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수필】
목격자
― ‘완전 범죄’가 불가능한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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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신문警友新聞 【윤승원 수필】 2024.12.23.
【윤승원 수필】
목격자
― ‘완전 범죄’가 불가능한 세상 ―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경우회 홍보지도위원
유머 동호회에서 A 회원이 문제를 냈다.
“이 세상에 완전 범죄가 가능할까?”
TV 수사반장을 열심히 보았다는 B 회원이 말했다.
“결국은 잡히더라. 경찰의 과학수사 능력도 뛰어나서 완전 범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자 문제를 낸 A 회원이 말했다.
“완전 범죄란? 목욕탕에서 쉬~하기!”
▲ 필자가 20대 청년시절에 참여했던 낙서 유머 동호회 - 1970년대 『주간한국』 지면에 실렸던 유머를 모아 책을 펴냈다. <완전범죄>제목의 유머는 이 책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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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동호인끼리 나눈 개그였지만 동의하기 어려웠다. 정직하게 말하건대 나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한 바도 없거니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직 경찰관 시절, 관내 미제사건 현황을 관심 있게 살펴봤다. 형사들은 미제사건 목록을 수첩에 지니고 다닌다. 경찰서장도 새로 부임하면 가장 먼저 관내 미제사건부터 챙겨본다.
일선 형사들은 미제사건을 ‘완전 범죄’로 보지 않는다. 언젠가는 잡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불태운다. 티끌만한 단서라도 끈질기게 추적한다. 단서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은 ‘목격자’다.
집 앞 골목에서 유치원생 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자 돌봄 할아버지의 중요한 일과다.
꽝~.
바로 내 앞에서 깜짝 놀랄만한 사고가 벌어졌다. 골목에 주차된 흰색 승용차 옆구리를 검은색 승용차가 들이받았다. 피해 차량은 인근 커피전문점 주인의 승용차였다.
하지만 가해 차량은 그대로 달아났다. 가장 가까이에서 뺑소니 차량을 목격한 나는 순간적으로 소릴 질렀다.
“아니, 저럴 수가, 그냥 달아나다니.”
그때였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오토바이 배달 청년이 우뚝 서더니 달아나는 차량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놀라운 순발력이었다. 배달 청년은 부서진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
차량에 부착된 차주의 연락처를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러고는 배달 일이 바쁜 청년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코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똑똑히 지켜본 사람으로서 우선 차주에게 알렸다. 차주는 부서져 너덜거리는 범퍼를 발끝으로 툭툭 쳐보더니, 피씩 웃었다.
“많이도 부서졌네.”
그다지 놀라지 않는 차주의 느긋한 표정이 놀랍기만 했다. 차량 앞부분이 너덜거릴 정도로 왕창 부서졌는데도 웃는 표정이라니.
그는 내게 대뜸 “목격자이시냐?”고 물었다. 목격자? 뜻밖에 ‘목격자’라는 말을 들으니, 그 어감부터 왠지 거슬렸다. 까닭 모를 불쾌감이었다.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에 개입해야 하는 ‘단서 제공자’.
그러잖아도 현장 목격자로서 자발적 신고 의무감이 발동하여 제보한 게 아닌가. 불의(不義)에 대한 당연한 시민의식이다. 차를 들이받는 장면과 그대로 달아나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설명해 주었다.
피해자는 내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뜻하지 않게 큰 피해를 봤음에도 가해자를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벙긋벙긋 웃었다. 피해자의 여유 있는 태도에 목격자인 나도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가 말했다.
“이미 차는 부서졌는데 속상해하면 뭐해요. 정해진 절차에 따르면 돼요. 보험회사에는 이미 연락했고요, 경찰에게도 신고했어요.”
나이는 20대로 앳돼 보이는 청년이지만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가 침착하면서도 노련해 보였다.
그와 대화한 지 5분도 채 안 됐는데 경찰 순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나타났다.
두 경찰관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선생님이 목격자이시냐?”고 물었다. 목격자? 여기서도 또 ‘목격자’라는 말부터 나오는 것을 보고, ‘아, 이 세상 모든 것은 <목격자>로 통하는구나!’ 싶었다.
그렇다. 모든 사안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사람이 ‘목격자’다. 피해 차주가 경찰에게 신고 경위를 설명했다. 경찰관은 순찰차 트렁크 위에 피해 조서 용지를 꺼내 놓고 적기 시작했다.
▲ 경찰관의 현장 조사 - 차량 피해자가 신고한 지 채 5분도 안 돼 신속히 출동한 경찰관이 차량 피해 상태와 도주차량에 대한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일러스트= 윤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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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였다. 피해 차주가 스마트폰을 열어 보였다. 오토바이 배달 청년이 보내준 도주 차량의 사진이었다. 뺑소니 차량 번호판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순식간에 달아나는 차량 번호판을 어떻게 정확하게 포착했는지 감탄했다. 배달하는 일이 얼마나 바쁜 직업인가. 더구나 차량통행이 빈번한 도로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해 차주의 연락처를 찍어두었다가 가해 차량의 번호판을 스마트폰으로 전송해 주는 배달 청년의 치밀한 신고 정신. 출동한 경찰도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가해 차량을 번거롭게 수소문하거나 수배할 것도 없다. 손쉽게 확실한 증거를 입수한 경찰관은 ‘상황 끝!’이라면서 이내 사라졌다.
골목에서 유치원생 손자를 기다리면서 도주 차량 운전자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분명 고의는 아니었다. 순간적인 과실이었다. 문제는 남의 차를 파손했으면 차에서 잠시라도 내려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피해 차주에게 연락하고, 보상이든 수리 약속이든 현장에서 해결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한 겁쟁이 운전자의 미숙한 판단이 안타까웠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 보호 본능이 앞서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뒤탈이 크다. 비양심자로 낙인찍힌다. 사회적 비난으로 확산한다.
어쩌다 운수 나쁜 날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지만 떳떳하고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때 유치원생 손자를 태운 노란 승합차가 내 앞에 섰다.
▲ 유치원생 손자를 태운 노란 승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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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조금 전 골목에서 어떤 상황을 목격했는지, 알 길이 없는 손자가 가슴에 와락 안긴다. 손자에게 말했다.
“네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만큼 할아버지도 새롭고 유익한 공부를 했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다.
“어떤 공부인데요?”
손자 손을 잡고 집에 들어가면서 설명했다.
▲ 곳곳에 숨어 있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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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여기저기 숨어 있는 눈이 많다. 건물 CCTV, 차량 블랙박스, 개인 핸드폰에도 눈이 달려 있지. 옛날에는 그런 눈이 없었어.
어르신의 ‘큰기침 소리’가 가장 무서웠단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면 저만치에서 어르신의 큰기침 소리가 들려왔지.”
손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옛날이야기를 할아버지는 전설처럼 추억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눈들이 그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손자에게 말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목격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목격자보다 무서운 것이 무엇인 줄 아니? ‘양심의 거울’이지.
유머 동호인끼리 우스갯소리로 ‘목욕탕 소변보기’가 ‘완전 범죄’라고 했지.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그런 까닭이지.” <『한국경찰문학』제24호> ■
▲ 손자와 할아버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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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문학시대> 카페에서
올사모 정구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