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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모음
절대 주권이 하나님께 잠16:1-12
오늘 본문에서 잠16: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절에도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9절에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정리해 보면 계획은 사람이 세운다 해도 성사하시는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행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이 본문에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의 마음먹은 대로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말씀하시기를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는 니라"(슥4:6)고 하심으로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40년을 살게 하시면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농사도 할 수 없었고, 공장이나, 수공업이나 가내 공업 같은 것도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아니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세대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광야 1세대들이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이 굶어 죽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함으로 그들이 광야에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늘의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너희의 힘으로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배우게 하셨고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만 바라보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 학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신 교과 과목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점을 확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약4:13절에 보면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의 계획은 완벽할 정도로 치밀하고 주도 면밀합니다.
사업 일정이 치밀합니다. 사업의 방법도 치밀합니다. 목적도 분명합니다.
"장사를 해서 큰 이익을 보리라"라고 하는 목적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계획을 치밀하게, 정확하게 세웠다 해도 하나님께 허락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은 아무 소용없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을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가 아니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래서 잠27:1절에 말씀하시기를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의지할 것이 있으며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의지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부자의 삶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가 그 해에 농사가 풍년이 들어 소출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소출을 저장할 창고를 크게 짓고 그 속에 차곡차곡 저장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쳐다만 보아도 배가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심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먹고
즐기자"라고 자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이 많은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새롭게 해야 할 것은 무엇이나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심으로 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로 잔치를 토요일에 합니다만 이것을 우리가 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실패합니다.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의 훈련을 다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 땅을 향하여 요단 강을 건넜습니다.
그 앞에 거대한 성 여리고 가 버티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을 상당한 긴장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경험도 없고, 훈련도 받아 본 일이 없고, 그렇다고 출중한 용사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앉으나 서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우리가 이길 수가 있다고 아마 목이 터져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전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대로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을 돌고 마지막 날을 일곱 바퀴를 돌며 함성을 지를 때에 거대한
여리고 성이 밖에서 안으로 무너지는 기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리고 성입니다.
거대한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그만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저렇게 거대한 성도 우리가 해 치웠는데 저 작은 아이 성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도 아니하고,
"우리가, 아니 내가 단숨에 해치워 버리겠다."라고 생각하고 2,3천명을 이끌어
들어갔습니다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실패한 원인을 보면 여러 가지로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쯤은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연고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는 가운데 성공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입니다.
오히려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계획도 세울 필요도 없고 우리가 잘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성령께서 해 주시겠지 하고 아무 준비도, 계획도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과감히 추진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하는 것처럼! 내가 그 일을 이룬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실패하는 줄 알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함께 해 주심을 간절히 바라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은 백년 살 것처럼 세우고, 사는 것은 하루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잠19:21절을 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이런 도모 저런 도모를 다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잠20:24절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하십니다.
잠21:30,31절을 봅니다.
"30)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31)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즉 아무리 인간이 지혜가 있고,
명철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기게 하시고 지게 하시는 결정은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다윗은 분명한 고백을 한 곳이 있습니다.
우리 역대상 29:10-13절을 보겠습니다.
"10)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11)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은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다고 했습니다.
부하게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이 주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실력자입니다.
그는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며, 당시에 로마 시민권도 소유한 사람이며,
율법 학자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그런 그가 맘만 먹으면 못할 일이 무엇입니까?
말을 못합니까? 권세가 없습니까?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을 다시 재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15:5-7절에 보면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와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가지는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진액을 공급받고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붙어 있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혼자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지가 원줄기를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시127:1절 이하를 보면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집을 세우려고 하여도 여호와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집을 새웠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 것이 분명함으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집을 든든히 지키려고 무인 카메라를 장착하고! 보안등을 켜고, 외제 자물쇠를 잠가도 뚫립니다.
지금까지 우리 집이 안전합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지켜 보호하심입니다.
때문에 더욱 경성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코피 터지도록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여 재물을 얻으려고 하여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헛수고일 분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잠조차 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시37:5절에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영등소망 교회 자체로서 이루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넘어야 할 산도 건너야 할 강도 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이 함께 여러분의 가정의 문제도! 자녀들의 문제도!
그리고 우리 영등소망 교회의 문제도! 그리고 이 지역 사회의 문제도 여호와께
맡기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영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지혜롭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시험 보는 수험생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실수하지 아니하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에게도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수술도 잘
할 수 있고 환자를 정성껏 보살 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살이 나오도록 회복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운전을 해도! 심지어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여도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평안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어려운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무사히 가나안 땅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앞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인도하시고(출23:20), 앞서 가시며 대적들을 멸하시기도 하시고(출23:23,27,32:34, 3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서 행하시며 쉴 곳을 찾기도 하시고(민10:33),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기도 하시고(신1:30),
심지어는 어디에 장막을 치면 좋은 지까지도 찾아 주시고 길을 지시하여 주시기도 하셨기에 이스라엘이 무사히 가나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신1:33,10:11, 31:3,8)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고, 동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첫째는 늘 사람으로서 내가 할 일을 성실하게 하며 부지런히 준비하고 예비함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야 하는가 하면 겸손히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과 동행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부디 우리 영등소망의 모든 성도들이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철저하게 준비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의 뜻대로 행하기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성사되는 줄 믿고 전폭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시고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서 여러분의 경영하는 바가
아름답게 이루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말씀 앞에 겸손히 잠16:13-33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20절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무나 명확한 말씀입니다.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좋은 것은 어떤 것들을 말씀하실 까요? 물론 좋은 것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좋은 것은 하늘의 것을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잠깐이요, 그 나라는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 즉 좋은 것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하셨으니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좋아도
그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6:33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모든 것은 과연 그 말씀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 그리고 하늘에 있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땅에 것, 그리고 신령한 것 모두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시리라
하셨으니 한마디로 말하면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즐거워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가끔 우리의 신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골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위엣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치 비둘기가 썩은 고기 먹는 까마귀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비둘기가 콩으로 만족한 것처럼 우리는 하늘의 것으로 만족해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오늘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기회에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 말씀이 일곱 번나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계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계14: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즉 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영원한 그 나라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 평화의 나라에서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죽지 못하는 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그런 사람은 차라리 이 세상에서 살 때가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하면서 즐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원한 그 나라와 지옥의 형편을 아는 우리로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계16:15절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즉 주님 오실 때까지 사단의 미혹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그리스도를 향하여 충성을 버리지 않고 지킨 성도들을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공사를 할 때에 도비야와 산발랏이 방해 공작을 할 때에
낮에 일하면서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한 손에는 연장을 잡고 일하는 것처럼!
그리고 밤에도 그들은 옷을 벗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는데!
그와 같이 늘 긴장하여 깨어 있는 성도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셨으니 언제 오실 지라도 맞이하겠다는 심정으로
늘 경건하게 자기를 근신하면서 사는 성도가 복이 있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마10:32,33,36-39,12:49,50)
계19: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하십니다.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주님 재림하실 때에 그 어린양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참예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정혼한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신랑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단장하고 기다리는 신부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에 참예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 영등소망의 성도들은 신부단장 잘 하고 있다가 재림하시는 주님의 혼인 잔치에
다 참예하시기를 바랍니다.
계20: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이 첫째부활에 참예한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게 됩니다.
이 첫째부활에 참예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이 사망이 그들을 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또한 메시아 왕국의 통치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요14:2, 행1:8, 엡6:19)
계22: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계22:14절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들어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보혈로 죄 씻음 받은 그 은혜로 들어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음 받은 자가 복이 있는 자요, 그런 자가 두루마기를 빤 자들이요,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여기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를 KJV에서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에 1절부터 보면 얼마나 분명합니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그 계명을 지키고, 말씀에 주의하는 자가 어떤 좋은 것을
얻게 됩니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셨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앞서서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수1:6-9절입니다.
"6)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 성도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길이 있고, 여기에 응답이 있고, 여기에 각양 좋은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삼가 주의하여 순종하고 묵상하고 따라 갈 때에
어떻게 해 주십니까?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평탄하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삼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음으로 멸망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왕이 되었을 때에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사람들이 왕을 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그래서 제비를 뽑았는데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 찾고 찾다 보니 헹구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삼상10:22)
이런 정도로 그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겸손한자와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어 세월이 흘렀을 때에 그는 사방의 모든 대적들을 물리쳤고, 그가 가는 곳마다 이기었습니다.(삼상14:47,48)
그러나 사울의 승리는 교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은 아말렉을 진멸 하되 모든 짐승,
모든 사람을 진멸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아말렉 왕을 살리고, 모든 좋은 것은
자기를 위하여 남겨 두었습니다.
이 사실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발각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삼상15:22-23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2)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아마도 사울은 "그까짓 것쯤이야"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하지 않는다고 당장에 무슨 일이 생기랴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심이 그를 망하게 하고 만 것입니다.
사울은 잠시 자기의 욕심을 채우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엄하게 말씀하시기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음으로"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버리십니다.
또 있습니다. 말씀을 주의하지 않음으로 망한 민족과 열방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뿌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솔로몬을 통하여 진흥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광을 받으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타락하기 시작하더니 그 이방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여호와에게서 완전히 이방 신에게로 돌려놓았습니다.(왕상11:1-11)
솔로몬이 이렇게 타락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솔로몬을 깨우쳤으나
듣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시기에
이르렀고, 결국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점점 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계속 보냅니다. 그래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합니다. 감옥에 가듭니다. 심지어는 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이 아프시지만 할 수 없이
북 이스라엘은 B. C722년에 앗수르에게 내어 주고,
남유다는 B. C 586년에 바벨론에게 내어 주게 됩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70년 동안이나 보냅니다.
왜 그런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하십니다.
완고하고 자만하여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에서 돌아 와 회개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말씀운동을 함께 일으킵니다.
참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이 불행의 원인인 줄 알고 말씀 운동을 일으켰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스7:9-11)
그리고 금식하였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떨었다고 했습니다.(스9:4)
그들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으니 아무 할말이 없노라"고 하면서 울었습니다.(스9:10)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 성을 완공한 후에 그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자들이 모였습니다.
새벽부터 모였습니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가 나무 강단 위에 올라가 모세의 율법 책을 펼 때에 온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내려 갈 대에 온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멸망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말씀 운동을 일으킬 때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씀을 낭독할 때에 온 백성이 울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니 너무나 자기의 죄가 더럽고 나를 구속하신 주님께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에스라서에 보니 낮이 뜨뜻하여 견딜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 앞에 겸손해진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나라를 잃은 지 거의 2천년! 하나님께서 나라를 일으키시고 독립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끝으로 이렇게 말씀 앞에 겸손히 행하는 자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첫째는 16절에 보면 금과 은을 얻기보다는 지혜와 명철을 얻으려고 힘쓰게 됩니다. 둘째는 17절에 악에서 떠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는 19절에 겸손히 행하게 됩니다.
넷째는 20절 하반 절에 여호와를 의지하며 삽니다.
다섯째는 24절에 선한 말을 하며 삽니다.
여섯째는 27절 이하에 덕을 세우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겸손치 못한 사람은 악한 일을 꾀하며 살고, 다툼을 일으키며
이웃을 이간질하는 말쟁이로 살게 됩니다.
끝으로 30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용사보다 낫게 여김을 받고, 성을 빼앗은 장수 같은 영광을 누리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도 말씀 앞에 겸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를 초청한 고넬료는 베드로가 들어 올 때에 그 앞에 일어나 넙죽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친구들까지 모았으며,
하나님 앞에 우리가 모였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요,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등소망의 성도들도 말씀을 귀중히 여기시되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받는 말씀마다 여러분에게 복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화목케 하는 자와 다툼을 일으키는 자 잠17:1-28
오늘 본문은 화목케 하는 자와 다툼을 일으키는 자를 배우게 합니다.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화목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교훈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화평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우리로 화평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시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롬5:10절에 보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하였고,
엡2:10절에도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레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이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서로 화목하면서 살 것을 가르친 교훈들을 찾아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10: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벧전4:7절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면서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 간 데마다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잠15:16-18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7)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8)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17: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17:14절에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잠18:6-8절입니다.
"6)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7)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8)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여기서 사람이 남의 말하는 것을 음식으로 따지면 별식과 같다고 했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평생 못하는 사람이 남의 흉을 말하라면 열을 올립니다.
남의 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것이나 말이 아니라 남의 흉이나 결점이나 흠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은 별식과 같아서 귀가 솔깃해지고 흥미 있게 듣습니다.
그런데 남의 말이라는 것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눈사람같이 불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엉뚱한 말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권하시는 것은
남의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칭찬이 아니면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영등소망의 성도들이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
남을 헐뜯거나 흉이나, 비난이나 이간질이나 마음 상하게 하는 말들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칭찬하는 말만 많이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잠20:3절을 보겠습니다.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 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잠25:8-10절
"8)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 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9)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10)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무슨 말입니까?
급하게 화부터 내고 성질을 내어 다투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욕을 보게 되어있습니다. 또 미련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툼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다투고 변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는 자는 미련한 자라는 것입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잠26:17절입니다.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잠26:20-22절에
"20)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21)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22)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되고, 은혜로 하나되려면 말장이들이 없어져야 합니다.
나무가 다 타면 불이 꺼지듯이 말쟁이들이 없어야 다툼이 쉬게 됩니다.
말쟁이들이 여기서 수군거리고 저기서 쑥덕거리면 이것은 타는 불에 나무를
더 얹어 놓는 것과 같아서 늘 다툼이 멈추지 않고, 시비가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누가 말쟁이인가 하고 두리번거리는 분들이 계신데
남 처다 볼 필요 없습니다.
나만 말쟁이 되지 않으면 말쟁이 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말쟁이들의 말은 또 기억도 잘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기억하면서 또 묵상하고 해야 할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나가다 잊어버리면서 남의 말은 기억도 잘 되어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대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한마디로 말하면 서로 화평하면서 살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지으실 때에 서로 사랑하면서 화평하고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꾀임을 받아 범죄한 후에는 사랑 대신 미움이, 화목 대신 싸움이 들어 왔습니다.
에덴 동산에 죄가 들어 온 후에 인간적으로 최초의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벌어진 골육 상전이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인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르시기를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는 말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면 반성하고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가를 생각해서 잘 드려 하나님께 칭찬들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홧김에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사탄에게 속아 화목하고 평화 해야 할 형제가 이렇게 시기하고 미워하고 드디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시기를 화목 하라고 하십니다.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엡4:1절에 보면 "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
롬12:18절에는 "할 수만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
히12: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화평하면서 사는 비결이 무엇이 있습니까?
먼저 화평을 가지려면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선적으로 급한 일입니다.
마음속 그 깊은 곳에 불안과 근심과 염려와 아픈 상처가 있으면 다른 사람과
화목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한 사람의 마음은 마치 바닷물이 요동해서 솟구치는 것과 같이
그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어디서나 문제를 야기 시키는 사람들 보면 그 마음에 평화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안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전문 상담 가를 찾아서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성령님께서 치료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사람 사이에도
화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과 화목하면 살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합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착하게 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맺히는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속에 있는 진실이 겉으로 나오는 것이고, 속에 있는 착함의 열매가 겉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벧전3:10, 11절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처세입니다.
화평한 일을 좇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화평의 생활을 하고 화평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화목하면서 사는 비결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대개 싸움이 어디서 생깁니까? 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을 조심하지 않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분노가 일어나고 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잠언에 말씀한 대로 "말쟁이가 있으면 다툼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화평한 교회라도 말쟁이 하나 때문에 교회가 흔들리고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말쟁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내가 말쟁이 되지 않으면 말쟁이는 이 교회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영등소망 교회는 이 말씀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서로 모여 수군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여 앉아서 남의 이야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의 이야기하려면 칭찬하는 말을 하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의 아들 되는 000 형제가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입니다.
벤처기업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사람인데 제가 급하면 가끔 사진 스캔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스캐너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던지 값이 꾀 나가는 물품인데
선 듯 하나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새가족 반에서도 성실하게 공부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 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모여 앉아서 칭찬을 하시고 좋은 이야기 나누시고,
은혜로운 간증들을 나누시면 은혜 위에 은혜가 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영등소망교회는 누구든지 말쟁이는 사절합니다.
왜냐하면 말쟁이는 성경에 다툼을 일으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목케 사는 비결 마지막 한가지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습관이 무서운 것이고, 버릇이 무서운 것입니다.
습관을 잘못 드리면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잘
못된 버릇을 갖게 되면 평생에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고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겸손하려고 힘쓰고, 어찌하든지
인내함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깨뜨리지 아니하려고 저마다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등소망 교회의 화목을 깨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화평한 분위기를 만드는 일을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끝으로 화목케 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에게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5: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화목케 하려고 힘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 보시면 "너는 내 아들이야!"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타락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려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사람과 하나님과를 화목케 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화목케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계신 우리 성도들도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가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이와 같은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룻의 목자가 서로 다툴 때의 일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 무슨 말을 한지 아시겠습니까?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같은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살고 있지
아니하냐 우리가 다투면 여기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이 하나님의 사람들도 불신자와 똑같구나 하고 우리를 멸시하고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우리는 다투지 말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이 말씀을 우리 영등소망의 성도들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영등소망의 성도들이 서로 화목하며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많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땅에 가나안 족속 같은 이방인들!
불신자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기독교는 차별화를 부르짖는 종교입니다.
적어도 우상숭배자들과는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술담배 피우고 지옥에 갈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화목하면서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선교회들이 일을 많이 해서 선교사를 돕고 불우이웃을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화목하면서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에게. 그리고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지금 필요한 사람은
다투는 사람이 아니고 화목하면서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신
말씀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줄 압니다. †
지혜로운 자가 됩시다 잠18:1-24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어리석은 자들의 여러 특징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하고 지혜로운 자로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라도 자기 속에 어느 정도는 어리석음이 잔존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멸시키는데 도움을 주시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1. 그러면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1-8)
첫째는 독선입니다.
1절입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조그마한 자기의 장기나 특기를 가지고 그것 때문에 영웅의식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자기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말, 혹은 자기의 의견이 모든 사람에게 거의 절대적으로 받아
드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내 의견만 고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의견만 받아 드려져야 합니까? 물론 중요한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의견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더 낫고 발전적이다라고 할 때에
그것을 택하는 것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에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독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의 단합이 깨어지고 분열이 조장되어 집니다.
그리고 그런 모임을 거부하게 되고, 스스로 뛰쳐나가 고립되고 맙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한대로 자기 욕심 때문에 결국은 그렇게 되고 스스로 나뉘어
참 지혜를 거부하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2절입니다.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라고 하셨는데 1절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잠언에서 명철이 무엇입니까? "악에서 떠남이 명철입니다.
지혜는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입니다.
때문에 명철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렘9:24)
지혜를 사람에게 머물게 합니다.(잠14:33)
그리고 연약한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 나갈 능력을 얻게 합니다.(잠15:21)
명철이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서 잘난 체 하거나 나서지 아니하며,
오직 이웃과 화합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이라면 명철을 소유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은 곧잘 독선에 빠지고 스스로 이웃들로부터 고립됩니다.
그 이유는 명철을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어리석은 자는 편벽 됨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부모가 한 자식을 편애함이나 특정인만 편벽을 하면 문제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편애를 받는 사람들은 큰 힘과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소외당하는 자는
좌절과 낙심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과 낙심으로 인하여서 그릇 성장하기도 하고 또는 정직한 사람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삭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쌍둥이에서와 야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아버지 이삭은 맏아들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결국 이같은 편애로 야곱과 에서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가정에 불행이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넷째는 분쟁과 다툼을 일삼습니다.
6절에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희생도 하여야 하고, 말을 삼가야 하기도 하고,
분을 마음속에서 삭여야 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화목하면서 사는 것은 창조의 원리요, 예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이러한 창조 원리 보다 자기의 감정이 앞서고 자기의 이해 관계를 더 앞세우고, 자기 유익을 생각하다 예수님의 절대 명령이 들려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지껄이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다툼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기 싶습니다.
잠18:8절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대로
내려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고, 맞는 말같이 들리고, 별식과 같이 흥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툼을 불러오고 분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옛 의서 에도 쓸데없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게 되면 속 기운을 소모시켜서
건강을 해치게 된다하여 소언(소언),
즉 말을 삼가 해 적게 하는 것도 양생법의 하나로 기록했습니다.
불평 불만으로부터 나오는 잔소리를 자주 하게 되면 체내의 자율신경계와 호르몬의 부조화를 유발해 결국 체질이 산성화되어 건강을 잃게됩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사용해도 부족함이 없는 말을 은혜스럽게 사용하여
자신과 이웃을 격려하며 긍정적이고도 창조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성도의 건강한 삶이라 하겠습니다 .
어찌 하든지 하나님의 교회는 분쟁이나, 다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요, 하나님의 교회를 허는 일이기
때문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한 자의 입술 때문인 것을 알고 입술이 미련하지 않도록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멸망을 자청합니다.
7절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는 말을 즐겨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악한 성품과 범죄의 사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뱉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그 입술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어리석은 입술로 말미암아 스스로 파멸의 구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아낍니다.
그래서 욥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도 말할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욥40:4,5절에 말하기를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말을 적게 하면 이웃에게 덕을 세울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명까지도
보존하는 법입니다.
사업에 크게 성공한 사람이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한번도 내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착상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나 자신이 언제 잘못하고
있는지 늘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경영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제일 말단 직원의 말까지도 귀기울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상관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도 한번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고,
단지 다른 사람의 평을 귀기울여 듣고, 자신의 행동을 개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정신입니다.
우리가 성숙한 인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과 충고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으로부터 충고를 받고 부지런히 권면을 구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 견고한 망대이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이 본문을 읽노라면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등대가 해로를 비추어 주듯이
인생의 항로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망대라는 사실입니다.
첫째 망대의 특징입니다.
망대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어야 모든 것을 바라 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망대의 사명은 파수하는 일입니다.(왕하9:17, 17:9, 18:8)
등대의 불빛이 배를 지켜 주는 것처럼 망대의 사명은 백성들을 지켜 주는 파수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망대는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망대는 백성들이 피난 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그러므로 망대는 파수와 함께 보호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대하26:10,15,마21:33) 그러므로 위험을 당한 자가 망대로 피하면 생명의 보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그러면 이 망대는 무슨 의미입니까?
망대는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 줄 피난처는 세상의 재물도 아니요, 지식과 명예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윗이 나갈 대 그는 부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강력한 안전한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가장 안전한 피난처인 하나님 안에 늘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망대 안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11절에 보니 부자는 재물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것이 큰 힘이 될 것 같지만 결국은 신기루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망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기루 같은 헛된 자신의 성벽에서
벗어나야 견고한 망대인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2)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12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멸망하려면 교만하면 됩니다. 교만은 멸망의 전주곡입니다.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질서를 파괴합니다.
이웃을 업신여기고 약자에 대해서는 강포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하게 아부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순종치 아니함도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망대의 보호함을 입는 길은 마음을 겸허하게 하고 남을 높일 줄 아는
미덕을 가진 사람입니다.
3) 견고한 망대의 보호하심을 입으려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마25장에 장차 우리가 나에게 달란트를 주신 주인 앞에 서게 될 것을 보여 줍니다. 그때에 어떤 이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들을 종들이 있고,
그때에 어떤 종들은 "악한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을 듣고 어두움 가운데서
이를 갈 사람도 잇습니다.
전혀 보호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누구입니까? 한 달란트 받았다고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고약한 하나님으로 불신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사명을 소홀히 여기고 직무를 유기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책임감입니다. 동물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해서 게으르거나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사명을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충성한 자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과 함께 하나님은 평안함과 안전함으로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3. 끝으로 기독교의 속성인 화해의 교훈을 받게 합니다.(15-24)
일본의 이다구라 시게무녀라는 훌륭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는 솔로몬과 같은
명재판을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입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가 찾아 와서 명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재판관이 하는 말이 재판을 할 때에
"나는 문을 닫고 나 홀로 방에 앉아서 재판한 다오, 문을 닫는 이유는 피고와 원고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란 보면 볼수록 미워지는 사람이 있고, 보면 볼수록 선량한 것 같은 얼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눈에 미워 보인다고 해서 다 악인이라고 할 수 없고,
내 눈에 착해 보인다고 해서 꼭 선량한 사람일수도 없습니다.
내 눈에 미워 보인다고 다 악인이라고 할 수 없고,
내 눈에 착해 보인다고 해서 곡 선량한 사람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판관은 얼굴을 보지 않고 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심도 없어지고, 사실 그대로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관계의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18:16,17-19,23-24)
여기서 말하는 선물은 뇌물이 아니라, 사심 없이 존경함으로 드리는 예물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선물은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하며 문제를 속히 처리하도록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합니다.
13절에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송사에서는 원고의 말만을 듣지 말고 반드시 쌍방의 말을 다 들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18절은 쌍방의 주장이나 논리가 일보의 양보도 없고, 사람의 지혜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제비를 뽑아 결정하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동측 교단에서는 총회장 선출을 제비로 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경우를 말합니다.
19절에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 보다 어려운 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형제 사이의 불화하고 반목한 관계를 화목케 하는 것은 견고한 산성의 문빗장을
여는 어려움보다 더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화목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버리시고,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것처럼! 반목질시하고 미움과 증오를 버리지 못하면 그 마음에 평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불행한 삶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화해는 자발적인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화해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요,
행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영등소망의 모든 성도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시고, 화목하셔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 기도를 기쁨으로 암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힘써 여호와를 경외하자 잠19:19-29
오늘 23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와를 힘써 경외합시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수24:14절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전12: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 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눅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공경하는 법도입니다.
이 세상에 두려워 할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공경하는 것이 성도들의 도리입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여러분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공경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언행 심사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언어 생활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보는 것과 손과 발을 금하고 행동에 조심성이
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마음을 잘 지키십니까?
그리고 생각을 마땅히 생각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습니까?
요즘 불행은 주를 경외한다고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잘 믿고 경건한 삶을 산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반면에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론이 무섭고, 인기가 추락될까 두렵고, 내 사업에 도움이 되고 내 삶에 도움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 변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눈치를 보고 선물 공세를 펼칩니다.
대신 하찮게 보이고 별 도움도 돼지 않는 사람은 무시하는 이런 악한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챤의 행동은 아닙니다.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경외하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관절과 골수까지 보시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히11:12,13)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일까지 보고 아십니다.
때문에 인간의 모든 비밀은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장사꾼들에게 팔아 넘기고 자기 아버지 야곱을 속였습니다.
그때 형들은 백퍼센트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여러 해 후에 그들이 지은 죄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애굽의 궁중에서 밝히 들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죄를 죄대로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중심에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아침 안개가 사라짐 같이 우리에게서 죄과를 멀리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의로운 척하고 거룩한 척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반드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금생에도 내리시고 내생에서도 피할 길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양심으로! 때로는 육신의 병으로! 때로는 사업의 실패로!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을 통하여 벌하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3,4대까지 내려가면서 형벌하실 것입니다.(출20:5)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최후의 심판입니다.
민32:23절에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아무리 모르게 했을지라도 하나님께는 분명히 보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옛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죄가 그 사람을 벌하고야 맙니다.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혼까지 지옥 불에 던져 버리십니다.
마25: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두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5:41절에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막9:47-48절에 보면 "만일 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눈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온유 겸손하시며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불쌍히 여기시기를 기뻐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믿어지십니까?
그렇게 좋으신 분이 이렇게 무서운 형벌과 진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순 의미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며, 얼마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미워하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씀하기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입니다.
다윗은 옛날 구약 시대나 오늘 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인물입니까? 남의 아내를 빼앗은 사람입니다.
그 여자를 완전히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해 그 남편을 의도적으로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속이려 하고 선지자를 속이려 했던 불의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다윗의 별이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했습니까?
한때 미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종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고 깨닫게 할 때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히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철저히 회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흉측한 카메라가 생겼다고 합니다.
다른 카메라나 별 다름이 없는 것인데 찍으면 사람들이 아무 옷도 입지 않은
나체 사진으로 나온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진 찍어 준다고 해서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내 몸이다 노출 된 나체 사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랍고 무서운 일입니까?
여러분들은 그런 카메라를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 사람이 보는 것과 같이 보시지 않으시고 마치 벌거벗은 몸 그대로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 중심을! 심령의 상태를 다 보고 계십니다.
밖으로 아무리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에는 칼날을 품고 있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사는 생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곧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악인이 누구입니까?
죄를 범하고 못된 짓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그런 인간이 물론 악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눅18:2,4,눅23:40)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유다의 왕손입니다.
그는 여호와 신앙으로 어렸을 때부터 무장한 사람입니다.
그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동일한 신앙을 가진 믿음의 친구입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를 사자굴 속에 던져 넣겠다는 이야기를 알면서도
그의 기도 생활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관직에서 박탈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자의 밥이 된다는 데도 그의 기도 생활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하였습니다.
다니엘이 만일에 사람 왕을 두려워하였다면 잠시동안 기도 생활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 섬기는 것을 보류하고 왕의 눈치를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다 죽겠다는 각오로! 우리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각오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이 만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아니하면 풀무 속에 던져 태워 죽이겠다는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나팔이 울려 퍼질 때에 일제히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소년들은 담대하게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실 것이요,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왕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 아니했습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라"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정리하면 우리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며,
둘째는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해야 하며,
셋째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이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비결이 있다면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14: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행하여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범한 죄를 미워해야 하고, 주위의 유혹을 거절하고, 불의한 세력을 뿌리쳐야 합니다.
셋째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이제 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첫째는 23절 하반 절에 생명의 복을 주십니다.
여기 생명의 복은 영생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고, 지식과 명예를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생명의 복이 없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면 이 세상에서도 복을 주십니다.
그것이 성경에 약속입니다.
둘째는 평강을 주고 재앙을 면케 해 주십니다.
잠19:2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게 되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염려가 있지만 그것에 눌리지 않고, 삶에 아픔과 고통이 있지만
심령에 즐거움이 떠나지 않으며, 빈들에 있든지 초막에 있든지 천국 같은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무엇을 많이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영등소망의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경외함으로 생명의 복을 누리시고, 평강과 함께 족함이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지혜의 교훈들 잠19:1-11
오늘의 잠언은 각종 지혜와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에서 규범으로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한 말씀 한 주제를 선정함으로 오늘의 설교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역시 미련한 자가 어떤 자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보면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 보다 나으니라"고 했고,
3절에도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10절에는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13절에는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련한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제 자신이 아무리 똑똑한 듯 행동할지라도 여호와를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지혜로운 것이 하나님의 가장 미련함만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1:25)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모르고, 설사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고,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그러면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지혜로운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빌3:8)
둘째는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염려하고 원망하는 것은 의식주 문제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물이 없음으로 원망하고 날마다 만나만 먹는다고 박한 식물이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원망 불평의 문제들의 대부분은 생활이 어렵고, 입을 옷이 변변치 못하고, 집이 불편하고 그런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이 잘 될 때에 원망합니다.
시37편에서 이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나 제 맘대로 사는 자가, 세상 가운데서는 결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더 풍성하고 큰소리치면서 돌아다닐 때 분노가
일어나고 원망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이것을 미련한 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시드는 들풀과 같이
될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영광도 가리우면서 살아도 번영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서 갚으실 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셋째로 미련한 자는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옳은 길인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우리의 삶 중에서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위대하심을 나타낼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물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 영광 받는 자리에 있다고 할 때에 잘못되기 시작하는 것이며 불행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스스로 영광을 차지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질로 갔거늘.."(사43:6)이라고 하셨습니다.
각기 제 길이 무슨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다. 잘못된 길입니다. 미련한 길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아집과 고집 때문에 옳은 길인 줄 알고 가니 얼마나 미련한 사람입니까?
잠14: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6:25)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미련한 자는 교만하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주장이 옳고, 자기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교만함으로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아 드릴 수가 없고, 못마땅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단정하고 오해하고 시험에 들고 나의 길을 고집하고 가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세상에 빠지면 나도 모르는 새에 교만해 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직도 자기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자와 같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서 잡
으려고 쫓아가노라고 겸손히 말씀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잘 한 일! 공적이 많이 있지만 그 일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빌3:12-14)
다른 성경에 보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받을까
두려워함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겸손히 행하겠다고 했습니다.(고전9:27)
우리는 자주 자주 자신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가끔 가끔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행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넷째로 미련한 사람은 입술이 사악한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입시 철에 수능을 며칠 앞에 두고 있는데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첫째는 출제 위원들의 말이요, 둘째는 언론이고, 셋째는 수석 합격 생의
말이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출제 위원들은 한결같이 "이번 수능시험은 정상적인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학생이라면 누구나쉽게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언론들은 한결같이 "올 수능시험은 과외가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수석 합격 생들은 "잠은 충분히 자고 과외나 학원은 한번도 받은 적도, 가본 적도 없어요. 그저 교과서 위주로 학교공부만 충실히 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우스개 소리인지 모르지만 성경은 거짓말을 금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라고 하셨고,
9절에는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잠12:17,18절에
"17)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 18)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잠24:28절에는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잠25:18,19절에
"18)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19)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 된 발 같으니라"
출20:16절에도 보면 십계명 중에 아홉 번째 계명입니다.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아합이라고 하는 위인이 좀 모자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간교한 이세벨이라는 여인입니다.
아합은 나봇이라는 사람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는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병이 났습니다.
이때 그의 간교한 아내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시켜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했다"라고 하는 거짓 말을 퍼뜨리고 돈을 주고 거짓 증인을 매수해 결국 나봇을 돌로 쳐죽이고 그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남편 아합에게 주고 말았습니다.(왕상21:1-19)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크게 미워하시는 일이요, 천벌을 받을 일입니다.
왕상 21:19절에 보면 선지자를 통해서 아합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라고 하시면서 나봇같이 너도 피를 흘리며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그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스데반도 거짓 증인에 의해서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너무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분해서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석이나 사석에서 남에게 대하여 중상하거나 악선전을 하거나 시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답지 않습니다.
이는 계명을 어기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를 삼가야 합니다.
유언비어를 만들고! 풍설을 만들고! 확실치도 않은 떠돌아다니는 말을 가지고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전하며 다니는 말쟁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실도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고 다니는 것은 거짓말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출23:1절에는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짓 말을 만드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더 나쁜 사람입니다. 더구나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마7:1절 이하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흔히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허물을 보기는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저 사람이 저런 말하면 안 되는데.."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자식 기르는 부모들은 남의 자식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 할 때에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들어 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 분명히 들어 났다 할지라도 이것을 다른 이에게 옮기지 말고 조용히 그 사람과 마주 앉아서 바로 잡아 주고 자신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남의 결점을 잘 말하는 사람의 배후에 보면 열등감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심이 강한 사람! 교만한 마음이 잠재되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경영하는 수도원 식당에는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 식탁이 환영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저도 그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우리 영등소망 교회가 환영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식탁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남의 허물을 말하기 싶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허물을 들어내는 사람보다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창9:20절에 보면 한 때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는 농사를 짓게 되었고
포도 농사가 잘 되어 포도주를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노아는 포도주를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취하여 집에서 벌거벗고 눕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때 이 모습을 누가 보았느냐 하면 둘째 아들 함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 아버지의 허물을 덮었으면 좋았을 것을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셈과 야벳이 어떻게 했습니까?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왜 뒷걸음으로 들어갔습니까?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즉 그 허물을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고, 함은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영등소망에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함과 같이 되지 말고, 셈과 야벳 같은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무엇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입니다.
마15:18절에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좋은 말이 나오면 그 사람의 인격이 좋은 것이고, 더러운 말이 나오면 그 사람의 인격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 속에 시기,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미움, 분쟁 같은 악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늘 깨끗케 해야 합니다. 우리 속을 청결히 해야 합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요8:44절에 보면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진실을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고, 거짓을 말하면 마귀의 자식이 되어서 마귀가 가는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영등소망의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하며,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격과 명예에 훼손이 되지 않도록 힘쓰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가 어지럽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혀와 입술과 마음을 성령의 불로 지져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구원하시는 여호와를 기다리라 잠20:1-30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태신자 초청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동안 기도 해 오던 태신자들을 초청해서 복음을 들려 드렸습니다만
왜 우리가 복음을 들어야 하는가는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1.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롬3:22,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신 말씀 대로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무슨 죄를 그렇게 범하였습니까?
우리 이 시간에 함께 몇 군데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5:19,20절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롬1:28-32절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갈5:19-21절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딤후3:1-5절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 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무식한 자나,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인 것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일서 1장에 보면 만일에 우리가 죄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1:8-10)
요16:9
"죄에 대하여라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이같이 죄를 지은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은 다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간수장에게 하신 말씀이 뭡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가 구원 얻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옛날에 연탄을 많이 뗄 때는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많았습니다.
연탄가스에 중독 된 사람은 정신을 잃고 의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대로 내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식초를 코에 쐬면 괜찮다고 해서 식초를 코에다 들여 붓기도 하고 동치미 국물을 먹이면 괜찮다고 해서 그렇게 해 보기도 하고 그러나 이것은 증세가 미비할 때의 일입니다.
아주 심하면 병원에 누군가가 실고 가서 산소 통에 넣어야 삽니다.
그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지은 죄를 스스로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이 깨끗하다고 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렘13:23절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불가능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기를 "오라 나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요한이 말한 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죽음이셨습니다. 이사야는 말씀한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라고 하시면서 오직 우리가 죄사함을 얻고 구원 얻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요1: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엔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한 사람만 들어 가는 것입니다.
미국에 유명한 부흥사 빌리선데이(Billy Sunday)라는 사람이 집회하면서 하나님께 묻기를 거기에 거기 침례교인은 몇 명이나 됩니까? 한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 감리교인은 몇이나 됩니까? 한사람도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장로교인은 몇 명이나 됩니까? 라고 하니 한사람도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여기는 침례교인, 감리교인, 장로교인은 한사람도 없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사람들만 와 있다"라고 하시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구원의 효력도 차별이 없습니다.
30년 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도 구원을 얻고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도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오전 9시들어 온 사람이나. 오정 12시에 들어 온 사람이나, 오후 3시에 들어 온 사람이나, 아니면 끝날 무렵인 5시에 들어 온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 씩의 품삯을 주신 것입니다.
인생이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2. 구원 얻은 성도들의 삶은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행동으로 구원받은 것을 나타내며 산다고 1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으려고 정직히 행하고 품행을 청결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에 그런 열매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12절에 귀와 눈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말씀이 두려운 말씀입니다.
13절에 게으르면 빈궁하게 되니 눈을 크게 뜨고 부지런히 일하면 풍족한 양식을
얻게 된다고 하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부지런히 생업에 종사해야 함을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14절 이하에 보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의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여야 합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값을 깎으려고 물건이 나쁘다고 흠을 뜯고 싸게 산후에는 돌아서서 좋은 것을 싸게 잘 샀다고 회심의 미소를 띄우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17절 말씀에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후에는 모래를 가득 입에 먹은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23절에도 속이는 저울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나쁜 것을 같다주고 좋은 것이라고 속이고, 틀림없는 국산입니다 라고 해서 샀는데 수입품 마늘이라면 이 얼마나 비양심적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양심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절에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라고 했으니 우리 구원 얻은 사람들이 할 일 없이 모여 앉아서
남의 험이나 뜯고 남의 비밀이나 누설하고 그런 일에 입을 벌리고 있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자들과는 사귀지 않습니다. 교제도 하지 않습니다.
22절에는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리는 명수들이어야 합니다.
네 스스로가 악을 갚겠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만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기다리라고 하실 뿐입니다.
좀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때로는 속상하여도 변명하고 행한 대로 갚겠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나를 손해 시킨 사람에게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악을 네가 갚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24:29절에 "너는 그가 네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에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라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자세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5:39)
롬12:17,19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라고 바울 사도는 권면하셨습니다.
살전5:15절에도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고 권면하십니다.
벧전3:9절에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얼마나 긴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살았습니까?
억울한 일을 수없이 당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 때가 언제이든지 상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약속하시기를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요셉에게 있어 어두운 밤은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광명의 아침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에 대해서 원수 갚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의 아들, 즉 조카들까지도 자기가 기르겠다고 사랑으로 갚아 줍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요셉이 말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창50:19)
사30:18절에 "무릇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사8:17절에는 "나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간절히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적에게 포위 당한 군인이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림같이 가물어 메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림같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이렇게 답답하고 억울한 중에도 우리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시냇물을 사모하는 사슴같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옹달샘을 찾아 미친 듯이
내려오는 사슴같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 이렇게 여호와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부 단장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기다리던 신랑이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정혼한 신부들이니 그 신랑이나를 맞이하러 올 때까지 우리는 신부로서 마땅히 단장할 것을 단장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 지라도 당장에 등과 기름을 들고 뛰어 나갈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합2: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행1:4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기도하곤 기다리고, 심어 놓곤 기다리며, 일해 놓곤 기다리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참고 기다리며, 우리 할 도리를 해 놓은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치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는 일에 실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여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사라였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라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했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사실 이스마엘은 생기지 말았어야 할 아들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가정에 있어서 평생의 화근 덩어리였습니다.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후 13년 뒤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에게서 이삭을 주어 약속을 지키셨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다리되 하나님의 약속은 더딜지라도 반드시 그대로 이룰 줄을 믿고 기다리는 일에 실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24:13절에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결론 삼아 시130:5-8절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5)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 6)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8)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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