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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와 엔카
김 기 태
우리는 살아가며 기쁠 때나 슬플 때, 마음속 감정을 노래로 풀어낸다. 누군가의 귀에 들리지 않는 혼잣말처럼 흥얼거리기도 하고, 장단에 맞춰 구수하게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여럿이 감정을 모아 한목소리로 노래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중, 정서 깊은 감정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장르가 있음에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다. 바로 ‘트로트’다.
국악은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우리의 전통 음악이지만, 일상 속에서 쉽게 다가가기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반면, 근대에 들어 대중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은 트로트와 발라드는 우리 생활에 익숙하다. 발라드는 서양에서 건너온 음악이지만, 젊은이들의 감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수록, 그들의 마음도 점차 트로트에 끌리게 된다. 통계로도 이를 알 수가 있다. 시장에서 트로트 음반은 여타 장르보다 꾸준히 잘 팔리고, 트로트 가수의 활동 수명도 길다. 이는 우리 국민이 트로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뽕짝’이라는 이름으로 서자 취급을 받는 트로트는 여전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 현실이다. 음악을 전공한 이들조차 트로트를 외면한다. 학식이 있거나 지위가 높은 이들이 겉으로는 오페라나 발라드를 운운하며 고상한 척하지만, 술 한 잔이 들어가고 흥이 오르면 정작 그들이 마이크를 잡고 부르는 건 언제나 트로트였다. 그것은 아마도 트로트의 리듬 속에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굴곡, 우리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군부가 집권하던 제3공화국 시절엔 트로트가 왜색이 짙다 하여 정책적으로 배제되기도 했다. 국악만을 보호하려 했던 당시의 방향은 오히려 대중과 음악 사이의 간극을 더 벌려 놓았다. 음악을 전공한 이들은 이 불합리함을 개선하고 국민에게 진실을 알릴 책무가 있었지만, 각자의 생계 앞에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밤 골목을 헤매며 떨어진 동전을 줍듯, 조용히 살아갈 뿐이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 노래와 음악을 사랑해온 민족이다. 몇 날 며칠을 노래했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남아 있을 정도다. 최근의 노래방 문화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다. 특히 노래방 기기와 반주기의 개발은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을 만하다.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를 잘 모르는 남미의 사람들도 우리의 전통 가요와 사물놀이를 들으면 반응이 뜨겁다. 작은 나라에서 5천 년의 역사를 지닌 단일 민족이 대표하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과거에는 606, 707, 909와 같은 반주기가 너무 비싸 일반인은 쉽게 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IT 산업의 발전 덕분에 노트북 하나에 1만 5천 곡 이상의 악보가 저장해 있어, 언제 어디서나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한국에서 개발된 이 반주기는 중남미의 음악가들이 꿈꾸는 반주기다.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반주기 가격도 50만 원 선으로 대중화되어,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기쁨이 되고 있다.
트로트는 우리의 정서가 담긴 소리요, 삶이 녹아든 리듬이다. 천박하다는 낡은 인식을 벗고, 이제는 당당히 우리의 음악으로 품어야 할 때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딴따라’라는 말의 어원은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랑 극단이 전국을 돌며 공연하던 시절, 공연을 알리기 위해 트럼펫과 북을 들고 동네를 누비며 연주했던 리듬 “딴따다 딴따, 딴따다 딴다”가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지며, 결국 이들을 ‘딴따라’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음악과 예술에 몸담은 이들을 낮춰 부르는 이 말은 그렇게 세월을 타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말이 있다. 우리가 노래방에서 “내 18번이야”라고 말할 때의 ‘18번’이란 표현이 있다. 이 역시 유랑극단에서 유래된 말로, 공연 순서 중 18번째 무대가 극단을 대표하는 주요 공연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누군가가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18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예전에는 아쟁을 연주하며 돈을 벌던 사람을 ‘풍각쟁이’라 불렀고, 시간이 흐르면서 음악을 하는 사람 전반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 정서 깊숙이 자리 잡은 트로트는 참 묘한 위치에 있다. 일본에서는 “엔카의 원조는 한국의 트로트다.”라고 말하는데, 정작 우리는 트로트를 왜색 가요라 치부하며 스스로 낮추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트롯', '트로트', '도롯도'라는 명칭은 영어 ‘trot’에서 비롯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각기 다르게 발음된 결과다.
일본 엔카의 창시자로 알려진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네 살 무렵 우리나라로 건너와 인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 선린상고를 졸업했다. 한국일보 창립자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장기영 씨와는 동기이며, 그의 이름은 지금도 선린상고 제15회 졸업생 명단에 남아있다. 학교에는 그가 기증한 시계탑이 여전히 남아,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
음악에 유난히 관심이 많던 그는 ‘황성옛터’를 작곡한 전기린 씨의 옆집에서 자라며 자연스레 한국 전통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전통 음악을 악보로 기록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며, 청진동에 있던 하숙집 근처 기생 집에 들러 당대 최고의 기생들이 부르던 노래를 연구하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가 받아들인 ‘꿍짜자 꿍짜’라는 리듬은 고수의 북소리에서 착안한 것이고, 비음과 두음, 복식 호흡에서 비롯된 창법은 국악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가 마사오 씨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체계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수많은 엔카를 작곡하며 이름을 알렸다. 1930년,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라는 노래로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이 곡은 우리나라 백제 시대의 궁중음악인 ‘정읍사’의 리듬과 흡사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부에서는 정읍사를 도용한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에서 자란 그의 성장 환경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음악 정서를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다.
이처럼 트로트가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 리듬과 호흡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너무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엔카 역시 한국에서 성장한 고가 마사오의 손에서 태어난 만큼, “엔카의 원조는 한국이다”라는 말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그렇다면 트로트와 엔카의 뿌리는 결국 한국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알리는 일은 우리 음악인들의 몫이다. 그러나 지금 그 책임은 소홀히 다뤄지고 있고, 이 무관심은 어쩐지 우리를 쓸쓸하게 만든다.
김치의 종주국은 분명 우리나라다. 그러나 이를 국제적인 상품으로 규격화하고 세계화한 것은 일본이다. 임진왜란 당시, 남원의 도공 심수관과 그 일행이 일본으로 끌려가 천민이었던 신분에서 중간 계급으로 대우받으며 장려된 결과, 그들의 기술은 일본 도예를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과정을 그저 일본의 약삭빠른 전략으로만 치부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와 안일함을 돌아봐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상대를 비방한다고 해서, 우리가 놓쳐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로 우리는 트로트를 생활 속에서 즐기면서도, 왜색이 짙다며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이곤 한다. 숨소리 하나, 리듬 하나까지 우리의 정서가 배어 있는 음악인데도, 우리는 그 주인 자리를 스스로 외면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엔카의 원조는 한국"이라 인정하는 반면, 우리는 오히려 트로트를 일본 가요라 치부하며 업신여기기 일쑤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온다. 마치 우리는 늘 지는 싸움만을 반복하는 것 같고, 일이 끝난 후에야 허둥지둥 뒷 북만 치는 듯한 허탈함이 마음을 적신다.
색소폰을 연주하는 방식은 연주자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트로트를 연주할 때는 원곡의 감성을 최대한 충실하게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발라드는 삶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처럼 부드럽게 연주해야 한다. 저음에서는 서브 톤, 고음에서는 크린 톤으로 표현하며 소리는 최대한 절제해 담백하게 내야 한다. 텅잉, 비브라토, 벤딩, 후두두 등 다양한 기교가 더해져야만 트로트의 다채로운 감정을 ‘천의 소리’로 풀어낼 수 있다. 아직 내 입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귀는 열려있다. 그래서 오늘도 연습실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색소폰을 불고 살아온 지 어느덧 20년. 이 글은 그동안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엮어 써 내려간 것이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잃어버린 우리 것을 다시 찾아 자랑으로 삼으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2008년, 충청대학에 트로트 학과가 신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 한켠이 뿌듯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뒤늦은 걸음일지언정, 그래도 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행히 모 방송국에서 일본 엔카와 한국의 트롯 대결이 우리들의 관심을 가지며 한국과 일본 국민의 정서를 같이하며 가까워지기를 기대한다.
우리 민족에게 우리의 노래가 있다는 것이 뿌듯하게 느끼는 아침이다.
*충남 서천 판교 출생, 충남대 농공과 졸업,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 마을 촌장, 수필집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희안한 수상록 등. blog.daum.net/ondong
감사 일기를 접하면서
김 순 길
오늘 예배에서 목사님이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으로 감사 일기장을 기록하라 하신다. 매일, 다섯 개의 감사 제목을 들어 기록하라고 한다. 존 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나의 비좁은 가슴팍에는 하나님의 광대한 계획이 늘 숨 쉬고 있다. 살다 보면 어려운 상황이 닥칠지라도, 그때마다 그의 사랑의 음성으로 모난 내 마음이 둥글게 깎여 나간다. 문제가 변하여 감사의 조건이 된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늘 무엇을 더 얻으려 하며 욕심을 갖는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어 하고, 친구의 금빛 왕관을 흠모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는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아니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일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세상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 두 갈래 길로 갈라진다.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가졌어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많이 못 가져 안달하는 수전노가 된다. 반면에 한 푼 가진 것이 없어도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면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에 즐겁다. 감사하는 마음은 조건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어려운 상황이 닥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어제 일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정원은 수국밭이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삽목하여 심은 수국이 번성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14년 연륜을 지닌 수국은 보랏빛, 진분홍빛, 하늘빛 등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때를 따라 만발한 꽃이 서리가 내려 시들기 전, 한 아름 욕심껏 꺾어 단지에 꽃아 1년을 즐긴다. 다음 해 다시 새것으로 바꾸어 꽂는다. 내일 서리가 내릴듯하여 서둘러 꽃을 한 아름 꺾어 단지에 가득 꽂았다. 남은 꽃을 병에 꽂아 바구니에 넣어 벽에 걸려고 한다. 걸려는 곳이 높아서, 손이 닿지 않아 소파에 올라섰다. 발꿈치를 들고 꽃을 벽에 걸려던 순간, 한발이 미끄러져 뒤통수를 마룻바닥에 부딪히며, '쿵' 하고 내동댕이 첬다. 꼬리뼈가 아프다. 큰일 날뻔한 순간이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뻐근하지만 걸을 만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평소에 넘어지면 안 된다고 조심하였건만, 한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불행 중 이만함이 얼마나 감사한가?
세월호 참사 때 일이다.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고 2학년인 귀한 아들을 잃은 장로님은 아들이 믿음을 가지고 변을 당했음을 감사한다. 아버지의 절규를 듣는 이마다 가슴 깊이 전율을 느낀다. 이처럼 고난은 감사함으로 인도하는 매개체가 된다. 편안함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은 진정한 사랑을 알고 서로 나누면서 베풀면서 감사하는 마음이다. 상대의 부족함을 서로 보듬고 어루만지면서 배려하고 살아가면서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의 마음에는 기쁨이 따른다. 감사의 마음은 가슴이 벅차 넉넉하다. 누가 하나를 원하면 둘을 주고픈 마음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 늘 향기롭고 예쁜 꽃이 피어있다. 오늘 이 순간은 어제 간 이가 그토록 그리던 소중한 날이다. 이 순간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죄악에서 나를 구원해주셔서 거듭나게 하심에 감사한다. 두 눈이 밝아 찬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가슴 깊이 만끽할 수 있어 감사한다. 두 귀가 경이로운 음성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입으로 맛있는 음식을 음미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두 발이 가고픈 곳을 멀쩡히 걸어갈 수 있어, 보고픈 이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나는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더 많은 것, 너무 큰 것 욕심내지 않고 지금 주어진 것에 족함에 감사한다. 감사 일기장에 그날에 감사함을 들어 조목조목 기록하면서 감사함으로 부유한 자가 되려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을 되새겨 본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 수필 부문 신인상, 수필집 향원의 열매,
kimsk3527@hanmail.net
기다림의 끝에서 딸의 삶을 바라보다
오 석 진
1989년 11월 20일 오후 5시경. 늦가을의 공기가 아직도 손끝처럼 선명하다. 날은 어두컴컴 해지고, 아내는 어제부터 진통은 있는데, 아직 나올 생각을 않는 듯하다. 잠시 지하상가로 석간신문을 사러 나갔을 뿐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은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분주한 병실 안, 작고 여린 울음소리가 공기를 깨뜨리며 번졌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 이제 내 삶은 새로운 색을 가지고 다시 시작되는구나.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몇 개만 간직한다. 그 장면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마음 한편에 조용히 놓여 있다가도, 문득 어떤 순간이 되면 생생한 색을 되찾으며 다시 살아난다. 너의 첫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잠시 후 4.0kg의 틈실한 너의 모습은 내 인생의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너는 내게 ‘아빠’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선물해 준 존재였다. 그날 병실로 들어서던 순간, “조금만 더 빨리 올걸…”하고 중얼거렸던 그 사소한 말은 사실 그 이후 평생을 따라다닌 감정의 씨앗이 되었다.
부모의 삶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조금 부족했고, 언제나 미완성이었고, 언제나 더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선행된다. 그런 마음의 씨앗에서 비롯된 이 글은, 너의 삶을 따라가며 나의 삶을 돌아보는 작은 기록이기도 하다. 너의 성장 과정 하나하나가 아빠에게 남긴 깨달음, 후회, 기쁨, 감사, 그리고 사랑의 기록이다.
잠시 후 재현 선배가 찾아왔다. 그 당시 아내는 배가 아프다고 한다. 당연히 그러려니 했는데, 고통이 점점 심해져 온다고 하여, 재현 형과 포장마차에 나가면서 간호사에게 이야기하고 나갔다.
한 시간여 후 돌아오니, 출산 후 지혈이 되지 않아 배에 피가 고여 통증이 있었던 사실로 다시 시술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의료사고가 있었는데, 정말 천만다행으로 정상을 회복하였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눈이 맑은 아이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 아이는 눈빛이 또렷하네요”라고 감탄할 정도로. 아빠는 네 그 눈을 보고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작은 생명체가 어떻게 그런 깊은 눈빛을 가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 눈빛은 마치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아빠, 잘 부탁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너는 이미 성격의 뼈대를 갖춘 것처럼 보였다. 배고프면 울지만, 금방 뚝 그치고 또 방긋 웃었다. 어린아이의 기분 변화라기보다, 딱 필요한 만큼만 표현하는 절제된 아이 같았다. 그런 모습은 태어나 처음 받은 너의 인상 그대로였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스스로의 감정들을 작은 상자 안에 정리해두는 아이. 밤에 열이 나서 안절부절못하던 날들, 새벽 3시에 당직 병원을 찾아 헤맨 날들. 아빠 품에서 가쁜 숨을 쉬던 네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이 아이의 고통을 대신 아파해줄 수 없는 것이 부모라는 존재구나.”
그 무력감이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었다. 부모라고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느끼며 무기력해지기도 하였다. 다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으로 매일 다시 배우는 삶만 있을 뿐이었다.
네가 네 살이던 어느 날, 우리는 거실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너는 그때 이미 궁, 차, 포, 마, 상, 졸, 사를 알고 제 위치에 놓고 있었다. 장기 말의 ‘포’ 한 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너는 손을 허리에 얹고 말하곤 했다.
“아빠, 포 가져와야 해! 지금!” 그런 너의 고집스러운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슈퍼에 가서 장기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 너의 주장을 접었지. 그때는 그냥 귀여운 고집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너의 강한 성격, 네 주장과 선택을 분명히 하는 태도는 그때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회 날, 아빠를 향해 멀찍이서 조용히 웃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다른 아이들처럼 달려와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자랑스럽게 손을 흔드는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그러나 환하게. 그 웃음은 마치
“아빠, 저는 여기서 제 친구들과 함께 있어요. 근데 아빠 온 건 알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묘한 깊이가 있었다.
백화점에 갔을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도 없이 쓱 지나치던 너. ‘사주세요’ 하지도 않고, ‘이건 싫어요’ 하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지나치는 너를 보며 아빠는 알았다.
“아, 이 아이는 이미 자기 세계를 갖고 있구나.” 너의 세계는 작았지만 확실했고, 여렸지만 단단했다.
중학생이 된 너는 더욱 자기만의 리듬으로 움직였다.
어느 날, 같은 학교에 엄마가 근무하고 있는데도 엄마를 찾지 않고, 굳이 아빠에게 전화하여 “아빠… 아파요.”라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은 단순히 몸이 아프다는 뜻이 아니라, 함께 있는 엄마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빠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의 표시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렇게 의지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누구보다 독립적인 아이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초창기에 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며, 궂은 날씨일 때도 40 여분을 걸어 학교를 오갔던 너. 한 번도 등·하교를 도와주지 않은 아빠를 속으로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너는 스스로의 리듬으로 성장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40 여분의 길들은 너에게 ‘혼자 서는 힘’을 만들어 주었다. 아빠가 주지 못했던 부분을 네가 스스로 채웠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미안함보다도 너의 강인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대학 입시를 고민하던 날들, 아빠가 대학 입시담당 장학사이었음에도 담임 선생님과 진로 진학 문제를 상담하게 했고, 너는 여전히 혼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묵직한 부담을 어깨에 올려놓고 있었다. 아빠는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너는 부모의 의견보다 너 자신의 기준으로 방향을 잡는 아이였다. 그 모습이 대견스러웠고, 그래서 더 이루 말할 수 없이 안쓰러웠다.
대학생이 되자 학업이 바빠 학교 근처에 원룸에서 혼자 살기도 했지. 그 바쁜 시간에도 간간이 아르바이트도 했었지. 밤 11시부터 새벽 1~2시까지 고3 수학 지도도 하고, 방학이면 백화점에서 캐셔로 온종일 서 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아빠가 브라질로 떠나던 날. 공항에서 너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강한 아이였던 너. 할 말은 스스로 다 하는 아이였던 너.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왜 우리만 두고 가…?”
그 말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라, 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 울음은 아빠 마음속에 깊게 남아 있다. 너의 강함 속에 숨겨져 있던 여린 마음을 처음으로 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 취업하면서 너는 완성된 한 사람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 동료들과 소통하는 방식, 언니처럼 챙기기도 하고, 때로는 후배처럼 배우기도 하며, 너는 자신의 일터에서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를 지탱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좋은 사람과 만나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었다. 아빠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한 편의 길고도 아름다운 영화를 마친 뒤 조용히 크레딧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감동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결혼식 날, 너의 얼굴을 바라보며 덕담을 전하던 순간, 아빠는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곧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 눈빛에는 네가 걸어온 모든 시간이 담겨 있었고, 그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목이 꽉 메 더는 너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날 아빠의 눈시울이 붉어진 이유는 슬픔도, 아쉬움도 아니었다. 단지, 네가 너무도 훌륭하게 자라주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가 어른이 되기까지, 아빠는 공무에만 매달리고 가족을 저버린 듯한 모습 즉, 늘 충실한 아빠가 아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간 시간들, 네가 내민 도움의 신호를 놓친 날들, 너무 늦게 깨달은 것들…. 그런 순간들은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고 뾰족한 모래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네가 강해진 이유 일부가 아빠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면,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부모는 완벽함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미완성의 여정이었다. 이제 너는 너만의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그 가정은 너의 마음, 너의 성실함, 너의 배려, 너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채워질 것이다. 아빠는 더이상 네 곁에 항상 서 있을 수는 없지만,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늘 너를 응원할 것이다. 너는 아빠에게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너의 힘으로 성장한 사람이며, 너의 노력으로 아름다워진 사람이다. 네가 살아갈 세상은 앞으로도 수많은 날씨를 가질 것이다. 맑음도, 흐림도, 비도, 바람도 하지만 너는 그 모든 날씨를 견뎌낼 힘을 가진 사람이다. 아빠는 그 사실을 너의 삶에서 이미 수도 없이 보아 왔다.
딸아! 너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늘 감사했다. 그리고 너의 삶 속에 내가 부족하게 채워 넣은 빈칸들 때문에 늘 미안했다. 하지만 그 모든 마음을 넘어서는 가장 큰 감정은 단 하나였다.
“너를 사랑한다.”
그 한 문장이 아빠가 평생 배워온 모든 마음의 결론이다.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삶을 살아가든 아빠의 마음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너를 향해 있다. 너는 아빠의 가장 큰 자랑이고, 아빠 인생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발자국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네 삶은 아빠에게 늘 소중한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딸아, 행복해라. 아빠는 언제나 너의 편이다.
* 충남 공주 출생, 공주고등학교, 공주대 영어교육과 졸업, 한국교원대 대학원 교육학 석․박사, 한남대 대학원 석사, 전)대전광역시교육청 장학사(관), 브라질 주상파울루 한국교육원장, 전)대전광역시교육청 교육국장, 행복교육이음공동체 대표, oshisty@hanmail.net
앨범 속에서
김 정 자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변하는 것들에 적응하느라 바쁘다.
시간이 늙었어도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을 갖고 살다 보니, 세파에 시달린 이마에 주름살이 느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향 집에 가보았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실로 삶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장에 간 엄마를 마중했던 느티나무 이파리와 아버지의 손과 흙으로 지어진 흙담도 흔적이 없다. 장독 뒤에 수줍게 피어난 봉숭아꽃으로 손톱을 붉게 물들이고, 첫눈을 기다리던 소녀의 손 마디마디에는 지난 세월이 굵게 묻어있다. 하얀 새끼손가락에 꽃반지 끼고 무언가를 약속했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참으로 다행인 것은, 집 정리를 하며 두꺼운 겨울옷을 정리하다 창고에서 앨범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속에는 고향 집도 있고 아버지와 엄마도 계셨다. 앨범을 정리하다 보니, 오랜 가뭄에 애태우던 가슴과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라는 얼굴, 거친 손 등을 천천히 들여다보니 엄마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을 운동회 날, 달리기를 마친 자식들을 먹이고 싶어 아껴 놓았던 찹쌀로 밥을 짓고, 삶은 계란, 환타 등을 가지고 와서 동네 어른들과 같이 먹던 흔적들도 있다. 팔에 일등 도장을 찍고 온 딸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워, 사진 찍어주는 사진사 아저씨에게 꼬깃한 돈을 꺼내 주고 찍은 사진을 보니 가슴이 아려온다. 사진은 색이 바래고 흠집이 있지만, 엄마의 모습은 내가 어릴 적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앨범 속 사진들이 지난 세월을 하나씩 풀어 놓는다. 내가 이십 대의 나이에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사십 년 넘게 살면서 남편과의 불화나 어려웠던 흔적 없이 행복한 모습이다.
아들의 첫돌 때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을 앞에 놓고 찍은 사진 속에는, 돌잡이 아들의 장래 희망에 대한 기대도 남아있다. 여름휴가에 물속에서 아들과 포도를 먹고 물장구를 치며 놀던 젊은 엄마는 한껏 멋을 내기 위해 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폼잡고 서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 그리운 형상들이 앨범 속에 남아있어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제는 앨범 속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고 없지만, 나만의 의미가 담긴 소중한 물건이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 이제는 사진들을 분리해서 아들 사진은 아들에게 전해주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은 소중하게 간직하자며 사진을 한 장씩 눈에 담았다. 세월 따라, 날씨 따라, 사진은 군데군데 흠집이 났고, 앨범 겉장은 헐고 낡았다. 하지만 사진에 묻힌 기억만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때 그 시절 느꼈던 감정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변치 않을 듯하다.
두 아들을 포도가 한창일 때 낳아서 그런지, 포도를 유난히 좋아한다. 까만 포도알이 달린 포도밭을 보면 행복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 같아, 참으로 흐뭇하다, 이제, 내 마음속에도 달콤하고 상큼한 포도알이 가득 들어찰 날도 올 것이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평소 사고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서민들의 삶이 팍팍하지만, 이럴 때 앨범 속의 추억을 꺼내 보면 힘이 생길 것이다. 자연은 늘 한결같고, 나무는 한 뼘 더 자라 든든해지며, 낙엽은 지고, 그럭저럭 또 겨울이 올 것이다.
저녁 준비를 하려다 보니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 왠지 혼자라고 생각하니 쓸쓸하다. 앨범 속의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본다. 어디에선가 들리는 듯해서 밖을 내다본다. 가을 향기에 추억도 함께 실려 온다. 젊었을 때 꾸었던 꿈도, 우아한 노후를 기대했던 것도 이제 세월 앞에 내려놓는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행복을 찾는 오후가 저물고 있다.
* 충남 금산 출생, 동서문학상, 대전문협 올해의 작가상, 수필집 『그랬구나』, 『새참』등, kim-qhfma@hanmail.net
아버지의 영농일기
진 재 훈
퇴직 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로 했으나 생각처럼 일이 쉽지는 않았다. 나는 거처할 빈방을 청소하다 장롱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품 영농일기를 발견했다. 대학노트에 투박한 글씨체로 매년 파종 날짜, 작업내용, 판매 수입 등 농사일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공책을 잠시 넘겨보다 문득 아버님 말씀이 생각났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셨는데 자식 중 꼭 한 명만이라도 가업을 잇는 아들이 있었으면 농사 박사를 만들 자신이 있었다며 아쉬워하셨던 점이다. 농사에 관해서 만큼은 주변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나 박사로 통했다.
농사일은 풀과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밭 주변에 무성한 풀을 없애기로 마음먹고 창고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녹슨 낫을 찾았다. 먼저 낫을 갈아야 하는데 숫돌질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중학교 때 우리 집은 소를 키웠기에 방과 후 들에 나가 꼴 베는 것이 일상이라 낫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세월이 오래다 보니 그 쉬운 일조차 헷갈렸다. 안과 밖의 어느 쪽을 먼저하고 얼마나 오래 숫돌질을 해야 할지 부터가 난감했다. 잘못하면 낫을 버린다는 말을 아버지께 수없이 들어왔기에 더욱 그랬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쉽게 이해되지 않아 대충 과거 기억을 더듬어 한쪽을 많이 갈고 반대쪽은 날만 살짝 세워 밭으로 나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풀이 잘 잘리지 않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반대로 날을 갈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종일 새벽부터 밭에 나가 풀과 씨름하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데, 어머님이 오시더니 너무 늦었으니 그만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 식사를 하라며 재촉하셨다. 조금 남아있는 풀마저 베고 일을 끝내려 하는데 그만하라며 역정까지 내신다. 그런 어머님 말씀이 조금 야속했다. 과거에는 아버님이 저녁 늦게까지 일을 끝내지 않으시면 자식들 배 골린다며 그만 마무리하라며 성화를 하셔서 자식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말이다. 그 당시는 농사일이 지겨워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고 집에 갈 생각만 하며 일을 건성건성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내가 더 일 욕심도 부리고 꼼꼼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걸 보니, 어릴 때와 다르게 아버님 성품을 닮아가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까지 하고 나니, 안 하던 일을 해서인지 온몸 여기저기 근육통이 밀려온다. 일찍 잠자리에 들려 했으나 마음과 다르게 정신이 더욱 또렷해진다. 학교 다닐 때는 공휴일마다 일을 시키시는 아버지가 그렇게 싫었다. 오히려 농사일 때문에 자식 농사 망친다며 아버지와 서로 다투곤 하셨던 어머니가 무척 고마웠다. 그런데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어머님의 자식을 위한 다정다감함보다 비록 싫은 소리를 들을망정 열심히 노력해 돈 벌어서 자식 5남매를 대학까지 보낸 아버님의 일 욕심이 더 고맙게 느껴진다.
한번은 농기구 살 일이 있어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 시장에 나간 적이 있다. 상점 주인들이 내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며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다. 안 그래도 우리 자식들도 내가 나이 들면서 외모와 행동이 할아버지 같다며 놀려 대는데 말이다. 게다가 아내는 한술 더 떠 아버님의 고집까지도 닮아간다며 핀잔을 주니 핏줄은 못 속이는가 보다. 그래도 그런 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예전에 TV에서 우리 의식 세계를 토론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우리의 행동 중 20%만이 본인이 의도하는 것이고 나머지 80%는 무의식, 즉 가족 내력 및 과거의 경험치 또는 자라온 환경에 따라 자연적으로 표출된다고 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밈(meme)’처럼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말이나 행동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는 지금의 내 모습을 견줘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묵혀둔 밭이라 잡풀이 아프리카 초원을 연상케 한다. 잡초를 베고 나면 옷 여기저기에 도깨비 풀씨가 화살촉처럼 다닥다닥 붙는다. 예전에 중국영화 속에서 수백 명의 진(秦)나라 군사가 퍼붓던 화살 쏘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고, 웅크린 고슴도치 등가죽 같기도 하다. 살갗을 파고드는 풀씨를 옷에서 떼어내는 일도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농사일이 풀 베기 작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밭 갈기, 씨 뿌리기, 농약 치기, 비닐하우스 관리 등 할 일이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나도 영농일기를 참조하며 노력하면 아버지처럼 농사를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농업 박사가 된다면 아버님의 생전 바람이 해결된 것이기에, 하늘에 계신 부친도 기뻐하시리라 생각되어 기쁜 마음으로 농사에 임하려 한다. 예정된 밭두렁 잡풀을 모두 베고 나니 성취감에 마음이 뿌듯했다. 비닐하우스 위로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혼자가 아닌 아버지와 함께 걷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린 시절 윗마을 할아버지 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아버지 등에 업혀 졸린 눈으로 밤하늘 별을 보며 다시 귀가 하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꼬불꼬불한 논둑길을 지날 때 듣던 청량한 개구리 울음소리와 아버지 등에서 느껴졌던 따스한 체온이 6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니 아마 그 시절이 그리운가 보다.
훈남 생각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옛날이 그리워지는가 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랄까, 너도나도 친구 찾기에 온 정신을 다 뺏기는 걸 보면…
공중파 TV 프로그램에서도 잘나가는 탤런트들이 나와 옛 은사나 짝사랑했던 친구를 찾는 내용을 흔히 볼 수 있다. 며칠 전, 고맙게도 우리의 마당쇠 승재가 옛 추억을 되새겨 보자고 “OO 24회 개띠”라는 우리만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예전의 친구 찾기 프로그램인 ‘아이 러브 스쿨’보다는 훨씬 강력한 흡인력이 있어서인지 벌써 회원으로 가입한 동창들이 40여 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카페 개설 후 수많은 글과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사진들이 많이 올라왔다. 더욱이 지역 친목 소모임 행사를 하고 나서,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참석자들 사진을 화면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참여 열기가 너무 높아 우리가 이렇게 옛 추억에 목말라 했나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이제 시작이지 않은가. 참여하는 친구들도 조금 더 넓히고, 내용도 풍성해지도록 중지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나 소외된 사람이 있듯이, 카페에 참여하고 싶어도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는 친구들과 수다 떨고 얘기하고 싶어도 먹고 사는 일이 바빠 그러지 못하는 동창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부분에도 신경을 쓰자.
아무쪼록 우리의 사랑방이 소수만의 전유물로 전락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려운 친구들에게는 빛이 되어주고 서로를 이 공간에서 맺힌 것을 풀 수 있는 그런 ‘소통의 무대’가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서로 진실성을 갖고 모두에게 배려와 우정으로 대할 수 있는 그런 장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우리 모두 이런 점들에 대해 고민을 함께했으면 하는 조그만 바람을 가져본다.
∥ 어제는 공주 인근에 있는 친구 별장에서 열린 중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했다. 인적 드문 외딴곳에서 모처럼 일상을 떠나 오랜 벗들과 술 한잔하며 밤새며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물감 뿌리듯 내리는 장맛비와 싱그러움을 자랑하는 소나무 잎 그리고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창밖에서 나를 반긴다. 솔직히 나도 이런 별장을 하나쯤은 소유하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인생을 논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얼마 전 TV에서 북유럽의 선진국 노르웨이 사람들의 여가생활이 방영됐다. 그들도 풍광 좋은 곳에 별장을 짓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꿈이란다. 참으로 소박한 생각이지만 우리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그 별장은 우리처럼 화려하고 멋진 시설이 아니었고, 심하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시골 정자보다 조금 나은 정도 수준이었다. 더구나 전기와 수도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그곳에서 하루라도 생활하기에는 매우 불편할 것 같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도시와 똑같은 생활을 하려면 굳이 별장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밖에 없는 그들 자녀 결혼식도 1년 뒤 그곳에서 치를 예정이라는 것이다. 남에게 과시하고 편안함 만을 추구하려는 우리에게 조금은 힘이 들더라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과연 내가 별장을 짓는다면 친구처럼 대한민국식 별장을 지을 것인지, 아니면 노르웨이식 별장을 지을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암과 싸우는 친구 남수를 생각하며
오늘 아침 출근길 한 라디오 방송에서 ‘천금매택(千金買宅) 팔백매린(八百買隣)’이라는 글이 소개되었다. 집 사는데 1만 냥(현재가치 약 2억원)이라면 8천 냥(80%)은 이웃을 잘 얻기 위한 비용이라는 의미로 우리네 삶 속에서 주변 환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집이 아닌 삶을 돈 주고 산다면 이웃이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의 동창 친구 남수가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며 모임 총무가 나서서 좋은 일을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나도 날마다 카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내 주장만 펼치는 데 신경을 썼지, 친구의 아픔은 등한 시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오늘 동창 영옥이가 올린 글을 보고 무척 부끄러워졌다. 우리가 늘 친구를 말하며 살아가지만, 막상 친구의 아픔은 외면한 채 너무 이기적인 생각만으로 친구를 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서다. 그런 점에서 영옥이의 글과 라디오 방송은 나에게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커다란 경종을 울려 준 것 같다. 소개된 글처럼 전 재산의 80%를 주고라도 살 만큼 가치 있게 친구를 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몇만 분의 일 만큼이라도 친구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이러고서 친구라 할 수 있는지 참으로 부끄러웠다.
∥일본의 어느 신부님 이야기
얼마 전 출장길에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다. 아직도 머릿속에 그때 느낌이 생생히 남아있어 기억을 더듬어 옮겨 본다.
일본의 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란다. 낯선 청년 하나가 마을에 들어왔다가 얼마 후 떠난 일이 있었다. 그 청년이 떠나고 서너 달이 지난 뒤 마을이 발칵 뒤집혀 졌다. 마을 처녀 중 한 명이 임신을 한 것이다. 이제까지 마을에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한 번도 없었기에 사람들의 충격은 컸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긴급회의가 열렸고 처녀에게 배 속의 애 아빠가 누구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처녀의 답변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당 신부가 아이의 아빠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범인이 신부라는 사실에 너무 충격을 받았지만, 확인하기 위해 처녀를 데리고 마을 입구에 있는 성당으로 몰려갔다.
그때 신부는 정원에 물을 주고 있었다. 하늘같이 믿었던 신부의 잘못된 행동에 배신감을 느낀 마을 사람들이 신부에게 심문하듯 따져 물었다. 당신은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할 성직자로서 어찌 처녀에게 임신을 시켰냐고. 신부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마디 대꾸도 없이 계속해서 정원의 꽃에 물만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그러고 나서 하던 일을 계속하자 일부 흥분한 마을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어찌할 것 같이 삿대질까지 해댔지만, 행동에는 옮기지 못하고 웅성거리다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한두 명씩 자리를 떠났다.
몇 년이 지난 후 청년이 다시 마을에 돌아와 처녀에게 청혼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자 이번에는 청년에게 달려가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청년은 과거를 회상하듯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몇 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명수배자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으며, 한 아가씨를 만나 서로 마음이 통했고 본인이 성공한 후 다시 돌아와 결혼식을 올리자는 언약을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청년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또한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던 법관이 되어 둘만의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처녀에게 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거짓말을 했냐고 물었다. 처녀의 답은 간단했다. 청년이 범인이라는 이야기기를 하면 마을 사람들은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서라도 결국 청년을 찾아낼 것이고, 어떤 방법으로든 청년에게 해를 가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나 범인이 신부님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마을 사람들도 어쩔 수가 없어 고민만 하다 그만둘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 길만이 자신과 남자 친구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신의에도 감탄했지만, 한편으로는 무고한 신부에게 누명을 씌워 죄인 취급했던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매우 걱정을 했다.
사람들이 용서를 빌기 위해 다시 성당으로 몰려갔다. 마침 신부는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간의 사실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신부에게 용서를 빌면서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신부님께서는 왜 처음부터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그랬냐고.
그러자 신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런 표정 없이 예전처럼 지나가는 말투로 그냥 한 마디 툭 던지셨다.
“그런데요?”
그게 어쨌냐는 것이다. 신부님은 마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간접적으로 꾸짖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마을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자신들의 마음속에 이미 죄를 지어내고 없애고 한 것이지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기였다. 자신의 어리석음은 탓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의 잘못만 보며 의심과 증오심만 마음에 가득 채운 채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런 우매(愚昧)로 가득 찼지만, 본인만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보게 한 일화였다.
* 충북 청주 출생, 금강불교대 수료, ≪상상의 힘≫ 수필 부문 신인상, jhj43211@naver.com
말을 걸을 용기
김 현 주
정말 급했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서울의 강변도로는 꽉 막혀 있고 자동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4차선 중 일 차선에 있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휴게소가 있나요? 아니란다. 1시간 정도 가야 하는데 거의 다가서 한군데 있단다. 그러면 안 돼요. 일단 차를 멈춰 주세요. 운전하는 분도 당황했고, 나는 긴장감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뱃속은 점점 더 끌어 올라 폭발하기 직전이다. 간신히 차선을 바꾸어 옆의 도로로 빠져나와 어느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을 둘러보니 화장실은 없다. 오전 10시쯤의 시간. 상가는 대부분 아직 불이 꺼진 상태다. 두리번거리다 상가 안에 불 켜진 곳으로 달려갔다. 망서릴 틈도 없이 문을 밀고는 “제가 급한데 화장실 좀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첫 번째 집은 없다며 거절한다. 다음 집으로 뛰었다. 식당이었는데, 식탁을 정리하는 사장님께 다급하게 화장실 사용을 부탁했다. 손짓으로 화장실 있는 곳을 가리킨다. 나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뛰어 들어갔다.
어제 모처럼 아이들이랑 치킨을 먹은 것이 문제였나 보다.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나오려니 그제야 민망하기도 하고 아침 일찍 남의 가게를 불쑥 찾은 것도 미안했다. 주방에서 등을 돌린 채 뭔가 하시는 사장님을 향해 “아침 일찍 정말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가게를 나왔다. 비로소 정신이 들고 함께 가는 분께도 감사하단 인사를 했다.
다시 차에 타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2주 전 마늘을 심어놓은 것이 싹을 틔웠는지 궁금해 보러 가는 길에 가을 나들이 겸 동행한 것이다. 도롯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은 어느새 겨울 채비를 하느라 마른 잎을 툭툭 떨구기 시작했고, 은행나무는 멀리서도 눈에 띄게 노랑 옷으로 갈아입은 채 바람에 떨고 있다. 맑고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몽실몽실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풍성하게 해준다. 더없이 좋은 날이다.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가다 보니, 문득 며칠 전 지하철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충무로에 갈 일이 있어 4호선을 타고 가는데 맞은 편 출입문 쪽에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무슨 일일까? 어디가 아픈 건가?’ 걱정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그 앞의 사람과 옆의 의자에 앉은 사람 누구도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나라도 가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다행히 한 사람이 내려 빈자리가 생기자 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문 옆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 한다. 고갤 숙인 채 있던 여자가 옮겨 앉는다.
나는 다행이다 생각하며 돌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즘 사람들의 비정함에 왠지 마음이 허전해진다. 누군가 불편하고 아픈 사람이 있을 때 내 가족, 내 이웃처럼 생각하고 돌보려는 마음이 없다는 게 서글펐다. 나 역시 용기 내어 다가가 말을 건네지 못하고 망설이는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적인 호의를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의인도 많고, 의협심으로 어려운 사람이나 위기의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하다 자신이 희생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 정도의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최소한의 배려나 선의를 가지는 건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양심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줄 아는 아량이 그립다.
오늘 같은 경우도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다급하니까 염치불고 하고 남의 가게 문을 열고 사정을 하게 되었다. 만약 참을 만한 정도였다면, 나도 그런 용기를 내기보단 망설였을 것이다. 사람이 극한상황에 처하면 평소 없던 용기와 배짱도 생기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내가 누군가를 도울 일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도움을 청할 일도 있다.
어떤 부탁을 했을 때 상대방이 거절할까 두려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나는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용의가 있음에도 내가 그런 부탁을 하긴 쉽지 않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따뜻한 배려를 실천한다면 우리 모두 훨씬 더 행복하고, 마음 푸근한 세상이 될 것이다.
청명한 가을날, 기분 좋은 가을 나들이가 만일 식당 사장님의 호의가 아니었더라면 무슨 봉변을 겪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예기치 않은 위급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는 용기가 발동하고, 궁하면 통한다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 같다.
사노라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나,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혼자서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용기 있게 도움을 청해 보라. 거절이 두려워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누군가는 진심으로 도우려 할 것이다. 내 생각을 앞세워 쉽게 포기하거나 주눅 들지 말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자. 진심은 통한다. 간절하면 그 간절함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렇게 도움을 받고, 그 고마운 마음을 나도 누군가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이어진다면,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강아지 잡던 날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요즘은 스마트기기에 빠져 산다. 눈을 뜨면 어느새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하는 손안의 마법에 취해 우리의 일상은 점령당하고 있다.
손주들과 함께 생활한 지 몇 개월이 되었다. 처음엔 “할머니 놀자아”하며 쉴 틈도 주지 않고 이런저런 놀이기구며 장난감을 가져와 함께 놀았다. 때로는 귀찮다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 또한 한때려니 생각하며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역시 생각한 대로이다.
할머니랑 노는 것에 싫증이 났는지 이제는 두 아이 다 태블릿을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본다. 며느리가 시간을 정해 놓고 제재를 한다. 하지만 한 번 잡으면 멈출 줄 모른다. 그만하라고 하면 못마땅해 볼멘 소리를 하거나 삐진다. 그러니 책을 보거나 건전한 놀이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전의 아이들은 어땠을까 생각하다 문득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당시 농촌은 같은 성씨들끼리 모여 사는 집성촌이 많았다. 마을 대부분이 친척들이어서 농번기에 어른들이 들에 나가게 되면 아이들은 한 집에 모여 놀기 마련이다. 집집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어, 모이면 대여섯 명이 되기도 하고 서너 명은 보통이다.
그날도 내 동생이랑 사촌 동생 셋이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노느라 시끄러웠다. 대여섯 살의 사내아이들이란 잠자코 있지 못한다. 막내 고모가 아이들을 챙기려고 집에 남아있고, 여자인 나는 그 애들 틈에 끼지 못하고 늘 외톨이로 혼자 있어야 했다. 어느 순간 소란스럽게 놀던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조용할 때는 뭔가 사고를 치거나 일을 저지를 때이다. 부엌에서 간식을 준비하던 고모가 아이들을 찾았다. 이 방 저 방 돌던 고모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 콩나물시루가 놓인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세 아이는 강아지를 잡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선 두 녀석이 붙잡고 그중 큰 사촌 동생이 면도칼로 다리를 자르는 중이었다. 방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고모가 나타나자 놀란 아이들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봤다.
작은고모는 아이들 손에서 강아지를 빼내어 데리고 나왔다. 다행히 아이들이라 힘이 없어 큰 상처를 내진 않았다. 너무 어린 강아지라 깨갱 소리도 내지 않고 붙잡힌 채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고모는 울며 천을 찢어 상처 난 강아지의 다리를 싸매 주었다. 놀란 강아지는 고모의 품에 안겨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눈물을 흘리는 고모 곁에서 나도 따라 눈물이 났다.
저녁에 들에서 돌아온 어른들은 한바탕의 소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고 말았다. 나와 고모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 강아지가 불쌍해 눈물을 찔금거렸는데,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이들은 보고 배운 대로 따라 하는 법이다. 그 당시엔 동네의 잔치나 명절 때가 되면 의례히 돼지를 잡아 집집마다 고기를 나누고 했다. 닭이나 토끼를 집에서 잡아먹는 건 흔한 일이었고, 돼지나 키우던 개를 잡기도 했다. 아마 동생들이 그걸 보고 따라 한 건 아닌가 싶다.
돼지를 잡는 날은 동네잔치가 벌어진다. 집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마련해 마을의 공터에 모여 펼쳐 놓고 큰 가마솥에 돼지고기를 삶아 푸짐하게 내어놓는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함께 먹던 그 시절의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난 우리 집에서 키우던 돼지를 잡았던 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돼지우리에서 꿀꿀대던 까만 돼지의 눈망울이 떠올라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무 데서나 그렇게 가축을 잡을 수도 없으려니와, 도축 시설이 잘되어 있어 그런 풍속도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그 시절엔 마을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서로 모여 나누고 일을 할 땐 힘을 보태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요즘처럼 한 아파트에 살며 이웃 간에 서로 알고 지내기는커녕, 층간소음으로 고소 고발은 물론 살인까지 일어나는 삭막한 시대에 그 옛날의 따스한 인정이 그리워진다.
그때 강아지 다리를 잡고 칼질하던 꼬마 악동들은 이제 60이 넘은 장년이 되었다. 지금은 모두 흩어져 살며 자기의 일상에 바빠 한자리 모이기도 힘들지만, 내 기억 속의 그 사건은 문득 떠오르는 고향의 웃픈 추억이다.
스마트기기에 길들어진 요즘의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었을 때, 그네들의 기억에는 어떤 추억이 남게 될까 궁금해진다. 도심의 콘크리트 절벽에 갇혀 지내고 인스턴트와 배달 음식에 길들어진 아이들.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넘쳐나고 원하는 욕구가 여과 없이 충족되어 지면서도 행복할 줄 모르는 아이들.
과유불급이라 하였다.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원하는 것을 무조건 다 가진다고 좋은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절제와 참을성도 필요하다. 내 손주를 비롯한 자라나는 새싹들이 좀 더 밝고 건강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정서발달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함께 고민해 볼 일이다.
* 대전 출생, 수필가, 한밭문학회 사무국장, hl3evs@hanmir.com
아버지의 회초리
류 주 현
고교 시절, 꼭 가보고 싶었던 제주도에 친구 4명과 갔다.
여름방학을 이용한 일주일 계획이라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식량, 부식, 텐트, 모포, 버너, 항고, 우의 등등 대전 중앙시장에서 음성적으로 파는 일명 양키 물품을 파는 곳에서 호신용 대검과 워커 등을 구매했다. 70년대 초에는 등산화보다 군용 워커를 많이 신었다. 훨씬 폼 나고 튼실하기도 했다.
식량과 부식, 통조림 등은 내가 준비했다. 나머지는 몇 달 전부터 용돈을 모아 학원비, 시계, 사전,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겨 마련한 자금으로 구입했다. 고춧가루, 간장, 식초 등은 대전 목척교 옆 가끔 가는 중국집에서 얻었다. 준비물은 대전역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한 달여 동안 차곡차곡 쌓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목표이신 부모님은 절대 허락하실 여행이 아니었다. “서울의 명문대학에 입학하면 원 없이 여행 다니거라, 공부를 열심히 하면 유학도 보내주겠다”라는 약속도 하신 분들이라 무전여행이란 단어는 입도 ‘뻥끗’ 못했다.
아침 일찍 학원에 간다고 인사드리고 대전역에서 집결해서 난생처음 목포행 열차를 탔다. 비행기를 탄 듯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목포항 인근 국밥집에서 중식을 하고 안성호로 제주항으로 출발해서 8시간여 만에 고대하고 선망하던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목표로 삼은 한라산 정상을 향해 산행이 시작됐다. 강한 태풍이 시작되어 입산을 통제하는 감시자를 피해 서울대생 형 두 명과 폭풍을 뚫고 패기와 열정으로 강행을 했다. 일요일마다 식장산과 계룡산 연천봉, 문필봉, 은선폭포로 등산을 하며 단련한다고 했지만, 폭풍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시야가 가리고, 길에 미끄러지고, 급기야 춥고 허기져 기진맥진하여 큰 바위 작은 틈에 간신히 텐트를 치고 고체연료와 생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며 공포의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이 되어서야 공포의 폭풍우는 잦아들었다. ‘이렇게 조난사고가 나 사망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형들은 하산을 서둘렀다. 일행은 생라면과 항고(그릇)에 받은 빗물을 먹고 백록담 정상에서 ‘야호!’가 아닌 “살았구나! 내가 살았다!”라고 큰소리치며 급히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길에 한 친구가 미끄러져 발목이 접 질러 부상했다. 게다가 산길은 좁고 험했다. 한사람이 교대로 거의 업다시피 부축하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애초에 계획한 일정은 바뀌었지만 산방굴, 성산봉, 서귀포시, 용두암, 박물관 등은 볼 수 있었다. 예정된 일정을 초과하여 돈은 바닥이 났다. 게다가 태풍으로 모든 배는 출항조차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제주시 근처 아이스께끼(ice cake) 상점에 가서 배낭과 학생증을 맡기고 각자 아이스께끼 통을 메고 거리로 나섰다.
“아이스께끼!”라고 소리치며 판매했지만, 장마로 많은 비가 내려 습도가 높아서인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항에 들어가 관광객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억지로 팔아 배표를 구해 이틀을 더 항구 대합실에서 잤다. 세면은 화장실에서 했다. 주변에서 밥만 겨우 해서 간장과 소금으로 허기를 채웠다. 실로 거지 중 상거지였다. 새카맣게 탄 얼굴에 눈만 반짝이고 바짝 말랐다. 그래도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웃을 수는 있었다. MBC 아나운서로 있는 누나의 카메라도 맡기고 동행한 친구가 집에 연락하자고 제안을 했다. 돈이 없어 사무실에 들어가 시외전화 한 통만 쓰자고 통 사정을 했다. 그래서 어머니와의 통화가 이루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친구 집에 연락해 주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래 살아있지, 다친 데는 없고?” 수화기로 느끼는 극도의 애절함은 표현키 어려웠다. “지금 어디냐?” 하는 어머니의 말씀은 뒤로 하고 ”며칠 내로 가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리는데, 높은 분이 부르더니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어린 학생들이 대단하구나!” 하시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시며 “배고프겠구나!”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설렁탕을 사주셨다. 염치불구하고 공깃밥도 추가해서 오랜만에 배부르게 포식을 했다. 정말 정말 고마우신 분이셨다.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화장실에 있는 봉 걸레로 사무실 바닥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도 비워주었다. ‘월급을 받고 일하시는 분으로 식사비가 적은 돈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미안했다.
다음날 제주항에서 ‘아리랑 호’로 15시간 이상에 걸친 길고 긴 항해를 시작했다. 배 맨바닥 선실에서의 고통은 아비규환이었다. 뱃멀미로 밤새 ‘우왝’거리며 오바이트 하는 소리, 코를 막게 하는 술 냄새와 찌든 땀 냄새가 우리를 괴롭혔다. 그래도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신선하기만 했다. 그 와중에 고시생인 듯한 장발의 청년은 두꺼운 전서를 안경을 쓰고 보고 있었다.
드디어 부산항의 뭍에 도착했다.
여전히 대전에 갈 열차 비가 없었다. 궁리 끝에 무전여행을 위해 몰래 타기 쉬운 부산진역까지 걸었다. 허기를 면하기 위해 초량국민학교 뒤편 수돗가에서 밥을 해서 소금을 뿌려 먹었다. 그런 후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출발해서 달리는 열차를 타기 위해 한 명만 표를 사서 들어갔다. 플랫폼에서 역무원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표를 가지고 있던 친구가 일행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담을 넘어 서서히 출발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어 열차에 올라탔다.
“휴우” 하며 모두가 바닥에 누워 버렸다.
공안 아저씨가 검표할 때, 열차와 열차 사이 난간을 건너가거나 화장실에 숨어서 가다가 너무 졸려 입석 칸 뒷바닥에 앉아 졸다가 기어이 걸렸다. 일행은 귀를 잡혀 공안실에 끌려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들고 벌을 받았다.
우리는 대전역 공안에 인계되어 학생증과 배낭을 압수당했다. 소지품은 돈을 갖고 후에 찾으러 오기로 하고, 집에는 연락하면 맞아 죽는다고 싹싹 빌고 나왔다. 우리는 대전역 근처 친구 집에 배낭을 두고 해산했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놈들처럼 한 번씩 안고 헤어졌다.
해 질 녘 집에 들어가 옥상에 있는 화원에 숨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 싶어 내 방에 들어가 자고 새벽에 아버님께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아버지는 불호령 대신 파이프 담배를 다 태우시고 10일간의 소행을 낱낱이 써서 제출하라고 말씀하신 후 출타하셨다. “요즘 통 식사를 못 하셨는데, 오늘 아침은 한술 뜨고 나가신다”라는 어머니의 원망 어린 말씀을 뒤로하고 방에 올라왔다. 거대한 폭풍이 올 것이란 직감을 예견하며 반성문을 써서 저녁에 제출했다. “반성문의 내용을 먼저 보신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셨다”고 아주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저녁에 귀가하신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내려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란다면서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하루 한 대씩 10대를 야전침대 각목으로 허벅다리를 맞았다. 아버지는 한 말씀도 안 하셨다. 그 당시 미제 군복 바지를 줄이고 염색한 바지의 뒤 단추가 깨지고, 허벅지는 터져 피가 범벅이 되어 바지를 벗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욕조에 바지를 입고 들어가 불려서 겨우 벗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화가 많이 나셨던 모양이다. 절뚝거리며 나는 겨우 옥상 방으로 올라갔다. 조금 후 정 부장 아저씨가 안티푸라민과 얼음을 가져다가 주시며 “어머님께서 주셨다”라고 했다. 한라산 폭풍우보다 더 큰 폭풍우였다. 워낙 엄격하신 분이라 각오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체벌은 혹독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또렷이 기억한다. 온 집안이 나 한 사람으로 살얼음판이었다. 모든 분께 죄송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예식장 등의 사업을 하셔 직원분들이 제법 많았다. 삼복더위에 살얼음을 걷는 나날이 이어졌다. 조식 후 학원을 다녀와 중식하고, 학원을 다녀와 공부하는 반성의 시간을 보낼 즈음 아버지의 부름이 있어 무릎을 꿇고 앉았더니 “많이 아펐냐?” 하셨다. “아닙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담배를 다 피우시더니 “그 녀석들 얼굴 좀 보자꾸나!” 하셨다. 친구들에게도 불호령이 있으시려나 생각 중에, 이번 일요일 12시에 천화각에서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셨다. 일단 나는 ‘휴우’하고 한숨을 쉬었다.
일요일에 친구 네 명이 조금 일찍 와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허허허!’ 호탕하게 웃으시며 “참 대단한 녀셕들이네! 이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거라!”라고 하시며 일일이 악수하셨다. 그날 우리는 정동 ‘천화각’에서 맛난 음식을 많이 먹으며 폭풍우 속에서의 두려움, 서울대 형들의 도움, 제주항 과장님의 고마움, 무임승차 3명, 대전역에 학생증 보관한 일 등을 말씀드렸다.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거라” 하셔서 각자 말씀을 드리고 나오는데,
“영화 보고 싶으냐?” 하시더니 동네 앞 중도 극장에 입장시켜 주셨다. 아! 정말이지 아버지가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그 시절 무전여행은 어렵고 고되고 힘들었지만, 어린 나에게 회초리로 무한한 사랑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 눈물이 고인다. 아버지의 무한 사랑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셨다.
“아버지 너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 대전 정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 전북대 경영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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