인공적으로 만들 수가 없잖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건설에 필요한 모래의 양과 국가에서 허가해 준 채취 양과 비교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사용량의 절반밖에 구할 수가 없어 부족한 양은 바닷모래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조립률도 안 맞고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 씻은 모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바닷모래는 염분이 있어 철근에 나쁜 영향을 주는데 바다에서 채취하여 레미콘 공장으로 가는 과정에서 바닷모래를 씻는 시설이 전국에 하나도 없습니다.
덤프 차량에 싣고 위에서 물 한번 뿌리는 것으로 관리하니 철근콘크리트 수명이 오래 갈 수가 없겠지요.
자갈은 자연의 모암(母岩) 상태에서는 강도가 나가겠지만 이를 발파해서 쪼개고 다시 크랏샤에 넣어 골재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충격으로 인한 크랙이 발생한 자갈로 만들어져 강도를 기대할 수가 없지요.
현재 믹서트럭에 담아 공급하는 콘크리트가 그 수준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부분에 소홀히 하면서 30년에 노후 되었다고 재개발한다고요?
장관님은 직무유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요?
이 문제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사고 후 법의 판단 결과는 잘못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담당자에게만 작은 책임을 물었을 뿐입니다.
강교는 많은 부재가 볼트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교량을 만들 당시 차량의 통과 하중보다, 날이 갈수록 통과 하중이 증가했습니다. 그러면 교량도 이에 맞춰 보강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지요. 볼트가 하나 파손되면 바로 교체하여 주면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이런 구조물이 영구구조물인 줄 알고 관리를 안 했지요.
성수대교가 무너졌지만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를 교훈 삼아 다시는 동일한 사고를 발생시키지 않아야 하는데 건교부는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안전 통로 하나 만들어 놓고 손을 놓은 상태 아닙니까?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아름다운 교량으로 미국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지만, 교량에 보수 팀 120명이 상주하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점검하고 보수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리의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현수교의 효시인 맨해튼에서 부르클린으로 이어지는 부르클린교는 1895년에 준공되었으니 지금 몇 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대원군 시절이 아닙니까?
맨해튼의 지하철도 100년이 넘었고요.
개인 빌딩도 100년 전후가 되었습니다.
당시 여건으로 차가 없었으니 주차장이 없는 건물이지만 불편하더라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배관도 문제가 있을 텐데, 불편을 감수하며 높은 월세를 주면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 같으면 벌써 철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울 지하철 구간 중 서울역과 청량리역 사이가. 1974년 8월 15일 개통되었으니 50년이 되었습니다.
수명이 다 됐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수고 다시 만들어야 하나요?
아니면 수명 연장을 위해서 조사하고 보수하고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나요?
매일 조금씩이라도 보강 작업은 하고 있나요?
최근 개통한 고속철도는 교각으로 많이 축조되었는데 30년 후 다시 만들어야 하나요?
아마 장관님께서 그때 자리에 없으시겠지만, 건교부는 그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맨해튼에 고층 건물을 보면 외벽에 마감재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지만 검소하게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로 보면 아파트 가격은 현 시세의 1/10로 다운시켜야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젊은이의 결혼율도 높일 수 있고 자녀출생도 증가할 것이고 노후대책도 한 방에 해결이 되지 않겠습니까?
집값은 젊은이의 힘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분이 건교부 장관입니다.
재개발에 신바람 나서 발표할 때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기본에 충실하셔야 합니다.
콘크리트 수명이 100년이라 하지만 미국에서는 매일매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 마을 촌장, 수필집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blog.daum.net/ondong
ITQ 자격시험 1
전 월 득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일흔 살, 늦깎이로 대전 시립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위가 선물해준 노트북과 프린터기까지 있으니 더듬더듬하면서라도 열심히 연습만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는 일주일에 한 시간씩 정규수업이 있어 기초부터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내가 창작한 시와 수필을 독수리 타법으로 워드를 쳐서 교수님께 메일을 전송하는 것 정도는 손수 할 수 있었다. 때로는 간단한 시를 쓰고 그림삽입도 해보며 누구보다 자신감도 있었다. 고등학교로 이어지면서 컴퓨터 수업이 일주일에 두 시간, 점점 수준은 높아지고 이론 시간도 길어졌다. 자주 바뀌는 강사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니, 진도가 꾸준히 이어지지 않아서 나 같은 컴맹에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또한 어느 때부터, 학교 컴퓨터들을 업그레이드하여 내컴퓨터와 버전이 달라지면서 집에 와 연습하지 못하게 되니 자연히 컴퓨터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학 강의 과제로 원고를 제출할 때만 사용하고 뒷전에 미뤄놓고 있었다.
3학년이 되면서 새로 정규직 컴퓨터 선생님으로 바뀌고 본격적으로 컴퓨터에 열정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국가고시 ITQ 시험이 있으니 응시할 사람들은 도전해보라는 컴퓨터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성적과는 무관하니, 꼭 해야 하는 필수 사항은 아니라고 하였다. ITQ 자격시험이 의무는 아니지만 3학년생 대부분이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문제지를 받아 연습에 들어갔다. 나도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 중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으로 시작하였다. 시험 문제 중 200점을 받아야 합격이라고 하였다. 표 만들기, 그래프 그리기, 도형 그리기, 수식 등 정해진 60분 안에 문제를 완성하고 전송해야 한다고 했다. 각 과목 수업을 마치면 쉬는 시간이 5분씩이고 식사 후 10여 분 남짓한 시간밖에 없으니 제아무리 연습한다 해도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두어 달의 기간을 두고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지만 부족한 상태로 시험장에 갈 수밖에 없었다. 수십 명 중에 나와 짝꿍 친구 두 사람만 첫 번째로 응시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나중으로 미루고, 또는 쉽지 않은 도전이라며 망설이는 듯하였다, 친구는 나보다 훨씬 젊고 컴퓨터 동아리에서도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남보다 앞서가기에 나도 일찍 따라나선 것이다. 등록비는 21,000원이었다.
10월이 되어 나는 우송정보대학교 고사장으로 갔다.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초, 중, 고, 대학생, 나처럼 백발들까지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다. 컴퓨터 선생님이 주신 수험표 한 장을 달랑 들고, 친구와 나는 다른 고사실로 한 시간 간격을 두고 들어갔다. 감독관들의 삼엄한 주의를 받으며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직 컴퓨터에 자신이 없는 나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바들바들 흔들리며 자판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 자판이 학교에서 연습하던 모델과 전혀 다르고 활자도 생소하게 보였다. 시험지도 익숙하지 않은 흑백 프린트라서 눈에 익숙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앉은 젊은 대학생들은 다닥거리며 정신없이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표를 만들어 문자와 숫자를 입력하였다. 노랑 색칠을 하고 캡션을 넣고 테두리를 마치고 그래프를 만들었는데,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학교나 집에서 혼자 차분히 할 때는 순조롭게 잘 이어지던 것이 상하 위치가 바뀌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조용히 선생님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 없으니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때마침 10분이 지났는지 전송하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이변이 없었다면 정상적으로 전송하는 타임도 잘 맞췄을 것인데 가슴은 콩닥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멘탈이 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생각도 못 하고 애먼 마우스만 붙잡고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연습은 부족하면서 남보다 한발 앞선 경험을 해보려던 것이 화근이었다. 1종 수동 운전면허 기능시험장에서 낙마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나와야 했다. 기계에 둔감한 노년의 어설픈 욕심이란 걸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다른 층에서 한 시간 앞서 똑같은 시험을 마친 남자 친구는 무난히 잘 끝냈다며 안도하는 눈치였다. 워낙 꼼꼼하고 침착한 성격이니 잘 할 수 있었을 거라 믿었었다. 내심 부러워하는 나에게 다음 기회가 있으니 차근차근 꾸준히 좀 더 해보자는 말에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무척 당혹스러웠던 혹독한 하루였다.
ITQ 자격시험 2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다. 첫 번째 시험은 충분한 실습을 하지 않은 채 마음만 앞세워 실패했다. 이번에는 같은 문제를 좀 더 연습했으니, 마음 편하게 혼자 학교로 갔다. 여덟 시 삼십 분이 되자 컴퓨터 선생님이 오셨고, 응시한 다른 한 명이 따라나섰다. 고사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그 친구 역시 시험이 어려울 거라며 걱정을 했다. 나는 두 번째 응시하면서도 시험이 만만치 않음을 예기하였다. 컴퓨터는 예민하고 너무 스마트한 기계이다 보니 아무나 선뜻 시험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분명한 것 같았다. 그 친구는 이번에 실패하면 더 이상 도전은 없다며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나이로 보면 나보다 훨씬 젊은데도 자신 없는 말을 하니, 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해보리라는 생각으로 지난번과 같은 장소로 찾아갔다. 이번에도 어디서 그렇게 몰려오는지, 수험번호 한 장씩을 손에 들고 입실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뛰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동안 한 치 앞도 모르고 세상을 살아온 우물 안 개구리가 밖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 계기는 확실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난번과 별로 다르지 않은 절차를 마치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시험의 압박감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진동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시험 문제를 받으니 유형은 비슷하지만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콤마가 붙은 네 자리 숫자가 첨부되어, 한참을 들여다봐야 콤마인지 점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생각에 조바심하며, 또드락 또드락 손가락을 움직여 4번 도형까지 만들었다. 다음은 그림을 찾아 입력하면 될 일이었다. 평소처럼 입력 버튼을 누르고 그림을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순간 당황하여 정신없이 도구상자를 여기저기 누르며 헤매는데, 시험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간, 화면이 하얗게 정지되는 안타까운 일이 또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좌절하기는 더 더구나 싫은 일이었다.
밖에는 남친이 해맑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부끄럽고 미안해서 그에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번엔 성공하라고 틈틈이 가르쳐준 보람도 없이 기대를 저버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초래한 나 자신에게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이란 기회가 있다는 희망으로 마음을 추스르며 고사장을 벗어났다. 휴일 늦잠에 취해있을 시간에 나를 배려해준 친구에게 보답하고, 내 마음도 다잡을 겸 집 근처에 있는 음식 거리로 가자고 하였다. 좋은 날이면, 지인들과 만나 즐기는 중식당이 있는 거리였었다. ‘예술의 전당’ 주변이라 음악회에 갈 때마다 저녁 식사를 하던 곳에서 여유를 누려보고 싶었다. 친구에게는 해물 잡탕밥을 권하고 나는 부드러운 유산슬을 먹기로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성격이 꼼꼼하고 검소한 친구는 다시 메뉴판을 챙겨보더니, 밥값이 좀 비싸다고 생각했는지 군만두와 얼큰한 짬뽕을 먹겠다며 다시 주문하는 것이었다. 입맛을 고려한 것인지도 모르니, 그냥 좋아하는 것을 나눠 먹기로 하였다. 어떤 경우일지라도, 나는 나 자신에게도 ‘기브 앤 테이크’를 확실하게 하는 성향이다. 비록 ITQ 시험은 실패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학교생활과 문학기행, 수필 쓰기, 홈패션 주문받은 일 등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고 감당해냈으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쯤은 먹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여 나누어 먹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모두에게 미안한 하루였다.
유구 섬유전시관 문학기행
부드러운 공기가 밀려와 훌쩍 떠나기 싫어 미적거리는 겨울바람과 씨름하는 계절이다. 따라온 봄비는 웅크린 하늘을 뚫고 내려와 대지를 적신다. 오늘은 한밭문학회에서 공주 유구에 있는 섬유전시관을 방문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꾸물거리는 아침이지만, 열 명의 문우님이 도착하자 두 대의 차량으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약 40분가량 소요되는 거리를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정감록에 나와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인 유구는 해방 전, 섬유산업이 활발했던 북한 지방의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에 거주하던 직조업자들이 6, 25전쟁 중 내려와 살면서 가정에 목재 기구를 설치하고 생산하기 시작한 것을 토대로 1950〜70년대까지 인견 직물을 주로 생산해왔다고 하였다. 80년 이후로는 자카드 직물의 다양화로 인테리어, 직물 및 의류의 한복감 등으로 전국적인 호황을 이룬 때도 있었다고 했다. 전시관에 있는 기계들은 투박한 옛 목재 기구에 몇 가닥의 형식적인 실을 걸고 아날로그 시대를 역력히 대변하고 있었다. 전시관 한쪽에는 추억어린 어머니의 베틀이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내 어릴 적 좁은 안방에 거추장스럽게 놓여있던 베틀 위에 날실을 감는 도투마리가 얹혀 있고, 헝크러진 실 가닥이 형식을 갖추고 바디에 걸려있었다. 한 짝 신이 매달린 휘어 만든 쇠꼬리, 허리에 차는 말 키, 배 북집에 실꾸리를 넣고 좌우로 번갈아 받으며 바디를 철석철석 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연하였다. 한 올 한 올 차일처럼 차오르며 직조되던 어머니의 무명, 삼베 짜던 모습을 발견한 듯, 반가운 마음으로 누가 묻기도 전에 이것저것 가리키며 도구의 명칭을 낱낱이 설명하였다. 동 연배 회원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직접 보았던 기억의 확신으로 전시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해설사가 따로 없다며 류 선생님도 관심 있게 둘러보며 저쪽을 보라는 손짓을 하였다. 쳐다보니 또 하나의 추억 어린 색동 옷감이 작업 과정을 중단한 채로 기계에 걸려있었다. 가동만 하면 금방이라도 돌 돌 감기며 색동원단이 생산될 듯하였다. 내가 열 살 무렵까지 해마다 명절이오면 어머니와 큰 언니가 손바느질로 색동저고리를 만들어 입혀주던 옷감이었다. 앞섶을 여며주며 갸웃갸웃하던 때때옷의 추억이 울컥 생각나서 가지런히 장식된 색동베개를 끌어안고 잠시 그리움을 달래보았다. 옆에는 목화송이에서 실을 뽑던 물레도 있었다. 춥고 긴긴 겨울밤, 풍차같이 얼기설기한 원형의 물레를 오른손으로 돌리고 왼손으로 무명실을 뽑아내던 기구였다. 지루하고 힘들 때쯤, 어머니는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 후루룩 마시고 숨 고르기를 한 후, 빛바랜 누런 책을 펼쳐 춘향전을 조곤조곤 소리 내어 읽어주곤 하였다. 섬세하고 소박했던 어머니는 70년대 초반까지 누에도 기르고 누에고치를 삶아 명주실을 뽑았었다, 팔팔 끓는 물에 하얗고 단단한 누에고치를 동동 띄우고 가느다란 실을 뽑아내면 마지막엔 쪼글쪼글한 번데기만 남았다.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오물오물 받아먹던 고소한 번데기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중국산에 밀려 찾을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시관을 나와 벽화 거리로 갔다. 아담하고 낮은 건물 벽에 커다랗게 그려 넣은 무명 한복을 입은 어머니 벽화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거리에는 커다란 목재 직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때마침 봄비가 보슬보슬 소리 없이 내려서 재빨리 기념사진을 찍고 시장통으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할 곳을 찾으러 가는 중에 생면부지 한 분을 만나 맛집을 물었다. 60대 중반쯤 되신 남자분이 얼마나 자상하게 여기저기 가르쳐주는지, 충청도 따뜻한 인심의 DNA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너무 친절하여 감사하다며 거기에 부응하고 싶은 류 선생님은 그냥 돌아서지 않고 그분이 시장 안에서 신발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기꺼이 가보자는 것이었다. 이 말에 우리 문우님 모두가 동의했다. 그는 읍내 시장 한 곳에서 40여 년이나 뿌리내린 토박이 신발 가게 사장님이었다. 나는 딱히 필요한 게 없었는데 병남 시인님이 고무신을 사겠다고 신어 보더니, 꼭 사려던 참이었다며 흰색과 검정색 두 켤레를 고르고 있었다. 고무신 바닥을 보니 말표 태화 고무, 어디선가 익숙한 단어라는 생각이 번득 스쳤다. 그 옛날 아버지가 신임하던 상표, 남녀 친구들의 전유물이었던 말표 검정 고무신, 자운영 꽃밭에 앉은 벌을 잡고 흐르는 냇물에 들어가 송사리도 잡아서 가두어놓고 놀았던 바로 그 신발이었다. 나는 여자라고 어머니가 꽃신만 사줬기에 검정 고무신은 한 번도 신어 본 추억이 없었다, 지금은 추억으로 일부러 신는 사람들이 있는 시대이니, 나도 한 켤레 고르며 필요하신 다른 분들에게도 사드리고 싶었다. 가격도 육천 원으로 저렴하여 부담 없이 권해보았지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총무 창운 님과 류 선생님만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세 켤레를 사 들고 함께 나오면서 ‘검정 고무신을 언제 신어 볼까?’ 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뜬금없는 숙제 거리 하나를 얻은 기분으로 안면에 미소가 어리며 추억하나 만들었다는 뿌듯함을 느껴 보았다.
다음엔 유구 인견 시생 직물 공판장으로 갔다. 넓은 판매장에 남녀 의류, 침구류, 모자, 머플러 등 일용품이 빼곡히 진열된 곳에서 아이 쇼핑하고 좋아하는 모자를 골라봤지만, 맘에 드는 모자를 찾지 못하고 식당으로 갔다.
찾아온 손님들 차량으로 에워 쌓인 메기매운탕 집, 이색적인 큰 화덕의 솥뚜껑에서 메기와 야채 등 온갖 양념이 어우러져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여기에 수제비를 떼어 넣으니 군침이 돌았다. 여행할 때는 그 지역의 특산물인 토종음식으로 출출해진 식욕을 돋우며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쏠쏠한 맛이라 할 수 있다. 병남 시인님의 통 큰 계산으로 맛있게 먹는 즐거움을 더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수백 평의 밭에 식재된 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배꽃이 피어 나비처럼 휘날리는 날이 오면 또 이곳을 찾아와야겠다.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부문 신인상, «대전문학» 시부문 신인상(2024), jwd5038@naver.com.
나의 장모님
노 복 래
우리 집에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
처남과 처남댁이 모시고 사는 장모님께서 모처럼 오셨다.
처남 내외가 해외여행을 가기 때문에 집에 혼자 계시면 안전과 건강이 걱정되니 우리 집에서 모시기로 하고 여행을 다녀오게 하였다.
장모님의 연세는 올해로 94세이시다.
그동안 몇 차례 우리 집에 오신 적은 있지만, 하루 이틀 묵으면 곧바로 가시곤 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장모님은 나를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장모님을 우리 집에서 모시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첫째 날, 새로운 음식 장만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장모님께서도 음식을 맛있게 드시고 기뻐하시어 온 가족이 웃으며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그 이튿날 문제가 생겼다. 장모님께서 배탈이 나신 것이다.
내가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지만, 마침 그날이 문인들과 문학기행을 가는 날이라 내가 빠질 수 없어 아내에게 잘 보살피라고 부탁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내도 고맙게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동의하였다.
아내의 정성으로 다행스럽게도 장모님은 배탈이 그치었다.
만약에 큰 탈이 나서 몸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의 책임이므로 많이 긴장했었다.
평소에는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는데, 장모님과 보내는 하루는 길게 느껴졌다.
아침 식사 후에는 장모님의 손놀림과 기억력 증진을 위해 민화투를 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주변 산책 운동을 시켜드렸다.
장모님은 노령의 연세지만 여전히 눈도 밝고, 귀도 밝고, 치아도 좋아 음식을 잘 드시고 소화 기능도 좋으셔서 정말로 감사하다.
우리 부부는 늘 장모님이 백세 이상 장수하시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번에 장모님과 같이 지내면서 장수의 비결을 배웠다.
장모님은 TV를 보면서 늘 웃으시고 손뼉을 치며 즐기신다. 그 모습이 너무 좋다.
바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는 게 장수 비결이라 생각한다.
나의 장모님은 30대 중반에 장인어른과 사별하시어 홀로 되었으나, 옥천군 청산면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4남매를 훌륭하게 키우신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시다.
“장인어른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장모님은 장인어른의 몫까지 더 오래 사셔야 한다.”고 평소에 자주 말씀드렸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그런지 100세 이상 장수하실 것 같아 기쁘고 흐뭇한 마음이다.
아내가 농담 삼아서 “아버지가 젊어서 돌아가셔서 어머니 사후에 못 알아보시면 어떡할 거냐?”고 여쭈어보니까, 대답이 “그건 아니다. 식구이기 때문에 분명히 알아볼 것이다. 죽은 후에라도 네 아버지를 꼭 만날 것이다.”라는 희망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희망과 긍정의 생각에 박수를 보내며 감사드린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장모님은 치매가 있으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억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내한테 나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누구냐?”고 물으시고 “여기가 어디냐?
어제 같이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 언제 오느냐”고 묻곤 하신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느냐 싶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대화를 하신다. 다행인 것은 아직 악성 치매는 아니시다.
고령화 시대에 치매는 큰 골칫거리라고 생각한다.
치매 예방을 위해 젊어서부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번에 장모님과 같이 지내면서 인생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들이 늙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나이 들어서 자식들한테 폐가 되지 않도록 치매 예방, 건강관리 등 많은 노력을 하여야겠다.
앞으로 가끔씩 장모님과 시간을 같이 보내며, 산책도 하고 민화투도 치며 벗이 되어 드리고 싶다.
일주일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신 아내에게 고생했다고 위로의 말을 전하며, 직장생활을 하면서 장모님을 잘 모시고 있는 처남과 처남댁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지구가 아프다
지난 3월에는 미국에서, 4월에는 중국에서 토네이도 현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토네이도(tornado)는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차가운 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만나 서로 대립하고 부딪쳐 형성되는 지구촌의 큰 재앙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데다가 따뜻한 바람이 계절마다 불규칙적으로 불어 토네이도가 잘 발생하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지난 5월 5일에는 제주도 한라산에 900mm의 기록적인 물 폭탄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 같은 강수량은 1년 동안에 내리는 총 강수량과 비슷한 엄청난 양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한라산이 아닌 서울 등 대도시에 그런 물 폭탄이 쏟아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실감할 수 없는 대재앙이라 느낄 수 있지만 앞으로 그런 사태가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지구촌의 재앙 원인은 바로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지구 온난화(warning) 시대를 지나, 지구가 끓고 있는 보오링(Boiling) 시대라고 한다. 기후 위기는 인류 문명의 풍속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 자체를 위협할 수 있으므로 지구 온난화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인류가 처한 가장 당면한 과제라 할 수 있다.
국제기구인 ‘기후 변화와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18년 인천에서 개막한 제48차 총회에서 ‘지구 온난화 1.5도 특별 보고서’가 채택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정책적으로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범 지구촌 정부 차원에서 지구 온난화 해결 방안을 강구하고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있지만, 나는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일상에서도 지구 온난화의 해결 방법을 찾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너지 자원절약, 친환경 상품 이용, 나무 심고 가꾸기, 산불 방지 등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방법들이 많이 있다.
지구 온난화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렸을 때 조부모님과 부모님께서 근검절약하시던 생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며 선인들께 감사드린다. 물질 풍요시대를 사는 지금의 생활을 보시면 아마도 꾸중을 하실 것만 같다.
지구가 아프다고 말한다. 전기 절약, 물 절약, 일회용품 사용 자제, 대중교통 이용 등 일상에서 지구촌을 지키고 보존해야겠다는 의지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이다. 나부터 작은 실천을 해 나갈 때, 우리 인류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시작한 공부
동방의 예의지국이라 일컬어오는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좋은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 설날에는 온 가족과 친지들이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여 차례를 지내고, 자녀들은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서로 덕담을 나누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좋은 미풍양속이 있다. 고향을 떠나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사랑을 나누며 보내는 좋은 풍습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지금은 설 명절이 다가오면 ‘아이들에게 무슨 덕담을 말해 주어야 하나?’를 생각하게 한다.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라’는 일상적인 말보다는 각 개인에게 알맞은 말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 맞이하는 2024년 갑진년 청룡의 해는 우리 가문의 장손인 官輝가 중학교 3학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 대학을 가야 할 것인지, 어느 전공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목표를 정하고 그에 따라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 하는 중요한 해이다.
중1, 2학년 때에는 반장을 하면서도 공부도 잘하여 1.2등을 다투는 모범생으로 온 가족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자랑스런 손자이다.
큰아들과 큰애기가 손자교육에 솔선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소규모 건설 현장에서 현장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아들은 전공 분야 자격증 취득 공부를 하고 있고, 가정 살림을 하고 있는 큰애기는 노후의 안정된 생활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꿈을 가지고 성실하게 잘 살고 있는 너희들이 자랑스럽고 고맙다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칭찬해주니, 모처럼 아버지한테 칭찬을 받은 큰아들 내외가 너무 좋아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칭찬은 위력이 있다. 지난 세월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들 삼 형제를 키우면서 내 생각과 뜻대로 따라오도록 요구하면서도 칭찬에 인색했던 것이 제일 후회가 된다.
젊은 날에는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앞으로는 사소한 일에도 좋은 점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칭찬을 많이 해주며 살아야겠다.
일 년 농사는 정월에 계획을 세우고, 춘삼월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을 매고 잘 가꾸어야 가을에 알곡을 추수할 수 있듯이,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니 그때를 놓치지 않도록 계획을 미리 세우고 일을 해 나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매사에 감사하며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덕담을 건넸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미래의 꿈을 위해 성실하게 살고 있는데, 할아버지인 나도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끝에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설날 아침에 식구들 앞에서 약속하고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EBS 방송에서 아침 시간에 생활 기초영어를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가르치는데, 따라가기는 조금 어렵지만,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다. 손자를 생각하며 공부하는 맛도 새롭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을 잘 만나서 그 덕분에 외국어에 관심이 있었는데 일상에서 활용할 수 없으니 마음뿐이었지만, 나이가 들면 치매 예방을 위해서도 외국어 공부가 좋다고 하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청룡의 해에 솟아오르는 용의 푸른 기운을 받아 더욱 알차고 멋진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