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은 시간부터 발전하여(상속성) 공간부터 확대하는(보편성)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한다. 또한 무산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비아’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등은 각기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에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그 ‘아’와 대치한 ‘비아’가 있고, ‘아’의 중(中)에도 ‘아’와 ‘비아’가 있으며, ‘비아’ 중에도 또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煩劇)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쟁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 기록이니라.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인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개의 속성을 요하나니,
① 상속성이니, 시문에 있어서 생명의 부절(不絶)함을 위함이요,
② 보편성이니, 공간에 있어 영향의 파급됨을 위함이라.
그러므로, 인류 말고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하여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되므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을 인류에뿐 상(喪)함이라. 사회를 떠나서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 ‘아’의 범위가 너무 약소하여 또한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되므로 인류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됨이라. 동일한 사건이라도 양성 ─ 상속·보편 ─ 의 강약을 보아 역사의 재료될 말한 분량의 대소를 정한다. 이를테면 김석문은 3백 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창도한 조선의 학자이지만 부르노의 지원설과 같은 양상의 역사적 가치를 쳐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피부르노가 그 학설로 인하여 구주 각국의 탐험열이 광등(狂騰)한다,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만, 김석문은 그런 결과를 가지지 못함이라. 또한 정여립은 4백 년 전에 군신 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지만, 이를 「민약론(民約論)」을 저작한 루소와 동등되는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설(鄭說)의 영향을 입은 양반 살육계 등의 전광 일섬(電光一閃) 같은 거동이 없지 않으나, 마침내 루소 이후의 프랑스 혁명에 비길 수 없는 까닭이라.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표창하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이으며, ‘아’를 소멸하여 ‘비아’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진적(陳跡)만 끼치나니, 이는 고금 역사에 바꾸지 못할 원칙이라.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통성(通性)이어늘, 매양 예기(豫期)와 위반되어 승리자가 아니 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이뇨?
● 작품 및 내용 해설
1.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조선 상고사』는 ‘총론’을 포함하여 전체 11편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총론’ 부분에 그의 민족주의적 역사 인식과 역사학의 방법론이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신채호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나라의 근대적 역사학을 확립한 역사가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그는 객관성이 결여된 중세 사학을 비판하여 구체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기술하면서도,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 즉 나와 남, 주체와 객체, 자민족과 이민족 간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하면서 민족주의적·민중주의적 사관을 확립하였다. 주관적 위치에 선 존재로서 아(我)를 설정하고, 이러한 아(我)가 역사적 아(我)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은 역사 발전의 동력을 모순과 대립물의 투쟁으로 파악한 마르크시즘적 논리를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를 왕조사(王朝史)나 연대기사(年代記史)로만 파악하던 기존의 관점이 갖고 있던 인과성의 결여, 영웅 중심의 역사 서술과 같은 한계를 극복하여 시간적 연속성과 공간적 보편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민족을 아(我)의 단위로 삼아 역사를 민족의 이익과 민족적 입장을 기준으로 해서 보는 주체적 민족 사관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것은 뿌리 깊은 사대 모화적 사관의 극복을 의미하며,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2`천만 민족의 애국화(愛國化)와 독립 정신을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2. 역사의 3대 원소와 이전 역사 연구의 결점
신채호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의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객관적으로 사회의 변화 양상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사실들을 그대로 적는 것이 역사이지 역사가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가,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역사를 기술하던 역사가의 손에 의해 더욱 왜곡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역사가에 의한 왜곡을 피하고 시간적 연속성과 공간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구성하는 3`대 원소인 시(時)·지(地)·인(人)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건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발생했는지를 밝히는 일이 역사가의 책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역사 기술의 객관성, 실증성을 강조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역사가들은 이러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를 개인의 후일담이나 상상의 산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객관성의 결여는 우리 민족의 흥망 성쇠를 그대로 보여 주지 못하였고, 그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 교훈이나 민족 정신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객관성이 결여된 역사 서술이 민족의 주체성을 형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역사 기술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즉 크롬웰이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왼쪽 눈 밑에 있는 혹을 빼지 말라고 하면서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모습 그대로 그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전의 역사학자들이 조선사를 쓰면서 있는 혹을 버리거나, 없는 혹을 붙이거나 하였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현존하는 사료를 통해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그 진위를 가려서 조선사의 전도를 개척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3. 새로운 역사 의식
신채호는 이 책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 처한 우리 민족이 일제에 투쟁할 수 있는 역사적 토대를 마련하고 강인한 민족 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정통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으며, 경주 김씨의 날조된 ‘신라 사기’ 정도로 혹평하고 있다. 또한 신라 역사에서 화랑도(花郞道) 정도만 긍정적으로 평가할 뿐 김춘추나 김유신의 경우 삼국 통일을 한 공로는커녕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 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광활한 강토를 떼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죄를 저질러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역사를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그의 역사관과 연결되어 있다. 즉 고구려는 외세와 투쟁하여 승리하면서 우리 민족을 보호하였으며, 백제 또한 부여와 고구려를 계승하여 자주적인 역량을 발휘한 반면, 신라는 외세와의 투쟁 경험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외세를 등에 업고 민족의 역량을 축소시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 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려는 식민주의 사관에 저항하여 광활한 중국 전역에 걸친 웅장한 역사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한반도와 만주 일부로 국한된 삼국 시대부터 한국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견해를 버리고 삼국 이전의 상고사로 거슬러 올라가 대단군 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 인식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와 같이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는 역사에서 주체의 중요성, 역사 기술의 객관성을 모두 추구했다는 점에서 논술적 사고를 돕고 올바른 역사관과 비판 의식을 길러 주는 좋은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각해 볼 문제
다음은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에서 발췌한 글이다. 개인이 역사를 만드는지, 사회가 개인을 만드는지의 문제는 역사학의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제시문 (가), (나) 중의 한 입장을 택하거나 제3의 입장을 택하여 다른 견해를 비판하면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
(가) 조선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 대왕의 사상으로 지배되며,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의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조선 5백 년 동안의 사회는 세종·퇴계가 만든 바가 아닌가. 신라 하대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 년 동안은 영랑·원효가 각기 사상계의 한 방면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가고, 원효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가 일진 일퇴, 일왕 일래로 갈아들어 사상계의 패왕이 되었으니, 6백 년 동안의 사회는 그 양가가 만든 바 아닌가. 백제의 치제(治制)를 온조 대왕(溫祚大王)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大王)이 마치며, 발해의 치제를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가 마치었으니, 만일 온조와 고이왕이 아니면, 백제의 정치가 무슨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면 발해의 정치가 무슨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것이다. 삼경(三京) 오부(五部)의 제도가 왕검(王儉)과 부루(夫婁)가 아니라면 조선의 국가 사회가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를 것이니, 이로써 보면, 일개 위대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고, 사회의 자성(自性)은 없는 것이 아닌가?
(나) 고려 말엽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원효종(元曉宗)은 이미 쇠락하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걸물이 없고, 다만 10만 명의 반승회(飯僧會)와 백만 명의 팔관회가 재곡(財穀)을 미비(未費)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이라, 사회는 벌써 불교 밖에서 새 생명을 찾기에 급급하므로, 안유(安裕)나 우탁(禹倬)이나 정몽주 등이 유교의 목탁을 들은 지가 오래였다. 그 밑에서 세종이 나고 퇴계가 났으니, 그러면 세종과 퇴계의 됨됨이는 그들 자신이 아니요, 사회가 만듦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누백 년간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소도 왕군(蘇塗王君)의 미신이나 율종 소승의 하품 불교(下品佛敎)로는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 사회가 그 새 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인 고로, 신라의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피차 다 여러 종교를 통일하는 새로운 법안을 내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럴 때에 영랑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부르며, 원효가 화엄의 자리를 베풀며, 최치원이 유불선(儒佛仙)을 관통하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며, 이에 각계가 갈채하여 이 세 사람을 맞음이니, 영랑이나 원효·최치원이 모두 본인 자신으로 됨이 아니고, 사회가 만듦이 아닌가?
● 문제 해결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크게 달라진다. 글 [가]는 뛰어난 개인에 의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영웅사적 시각으로 개인이 사회에 우선한다고 보고 있다. 반면 글 [나]는 사회적 조건이 개인을 만든다고 보는 환경 결정론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시각은 모두 한계를 갖는다. 즉 개인이 사회에 우선한다는 시각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의미를 놓치는 것이며, 사회가 개인을 우선한다는 시각은 개인의 자발성과 선택 가능성, 의지 등을 무시하는 것이다. 시대와 환경이 개인의 존재 조건을 만들어 내는 토대가 되지만, 개인이 시대와 환경을 선택하고 이용하는 능력, 의지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즉 사회적 조건이 개인의 전체적인 조건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기존의 상황과 국면을 제공하고 개인은 사회의 모순을 능동적으로 바꾸어 가는 상호 영향 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丹齋 申采浩 연보
1880년 :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도리미)에서 농촌의 가난한 선비 신광식(申光植)과 밀양 박씨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신숙주의 후손인데,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는 일찌기 문과에 합격하여 정언(正言)까지 지낸 바 있으나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낙향하여 농사를 돌보았는데, 아버지 대에 와서 집안이 몰락하여 어머니 집이 있는 한밭(大田) 근교 안동 권씨촌 작은 묘막에서 은거 중 출생하여 콩죽으로 끼니를 잇는 어린 시절을 보냄. 선생의 이름은 처음에 채호(菜浩)로 쓰다가 뒤에 채호(采浩)로 바꾸었는데 아호(雅號)는 단심가(丹心歌)에서 따온 일편단생(一片丹生)을 줄인 단생(丹生), 그것은 다시 단재(丹齋)로 고쳐 불렀고, 그 밖에 무애생(無涯生), 금협산인(錦頰山人), 한놈,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이라는 필명(筆名)을 쓰기도 함. 가명으로는 유맹원(劉孟源), 박철(朴鐵), 옥조숭(玉兆崇), 왕국금(王國錦), 윤인원(尹仁元) 등이 있다.
1887년 (8세) : 이 무렵을 전후하여 아버지 신광석이 38세로 별세. 어머니 그리고 형님 재호(在浩)와 함께 교육관계로 향리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고두미)로 이사함. 할아버지가 향리에서 작은 한문 서당을 열어놓고 있었으므로 이 서당에 들어가 엄한 교육을 받게 됨. 이 무렵 워낙 재질이 뛰어나 9세에 『통감』(通鑑)을 읽고 이해하며, 10세에 행시(行詩)를 지었으며, 14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여 소년 신채호의 문명(文名)이 인근 마을까지 널리 퍼짐.
1895년 (16세) : 향리에서 풍양 조(趙)씨와 결혼.
1897년 (18세) : 이때를 전후하여 형 재호가 20세로 요절. 이무렵까지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마침 목천(木川)에 있는 당시의 대학자이자 구한말의 재상이었던 양원(陽園) 신기선(申箕善) 집을 드나들며 많은 책을 섭렵. 신기선은 선생의 재질을 총애하여 무슨 책이든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함.
1898년 (19세) :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상경.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민권 운동을 전개하던 중 12월 25일 간부 및 회원들과 한때 투옥됨. 성균관에 들어가 당시의 성균관장 수당(遂堂) 이종원(李鐘元)의 총애를 받는 한편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애제자로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과 함께 실력을 인정받음.
1901년 (22세) : 한때 향리에서 20리 되는 인차리에 설립된 문동학원(文東學院)에 강사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3년 (24세) : 성균관에서 조소앙(趙素昻) 등과 친일·매국의 무리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고, 유생들과 일대 시위를 벌임.
1905년 (26세) : 2월에 성균관 박사가 됨. 단발을 결행할 뿐만 아니라 성균관 남재(南齋)에서 함께 머물고 있던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 위암(韋菴) 등 당대 저명 유생들의 단발 종용에 앞장섬. 향리를 찾아온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 논설위원에 위촉되어 계몽논설을 집필함.
1906년 (27세) : 위암 집필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얼마 뒤 운강(雲岡) 양기탁(梁起鐸)의 추천으로 영국인 배설(裵說)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됨. 주필 취임 이래 논설을 비롯해 언관(言官)·사관(史官), 다운 시론(時論)과 사론으로 국혼을 떨치고 애국계몽운동에 급선봉이 됨.
1907년 (28세) : 10월 25일 번안서『이태리 건국 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광학서보에서 발행. 마찌니와 같은 애국자를 최고의 인간상으로 형상화 하는, 애국심 고취와 민족혁명 진작에 앞장선 이 책은 그 서문부터 많은 사람에 널리 읽혀짐. 그러나 독립운동을 합법적으로 전개하기 어려워지자 운강 양기탁,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전덕기(全德基), 추정(秋訂) 이갑(李甲).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에 참가하며 그 취지문을 기초함. 또한 경향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논설로써 이를 주도하고 스스로 금연을 결행.
1908년 (29세) : 가정교육과 여성계몽을 위하여 순 한글잡지 「가정잡지」를 편집 발행. 이해 4월부터 「대한협회월보」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성력(誠力)과 공업(功業)」「대아와 소아」 등의 논설을 발표. 5월 30일 「을지문덕」 발간. 8월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에 「기호학회는 하유(河由)로 기(起)하였는가」「문법을 의통일」(宜統一) 등의 논설을 발표. 배설 사장의 도미(渡美) 유학 주선도 사절하고 주필로 계속 근무하면서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여우인절교서」(與友人絶交書) 「고 전간재 선생 족하」(告田艮齋先生足下) 등 논설을 발표하고 「성웅 이순신」과 「대한민국의 목적지」「독사신론」(讀史新論) 등을 연재하는 한편 동지에 논총(論叢)·사조(詞操)와 사회등(社會燈) 난에 연재 풍자의 담시류(譚詩類) 등을 발표.
1909년 (30세) :「대한매일신보」에 「학생계의 특색」「오호라 우용택(禹龍澤)씨의 국민·대한 양마보(兩魔報)의 응견(應犬)됨이여」「한국 자치제의 약사(略史)」 등 논설 발표. 시도(詩道)와 국가의 관계를 다룬 「천희당 시화」(天喜黨詩話)와 「동국거걸 최도통」(東國巨傑崔都統)을 연재, 「이순신」이나 「을지문덕」과 아울러 「최도통」에서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인간상을 그려 문약(文弱)을 배격하고 무풍(武風)을 떨치는데 힘씀. 8월에 윤치호, 안창호, 최광옥, 최남선, 박중화, 장응진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하고 그 취지서 집필. 그 당시 서울 삼청동에 거주하는데 늘 병약하여 약을 복용 중이었고, 장남 관일(貫日)이 태어났으나 우유에 체하여 일찍 여의고, 이 해에 선생은 부인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장래의 망명준비도 겸하여 밭 오두락(五斗落)을 사주고 사실상 별거 상태로, 그 무렵 죽은 형 신재호의 딸 향란을 맡아서 기름.
1910년 (31세) :「이십 세기 신국민」 발표. 이 해 봄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는 제목하에 육당 최남선 주재의 「소년」지 제3권 제8호에 수록 발표함. 국치(國恥)를 예감하고 4월 8일 도산 안창호, 추정 이갑, 월송(月松) 이종호(李鍾浩) 등과 중국으로 망명, 이때 순암 안정복의 친필본(本) 『동사강목』을 휴대하고 기차로 국경을 넘어 안동현에 도착한 뒤 기선으로 청도(靑島)에 안착, 다수 동지들과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는 청도회의(靑島會議) 개최. 여기에서 토지개간사업, 무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 및 전문기술자 확보 등을 결의하였으나, 자금 염출이 뜻과 같지 못하여 연해주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가서 월송 이종호로부터 자금을 다소 지원받아 독립사상 고취와 동지규합을 목표로「해조신문」(海潮新聞)을 다시 간행한 후, 다시「청구신문」(靑丘新聞) 뒤에「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 김하구(金河球) 등과 함께 복간한「권업신문」은 러시아어 번역판까지 내기도 했으나, 1914년 일본 정부의 간교한 술책으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발행금지를 당함.
1911년 (32세) : 해삼위에서 윤세복(尹世復 : 회장), 이동휘(李東輝), 이갑(李甲) 등과 광복회(光復會) 조직, 그 부회장으로 활약.
1913년 (34세) :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역사 연구에 몰두하던 중 예관(目兒觀) 신규식(申圭植)의 초대로 상해로 가서 망명지사들과 접촉, 그 시절 친분이 두터웠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언제나 얼굴에 곤란하고 궁핍한 빛이 띄어 누르스름 부은 듯도 하고 기운도 초췌하고 걸어다닐 때면 늘 복부를 부둥끼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냉통(冷痛)이 때때로 심하다고 하면서도 조선역사를 말할때에는 두 눈이 곁에 있는 사람을 쏘고 답변이 칼날 같았다. 가끔 한 두권 책자를 들고 법조계(法租界) 합이부로(哈爾部路) 뒷 공원 풀밭으로 거닐며 혼자 웅얼웅얼하다가 또 무엇을 생각하다가, 그 중에도 한 손은 여전히 복부를 부둥켜 놓지 못하였다."
1914년 (35세) :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학교 경영에 참가하는 한편 이 무렵 대종교(大宗敎)에 입교하고, 조선사의 집필에 착수. 그 때 윤세복과 이길용(李吉龍) 제씨와 장차 독립군양성소도 시찰할 겸 백두상에 오르고 남북만주 일대의 고구려 옛 영토를 떠돌며 광개토왕릉을 현지답사함. 이 때 그는 "내가 아령(俄領) 방면과 만주 방면에 있으면서 우리의 사적을 찾기에 전력을 다하였는데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자랑이 되는 훌륭한 것도 많았는데 저 무지한 중국인의 손에서 자꾸 없어져 가는 것을 생각하면 통곡할 수 밖에 없다" 고 한탄하였다. 일찌기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지적처럼 "단재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는 데 있었던 만큼 사적 답사의 뜻은 자못 큰 바 있었음.
1915년 (36세) : 북경에 머무르며 저술 및 동지 규합에 전념. 『조선상고사』의 집필도 구상하며 북경 도서관 생활. 신규식과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를 조직하여 해외에 있는 청년들의 당합을 꾀하는 한편 두사람이 함께 중국정부에 한·중항일공동전선의 결성을 제의. 또한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예관 신규식,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해외에 있는 청년들의 교육을 꾀함. 이무렵 만주 거류 동포계몽을 겸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재로 『조선사』를 발간하였다 하나 전해지지 아니함.
1916년 (37세) : 3월에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 독립운동의 길을 환상적으로 극화(극화)한 역사적인 주제의 작품인데 바로 그 자신을 모델로 한 한권의 자전적(自傳的) 소설이다. 8월에는 대종교의 나철(羅喆)이 자결하자 대종교운동에 참여해온 선생을 애통하며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음. 대종교와의 관계는 김교헌(金敎獻), 박은식, 유근(柳瑾) 등과 교육 책임자였음.
1917년 (38세) : 조카딸 향란의 혼인문제로 일시 몰래 입국하여 서울에 들어옴. 선생은 망명을 떠나면서 조카딸의 양육을 어느 동지에게 부탁하였는데 독단으로 혼사를 정해 놓고 작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함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義)를 끊는 뜻으로 손가락을 끊고 마지막으로 조국을 등지고 다시 중국 땅에 망명.
1918년 (39세) : 북경의 보타암(普陀庵) 일실(一室)에서 『조선사』의 집필을 계속하는 한편 북경의 권위지 「중화보」(中華報)에도 많은 논설을 집필, 신문의 판매 부수가 증가. 그는 이 원고료로 생활을 유지하였으나 그 후 「의」(矣)라는 글자 한 자를 빼고 실었다 하여 단연 집필을 거절, 동신문사 사장이 사과하러 왔으나 꾸짖어 보내며 연재를 중단하였고 또 한 번은 「북경일보」(北京日報)에 논설을 발표하던 중 3회째 연재 중에 원문 글자 두 자를 교정하였다고 분노하여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음. 그 후에도 돈을 위하여 집필한 것이 조선 사람의 지조를 깨뜨린 것 같다고 뉘우쳐 마지 않음.
1919년 (40세) : 2월에 봉천에 갔을 때 의군부(義軍府)에서 「주일보」(週日報)의 간행을 부탁받은 바 있고, 또 한진산(韓震山)과 「진광신보」(震光新報)를 발간한 듯함. 2월 무오 독립 선언서에 39인 민족 대표로 서명.4월 11일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녀 평정관(評定官)이 되고 이어 의정원(議政院)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한성 임시정부(漢成臨時政府)의 법통(法統)을 따를 것을 주장함. 경성국민대회(京城國民大會)에서도 평정관(評定官)으로 선출됨. 7월에는 임시정부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 전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3·1운동 얼마 뒤 남형우(南亨佑), 안희제(安熙濟), 박광(朴洸) 등이 조직하였던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단장으로 추대, 신문 「신대한」(新大韓)의 주필이 되어 철저하고 준열한 독립운동론으로 임시정부 기관지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주재의 「독립신문」과 대조적인 논조를 펴면서 특히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타협적인 도일사건(渡日事件)과 우남(雩南)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사건에 대하여 가혹한 비판을 가한 이후, 점차 임시정부 자체가 대의에 어긋남을 개탄하여 그것을 부인하는 논조를 펴게 되니 소위 신대한사건(新大韓事件)을 일으킴. 상해 의영학교(義英學校) 교장에 취임. 일명 「학생단」이라고도 하는 회원 70명 가량의 대한독립청년당의 단장이 되고, 이어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副團主)로 추대됨. 그 전후 상해시절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춘원 이광수로부터 영어를 배움.
1920년 (41세) :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가서 4월에 제2회 보합단(普合團)의 조직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의 직예성(直隸省)과 하남성(河南省) 방면에서 망명인사와 중국인 유지로부터 독립군자금을 모집하는 책임을 맡음과 아울러 이 단체의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됨. 이 해에 우당(友堂) 이화영(李會榮)의 부인 이은숙(李恩淑)여사의 자부의 중매로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간우회사건(看友會事件)으로 북경에 망명, 유학중이던 박자혜(朴慈惠) 여사와 결혼. 28세의 박여사와 북경 금십방가(錦什坊街)에서 생활.
1921년 (42세) : 1월, 「천고」(天鼓)지 창간. 음력 1월 맏아들 수범(秀凡) 출생. 4월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물불 이극로(李克魯) 등 동지와 함께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는 「이승만성토문」을 발표, 상해 임시정부 독립신문사측에서 춘원 이광수를 파견하여 선생에게 주필이 되어 줄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북경에 머물면서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 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하고 ①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 운동을 하고 ②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시국을 수습하며 ③ 군사단체를 완전히 통일해서 혈전을 꾀한다는 내용의 통일책진회 발기취지서를 발표. 겨울경「효종」(曉鍾) 간행.
1922년 (43세) : 생활이 극도로 궁핍한 가운데 역사 연구에 정진하고자 가족을 귀국시키고, 중국인 진(陳)씨의 알선으로 관음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불경 독파. 49일 고행도 하며 일년간 수도생활을 한것은 궁여지책이었으나 이 기간 조선사 연구에 몰두한 결과 대저작물 집성. 첫째권은「조선사통론」, 둘째권은 「문화편」, 세째권은「사상변천편」, 네째권은「강역고」(彊域考), 다섯째권은「人物考」(인물고), 기타 부록으로 된 방대한 원고였던 모양이나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23년 (44세) : 이 때를 전후하여 (1921-23) 치따, 하바로스끄의 원동군(遠東軍) 역사 교관. 흑하 연안에서『자본론』,『전쟁론』 등을 초역하여 독립군 교재로 쓰게 하였고, 이로 인해 밀산사건이 일어나자 투옥되었다가 풀려남. 1월에 상해에서 「조선혁명선언」을 기초(起草),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이고 유자명(柳子明)이 그 참모인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에 따라 쓴 「조선혁명선언」은 일명「의열단 선언」이라고도 하는데<고유적 조선의><자유적 조선 민중의><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사회적 불균등의><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할 것을 선언하고 이를 위하여 민중이 직접 폭력혁명할 것을 천명했다.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李石曾)의 소개로 수개월 동안유명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섭렵.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자 회의에 참여. 독립운동 지도층이 임시정부에 대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분열되는데, 선생은 창조파의 맹장(猛將)으로 활약. 그 무렵 북경 순치문내(順治門內) 석등암(石燈庵)에 일시 거처함.
1924년 (45세) : 북경에서 이규준(李圭駿) 중심으로 조직된 다물단(多勿團)의 선언문을 집필하며 지도함. 이 다물단에서 김달하(金達河)가 일본군의 스파이라 하여 이듬해 가을에 암살한 사실이 있었음. 그 무렵 육당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에서 환국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함. 단오절에 환인현(桓仁縣)에서 이도(李悼) 윤세용(尹世茸) 제씨(諸氏)와 한시(漢詩) 「무제」(無題) 지음.
1925년 (46세) : 1월 3일부터 10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이두문 명사해석법」「삼국사기 중 동서양자(東西兩字) 상환고증(相換考證)」「삼국지동이열전교정」「평양패수고」「전후삼한고」「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조선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등이 연재 발표됨. 이 때를 전후하여 민족항쟁의 적극 추진에 무정부주의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여기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함. 그것은 정부라는 것이 있으므로 해서 권력투쟁이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독립운동을 하는 망명정부에서도 권력투쟁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 모든 역량을 독립 운동에 집중시키는데 무정부주의가 적절한 한 방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7년 (48세) : 1월에 비타협적 민족통일 전선인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의 한사람이 됨. 대략 이 시기에 김창숙, 박숭병(朴崇秉) 등과 잡지「탈환」을 발간하였으며, 9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적극 항쟁의 필요성에 따라 무정부주의 동방연맹(東方聯盟)에 가입하고 「동방」(東方) 잡지를 발간.
1928년 (49세) : 조선일보 신년호에「예언자가 본 무진(戊辰) -새해에 대한 측면관(側面觀)」기고. 이 해 벽두에 혁명 소설「용과 용의 대격전」집필. 조선사 연구에 열중하다가 시력이 매우 악화되어 완전 실명하기 전에 아들과 상면하기를 원하여 이 해 초에 처자를 북경에 부름. 사월에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북경회의 동방연맹대회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작성하는 등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조선에 독립운동의 선전기관을 설립할 것과 일본인 건축물을 파괴하기 위한 폭탄제조소를 설치할 것 등을 결의함. 이 결의를 실천하기 위한 자금 마련책으로 북경우무관리국(北京郵務管理局)에 근무하는 대만인 임병문(林炳文)과 협의 외국위체(外國爲替) 입수 등 눈부신 행동을 개시.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일본 신호(神戶)를 거쳐 문사(門司)에서 항춘환(恒春丸)편으로 5월 8일경 대만 기륭항(基隆港) 상륙 직전 일본의 수상서원(水上署員)에 잡혀 대련(大連)에 호송됨. 대련감옥에서 미결수로 10월 23일 이관용(李灌鎔), 11월 16일 신영우(申榮雨) 등과 옥중 면담.
1929년 (50세) : 연초부터 대련 법정에서 공판이 개정되어, 2월 7일 2회, 4월 4일 3회, 10월 3일 4회 재판 속개. 사실 심리 과정에서 피고인으로서 "현제국주의 제도에 불평과 약소민족의 미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느냐" 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다" 고 답변함. 이 해 차남 두범(斗凡) 출생. 부인은 서울에서 산파업을 하고 있었으나 생활은 말이 아니었고, 이를 옥중에서 전해들은 선생은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 라는 비통한 편지를 보내옴.
1930년 (51세) : 5월 9일, 대련법정에서 2년 10일 만에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되어 여순(여순) 감옥에 이감, 복역. 6월 15일 그 동안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조선고대사 관계논문의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동지들의 주선에 의하여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란 이름으로 출간됨.
1931년 (52세) : 민세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백 3회에 걸쳐 『조선사』를 연재. 이어 10월 15일부터 12월 3일, 대음해 5월 27일부터 5월 말일까지 40회에 걸쳐 『조선상고문화사』를 발표 연재함. 그러나 선생은 고칠 것도 많고 또 일본연대로 표시하는 신문에 글을 실리고 싶지 않다고 하여 연재를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음.
1935년 (56세) :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 이에 서울의 친지들이 선생의 옛친구이며 일가뻘이 되는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假出獄)을 종용하였으나, 선생은 친일파에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히 거절함.
1936년 (57세) : 2월 18일,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급보에 접한 부인과 아들 수범, 친우 서세충(徐世忠)이 여순으로 달려갔으나 2월21일(음력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 순국(殉國). 향년 57세. 순절의 비보에 접하여 김창숙은 "단재의 죽음으로 나라의 정기(正氣)가 스러졌다" 고 애도했고, 단주(丹洲) 유림(柳林)은 "단재는 천하의 선비로 내 스승이었다" 라면서 칭송함. 그는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하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소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옴. 당시 국내의 각 신문에서는 순국하여 말없이 환국한 선생을 애도하여 마지 않았고, 4월호 「신동아」「조광」(朝光)지 등에서 단재 추모특집. 유골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 선생이 살던 옛집터에 이제 당국이 모르게 모셨다. 그는 민적(民籍)이 없어 정식으로 묘소허가를 얻지 못하고 친척뻘되는 면장의 묵인하에 암장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발각되어 면장은 파면당하고 말썽이 많았다. 그는 살아서 "곡하고 노래하기 그마저도 어려워라" 고 했지만 죽어서도 정작 묻힐 곳이 없는 형편이었다. 묘소의 비갈(碑碣)은 만해(卍海) 한용운이 벌석하고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단재 신채호지묘」(丹齋申采浩之墓)라고 서각(書刻). 만해가 따로 비문을 쓰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묘비(墓碑)만 경부(田井夫) 신백우(申伯雨)가 몰래 갖고 가 세움.
1998년 5월 2일
조영태
丹齋 申采浩
서
본
1. 신채호의 생애와 독립운동
--(1) 성장과 수학기
--(2) 애국계몽운동기
--(3) 국외망명 독립운동기
--(4) 무력적민중혁명론과 고대사연구기
--(5) 민족해방의 무정부주의운동기
2. 신채호의 의열단 활동과
『조선혁명선언』 작성
3. 『조선혁명선언』과 무력적민중혁명론
--(1)『조선혁명선언』
--(2) 무력적민중혁명론
결
서
한국근대사를 돌아보면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사학과 근대사학의 수립자이며 동시에 민족독립운동가였던 한 인물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은 그 호 丹齋가 이야기하듯 一片丹心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사를 밝히는데 쏟아 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단재 신채호의 일생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 살펴보고 그의 후기 민족독립사상을 집약·표출하고 있는 『조선혁명선언』과 '무력적민중혁명론' 에 대하여 간략히 적어 보았다.
본
1. 신채호의 생애와 독립운동
신채호의 생애는 그 성장, 수학, 사회적 활동과 사상적 전개과정을 고려해 보건대 대략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
그 첫단계가 출생, 성장, 수학의 시기이고 두번째가 애국계몽사상가요 역사학자로써 그의 전기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던 시기이며, 세번째는 망명의 시기요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시기이다. 네번째는 임정에서 탈퇴하여 정치적으로는 반 이승만노선을 표방하고 사상적으로 '무력적민중혁명론' 을 주장하며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번째는 신간회와 무정부주의결사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모색하며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기까지라 할 수 있다.
--(1) 성장과 수학기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도리미)에서 농촌의 가난한 선비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한다. 본관은 고령으로 신숙주의 후손인데, 할아버지 신성우는 일찌기 문과에 합격하여 정언까지 지낸 바 있으나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낙향하여 농사를 돌보았는데, 아버지 대에 와서 집안이 몰락하여 어머니 집이 있는 한밭 근교 안동 권씨촌 작은 묘막에서 은거 중 출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시절, 거의 매 끼니를 콩죽으로 연명할만큼 극심한 생활난을 겪었다.
아버지 광식의 행적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으나 자신의 대에서 입신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듯 자식의 교육에 기대를 걸고 일찍부터 수학의 길을 터 주었으나 1887년이 되는 해에 아버지 신광석이 38세로 별세하여 어머니 그리고 형님 재호와 함께 교육관계로 향리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고두미)로 이사하게 된다. 할아버지가 향리에서 작은 한문 서당을 열어놓고 있었으므로 이 서당에 들어가 엄한 교육을 받게 되는데 특히 신채호는 어릴때 부터 병약하여 항상 잔병치레가 떠날 날이 없었으나 문재가 특출하여 9세에 『통감』을 읽고 이해하며, 10세에 행시를 지었으며, 14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또 이때를 전후하여 형 재호가 20세로 요절하였는데 이미 기혼이었고 소생으로 어린 딸을 두고 있었다. 신채호는 8년 연상인 형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형 재호의 죽음은 신채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형에 대한 그의 향념이 각별하였다는 것은 훗날 그가 중국 망명생활 중에 조카딸 향란의 혼사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밀입국 했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채호는 16세가 되는 1895년에 당시의 풍속에 따라 혼례를 올린다. 농촌 출신의 조씨 부인과는 매사에 의견이 맞지 않았고 그의 결혼 생활은 훗날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던 1910년까지 14년간 계속되었으나 국외망명을 앞두고 사실상 이혼상태로 끝나게 된다.
급속히 학문적 성숙을 거듭하던 신채호는 18세에 당시의 대학자이자 구한말의 재상이었던 양원 신기선 집을 드나들며 많은 책을 섭렵하였고, 1898년 가을에는 그의 추천으로 상경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가 당면한 시대적 상황을 깊이 관찰하고 유학적 이론과 사고에 대하여 깊은 성찰과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는 또 당시에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급진개화사상이나 위정척사사상의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개화 사상을 자주적인 입장에서 민족자강사상으로 수용 발전시키고자 부심하였다.
--(2) 애국계몽운동기
그의 최초의 독립운동은 1896년에서 1898년에 걸쳐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근대적인 민권자강운동에 참여하는데서 비롯된다. 신채호가 독립협회에 참여한 시기는 대략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자강개혁내각의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을 추진하던 전후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는 당시 독립협회 소장파의 한사람이며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했었는데 독립협회는 이해 12월 25일 일부 수구파 관료 및 국왕의 기습적인 탄압을 받아 해산되기에 이르고 신채호는 이때를 전후하여 구속되었다. 당시 신채호가 얼마동안의 투옥생활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1901년 고향에 내려가 문동학원 강사가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아 짧은 기간이었을 듯하다.
한때 향리에서 20리 되는 인차리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인 문동학원에 강사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03년 24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에서 조소앙 등과 친일·매국의 무리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고, 유생들과 일대 시위를 벌여 민족의식에 투철한 신채호의 실천적이면서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1905년 2월에 그는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단발을 결행하여 민족자강의 구국운동에 투신하려는 결의를 나타내었다. 또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에 위촉되어 계몽논설을 집필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로인해 위암 집필의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얼마 뒤 양기탁의 추천으로 영국인 배설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주필 취임 이래 논설을 비롯해 언관·사관, 다운 시론과 사론으로 국혼을 떨치고 애국계몽운동에 급선봉이 된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합법적으로 전개하기 어려워지자 양기탁, 이동녕, 이회영, 전덕기, 이갑, 안창호, 이승훈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의 조직에 참가하며 그 취지문을 기초하고 또한 경향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논설로써 이를 주도하고 스스로 금연을 결행하였다. 또 1909년 8월에 윤치호, 안창호, 최광옥, 최남선, 박중화, 장응진 등과 청년학우회를 발기하고 그 취지서 집필하였다.
신채호는 그 당시 서울 삼청동에 거주하는데 늘 병약하여 약을 복용 중이었고, 장남 관일이 태어났으나 우유에 체하여 일찍 죽게 되었고 사실상 별거 상태인 부인에게 장래의 망명준비도 겸하여 밭 오두락을 사주고, 죽은 형 신재호의 딸 향란을 맡아서 기르게 된다.
--(3) 국외망명 독립운동기
국치를 예감한 신채호는 1910년 4월 8일에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기차로 국경을 넘어 안동현에 도착한 뒤 기선으로 청도에 안착하여 다수 동지들과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는 청도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서 토지개간사업, 무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 및 전문기술자 확보 등을 결의하였으나, 자금 염출이 뜻과 같지 못하여 연해주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가서 이종호로부터 자금을 다소 지원받아 독립사상 고취와 동지규합을 목표로『해조신문』을 다시 간행한 후, 다시「청구신문」,「권업신문」을 발행하고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한다.
이후 1914년에 윤세복의 초청으로 봉천성 회인현에 가서 학교 경영에 참가하는 한편 이 무렵 대종교에 입교하고 집필활동에 들어간다. 이 때 그는 "내가 아령 방면과 만주 방면에 있으면서 우리의 사적을 찾기에 전력을 다하였는데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자랑이 되는 훌륭한 것도 많았는데 저 무지한 중국인의 손에서 자꾸 없어져 가는 것을 생각하면 통곡할 수 밖에 없다" 고 한탄하였는데 그의 일념은 첫째가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는 데 있었던 만큼 사적 답사의 뜻은 자못 큰 바 있었다.
1919년 2월에 무오 독립 선언서에 39인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고 4월 11일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평정관이 되고 이어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또 경성국민대회에서도 평정관으로 선출도었고 7월에는 임시정부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 전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개조·통합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선임에 비판적이었던 신채호는 의정원 의원직과 전원위원장 자리를 사퇴하고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는 자들과는 과감한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임정노선에 대립되는 주간신문 『신대한』의 주필이 되어 철저하고 준열한 독립운동론으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대조적인 논조를 펴면서 특히 여운형의 타협적인 도일사건과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사건에 대하여 가혹한 비판을 가한 이후, 점차 임시정부 자체가 대의에 어긋남을 개탄하여 그것을 부인하는 논조를 펴게 된다.
1920년 41세가 되는 해에 그는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가서 제2회 보합단의 조직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의 직예성과 하남성 방면에서 망명인사와 중국인 유지로부터 독립군자금을 모집하는 책임을 맡음과 아울러 이 단체의 내임장으로 추대되었고 이 해에 유학중이던 박자혜 여사와 결혼하여 북경 금십방가에서 생활한다.
다음해 음력 1월 맏아들 수범 출생하였다. 또 이해 4월에 김창숙, 이극로 등 동지와 함께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는 「이승만성토문」을 발표하였고, 상해 임시정부 독립신문사측에서는 이광수를 파견하여 선생에게 주필이 되어 줄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북경에 머물면서 김정묵, 박봉래 등과 통일책진회를 발기하고 발기취지서를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4) 무력적민중혁명론과 고대사연구기
신채호가 정치적·군사적인 민족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던 1922년, 그의 사생활은 점차 궁핍과 고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부인과 아들을 본국으로 들여보내고 중국인 진씨의 알선으로 관음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불경 독파하였고 이 기간 조선사 연구에 몰두한 결과 대저작물 집성하였는데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강역고」,「인물고」, 기타 부록으로 된 방대한 원고였던 모양이나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편 그해 겨울 의열단의 김원봉의 방문을 받아서 의열단과 같이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였고 이 선언은 일명「의열단 선언」이라고도 하는데<고유적 조선의><자유적 조선 민중의><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민중적 문화의>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사회적 불균등의><노예적 문화사상의>현상을 타파할 것을 선언하고 이를 위하여 민중이 직접 폭력혁명할 것을 천명했다.
또 이즈음에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의 소개로 수개월 동안유명한 사고전서를 섭렵하고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자 회의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지도층이 임시정부에 대한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되는데, 선생은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고 그 무렵 북경 순치문내 석등암에서 일시 거처한다.
--(5) 민족해방의 무정부주의운동기
1924년말 북경에서 북경에서 이규준(李圭駿)가 중심으로 다물단이 조직된다. 그리고 그 지도와 선언문을 집필을 신채호에게 부탁하였다. 그 무렵 육당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에서 환국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다음해 1월 3일부터 10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이두문 명사해석법」「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삼국지동이열전교정」「평양패수고」「전후삼한고」「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조선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등이 연재 발표하였고 이 때를 전후하여 민족항쟁의 적극 추진에 무정부주의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여기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것은 정부라는 것이 있으므로 해서 권력투쟁이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독립운동을 하는 망명정부에서도 권력투쟁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 모든 역량을 독립 운동에 집중시키는데 무정부주의가 적절한 한 방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1927년 1월에 비타협적 민족통일 전선인 신간회 발기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9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적극 항쟁의 필요성에 따라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게 된다.
1928년 조선일보 신년호에「예언자가 본 무진 -새해에 대한 측면관」을 기고하고 이 해 벽두에 혁명 소설「용과 용의 대격전」을 집필한다. 4월에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북경회의 동방연맹대회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작성하는 등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조선에 독립운동의 선전기관을 설립할 것과 일본인 건축물을 파괴하기 위한 폭탄제조소를 설치할 것 등을 결의하였고 이 결의를 실천하기 위한 자금 마련책으로 북경우무관리국에 근무하는 대만인 임병문과 협의 외국위체 입수 등 눈부신 행동을 개시하였다.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일본 신호를 거쳐 문사에서 항춘환편으로 5월 8일경 대만 기륭항 상륙 직전 일본의 수상서원에 잡혀 대련에 호송되어 대련감옥에서 미결수로 갇히에 된다. 대련 법정에서 공판이 개정되어, 1928년 2월 7일 2회, 4월 4일 3회, 10월 3일 4회에 걸친 재판 진행되었다. 사실 심리 과정에서 피고인으로서 "현제국주의 제도에 불평과 약소민족의 미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느냐" 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다" 고 답변하였다.
이 해 차남 두범이 출생하였는데 부인은 서울에서 산파업을 하고 있었으나 생활은 말이 아니었고, 이를 옥중에서 전해들은 선생은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 라는 비통한 편지를 보낸다.
1930년 5월 9일, 대련법정에서 2년 10일 만에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되어 여순 감옥에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복역중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으나 선생은 친일파에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1936년 2월 18일, 57세가 되던 해에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급보에 접한 부인과 아들 수범, 친우 서세충이 여순으로 달려갔으나 2월21일(음력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 순하였다. 그는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하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소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왔다. 유골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 선생이 살던 옛집터에 일제 당국이 모르게 모셨으나 이것이 발각되어 면장은 파면당하고 말썽이 많았다. 묘소의 비갈은 만해 한용운이 벌석하고 위창 오세창이 「단재 신채호지묘」라고 서각했다. 만해가 따로 비문을 쓰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묘비만 경부 신백우가 몰래 갖고 가 세운다.
2. 신채호의 의열단 활동과 『조선혁명선언』 작성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에서 폭력투쟁을 위한 비밀결사인 의열단이 창단한다. 그러나 이 단체는 폭력투쟁이 독립운동차원에서 정당화할 만한 성문화된 강령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자들 사이에서도 암살·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테러리스트 단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형편이었다. 물론 그들은 1919년 창립 당시에 결정한 「공약 10조」라는 내부적인 신조와 강령이 있었으나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들은 단원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그들의 투쟁정신을 일반 민중에게 널리 선전 계몽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1922년 겨울, 의열단에서 단장으로 있던 약산 김원봉은 단재 신채호를 방문하게 된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의 행동적인 투쟁노선에 동조하였고 김원봉은 의열단의 활동에 지침이 될만한 혁명선언을 기초해 줄 것을 청하기에 이른다.
아뭏든 신채호는 김원봉의 간청을 쾌락하여 그와 함께 상해로 간다. 이 때 김원봉은 양옥 한채를 세내어 헝가리인 폭탄기술자 마자알을 고용하여 비밀리에 고성능 폭탄을 제조하고 있었고 약 1개월 뒤 폭탄 제조와 실험이 모두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신채호는 1923년 1월을 전후로 하여 『조선혁명선언』을 탈고한다. 약 1개월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결과였다. 이 선언문은 6천 400여자에 이르며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의 정당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문서로써 자리매김을 하게 되며 훗날 최남선의 『3·1 독립선언서』와 한용운의 『조선독립 이유의 서』와 함께 대표적인 독립선언서의 하나로 간주된다.
이 무렵을 전후로 해서 신채호는 의열단에 선언문을 기초해 준 것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적인 무력투쟁에도 직·간접적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7월 21일, 김창숙, 유자명 등과 천진에서 회합을 갖고 동양척식 및 척산은행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권총 및 실탄을 구입하고 국내에 잠입할 대원으로 유자명, 한봉근, 나석주, 이승춘이 함께하려 했으나, 시일을 끌게 되어 자금의 대부분을 소비하여 결국 나석주 단독으로 결행하게 된다.
이 거사계획은 의열단원 유자명이 실질적인 배후 책임자였다. 또한 신채호도 당시 그가 보관하던 폭탄 2개를 나석주에게 제공하였고, 일설에는 서울에 있는 그의 처 박자혜에게 현장답사 임무를 의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석주의 거사가 있은 후 일본 경찰은 김창숙, 유자명, 한봉근, 이승춘, 신채호, 박관해, 황의춘, 이지영 등을 그 배후 관련자로 지목했는데 이는 신채호와 의열단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조선혁명선언』과 무력적민중혁명론
--(1) 『조선혁명선언』
먼저 이 선언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라는 말로 시작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그 현실을 절실하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 결론으로 일제는 '조선민족 생존의 적' 이며 아울러 '일본을 없애는 일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 임을 가차없이 선언하고 있다.
둘째로, 일제와 타협하는 국내의 일부 사이비 민족운동자들도 민족의 적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신채호가 지칭하는 타협주의자는 내정독립론자·참정권론자·자치론자·문화운동자 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제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하에 한국인의 정치활동을 얻어내자는 것으로, 일제의 회유책에 조종되어 다분히 순응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강도적 침략주의의 근성을 지닌 일제의 이민족 통치하에서는 어림도 없는 허명임을 간파해 마지 않는다. 또 문화운동자들도 다음과 같이 비판해 마지 않는다.
……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 약탈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성이 있으랴. …… 검열·압수, 모든 압박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어 대며, 강도의 비위를 거스리지 아니할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세째로, 이 선언은 당시 상해의 독립노선 중 외교론과 준비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여 '민중직접혁명의 수단' 에 의한 새로운 독립투쟁의 방향을 모색한다.
먼저 외교론에 대해서는 그 과신이 조선시대의 문약정치가 낳은 사대외교에서 비롯됨을 지적하고 외세에 의존함으로는 민족의 자주역량에 의한 독립을 할 수 없음을 말하며 특히 3·1운동에 있어서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오히려 민족독립운동의 타오르는 의기를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준비론에 대한 비판은 독립준비론의 범위가 끝없이 확대되는 이 마당에 '선준비 후독립투쟁' 을 잠꼬대라 일소한다.
…… 경술 이후 각 지사들이 …… 십여년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만치 준비! 준비! 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없는 단체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 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實業)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신채호는 외교론·준비론을 펴는 임시정부의 지도노선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민중직접혁명' 의 수단을 제시한 것이다.
네째로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 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 이라고, 민족혁명의 당위성을 전제한 다음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沸騰)·팽창(膨脹)의 열도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진 판단에서 이탈하여 돈없고 군대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帝王)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신채호가 독립혁명을 달성할 수 있는 주도세력으로 주목한 것은 바로 '민중' 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서 폭력적 혁명이 수반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십만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천장(億千張) 신문 잡지가 한번의 폭동만 못할 지니라.' 고 하여 폭력적 방법만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임을 단언한다.
신채호는 지금까지의 독립운동의 취약점에 대해 민중이나 폭력이 결여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갑신정변은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 또한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은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보였지만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기에 실패하였다고 지적한다.
또 네번째장에서 주목할 것은 폭력의 대상물을 열거한 것인데 여기에서 신채호가 주장한 폭력은 부대조직의 군사행동이 아닌 테러행위를 지칭함을 나타내 주고있다.
이제 폭력 - 암살·파괴·폭동 - 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정탐꾼·매국적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 할 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다섯째로, 이 선언은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고 전제하며 파괴와 건설의 변증법을 통하여 미래의 이상적인 조국상을 제시한다. 신채호가 파괴대상으로 열거한 것은 제국주의와 봉건제도로 '민중직접혁명' 이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파괴를 통해 자유·평등의 이상적인 민중사회의 건설에 있음을 뚜렷이 하고 있다.
끝으로 이 선언은 '민중직접혁명' 이 민중과 폭력이 수반되어야 함을 재천명하며 다음과 같이 끝마치고 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2) 무력적민중혁명론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열단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단순히 의열단이라는 항일 폭력투쟁 단체의 강령이나 투쟁방법을 대변한 선언문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서가 일차적으로는 '선언적 강령' 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의열단에 신채호 자신의 무력급진론적인 투쟁 이념을 부여하고, 나아가 당시에 변모된 정세에 부응하여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채호는 일찌기 국외로 망명하기 전에 민족주의 이론을 개진한 바 있으며, 그것은 한말에 대두된 개화사상과 민족자강론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망명 이후 경술국치를 당하여 그 시대의 정세와 식민지현실의 변모에 따라 그 이론과 실천면에서의 혁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급격히 대두된 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새로운 조류는 개화와 민족자강론으로 특징지워진 초기 민족주의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무력적민중혁명론이라는 후기 민족주의의 이론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신채호의 무력적민중혁명론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족독립운동의 주도적 담당 세력으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 실천방법도 임정의 독립노선인 외교론·준비론이 아니라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에 의한 독립투쟁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그가 임정에 적을 두었다가 탈퇴한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그 도안 자기 자신이 체험하고 구상해 온 민족 독립의 방략을 논리적 체계로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그는 마침 의열단의 요청으로 이 선언을 기초하면서 무력적민중혁명론의 노선을 구체화 한 것이다.
그가 민족독립운동의 방안과 담당계층으로 각기 '민중' 과 '혁명' 개념을 도입한 것은, 1920년대 민족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이 새로운 전환점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3·1운동 이후에 대두된 노동운동·농민운동은 때마침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영향뿐 아니라 경제적 민족주의에 눈뜬 민중의 자발적 역량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신채호는 이들 민중세력에 크게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민중을 토대로 한 혁명의 성취를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자각시키는 일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신채호가 초기에 입론한 민족자강사상에서 민중적 혁명 사상으로의 변환은, 당시의 시대적 정세 변화를 예리하게 반영한 결과이었으며 사실 신채호가 이 선언에서 격렬한 어조로 주장한 것은 일제 이족통치의 타파였으며, 또 그 제국주의적 속성의 부정을 통해, 고유적 조선·자유적 조선민중·민중적 경제·민중적 사회·민중적 문화가 실현된 조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이상적 미래를 설계하고자 함이었다.
결
이상으로 신채호의 일생과 『조선혁명선언』 그리고 '무력적민중혁명론' 에 대해 알아보았다. 신채호의 일생은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감옥에서 순국하기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역사를 밝히는 데에 모든 힘이 모아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민족운동사상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이 갖고 있는 비중이나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의의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신채호의 후기 민족독립사상을 집약·표출하고 있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1920년대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반영한 독립 선언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에서 식민통치기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에서 나온 이 논의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와 우리의 입장을 객관적 입장에서 견지하여 나타난 결과물로써 민중의 무력적 항쟁만이 자주독립의 유일한 길임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