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21~5장1절
우리에게 장 발장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 불쌍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한 죄수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뮤지컬로 각색되었는데,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과 더불어 세계 4대 뮤지컬로도 유명하며, 2012년에는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시대적 배경이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해서 더 흥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영화 “레미제바블”의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젊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자유를 갈망하며 정부군과 맞서는 장면에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리고 법의 수호자로서 범법자인 장발장을 추격하는 자베르 경관이 장발장의 실체를 알게 되자 자신이 믿었던 법의 모순 앞에서 갈등하다가 종국에는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는 모습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자베르 경관의 충직함에 안타까워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것을 비유함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21)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율법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지키려는 자들”처럼 보이지만, 바울은 복음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9)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율법의 종“으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자들을 비꼬며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즉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통해 복음(자유)과 율법(종)을 구체적으로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으니”(22),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해서 여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지만(창25:1-2), 바울이 여기에서 두 아들만을 언급한 것은 이들의 탄생의 근원이 상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3-24)
아브라함에게는 원래 아내 사라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후손이 없자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폐경이 되어 임신이 불가능한 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들, 즉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방법에 의해 얻은 것이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삭은 이미 석녀가 되어버린 노쇠한 부부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태를 여셨기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에게서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본처 곧 “자유있는 여인”인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이삭을 낳아 두 아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24절에서 두 언약이란 율법의 언약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언약, 즉 율법과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25)
하갈은 육체를 대표하여 이 세상의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갈과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과 지금 있는 예루살렘 그리고 종을 동일선상에 위치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란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를 삼고 있는 당시의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고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기에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순수한 사라 혈통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고수함으로 이처럼 종의 신분을 지니게 되었지만, 반면에 이방인들은 믿음을 통해 자유자의 후손이 되는 것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어 천상의 예루살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8)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자유자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동일선 상에 있는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인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이삭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율법주의자들로 인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바울은 구약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29)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그 때의 상황과 현재 율법의 종 노릇하고 이는 율법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의 상황을 동일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핍박을 받고 있어야 할까요?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7)
바울은 이사야 54장1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한 결과,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주전 586년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슬픔과 고통과 멸시와 천대 속에서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번성의 말씀을 선포하셨는데, 바로 그 말씀을 인용해서 현재 핍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 “산고를 모르는 자”를 사라와 동일시하였는데, 결국 사라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셨고 그의 후손들이 모래알 같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필함으로 현재 핍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을 핍박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30)는 구약의 내용을 인용해서 율법과 복음(믿음)은 공존할 수 없기에 믿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의 정죄 아래 머물러 있는 자들은 육체의 신분에 따라 죄의 종으로 머물러 있게 되기에 하나님의 유업에게 제외되게 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31)
바울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비유적인 해석에 대해 자신을 비롯한 갈라디안 교인들 모두가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3:6-9)임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학자들에 따라 5장 1절을 4장 31절과 연계해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따로 분리해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 데, 저는 5장1절을 앞서 3장과 4장의 결론 부분이자 동시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나머지 장의 도입부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이 자유를 굳게 지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서두에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자유가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해보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단순히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차이, 즉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차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자유”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 표방하는 나라는 자유가 있기에 범죄가 없나요?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범죄는 존재합니다. 사람이 세상적 관점으로 추구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기인합니다. 말씀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 말씀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자유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즉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자유를 만끽하듯이, 피조물인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을 때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근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보혈로 나를 율법의 멍에로부터 구속해주셨다는 이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억압이나 구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율법이냐 복음이냐 양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하며 갈등했던 우리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더 이상 율법의 종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 받은 약속의 자녀임을 자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이 사회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어 가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