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석거(木石居)의 뜻은 한그루의 나무처럼 하나의 바위처럼 자연에 묻혀 살겟다는 의미랍니다.
김상헌(金相憲, 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조선후기 척화의 상징이셨다.
좌의정을 지내셨으며,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를 지내고 효종의 묘정(廟廷)에 뱌향되었다.
청음 김상헌 선생은 병자호란 뒤 안동으로 낙향(落鄕)하였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가면, 안동김씨(安東金氏) 종택과 함께 청음 선생의 증조부 김번(金璠)이 살았던 청원루(淸遠樓)가 있다. ‘청원루’란 명칭은 북송 때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의 ‘향원익청(香遠益淸)’이란 말에서 따왔다는 설과 함께 ‘청(淸)나라를 멀리한다[遠]’란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청원루에서 머물던 청음 선생은 그곳 소산리에서 북쪽으로 8㎞쯤 떨어진 서미마을로 거처를 옮겼는데, 학가산(鶴駕山) 자락에 초가삼간을 지어 ‘목석거(木石居)’라는 당호를 내걸었다. 학가산 봉우리 아래로 큰 너럭바위가 드러나 있는데, 일명 ‘중대(中臺)’라고도 불린다. 바위 전면에 ‘木石居(목석거)’란 세 글자가 암각(巖刻)되어 있고, 이에 덧붙여서 청음 선생 칠세손(七世孫) 되는 김학순(金學淳)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왔을 때인 경진(庚辰, 1820년, 순조 20)년 음력 2월에 새겨놓았음을 알 수 있다.
글 : 고현준
▲청음김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
[原文]
直安東府西四十里有山。曰鶴駕。其下盖有淸陰金先生遺墟云。崇禎丙子冬。虜入寇。上幸南漢。先生自楊州石室聞變。追赴力陳死守之義。及議乞降。詣廟堂。哭裂國書。不食六日。又自經幾殊。丁丑正月晦日。上出城。先生痛哭拜送。仍出自東門。至安東之豐山止焉。盖以有兩世祖墓也。已又深入西美洞。扁其居曰木石。著豐嶽問答。以見志。戊寅。㙜諫柳碩李烓等。論以遺君請竄。只命削官。尋叙復。己卯上䟽。請勿助兵犯大明。庚辰。虜以先生北去。幽之北舘。辛巳。使出住義州。癸未。又拘入瀋陽。先生終不少屈。乙酉。始放還。丙戌。擢拜左相。己丑。孝宗卽位。 命以肩輿入闕。先生欲贊成復雪大業。不幸狼狽而歸。以壬辰六月二十五日。卒於石室。春秋八十三。後五十八年。吾堂姪李君正臣。守安東。見先生舊居。鞠爲茂草。慨然歎曰。先生。我東之伯夷。而鶴駕。是先生之首陽。豈可使採薇遺跡。泯沒如此耶。遂立一小石。鑱其面曰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仍屬余記其右。余嘉其意。不敢辭。遂書其事。俾刻之。先生諱尙憲。字叔度。諡文正。本安東人。高麗太師宣平。卽鼻祖。至今祭于社。銘曰。
退之頌伯夷曰。崒乎泰山不足爲高。昭乎日月不足爲明。明道銘顔樂亭曰。水不忍廢。地不忍荒。嗚呼正學。其何可忘。余今於先生亦云。惟此一木一石。嗟百世之後。勿毁勿傷。<끝>
崇禎紀元後八十三年(1710,숙종 36) 庚寅三月 日立
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李喜朝 撰
通訓大夫安東大都護府使李正臣 書
芝村先生文集卷之二十四 /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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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안동부(安東府)에서 서쪽으로 40여 리(里) 되는 곳에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학가산(鶴駕山)이다. 그 산 아래에 청음(淸陰) 김선생(金先生)께서 머물렀던 곳이 있다.
숭정(崇禎) 인조(仁祖) 14년 병자(丙子, 1636)년 겨울에 오랑캐 군대가 남한산성으로까지 쳐들어왔을 때 그때 선생은 양주(楊州)의 석실마을에 계시다가 이런 급보를 전해 받고서 한달음에 달려가 임금께 나아가서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켜낼 것을 강력하게 간언(諫言)했다.
그러나 묘당(廟堂)에서 이미 항복하기로 의논이 모아졌기에 선생께서는 통곡하시며 그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엿새 동안이나 단식하면서 스스로 죽을 결의를 다졌다. 정축(丁丑, 1637)년 정월 그믐날에 이르러 임금이 타신 수레가 항복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통곡하며 배송하신 뒤 곧바로 동문으로 나와 안동의 풍산(豐山)으로 낙향하셨다. 두 선조의 묘소가 있는 소산 마을의 청원루(淸遠樓)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깊숙한 곳 서미동(西薇洞)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편액(扁額)으로 ‘목석헌(木石軒)’이란 당호를 내걸고 초당(草堂)에 거처하셨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 <풍악문답(豊岳問答)>이란 글을 쓰시면서 의지를 내보이시기도 했다.
무인(戊寅, 1638)년에 대간 유석(柳碩)과 이계(李烓) 등이 상소해 아뢰기를, 임금을 버리고 달아난 김상헌의 죄를 물어 유배형에 처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삭탈관작(削奪官爵)만 행하라는 명을 받았다가 이내 복관되었다.
기묘(己卯, 1639)년에 상소를 올려, 오랑캐들이 대명(大明)을 침입할 적에 조선에서 군사를 파견해 돕지 말기를 청하였다.
경진(庚辰, 1640)년에 노차(虜差) 용골대가 선생을 북쪽으로까지 호송해서 북관(北館)에 감금하였다.
신사(辛巳, 1641)년에 의주(義州)로 옮아갔고, 계미(癸未, 1643)년에 심양(瀋陽)으로 끌려가서 구금되었으나, 선생께서는 끝끝내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을유(乙酉. 1645)년에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9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혔던 소현세자도 함께 귀국했다.
병술(丙戌, 1646)년 3월에 좌상(左相)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이의 공식 명칭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이다.
기축(己丑, 1649)년에 효종(孝宗) 임금께서 즉위했는데, 임금께서 명을 내리시길, 견여(肩輿)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선생께서는 청(淸)나라에 대해 복수해서 치욕을 씻는 북벌(北伐)의 큰 사업에 대해 찬성하셨었지만, 불행히도 낭패로 끝나면서 돌아와야 했다.
임진(壬辰, 1652)년 6월 25일에 석실(石室)의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83세이다.
그 후로 58년이 지난 뒤, 나의 조카인 이정신(李正臣) 군(君)이 안동의 부사(府使)로 부임해 와 선생이 살았던 옛 집터를 둘러보게 되었다.
잡초만이 무성하고 황폐해진 모습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서 탄식을 자아내며 이르기를,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의 백이(伯夷)와 같은 인물이고, 가학산(鶴駕山)은 바로 선생에게는 수양산(首陽山)이 되는 곳이라.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사시던 그 유적을 어찌 이처럼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마침내 한 개의 작은 돌을 세우면서 그 앞면에다 글씨를 새겨넣기를, ‘청음김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라 했다. 그 기문을 지어줄 것을 내게 부탁해오자, 가상한 그 뜻을 거절할 수가 없기에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드디어 그 사실들을 글로써 작성해 돌에다 새긴다. 선생의 휘(諱)는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본관이 안동인(安東人)인데, 고려(高麗)의 태사(太師)인 선평(宣平)을 그 시조(始祖)로 모셔 이제까지 사당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이에 명(銘)한다.
한퇴지(韓退之)가 백이(伯夷)를 노래한 구절 가운데, “높은 태산도 높음이 되지 못하고[崒乎泰山不足爲高], 밝은 일월도 밝음이 되지 못한다.[昭乎日月不足爲明]”라고 했다.
또한 정명도(程明道) 선생이 안락정(安樂亭)을 명(銘)한 글에 “물을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도 차마 황폐시키지 못한다. 오 올바른 배움이여, 그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水不忍廢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라 했다.
나도 이제 선생께 또한 같은 말을 전하리라. “오직 이곳의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백세(百世)의 뒤에 함부로 허물거나 손상치 말아야 할 것이라.[惟此一木一石 嗟百世之後 勿毁勿傷]”
참고로 안동의 학가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초옥을 지어 목석헌(木石軒)이란 편액을 달아놓고 지내면서 지었다고 하는 <풍악문답(豊岳問答)>이란 글의 내용은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이렇다.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諫爭)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臣之於君 從其義 不從其令]」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는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변란 때에 초야에 낙오되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하겠거니와,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되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옛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네가 대의는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말은 옳으나,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안 따라 이백 년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가 평소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 맹세코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임금에게 다투어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
위의 글 가운데, 특히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를 뿐 그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다.”라고 하면서 신하로서의 절의를 강조한 대목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목석거(木石居) 옆에는 본래 서간사(西磵祠)란 건물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청음 사후에 후인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국역 :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