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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악산우회 맑은뫼에 비친 빙벽달인들의 자화상 글 이민호 객원기자 /사진 신준식 기자 형님! 지금 어디십니까?”
전설처럼 내려오는 청악의 스토리가 궁금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지나간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듯 들려주는 선배들의 이야기 속으로 긴 시간의 여행을 떠난다. 청악산우회원들의 토왕성에 대한 태도는 사뭇 숭배적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1985년 12월 말부터 청악산우회는 토왕성 빙폭 등반을 목표로 31일간 구곡폭포에 캠프를 설치하고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을 마친 이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누구라도 구곡에서 한 달 동안 이렇게 살면 토왕폭을 등반하는 것은 문제없다”라고. 그렇다. 맞는 말이었다. 그 당시 훈련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전 회원 등반 회수 187회, 50회 이상 등반자 2명. 당시 열악한 장비와 등반력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대기록들이었다. 구곡 빙폭 길이를 단순히 50미터로 계산한다고 치자. 총 등반거리가 9350미터에 이르는 셈이다. 그러니 처음 2인 1조로 훈련할 때 3시간씩이나 소요되던 등반시간은 한 달이 지난 후 한 시간이내로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곡 빙폭 훈련을 마친 후 이 정도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준비된 특공대원들(?)은 토왕성 빙폭으로 향했다. 1977년 도전자의 발길을 처음으로 허용한 토왕은 198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단독등반이 이루어질 만큼 거센 도전을 받았지만,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등반할 수 있는 빙폭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악산우회는 준비된 도전자들이었다. 그들은 토왕성 빙폭 상, 하단을 2인 1조 나누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전장 300여 미터의 국내 최장폭 토왕을 등반해내기에 이른다. 계획에서부터 등반, 그리고 보고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한 후, 당시 산우회장이었던 장기활씨는 안나푸르나 초등 후 모리스 엘조그 대장이 말한 것처럼 이런 선언을 했다. “청악에게는 또 다른 토왕폭이 있다. 우리 모두의 뜻을 모아 반드시 또 다른 토왕폭을 찾겠다.” 당시 그들의 높은 등반 욕구와 의지가 엿보이는 말이다. 청악산우회의 등반 경력을 잠시 살펴보자. 설악산의 마등령과 귀때기청봉 직선등반, 화채봉 마등령 직선등반, 아이스 바일의 꽈배기식 손목걸이 개발, 소승폭 초등, 소토왕폭 초등, 대승폭 단독등반, 구곡폭포 여성 최초 선등, 캐나다 록키지역 대빙폭 등반, 설악산 소토왕골 암장 개척, 도봉산 선인봉 청악길(5.11a/b) 개척, 설악산 토왕폭 및 장군봉 하강루트 개척, 회원 다수의 타일랜드 프라낭 5.13급 등반, 살라테월 단독등반, 그리고 제4회 대한민국산악상 개척등반상 수상 등등, 이들의 선구자적 활약들은 한국 등반문화 발전에서 한 몫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의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청악산우회는 전회원의 고른 등반능력을 시험하는 등반을 기획한다. 1990년 2월, 청악은 다른 산악회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고(?)를 쳤다. 이른바 토왕폭 5개조 10명 동시 등반이 그것이다. 이는 산우회 회원 개개인의 등반 능력을 조직적으로 육성시켜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 각 단위 산악회가 이룩한 등반들이 대개 뛰어난 한두 명의 클라이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라면 청악은 달랐기 때문이다. 실제 토왕폭을 프리솔로로 다섯 명이 등반할 수 있는 산악회가 있을지는 몰라도, 선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 있고 그 파트너로 후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어찌 보면 이벤트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대규모 등반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일로 기록될 것이다. 청악산우회에도 간판스타는 있다. 그의 이름은 김운회. 1971년 창립되어 35년이 지난 오늘까지 매주 산행을 하며 정통 알피니즘의 추구하는 청악산우회의 가장 큰 강점은 선후배간의 팀웍을 실현해 나가며, 창립 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꾸준한 활동에 있다. 청악산우회는 ‘맑은 뫼’라는 회지를 냈다. 맑은 뫼는 단순한 회지 이상으로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초기 ‘맑은 뫼’는 단순히 장기산행 보고와 등반기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곡 빙폭에서의 훈련과 토왕 빙폭 등반을 마친 후,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수직빙벽등반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때 ‘맑은 뫼’는 한국적 빙벽 특성에 맞는 장비에 대해 평가, 각 장비별 장단점과 사용법, 등반자세와 확보기술, 훈련방법 등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 내용들은 외국 서적을 참고하기보다는 회원들 자신의 체험을 정리한 내용들이었다. 500부를 발간해 각 단위 산악회와 대학산악부에 발송하였다. 입소문을 통해 빙벽등반의 교과서로 사용 되면서 주변의 요청이 쇄도(?)하자 200부를 추가 제작했다. 어느 산악회에서는 이 회지를 교재로 삼아 민박집에서 합숙하며 등반을 했는데, 하도 책을 많이 봐서 너덜너덜해졌다고 한다. 학창시절 필자 또한 교실 뒷자리에 앉아 수업과는 상관없는 ‘맑은 뫼’를 읽으며 토왕을 꿈꾸었었다. 청악산우회와 함께 한 하루가 지나고 땅거미가 내리자 여기저기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후배들이 등반을 마치자 선배들이 나서서 장비 정리를 돕는다. 로프와 등반에 사용했던 스크루와 퀵드로 그리고 머물렀던 자리 정리에 이르기까지 후배들의 마지막을 챙기는 선배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