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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강해(8)
우리 목숨까지도
본문 : 살전 2:6-8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외줄타기 명수인 어느 곡예사가
깊은 계곡 사이에 줄을 매고
시범을 보였습니다.
관중들에게 “여러분, 내가 이 외줄을 타고
이 계곡을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곡예사는 사뿐히 외줄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믿지요?”
사람들은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곡예사는 다시 관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 사람을 등에 업고
이 외줄을 타고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은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자 그러면 누구든지 한 분만
내 등에 업혀보십시오”라고 하자
아무도 업히지 않았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내 자신을 맡기는 것은 거리가 있습니다.
업히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우리 삶을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님들은 주님의 등에 업힐 수 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주님에게 맡기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세>
바울은 앞서 자신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마음의 자세와 동기로 전했는지를 강조하였습니다.
<3-5절>
3절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절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정말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는
유일한 동기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탁받았다는
확실한 소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책임을 맡은 종,
곧 ‘청지기’임을 깨닫고 그 소명에 충실하고자
애를 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고난과 역경도
오히려 감사하면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바울 사도가
어떠한 자세로 복음을 전하였는지를
고백하는 내용의 연속입니다.
6절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사람들로부터 그 어떤 대가나
호의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 구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고
복음의 진리를 적당히 왜곡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변형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만 전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라면
생명을 내걸고 싸웠습니다.
그런 바울이었기에 한번은
사도들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갈2:11-14>
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게바가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
(할례 받지 않은 이방 교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데...
마침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 야고보가
보낸 온 유대인들이 식사자리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였던 것입니다.
왜 피하였습니까?
유대인들의 비난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지만,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고넬료 가정의 구원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이 허락되었음을
가장 먼저 알았던 사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을 보고 행동이 돌변하였습니다.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한다’는
뒷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행동에서
당당하지 못한 모습,
어찌 보면 비굴한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이는 아직도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온 행동입니다.
물론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대하여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대다수가 아직 모세의 율법과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보면
공연한 오해를 살 수도 있기에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행동을 복음의 진리를
훼손할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행동을 책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라면 생명을 내걸고
싸웠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고 지키는 일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음>.....
나아가 그는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위(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7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권위를
내세우기 좋아합니다.
자기 직책을 앞세워 권위를 주장합니다.
돈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이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도 권위일 수 있습니다.
저는 건강한 사회의 질서를 위해
‘권위’는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는 자발적 존경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모범을 보이고, 앞에서 이끌고,
관심과 사랑을 베풂으로...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권위주의’에 빠져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요즘 말 많은 소위 ‘갑질’도 이런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도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의 질서를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영적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막10:43-45>
43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영적 스승의 위치에서 섬김을
받을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그는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마치
‘어머니가 사랑으로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것같이’ 자신도 성도들을 섬기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여기서 ‘유모 nurse’란 뜻은,
직업적 유모란 뜻이 아니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NIV에서는
아예 ‘moth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 부모이시고,
바울 자신은 유모라는 뜻입니다.
직업적 간호사란 뜻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인 부모’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자기가 아버지가 되었다고,
너희를 낳았다고 말씀합니다.
<고전4:14-15>
14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 사도도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아직 그들이 초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새로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을 젖먹이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유순한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가 없으면
바로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의미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랑의 어머니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는 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새로 믿는 신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돌보았습니다.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은
우연하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들 !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 자녀를 위해서
부모가 얼마나 애씁니까?
우리가 지금은 다 성인이 되었습니다만 ....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우리 부모님의 수고가
얼마나 컸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십니까?
자녀는 잠깐 동안에 자라지 않습니다.
자라는 데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대로
‘성장통’(growing pain)이 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해 가는 동안
부딪치는 문제, 갈등, 고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 같은 성장 과정에 있는 자녀를
돌보는 부모에게는 굉장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성장통’이 있습니다.
각종 시험과 내적 외적 핍박, 유혹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참고 인내 인내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지만....
목회자인 저와
우리 기존의 신자들에게는 부담입니다.
우리가 본을 보이고,
사랑과 인내로 이끌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먼저 믿은 자들의
사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목숨까지도>.....
나아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사모함과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표현합니다.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은 정말로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기를 사모하였습니다.
마치 이산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의 사모함은 간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되질 않았습니다.
<살전 2:17-18>
17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절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랑하기에 두 가지를 주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복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목숨입니다.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선물을
자신들의 목숨이라는 포장지로 싸서
전달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쁘게 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선한목자 되신 우리 주님 요10:11-15 참조).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
곧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곧 복음과 생명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주시려고
독생자 아들의 생명을 죽이셨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이용해서
사업하는 목사와 선교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부터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십자가의 원수(빌 3:18)"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교회를 위해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주고 목숨까지도 기쁘게 주고자 했던.....
바울의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어디나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선교지에도 도시에도 시골에도...
진짜는 복음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기쁘게 주려합니다.
가짜는 복음으로 사업을 합니다.
몇 일전 아주 부끄러운 뉴스가
방송에서 나왔습니다.
미국 교포인 어느 30대 남자가 미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자기 애인을 꾀어
회사 돈 50억 원을 횡령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미국 부동산을 사들이는 등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들통 나자 미국으로 혼자만 도망갔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답시고
회사의 공금을 횡령하는 여자도 문제고...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성도들을 위해서
복음과 목숨을 주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바울 사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세........,
성도를 대하는 자세를 배워야겠습니다.
- 사심이 없는 복음 전도....,
-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
- 권위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섬기는 리더십,.......
- 자기 목숨까지도 주고자 했던 성도를 향한 사랑... .....
오늘 우리 금산교회 온 성도들이 함께
꿈꾸고 본받아야 할 영적 자세입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