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지 중에서
원 종 민
1983년 7월 16일, 17일(토, 일) 도봉 선인봉
아무리 훈련 삼아 해드 랜턴 없이 야간 산행한다지만 너무 깜깜하다. 처음 석굴 야영을 오는 두 여자 대원의 불평을 이것도 훈련이라고 나무라는 나도 발걸음이 편하지 않다. 아직 장마중이라 말라있던 도봉이 흠뻑 물을 먹어 풀과 흙내음이 좋고 물소리 또한 어울린다.
청암샘터 가는 중간 전 주에 데포 해 놓은 카바이트 캔들을 너무 깜깜해 못 찾겠다. 석굴 야영장을 환하게 밝히는 칸데라가 없지만 다행히 양초를 비상으로 준비했다. 석굴입구에서 휴식을 하는데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동건이였다. 늦어서 부지런히 뛰어 우리 옆을 지나면서 어두워 서로 모르고 앞질러 온 것이다. 돌부리를 피하고 질퍽거리는 청암샘터의 물길을 피하느라고 힘든 줄 모르고 석굴까지 올랐다. 땀도 흐르지 않는다. 컨디션이 좋다는 증거이다. -나는 컨디션이 나쁘면 땀이 많이 흘리는데...
텐트를 치자 곧 영진이형, 상형이형, 태영이 형이 도착했다. 야식으로 라면을 즐기고 취침준비를 하는데 현용자는 뱀이 무서워 잠이 안 오고 고봉실은 깜깜해 무섭다고 야단이다.
태영이 형은 8월 설악 릿지 등반 비박 훈련한다면 텐트가 남는데도 우리와 같이 별을 보고 눕니다. 잠든지 얼마 안돼 문균형이 왔다. 라면을 끓여달라, 야바위를 하자는 등 동건이를 괴롭히고 다른 사람의 잠을 설쳐 놓는다. 6시가 다 되어 기상했다. 매주 산행을 같이하는 동건이가 나의 매번 똑같은 메뉴에 질렸다며 새로운 맛을 호소하여 가지볶음과 콩나물 두부찌개를 준비했으나 새벽에 세수도 안 했으니 입맛이 날 리가 없다. 석굴의 아침은 소란스럽다. 식사준비를 하는 팀, 설거지를 하는 팀, 아침도 안 먹고 등반 준비를 하는 팀 등등, 상쾌한 새벽공기와 함께 산에 미친 사람들의 합창이 산아래 보이는 도시에서 찌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자! 이제 어느 코스를 등반할 것이냐? 나의 계획은 하늘 벽을 오르고 다음으로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 선인의 벽인 표범을 오를 예정이었으나, 영진이 형의 1피치, 다음 피치부터는 문균이 형이 톱으로 표범을 하겠다 하신다. 사실 우리 청악은 한동안 침체를 겪는 동안 선인의 최 난코스인 표범을 꺼려왔었다. 이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는 청악의 83년 상반기 암벽 등반 숙제는 당연히 표범이었다. 드디어 표범을 사냥하는 것이다. 등반 준비를 마치자 갑자기 톱의 화살이 나에게로 왔다 "저는 아직안 돼요"
"아니!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언젠가는 해야 될 것인데 한 번 해 보자. 아냐 난 아직 멀었어. 지난주 요델 바트레스를 오를 때와 같이 용기와 두려움이 교차했다. 용기와 두려움은 항상 상충하는 것인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의해 기어스링을 몸에 걸고 비너 수량과 후렌트, 너트, 스링, 햄머를 점검한다. 내가 톱, 상형이 형이 쎄컨, 동건, 문균이형... 1피치는 언더, 쨈과 레이빽이 혼합된 크랙으로 전 피치 가운데 제일 어려운 곳이다. 상형이 형이 언더크랙에 스토퍼를 설치하고 등반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 몸은 나비와 같이 가볍다'하고 생각하며 손에 초크를 묻히고 바위에 붙었다.
팔에 힘이 들 뿐 가볍게 1피치를 올랐다. 표범이란 놈의 발톱을 부러뜨려 놓았다. 자신감이 끓어 올랐다. 2피치를 팬드럼하는데 홀드와 스텐스에 박쥐 똥이 묻어 젖어 질퍽거렸다. 냄새도 지독하다. 이제 표범의 이빨 언더크랙이 기다리고 있다. 왼쪽으로 쏠리는 몸의 중심을 왼발을 바깥쪽으로 빼고 바란스를 잡으며...
이제까지 보기에는 상당히, 어렵게 느꼈던 언더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등반하여 이빨도 부러뜨렸다. 이제 슬랩만 남아 있다. 뒤에서 계속 코치를 해 주시던 상형이형이 이제 거의 끝났다고 다시 한번 용기를 주신다. 크랙이 끝나고 오른쪽의 곱돌을 올라서는데 스텐스를 못 봐 주먹보다 조금 큰 곱돌에 두 손과 두발을 올려놓고 아슬아슬하게 올랐다. 십년감수한 기분이었다. 티끌만치의 바란스가 빗나갔어도 슬립을 했을 것이다. 빌레이를 보던 상형이형의 간이 콩알만해 졌었다고 한다. 이제 왼쪽의 노란스링을 잡아야한다. 팔을 아무리 뻗어도 잡을 수가 없다. 곱돌에게 오른발을 좀 더 옮기도 왼발을 왼쪽으로 최대한 뻗어야 될 것이다. 그러나 바란스가 불안하여 용기가 나질 않았다.
183센티미터의 장신인데도 3센티미터 정도 모자랐다. 할 수 없이 록햄머로 스링을 올린 다음 재빨리 왼손으로 잡고 확보를 했다. 상형이 형이 동건의 빌레이를 보는 동안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깎아지른 회갈색의 암벽에서 잠깐 휴식때 담배는 무엇하고도 바꾸고 싶지 않다. 석굴에 종선 형님이 올라와 구경하는 것이 보였다. "CA"하고 손을 흔들었다. 다시 왼쪽으로 팬드럼, 슬랩 트레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트 화이딩을 해 보았으나 앞이 캄캄하였다. 나는 항상 잡을 곳도 디딜 곳도 없어 보이는 슬랩에서 겁을 잔뜩 집어먹는다. 더구나 지난번 박쥐상단 슬랩에서 첫 슬립을 해서 더욱 불안했다. 일단은 팬드럼해서 슬랩에 붙었다. 다리가 떨려오고 슬립하면 어디까지 떨어지나 밑을 바라보았다. 괜히 밑을 보았다. 다리가 더 떨려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떨어질 것이다. 다시 스텝과 홀드를 찾았다. 이 정도면 쉽게 오를 수 있는데... 그래 난 할 수 있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
역시 가볍게 올라 스링을 잡았다. 이를 바라보았다. 양호한 슬랩과 허리코스의 후향레이백 크랙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쉬운 곳이다. 휴! 이제 끝났다. 몇 달만에 등반하는 상형이형의 슬랩 바란스가 불안하였으나 무사히 올랐다. 양호한 슬랩을 뛰듯이 올라 크랙을 지나 허리 테라스에 올라섰다. 아! 드디어 표범을 해치웠다. 나는 내 마음속의 나태와 비겁을 이기고 내 생명과 의지에 충실했다. 고난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작은 목표를 성공한 기쁨! 바로 이런 것이 삶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가슴 뜨겁게 뿌듯함이 저며왔다. 뒤이어 상형이형, 동건이가 무사히 올랐다. 하강도중 박쥐 소나무에서 참외를 먹고 내려왔다. 텐트에 도착하니 종선 형님이 직접 짜장을 볶고 계셨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지난번에 사람이 밀려 완등을 못한 경송길을 등반하기로 했다. 경송길은 작년 가을에 경송산악회에서 은벽 2피치 크랙 인 쪽의 슬랩으로 코스를 개척하였으나 개통식 때 톱이 추락하는 그레이드 평가 5급의 난 코스이다. 톱은 등반대장인 문균이 형이다. 두 여자 대원도 은벽 쪽에서 훈련하기 위해 같이 출발했다. 경송길의 특징은 3-5미터 간격으로 볼트가 계속 이어져 어느 피치에서는 반드시 호른발로 볼트를 밟고 또 다른 피치에서는 왼발로 볼트롤 딛어야만 하는 곳이다.
더 이상 코스 개척이 불가능해진 선인에 억지로 낸 코스니 만큼 까다롭기 한이 없는 슬랩이다. 동건이 말대로 매 피치의 볼트 주위에는 핏자국이 향상 있다. 태영이 형과 나는 처음으로 같이 등반을 하게 되었다. 문균이 형은 올해 들어와 무서운 등반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대장답게 1,2피치를 가볍게 치고 은벽 크랙이 시작되는 곳에서 동건이와 함께 자일을 조작하다 매듭을 떨어뜨렸다. 형의 머리 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는지 기분 나쁘다며 빽을 한다. 밑에 있던 대원들은 영문을 모르고 대장이 자신이 없나 보구나 하며 놀려댔다.
뒤이어 구맥팀이 경송에 붙었고 우리는 여자 대원에게 크랙 등반법, 하강법을 교육하고 슬랩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만장봉 쪽에서 "낙석"이란 소리에 위를 보니 수박보다 조금 더 큰 바위 3-4개와 작은 돌들이 경송길을 무서운 속도로 덮쳐왔다,. 모두들 재빨리 피했다. 다행히 낙석은 우리를 피해 수많은 파편으로 부서져서 떨어졌다. 영진이 형은 70도의 슬랩을 뛰어서 트레바스하여 피했다. 초인적인 행동이었다. 현용자는 오도 가도 못할 곳에 있었기 때문에 피하지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 있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왼쪽의 큰 침니에서 신음 소리가 났다, 구맥팀의 톱이었다. 그는 슬랩에서 꼼짝못하고 떨어지는 바위를 피하다 작은 파편을 옆구리에 맞고 추락했었던 것이다. 작은 돌이지만 가속도에 의해 상당히 충격을 주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고 약간의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었을 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톱의 빌레이를 보던 쎄컨이 자일을 놓고 낙석을 피해 도망갔다는 사실이다.
자신도 살려고 무의식중에 한 짓이라지만 문제점을 제기한 행동이었다.
영진이형 말씀대로 "크라이밍에 실패한 클라이머는 용서할 수 있어도 빌레이에 실패한 클라이머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도망가지 않고 톱을 확보했을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문균이 형이 빽을 하지 않고 계속 등반하였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치가 떨린다. 바로 그 자리에 낙석이 덮쳤기 때문이다.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기에 충분한 낙석이었다. 하나님하고 부처님께 천만번 감사해도 부족할 것이다. 문균이 형의 순간의 결심이 목숨을 구한 것이다. 문균이 형은 다시 태어났다며 크게 기뻐하신다. 구맥팀도 그 정도 다친 것이 천만다행인 것이다. 모두들 구사일생한 기분으로 석굴로 향했다. 암벽 등반 중 위험은 등반자 자신의 체력, 기술, 심리적 불안 등 주체적인 것과 눈, 비, 바람, 기온, 낙뢰, 낙석 등 외부의 어쩔 수 없는 객체적인 것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체력이 모자라고 기술이 부족하고, 자신이 없으면 등반을 하지 않거나 빽을 하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꼼짝없이 위험 요소와 맞부딪혀 대처해 나기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때에 등산에 관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장비가 자신의 유일한 보호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명약관화한 것이다. 은벽 쪽은 원래 낙석이 잦은 곳이다. 영진이 형이 화이버를 쓰라고 해지만 나는 톱도 아닌데 불편하게 왜 쓰냐고 쓰지 않았던, 나의 어리석음을 깊이 반성했고, 구맥의 톱은 화이버를 쓰지 않았으나 다행히 머리를 피해 옆구리에 맞았다. 어쨌든 큰 사고를 무사히 피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다시 한번 산행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석굴에 도착하니 기활 형님과 형수님 귀여운 삐삐와 미라가 수박 2통을 사 가지고 오셨다. 오후 4시 반경에 하산을 한다.
김경균 바위 레이빽을 10번 이상 시도해도 되지가 않는다.
영진이 형은 레이빽과 오버행을 모두 성공해 이제 김경균 바위레이빽은 완등하는 사람은 5명이 됐다. 대원 모두가 삼양동 기활 형님 댁으로 가서 형수님이 해 주시는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즐겼다. 단숨에 두그릇을 해치웠더니 배가 너무 불러 돌리는 마이티판이 졸음으로 가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