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는 기차로 가게 되는데 뉴델리에서 암리차르까지도 520㎞가 넘는 장거리이기 때문에
기차로 간다.
인도의 기차역은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이 많아서 무거운 짐을 직접 들고 기찻길을 건너기 위해서 고가도로를 건너야 하기 때문
에 기차를 타는 일이 특히 여성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기차역 앞에는 짐을 운반하려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네 시 반에 기차를 타고 여섯 시간 걸려서 암리차르에 도착했는데 저녁 열시 반이다.
선반에 케리어를 올리는데 이것도 혼자서 올리기가 힘이 든다.
뉴델리를 벗어나서 암리차르로 가는 길의 들판 모습...우리나라의 논과 같은 모습이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북서쪽으로 올라간다.
기차가 출발하자 말자 곧바로 식사와 간식이 나온다.
조금 있다가 또 간식이 나오고...
심심할 여가가 없다.
밖의 경치를 보다가 보면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또 식사가 나온다.
디져트도....
여섯시간 만에 암리차르에 도착을 하고...
트렁크를 내려서 가이드가 모이라고 한 곳으로 가야 한다.
정신줄을 잠깐만 놓으면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대합실이 승강장과 같이 있어서 혼잡해서 한눈 파는 사이 일행을 놓치게 된다.
같이 모여서 역 밖으로 나간다.
숙소로 가기 위해서 버스에 짐을 싣고...
숙소에 도착을 하고...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열악했던 숙소 중의 하나이다....숙소의 예약은 여행사에서 사전에 한다....그리고 암리차르가 파키스탄 국
경 근처의 도시라서 도시도 그리 크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밤 열시 반에 암리차르에 도착을 해서 다시 예약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가서 방을 배정 받으니 11시가 넘었다.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샤워를 하고 나기 열두시가 넘었다.
가이드는 내일 아침 5시경에 황금사원을 가 보라고 하는데 황금사원은 밤에 보지 않으면 안된다.
밤에는 사원 전체에 조명을 켜기 때문에 황금사원이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지만 낮에는 조명이 없기 때문에 그냥 아름다운 건
축물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3시에 일어나서 그래서 룸메이트와 같이 호텔 밖에서 30여분을 릭샤를 기다려서 사원에 도착하니 네 시가 넘
었다.
여름이기 때문에 새벽도 빨리 오고 새벽이 오면 조명이 빛을 잃기도 하고 5시 반 정도에 조명을 끄기 때문에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서둘렀던 것이다.
새벽에 릭샤를 잡아서 암리차르의 황금사원으로 가는 길이다...마치 별천지를 들어가는 느낌이다. 앞에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새벽인데도 삼삼오오 들어가는 사람들
황금사원 주변은 별도의 도시가 만들어져 있다...바닥도 대리석으로 깔아져 있어서 이곳은 인도의 여느 곳과는 완전이 다르다.
앞에 황금사원의 건물이 보인다.
실지로 보면 조명이 참으로 아름답다.....시크교도가 아니라도 조명을 보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처럼 ...바깥 광장으로
좌측에 신발을 맡기는 곳이 있고 광장에서부터 신발을 벗게 된다.
우리가 암리차르로 오는 것은 파키스탄의 라호르로 가기 위해서이고 또 암리차르에는 시크교사원(寺院)으로 유명한 황금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암리차르(Amritsar)는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동쪽으로 32km 뉴델리에서는 북쪽으로 500여km에 있는 펀잡주에 있는 인도의 변
방의 소도시이다.
이곳에 황금사원(하르만디르 샤히브)이 지어지기 전에는 1919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학살 사건이 일
어난 곳으로 밖에 알려진 것 밖에 없으나, 지금은 인도를 오는 사람이라면 들러보고 가야 할 곳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건물이 휘황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러 오는데 이 건물은 시크교의 본산(本山)으로 시크교의 성지이다.
그러므로 시크교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건물이 아름답기는 한데 어마어마하게 돈을 처발라서 건물을 지어 놓았구나’ 정도의 감상
으로 끝나게 된다.
여행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지역의 종교를 알고 가야하는데 우리가 보는 그 지역의 건물이나 사람
들의 삶은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와 모든 것이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던 종교에 대해서 기본적인 상식정도는 알
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건물만 보고 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문과 바깥 광장에서 잠을 자는 교인들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안내를 맞는다.
대부분이 가족단위로 모여 있고..
정문으로 들어가면 하리 만디르 사힙(Hari Mandir Sahib)이라는 황금사원이 정면에 나타난다....400키로의 금이 입혀져 있다고...
시크교에 대해서 간단히....
시크교는 나나크(Guru Nanak Dev, 1469~1538)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시된 종교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교리의 일부를 받아 들여
만들어 졌으며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거부하여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시크교 교도가 되면 남자는 사자
라는 의미를 가지는싱(Singh)으로 성이 바뀌고 여자는 공주(公主)라는 의미의 카우르(Kaur)로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신은 영원하며 형체가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신으로 다가 가는 길은 오로지 수행과 명상만이 길이다 고하여
수행과 명상을 중요시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크교도들은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는데 신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훼손하지 않고 간직한다는 의미로 머리와 수염을 말아
서 터번 속으로 넣기 때문에 남자들은 터번을 쓰고 단검을 차는 것은 용기와 약자에 대한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시크교는 교도가 2천 5백만 정도로 세계 5대 종교에 속하지만 소수이다가 보니 무굴제국 시대에는 이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았
고, 그 후로는 힌두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1801년에 란지트 싱에 의해서펀 자브 지방에 시크교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1849
년에 영국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시크교도들은 인도인들 중에서 부유하게 살아가는데 교리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해외에 있는 시크교도들 또
한 부유하게 살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시크교도들이 영국군들과 싸워서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그 용감성을 인정하
여 1.2차 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하게 하였고, 지금도 시크교도들을 경비(警備)로 채용하는 나라들이 많을 정도이다.
인도가 영국으로 독립후에 이슬람인인들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을 하였지만 시크교는 분리독립을 하지 못하게 되자 독립은 하
지 못하더라도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자 총리였던 인리가 간디가 시크교도를 탄압하면서 황금사원에 무장 난입을 하여 400명을 학살하자,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
였던 경호원에게 1984년 암살이 되었고 시크교인들은 인도인들에 의해서 무차별 학살을 당하였다.
그 이후 2004년 인디라 간디의 며느리 소냐 간디가 시크교 교도인 만모한 싱을 총리로 임명하는 등 화해를 하였으나 아직도 과격
파 시크교도들이 테러를 하는 등 아직도 시크교도들과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과는 갈등이 계속 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