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본문 : 살후1:11-12
세상을 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끝없는 경쟁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어떤 분이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끼, 꼴, 깡, 꿈' 이 네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끼'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끼는 프로근성, 즉 전문성입니다.
전문성이 없는 사람은 대우를 못 받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꼴'이 좋아야 합니다.
꼴은 일하는 자세, 대인관계, 예의범절입니다.
이 자세가 흐트러지면 아무리 전문성이 있고,
아무리 고학력자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꼴 좋다.'라는 비아냥거리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살아가는 꼴이 좋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깡'이 있어야 합니다.
위기를 돌파하는 의지력,
위기에 대처하는 인내력,
장애물을 돌파하는 깡이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가 '꿈'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분명한 목표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다는 말은 꿈을 향해 계속 발전해
간다는 말입니다.
이 꿈이 있는 사람이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 '끼'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도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데도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데도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 프로근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근성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성도다움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니까 '꼴'이 좋아야 합니다.
불신자 보기에도 꼴이 좋아야 합니다.
신뢰를 주는 행동을 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깡'이 있어야 합니다.
시련을 극복하고,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앞의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의 의지력이
꼭 필요합니다.
시험은 이기고 승리하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소원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 승리와
천국의 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천국의 소망이 우리를 이기게 합니다.
<바울의 중보기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중보기도로 도왔습니다.
이는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바울은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기도의 능력,
특히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립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바울의 중보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게”(11절)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각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부름 받은
소명을 따라 성직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해 달라”(11절)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결단만 가지고는 부족하니
하나님이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실 때만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이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셔서
우리를 통해 이루려고 하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오늘은 기도의 세 번째 내용입니다.
12절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름’은 인격 전체를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심은
예수님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비교 - 십계명 중 제3계명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성도들은 ‘그리스도인’(기독교인)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불리게 된 배경을 아시지요.
<행11:25-26>
25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절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와 사울(바울)이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일 년간 목회를 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소문이 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 하여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영어로 Christian, 한자로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이미지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끼리도 신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건축업자들이 많아
그중 친분이 있는 집사님께 자신의 건물을
짓도록 맡겼는데 날림으로
공사할 뿐만 아니라 사기까지 쳐서
애를 먹었다는 말씀(소송까지 감).
교인이라고 믿고 맡겼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도 교회에 열심히 나온다는 것…….
요즘 교회를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그의 설교에서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 에
대해서 말합니다.
‘Almost’라는 단어는 ‘거의, 대체로’ 라는
뜻을 가지는데 비슷하게 보이지만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같으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어쩌다 이지경이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이 귀화를 신청할 경우
무조건 국적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5년 이상 계속하여 대한민국에
주소가 있어야 하고,
매우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재산 조건도 강화되어 앞으로는
우리나라와 혈연·지연이 없는
외국인이 귀화하려면 ...
6천만 원 이상의 자산을 갖거나
1인당 국민총소득 이상의
소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범죄 기록이 없어야 하는 등
매우 까다로운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인’이라는 말에
걸맞은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모든 언행 심사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의 그리스도인’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
회개하고 서로가 좀 더 조심하고 절제하고,
바르고 성실하게, 그리고 서로 사랑함으로...
참 그리스도인으로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도록 노력하여 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
사도 바울의 유일한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빌1:20-21절>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사형을 당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위기의 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아 풀려나거나 혹 처형을
당하게 되더라도 재판대에서 부끄러워하거나
주저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로 인해 존귀하게
여겨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고
고백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그의 삶의 내용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존재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는 일이라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 속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겠습니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핵심적인 한 가지를 고르라면
역시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단 두 마디로
정리했습니다(마22:34-40).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주님의 제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13:34-35>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안의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온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
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2절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벌이 꽃에서 꿀을 딸 때 꿀만 따먹는 것 같지만
사실은 꽃을 위하여 꽃가루를 옮겨주는 일도 합니다.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도 영광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힘쓰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입니다.
성령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참조 - 예수님의 최후 중보기도 요17:20-26)
우리가 주 안에 있어 주님을 영화롭게 하면 ...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영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입니다.
(일석이조, 일거양득, 마당 쓸고 동전 줍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이름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장식용 십자가로는 안 됩니다.
본질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이 역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보고 예수님이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가리켜 비유하기를
‘그리스도의 편지’(고후3:3)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바울은 성도들을 가리켜 비유하기를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부르심(말씀)을 보고 듣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향기를 맡습니다(반대로 행동하면 악취).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편지와 향기의 역할을 잘 감당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 ‘주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하고,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