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지역의 천주교[天主敎]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활동하는 있는 로마가톨릭교.
개설
충청남도 아산시의 천주교는 조선 후기 1890년대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인 노력으로 서울, 경기 지역에 이어 아산 지역을 비롯한 내포 지역에 전래되었다. 이후 천주교가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100년간 모진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내포 지역에는 천주교 신앙의 뿌리가 확고하게 내렸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90년대 이후 성당(聖堂)과 공소(公所)가 많이 설립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도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1890년에 설립된 예산의 간양골성당을 1895년에 아산 지역으로 옮긴 공세리성당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총 11개의 성당이 설립되어 지역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활동해 왔다.
천주교의 한국 전래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 때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한 명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개혁을 추구하던 남인 학자들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졌다. 1779년부터 경기도 광주의 주어사(走魚寺) 천진암(天眞菴)에서 이승훈(李承薰)·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형제와 정약전·정약종·정약용 형제 등 10여 명이 참여한 강학회(講學會)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중국에서 들여온 서학(西學)[처음에는 천주교가 서양의 학문으로 인식되었기에 붙여진 명칭] 관련 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종교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1784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으로 간 이승훈은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J. J. de Grammont)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黙珠) 등 천주교 성물(聖物)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이 다른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고, 중인(中人) 김범우의 집 명례방[현재 명동성당 자리]에서 정기적으로 신앙 집회가 열렸다. 천주교는 서울에 이어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변천
천주교를 충청도에 전파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은 예산 여사울[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사람 이존창(李存昌)이다. 이존창은 1785년경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내포 지역에 전도 활동을 시작하여 양반, 평민은 물론 천민들을 대거 입교시켰다. 그 후 천주교는 이도기·정산필·김풍헌 등의 활동으로 공주·홍성·부여와 전라도 북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795년 초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1752~1801]에 의해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신분 평등을 설파하고 유교적 제사를 거부한 천주교는 조선 정부로부터 강력한 박해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정약종·이존창·강완숙 등 초기 교회 지도층이 순교하였고, 황사영은 백서(帛書)[비단에 쓴 글]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정하상 등은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로마 교황청에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신부]들이 속속 밀입국하여, 마침내 1831년에 조선교구(朝鮮敎區)가 설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1866년부터 5년간 계속된 병인박해는 박해의 절정이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은 산골에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敎友村)을 만들었으며, 비밀리에 전국을 순회하며 사목(司牧) 방문을 하는 사제로부터 간혹 미사와 성사(聖事)를 받았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도들은 성리학적 관념을 타파하고 신분 평등을 지향함으로써 사회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글 전용 교리서와 천주가사(天主歌詞)를 보급하여 서민 문화 발달에 기여하였다. 천주교는 개항 후인 1886년 한불수호조약을 맺으면서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1877년 9월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와 함께 황해도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두세(C. Doucet)[한국명 정가미(丁加彌)] 신부는 1883년, 1884년에 걸쳐 충청도의 천안·아산·예산·홍주·당진·서산·공주·부여·논산·서천과 경기도의 안성·평택 등을 순회하며 모두 35개의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1890년 8월에 퀴를리에 신부는 예산 양촌[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 본당을, 파스키에 신부는 예산 간양골[현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 간양골 본당을 설립하였다.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내포에 거세게 번지자,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는 일단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파스키에 신부가 병이 깊어져 홍콩으로 요양하러 가게 되어, 잠시 퀴를리에 신부가 관할하던 간양골 본당은 1895년에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로 옮겨졌다.
현황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공세리성당은 오랫동안 지역의 많은 천주교 공소들을 거느리는 중심 역할을 했다. 1948년에 온양성당이 분리되었으며, 이후 도고성당[1974], 둔포성당[1976], 온양 용화동성당[1985], 모산성당[1985], 온양 신정동성당[2004], 배방성당[2008], 장재성당[2010], 온양 모종동성당[2011], 온양 풍기성당[2011]이 분리 설립되었다.
의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내포 천주교회의 순교 신앙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신앙의 뿌리가 깊고 신자들의 신앙심이 깊은 곳이며, 성당과 신자도 많다. 아산 지역의 천주교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많이 배출하는 등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확고한 위상을 갖춘 교회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부처와 예수 안개 속을 걷다』(전국역사교사모임, 2011)
「내포 천주교 답사자료집」(충남역사교사모임, 2002)
한성준, 「간양골성당터와 수철리공소」(신례원 성당 성지개발자료, 2015)
한국천주교회발상지 천진암성지(http://www.chonjinam.org)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리성지박물관[貢稅里聖地博物館]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 관내에 있는 천주교 성지 박물관.
개설
공세리성지박물관은 1922년 9월 에밀 피에르 드비즈(Emile Pierre Devise)[세례명 에밀리오, 한국명 성일론] 신부에 의해 공세리성당과 함께 건립되었던 사제관(司祭館)을 용도 변경하여 2008년 9월 6일 개관한 천주교 관련 전문 박물관이다. 천주교 대전교구의 첫 감실(龕室)과 공세리성당의 초대·3대 주임이었던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의 유품(遺品) 등 총 1,5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성 앵베르(Imbert) 주교, 성 모방(Maubant) 신부, 성 샤스땅(Chastan) 신부, 성녀 루이스 드 마릴락(Louise de Marillac)의 유해 일부가 봉안되어 있다. 공세리성지박물관은 1890년 공세리성당의 전신 간양골성당이 설립된 때부터 현재까지 내포 지역의 천주교회사와 순교사를 압축하여 보여 주고 있다.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한국천주교회 초기 교우촌의 생활 모습과 신유·병인 박해 때의 순교자들, 그리고 6·25전쟁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활동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공세리성당 초대 신부인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의 유물과 조선에 파견되어 활동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주요 성직자들의 유해, 박의서·박원서·박익서 3형제 등 공세리 출신 순교자 32위의 유해를 전시하고 있다.
건립 경위
공세리성지박물관은 공세리성당을 비롯한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와 뿌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순교자의 삶과 얼을 이어받아 참된 신앙을 가꿀 수 있는 복음(福音)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변천
공세리성지박물관은 1922년 9월 건립된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사제관에서 비롯되었다. 2008년 9월 6일 공세리성당 사제관에서 공세리성지박물관으로 명칭을 바꿔 정식 개관하였다. 공세리성지박물관의 초대 관장은 당시 공세리성당 주임 신부였던 오남한 신부가 맡았으며, 2008년 9월 14일 1종 전문 박물관[충청남도 제15호]으로 등록하였다. 2010년 1월 제2대 관장으로 김찬용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2014년 1월 제3대 관장으로 김수겸 신부가 부임하였다. 2017년 12월 제4대 관장으로 부임한 박지목 신부가 2019년 3월 기준으로 재임하고 있다.
구성
공세리성지박물관은 교회 고문서와 서지류(書誌類), 대전교구 최초 감실(龕室), 성당 종, 십자가, 묵주(默珠), 옛 사진 등 관련 유물 1,5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웃한 베네딕토관에 99.19㎡[30평] 크기의 지하 수장고(收藏庫)까지 갖추고 있다. 전시실은 탄생의 방[초기 교회 생활과 건축],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 방[이상 1층], 박해와 순교의 방[내포교회, 특히 공세리성당 순교사], 영광의 방[광복 이후 순교사], 재창조의 방[사귐과 섬김, 나눔의 교회, 이상 2층] 등 다섯 전시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전시 유물 사이사이에 놓인 허명자[테레사(Teresa)]의 유리화, 상성규[안드레아(Andrew)]의 도자 벽화 등이 순교 신심을 묵상(默想)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현황
공세리성지박물관의 1층 첫 번째 전시실에는 내포의 유래와 박해 시대 교우촌의 모습을 보여 주는 실물 축소 모형[미니어처], 공세리성당의 전신인 간양골성당 터의 기와 조각, 장롱 위에 올려놓은 이동식 제대 판목(板木), 1890년대 제의(祭衣), 내포 교우촌 분포도 및 아산 지역 초기 공소 현황 등을 전시하였다. 1890년대 초 공세리 마을 한옥을 고쳐 쓰던 성당, 1899년에 새로 지은 ㅁ자 한옥 성당, 1922년에 건립한 현재의 서양식 고딕 성당 등을 옛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공세리성당에서만 35년간 사목했던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의 유품을 전시하였으며, 프랑스에 있는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의 묘지석을 재현해 놓았다. 또한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의 종손(從孫)이 기증한 금장(金裝) 『드비즈 서간집』과 묘에서 직접 가져온 흙도 전시하였다. 이 전시실은 공세리성당 건축과 의료[이명래고약], 교육[조성보통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천주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2층에는 ‘박해와 순교의 방’이 있다. 허 발바라(Barbara)[1825년]와 박의서·박원서·박익서 3형제[1867년] 등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들 100여 명에 대한 순교사를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신앙의 자유를 얻을 당시 교민 조약문과 호조(護燥)[여행 증명서] 등도 전시되어 있다. 이어지는 ‘영광의 방’에는 6·25전쟁 중 공세리성당에서 사목하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치당하여 순교한 뵐토(Bulteau)[요셉, 한국명 오필도] 신부와 함께 납치당하여 순교한 대전 목동성당 까다르(Cadars)[요셉, 한국명 강달순] 신부, 공세리성당 본당 출신 대전교구 첫 사제로서 홍성성당 초대 주임으로 발령받아 사목하다가 역시 6·25전쟁 때 대전 목동에서 순교한 강만수 신부의 삶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마지막 전시실인 ‘재창조의 방’에는 공세리성당의 성모 깃발과 예수 성심 깃발 등이 전시되어 있고,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땅 신부, 성녀 루이스 드 마릴락의 유해 일부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
『달릴 길을 다 달리고』(대전교구사연구소, 2008)
가톨릭평화신문(http://www.cpbc.co.kr)
공세리 성지·성당(http://www.gongseri.or.kr)
한국사립박물관협회(http://pmuseums.org)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괴산군 연풍지역 가톨릭 신자들의 순교지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가톨릭 신자 순교지로 1791년 신해교난을 피해 연풍지역에 은거하던 신자들이 1801년 신유교난 때 처형당한 장소이다. 성지에는 옛 연풍향청 건물, 높이 8.5m의 십자가상, 황석두 성인의 입상과 묘, 다블뤼 주교 등 5인의 성인상과 순교현양비, 대주교 노기남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63년 천주교회는 예배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연풍향청 건물을 구입하고 집터를 정리하던 중 박해 때 죄인을 죽이는 형구돌을 발견하였고 1974년 이후 이곳을 성역화 하였다. 연풍향청은 현재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향청 건물 문 앞에는 신유교난 당시 순교자들을 처형했던 처형석(處刑石)을 유물로 전시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2024-10-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