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
도표를 보시면 8장에는
“하나님의 손”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18)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22)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31) 출발과정에서부터 안전하게
도착하기까지 인도하셨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7:9과 28절에서도 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섯 단원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단원(1-14) 2차 귀환자의 보계
둘째 단원(15-20) 레위인을 데려옴
셋째 단원(21-23) 금식기도의 응낙
넷째 단원(24-34) 예물관리
다섯째 단원(35-36) 번제를 드림
첫째 단원(1-14) 2차 귀환자의 보계
“아닥사스다 왕이 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보계가 이러하니라”(1)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상고해 보면 족보가
빈번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는 바벨론 포수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보계(譜系)를 그마만큼 중요시했다는 증거입니다. 왜 그러해야만했을까요? 선민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역대상은
1-9장이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에는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을 인솔하여 1차로 귀국한 스룹바벨의 이름도 끼어있습니다(대상 3:19). 이로 보건대 역대상에
수록된 족보도 70년 간 포로로 추방되어 있는 동안 잃어버리기 쉬웠던 보계를 밝혀주고 재정리하는데 그 의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보계의 의미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계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고 그 보계를 밝힐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보계는 어느 개인이나
가문의 족보를 보여주기 위함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계가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가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證據)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유다
지파를 통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동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구약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에게는 그 이름이
“족보에 기록”(3,
20)되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일 보계 중에서 그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게 되면 부정하게(성민이 아닌)
여겼던(2:62)
것입니다.
둘째 단원(15-20) 레위인을 데려옴
출발에 앞서 무리를 아하와로 강가에 모으고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하나도 없는지라”(15)
신실한 자들을 보내어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17)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18) 38명을 ”데려왔으니 그
이름이 다 기록되었느니라“(20하)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레위인을 필요로
하였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수종들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만 그 이상입니다. 이는 에스라의 사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하시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데 있습니다. 그 본격적인 사역이 느헤미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칠 월 일 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 8:2-3) 그렇다면 듣는다고 그
뜻을 다 깨달았겠습니까? 이때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7하-9상) 이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레위인을 필요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한 명철한(레위인) 사람을
데려왔다”(18)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동역할 명철한 레위인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단원(21-23) 금식기도의 응낙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출발에 앞서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21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21하)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왕에게 호위병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22)고 그 까닭을 말씀합니다.
진실한 믿음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에스라 그는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는 자요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에 합당한 양 무리에 본이 되는
학사입니다(7:10).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23)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31절을 보십시오.
“정월 십 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4개월
간)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저들은 하나님께 드릴 은과 금과 기명들과
막대한 예물들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저들의 귀환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적”들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으슥한 길에 “매복”했다가
강탈을 일삼는 산적들도 출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저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여주셨습니다.
넷째 단원(24-34) 예물관리
“그때에 내가 제사장의
두목 중…십 인을 따로 세우고 저희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기명들을 달아서 주었으니”(24
-25)
여기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의 재정관리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물질은 물질관리의 원리에 입각해서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성과 투명성입니다. 도표를 보십시오. 본 단원의
중심단어는 “달아서”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재정문제 등을 취급함에 있어서
믿읍시다, 은혜로 합시다, 나를 의심하는 거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라는 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는 책임 있는 여러 사람에게 계수하고
“달아서” 맡겼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기명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 골방에 이르러…이 기명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28-29)고 임무를 부여합니다. “달아서” 맡긴 것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달
때”에 정확하게 일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의 재정관리와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 8:20-21) 그래서 신실한 여러
사람에게 공동으로 맡겼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물을 달아서 드릴 때에도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 한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제사장들도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다 계수하고 달아보고 그 중수를 당장에 책에
기록하였느니라”(33하-34) 얼마나 정확합니까?
얼마나 분명합니까?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단원(35-36) 번제를 드림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35상)
묻습니다. 번제가 먼저입니까? 가져온 예물을
“계수하고 달아서”(34) 드림이 먼저입니까?
에스라는 위임받은 예물을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드리고(참고 마 5:25) 안돈 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 둘이요”(35중)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드렸습니다. 그들은 소수이었으나 전체에 속한 부분이요 지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야 왕의 조서를 관원과 강 서편
총독들에게 전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먼저입니다. 에스라는 먼저
예물을 봉헌한 후 헌신예배(번제)를 드리고 사역에 임했던 것입니다. 9장 이하와 느헤미야서에
이어지는 그의 사역을 기대하십시다.
이 모든 일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