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단원(17-21)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① 내용을 상고하기 전에 먼저 문맥에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본 단원에는 네 절(18-21) 속에,
“내가, 또는 나”라는 말이 무려 11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나”는 누구인가? 16절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16절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본 단원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20중) 하고
인간의 책임을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그 사람은 삶의 목적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17상) 합니다.
“칭의교리”를 전하게 되면 어떤 곡해(曲解)와 반대에
부딪치게 되는가? 17절은 이를 예상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 “죄인으로 나타나면” 합니다. 즉 의롭다함을 얻은 후에도 실수하고 넘어질 수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럴 경우, ㉡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17중) 합니다.
이는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 들고 나오는 비난입니다. 이러한 가상적(假想的)인 비난에
대한 논박은 로마서 6장에도 나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복음의 핵심”인 칭의 교리를 증거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오해를 예상하게 되느냐 하면, “당신은 지금 율법의 행위는 필요
없다. 오직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이냐?” 하고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주의자들은, “지금
당신은 죄를 조장(助長)하고 있소.
당신은 도덕폐기론 자요” 하고 비난할 것을 예상하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③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하) 합니다.
로마서에서도, “그럴 수 없느니라”(롬 6:2) 하고
단호히 거부합니다. ㉠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 합니다.
17-18절이 무엇을 말씀함인지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문맥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도 “의인”(義人)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럴 경우 내가 실수하는 것은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분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
자신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 또한 매를 맞아도 은혜 아래서 맞는 것이지 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점이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④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19)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깨닫기만 한다면 자유 함과 환희(歡喜)를 동시에
맛보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제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의미인 로마서 6:11절을 먼저 상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합니다. 이 한 절 속에는 “죽었다”는 말과, “살았다”는 말이 들어있는데, 나무를 예로 들면 “죽었다”는 말은 끊어짐(分離)을
의미하고, “살았다”는 말은 접붙임(소속)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진영(陣營)에 소속이
되어 있던 내가 거기서는 분리(죽었고)가 되어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진영에 속하게(살았다)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점을 주님은, ㉡ “사망(의 진영)에서
생명(의 진영)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구원 얻기 전에는 어떤 상태에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끊어진) 자요 죄에
대하여는 산(붙어있는) 자”였던
것입니다.
⑤ 이를 출애굽을 들어서 설명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로의 군사는 홍해까지는 추격을 해왔습니다. 다시
노예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사로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 성경은 홍해도하를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표, 즉 세례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바로의 진영에 속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진영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즉 “죄의
왕국에서 은혜의 왕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하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19) 하신
의미입니다. 전에는 간악한 사탄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악용(고전 15:56)하여 나를
정죄하고 결박하여 가두었으나, 이제는 율법의 지배 아래서는 죽었고, 은혜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지배 하에서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⑥ 어떻게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인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상) 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여기에 성경 상 가장 큰 신비라 할 수 있는 연합교리가 등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우리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세 전에, ㉡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엡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고전 1:30) 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⑦ 그러므로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 옛 사람이, ㉠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6), ㉡ 함께 죽고(8상), ㉢ 함께
장사되었다가(4), ㉣ 함께 살게(8하)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 이런 논리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는 말씀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① 본문 19-20절을 통해서도 죽었다는 말을
두 번, 살았다는 말을 두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19),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20)고
말씀합니다. ㉡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19),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0) 합니다.
㉢ 이점에서 유념해야할 점은, 연합교리란 어떤 체험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하고,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게 될 때, 정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유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②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0중) 합니다.
이것이 루터가 말한 바, ㉠ “누군가가 내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이 집에 누가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전에는 마틴 루터가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죽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리라” 한 의미입니다. ㉡ 이러한 깨달음과 고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상 모든 어려움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이 한가지를 망각한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③ 이를 깨달은 자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가?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려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하) 하고
말씀합니다. ㉡ 이러한 사람은 한마디로 인생의 목적(目的)이 바뀐
사람인 것입니다. ㉢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하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중에는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없다” 라고 단언합니다. 만일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자가 아니요,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④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의도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이란 이처럼 옛 사람이 죽고 그리하여
삶의 목적이 바뀐 사람들인데, 어찌 죄 가운데 거할 수가 있단 말이냐 하고 반박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 나를 사랑하사,
㉡ 나를 위하여,
㉢ 자기 몸을 버리신,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진정 이를 믿는 자라면 죄를 지어도 괜찮기는커녕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삶”(20하)이라는
말씀입니다.
⑤ 복음을 곡해하고 비난하는 자들의 가상적인 질문을 반박한 바울은, 마지막 절에서 본 장의 결론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21중) 하고 본
주제로 돌아갑니다. ㉡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다시 말하면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는 뜻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하)고
말씀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의롭게 되는 방도가 달리 있는데도 죽으셨다면, 그것은 헛된 죽음을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⑥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헛된 데로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21상)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 하고 그토록 분개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⑦ 현대교회의 치명적인 병폐 중 하나가, ㉠ “하나님이 해주신 일보다는 사람이 해야할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이를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강조하고 있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 “다른 복음”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해주신 일입니다. 이를 듣고 믿을 때,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해야할 일은 윤리입니다. 이는 “교훈”을
받는 것이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가 아닙니다.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윤리는 율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또 하나는, “복음”을 하나의 관문(關門)처럼 여기는
풍조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았다. 복음을 통과했다. 이제는 성장이다. 성화다”. 그리하여 행함을 강조하고,
순종을 요구합니다. 아닙니다. 복음의 핵심인 “의롭다 함”이란, 예배드릴 때 입고 있어야할 예복입니다. 기도할 때에 우선적으로 묵상해야할
말씀입니다.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는 말씀입니다. 임종 머리에서도 붙들고 있어야할 진리입니다. 최후심판 날에 진노하심에서 구원(롬
5:9)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칭의”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복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하)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