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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8)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1:22-25
<스스로 속이지 말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제일 강적은
‘알았다고 해 놓고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제 말해도 ‘알았다’고 하고,
오늘 말해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행하지는 않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은 잘 합니다.
그런데 실천을 안 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말합니다.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이나 속임수로 속일 수 없는 두 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물건을 훔쳐 감추었던 아간은 사람들의 돌에 맞아죽었으며,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도 거짓말로 인해
문둥병자가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전 재산을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말해놓고 실제로는
반을 감추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들을 향하여
성령을 속인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성령을
속인 죄로 그 자리에서 영혼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결코 속일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자기 자신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두 주 전에 이태원 살인사건(조중필씨)의 피의자인 페터슨이
19년만에 송환되어 왔습니다. 공항에서 기자 회견을 하는데
자신은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친구였던
에드워드 리가 죽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제 시선은 페터슨에게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가 진범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알 것입니다.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속히 범행을 자백하고 합당한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
책임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할지는 내 맘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
(요1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좋은 설교를 듣는 것으로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공부에 참여하고는 성경지식이
자란 것으로 만족할 때가 있습니다.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고 그 감동에
스스로 만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 말씀과 지식과 감동이
실생활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기존의 성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는 실천은커녕 아직 듣는 것조차
힘겨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혹은
‘배우는 것’을 소홀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듣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듣기만 하는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듣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 어느 아이의 편지 -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내용 -
답장 -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먼저 배우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없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롬10:14-15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 사기꾼의 말도 자꾸 들어보십시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결국에는 속아 넘어갑니다.
예> 이단들의 수법 - 반복하여 세뇌시킴.
우리가 그런 악한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기 전에
그런 자들의 말을 먼저 들었다면.... 끔찍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위를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하나님께
올바르게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들으십시오.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기회가 있으면 열심을 내서 배우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듣는 것에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것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초기 선교사들부터 지나치게
‘믿음’만을 강조하다보니 ‘실천’의 문제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둘째,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였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쓸 정도로 서구열강의
식민지 정책이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 정치적인 핍박아래 있던 교회는 소위 ‘정교 분리’의 원칙이
세워 정치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고, 문화적인 핍박아래
있던 교회는 ‘내부 지향적인’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셋째, 일제의 식민지 시절, 전쟁 통에 그야말로 우리 민족은
‘한’ 많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 탈출구요 해방구였습니다.
‘한’을 풀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해방의 말씀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천국에 온 것 같았습니다.
현실과 분리된 영적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한국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밖에서는 어떻든지 교회 안에서 충성하고,
열심내고, 헌금 많이 하면 좋은 교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충성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오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
도와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소홀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여파가 남아 있어 자신의 삶이 어떠한지는
돌아보지 않고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것도 크고 화려한 교회에 나가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그러한 자기가 성결하고
거룩한 사람인 양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에게도 ‘예수 믿는 사람은
말발만 세다’는 치욕적인 말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균형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듣고 안 말씀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훈이라도 우리의 생활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구제적인 삶 속에서 적용되고 실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들음’과 ‘행함’의 균형>
성경은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은 후 곧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마7:24-27에서 예수님은 두 사람, 즉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과 모래 위에 세운 사람의 비유로 끝맺습니다.
전자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사람이며, 후자는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행위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살전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 사울이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아말렉 왕 아각과 가장 좋은 양과 소들을
남겨 놓았을 때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이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으며 또한 사울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23절).
말씀은 이렇게 완벽한 균형을 맞추고 있는데 우리는
철저히 불균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거울 비유>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자에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23-24절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우리가 흔히 거울을 보고도 돌아서면 금방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울을 보더라도 그냥 돌아서면 자기 모습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거울을 본 다음에는 반드시 손질을 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 생활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이 땅의 모든 교회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예컨데 매주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성도라면 적어도
일 년에 52회의 주일 설교를 듣습니다.
거기에 오후(저녁)예배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2배로 늘어나고, 수요 예배까지 합하면 3배로 늘어납니다.
이것뿐입니까? 금요기도회를 더하면 그 숫자는
200번을 넘게 됩니다. 새벽기도회, 금요속회,
기타 성경공부 및 각종 세미나를 더하면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밀려오는 파도만큼이나
엄청난 양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듣는데도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통계를 보면 범죄율이 25퍼센트인데,
그리스도인의 범죄율도 똑같이 25퍼센트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들을 때는 ‘아멘’하고,
화답하지만 정작 교회 문을 나서면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적 ‘치매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헝클어진 모습을 교정하지만, 그 순간일 뿐 이후로는
까맣게 잊어버려 흐트러진 매무새를 고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믿음의 법’,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불리우는 ‘복음’(고전9:12)입니다.
‘들여다본다’라는 말의 뜻은 ‘자세하게 살핀다’는 뜻입니다.
즉 ‘복음’을 자세히 듣고 살피는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 다시 말하면 복음으로 구원받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받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있음을 약속하십니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말 잘해서 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靜이 아닌 動입니다.
식당의 메뉴를 읽었다고 해서 배가 부른 것은 아니고
, 의사의 처방을 받았다고 병이 치료되는 것이
아니듯이 단지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그 은혜가
내게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은 말씀을 부지런히
행하고 실천함으로서 그 은혜와 능력을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을 통해 완전해진다’
(Practice makes perfect)라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유익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고자하는
노력과 연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곧 복 받는 열쇠임을 믿으시고 그대로 순종하셔서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