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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로가 구 병태의 도움을 받아 셋이서 이삿짐을 내려놓고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살기로 했던 흙집(아직은 ‘夢想?’이란 이름을 짓기 전)엔 난방설치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기로는 깜짝 놀라,
“야, 범상! 어떻게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데서 이 겨울을 보내라는 거야?” 하고 항의 겸 따지게 되었는데,
범상은 그제야,
“며칠 내로 보일러를 설치해줄 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저 사람 좋기만 한, 그러면서도 늘 허술하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한 범상은, 난방도 설치해놓지 않은 집에 기로더러 와서 살라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가뜩이나 추위를 타는 기로는 범상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지만 속으론 화가 부글부글 끓어 얼굴이 벌개지고도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범상은 겨우 방구들의 일부에 불이 들어가는 이 흙집 구조에 도배만 해놓고 새로운 장판을 깔아 덮어놓았던 상황이라, 군불을 때도 방 하나의 아랫목만 따뜻하고 윗목을 포함한 반절은 얼음장 같은 냉방이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이삿짐을 싣고 온 이상 당장 다른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기로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믿고,
그 날 밤엔 흙집의 군불을 땐 방에서는 구 병태 부부를 재우고,
본인은 범상과 통나무집의 냉방에서 전기장판을 깔고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울에 살 때도 전기장판, 전기밥솥, 전자렌지 등의 가전제품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살던 예민한 체질의 기로에겐(기로는 그런 건 체질적으로 약하기도 했지만 싫어하기까지 했다.) 냉방 위에 따끔따끔한 감촉의 전기장판 위에서 자는 일이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더구나 통나무집은 어찌나 위풍이 센지, 거기에 있던 석유난로에 불을 붙이자 석유난로가 낡아서인지 제대로 연소되지 않은 냄새 때문에, 이제는 또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자... 이사 온 첫날부터 추위와 잠자리의 불편으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그런 반면 다부진 체격에 힘도 좋은 범상은, 정말 아무 문제없이 코를 골며 잘만 자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랜 친구사이였지만 범상은 기로의 생활상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런 쪽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은 무감각하고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괜찮으면, 친구인 기로도 다소 고생은 되더라도 혼자 사는 입장에서 그 정도의 어려움은 얼마든지 견뎌낼 걸로, 자기 편리할 대로 기준을 정해놓고 얼렁뚱땅 기로에게 그 조건에 맞춰 살라고 불러들였던 것인데,
기로는, 최소한 잠자리만큼은 호화롭지는 않더라도(여기서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평균 수준은 되어야 생활을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악재와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그 날은 날이 푹해서 그렇게라도 지냈던 것인데, 그 다음 날이 문제였다.
첫 밤을 그렇게 거의 뜬 눈으로 지새고 일어나니, 새벽부터는 기온이 평년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점심이 지나면서부터는 또 어찌나 춥던지... 기로는 그런 상황에서 도무지 다시 밤을 보낼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아직도 휴가 중인 구 병태 부부와 함께(자신을 찾아온 손님이기도 한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사실 기로는 상범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구 병태 부부가 있어서 그런 내색도 못한 채 참고 있었다.) 그들의 차를 타고 거기서 한 시간 정도 가면 되는 ‘정읍’의 김 선생님 댁으로 갔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밤을 지샐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피난을 간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로는 둔터니의 그 집 상황을 이미 알고는 있었다.
수(數)로는 두 채인데, 둘을 다 합해도 제대로 된 집 한 채의 기본 시설도 안 갖춰진 허술한 상태라는 걸.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번드르르한 통나무집은 그저 방갈로 수준이라 난방이 안 돼서 석유난로와 전기장판을 이용해야만 잘 수 있고(그래서 기로가 생활을 하려던 곳은 흙집이었다.), 흙집의 부엌은 방치된 상태로 몇 년을 지낸 결과 이제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해서 이용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훤히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흙집의 온돌방만 제대로 된다면, 그 밖의 불편함은 다 참고 견디겠다는 각오로 왔던 것인데,
그래서 지난 가을부터,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게끔 해 놓아야, 내가 갈 거 아냐?” 하면서 다그쳐왔음에도,
그 결과가,
이 집도 저 집도 아닌, 그렇다고 바깥에서 지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오늘이 며칠인가?
갑자기 TV는 없고 또 인터넷도 되지 않는 먹통의 세계에 와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지내다 보니, 날짜도 모르겠다......
결국 어제 정읍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범상과 보일러 설치에 들어갔다.
그런데 뭐가 잘못 됐는지, 보일러가 작동이 안 되어, 이제는 점점 부아가 치밀기까지 했다.
그러자 범상도 미안했던지, 이 ‘둔터니’ 마을 입구의 ‘산장 가든’의 주인을 불렀는데,
그 분이 와서도 해결점을 찾지 못해 돌아갔고,
오늘도 역시 통나무집 냉방에서 석유 냄새나는 난로를 켜놓고 자야 할 상황으로 치닫다 보니,
‘내가 여기로 내려온 게 잘못은 아니었나?’ 하는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아니, 당장 짐을 싸들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기까지 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벌써 며칠 째 쓸데없는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그 사이에 비가 내려, 집 주위엔 물기가 가득하여... 습한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는, 마음 둘 데마저 없다.
그래서 잘 따져 보니, 이사 온지 닷새가 지나가는데... 짐도 풀지 못한 상태로 마치 한 데에서 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며칠 밤을 보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곳에 와서, 가장 기본적인 난방문제마저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니,
화도 치미는 것이다.
어쨌거나 시골로 이사 온 지 닷새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시골 사람이 다 되어있는 느낌이다.
허기야 어디 ‘시골 사람’이 따로 있을까마는......
우선, 샤워 시설이 없어(이 곳은 수도 시설도 안 되어 있어서 샤워할 수 없음) 머리를 감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에,
어젯밤엔 비까지 내려 땅이 질다 보니 몇 개 안 되는 신발들엔 진흙이 묻어 어느새 깨끗한 신발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이런 저런 잡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내 손은 어느새 여기 저기 흠집이 나 핏자국이나 상처가 아무는 모습도 보이고, 그럴 일이 없었던 내 손톱엔 새까만 떼도 끼어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시골로 내려와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상태라, 오늘은 하는 수 없이 내 방에 군불을 지피기로 하고 여기저기 집 주변에 돌아다니던 나무를 주워다 불을 땠는데...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때느라 한 시간 여를 소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을씨년스러워, 내 신세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쉽게 살 가게도 없다 보니, 있는 것만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어... 통나무집에서 상 범상과 라면을 끓여 먹었을 뿐이다.
3 . 1
3월 첫 날의 일기가 저런데,
보다 상세한 상황 설명을 하자면,
상범이 오후 내내 보일러를 설치하느라 애를 쓰다가 결국 문제 해결이 안 되자, 둔터니 마을의 해결사(?)이기도 했던 박 만석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어서,
범상은, 산장 집에 직접 찾아가 그 분을 모셔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 기로에게는 그것이 새로 이사온 뒤의 산장아저씨인 박 만석과의 첫대면이기도 했다.
물론 이미 그들 사이는 구면인데다, 몇 번인가 인사를 나눈 적도 있었기에,
"안녕하십니까? 저 아시죠? 이번에 이 집에 와서 살려고 내려왔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박 만석은,
"아, 그려..요?" 하는, 범상한테는 ‘하게’를 쓰면서도 기로에겐 아무래도 그러기가 좀 쑥쓰러웠던지, ‘요.’자를 붙이면서 다소 멀뚱한 자세와 표정으로 억지로 웃는 듯한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여전히 낯을 가리는 듯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경계하는 듯한 거북한 자세였다.
그렇게 기로에게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더니, 이리저리 보일러를 살펴보고는,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은디?" 하더니, "근디, 왜? 보일러는 중고를 써?" 하고 범상에게 묻자,
"예, 집에 남아 있는 게 있어서요......" 하는 범상의 대답에,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두어 차례 흔들더니,
"그렁게 말을 안 듣지......" 하면서도, "날도 추운디, 어떻게 잘라고?"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하고는, 돌아가버렸다.
물론 기로는, 보일러 문제와는 관계 없이라도, 어차피 둔터니로 이사온 입장이라, 마을의 유지이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도 했던 박 만석에게는,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립니다." 하고 의식적으로 재차 인사를 하며, 뭔가 얘기를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도,
"아, 예..." 조금은 당황한 듯,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로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듯, 얼렁뚱땅 대답을 하는 모습이기에,
"저, 이 친구에게 하시듯, 말씀을 낮추셔도 되는데요......" 하고 애써 웃으면서 말을 더 붙여가려 했지만,
박 만석은, 다시 한 번 기로를 쳐다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째 표정이 여전히 애매하기만 했다. 그리고는 정말, 어물쩡하게 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기로가 범상에게,
"야, 저 양반...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마치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사실, 따지고 보면 어디 한 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원래가 저러냐?" 하고 푸념하듯 물으니,
"글쎄... 다소 의외이긴 한데, 워낙 그런 면이 있는 건 사실이야. 뭐랄까? 사람들한테 쉽게 정을 안 줘...... 뭐, 낯을 좀 가리는 스타일이랄까? 내가 듣기론, 언젠가 이 마을에 한 지식인이 와서 2 년인가를 살다 갔다는데... 그 사람한테 홀딱 빠져가지고, 둘이 죽고 못 살듯이 잘 지내다가... 그 사람이 가 버린 뒤 연락을 끊었대나 뭐래나.... 그 뒤로는, 도시 사람들한테 더욱 거리를 둔다는 것 같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로는,
"어디, 사람이 다 똑 같은가? 그리고 우리가 어디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하는 정도로 심드렁하게 볼멘소리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제서야 기로는,
"근데, 이 보일러... 중고야?" 하고 범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의미 있게 물었다.
"응. 집에 있던 거......" 하고, 아무 감정도 없이 범상이 대답했다.
"야, 아까 산장 아저씨가 그러잖아... 중고를 쓰니 말을 들을 리가 없다고." 했는데도,
"그래도 새 것까지 살 건 없잖아?" 하고, 범상은 여전히 보일러를 만지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말을 했다.
그러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던 기로는, (사실, 기로는 그 게 중고인지 새 것인지도 모른 채, 다만 보일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걸로만 알고 있었기에)
'지금 이 놈이, 돈을 아끼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란 말이지?' 하는 생각이 미쳤던 것인데,
물론 돈을 절약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저, 이 근동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악명이 높은 자린고비인 산장아저씨라는 사람마저도,
‘중고를 쓰니 그렇지......’ 하며 혀를 차고 돌아간 것처럼,
다만, 돈을 아끼기 위한 행동으로만, 범상이 자신이 이사 온 이래 요 며칠 동안 그러고 있는 것이,
'이 놈이,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행동이라지?' 하는 생각으로 비약되면서는,
"야, 범상!"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기로가 범상을 불렀다.
그러자 보일러 기름이 한 쪽 뺨에도 묻어있던 범상이 빤히 기로를 쳐다보았다.
"너, 이렇게 나를 무시해도 되는 거냐?" 하자,
"그게 무슨 소린데?" 하고 범상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니가 나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이런 곳에 와서 살라고 그동안 그토록 노래를 불러댔으며... 결국 이렇게 해 놓고 날 여기까지 데려와서도, 말도 듣지 않는 중고 보일러나 설치해주면서 살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범상은 그게 무슨 소린가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렇지만, 난 이렇게 보일러를..." 하고 변명하려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 필요 없다! 나, 다시 짐싸 갖고 서울로 올라 갈란다!"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들려? 나 짐 싸 갖고 올라 간다고, 지금 당장!"
"야, 그렇다고... 말을..."
"뭐가, ‘그렇다고’야? 너, 이따위로 집을 해놓고 날더러 와서 살라고 했냐?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내가 거지냐? 아무리 내가 니 집에 빌붙어 살려고 온 사람이기는 하다지만,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난방시설도 안 해놓고, 이 추운 겨울에 이런 집에서 살라고 불렀느냐고? 그것도 30년이 넘은 친구에게...... 그리고 이사 와서 며칠을 냉방에서 자게 하는 것도 모자라, 겨우 집에 굴러다니는 고장 난 중고 보일러나 설치해주느라 내 앞에서 며칠 째 그러고 있다니...... 친구는 이래도 되는 거냐? 내가 작년 가을부터 몇 차례,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내내 집수리를 해 놓고 날 부르라고 부탁을 해왔는데... 그리고 그 동안에도 너에게 확인을 할 때마다, 넌, 나에게 '걱정 말고 오라'고만 해댔지? 어떻게 집에 난방 시설도 없는 곳에 와서 살라고, 내려오라고 했던 것이며,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야, 그것도 다 썩어 빠진 고물 보일러를 설치하느라 며칠씩이나 나를 힘들게 하느냐고? 그런데, 이렇게 생겼는데도 '걱정을 말라'고? 너는 도대체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냐 속인 거냐?" 하고 묻다간, "그러니까 그동안은 니가 날 속인 거 아냐? 이런 상태로 날 데려와서 뭘 어쩌자는 건데? 내가 너에게 어디 큰 것 바랬냐? 그저 보통 사람이 살 수 있는 평범한 환경은 갖춰놓고, 그러니까 웬만한 시골집 같은 환경은 된 상태로 사람을 오라고 해도 했어야 할 것 아니었냐고?" 봇물 터지듯 기로는 악을 쓰며 모든 생각들을 다 쏟아붙고 있었다.
그제야,
"야, 그건 미안해!" 하고 정식으로 사과를 하는데도,
"미안이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미안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다가 실수를 저질러서 하는 사과할 때나 쓰는 말이지, 니가 지금 뭔가 실수를 저지른 거야? 이렇게 애당초부터 빤히 니 스스로 알면서 사람을 불러놓고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온 사람을 속인 거나 다름없는데...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미안’이야? 차라리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해라! 그것도 일부러!! 이렇게 이사까지 해 놓아,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그걸 받아들이라는 거냐고? 그럼, 미안해서 어쩔 건데? 앞으로도 계속 이 추위에 떨라는 거야?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거야?" 기로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퍼부어댔다.
"야, 그건 너무 하잖아?"
"그래! 나, 너무 하고 있다. 그건 나도 알겠는데... 그렇지만 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나 역시 여기에 오기까지에는 좋은 감정이었고, 정말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 둔 덕분에......’하며 자랑도 했듯이, 너무나 좋은 감정이었고... 며칠 동안은 힘이 들었어도 그걸 지키고 싶어서 꾹 참고 있었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깟 고물 보일러에 중고 석유난로에... 그런 걸 가지고 나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며칠씩이나 괴롭혀? 내가 뭣 땜에 여기 내려와서 그런 걸로 힘들게 살아야 하는데? 야, 따지고 보면, 나는 니네 집의 손님이나 마찬가지잖아? 너는 손님을 맞으면서, 그것도 몇 년씩이나 와서 살라고 노래를 불러놓고는... 이 따위로 해 놓고 오라고 했던 거야? 그리고 그 중고는 또 뭐야? 너는 나를 역시 ‘중고’로 생각하는 거 아냐?" 하는 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이혼하고 혼자 산다고, 사람 자체를 그렇게 중고로 취급해도 되느냐고? 아무리 친구지간이라지만, 이건 너무 한 일 아니냐?" 하고, 기로는 자격지심(?)으로 본인의 이혼을 끄집어내면서까지 퍼붓자,
범상은,
"내가 언제 니 이혼 얘길 했다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얘길 하고 그래? 야! 내가 니 이혼 문제를 염두에 두고 그랬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너 정말, 그런 식으로 생 사람 잡으면서 막나갈 거야?" 하고, 드디어 범상도 악을 쓰며 화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제는 기로 쪽에서 조금 수그러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기로도 거기서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래, 어쨌거나 좋다. 그래도 결국 내가 너에게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건, 정말 몰랐던 일이고, 또 내 입장에서도 가슴 아픈 일이야. 내가 뭐, 여기로 이사 오면서... 얼마나 화려하고 또 대단한 걸 요구한 거냐? 그저, 웬만한 사람 사는 환경을 말하는 거잖아? 그런데 너는 이게 사람 살 곳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너, 지금 전주에서 난방도 안 되는 이런 집에서 살고 있냐?" 하고 묻더니, "비록 내가 아무리 가난하다고는 해도, 나는 못 산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겨울 철에 난방도 안 되는 집에서 살 사람도 아니다. 바로 너처럼! 그리고 단 하루를 살더래도, 이런 집에선 못 살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기장판에 그 숨 막히는 냄새의 석유난로를 켜놓고 잘도 자드라마는... 나는 단 하루도 못 자겠다. 내가 여기 온지 며칠 짼데, 제대로 하룻밤 잠을 잔 줄 알아? 나는 못 견디겠어. 그러니, 다시 돌아갈 테니, 내일은 차 좀 불러라!"
이사 오면서부터 며칠을 꾹 참고 있던 감정을 이제 더 이상 속에만 담아둘 수 없었던 것으로, 기로는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범상과는 친구 사이고 뭐고 다 때려 칠 자세가 된 모양 같았다.
화가인 친구에게 좋은 풍경 속에 묻혀서 살게끔 준비해 주고 있는 범상의 입장에서도, 기로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기로의 독기 오른 언행은 의외였다.
그렇지만 털털하고 사람만 좋았던 범상은,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기로의 폭언에도 심한 대응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범상은,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듯, 상대방에게 그만큼의 배려가 없었다는 말이었고, 그 것이 그의 천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로의 그런 폭언에 범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좋은 일을 하려고 했던 범상은, 뜻하지 않게 오랜 친구였던 기로와 일생일대의 언쟁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그 둘 사이에 여태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그 스스로는 전혀 고의적이 아니었다고는 했지만, 기로의 직설적인 표현이 또 근거 없는 말도 아니었음도 그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두 친구는, 아무리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는 해도, 어떤 한 문제로 갈등에 쌓이다 보면, 각자 입장 차이가 크다는 것과 또 전혀 다른 타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평생을 친구로 지낸 오랜 사이이기도 해서, 각자 그 정도로(특히 기로의 입장에서) 표현을 했던 것으로... 갈등의 일단락을 지었다.
그건 역시 오랜 친구사이라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기로가 이 ‘둔터니’마을로 이사 온 초반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아직 채 겨울이 끝나기도 전인 2월 말에 이사 온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고, 유난히 춥기도 했고 또 일기도 고르지 않았던 막바지 겨울 탓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실 이 마을 주민들은 각자가 지하수거나 호수 건너에서 호스로 연결된 역시 지하수를(특히 산장집 같은 경우) 먹는 등, 기반 시설이 너무나 열악했던 것으로,
전기와 전화는 들어왔지만 통나무 집 역시(아직 범상도 현지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상태가 아닌, 방치된 집이어서) 수도시설도 안 돼 있어서, 약 5 미터 정도 떨어진 옆집(키큰 아저씨)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것 역시 해결해야 될 숙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서울의 온수가 나오는 편리함은 고사하고라도, 얼음 같은 찬 물로 취사를 하고 또 씻어야 하는 일 역시 기로에겐 결코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예견된 고생'이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