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의 고장, 밀양의 첫인상은 차분했다. 그 바탕에 사대부 마을이라는 자존심이 깔려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실리를 추구하는 세태와는 거리가 먼 고장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밀양 출신 비운의 혁명가 김원봉
지역 독립기념관서 일대기 재조명
조선 3대 누각 영남루 보수공사 한창
민족사의 수난 보여주는 천진궁
인근엔 대중음악가 박시춘 옛집도
가산 연밭에 둘러싸인 연극촌
자연과 문화의 절묘한 어울림
첫 번째 코스로 찾아간 영남루. 밀양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유적지다. 현풍 비슬산에서 발원한 강물과 청도 운문산에서 내려온 계곡 물이 합쳐진 밀양강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진주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를 포함해 조선 3대 누각으로 꼽히는 곳이지만 지난 5월부터 시작된 보수공사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영남루 뒤편에는 고조선의 시조 단군왕검부터 가야의 김수로왕을 거쳐서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여덟 왕조의 문을 연 시조들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이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총독부가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하면서 우리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해 그 위패들을 땅에 묻었다는 사연이 안내판에 적혀있다. 민족사의 수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다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하는 분위기다.
천진궁 오른쪽 언덕배기에는 조그만 초가집이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비 내리는 고모령' 등 어려운 시절을 헤쳐 온 앞세대들이 시름을 달래며 불렀던 대중가요들을 작곡한 박시춘이 유년기를 보냈다는 집이다. 마당에는 박 작곡가가 대표작으로 꼽았던 '애수의 소야곡'의 악보를 새겨놓은 비석이 서 있다.
이처럼 밀양시청이 의욕적으로 복원한 박시춘 옛집이지만 어딘지 어색하다. 인근 영남루와 천진궁과 엇박자를 이루는 분위기가 완연하다. 힙합과 랩 음악에 익숙한 신세대 감각과 거리가 먼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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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박시춘이 유년기를 보낸 집. |
다음 코스로 찾아간 밀양시립박물관. 입구 분수대 아래에서 물벼락을 맞으며 더위를 식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천진스럽다. 박물관 현관문 오른쪽에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밀양에 웬 독립운동기념관?" 의아스러운 마음에 들어선 그곳에선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영화 '암살'에 나오는 바로 그 김원봉이다.
의열단을 조직해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했던 사람.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 폭탄을 던진 이후 현상금 8만 원(김구 선생은 5만 원)이 걸렸을 만큼 비중이 높았던 거물급 독립투사. 해방 직후 좌우 합작을 추진하다 월북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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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독립운동기념관 |
북쪽에서 김일성 일파의 서슬에 '국제간첩'으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도 모자라 남쪽에선 그 이름 석 자를 떠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던 비운의 혁명가, 김원봉의 일생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기는커녕 역사에 묻혀 이름조차 언급하기가 힘들었던 월북인사의 일생을 추모하는 기념관을 기초단체가 건립해 운영하는 시대. 이념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민 사회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밀양시립박물관에서 가지산 쪽으로 자동차로 30여 분 달려가면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맺힌다는 얼음골이 나온다. 그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얼음골 입구에 도착하면 주차장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에어컨 바람을 맞는 기분으로 가지산 계곡 길을 따라 걷기를 20여 분. '가마불폭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온다. 높은 절벽 위에서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지는 중간에 오색 무지개가 서리는 모습을 상상했던 가슴은 이내 실망으로 가득 찬다. 오랜 가뭄에 폭포는커녕 물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절벽이 덩그렇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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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 계곡. |
허무한 마음에 발길을 돌려 찾아간 결빙지. 매년 7월까지 고드름이 맺힌다는 현장에는 마치 냉장고를 열어 놓은 것처럼 찬바람이 불어온다. 한 달만 일찍 찾아 왔더라면 여름철 고드름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접고 마지막 코스로 찾아간 가산 연밭. 벼농사로 수지를 맞추지 못한 농민들이 연꽃을 키워서 대박을 터뜨린 현장이라고 했다. 연밭 주차장 맞은편에는 폐교 부지에 들어선 '밀양연극촌'이 있다. 연극촌 마당에는 극장 건물이 성벽처럼 펼쳐진다.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에다 무대, 연습장, 녹음실 등을 갖춘 '종합예술창작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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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연밭. |
연극촌 바로 옆에는 조롱박 터널이 조성되어 있다. 한여름 햇볕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까닭 모를 여유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생활고에 허덕이다 벼농사마저 포기한 농민들이 진흙탕 속에 뿌린 씨앗으로 아름다운 연꽃을 피워낸 가산 연밭. 그 한 모퉁이에 탐스러운 조롱박 터널을 만들어낸 농민들의 손길. 굵은 땀방울로 뒤범벅된 가산 연밭에 둘러싸여 창작열을 불태우는 연극촌 가족들의 열정 그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세상을 추구하는 유림의 마을에서 뿌리를 내린 밀양연극촌을 둘러보면서 느낀 감상의 한 단면이다. 글·사진 =정순형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시외버스: 부산서부터미널에서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1시간 단위로 운행한다. 소요시간 1시간. 운임 4천500원.
열차: 부산역에서 오전 5시 13분 무궁화호를 시작으로 각종 열차가 수시로 운행한다. 소요시간 44분. 운임 3천900원 (무궁화호 ).
자가운전: 남해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대구부산고속도로 순. 소요시간 1시간 10분. 통행료 약 5천500원.
■먹거리
밀양에선 여름철 보양식으로 육개장(사진)을 찾는 사람이 많다. 소고기에 대파와 고사리, 숙주나물 등을 넣고 고추기름을 가미해 끓인 육개장은 뒷맛이 깔끔하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가지나물과 무우채나물이 정갈해 입맛을 더한다. 영일식당 1인분 6천 원. 055-354-4486.
정순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